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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8
/ 중생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재창조이다.
- 악을 버리려다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흔히 회개를, 자신의 모든 악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고 제거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마음조차 온전히 알지 못한다.
자기사랑은 너무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악은 의식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그의 모든 악을 한꺼번에 보여 주지 않으신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모든 악을
한순간에 보게 된다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절망하거나
오히려 자신을 포기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주님은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악을 드러내시며 그것도 언제나 함께 싸울 수 있는 진리와 선을
동시에 공급하며 다루신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이며 동시에 중생의 질서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해
악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보여 주신다.
이 때문에 사람의 구원은
자신의 모든 악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 달려 있지 않다.
만일 구원이 자신의 내면을 완벽하게 분석하여
찾아내는 악마다 그것을 하나씩 제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악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다.
자기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변호하고,
악을 선하게 보이도록 꾸미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중생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조금씩 재창조하시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 전체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주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부분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 치료에 협력하는 환자에 가깝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악을
진리의 빛 아래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지 않으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전 글들 참조)
주님께서 지금 드러내시는 악은
우연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영적 상태에서 실제로 다루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마치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그것을 거절할 때
주님께서는 그 작은 순종을 통하여
더 깊은 악들까지도 질서 있게 다루어 가신다.
반대로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수많은 악을
억지로 파헤치려 하거나,
자신의 영혼 전체를 스스로 심판하려 한다면,
사람은 주님의 인도보다 자신의 분석을 더 의지하게 되기 쉽다.
그것은 오히려 섭리의 질서를 앞질러 가려는 위험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중생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 전체를 해부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필요한 악을 빛 가운데 드러내시고,
인간이 그 빛에 순종하는 과정을 반복해 가시는 역사이다.
주님께서는 아직 보지 못한 악들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며,
인간은 지금 보여 주신 것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렇게 현재 드러난 악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지 않고 주님께 맡길 때
아직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악들까지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차례차례 분리되고 정화되어 간다.
그러므로 구원의 희망은
자신의 내면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진리에 끝까지 순종하려는 마음에 있다.
- 사고(思考)의 출발점을 주님의 섭리에 두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악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은 입으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거의 반대로 살아간다.
어떤 악을 발견하면 ‘내가 깊이 분석해서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 ‘내가 많이 학습해서 알게 되었다.’고 여기며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내가 노력한 결과다.’라고 해석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겉으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아가 역사하는 모습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린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의식은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건을 해석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성향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섭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습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악이 갑자기 선명하게 보였다고 하자.
그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생각은 ‘내가 드디어 찾아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이것을 보여 주셨구나.’이어야 한다.
이 둘은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첫 번째는 자신을 주체로 삼지만 두 번째는 주님을 주체로 삼는다.
이 차이가 중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생각하고 의도하며
선택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 인정은 마지막에 덧붙이는 겸손한 말이 아니라,
생각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여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우리의 생각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 안에는
이런 의도가 숨어있다.
사람은 흔히 어떤 일을 잘 마친 뒤에
‘다 주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neself)'의 질서는
그렇게 끝에서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주님께서 지금도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믿음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면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게 된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일도, 만난 사람도, 드러난 악도
먼저 ‘주님께서 이것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실까?’라고 묻게 된다.
그러면 삶 전체가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섭리의 학교가 된다.
이 원리를 잃으면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능력과 경험으로 해석한다.
성공은 자기 실력으로 돌리고, 실패는 환경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악을 발견해도 ‘내가 잘 분석했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이 자아의 더욱 은밀한 작용이다.
겉으로는 주님을 말하지만 실제 사고의 출발점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고의 출발점을 주님의 섭리에 두는 자는
자신의 악을 볼 때도 이렇게 생각한다.
‘주님께서 지금 내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이 악을 빛 가운데 올려놓으셨다.’
그러면 사람은 더 이상 아직 보이지 않는 악까지
억지로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보여 주신 것 하나에 충실히 응답하면 된다.
그 하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다른 악들까지 함께 다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악 하나를 통하여 다른 많은 악을 다루고 계신다.’는 말에도
더욱 깊은 섭리의 질서가 담겨 있다.
