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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한 아론의 축도(민6:23-27)-2026.5.31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렀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고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축복하는 내용까지 친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는 통로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복을 유통시키는 대리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복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일군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 될 터인데 굳이 이런 절차를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그런 질문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추론해 보면, 영적인 질서와 권위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광야라는 거칠고 험난한 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이끌어가시는데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당신이 작정하신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는 당신이 세우신 지도자들을 허수아비처럼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혹은 리모콘 작동하듯이 사용하시지도 아니하십니다. 당신이 세우신 제사장들을 통하여 복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지도자를 존중하고 영적인 권위에 순복함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들도 중보자로서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장차 대제사장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학습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의 말을 전하는 사람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었지만 복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복의 통로는 사람이지만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통하여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존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알다시피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직접 유통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을 통하여 유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세를 소외시키지 아니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전달하시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배려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도 가끔 선행을 베풀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명절이나 기념일에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가 있지요. 금전적으로 봉양하고 싶을 때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자기가 준비한 돈이라도 상대방의 배우자를 통해 전달하면 훨씬 더 큰 감동이 되고 모양새도 좋습니다. 시댁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다면 며느리가 드리는 것이 분위기가 좋고, 친정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다면 사위가 드리는 것이 훨씬 보기에도 좋고 모양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통하여 복을 유통시킵니다. 본문은 구약 아론의 축도요, 신약 바울의 축도는 고린도후서13장13절입니다. 굳이 아론의 축도와 바울의 축도를 비교한다면 구약에 희미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신약에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3장13절의 축도는 지금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근거가 되고 실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축도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구약의 축도와 신약의 축도 사이에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구약 아론의 축도의 신관은 성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약 축도의 신관은 성자로부터 시작되지요. 그래서 지금 목사님들이 축도하는 양식도 성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우월적인 순위가 아닙니다. 중요도의 순서도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 성부를 알기 때문에 성자 예수님의 은혜를 먼저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초점이 성자 예수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관심도 예수요, 성령 하나님의 관심도 예수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이 가득하지만 본문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하기에 좋은 구절입니다.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표현은 그렇지만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3가지 얼굴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직접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편이십니다. 구체적으로 삼위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1) 성부 하나님의 지키시는 복입니다(24절)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주신 복을 잘 지켜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는 복도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미 애굽에서 나오는 것도 복이요, 이제 광야를 통과케 하실 것도 복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장차 들어갈 것도 복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의 스케줄 속에 들어있는 큰 복들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중에 복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광야를 통과 함에 있어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광야를 통과하면서 그들이 받아야 할 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지켜주시는 복입니다. 지키신다는 히브리어는 ‘샤마르’입니다. ‘샤마르’는 ‘울타리를 치다’, 혹은 ‘파숫꾼이 밤을 세워 감시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눈동자처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실지라도 지키심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신 복도 중요하지만 지켜주시는 복도 너무나 소중한 복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마실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을 짓고 버틸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일교차가 심해 밤과 낮을 버티기가 곤혹스럽습니다. 또한 사람을 헤치는 전갈이라든지 불뱀 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변에 대적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한두 달에 통과할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이 년에 통과할 곳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최소한 광야에서 사십 년을 버텨야 합니다. 때문에 자기들의 재간으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도우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광야여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복 중에 복은 지켜주심을 받는 복입니다. 아무리 물붓듯이 부어 주시면 뭐합니까? 지켜주심이 없으면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려주실 터이니 축복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광야에서는 지켜주시는 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심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지켜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축복을 시편121편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시121:5). 그분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낮의 해도 이스라엘을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그들을 해치 못할 것입니다.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실 것이며 영혼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출입을 영원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2) 성자 하나님의 비추시는 복입니다(2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얼굴을 비춰주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자기 백성들에게 비추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는 감시 감독을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지켜주시는 복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지켜주시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얼굴을 이스라엘에게 비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눈동자처럼 지켜보시고 바라보신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비춰주시는 복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이 신하를 향해 얼굴을 들어 웃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관계 회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또렷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표현이지요.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봅니다. 따스하고 인자한 시선으로 주목하십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당신의 눈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비추어 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당신의 시선을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사랑하는 자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바라봅니다. 비추어 준다는 말이지요.
척박한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외면하신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40년 광야를 통과하는 내내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순적하게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눈빛을 돌리지 아니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시선을 돌리지 아니하십니다. 지속적으로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듯이 말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인간이 직접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은 죽음입니다. 이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원리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본 자가 없습니다(요일4:12). 하나님을 볼 자도 없습니다(딤전6:16). 하나님을 본 자는 죽습니다(출33:20).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볼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당신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신 것이지요(요1:18). 그분이 바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니시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분께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요1:14). 예수님도 친히 말씀 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입니다(골1: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나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4장6절도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신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얼굴을 비추신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되 자기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장차 오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축도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들에게 맡겨주신 축도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고린도후서13장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래서 민수기서 6장25절은 구속사적으로 볼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얼굴을 드시고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빛을 말입니다.
(3) 성령 하나님의 드시는 복입니다(26절)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신의 얼굴을 드사 평강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26절). 사실 24절이나 25절이나 26절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다른 표현입니다. 24절에서 지켜주시는 복이 25절에 비추시는 복으로, 비추시는 복이 26절에 드시는 복으로 환원되는 것이지요.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방식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드사 평강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복이 점점 더 적극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키시는 복에서 비추시는 복으로, 비추시는 복에서 드시는 복으로 적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드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시는 방식입니다. 지키신다는 표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러실 수는 없지만, 혹시 사각지대라도 있을까 봐 당신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들어서 보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단순히 지켜주신다는 표현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표현이지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당장에 달려가서 도와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는 당신의 눈동자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고정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안전과 승리를 약속하신 표현이지요.
어린아이는 엄마가 자기 곁에 있으면 최고의 안정감을 누립니다. 그래서 놀다가도 자꾸만 엄마의 위치를 살피고 존재를 확인합니다. 하다못해 화장실을 가도 엄마가 옆에 있음을 확인하려고 문을 열고 일을 봅니다. 그만큼 엄마의 존재가 큰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한 가지만으로 최고의 안정감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들어 계속 우리를 주시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주목하신다는 말이지요.
본문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24절은 성부 하나님의 복이요, 25절은 성자 하나님의 복이며, 26절은 성령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복은 모든 복을 예정하신 복이요, 성자 예수님의 복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복을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복이며, 성령 하나님의 복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것을 우리 가운데 정확하게 전달하시고 분배하시며 적용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복을 선포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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