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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史 및 地理志에서 말하는 사막지대(沙漠地帶) [제5편]
[朝鮮 疆土와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
2,026년 05월 17일
○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直說的)으로 표현(表現)한다면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필연적(必然的)으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왕조(王朝)가 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는 이전(以前) 왕조(王朝)였던 고려(高麗), 그 이전(以前)의 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가, 그 이전(以前)의 삼한(三韓)이, 또 구이(九夷)가, 동이(東夷)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세력(土着勢力), 주류집단(主流集團)이었기 때문이다.
• 『‘해동(海東)이니, 동방(東方)’이니 하는 옛 용어(用語)의 대상(對象)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一部)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지칭(指稱)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해동(海東)이니, 동방(東方)’이니 하는 옛 용어(用語)의 대상(對象)이 “반도(半島)”라는 인식(認識)은, 20세기(世紀)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겨우 100여 년(年)이 지났을 뿐이다.』
조선(朝鮮)이 여러 이유(理由)로 쇠퇴(衰退)해지면서 ‘종이호랑이’로 전락(轉落)해버리자, 조선(朝鮮)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 국가(國家), 부족(部族), 종족(種族)들이 들고 있어 난 것이 그 시초(始初)다.
조선(朝鮮) 군주(君主)의 무능력(無能力), 권력투쟁(權力鬪爭), 만연(蔓延)된 부정부패(不正腐敗) 등(等), 여러 이유(理由)로 쇠퇴(衰退)하며 ‘종이호랑이’로 전락(轉落)해버리자 : 「수천(數千) 년(年) 지배(支配)당한 서남(西南) 땅의 만이(蠻夷) •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던 한족(漢族) • 또한 수천(數千) 년(年) 변방(邊方)의 속국(屬國)을 자청(自請)했던 왜(倭) • 그리고 19세기(世紀)에도 만이(蠻夷)라고 칭했던 구라파(歐羅巴)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의 이익(利益)을 위해, 이합집산(離合集散) 야합(野合)하게 된 것이다.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몰락(沒落)과 해체(解體)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아예 해체(解體)시키고, 극동(極東)의 조그만 땅 ‘반도(半島)’로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대한제국(大韓帝國)【반도(半島) 땅】과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構圖)는 2,026년(年) 지금(只今)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획기적(劃期的)인 사태(事態)가 벌어지기 전(前)까지는 계속(繼續)될 것으로 예측(豫測)된다.
☛ ‘결과론(結果論)’이지만 : 「●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서변(西邊) • 서북변(西北邊)은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동구라파(東歐羅巴)로 이어졌고, ● 북변(北邊)은 초원지대(草原地帶)와 대황지대(大荒地帶)로 이어지며, ● 동(東)쪽과 남(南)쪽은 바다에 한계(限界)하고, ● 서남변(西南邊)은 만이(蠻夷)들과 접경(接境)하고 있었다.」 이게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조선(朝鮮)의 사로(四路)의 형편(形便)’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이 주장(主張)하는 논리(論理)”는, 바로 “19세기(世紀) 말(末)로부터 20세기(世紀) 초(初), 조선(朝鮮)이 해체(解體)된 후(後)의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설명(說明)해 주고 있다.” 이는 곧 현대사(現代史)에 해당(該當)되는 것이다』
☛ 『‘해체(解體) 이전(以前)’의 조선왕조(朝鮮王朝) 변경지방(邊境地方) 즉(卽), 서변(西邊)•서북변(西北邊)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라는 그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를 필자(筆者)가 직접(直接) 인용(引用)하며, 독자(讀者)들에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앞으로도 몇 편(篇) 더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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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東史綱目 8 上, 갑신 고려(高麗) / 기축년(己丑年) 예종(睿宗) 4년[1,109년] : 추(秋) 7월 :
《崔氏曰。開邊之失。始於肅宗而成於睿宗。其傾無量之費。役無辜之民。快心北漠者。適足以損國威啓戎心而已。所得何能償其所失哉。: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변방을 개척한 실수는 숙종(肅宗)에게서 시작되어 예종(睿宗) 때에 이루어졌는데,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 죄 없는 백성(百姓)을 사역(使役)하여 북(北)쪽 사막(沙漠)을 정복한 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오랑캐의 분심만 돋우어 놓은 것뿐이니, 얻은 것이 어찌 잃은 것을 보상(報償)하겠는가?”》하였다.