사람은 하나의 악만 보고 있지만 주님은 영혼 전체를 보신다.
우리가 오늘 조급함 하나를 배우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그 조급함 뒤에 연결되어 있는
교만과 자기신뢰와 명예욕과 두려움까지 함께 다루고 계신다.
우리는 한 가닥의 실만 붙잡고 있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에 연결된 전체 매듭을 풀고 계신다.
그래서 중생은 부분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전체가 함께 움직인다.
이것이 사람이 모든 악을 다 찾아낼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님은 한 부분을 치료하시면서
그와 연결된 많은 부분을 동시에 질서 있게 재배열하신다.
이 사실은 우리 삶에 매우 실제적인 교훈 하나를 전해 준다.
사람은 많이 보는 것보다, 보여 주신 것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더 많은 악을 찾으려 애쓰지만,
주님께서는 지금 보여 주신 악 하나에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그 하나에 순종하는 것이 다음 빛을 받을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충성은 양보다 방향에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섭리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아직 없는 수준까지 요구하며 자신을 정죄한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주신 빛에 대한 응답을 바라신다.
내일의 빛은 내일 주신다. 이것이 섭리의 자비이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진리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치료를 신뢰하며 협력하는 사람이다.
의사는 환자의 몸 전체를 알고 있지만
환자는 지금 치료받는 부위만 안다.
환자가 의사를 믿고 치료에 협력하면 몸 전체가 회복되듯이,
사람도 지금 주님께서 비추시는 악에 충실히 응답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훨씬 깊은 곳까지
함께 새롭게 하신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중생의 평안이다.
중생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시작되는 길이 아니라,
오늘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에 신실하게 응답할 때
주님께서 전체를 다스리신다는 신뢰 위에서 걸어가는 길이다.
그 신뢰가 깊어질수록 자기 자신을 붙드는 힘은 약해지고,
주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평안은 더욱 커지게 된다.
섭리를 '믿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은 섭리를 교리로 믿는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섭리의 운용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스베덴보리의 신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며,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를 배우는 것이다.
악이 드러난 순간에도, 유혹이 찾아온 순간에도,
실패한 순간에도,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순간에도,
먼저 주님의 현재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중심도 달라진다.
‘내가 얼마나 많이 찾아냈는가?’ 에서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여 주시는가?’ 로 옮겨간다.
이것이 바로 섭리 중심의 회개이다.
이를 위해 실제로 가장 도움이 되는 영적 습관은 아주 단순하다.
어떤 깨달음이나 양심의 가책이 생길 때마다
먼저 마음속으로 이렇게 묻는 것이다.
‘주님, 지금 제게 이것을 보여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사람의 시선을 자기 분석에서 주님의 역사로 돌려놓는다.
그다음에는 이렇게 이어질 수 있다.
‘지금 제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사람은 아직 열리지 않은 영역까지 파고들지 않고,
주님께서 현재 열어 주신 영역 안에서 충실하게 응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제 주도권은 주님께 돌리는 삶이다.
- 그럼 매 순간 의식적으로 주님이 지금 역사하신다고
떠올리며 살아야 하는가?
한편 이런 생각도 일어날 수 있다.
악이 드러난 순간에도, 유혹이 찾아온 순간에도, 실패한 순간에도,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순간에도
먼저 주님의 현재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이 원리를
실제 삶 속에 적용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삶의 매 순간을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매번 의식적으로 그것을 떠올리려 하면
오히려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자칫 일에 몰두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삶이 지나치게 긴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부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왜 그것이 그렇게 번거롭게 느껴지는 것일까..
어쩌면 오랫동안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온 삶의 방식'이
조금씩 흔들릴 것 같은 느낌을 자아가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까지는 내가 판단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삶의 순간마다 먼저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려고 하면,
자아는 마치 자신의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은 낯선 불편함을 느낀다.
