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회 목포문학상』 동화부문 당선작
「책상 밑 도깨비」
이명하(경기도 용인시)
세상에는 도깨비가 많나 봐요. 어느 날 민구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뭘까요?”
선생님이 질문을 했어요.
“저요, 저요.”
“꽃, 봄바람, 새싹, 고양이털, 노랑나비, 아기웃음, 아기똥풀…….”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소리를 질러댔어요. 민구도 꽃, 꽃 하고 외치다가 입을 다물었어요. 선생님이 칠판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민구는 아직 글을 잘 못 읽는답니다.
‘정말 싫어, 어려워. 저 글자들 몽땅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무언가 민구 눈앞으로 휘익 지나갔어요. 다른 아이들은 지나가던 봄바람이 들어왔나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도깨비였어요.
바람같이 재빠른 도깨비가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글자를 먹는 거예요.
‘어쿠, 무서워.’
민구는 책상 밑으로 숨었어요. 선생님이 칠판의 글자를 지울 때마다 그것을 잡아채듯 먹어치우는 도깨비가 정말 무서웠어요.
“민구 뭐하니?”
“선생님, 칠판 옆에 도깨비가 있어요.”
민구는 책상 밑에 숨어서 무릎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개미소리만해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어요. 민구는 무서워서 한 눈을 감고 빠끔 고개를 내밀었지요.
“으이그.”
순간 도깨비와 딱 마주친 거예요.
도깨비는 막 꽃이라는 글자의 ㄲ을 먹는 중이었어요. 그 꽃은 붉은 봉숭아꽃인가 봐요. 도깨비의 입술이 발갛게 물이 들었네요. 아까는 분명히 파란 입술이었는데 말이지요.
민구가 무서움을 참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눈이 마주친 도깨비는 못 본 척 휙 고개를 돌렸어요.
“여러분, 선생님이 글자를 지울 때마다 크게 하나 하나 따라 읽어봐요.”
도깨비는 ㄲ ㅗ ㅊ을 차례로 먹은 다음에 이제는 봄바람의 ㅂ ㅗ ㅁ을 먹었어요.
선생님이 고양이털의 ㄱ을 지우기 시작하자 도깨비는 잠시 서 있었어요. 도깨비는 고양이털은 먹지 않았어요. 그 대신 선생님이 지우는 칠판지우개를 잡아당기네요.
“칠판이 잘 지워지지 않네.”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도깨비는 붉은 입술을 날름거리며 다음 글자를 기다리고 있군요.
“여러분, 선생님 따라 크게 읽어보세요. 노랑나비!”
“노 랑 나 비.”
선생님은 ㄴ ㅗ ㄹ ㅏ ㅇ ㄴ ㅏ ㅂ ㅣ 차례대로 하나씩 지워나갔어요. 도깨비는 나비는 먹나 봐요. 팔랑팔랑 긴 혀를 내밀어 마치 사마귀가 먹이를 채가듯 글자를 먹어 치우고 있어요.
민구는 도깨비가 자기를 모른 척 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했어요. 왜냐하면 민구는 항상 괴물을 많이 그리거든요. 아침부터 잠잘 때까지 말이지요. 일기장에도 글씨는 안 쓰고 괴물만 잔뜩 그려 넣었지요.
할머니 지키는 괴물, 엄마 지키는 괴물, 동생 지키는 괴물.
머리는 마구 헝클어지고 광대뼈 있는 데까지 입은 쫙 찢어져 있어요. 이빨은 날카롭고 무지 커요. 또 혀는 삼심 센티미터 자 보다 더 길어요.
그 괴물을 보던 할머니가,
“이거 도깨비 아이가?”
하고 물었지요.
“아니에요. 우주괴물이랑 공룡괴물이에요.”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었어요.
“아니다. 이건 도깨비다.”
“도깨비는 뿔이 있어야 하잖아요.”
“뿔은 감추면 된다.”
그때부터 민구는 도깨비도 괴물일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도깨비는 분명히 남자일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왜냐하면 민구랑 같이 집을 지켜야 하거든요. 아빠가 없는 집에 남자라고는 민구밖에 없어요. 민구는 항상 집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무시무시한 괴물을 그리는 거예요.
그런데 딱 마주친 도깨비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버린 거예요. 민구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지요.
“선생님!”
