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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침곡산 덕동문화마을 | ||||||||
때 아닌 동해안 태풍경보와 폭우예보가 염려되었는지 포항에서 전화가 왔다.
용계정은 1687년(숙종 14년)에 준공, 애초 이름을 사의(四宜)라 했으니 이는 ‘사계절 변함없는 만상의 조화’를 뜻한다. 하지만 1778년 현 위치 상단부에 세덕사(世德祠)가 건립되어 많은 정자가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중 용케 살아남은 사의정은 그 후 용계정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현판은 지족당(知足堂) 최석신(崔錫信)의 글씨다.
소장품은 이 관장의 5대조로 진사를 지낸 분의 말안장, 세덕사현관이 착용한 쪽물을 들인 예복. 그리고 각종 전적과 서간문이 즐비하다. 130년간 보관되었다는 마을 방명록인 첨배록(瞻拜錄)과 함께 나온 옥수수대로 만든 효자손은 옛사람의 체취로 뭉클하다. 내용인즉 ‘아침에 다녀간다. 말 한 필과 노비 몇몇이 함께 다녀간다’ 등 단순하지만 일상의 삶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기록이다. |
마을숲 복원대상인 섬솔밭·송계숲·정계숲
▲ 보호수인 누운향나무. |
다시금 용계정으로 향하자 세덕사지(世德祠址) 표석 뒤로 보호수인 은행나무 암수 두 그루(1803년생), 다홍빛 꽃의 목백일홍(1806년생), 누운 향나무(1837년생)가 수려하다. 정확한 나무의 식재연도가 문헌기록으로 전하니 이 또한 기록문화요, 역사의식이다.
조경과 함께 경관 예찬은 일찍이 구곡(九曲), 삼기(三奇), 팔경(八景)으로 나뉘었으며, 덕연구곡(德淵九曲)의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그 마당에 마모가 심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주변 덕인사지에서 출토된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일행은 이제 계곡 위의 솔밭으로 갔다. 섬솔(도송)밭은 풍치와 방풍림 역할을 동시에 지녔다. 한편 원래 산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의 물 중 한 곳을 늪으로 만든 친환경숲-바이오톱(Bio Top) 조성지인데, 다양한 수생식물 중 노랑어리 연꽃이 늪에 수를 놓았다. 이로써 덕동 마을은 옛문화와 함께 생태마을 자원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대체 바이오톱이 무엇이란 말인가.
▲ 덕동마을 소나무숲(139×87cm). |
때마침 도착한 포항 생명의 숲 사무국장 장정선씨와 이 관장 댁에서 차를 나누며 일행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이도 공감한다. 문제는 관계당국이 마을분들과는 협의 없이 안내판을 임의로 제작, 세우고 간 것이다. 이에 개명 제안으로 ‘생명의 늪, 생명의 땅’ 등이 나왔다. 모쪼록 자연친화는 가장 쉽고 이해가 우선해야 할 것이다.
날이 어두워져 사정이 있는 정 교수와 이점동 선생, 장 국장은 되돌아가고 셋만 남았다. 남녀유별이라 이 선생댁에서 여성이 자고 길손은 홀로 정자에 머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고색창연한 정자의 운치와 경관, 그리고 풍류의 기회를 놓칠 분들인가. 씻기와 뒷일이 불편하다는 주인의 염려를 떼고 정자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정자는 평면 열 칸 중 여섯 칸은 대청이고 온돌방인데 방은 십여 명의 숙소가 될 만큼 넉넉하다. 뜻밖에도 정성껏 준비해온 이재란 선생의 다례(茶禮)와 깊은 맛의 와인 한 잔이 깃들인 밤. 흐르는 계곡물과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시간이라니.
한여름 저녁불을 끄고 대청에 누우면 스치는 솔바람과 밝은 달빛이 세속을 잊게 하고 사위에서 들리는 물소리, 벌레소리가 선경(仙境)에 이른다지만 오늘의 인연도 특별하다. 누가 가을밤 빗소리 듣는 정자 속의 다담(茶談)을 쉽게 경험할 수 있으랴. 믿건대 이곳 조상의 음덕이 길손들의 염원을 받아주고 열어준 행운이리.
평균연령 70대…미래 걱정된다
이튿날 아침, 밤새 추적이는 비는 태풍경보를 타고 드세진 느낌이다. 이 관장댁에서 부인(이옥주·70)이 마련한 아침상은 추어탕과 직접 심고 가꾼 채소로 자연채식의 무공해 별미를 맛보게 해 준다. 그런데 부부의 모습이 최소 10년 이상은 젊게 보인다. 일행 모두의 공감에 건강비결은 검약(儉約)과 소식(小食)이며 특히 물이 중요한 것 같다고 하나 자족하는 생활과 노동이 조화를 이룬 듯하다. 슬하의 5남매가 대구, 포항 근교에 살림을 냈으므로 항시 발걸음이 잦고 손자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는 노부부는 실로 다정다감하다.