➥ 위의 동국사(東國史)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이르기를 : 「其傾無量之費。役無辜之民。快心北漠者。: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無量), 죄 없는 백성(百姓)을 사역(使役)시켜서, 북(北)쪽 사막(沙漠)【北漠】을 정복하였다(快心)」라는 기록(記錄)을… …『오류(誤謬) 또는 기록(記錄)의 실수(失手)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근거(根據)도 없다.』라는 것이다.
•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著者)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대(先代)께서는 「其傾無量之費。役無辜之民。快心北漠者。: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無量), 죄 없는 백성(百姓)을 사역(使役)시켜서, 북(北)쪽 사막(沙漠)【北漠】을 정복하였다(快心)」라는 것을 기록(記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➊ “당연(當然)한 일이었으므로 저본(底本)과 경험(經驗)대로를 기술(記述)했다”
➋ “황당무계(荒唐無稽), 괴상망측(怪常罔測)하지만 그대로를 기술(記述)했다”라면 : 〈동국(東國)은 반도(半島)로 한정(限定)된 땅으로 북막(北漠)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지세(地勢)지만… …왜 그런 기록(記錄)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류(誤謬)가 아닐까?〉라는 말을 분명히 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없다” 즉(卽), “남겨 놓은 것이 없다”라는 뜻은, 「동국(東國)은, 북막(北漠)과 접경(接境)하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 동사강목(東史綱目) 해제(解題) 인용(引用) :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주지되다시피 영ㆍ정조(英正祖)대의 실학적(實學的) 역사저술(歷史著述)의 대표적인 것이며, 그의 또 다른 역사저술인 ‘열조통기(列朝通紀)’와 더불어 그가 동국사(東國史)를 재구성(再構成)하려던 역사의식(歷史意識)을 표현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라고 서두(序頭)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기축년(己丑年) 예종(睿宗) 4년[1,109년]’의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21세기(世紀)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根據)도 없다」라는 것이다.
「북(北)쪽 사막(沙漠) 곧 북막(北漠)의 특이(特異)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가진 곳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장안이서(長安以西)∼서북(西北)’에서만이 가능(可能)한 일이다.」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영하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는 황하(黃河)의 서(西)쪽에서나 가능(可能)한 일이자, 그 동(東)쪽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지형지세(地形地勢)다. 막무가내(莫無可奈)로 “반도(半島) 땅”을 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 곧, 「12세기(世紀)의 고려왕조(高麗王朝)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명백(明白)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이러한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은, 누구도 부정(否定)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형지세(地形地勢)나 방위(方位) 등은 조작(造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끓은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애절(哀絶)한 마음을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 “아닌 것은, 아닌 거다” ➤ 반도사학(半島史學)은 가공(加工)되고, 왜곡(歪曲)되어, 조작(造作)된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반도사(半島史)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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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海東繹史 續集 12권 지리고(地理考) 12 / 조선(朝鮮)
《‘鴻書’ 曰 : 遼東。古並營地也。其背爲沙漠。其面爲滄溟。其餘氣爲朝鮮國。:《홍서(鴻書)에서 말하기를 : 요동(遼東)은 옛날의 병주(幷州)와 영주(營州)의 땅이다. 그 뒤쪽은 사막(沙漠)이고 앞쪽은 바다이다. 그 남은 기운이 조선국(朝鮮國)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홍서(鴻書) : 「명(明) 만력(萬曆) 연간(年間)에 유중달(劉仲達)이 쓴 ‘홍서(鴻書)=유씨홍서(劉氏鴻書)’」를 말하는 것인데, 이곳에서 말하기를 : 『遼東。古並營地也。其背爲沙漠。其面爲滄溟。其餘氣爲朝鮮國 : 요동(遼東) 땅은 옛 병주(並州)와 영주(營州)의 땅을 땅인데, 그 뒤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이고, 그 앞에는 ‘창명(滄溟)=창해(滄海)’』라고 하였다.
그러나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을 대입(代入)하면 :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코믹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병주(並州)와 영주(營州)의 땅도, 요동(遼東)의 땅 뒤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 『지명(地名)을 이동(移動)시켜 엉뚱한 곳에 만들어버렸다』라는 이야기다.
20세기(世紀) 「“병주(並州)•영주(營州)•요동(遼東) 땅”의 그 뒤쪽에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고, 그 앞에 바다도 없기 때문이다. “병주(並州)는, 산서성(山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 및 내몽고(內蒙古) 내륙지대(內陸地帶)에 있다.”」라고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혹자(或者)는, 영주(營州)는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접경(接境)이요, 요동(遼東)은, 심양(瀋陽) 땅을 말하기 때문에 그 아래에는 창해(滄海) 곧 발해(渤海)가 있잖은가! 하며 “반론(反論)”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에게 필자(筆者)는 반드시 질문(質問)을 던질 것이다.