이 느낌은 매우 중요한 영적 통찰이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사상으로 보면
이것을 조금 더 분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매 순간 의식적으로 주님이 지금 역사하신다고
떠올리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맡은 일을 할 때는 그 일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에, 의사는 치료에,
운전하는 사람은 운전에 마음을 써야 한다. 이것도 질서이다.
만일 모든 순간마다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주님.. 주님..’만 되뇌려고 한다면
오히려 자연적 기능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
주님은 그런 방식보다 삶의 애정과 의도의 방향을 더 보신다.
즉, 항상 의식 속에 주님이 계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바탕이 주님을 향하도록 형성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악이 드러났을 때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이구나.’라고
한 번씩 방향만 돌려도 충분하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매번 애써 떠올리는 생각이 아니라
습관이 되고, 더 나아가 삶의 성향이 된다.
처음에는 분명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이 평생 억지로 자신을 감시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하나하나 대신 관리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 자체를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금도 주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여러 번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하지만,
점차 중생이 이루어질수록 그것은 억지로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 간다.
마치 처음 운전을 배울 때에는
브레이크와 핸들, 방향지시등 하나까지 모두 의식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새로운 습관이 되어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영적인 삶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의식이 앞서지만,
나중에는 생명이 앞선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의식을 끊임없이 긴장시키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 자체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선을 더욱 자연스럽게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그러므로 지금 느끼는 번거로움 자체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또 번거롭게 느끼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대로 살아온 자유를 잃을까 봐
자아가 느끼는 저항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아는 주도권을 놓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모든 일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해석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께서 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
‘지금 무엇을 가르치고 계실까.’ 를 먼저 묻게 되면
판단의 중심이 나에게서 주님께 옮겨간다.
자아는 바로 이것을 불편해한다.
하지만 이것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하다.
모든 불편함을 곧바로 ‘내 자아가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자연적 정신은 새로운 습관을 익힐 때
원래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도, 처음 악기를 배울 때도,
처음 외국어를 사용할 때도 번거롭다.
그것은 반드시 악한 저항만은 아니다.
그래서 초기에 느끼는 번거로움은
두 가지가 함께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새로운 영적 습관을 배우는 자연스러운 부담이다.
다른 하나는 주도권을 놓기 싫어하는 자아의 더 깊은 저항이다.
시간이 지나면 첫 번째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두 번째는 조금씩 약해진다.
그래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주님을 매 순간 의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먼저 주님의 섭리를
기억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중생의 매우 중요한 훈련이다.
그 훈련이 반복되면 의식적인 노력은 점차 줄어들고,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중생과도 잘 맞는다.
중생은 끊임없는 긴장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애정이 점차 새로운 생명의 습관이 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행하던 것이 나중에는 마음의 성향이 되고,
결국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된다.
(참고 AC 9334
‘사람이 처음에는 진리에 따라 행동하지만,
나중에는 선으로부터 행동한다.
그때에는 진리를 생각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행한다.’
이 문구는 바로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행하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된다.’는 설명의 핵심 근거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행한다.
그러나 중생이 진행되면 '해야 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좋아서' 행하게 된다.
즉 진리가 애정 속으로 들어가 생명이 된 것이다.
AC 4353
‘중생된 사람은 선을 행하는 데서 자유를 느끼며,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 된다.’
이 문구는 ‘새로운 애정이
새로운 생명의 습관이 된다.’는 설명과 매우 잘 연결된다.
습관이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즐거움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자유는 선을 사랑하는 데 있다.
TCR 571 ‘거듭남은 새 의지를 받고 새 이해를 받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 결국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중생은 행동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세 문구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사람은 진리를 따라 의식적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한다.
그러나 중생이 진행될수록 진리는 점차 의지와 결합하여
새로운 애정이 되고,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된다.
그때 사람은 더 이상 외적인 명령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의지와 이해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AC 9334, AC 4353, TCR 571 연산)
바로 이러한 중생의 질서 안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치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되,
그 모든 의지와 능력과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DP 100, 연산
여기서 핵심은 '스스로 행동하되, 주도권은 주님께 돌리는 것'이다.