민구는 큰 결심을 하고 책상 밑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도깨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어요.
“선생님, 저기이요.”
“어머나! 우리 민구가 나왔네. 그래, 무슨 일이지?”
1학년이 시작된 지 한 달 동안 글씨만 쓰면 어렵다고 책상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민구 때문에 선생님은 골치가 아팠어요.
사탕을 줘 봐도 소용없었어요. 심지어 교장 선생님까지 교실에 와서 민구를 달래보았지만 허탕이었어요. 그런 민구가 스스로 책상 밑에서 나오니 놀랄 수밖에요.
“선생님이 글자를 지울 때마다 도깨비가 다 먹어치워요.”
민구는 칠판을 가리키며 말했지요.
“호호. 그랬구나. 그럼 선생님이 글자를 안 지우면 도깨비가 되게 배고프겠네.”
“…….”
민구는 슬쩍 도깨비를 바라봤어요. 도깨비가 잔뜩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네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응.’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럼 아주 아주 천천히 지울게요. 도깨비가 지루해서 글자를 먹기 싫도록 말이에요.”
선생님은 굼벵이가 굴러가는 것처럼 손을 천천히 움직여 글자를 지우기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천천히 따라했어요. 마치 느리게 말하기 게임 같았어요. 아이들 입이 헤벌쭉 벌어졌어요. 생각보다 재밌었거든요.
“자, 아 기 웃 음. 천천히 따라 해봐요.”
민구는 동생이 웃을 때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입으로 한번 중얼거려 봤어요. 아 기 웃 음. 몸이 아픈 아빠는 떠났지만 동생은 무럭무럭 자랐어요. 만날 웃었어요.
갑자기 도깨비가 가르르 갈갈 웃기 시작했어요. 아기처럼요.
“선생님, 아기웃음은 지우지 말아요.”
“왜?”
“글자를 지우면 도깨비가 막 화낼 지도 몰라요.”
민구가 말하자 선생님이 다시 빙긋이 미소를 지었어요.
“아, 그래? 그러면 말이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요?”
“도깨비한테 글자를 먹지만 말고, 글자를 따라 읽어보라고 하면?”
민구는 고개를 저었어요.
“왜? 도깨비가 싫대?”
“도깨비는 글자를 먹는 것만 좋아한대요.”
“그럼 도깨비 대신 민구가 따라 해보면 될 거 같은데?”
“…….”
“민구야, 책상 속에서 나온 김에 글자 한 번 읽어 볼까? 자, 이번에는 아 기 똥 풀.”
‘아기똥풀?’
민구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아기가 똥을 누면 풀이 되나? 아이고 웃겨라.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도깨비가 붉은 입술에 스윽스윽 침을 바르고 있네요. 배가 고픈가? 하기야 음식을 먹다가 중간에 그치면 더 배고플 수도 있는 거니까요.
‘빨리 읽어, 네가 읽어야 선생이 글자를 지울 거 아니야? 나 빨리 먹어치워야 돼. 아기똥풀은 내가 되게 좋아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거처럼 눈을 부릅뜨고 민구를 바라봤어요.
민구는 항상 말은 또박또박 잘했어요. 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가 나왔어요. 글자를 모르니까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 민구, 자 읽어보자, 아 기 똥 풀!”
민구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어요. 도깨비도 눈을 더 쪽 찢어 올라가게 하고 민구를 노려봤어요.
“아 기 똥 풀.”
“다시 한 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아 기 똥 풀.”
“잘했어. 민구야, 글자 읽는 게 어렵진 않지?”
선생님은 아기똥풀을 지우며 말했어요. 민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기에다가 똥에다가 풀을 합하면 아기똥풀이 되잖아요. 글자는 어려운 줄만 알았는데 쉬운 글자도 있네요.
민구는 자꾸 아기똥풀, 아기똥풀 하고 중얼거렸어요. 아기가 노란 똥을 싸면 그 똥에 풀이 나는데 그게 바로 아기똥풀? 이렇게 생각을 하니 아기 글자도 쉽고 똥 글자도 쉽고 풀 글자도 쉽게 느껴졌어요.