☛ 《‘한서(漢書)=전한서(前漢書)’와 ‘동한서(東漢書)=후한서(後漢書)’에 기록(記錄)된 “도요장군(渡遼將軍)의 활동영역(活動領域)”은, 남하(南河)와 북하(北河)가 흐르는 중원(中原)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그 서(西)쪽 지방(地方)이었음을 어떻게 설명(說明)할 건가?》
이때의 “요하(遼河)”는 곧 중원(中原) 북방지대(北方地帶)를 흐르는 황하(黃河)【청해성(靑海省)으로부터 감숙성(甘肅省), 영하성(寧夏省), 내몽고(內蒙古) 땅을 흐르는 하(河)】였음을 밝혀주는 내용(內容)이다. 동의(同意)하시나?
그렇다면 아래의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 내용(內容)은, 제왕(帝王)과 대신(大臣)들의 헛소리를 기록(記錄)한 것일까?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답(答)해야 한다.
☛ ➊ 後漢書 本紀 : 《初 置 度 遼 將 軍, 屯 五 原 曼 柏。 : 처음 둔 도요장군(渡遼將軍)을, 오원(五原) 만백(曼柏)에 주둔시켰다. 【註 釋 : 武 〔昭〕 帝 拜 范 明 友 為 度 遼 將 軍, 至 此 復 置 焉。 以 中 郎 將 吳 常 行 度 遼 將 軍。 曼 柏, 縣, 在 今 勝 州 銀 城 縣。: 무제(武帝: 昭帝)가 범명우(范明友)에게 도요장군(渡遼將軍)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다시 둔 것이다. 중랑장(中郎將) 오상(吳常)이 행(行) 도요장군(渡遼將軍)이 되었다. 만백(曼柏)은, 현(縣)으로, 승주(勝州) 은성현(銀城縣)이다.】》
☛ 그럼 「청해성(靑海省)에서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금성(金城)’에서 북(北)으로 꺾여 영하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는 하(河)가 바로 “요하(遼河)”였다」라는 것을 인정(認定)하시겠는가?
➋ 後漢書 本紀 : 《夏 六 月, 車 騎 將 軍 竇 憲 出 雞 鹿 塞 : 여름 6월,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계록새(鷄鹿塞)를 나가고, 【今 在 朔 方 窳 渾 縣 北。: 삭방(朔方) 유혼현(窳渾縣) 북쪽에 있다. 闞 駰 十 三 州 志 云 : 窳 渾 縣 有 大 道,西 北 出 雞 鹿 塞 : 감인(闞駰)이 13 주지(州地)에서 이르기를 : 유혼현(窳渾縣)에 대도(大道)가 있어, 서북(西北)으로 계록새(鷄鹿塞)를 나간다.】 度 遼 將 軍 鄧 鴻 出 棝 (稒) 陽 塞 : 도요장군(渡遼將軍) 등홍(鄧鴻)은 고양새(棝陽塞)를 나가【棝 (稒) 陽, 縣,屬 九 (五) 原 郡, 故 城 在 今 勝 州 銀 城 縣 界。: 고양(棝陽)은, 현(縣)으로, 구원군(九原郡) 또는 오원군(五原郡)으로 옛 성(城)은 승주(勝州) 은성현(銀城縣) 북(北)쪽에 있다.】 南 單 于 出 滿 夷 谷, 與 北 匈 奴 戰 於 稽 落 山, 大 破 之, 追 至 私 渠 北 (比) 鞮 海 。 : 남선우(南單于)는 만이곡(滿夷谷)을 나가, 북흉노(北匈奴)와 함게 계낙산(稽落山)에서 싸워, 크게 깨뜨리고,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까지 추격(追擊)하였다. 竇 憲 遂 登 燕 然 山, 刻 石 勒 功 而 還。: 두헌(竇憲)이 마침내 연연산(燕然山)에 올라서 돌에 공적(功籍)을 새기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 도요장군(渡遼將軍)과 그 휘하(麾下) 수만(數萬)의 보기(步騎)가 황하(黃河) 북안(北岸)의 도요영(渡遼營)에 주둔(駐屯)하고 있다가 “고양새(棝陽塞)”를 나가 북해(北海)까지 진격했다면 : “황하(黃河)가 요하(遼河)였다”라는 말에 동의(同意)하시겠는가?
