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 종합격투기 3위… 日열도 강타하고 돌아온 '타격 女帝' 함서희
“길거리 싸움꾼을 바꾼 건 엄마의 눈물… 링에서 규칙을 배운다”
공이 울리면 주먹이 운다
만 20세에 대한해협 건너 숱하게 때리고 맞았죠
7년간 2등, 2등, 2등… 마침내 거머쥔 챔피언 벨트
네일아트 즐기는 女戰士
드라마만 보면 훌쩍이고 네일 아티스트 일도 했죠
파이터지만 마음 여린 4차원 아가씨랍니다
방황, 그리고 도전
중학교 때 싸움 많이 했죠 탤런트 꿈마저도 접었고…
고교 때 나간 킥복싱 대회 눈을 떴죠, 새로운 세상에
얼굴이 엉망되긴 하지만…
치열했던 경기가 끝나면 목에서 피맛이 느껴져요
‘왜 이걸 하지’ 후회하지만… 며칠 지나면 ‘또 뛰고 싶다’
마지막 1초까지 최선을!
제가 만족하는 경기라면 패배해도 상관 없어요
최종 목적지 미국 무대 위해 달릴 겁니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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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서희는 국제 격투기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强者)다. 일본 무대까지 평정, ‘탈아시아급’이란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그의 복근은 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낸다. 후배 파이터 송가연은 “언니의 몸은 존경스러울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11자’형 복근이 섹시하고 멋있는데 자꾸 왕(王)자 근육이 만들어져 속상하다”고 했다. 사진은 함서희(왼쪽)가 지난 1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딥 주얼스4’ 대회 킥복싱 경기에서 상대 기라 유우키 선수에게 왼발 킥을 날리는 모습. 함서희가 3대 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에밀리오 야쑤오 이나푸쿠 제공
옆구리를 노린 상대 선수의 오른발 미들 킥이 날아들었다. 빠른 스텝으로 안쪽을 파고들며 벼락같이 뻗은 왼손 스트레이트 펀치. 감이 좋았다. 턱에 정통으로 펀치를 맞은 상대가 링 위에 쓰러졌다. 원, 투, 스리…. 주심의 카운트 '에이트(8)'에 일어선 상대와 주먹이 오가는 잠깐의 난타전이 벌어졌다. 10여초가 흘렀을까. 다시 한 번 왼손 스트레이트가 작렬하며 상대 선수 또 한 번 다운. 그것으로 승부는 '끝'이었다. 주심은 더 이상 경기가 진행될 수 없다고 판단, 'KO'를 선언했다. 사각의 링을 둘러싼 관중석에서 뜨거운 갈채가 터져나왔다.
지난해 8월 25일 일본 후쿠오카 중심가에 있는 스카라에 스파지오 경기장. 일본 격투기 단체가 주최한 이날 여성부 킥복싱 경기는 종합 격투기 선수인 함서희(27)가 '타격 여제(女帝)'라 불리는 이유를 증명한 자리였다. 3분 3라운드 경기였지만 그의 능력을 보여주기에 1라운드 2분이면 충분했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지난 4월 6일 서울 양재동 '더 케이(The K)' 호텔 특설링. 함서희는 국내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FC가 주최한 '코리아 3' 대회 48㎏급에 출전했다. 종합격투기 시합으로는 처음 서는 국내 데뷔전. 팬들은 '함서희'를 연호했고 그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대 시노 밴후스(18·미국)는 만만찮은 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함서희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3대0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
"지난 7년간 일본 경기만 뛰었다. 국내 시합이 잡혔을 때 정말 부담이 컸다. 기대가 큰 국내 팬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실력이 과대평가된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 말까'라는 고민은 잠시 있었지만 프로 선수로서 경기를 마다할 순 없었다."
함서희는 세계 여성 종합격투기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强者)다. 지난해 미국 랭킹사이트는 그를 세계 3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국내 여성 선수가 채 다섯명도 안 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의 존재감은 더 돋보인다. 그는 지난해 5월 일본 여성 종합격투기 단체 주얼스가 개최한 '주얼스24' 대회 애텀급(48㎏) 경기에서 당시 챔피언 나호 스기야마를 판정으로 꺾고 챔피언 벨트를 찼다. 총 전적은 18전 13승 5패지만 2011년 12월 패배 이후 2년 반 동안 패배를 잊은 채 질주 중이다. 그동안 4연속 승리를 챙겼다.
로드 FC 관계자는 "함서희는 탈아시아권 선수로 평가받는다. 킥복싱을 바탕으로 한 연속 타격이 명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킥복싱에서도 이미 정상에 올라 있다. 2009년 일본 글래디에이터 대회 경량급 챔피언이 됐고, 6번에 걸친 방어전을 모두 승리했다. 현재 전적은 27전 22승 5패이다.
