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30주일설교 고린도전서1:1-9(불편한 이야기)
본문: 고린도전서1:1-9
제목: 불편한 이야기
오늘은 고린도전서1:1-9의 말씀을 가지고
“불편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불편한 이야기”
오늘부터는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처음 세워진 교회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가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라고 이름도 지어진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 놓고 본받을 수 있는 이상적인
‘초대교회’란 실제 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요?
허구일 공산이 큽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마냥 좋았던 시절은
얼마 길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의 능력 아래 있던 교회도
헌금 유용과 유사한 범죄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유대 사회를 넘어서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더 많은 문제와 갈등들을 경험했으리라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멋지기만 했을 것 같은 초대교회나 지금 우리의 세우고 일구는 교회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불완전함이 교회의 이상적인 진리 주장을 거짓으로 만든다는 발상은 성급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드러내는 온갖 문제는
이 세상에 삶의 뿌리를 내리면서도
이 세상과는 다른 삶의 논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들일 수 있습니다.
육체 안에 살아가지만 육체를 따라지가 않는 그리스도인들(고후10:3)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신앙을 드러내는 삶의 마당이면서
동시에 신앙을 위협하는 도전의 원천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편안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다수의 대중과 달리,
교회에서는 익숙한 기존의 가치관이
복음이라는 새로운 가치관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삶의 온갖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 이 세계의 가치에 익숙해진 이들이
복음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나고
교회라는 새로운 사회에 들어왔을 때
벌어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세상 속의 교회가 경험하는
이런 몸부림의 가장 적나라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복음과 유대적 전통의 마주침을 그려냈다면,
고린도전서는 복음을 받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세계 속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갈등을 포착합니다.
로마서나 지난번 살펴보았던 갈라디아서는
복음과 유대적 관행과의 갈등이라면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고린도전서는 세속적 관행과의 갈등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죽 훑어보면, 교회에서 생길 수 있는
온갖 문제가 죄다 망라된 그야말로
‘교회 문제의 종합 선물 세트’같습니다.
바울에게서 ‘세속적’이기 짝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정작 신자들의 영적 자만이 하늘을 찔렸다는 사실은
이런 상황을 더욱 역설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그만큼 친숙하기도 합니다.
‘음행’의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조차 용납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5:1).
고린도 교회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울의 이런 좌절감은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는 판이 되었다‘는
오늘날 우리의 좌절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옛날이 오늘과 같다고 그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초대교회‘는
그저 모방하기만 하면 되는 완성품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고린도에 생겨났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복음을 받고
그 능력에 참여한 사람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죄의 증상‘으로
힘겨워하던 공동체의 사람들입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읽는 우리의 관심은
그저 시시비비를 가리는 올바른 교훈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굴곡진 족적을 더듬으며
그 ’골치 아픈‘ 삶 속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말씀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편한 이야기 시작하기(1-3절)
고린도전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야단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격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하고
절절한 호소의 분위기를 타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달라지는 몸짓이나 말투는
모두 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를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는 한 지역 교회에 발생한
구체적 문제들을 다루는 실천적 훈계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그만큼 쓰기 힘든 편지입니다.
불편한 이야기는 언제나 힘듭니다.
욕하고 끝내면 제일 간단합니다.
목회자가 관계의 판을 깨는 감정 폭발은
신자의 회복과 건강을 위한 선택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신자들을 마주합니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쓴소리는 늘 조심스럽습니다.
다소 애매해진 관계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너무 날카로운 소리는 오히려 관계를 망칠 것이고,
지나치게 나긋나긋한 소리는 되레 역효과가 날 것입니다.
신자 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돌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진퇴양난에 가까운 상황,
이것이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바울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시작하는 바울의 언어는 매우 신중합니다.
인사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편지를 받아 읽을 신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 단락만 읽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핏 영화 제목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착각할 만큼 바울의 언어는 기쁨과 감사로 넘칩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무척 어렵습니다.
마음을 완전히 감추는 일도 힘겹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시작하는 훈훈한 언어 속에서도
여기저기 뼈가 느껴집니다.
바울은 당시 관행에 따라 보내는 사람,
곧 바울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 부르심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더해집니다.
물론 신자들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면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편지를 받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바울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전과 다릅니다(9:1)
또 공동체의 여러 문제를 두고도
따끔한 훈계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자,
고린도 교회 설립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훈계를 위한 권위도 필요했겠지만,
자신의 위상 자체도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 부르심은 자발적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위탁하신 임무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는 거절할 수 없는 강제소환이며,
이를 거부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화를 자초할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의해서 파송된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입니다.
인간의 권위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 권위에 의해 파송된 사람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다양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갑니다.