이제 길손은 서두르기로 했다. 태풍 소식에 비 그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이상 며칠을 머물 이유가 없으므로 우산을 쓰고라도 화첩기행을 단행해야했다. 그런데 고깔에 우비를 쓰고 나타난 이희섭(李熙燮·57·용계정 유사)씨는 내 우산을 잡아채며 “공휴일엔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한가하고 마침 할 일도 없으니 안심하고 그림 그리소” 하며 내 사정을 헤아려준다.
마을 입구로 다시 내려가서 금줄이 둘린 당산나무를 만나니 귀목나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제단의 소나무와 함께 붙어있고, 주변 솔밭으로 금줄이 연결되어 있다. ‘전통마을 숲 복원’은 숲속전통제례의식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정월 대보름에서 해방 이후 8월15일로 일정이 변경되었으며, 제례를 지원하는 송계부가 기록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마을숲은 현재 200여 년 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또 마을 길목으로 오르자 유일한 점방(가게) 문에 ‘행복을 여세요’라는 어여쁜 글씨가 돋보여 마음이 기쁘나 상품진열대가 텅 비어있어 안타깝다. 이 가게 주인이 지금 내게 우산을 받쳐주는 이씨다.
▲ 애은당의 초가. |
마을의 중요문화재인 애은당(愛隱堂)을 찾자 안주인 이복림(李福林·80)씨가 맞아준다. 시아버지(이원경)가 약방을 열었던 집을 맏며느리가 5남매를 길러 내보내고 홀로 산다. 한켠의 초가집과 지붕 위의 박, 담장 아래의 장독이 옛 고향집 분위기다.
이원돌(李源乭) 가옥 여연당(與然堂) 또한 초가가 딸린 ㅁ자형 집인데, 벌꿀을 치고 있다. 밑그림을 그리는 동안 주인이 벌꿀차를 내와 비에 젖은 기분이 한결 가뿐하다. 온갖 먹거리와 농기구가 벽에 걸려있어 산골 농가의 현실이 실감난다. 그리고 바로 옆 담장으로 이어진 사우당(四友堂) 이희국씨 집은 옛 사대부의 권위와 상징처럼 마루가 높고 긴 一자형 건물로 앞산을 바라보고 앉았다. 그 길목 앞의 덕계서당(德溪書堂)은 추억의 비를 맞으며 비어있어 쓸쓸하다.
▲ 이원돌, 이희국 가옥 스케치(66. 5×25cm). |
점심은 어제 만난 이점동 선생 집에서 일행을 초대해와 근교의 과수원집에서 정성어린 대접을 받았다. 이제 마을에 돌아온 후 다시 화첩을 챙기는 것은 마을 전경을 살펴야 하는 일이 남은 까닭이다. 가을비 내리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바라본 자금산(紫金山) 자락과 천재봉(天癸峰), 그 아래로 펼쳐지는 솔숲의 경관은 천혜의 비경이요,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솔숲 뒤로 휘돌아가는 황금빛 논 앞으로는 계곡과 늪지가 마을을 품었다. 마을집들은 모두 계곡 넘어 동남쪽으로 앉았기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주산(主山)은 실제 뒷산인 침곡산(針谷山·720m)이 된다.
▲ 늪지의 노랑어리연꽃(33×24.5cm). |
그런데 우중이라 산을 오르기 어려워 여러 각도에서 마을을 조망해야 하는 형편이나 마침내 젖은 화첩을 품에 안고 다닌 지 서너 시간만에 밑그림을 담을 수 있었다. 결국 풀섶에서 풀독이 오르고 온 몸이 다 젖은 채 정자로 돌아오자 일행과 주민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실로 악조건이었으나 일행의 염려와 주민들의 협조로 그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화첩을 펼쳐 보이자 모두들 다행스러워하며 밝은 표정이다.
그러나 한편 이 아름다운 풍광과는 달리 마을에는 현재 27가구에 44명이 거주하는데 빈집이 늘어가는 추세다. 평균 연령이 칠십대인 노인들이 꾸려가는 현실과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에 젊은 출향인(出鄕人)과 문화재 당국의 관심이 요청되고 있다. 아무리 산천이 의구하되 마을은 생기가 돌아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샘이 솟듯 흐르는 물만이 썩지 않고 강으로 흘러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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