지난 21일 부산 시내 부산국제영화제(BIFF) 광장 근처에서 국내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함서희를 만났다. 그는 발목까지 오는 핑크색 부츠에 빨간 진, 하얀색 반팔 블라우스를 입었다. "격투기 선수라고 추리닝 입고 나올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사실 그의 옷차림은 예상 밖이었다. 국내 시합 이후 좀 쉬었느냐고 물었더니, 함서희는 "사흘 전 일본 가서 킥복싱 한 게임 더 하고 왔다"며 승리의 브이(V)자를 그려 보였다.
―국내 데뷔전이 어렵게 성사됐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상대 선수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일본 선수들은 대부분 이미 내가 싸워봤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나와 대결을 꺼렸다고 한다. 미국과 브라질, 호주 등에서도 상대를 물색했지만 실력이 떨어지거나 굳이 강자와 붙어 이득이 없다는 이유로 고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시합 못하나' 생각했는데 막판에 미국 선수가 나섰다. 고마웠다."
―함서희란 이름이 일본에선 꽤 유명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2007년 이후 일본에서만 활동했다. 국내엔 선수도 없었고 당연히 시합도 없었다. 국내에선 주로 킥복싱 시합을 뛰었다. 몇 년 동안 국내 활동이 없으니까 '함서희 은퇴했나봐'라는 말이 나오더라."
◇일본을 강타한 격투기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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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서희는 한때 부상과 슬럼프로 운동을 중단하고 생계를 위해 네일 아티스트 일을 했다. 평소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사진은 지난해 8월 빨갛게 칠한 손톱을 자랑하려고 휴대전화로 자신을 찍은 모습. /함서희 제공
나이 만 20세, 키 157.7㎝. 2007년 그의 일본 데뷔전은 세계 격투기 시장을 주도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일본에 충격이었다. 당시 애텀급 챔피언으로 인기를 누리던 와타나베 히사에를 압도적인 타격 실력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였다.
―일본 무대는 어떻게 진출하게 된 건가.
"같은 체육관 소속인 김동현 선수가 소개했다. 그 형아(함서희는 오빠뻘 선수를 그렇게 불렀다)가 당시 일본 경기를 뛰었는데 일본 측에서 '여자 선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얼떨결에 대한해협을 건너갔는데 그게 큰 사건이 돼 버렸다."
함서희의 별명은 '함더레이 실바'. 화끈한 타격전으로 미국 종합격투기대회 UFC에서 흥행몰이를 하는 반더레이 실바와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싸울 때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고 '닥치고 공격'하는 스타일이다. 상대를 붙잡아 넘어뜨리고 손·발 관절을 꺾는 기술에는 별 재미를 못 느낀다고 했다.
―국내 데뷔전 때 일방적인 경기를 했는데 인터뷰 때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기량을 다 보여드리지 못했다. 내 장기인 입식(立式) 타격전을 펼쳤어야 했는데 레슬링처럼 주로 바닥에 누워서 하는 경기가 됐다. 그분이 오시지 않은 시합이었다."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니.
"경기가 잘 풀릴 때 '그분이 오셨다'고 한다. 내가 내가 아닌 상태이다. 사람들은 경기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라고 하지만 난 정신줄 놓고 진짜 괴물처럼, 미친 사람처럼 싸워야 한다."
―그런 시합은 자주 하나.
"사실 절반도 안 된다."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비법이 있나.
"무엇보다 집중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집중하면 상대방의 모든 움직임이 다 보인다. 반대로 긴장하고 정신이 산만하면 정신없이 얻어터진다. 날아오는 주먹과 발이 뻔히 보이는데도 맞는다. 집중만 하면 피할 수도 있고 카운터를 날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일본에서 그는 한국 남자 선수들보다 대전료를 많이 받는다. 그만큼 레벨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액수에 대해선 '노코멘트'라고 했다.
◇어릴 적 꿈은 탤런트… 싸움 때문에 접어
함서희는 어릴 때 피아노 치는 걸 좋아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다. 그 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탤런트로 바뀌었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를 무턱대고 찾아가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합격이 됐다.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았나 보다.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남들 앞에 나서도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었다. 오디션엔 엄마 허락도 없이 갔다. 노래도 배우고 연기도 배웠다. 1년쯤 지나니 단역이 들어왔다. 드라마 '태조 왕건' '가을동화' 등에 얼굴을 내밀었고, 단막극에도 출연했다."
―왜 연기자 꿈을 접었나.