행동은 사람의 몫이지만, 무엇을 보게 하시고 언제 드러내시며
어떻게 치유하시는지는 주님의 몫이다.
그래서 자신의 악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발견했다.’보다
‘주님께서 지금 보여 주셨다.’라고 해석하는 습관은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중생의 주체를
자신에게 둘 것인가, 주님께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영적 태도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성한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실제적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as if from himself’이다.
스베덴보리는 ‘from himself(자기 자신으로부터)’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as if from himself(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라고 말한다.
이 차이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치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되,
그 모든 의지와 능력과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이 문장은 얼핏 읽으면 단순히 ‘겸손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깊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의미는 이렇다.
사람은 실제 생활에서는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자기 의지로 결단하며, 자기 손으로 악을 거절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도 존재하지 않고,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 선을 원할 수 있는 의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악과 싸울 수 있는 힘은
모두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즉, 사람은 행동의 주체처럼 살아야 하지만,
생명의 근원은 자신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행동하되 주도권은 주님께 돌려야 한다.’라는
결과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연산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DP 100은 사람에게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멈추거나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람은 실제로 싸워야 한다.
둘째, 같은 문장에서 곧바로
‘그러나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그는 믿어야 한다.’ 라고 덧붙인다.
따라서 사람은 행동은 하지만,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과 능력을 자기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사람은 생명의 최소한의 것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다.’ DP 43 라고 말한다.
또 ‘주님만이 사람을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신다.’ TCR 571
라고도 말한다.
이 두 가르침을 함께 놓으면
사람은 실제로 싸우는 당사자이지만,
영혼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 신학의 가장 아름다운 균형을 본다.
만일 사람이 모든 것을 주님이 하신다고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유는 사라진다.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하려 한다면
자아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네가 하는 것처럼 살아라.’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러나 생명도 능력도 승리도
모두 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사람은 자유 안에서 협력하면서도,
영광은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게 된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neself)'의 참된 의미이다.
- 중생의 핵심은 내가 내 영혼을 완성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이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중생의 질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자.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생을
자신의 노력으로 완성해야 하는 과업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고,
숨어 있는 악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어 제거하려 애쓴다.
물론 자기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알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거듭 가르친다.
그러나 그 자기 성찰이 중생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성찰은 주님의 역사에 협력하는 과정이지,
영혼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으로 드러나는 생각과 행동은
영혼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삶 전체를 움직이는 애정과 의도의 층이 있으며,
그 가장 깊은 중심은 오직 주님만이 보신다.
사람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의 뿌리를 모두 살펴볼 수 없으며,
설령 그것을 본다 하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제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중생은 사람이 자기 영혼을 수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질서 있게 새롭게 창조하시는 역사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주시고,
그 선과 진리가 자라 영혼을 지탱할 수 있게 되면,
그 빛에 비추어 지금 다루어야 할 악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먼저 영혼이 견딜 수 있는 생명을 공급하시고,
그다음 그 생명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악을
드러내어 분리해 가신다. 이것이 중생의 질서이다.
이 질서를 생각하면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깊은지도 알게 된다.
어린아이가 무거운 짐을 한꺼번에 들 수 없듯이,
영적으로도 사람은 자기 안의 모든 악을 동시에 마주할 수 없다.
만일 주님께서 그것을 모두 드러내신다면
사람은 절망하거나,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 악과 더욱 깊이 결합할 수도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드러내시고,
그때마다 그 악을 이길 수 있도록
필요한 선과 진리를 함께 공급하신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치료보다 먼저 생명을 준비하신다.
이런 이유에서 중생은
자기 분석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자신을 맡기며 협력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neself)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싸움 속에서도 실제로 악과 선을 분리하시고,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시며,
사람을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사람은 자유 안에서 협력하지만, 재창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중생의 핵심은
‘내가 내 영혼을 완성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 내게 보여 주시는 악에는 충실히 응답하고,
아직 보이지 않는 부분은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데 있다.
사람은 현재 드러난 악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끝까지 싸워야 하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 영혼의 깊은 영역까지 스스로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 영역은 주님의 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는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서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언제나 주님에게서 온다고 설명한다.