➌ 위의 글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 “➊+➋”의 구절(句節)을 보면 그곳에 공통적(共通的)으로 들어가 있는 “도요장군(渡遼將軍)”이라는 장군(將軍)의 직책(職責)을 볼 수 있다.
우선(于先),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학(半島史學) : 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요하(遼河: 遼水)는, 심양(瀋陽)에 있다』라고 줄기차게, 맹렬(猛烈)하게, 끊임없이 주장(主張)하고 있으니, 당연(當然)하게도 『도요장군(渡遼將軍)과 그 휘하(麾下) 군졸(軍卒)들은 요하(遼河)를 건너, 주둔(駐屯)하고 있었다』라는 것으로 이해(理解)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요장군(渡遼將軍)과 그 휘하(麾下) 수만(數萬)의 보기(步騎)들은 어디에 주둔(駐屯)하고 있었다는 건가? 요하(遼河: 遼水)를 건너면 바로 고구려(高駒驪) 땅인데, 고구려(高駒驪) 땅에 보기(步騎) 수만(數萬)이 주둔(駐屯)하고 있었다? 이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➍ 위의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에서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해주고 있잖은가!
〈당시(當時) 후한(後漢)의 도요장군(渡遼將軍)과 그 휘하(麾下) 수만(數萬)의 보기(步騎)는, 오늘날의 황하(黃河)【남하(南河)+북하(北河)】를 도하(渡河)하는 총책임(總責任)을 가진 장군(將軍)의 직책(職責)이 바로 ‘도요장군(渡遼將軍)’이며, 이들은 도하(渡河)하여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옛 오원군(五原郡)【옛 구원군(九原郡)】의 만백현(曼柏縣)에 있는 도요영(渡遼營)에 주둔(駐屯)하였는데, 이곳은 승주(勝州) 은성현(銀城縣) 북(北)쪽에 있다〉라는 것이다.
『도요장군(渡遼將軍)』이란 : 「수만(數萬)의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안전(安全)하게, 신속(迅速)하게 요하(遼河)를 도하(渡河)시켜 북방(北方)과 서북방(西北方)의 적(敵)【오환(烏桓) 또는 흉노(匈奴)】을 남하(南下)하지 못하도록 저지(沮止)시키고, 공격(攻擊)하여 이들을 물리치는 총책임(總責任)을 가진 장군(將軍)의 이름이 바로 도요장군(渡遼將軍)이라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듯이 : 요하(遼河)를 도하(渡河)하여 : 북흉노(北匈奴)를 치고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까지 추격(追擊)했다라고 했잖은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 편에서 이르기를 :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는 막외(漠外)에 있는데, 또한 북해(北海)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혹자(或者)들은 “북해(北海)”를 “바이칼호[Lake Baikal]”라는 근거(根據)나 고증(考證)도 없는 주장(主張)을 펼친다. 이런 분들에게는 역사공부(歷史工夫)를 다시, 열심히 시작(始作)해야 한다는 충고(忠告)를 해주고 싶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 편을 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私渠北鞮海在漠外, 亦曰北海. 漢元封初,單于留漢使郭吉,遷之北海。天漢初,又徙蘇武於北海,即此。東海永元初,竇憲等敗北單于於稽落山,追擊諸部至私渠北鞮海。又西北有西海,是時憲等遣使吳汜等奉詔致賜,及北單于於西海上,說令稱臣入朝。單于喜,隨使者到私渠海,聞漢軍已入塞,乃遣其弟奉貢入侍。二年,復款居延塞,欲入朝見,竇憲遣班固等迎之,會南單于復請襲擊北單于,許之. 單于遁去,班固至私渠海而還.》
요하(遼河)를 도하(渡河)하는 것과 고구려(高駒驪)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그런데 수양제(隋煬帝)는 요하(遼河)를 건넜다고 하였으며, 당태종(唐太宗)과 당고종(唐高宗)의 군대(軍隊)는 요하(遼河)를 도하(渡河)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 「20∼21세기(世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이러한 옛 기록(記錄)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記錄)에 의하지 않은, 임의적(任意的)으로,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만들어 놓은 가공(加工)된 얘기를 “역사(歷史)”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듯이 :
1) 도요장군(渡遼將軍)과 보기(步騎) 수만(數萬)이 ‘북방(北方)’으로 진격(進擊)한다면 : 그곳은 초원지대(草原地帶) 및 몽고고원(蒙古高原), 항애산(杭愛山)으로 가는 길이고,
