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jpark님의 글을 잘 보았습니다. 빠뜨린 것 하나와,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내용 중에서 각각 3가지만 묻도록 하겠습니다.
가. 빠뜨린 것 등
(1) 咸安二年(372) 春正月 辛丑,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근초고왕 사신기록과 일치, 왕의 이름을 묻지 않음.
(2) 咸安二年(372) 夏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 삼국사기와 불일치, 왕의 이름을 물음.
(3) 太元九年(384) 秋七月, 己酉, 百濟遣使來貢方物.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침류왕 사신기록과 일치, 왕의 이름을 묻지 않음.
(4) 太元十一年(386) 夏四月, 以百濟王世子餘暉為使持節都督鎮東將軍百濟王. - 삼국사기와 불일치, 왕의 이름을 물음.
1. 왜 (4)번의 386년 여휘왕의 진동장군 백제왕 책봉기록은 쓰지 않았습니까?
왜 여구는 백제왕을 칭했는데 여휘는 백제왕세자를 칭했습니까? 외교에서 왕이 아니라 왕세자를 칭하는 것은 3번 나옵니다. 나머지 2번은 칠지도의 백제왕세자와 왜왕세자 흥인데, 외교에서 왕세자를 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3세기 후반에 마한지역과 진한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분명한 마한주와 진한주가 서진에 여러번 사신을 보내는데, 서진은 단 한 번도 마한주나 진한주의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위의 (1)과 (3)도 동진은 근초고왕과 침류왕의 이름을 안 묻습니다. 중국 왕조가 사신을 보낸 왕의 이름을 묻는 경우와 안 묻는 경우가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3. 만일 (2)번에서 진서가 본이 2개인데 모두 동일하고 다음처럼 딱 한군데가 다르다고 가정합니다. 하나는 여구를 진동장군으로 책봉하였다고만 나오고, 다른 하나는 여구를 진동장군으로 책봉하고 낙랑태수 직을 주었다고 나올 때,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어떻게 압니까?
나. 유명한 질문 중에서
1. 삼국사기 집필진은 진서를 모두 확인하였고 372년 여구왕과 386년 여휘왕의 백제왕 책봉기록도 다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둘을 버리고 416년 전지왕의 백제왕 책봉기록이 최초의 중국 왕조 책봉입니다. 삼국사기 집필진이 이렇게 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국사 시험에 중국왕조로부터 최초로 백제왕 책봉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고 나오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합니까?
2. 동성왕은 이름은 여대고, 휘는 모대(또는 말다)고, 시호는 동성입니다. 무령왕은 이름은 여융이고, 휘는 사마고, 시호는 무령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의 성과 이름은 없고, 휘만 근초고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주는 시호도 주지 않고 휘에다 왕만 붙여 처리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집필진이 진서를 모두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의 성과 이름을 안 쓴 이유는 무엇입니까?
중국사서는 전지왕을 여영(또는 여전)이라 하여 성이 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영이라고 썼습니다. 삼국사기 집필진이 진서의 이 기록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은 안 쓰고 이름만 쓴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고대에 성은 집단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왕의 성을 기록하지 않아도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가 있는데 지배층의 주요 인물이 대부분 김씨입니다. 그러면 왕도 김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이 김씨가 아니면 곧 김씨로 바뀝니다. 또 어떤 나라가 있는데 지배층의 주요 인물이 대부분 고씨입니다. 그러면 왕도 고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이 고씨가 아니면 곧 고씨로 바뀝니다. 역사학의 상식입니다.
삼국사기가 근초고왕의 성을 쓰지 않았어도 이 상식을 적용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 이전에 백제의 지배층 성씨가 무엇인지릃 보는 것입니다. 해씨와 진씨입니다. 이 두 성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백제의 8성대족 중에 들어가므로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여씨는 근초고왕 이전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단 근초고왕이 부여씨일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근초고왕의 성은 해씨와 진씨 둘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데, 진씨는 왕비족입니다. 그러면 근초고왕의 성은 삼국유사처럼 해씨여야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위 파란색으로 쓴 역사학 상식 설명에서 모순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에 최초로 나타나는 부여씨는 언제 누구이며, 그 기록이 틀리면 왜 틀리는지, 맞으면 왜 맞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과거와 미래님.
간단하게 답변을 드립니다
백제 왕통을 보면 크게 고이왕계의 우씨와 초고왕계의 해씨
비유왕계의 진씨로 나눌수 있습니다.
고이왕계는 중국에 사신을 보낸적이 없고
초고왕계가 처음으로 근초고왕이 부여출신을 강조하면서 부여씨 성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전지욍도 마찬가지구요.
근데 비유왕계의 시초인 비유왕은 진씨라는 왕비족 이였습니다. 비록 진씨지만 여구 여전 처럼 여씨 성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여구 여전의 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유왕이 굳이 다른 성으로 받을 이유가 없는 거죠.
그의 아들 개로왕도 마찬가지여서 여경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근데 475년 한성이 함략되자 그의 아들 문주가 웅진으로 내려와 여씨가 이닌 모씨로 모도라는 책봉은 받습니다.
모는 마와 같은 것으로 진을 의미하죠.
동성왕도 모도를 이어받아 모대로 책봉을 받는 것이구요.
이것이 무령왕때 부터 다시 그의 부친 개로왕이 사용했던 여씨로 바꾸게 됩니다.
이후 쭉~ 여씨로 책봉을 받게 되는 것이구요
간단하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제가 너무 무리한 질문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knjpark님에게 질문을 자제하겠습니다.
중국 사료의 백제왕 책봉 기록이라는게 자국중심주의에 따라 객관적 팩트와 거리가 멀게 표현된 내용이라 외교 의전에서 자국을 높이려는 목적이 담겨 있는게 중국 사료의 백제왕 책봉 기록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