민구는 다른 글자도 읽어보려고 칠판을 바라봤지만 이제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네요. 도깨비 뱃속으로 다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먹보 도깨비는 냠냠, 아기똥풀 글자를 쭉 빨아먹고 있네요. 칵. 순간 도깨비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어요. 입에 안 맞았나? 똥냄새가 지독했나 봐요. 민구는 좀 고소했어요.
드디어 국어 읽기 시간이 끝났어요. 도깨비는 이제 배가 산만하게 불렀어요. 아직 1학년 1반에 먹을 것이 너무 많아 1학년 2반으로 가는 것이 언제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도깨비는 책상 밑으로 잠시 낮잠을 자러 들어갔어요.
크렁크렁.
자고 있는 도깨비가 코까지 골고 있네요. 민구는 자기 발에 자꾸 거치적거리는 도깨비를 뒤꿈치로 쿡쿡 찼어요. 자느라고 몸이 늘어져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종소리가 들리고 다시 공부시간이 됐어요. 선생님이 칠판에 숫자를 쓰기 시작하네요.
‘어, 어렵다. 모르겠다.’
민구는 또 책상 밑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구부렸어요. 책상 밑에는 도깨비가 불룩 나온 배를 위로 하고 자고 있어요. 가끔씩 퓨퓨 하고 숨을 내쉴 때 아기똥풀 냄새도 나고 향긋한 꽃 냄새도 났어요.
“민구야, 이제 책상 밑으로 그만 들어가야지. 답답하잖아. 혹시 도깨비라도 숨어 있으면 어떡하니?”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어요.
“여기 도깨비 있어요. 정말이에요. 근데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래? 그럼 도깨비랑 같이 공부할까? 덧셈, 뺄셈도 재밌는데.”
“도깨비는 글자만 먹을 거예요. 숫자는 먹을 지, 안 먹을 지 잘 몰라요.”
선생님은 말문이 막혀서 잠시 가만히 서 있었어요. 그 순간을 이용해서 민구는 책상 밑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어요.
“야, 일어나 봐.”
민구는 드르렁 코를 고는 도깨비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꽉 집었어요.
“으윽, 도깨비 살려.”
눈을 뜬 도깨비는 힐끔 민구를 쳐다보고는 먹을 게 없나 칠판부터 살폈어요.
“어 저거 뭐야? 저거 꼬부랑거리는 거.”
“숫자야. 내가 글자보다 더 싫어하는 거야.”
“와, 꼬불꼬불 맛있겠는 걸. 간식으로 먹어야겠다.”
말릴 틈도 없이 도깨비는 휘익 하고 어느 새 칠판 앞으로 나아갔어요.
선생님이 10+24= 23+2= 여러 개 문제를 칠판에 적었어요.
“누가 나와서 풀어볼까?”
아이들이 손을 들었어요. 맨 먼저 혜진이가 나와서 10+24=34라고 정답을 적었어요. 옆에서 기다리던 도깨비는 정답 34를 날름 먹어치웠어요.
“선생님, 자꾸 답이 지워져요.”
“그럼 천천히 다시 적어 봐.”
혜진이는 정성스럽게 34를 적었지만 순간 도깨비가 또 정답을 먹어치웠어요.
“선생님 칠판에 도깨비가 있나 봐요. 쓰면 자꾸 자꾸 지워져요.”
선생님이 보기에는 혜진이가 답을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혜진이에게 나중에 다시 풀면 된다고 말하고 다른 애를 시켰어요.
혜진이는 속이 상해서 교실 여기저기를 보면서 눈을 흘기다가 책상 밑 민구를 봤어요. 민구는 책상 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그 순간 혜진이도 정말 책상 밑으로 들어가고 싶어졌어요.
선생님이 뒤돌아 서 있는 사이에 혜진이도 샤샤샥 책상 밑으로 들어갔어요.
이게 웬일인가요. 책상 밑은 숨기에 딱이에요. 선생님 말도 들릴락 말락 해요. 아이들 발모양도 관찰하고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 같은 것도 보이고 정말 신기한 게 많았어요.
“선생님, 혜진이도 책상 밑으로 들어갔대요.”
아이들이 말했어요.
“혜진아, 너까지 뭐하니? 나와서 다시 문제 풀어 봐도 돼.”
선생님은 혜진이가 문제를 못 맞춰서 뽀로통해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오라고 손짓했어요. 하지만 혜진이는 고개를 저었어요. 이렇게 아늑한 줄 미처 몰랐어요. 집에서도 가끔 침대 밑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엄마한테 혼날까봐 한 번도 못해봤거든요.