2) ‘서북(西北)’으로 출정(出征)한다면 : 바로 대막지대(大漠地帶)인 고비사막(과벽: 戈壁)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원(元) 초(初), 야율초재(耶律楚材)의 기록(記錄)[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에 의하면 당시(當時)의 “과벽(戈壁)”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를 일컫는다. 과벽(戈壁)은 대막(大漠)이요, 한해(瀚海)를 지칭(指稱)한다.】
「‘한서(漢書)=전한서(前漢書)’와 ‘동한서(東漢書)=후한서(後漢書)’」에서 칭(稱)하고 있는 「하북(河北)」은, 「청해성(靑海省)으로부터 감숙성(甘肅省)으로 이어지며, 영하성(寧夏省)으로 흐르는 하(河)의 북방지대(北方地帶)【하서회랑(河西回廊)】를 일컫고 있다」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당시(當時)에는 이곳도 유목민(遊牧民)들의 천혜(天惠)의 땅이었다”라는 것쯤도 알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 전한서(前漢書) 및 후한서(後漢書), 오대사(五代史),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주요 역사서(歷史書) 스스로 모순(矛盾)을 드러내고 있다. “도요장군(渡遼將軍)”이라는 관직명(官職名)을 놓고 보면 :
위에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도요장군(渡遼將軍)”과 “하(河)”를 대입(代入)」하면 : 「‘전한(前漢)=서한(西漢)’, ‘후한(後漢)=동한(東漢)’, 오대(五代)까지 모든 왕조(王朝)는 오늘날의 하서(河西) 땅, 청해성(靑海省)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스스로 자백(自白)하고 있다.
즉(卽), 「하(河)가 청해성(靑海省)과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금성(金城)’에서 꺾여 북(北)쪽을 향(向)해 흘러 영하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여 다시 동(東)쪽으로 흘러가는 이 하천(河川)이 바로 “요하(遼河)”라고 스스로 자백(自白)하고 있다」라면 : 「동서(東西)로는 청해성(靑海省), 감숙성(甘肅省)으로부터 산동성(山東省)까지 : 남북(南北)으로는 내몽고(內蒙古)로부터 해남성(海南省)까지 모두는 조선(朝鮮)의 강토(疆土)였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강토(疆土) 구도(構圖)”는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오대사(五代史), 자치통감(資治通鑑) 등(等)의 주요(主要) 사서(史書)에서 스스로 증거(證據) 해 주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 왜 "장안성(長安城)이 평양성(平壤城)이 되고, 험독성(險瀆城)"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북변(北邊)과 서변(西邊)은 사막지대(沙漠地帶)와 연이어져 있다라는 기록(記錄)은,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그대로 전(傳)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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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8권 / 함경도(咸鏡道) 길주목〔吉州牧〕: [장백산(長白山) 주(州) 서쪽 116리에 있다. 두리산과 서로 연해 있는데, 산이 극히 높고 크며 사계절 내내 눈이 있다. 5월에 녹기 시작하다가 7월에 다시 눈이 내린다. 경성부(鏡城府)에도 보인다. 고려(高麗) 이색(李穡)의 시] 〈한(韓) 만호(萬戶)를 보내며〔送韓萬戶〕〉에,
《長白山窮窿, 鐵嶺關嵂崒, 橫亘幾千里, 天險不可越 : 장백산(長白山)은 높다랗고, 철령관(鐵嶺關)은 우뚝하여, 몇 천리(千里)【橫亘幾千里】를 가로(橫)로 뻗쳤으니, 천연의 험지라 넘나들 수가 없는데》라고 하였다.
➥ 이런 기록(記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 반도사학(半島史學) 학자(學者)님들의 ‘진정(眞情)한 정체(正體)’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는, 분명(分明)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라고 말하고 있는 그 주체(主體)가 바로 반도사학(半島史學)이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접경(接境)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이 동서(東西)로 수천리(數千里)에 뻗어 있지 않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우리나라 백두산(白頭山)이 횡(橫)【동서(東西)】으로 수천리(數千里)에 뻗어 있나?
이 정도(程度)의 지세(地勢)도 모른다면 : 역사(歷史) 공부(工夫)나 연구(硏究)는 잠시 스톱(Stop) 하시고, 지리학(地理學)을 좀 더 연구(硏究)하시는 것이 ‘견(犬) 망신(亡身)’을 당하지 않는 방법(方法)일 것 같다.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수천리(數千里)에 뻗었다【橫亘幾千里】』라는 곳을 찾으면 되는 일이고, “사계절(四季節) 내내 눈(雪)이 쌓여있다”라는 말은 곧 빙하(氷河)가 쌓여있다는 말이다.