"중학교 때 숱하게 싸움질을 했다. 친구들이 다른 학교 애들과 싸울 때면 도와달라고 했다. 나를 위해, 힘없는 친구를 괴롭히기 위해 싸운 적은 거의 없다. 동네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면 학교에 알려지고 엄마는 학교에 불려다녔다. 그런 일이 쌓이고 쌓여 학교를 두 번이나 옮겼다."
―엄마에게 미안하지 않았나.
"학교를 옮긴 뒤에는 조용히 지내려고 하는데 싸움 잘한다는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다. 싸움이 터지면 애들이 SOS를 쳤고, 또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교장 선생님께, 교육청 관계자에게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졌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이렇게 살 거면 연기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며 연기학원 수강증을 모두 찢어버렸다."
함서희가 격투기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활달하니 여군이 되는 게 어떠냐"는 부모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당장 동네 체육관을 찾았다. 우선 태권도 단증을 따기로 했다. 태권도 등록하면 킥복싱도 배울 수 있고, 종합 격투기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첫 출발은 킥복싱이었다.
"두 달 정도 지났는데 관장님이 '조만간 킥복싱 시합이 있는데 나가볼래'라고 했다. 재밌겠다 싶어 출전 신청을 했는데 그게 운명의 날이 됐다. 하루에 두 판을 연속 이기고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코뼈가 부러지고 이마엔 혹이 났다.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고3 땐 챔피언도 됐다."
―동네 싸움꾼이 제도권에 들어온 건가.
"길거리 싸움이랑 달랐다. 막싸움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린 공정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링 안엔 규칙과 심판이 있고 점수가 매겨진다. 권투·태권도와 마찬가지다."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싸움에도 규칙이 있어야 하고, 공정한 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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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1일 부산 남포동 비프(BIFF) 광장에서 만난 함서희는 “언젠가 미국 격투기 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남강호 기자
◇방황, 그리고 네일 아티스트
여성 격투기 선수의 인생은 험난했다. 2007년 12월 일본 선수와 경기를 하다 큰 부상을 당했다. 상대에게 왼팔을 잡혔는데 탭(tap·손으로 툭툭 치며 경기 포기를 표시하는 행위)을 하지 않아 팔꿈치가 뒤로 꺾여버렸다. 4개월 후 다른 시합에서 똑같은 부위를 또 다쳤다. 슬럼프가 왔고, 이상하리만치 경기 일정도 잡히지 않았다. 먹고살 일이 막막해졌다.
―왜 탭을 치지 않았나.
"경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탭을 쳤다면 KO로 졌을 것이다. 그렇게 지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거다."
―또 다쳤을 때 상대가 원망스럽지 않았나.
"후지 메구미 선수였는데 정말 존경했던 선수다. 그는 당시 세계 최강 챔피언이었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거의 모든 시합을 KO로 승리한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런 선수와 경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팔이 잡혔을 때 '평생 팔을 못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는 탭을 했다."
―그런 부상을 당하면 집에서 걱정이 많았겠다.
"부모님껜 말씀드리지 않았다. 집에 들어갈 땐 깁스를 풀고 들어갔고 어디 아프다는 내색은 절대 안 했다. 방에 들어가 이불 뒤집어쓰고 몰래 울었다."
경북과학대학 이종격투기전공 중퇴가 최종 학력인 함서희는 딱히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어떤 일이 관심 있을까 자문하다 손톱을 꾸미는 네일아트가 맘에 들어왔다.
―하고 싶은 일 못하게 되니 '내 인생 왜 이럴까' 그런 생각도 들었겠다.
"네일아트 하는 것도 행복했다. 전에 해보지 못한 일을 하는구나, 색다른 경험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나쁜 일도 아니니까. 명동에 있는 가게에 취직했는데 일본인 관광객 손님이 많았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8~9시에 퇴근했다. 매달 월급 받으며 일하는 게 체질에 안 맞더라."
―그래서 선수 생활을 다시 시작한 건가.
"네일숍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했다. 그해 일본서 대유행한 입식 격투기 시합인 K-1 대회가 국내에서 개최됐는데, 나와 친했던 임수정 언니가 무대에 서게 됐다. '아, 이제 우리나라에도 격투기 붐이 오는구나' 생각했다. 맘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내게 운동만큼 희열을 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2009년 9월 컴백했고, 다키모토 미사키 선수를 3대0으로 꺾었다."
