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이후
헤이그 특사 사건
잃어버리기는 쉬우나 되찾는 것은 어렵다. 헤이그 특사사건은 그 한 단면이었다. 광무황제(고종)는 1905년 11월 17일 국권을 강탈해 간 을사조약을 막지 못했으나, 비준권을 가진 황제로서 승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잃고 난 후에는 적극적으로 국권을 되찾고자 11월 26일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전 주한미국 공사 알렌을 통해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광무황제의 요청을 무시했다. 가쓰라·태프트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헤이그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899년의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광경 / 1906년의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광경
광무황제는 다시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최측근 이용익을, 그 후 현상건을 파견했으며, 소환령을 거부하고 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전 주러 공사 이범진을 통해서도 러시아 정부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러시아는 프랑스를 제외한 각국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음을 알고 을사조약에 대해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고종에게 도와줄 수 없다는 전문을 보냈다.
외교적 고립무원에 빠진 광무황제는 1906년 1월 29일 내한한 <런던 트리뷴> 기자 스토리를 통해 북경주재 영국공사에게 5년간 열강의 공동보호를 요청하는 국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영국도 일본과 동맹국이었다.
1906년 8월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계획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4월에 극비리에 광무황제 앞으로 초청장을 보내왔다. 1899년의 제1차 만국평화회의도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하여 헤이그에서 열려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조약’이 채택되었고 상설 중재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제1차 만국평화회의 때 성사시키지 못한 군비확장 제한 문제를 다시금 논의하려 하고 있었다.
광무황제는 이 기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고 중재재판소에 제소하여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광무황제는 을사조약 때 일본에 연금되어 있다가 중국 상해에 망명해 있던 이용익과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특사로 참석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참가 거부로 취소되었다. 광무황제는 다른 한 편으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에게 위임장을 주어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공판소에 일본의 국권침탈을 제소하게 했다.
1907년 1월 다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고종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이용익에게 참석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이용익은 용정의 이상설과 상해에 있던 러시아 외상 파블로프와 만나 특사 파견문제를 논의하다가 1907년 2월 갑자기 사망했다. 특사 파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3월경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대한매일신보사 양기탁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집결해 있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이회영·이동휘·이갑·안창호·이승훈·이준·김구 등의 상동파 인사들에게 알렸다.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특사 파견을 추진하기로 하고,
황제의 측근 인사들과 접촉하여 이준이 통감부의 감시 하에있는 광무황제 알현에 성공하였다. 이준은 이상설과 이위종과 자신을 특사로 파견해 줄 것을 주청하고, 평화회의에 가지고 갈 친서와 더불어 미국 대통령,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황제 등에게 보낼 친서를 요청하였다. 황제는 쾌히 수락하고 이들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헤이그 특사단을 지원하고 광무황제의 특사 역할을 했던 헐버트 , 박사만국평화회의를 주관한 러시아 니콜라이2세 황제
/ 헤이그의 이준 평화박물관-당시 특사단이 머물렀던 호텔을 매입하여 박물관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준은 중추원 의관 나유석과 함께 4월 26일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5월 21일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을 찾았고 프랑스어 등 외국어가 유창한 그의 아들 이위종을 특사단의 일원으로 합류시켰다.
헤이그특사들은 이범진을 통해 주한러시아공사를 지낸 베베르와 상해에서 귀국한 외무상 파블로프를 만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광무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들이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 외무부로부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에도
특사들은 네덜란드 헤이그로 출발하였다. 특사단이 러시아와 베를린에서 「장서」의 번역과 인쇄를 하고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5개국 247명이 모인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지 10일이 지난 뒤였다.
헤이그특사들은 헤이그 시내 바겐슈트라트가 124번지에 있는 융호텔(Hotel de Jong)에 숙소를 정하고, 태극기를 내걸고 활동에 들어갔다. 특사단의 회의참석은 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헤이그특사들은 중재재판을 다루는 제1분과위원회에 일제침략을 규탄
하는 고종의 친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그것도 거부되었다. 이에 특사들은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대표들을 개별 방문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만국공법 위반사항을 지적하며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동정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특사단의 활동은 외교가의 무시 속에서 오히려 각국 기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영국 언론인으로 국제협회 회장윌리엄 스테드(William T. Stead)는 자신이 주관하는 평화회의보에 특사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를 실어주고, 6월 30일 자에는 ‘무슨 이유로 한국을 제외 하였는가’라는 논설을 게재했으며, 7월 5일자에서는 성명서 전문을 게재했다. 또한 특사들을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Korea)’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감동한 기자들은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 의결하였다. 이 사실은 헤이그에서 발행된 7월 10일 자의 <학세 쿠란트(Haggsche Courant)>에 자세히 보도되고,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8월호에도 요약 게재되었다. 그러나 이위종의 연설을 주선한 스테드조차도 일본을 비난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7월 14일 이준이 뺨에 생긴 종기를 잘못 치료하여 사망했다. 4일 후 국내 신문에는 “할복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준의 장례를 마친 이상설과 이위종은 7월 19일 미국에서 온 윤병구·송헌주 등과 함께 3일간 영국을 방문하고 8월 1일에는 2주일간 예정으로 미국으로 갔다. 광무황제의 밀명에 따라 유럽 각국 정부와 미국에 고종이 을사늑약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 등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헤이크 득사들의 활동을 보도한 만국평화회의보 / 덕수궁 돈덕전에서 고종의 퇴위를 요구하는 일본군
미국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은 미 대통령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9월 1일에 다시 헤이그로 와서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임시로 묻힌 이준의 유해를 뉴브다이컨 묘지로 옮기고, 9월 5일경 다시 출발하여 파리·베를린·런던·페테르부르크 등지를 연이어 방문하며 구국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이상설은 미국으로 떠나고 이위종은 러시아로 향함으로써 헤이그특사들의 구국외교활동은 공식 종료되었다.
일본은 특사 파견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빌미였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신들을 통감부로 불러들여 황제가 물러나게 하도록 지시했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필두로 대신들은 광무황제를 찾아가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고 압박하였다. 특히 시종원경 윤덕영은 일본인 관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열하고도 집요하게 황제의 양위를 강박하였다. 결국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는 “이제까지 짐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필요한 적재의 인물을 만나지 못한 듯하다”며 칙령을 발표하고 7월 20일에 왕위를 아들 순종에게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광무황제 강제 퇴위 사실이 알려지자 7월 17일 서울 시내 군중들이 들고일어났다. 7월 18일에는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그날 밤 9시경에는 많은 시민이 종로에 집결해 황궁앞으로 시위 행진했다. 애국지사들은 가두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불같은 연설을 토해 내었다. 밤 11시경에는 왕궁을 에워싸고 결사회(決死會)를 구성했다.
7월 19일 오후 5시, 다시 한국 군인 100여 명이 군영을 탈출해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밤에는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문사(國民新聞社)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했다. 7월 20일 아침에는 ‘결사회’를 표방한 군중이 서소문 밖 총리대신 이완용의 저택을 불살랐으며, 시위보병대 병사 약 30명이 종로 순사 파출소에 총격을 가했다. 21일 밤 10시경, 결사회원들은 내무대신 이지용(李趾鎔)·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및 그의 형 이근호(李根澔) 등 친일 고관들의 저택에도 불을 질렀다.
헤이그 특사사건은 국권을 빼앗긴 것이 얼마나 어이없이 쉽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데 반하여 이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헤이그특사 사건은 국권회복의 길고도 어려운 과정의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