➤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은, 반도(半島) 땅의 영산(靈山)일 뿐,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산(靈山)으로써는 자격미달(資格未達)인 셈이다.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으로 두 봉우리가 있다거나 세 봉우리가 있다는 만년빙하(萬年氷河)가 쌓여있는, 동서(東西)로 수천리(數千里)에 뻗어 있는, 본래(本來)의 만주(滿洲)와 접경(接境)하고 있는 그 산(山) 은 바로 오늘날의 “벨루하산(Belukha, 山)”이다.
☛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은 오늘날의 벨루하산(Belukha, 山)을 말하는 것인데, 만어(滿語)로,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이라고도 한다. 【별노합산(別盧哈山 : 4,506m), 우의봉(友誼峰 : 4,374m)이며, 규둔봉(奎屯峰:4,082m)은 몽골과 중국(中國)의 국경(國境)에 서 있다. 】을 말하는 것이다.」 동(東)쪽으로 당노산맥(唐努山脈)으로 이어지며 수천리(數千里)에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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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여지도서(輿地圖書)【홍문관(弘文館), AD1,760】 : 咸鏡道 咸鏡北道兵馬節度營
《權始經詩: “北界連沙漠, 居民摠守城。 關防開六鎭, 節制設三營。 按使方宣化, 將軍亦鍊兵。 各宜勉職責, 誓不負平生。” ○ 金時傑詩: “休傳出塞曲, 且歌感君恩。 聖世躬推轂, 將軍志喪元。 籌邊頻看劍, 宴客細傾尊。 早晩酬洪造, 襟懷托永言。” ○ 同人詩: “功合麒麟畫, 身爲玉塞城。 龍韜雄制閫, 虎士肅連營。 志在淸沙漠, 歌成洗甲兵。 國讎猶未報, 奮義誓輕生。”》
《北界連沙漠, 居民摠守城 : 북(北)쪽 지경(地境)은 사막(沙漠)과 잇닿아 있는데,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은 모두 성을 수비(守城)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홍문관(弘文館), AD 1,760年】는,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로 18세기(世紀) 홍문관(弘文館)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에서 편찬(編纂)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말하기를 : 함경도(咸鏡道) 북도(北道) 절도영(節度營)을 설명(說明)하는 대목(臺木)에서 관리(官吏) 권시경(權始經)이 노래한 구절(句節)을 인용(引用)하여 이곳 땅의 특이지세(特異地勢)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고려(高麗)의 윤관(尹瓘)이 개척(開拓)한 ‘1’ 천리(千里) 땅은, 반도(半島) 땅이 아니라,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 땅이었다”」라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는 곳은 : 영하성(寧夏省) 하란산(賀蘭山) 서(西)쪽 땅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말하는 지형지세(地形地勢)조차도 설명(說明)하지 못한다면 : 무슨 재주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여러 국가에 대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할 수 있나? 자격미달(資格未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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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新增東國輿地勝覽 49, 咸鏡道 安邊都護府
《安得與君駕尻輪而馳神馬,絶大漠而凌蒼霞,陟白山之絶頂兮?望尹碣以摩挲,臨瀚海而酌蒼波;洗胸中之嵯峨,奏‘徵招’而歸來,以獻夫胡越一家之歌。: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沙漠)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한해(瀚海)에 임하여 푸른 물결을 잔질하여 :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曰 : 《이러한 구절(句節)은 『옛 “전한(前漢)의 곽거병(霍去病), 위청(衛靑)” 또는 “후한(後漢) 때 도요장군(渡遼將軍) 등홍(鄧鴻)은, 북흉노(北匈奴)를 크게 깨뜨리고,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中原大陸의 西北方】까지 추격(追擊)하고,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은,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돌에 그 공적(功績)을 새기고 돌아왔다”』라는 옛 고사(古事)를 인용(引用)한 것이다》라고 말할 것임은 100% 확신(確信)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위의 구절(句節)은 「대막(大漠)【큰 사막지대(沙漠地帶)】을 넘어, 연하(煙霞)를 헤치고 달려가 백산(白山)【백두산(白頭山)】의 정상(頂上)에 있는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싶다」라는 젊은이의 큰 꿈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半島) 백산(白山)과 윤관(尹瓘)과 대막(大漠)이나 연연산(燕然山), 한해(瀚海)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윤관(尹瓘) 