◇"예쁘고 싶다. 하지만 연연하진 않는다"국내 격투기계에선 함서희 경기력에 대해 '탈아시아급'이란 표현을 쓴다. 일본을 평정한 그는 이제 미국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미국 UFC가 최근 여성 경기를 만들고 있다. 52㎏급까지 나왔는데, 조만간 내 체급인 48㎏급도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최근 연승하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그전엔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식이었다. 평소 서울 집에서 대충 지내다 시합 잡히면 한 달 앞두고 부산 체육관에 내려가서 연습하고 그랬다. 그러면 이겨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작년에 부산에 완전히 정착했고 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요즘엔 주 6일 운동한다. 또 체급이 맞지 않는 점도 있었다. 한 체급 위인 52㎏급에서 주로 뛰었는데, 최근엔 내 체급인 48㎏급 경기를 하고 있다."
―격투기 선수로서 최대 장점은 무엇인가.
"주변에선 내가 전사(戰士)의 심장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시합을 보면 안다. 상대를, 주먹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왼손잡이란 점도 유리하다. 오른손잡이 상대는 나를 까다롭게 생각하지만 나는 10여년간 오른손잡이를 상대해왔기 때문에 편하다."
―격투기를 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인내심. 훈련할 때 엄청난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너무 힘들어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다. 숨 쉬고 서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다. 운동 좀 했다는 분들이 체육관에 찾아와 선수를 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일주일을 못 버티고 사라진다. 하루도 못 견디는 경우도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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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 때 느끼는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시합 중에는 고통을 모른다. 십자인대가 끊기거나 주먹이 부러지면 몰라도…. 코가 부러져도 '아 시큰하다' '짜릿한데' 그 정도다. 부러진 코뼈는 맞추면 된다. 시합 끝나고 긴장 풀리면 그때서야 엄청난 고통이 밀려온다."
―얼굴이 엉망이 되면 무척 속상할 텐데.
"첫 킥복싱 시합 때 평생 느낄 아픔을 다 느꼈다. 만신창이였다. 그 이후론 '다치면 또 얼마나 다치겠어. 첫 시합만 하겠어'라고 생각한다. 떨리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는다."
―혹시 맞는 걸 즐기는 건 아닌가.
"그건 변태고. 하지만 시합 때 맞으면 자극은 된다. 정신 바짝 차리게 해준다. 한 대 맞고 숨 한 번 크게 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격투기가 그렇게 매력 있나.
"시합 끝나면 목에서 피맛이 느껴진다. 종합격투기 하는 사람들은 이 느낌 다 안다. 모든 체력을 다 쏟기 때문이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2~3일 지나면 어떨 땐 일분도 안 돼서 '아 또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중독성이 엄청 강하다."
―후회한 적은.
"솔직히 시합 준비할 때마다 매번 후회한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왜 이걸 시작해서 이런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겼을 때 상대를 보면 어떤 생각 드나.
"고맙다는 생각이다. 나랑 시합해줘서 이런 시합을 만들어줘서 그리고 끝까지 함께 싸워줘서."
―자신만의 원칙이 있나.
"마지막 1초까지 최선을 다한다. 꼭 이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링에 오른 적이 없다. 솔직히 져도 상관없다. 내가 만족하는 시합을 한다면. 내가 즐거운 시합을 하면 보는 사람도 즐겁다. 꼭 이기겠다고 하는 시합은 내용도 결과도 안 좋더라."
◇오늘도 링에 오른다, 나중엔 못하니까함서희는 일본 데뷔전 직후 인터뷰에서 "꼭 챔피언이 되겠다"고 했다. 꿈이 이뤄지기까진 7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는 작년 챔피언 벨트를 차고 눈물을 보였다.
―왜 울었나.
"챔피언 벨트는 언제나 한 발짝 먼 데 있었다. 토너먼트를 해도, 타이틀매치를 해도 언제나 2등이었다. '아, 나는 챔피언과는 거리가 멀구나'라고 좌절도 했다. 그런데 드디어 챔피언이 된 것이다. 지난 세월이 스쳐갔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거 잘했구나, 다시 돌아오길 정말 잘했구나 싶었다."
―지금도 킥복싱 시합을 계속하는 이유는.
"현재 주력은 종합격투기다. 하지만 뿌리는 킥복싱이다. 이 기본을 꾸준히 유지하려고 한다. 지는 건 별로 신경 안 쓴다."
―혹시 수입이 더 필요해서인가.
"예전엔 돈 생기니까 시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이 링에 오르기 위해서다. 나중엔 못할 일이니깐. 프로는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링에 오르지 않으면 의미 없는 존재 아닌가. 또 시합을 해야 실력도 는다."
―인간적인 약점은.
"마음이 여리다. 노숙자만 봐도 눈물이 난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울고, 엄마 아빠랑 지하철에서 바구니 들고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을 봐도 운다."
―그런 사람이 격투기를 하나.
"그래서 4차원이란 말을 듣나 보다. 마음 여린 거랑 시합이랑 별개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