DP 100 연산
또한 사람을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 역사에 자유롭게 협력하는 존재라고 거듭 말한다.
TCR 571 연산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생각하면 중생의 참된 모습이 분명해진다.
중생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평생에 걸쳐 질서 있게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이다.
인간은 그 섭리에 순종하며 협력할 뿐이고,
영혼을 새 생명으로 빚어 가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시다.
스베덴보리는 회개를 말할 때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엄밀하게 살피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진리의 빛 아래 놓고,
악을 악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버리기로 결단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성찰 없이는 누구도 중생의 길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검토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미세한 경계가 있다.
사람은 이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어느새 중생을,
자신의 영혼을 완성해 가는 프로젝트처럼 이해하기 쉽다.
자신의 마음을 더 깊이 분석하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악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며,
숨겨진 동기와 목적까지 모두 밝혀내야만
비로소 주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여전히 주님의 도우심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 마음의 중심은 조금씩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다.
처음에는 ‘주님, 제 악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악이 무엇일까.’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주님의 빛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자신의 분석이 앞서기 시작하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보다 자신의 통찰력을 더 신뢰하게 된다.
이것은 노골적인 교만이라기보다 훨씬 미묘한 영적 위험이다.
주님을 더욱 잘 섬기고 싶다는 열심 자체는 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열심 속에 아주 미세하게 자기 신뢰가 스며들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으로부터(from the Lord)'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as from self)' 움직이기 시작한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자아는
바로 이러한 미세한 형태로도 사람 안에서 작용한다.
이러한 현상이 왜 위험한가.
그것은 회개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를 인간이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신다.
그리고 그 선이 사람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그 빛 가운데 지금 다루어야 할 악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항상
생명을 먼저 공급하시고 그다음 치료를 시작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흔히 이 질서를 거꾸로 바꾸려 한다.
먼저 모든 악을 찾아내고, 그다음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지금은 이 악을 다룰 때이다.’라고 하시는데,
사람은 ‘아직도 찾아야 할 악이 더 많습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치료의 순서를 정하려 한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신성한 섭리의 질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은 회개의 주체이지만, 중생의 주체는 아니다.
사람은 순종하는 자이지, 재창조하는 자가 아니다.
사람은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어떤 악을
언제 어떻게 드러내실 것인가는 오직 주님의 지혜에 속한 일이다.
그렇다면 자기 성찰은 줄여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욱 깊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끝없이 해부하는 데 있지 않다.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는 데 있다.
이 둘은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인간이 중심이 된다. 후자는 주님이 중심이 된다.
전자는 자신의 통찰력이 구원을 이끈다고 믿기 쉽다.
후자는 주님의 섭리가 중생을 이끄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
전자는 자신의 분석을 의지한다. 후자는 주님의 빛을 의지한다.
그래서 중생의 핵심은 내가 내 영혼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다.
주님께서 지금 비추시는 곳에서는 숨지 않고 순종하며,
아직 비추지 않으신 부분은
조급하게 자신의 힘으로 열어젖히지 않는 데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나의 악만 보는 것 같아도
그 뒤에 연결된 수많은 악까지 함께 다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전체를 움직이신다.
우리는 현재를 보지만, 주님은 영혼의 마지막 목적까지 함께 보신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모든 악을 알아야만 구원될 수 있다면,
결국 구원은 인간의 통찰력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를 가르친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 전체를 알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의 분석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한 섭리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회개를 강조하는 가르침과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가르침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하나의 질서 안에서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사람은 주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악 앞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직 열어 주지 않으신 영역까지
자신의 힘으로 파헤치려 해서도 안 된다.
회개는 사람의 책임이지만,
무엇을 언제 얼마나 드러내실 지는 주님의 책임이다.
바로 이 질서를 지킬 때
사람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충실히 회개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분석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한 섭리에 맡길 수 있다.
이것이 자기 신뢰와 주님 신뢰 사이의 바른 균형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중생의 길과 가장 깊이 일치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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