장군(將軍)은, ‘두만강(豆滿江)=두만강(豆萬江)’ 이북(以北)의 ‘7’ 백리(百里) 땅을 개척(開拓)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선후좌우(先後左右), 지형지세(地形地勢), 방위(方位) 등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넓고 넓은 땅의 것을, 좁디좁은 반도(半島)에 구부려 넣으니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산(白山)은 천산(天山)의 다른 이며, 또한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문제(問題)는 이러한 백산(白山) 또는 백두산(白頭山)에 오르려면 대막지대(大漠地帶)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說明)과 같은 기록(記錄)은 수없이 많다.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동국사(東國史)에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사대부(士大夫)들이 지어 현존(現存)하는 많은 문집(文集) 속에서 말이다. 문제(問題)는 이러한 기록(記錄)을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좁디좁은 반도(半島) 땅에 옛 기록(記錄)을 끼워 맞추다’ 보니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폐쇄(閉鎖)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 열린 자세(姿勢),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이 요구(要求)되고, 또 필요(必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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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新增東國輿地勝覽 49권 咸鏡道 端川郡
《제영(題詠) : 鄭欽之詩:“水複山重地轉幽, 欄干徙倚久遲留。焦心已覺成衰疾,放意難堪作勝遊。南望白雲長極目,北踰黃磧更回頭。何當掃盡腥膻醜,露布星馳達九旒?” ; 정흠지(鄭欽之)의 시(詩)에 : “물이 겹치고 산이 겹쳐서 지경이 한층 더 그윽한데, 난간을 의지하며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노라. 마음을 태우자니 이미 노쇠한 병이 된 것을 깨달았고, 마음 놓고 명승의 유람길 조차도 감당하기 어렵구나. 남녘으로 흰 구름을 바라보며 언제나 목력(目力)을 다 했는데, 북(北)으로 누런 사막지대를 넘고서도 다시 머리를 돌려 보았다. 어찌하면 비린내 풍기는 추악한 무리들을 깨끗이 소탕하고, 첩서(捷書)를 주야로 달려 구중궁궐에 올릴까.” 하였다.》
《단천군(端川郡)의 북방지대(北方地帶)는 누런 모래 사막지대(黃磧)가 펼쳐져 있어, 이곳을 넘어 다시 머리를 돌려 보았다》라는 이야기다.
「단천군(端川郡)」이 어딘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에 있는 땅의 이름인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는 땅의 이름인가? 만약(萬若),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는 땅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분명(分明) 누런 모래【黃沙: 黃磧 : 黃土沙漠地帶】의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어, 이곳은 오늘날 유명(有名) 관광지(觀光地)로 이름깨나 날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단천군(端川郡) [出處 / 新增東國輿地勝覽] : 토산(土産)으로 〈영양(羚羊)ㆍ사향(麝香)ㆍ철(鐵)ㆍ연철[鉛鐵]【모두 토라산(吐羅山)에서 난다.】사색옥(四色玉) 【청(靑)ㆍ황(黃)ㆍ백(白)ㆍ오(烏)의 사색의 옥이 모두 이동(梨洞)에서 난다.】석유황(石硫黃) 【오을족(吾乙足)의 북쪽 봉우리 밑에서 난다.】이 있다〉라고 하는데 :
➊ 영양(羚羊) [出處 : 위키백과] : 〈영양(羚羊, antelope)은 소과에 속하는 염소를 닮은 야생동물들을 부르는 말이다. 종류가 대단히 많아 100종 이상이나 된다. 대개 아프리카의 초원, 사막, 삼림에 살고, 소수종만이 인도 및 아시아 중앙부에서 서식한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으며,
➋ • 사향(麝香) [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약기원사전』에 의하면, 사향은 난쟁이사향노루(Moschus berezovskii Flerove), 산사향노루(Moschus chrysogaster Hodgson) 또는 사향노루(Moschus moschiferus Linné) 수컷의 사향선 분비물로써 그 내용물을 꺼내어 말린 것을 가루사향이라 하고, 주머니 모양의 사낭(麝囊)을 그대로 잘라내어 말린 것을 주머니사향이라고 한다〉 • 사향(麝香) [出處 : 위키백과] : 〈러시아, 티베트, 네팔, 인도, 중국 등이 주요 산지이지만, 특히 티베트, 네팔, 몽골산이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향노루(麝香노루 [출처(出處)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천연기념물. 사향노루(麝香노루 : Musk Deer (Moschus moschiferus)〉라고 하였으나, 예전부터 반도(半島) 땅에서 야생(野生)했다는 근거(根據)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➌ 사색옥(四色玉) 【청(靑)ㆍ황(黃)ㆍ백(白)ㆍ오(烏)의 사색의 옥이 모두 이동(梨洞)에서 난다.】이 반도(半島) 단천군(端川郡)의 토산(土産)이었다면 : 한국인(韓國人)들이 모를 일 없는 일임에도 : 아예 검색(檢索)조차 되지 않는다.
