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 스승 P.페루지노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나, 후일에는 피린체파의 화풍으로 발전하였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갈라테아의 승리》, 《어느 추기경의 초상》등의 작품이 있다.
우르비노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司祭)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동향인인 T.비테에게서 배웠다.
1500년 P.페루지노가 완성한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의 벽화 중 우의상(寓意像)은 당시 17세였던 라파엘로가 조수로서 그린 것이다. 1500년경의 작품으로 알려진 콘데미술관(샹티유이)의 《삼미신(三美神)》, 내셔널갤러리(런던)의 《기사의 꿈》은 청순한 색채와 감미로운 음악적 리듬이 보이며 격정이나 위대성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운 매력을 나타내려 하였다. 공간에 교차하는 화음의 물결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음악적인 감각은 루브르미술관의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의 기조를 이룬다. 페루지아에 나온 후로는 페루지노풍의 최고의 기법을 급속히 익혔으며, 특히 《성모대관》(바티칸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磔刑)》(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밀라노) 등은 페루지노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공간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는 그의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이고 있다. 1504년 피렌체에서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면서 F.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파(派)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도니 부처상(夫妻像)》이나 기타 이 시기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고, 이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성모자상에서도 성모의 자태나 피라미드형 구도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도 모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인(先人)의 기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구성에 있어서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 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 등에는 언제나 독자성을 나타내었다. 1509년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궁전 서명실(署名室)의 장식에 종사하여 천장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三德像)》 등을 그렸다. 로마의 고대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완성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공교한 율동적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교황 측근으로부터도 계속 제작의뢰를 받아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파르네지나궁전의 벽화 《갈라테아의 승리》의 제작의뢰를 받은 것도 역시 이 무렵이다. 그때 파르네지나궁에서 작업 중이던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온보와 알게 되어 그의 채화법(彩畵法)을 배웠다. 이 색채묘법(色彩描法)의 변화는 1511∼1514년에 제작한 바티칸궁전의 스탄차 데 엘리오도로의 벽화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성 베드로의 해방》 《로마에서 격퇴당하는 아틸라》 등에 나타나 있는데, 빛과 그늘을 양괴적(量塊的)으로 대치시킨 명암효과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띠었다.
베네치아파적인 색채효과는 《율리우스 2세상(像)》을 위시하여 《베일을 쓴 여인》 《발타사르 카스티요네상》 《작은 의자의 성모》 등에 나타나 있다. 한편 건축에도 손을 대어 1514년 동향 선배인 B.L.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베드로대성당 건조에 관계하였고, 1514∼1517년 바티칸궁전의 스탄차델 인첸디오의 벽화장식에도 종사하였으며, 1515년부터는 고대유적 발굴의 감독관이 되었다. 《산시스토의 성모》(드레스덴)는 이 무렵의 걸작으로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싹트고 있으며 《산타 체칠리아》(볼로냐)에서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 사이에도 키지예배당의 설계와 장식, 바티칸궁전의 로지에의 장식, 빌라마다마의 건축 등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화려한 궁정화가로서 일에 쫓기던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차차 쇠퇴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지나궁의 천장화 《프시케의 이야기》에서는 지난날의 감미로운 리듬은 사라지고 고대 조각의 영향을 조악하게 반영하여 채색한 조상(彫像)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群像)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명예회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요절하였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그 후 근대회화사조에 의하여 경시된 적도 있다.
작품들
시스티나 성모 (1512~14년. 캔버스 위에 유채. 265 x 196cm.)
갈라테이아의 승리 (1514년경 프레스코화 295x225 cm.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현재 로마의 파르네지나 궁)에 그린 벽화.)
성모자와 아기 성요한 (1507~08년 나무판 위에 유채 122 x 80cm.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부제는 아름다운 여정원사. 여정원사는 꽃피는 초원에 앉으려는 성모의 아름다움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아테네학당 (1509-1510 프레스코화. 로마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앙에 있는 사람의 왼쪽이 관념세계를 대표하는 플라톤이고 오른쪽의 파란 옷이 과학과 자연계의 탐구를 상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천정화 (바티칸 궁의 장식을 위한 화가로 선정된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레오네 10세에게 각별한 신뢰를 받는 화가가 된다.)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화 (1514-1515 캔버스 유채 82x67cm.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초상화의 주인공은 라파엘로의 친구이자 당시 저명한 문예가로 초기 초상화의 걸작이다. 후에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플랑드르의 루벤스도 모사하였다고 한다.)
삼미신 (1504~1505 목판 유채 17x17cm. 소재는 그리스 신화에서 발췌한 것으로 세 여인은 각기 손에 사과를 쥐고 있는데 정숙, 청순,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7년 나무판 위에 유채 107x77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어린 성요한의 손을 보면 작은 새가 쥐어져 있는데, 이 작은 새는 예수의 수난의 상징이며 풍요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