민구는 괴물그림을 다 그린 다음, 문득 고개를 들었어요. 건너편에 있던 혜진이랑 눈이 딱 마주쳤어요. 어, 혜진이도 책상 밑으로 들어갔네. 혜진이도 공부가 어려운가? 혜진이는 민구를 보고 씨익 웃었어요. 미안해서요. 솔직히 민구가 책상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좀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거든요.
도깨비는 간식은 조금만 먹어야 한다는 엄마도깨비 말이 문득 떠올랐어요. 그래서 다른 애가 푼 정답은 먹지 않았어요. 사실은 꼬불꼬불 모양은 신기했는데 맛은 좀 그랬어요. 아무 뜻이 없잖아요. 숫자는 숫자일 뿐이지요.
휘익.
“야, 너 왜 벌써 들어와?”
“별루야.”
“뭐가?”
“꼬부랑 숫자, 맛도 없고. 색깔도 없어서 싫어”
“그래도 숫자는 셀 수 있잖아. 그거 되게 중요한 거야.”
민구는 할머니가 물건을 살 때 손가락으로 셈하는 것을 많이 봤어요.
“우리 민구는 할미처럼 손가락으로 셈하면 안 돼. 꼭 연필로 셈해야 돼.”
할머니 말이 떠올랐어요. 갑자기 책상 밑에 들어와 있는 것을 할머니가 알면 속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깨비 너는 왜 먹기만 해? 글자는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는데, 또 숫자는 셈할 수도 있는데. 왜 다 먹기만 하지?”
“비밀이야.”
“그래?”
“그럼 넌 왜 책상 속으로 들어와 있지? 다른 애들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비밀이야.”
“그래?”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어요. 그 순간 건너 편 책상 밑에 있던 혜진이가 아악, 소리를 질렀어요.
“도깨비다.”
혜진이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도깨비야, 도깨비 하면서 다시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책상 밑에서 지르는 비명은 들리지 않나 봐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선생님도 숫자 문제 풀이를 해주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도깨비는 혜진이의 비명을 들으며 귀를 막았어요.
“나는 저 소리가 가장 듣기 싫어. 다들 나를 보면 저렇게 소리를 질러댄단 말이야.”
“네가 도깨비니까 그렇지. 봐봐, 너는 글자도 먹어 치우고 숫자도 먹어치우잖아. 우리는 그런 거 공부하지, 먹지는 않아. 그래서 도깨비를 보면 저절로 소리 지르는 거야.”
“그런 거야? 나는 배가 불러서 좋기만 한데. 이렇게.”
도깨비는 배를 두드리면서 말했어요. 그 바람에 뭔가 방귀 같은 게 뽕 하고 나왔어요.
어, 그런데 방귀 따라 나오는 건 꽃 향기였어요.
“아까 먹은 꽃이 소화가 됐나 봐. 향기 좋지?”
“응.”
“그럼 이제부터 잘 봐. 크크 끄윽 컥!”
도깨비는 트림 같은 것을 했어요. 노랑나비가 도깨비 입에서 나왔어요. 팔랑팔랑, 책상 밑을 날아다녔어요.
“와. 나비, 예쁘다.”
“다시 잘 봐. 끄윽 끄윽!”
신이 난 도깨비는 다시 입을 벌렸어요. 이번에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더니 아기똥풀이 막 피기 시작했어요. 책상 밑은 순식간에 노란 풀밭이 됐네요.
민구는 갑자기 꽃이 그리고 싶어졌어요. 노트를 집어 들었어요. 괴물만 잔뜩 그려져 있던 노트를 지우개로 박박 지웠어요.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이제 민구의 그림 속에서는 꽃도 피고 나비도 날아다니고 있네요. 물론 동생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그렸어요. 동생을 그리니까 할머니도 그리고 싶어졌어요. 엄마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이 아팠던 아빠가 풀밭에 누워 웃고 있는 모습까지 그렸어요.
도깨비는 도깨비대로 신이 나서 자꾸 끄윽끄윽 거렸어요.
“이제 그만 해, 더 이상 그리기 힘들단 말이야.”
“그래?”
“이제 배도 부르고 돌아갈 시간이야.”