• 東國輿地志 : 形勝 ; 磨雲崛其前,磨天矗其後。本朝李安訥詩敍:“端,故女眞地,濱海而治,壤接陰山,磨雲崛其前,磨天矗其後” 土産 : 羚羊,麝香,貂,靑鼠,黃鼠, 四色玉,靑、黃、白、烏,俱出梨洞。石硫黃,出吾乙足北峯底。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는 ‘이안눌(李安訥)’의 말을 인용(引用)하여 : 단천군(端川郡)에 대해 놀라운 기록(記錄)을 보여주고 있는데 : 「단천군(端川郡)의 땅이 음산(陰山)과 접(接)해있다」라는 것이다. 도대체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어디에 음산(陰山)이라는 산(山)이 있다는 것인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음산(陰山)”은 2개소(個所)가 있다. 첫째는 영하성(寧夏省)과 그 서(西)쪽 내몽고(內蒙古) 땅에, 두 번째는 바로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에 있는 박격달산(博格達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의 음산(陰山)은, 근세(近世)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음산(陰山)’은 한 곳에 있는 것이다. 바로 박격달산(博格達山)이다.
【20∼21세기(世紀)에 만들어진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지도(地圖)를 보면 :“음산(陰山)”이라는 산(山)의 이름은 없다. 다만 같은 산계(山系)를 두고 음산산맥(陰山山脈) 또는 청산산맥(靑山山脈) 또는 양산산맥(陽山山脈)이라고 표기(表記)된 것도 있고 뒤죽박죽이다. 곧 조작(造作)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大東地志 : 玉, 靑、黃、白、烏 四色俱出梨洞, 惟靑色爲國用。 그러나 ‘영양(羚羊)ㆍ사향(麝香)’에 대해서는 언급(言及)조차 없다.
➥ 반도(半島) 단천군(端川郡)의 땅은, 동(東)쪽은 동해(東海)에 닿고, 북(北)쪽은 두만강(豆滿江)이 흐르는 곳으로 단천군(端川郡)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을 수 없는 지세(地勢)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세(地勢)는 천지창조(天地創造) 조물주(造物主)가 회귀(回歸)해도 불가능(不可能)한 곳이다. 곧 「반도(半島)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증거(證據)다.
“함경도(咸鏡道)의 단천군(端川郡) 땅”에서 뒤를 돌아보니【머리를 돌려보니】 : 누런(黃) 사막지대(沙漠地帶)인 ‘황토(黃土)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다?
반도(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보면 : 그곳은 두만강(豆萬江) 유역(流域)으로 : 남(南)쪽도, 북(北)쪽도, 그 어디에도 ‘황토(黃土) 사막(沙漠)’은 없다.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이곳 단천(端川)으로부터 서(西)쪽으로 ‘7’ 천리(千里)쯤 떨어져 있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의 서변(西邊)∼북변(北邊) 사이의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라는 명확(明確)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모를 리 없는 학계(學界) : 차라리 모른다면 그나마… …「미친 척, 모르는 척, 입을 닫고 있다」라면 : 도저히 용서(容恕)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는 행위(行爲), 총칼을 들고 뒤통수를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옛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을 망라(網羅)한다.」 바로 이곳이 ‘사서(史書), 실록(實錄), 문집(文集), 지리지(地理志)’ 등(等)에서 말하는 : 「‘수만리(數萬里), 몇 만리(萬里), 일만(一萬) 리(里)’ 등으로 표현(表現)된 조선(朝鮮)의 강토(疆土)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6년 05월 17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안녕하세요.
회원 여러분,
또 이곳을 찾아주시는 손님 여러분,
감사드리며, 다음 게재 내용은 이어지는 "6편"입니다.
"6"편에서는 생생한 연행일기에서 '사신단의 일원'으로 연경(燕京)을 다녀오신 분들의 생생한 여정일기 속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을 가지고 '반도사학'의 궤변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 댁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