그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편지 시작에 이것을 보여줌으로 자신의 조언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고린도 지역에 뿌리내린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고
또한 거룩한 자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거룩해졌다는 이야기이고
더 나가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를 편지의 수신자로 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도 수신자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교회” 중에서
일부 성도입니다.
이 편지 전체에서 드러나는 한 문제는
신자들의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오만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사람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려 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과
십자가 복음이 갖는 실천적 여러 행동을 분명히 하며
주변 사회의 기대나 가치에 휘둘리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세상은 자기중심적이고 경쟁적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거룩한 삶에 대한
초월적 열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존재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신자들을 향해,
복음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숙고하면서
이 부르심에 어울리는 삶을 회복하라고 호소합니다.
성도들을 위한 감사(1:4-9)
본격적으로 걱정거리를 풀어 놓기 전에
교회를 생각하며 드리는 감사의 언어에도 현 상황을
바라보는 복잡한 속내가 묻어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신자들에 관한 감사 속에는
말이나 지식 또는 그보다 일반적인 은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등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앞으로 바울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바로 그 고민의 주제들입니다.
감사의 주된 이유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은 “모든 면에서” 풍성해졌습니다.
“모든 면”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모든 말과 모든 지식”을 가리킵니다.
말과 지식을 통해 풍성하게 나타난 은혜는
그들 중에 “그리스도에 관한---증거가---확실하게
자리 잡은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주신 증거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현 문맥에서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내용은,
곧 ’십자가의 말씀‘으로 요약되는 복음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의 견고함과 풍성한
말과 지식의 은사는 신자들이 “어떤 은사에도
부족함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미래에 대한 애타는 기다림은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은 예수님의 “계시와 나타나심”
곧 그분의 현존입니다.
지금 신자들은 주님의 부재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그들과 함께하신 것을 고대했습니다.
바로 이날이 신앙의 끝 목표입니다.
영적 투쟁의 상황에서 신자들의 종말론적 기다림은
성도다운 믿음의 자태를 잃지 않으려는
역동적 몸짓, 곧 현재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지키려는 의식적 노력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를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미래를 향한 인내의 삶은 하나님의 선제적 은혜로 시작되고, 그 은혜에 의해 지탱됩니다.
바울은 교회에 주어진 풍성한 은혜에 주목하며 성도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9절)을 상기합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의 목적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의 사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고,
이 메시지가 본연의 효력을 발휘하여 그들은 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복음에서 구원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가 “많은 자녀 중 맏아들이 되시는” 것,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예정하신 집안 구원의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
곧 자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친히 그의 신자들을
흠 없는 자로 서도록 만드실 것입니다.(8절)
복음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되고 성취되는 이야기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편지의 전체 흐름에서 이 감사 단락은
쉽지 않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현재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감사의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성도들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 놀라운 일은 바울의 감사 제목들이
이후의 논증에서 그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바로 그 사안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 곧 ’은사“의 풍성함을 두고 감사합니다(4-5절).
하지만 공동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원인 하나가 바로 은사에 대한 성도들의 빗나간 태도입니다(12-14장).
그래서 감사가 끝나기 무섭게 바울은
말과 지혜에 대한 고린도의 신자들의 피상적 집착에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들이대며 신자들을 나무랍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금 바울은 감사와 칭찬을 가장하여
신자들의 일탈을 풍자하는 중일까요?
하지만 풍성한 은사에 대한 바울의 감사가 풍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흔적은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고린도 신자들들의 열정에서 보듯 풍성한 은사 자체는
누가 봐도 마땅한 감사의 주제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이 은혜를 수용하고 활용하는 태도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들어납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들은
그 자체로 감사의 제목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신자들에게는
그 “은혜를 헛되지 받지 않는”태도,
곧 하나님의 은혜를 그 본래 의도에
맞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요구됩니다.(고후6:1)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감사 속에는
불가불 그 귀한 은혜를 이기적으로 남용하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받은 많은 은사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써,
‘왜 하나님께서 거저 받은 것을 자기 자랑거리로 삼느냐’는 꾸지람을 미리 내비치는 셈입니다. (4:7)
그렇게 보면 인사말과 감사에서 바울이 유난히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1절부터 9절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반복하여 언급합니다.
1절과 3절처럼 의례적인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
모으려는 의도가 뚜렷합니다.
이 역시 분열과 갈등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현재 안타까운 상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종일관 교회의 유일한 기초(3:10-11)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상기해 주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일의 실천적 의미를 풀어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왜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깁니까?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여서 생기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하려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게 되었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지 못할 때 우리는
불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불편한 이야기를 잘 들어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