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박성은 리아입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성지는 죽산성지입니다.
죽산은 예부터 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천주교 박해 때에는 주변 교우촌의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산 관아에서 심문하고 고문한 뒤 처형하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이곳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이진 터'→'잊은 터'
이곳은 고려시대에 외적이 진을 쳤던 곳이라 이진터라고 불렸는데, 박해 당시에는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 '잊은 터'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참 슬픈 이름이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던 곳이 다시 '기억해야 할 터'로 되살아났답니다.
죽산 성지 조성은 1979년 죽산 본당에서 추진위원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94년부터 성지 부지를 확보해 조성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현재의 성당은 1997년에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14일 봉헌되었습니다.
죽산 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4위 순교자와 무명 순교자의 묘라고 생각합니다.
죽산에서는 기록을 통해 이름이 확인되는 순교자만 24위에 이릅니다. 순교자의 묘역에는 이 24위 묘와 함께 가운데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성역문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거룩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역문의 양쪽에는 순교자의 역사와 아픔을 기리는 시비와 순교 역사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석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선조들의 숭고한 신앙과 희생을 기리는 추모시와 역사적 유래가 새겨져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무명 순교자의 묘입니다.
이름을 남긴 순교자뿐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도 함께 기억하는 곳입니다.
죽산성지에서는 유난히 가족 순교가 많았습니다.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는 충북 진천 절골에서 네 아들을 키우던 부부였는데 오 마르가리타는 박해가 심해지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피신하다 붙잡혔고 남편 박경진 프란치스코 역시 밀고로 체포되어 죽산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여정문은 1867년 순교했는데, 아내는 남편과 함께 죽겠다며 스스로 잡혀갔고, 이를 본 15세 아들까지 부모와 함께 잡혀 죽산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또 최성철과 그의 아들도 함께 순교했습니다.
이 조형물은 순교자 현양탑 인듯합니다. 아래쪽은 꽃잎처럼 펼쳐진 형태가 기둥을 받치고 있고, 위로 아주 길게 솟은 기둥이 강한 느낌으로 다가와 순교자의 희생과 신앙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듯한 느낌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순교자 묘역을 감싸듯 배치되어있어 그리스도의 수난과 순교자들의 수난이 서로 겹쳐지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동시에 그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을 기억하도록 공간이 구성되어 있는 듯합니다.
순교자의 묘를 내려오는 계단에서부터 이곳의 벽면을 따라 묵주의길이 있습니다. 그 묵주알 하나하나 장미 덩굴이 감싸고 있고요. 장미가 피는 계절이었으면 정말 아름다웠을 거 같습니다.
이곳은 죽산 성지 대성당입니다. 유럽의 고딕 성당처럼 웅장하게 높이 솟은 모습이 아니고 황토색 벽과 검은 기와의 낮고 소박한 형태입니다. 수원교구에서도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황토색 벽에 기와를 얹은 한국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박해받던 신앙 선조들의 소박한 삶과 참 많이 닮은 공간입니다.
실내는 문이 잠겨있어서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성당 옆은 성모님과 안내도입니다.
대성당 주변이 한국적이고 정스런 풍경이었습니다.
이곳은 소성당입니다. 아주 커다란 느티나무와 어우러지는 소성당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소성당도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했지만, 순교자들의 기도를 품은 성전은 오늘도 순례자들의 기도를 기다리며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겠죠? 이름을 남긴 순교자뿐 아니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까지 기억하는 곳, 그래서 이 작은 성당의 고요함이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이상으로 죽산 순교 성지 소개를 마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성당 내부 사진을 담아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