“벌써?”
“비밀하나 말해줄게. 우리는 먹는 게 공부야. 먹으면 뱃속에 가득차고 뱃속에 가득찬 글자나 숫자들은 슝슝 머릿속으로 들어가거든. 도깨비들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려고 하잖아. 사실은 그게 다 공부하는 거야. 먹다보면 이렇게 트림도 하고 방귀도 나와. 머릿속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건 아주 아주 맛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구는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도깨비가 섭섭할까 봐요.
“그럼 나도 비밀하나 말해줄게. 내가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건……. 무서워서 그래. 다 무서워서. 글자도 무섭고 숫자도 무섭고. 어려운 건 다 무서운 거야. 그래서 괴물만 그렸어.”
도깨비도 알 듯 말 듯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 바람에 모자로 지그시 눌렀던 뿔이 툭 튀어나왔어요.
“어, 정말 도깨비다.”
혜진이가 또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네요.
“이제 나 갈 시간이야. 공부를 많이 했더니 오늘은 되게 배가 부르네.”
도깨비는 말릴 틈도 없이 민구의 그림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어요. 민구의 손등에 노랑나비가 앉았어요. 동생 웃음소리도 들리구요. 민구를 떠난 아빠도 풀밭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네요. 봄바람이 불자 아기똥풀이 민구의 발가락을 노란 얼굴로 간질였어요.
민구는 노 랑 나 비, 아 기 웃 음, 아 기 똥 풀 하고 중얼거렸어요. 그러자 글자가 그림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민구는 글자를 따라 쓰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어요. *
『제3회 목포문학상』동화부문 예비심사평
예심위원 윤삼현(동화작가)
제 3회 목포문학상 동화부문 응모작 60여 편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대체로 작품의 유형이 요즘 세태를 반영하듯 다문화가정문제, 외모문제, 부모갈등,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편부모하의 심리적 갈등, 빈부대립문제 그리고 용기가 부족한 심약한 아동의 불안감 극복과정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동물소재의 풍자적 우화, 사업실패로 변화된 환경에의 적응문제도 눈에 띄었다.
우선 응모작의 공통된 문제점은 지나치게 편협한 소재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한계를 노출하고 마는 아쉬움이다. 울림과 반향을 확대시켜 보편적 감동을 증폭시키는 동화의 가치와 기능을 살리는 수고가 요청되었다. 지나치게 학교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상사, 가정의 사소한 갈등, 친구와 겪는 밋밋한 대립 등이 일상적이어서 주제의식이 얕아 보이는 게 흠으로 드러났다. 최근 동화가 보여주는 몰개성과 신선함의 결여가 응모작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땅히 예술성, 재미성, 교시성을 두루 만족시키는 명품 동화를 선보이려면 새로움과 독자적 개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강점을 보여 본심에 올릴 만한 작품으로는 다음 다섯 작품이다.
<엄마의 스마트폰>은 요설적이지 않고 간결체 문장의 장점이 뚜렷하다. 언어의 호흡이 살아있어 묘미가 있고, 스토리 전개에 무리가 없다. 가난한 환경을 극복해가는 희망적 분위기를 잘 살렸다.
<다로의 행복했던 날들>은 서사적 호흡이 만만치 않고 입심도 꽤 걸어 보인다. 고양이와 아기 오리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고 둘의 동행이 시종 시선을 끄는 가운데 죽음으로 가는 종결이 슬픈 빛깔로 여운을 남기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열쇠>는 사업실패로 힘들어진 주인공의 시야에 비치는 세계를 바늘 같은 언어로 쿡쿡 눌러찍듯 그려냈다. 결손가정의 심리묘사와 대화문도 주목을 끈다. 두 주인공의 동일화에의 결말을 끌어내는 솜씨도 만만치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당당구리가 돌아오면>은 유연한 문장과 재치있는 대화문이 시선을 끌었다. 아이들 사회의 단면을 다루되 진부하지 않고 끝까지 읽히는 힘을 보유한다. 소심한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는 심리적 과정도 무리가 없다.
<책상 밑 도깨비>는 문자 미해득인인 어린 주인공의 해학적 표정, 그 자체가 동화적이다. 도깨비와의 만남의 설정도 개성적이며 문장이 안정되어 있고, 유아적 호흡으로 재치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한 것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