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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 일본계 법화교단의 수용실태와 토착화 요인
1. 들어가면서
한국은 종교의 백화점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종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주류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외에도 다양한 신흥 종교들이 종교 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흥종교들은 백여년 내외의 짧은 創敎 역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학자와 사회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현재 한국사회의 신흥종교들은 다양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주류 종교에서 파생된 것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수입된 것도 있다. 전통사상을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 있는가 하면 매우 이질적인 외래사상을 기반으로 성립한 것도 있다. 외국과의 교류 확대와 다양한 문화의 유입은 다양한 종교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신흥교단 중에서 계통은 다르지만 불교라는 커다란 공통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교단들도 등장한다. 그들 중에 법화계통의 신흥교단 역시 적지 않다. 李璟雨는 이들 법화계 종단의 특징을, 첫째는 傳統的인 法華思想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구성한 단체, 둘째는 법화사상에 재래의 民俗信仰을 결합한 단체, 셋째는 日本 法華宗系의 影響을 받아서 이루어진 단체, 넷째는 일본의 日蓮正宗과 創價學會의 국내지부로 나눈다.1)
본고는 이상과 같은 법화계 종단들 중에서 네 번째 분류에 해당하는 일련정종과 창가학회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수입되어 한국에 토착화한 일본계 불교, 그 중에서도 법화계 교단의 실태와 토착화 요인은 무엇인가를 분석하고자 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003년 9월부터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으로 시작한 “한일종교의 상호수용 실태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국내에 활동하고 있는 교단과 교파는 18여개이며, 이들을 신앙하는 신자는 210만명을 능가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2) 이들 중에서 10여개 정도가 불교계 신흥종교라 말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 법화계열이 다섯 개 종파를 헤아리고 있다. 나머지는 신도의 영향으로 성립한 천리교 내지 기독교 계열 등이다.
일본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현재 한국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법화종단은 5개에 불과하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그 이상도 말할 수 있지만 완전히 한국화되어 있으며, 일본과 특별한 연고를 지니고 있지 않은 종단은 논외로 삼고자 한다. 연구자가 연구 대상으로 삼는 교단은 일본의 본부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종교의례 속에 일본의 영향이 다분히 남아 있는 교단들이다.
창가학회, 일련종, 태양회, 본문불립종, 입정교성회 등의 이들 교단은 일본에 본부를 두고 있거나 일본에서 파견된 포교사가 있다. 신도들 중에서도 간부들은 일본의 본부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이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 ’60년대 이후 한국에 상륙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40 내지 50년의 한국 체류기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일본본부 내지 일본의 유관 종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계 교단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교단은 현재까지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하지 않고 있으며, 1222년에서 1285년에 걸쳐 활동한 니찌렌[日蓮]이란 일본인 승려를 종조로 삼고 있다. 교세의 대소를 떠나 한일간에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차이와 배타성으로 인해 토착화 과정에 다양한 굴곡을 경험한 것이 특징이다. 반일감정이 팽배했던 시기에는 국가적인 감시와 억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토착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그런 점에서 토착화의 성공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토착화의 요인을 분석해 내는 일은 단순히 특정 교단의 문제를 넘어 한국사회의 문화변동과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적응, 그리고 극복과 着根이라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점에서, 두 번째는 주류종교의 틈새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친화적인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이상의 관심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계 법화교단의 실태와 그간의 교세변동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어 각 교단이 지니는 특징과 공통분모를 통해 토착화의 요인이 무엇이고, 그 요인의 어떠한 점이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는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2. 국내 일본계 법화교단의 실태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일본계 법화교단은 현재까지 파악되고 있는 것은 5개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일본과 긴밀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서민 대중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현재까지 조사된 보고서나 2003년 9월부터 2004년 8월까지 부산 동서대학교를 중심으로 실시된 “한일종교의 상호수용실태에 관한 조사”자료, 그리고 2004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실시된 “일본 대중문화개방에 따른 일본계 종교의 교세 및 수용자 의식 변용에 관한 조사”시 실시된 조사자료 등에 의해 교단의 실태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 법화교단의 실태
(1) 일련정종계
일련정종계 법화교단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개항 무렵이라 본다. 그것이 일제시대를 거쳐본문불립강파(현재의 본문불립종의 모태)과 본적일치파(현재의 일련종 모태)로 계승되었다. 일련정종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즉 본문법화종계의 사찰인 가황사 주지 박수공이란 사람이 1960년 일련정종학회를 창립하며, 그의 아들인 박소암이 그곳에서 일련정종을 수용하여 한국 일련정종 교단을 창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963년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일련정종의 활동이 재개되는 것으로 본다3).
박소암은 그의 형인 박성일이 일본서 가져온 일련정종 <<절복교전>>을 보고 대한불교법화종 교무국장을 지내다 일련정종으로 개종 입신하며4), 본부인 일본의 대석사에서 일련정종의 기본 교의서로 삼고 있는 <<어서전집>>, <<묘법연화경>>, <<결경>>, <<절복교전>> 등을 받게 된다5).
이후 일련정종은 많은 갈등과 분파의 과정을 겪게 된다. 창가학회와의 결별, 토착화를 들러싼 견해차이 등이 그 이유였다. 필자가 조사를 하면서 듣게 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략 48개 이상의 분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한국일련정종연합회 내지 (재)한국일련정종 발기인회 등을 통해 통합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계파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자주파, 해외파, 독자노선파가 그것이다. 해외파는 일본 대석사 종무국 해외부의 예하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주파와 독자 노선파는 대석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운영되고 있다.
조직과 재정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6). 국내 일련정종 각파의 조직은 일본 창가학회 본부의 조직에 준하고 있다. 본부의 조직은 상부조직이며 하부조직은 각 지부 이하의 지방조직이다. 상부조직에 있어서 지부장 이상의 간부는 한국 각 본부장의 에 의해 일본 일련정종 창가학회 회장이 임명한다. 간부는 학력이나 경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심이 얼마만큼 충실한 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부조직은 지방의 지부 이하의 조직인데, 신도 6 내지 10명이 1조를 이루며, 3~5개조가 1반을 이룬다. 3~5반이 1지부를 이루며, 3~5지부가 1지구를 이룬다. 3개 이상의 지부가 총지부가 되며 3개 이상의 총지부가 총합본부를 이룬다. 즉 지방조직은 조직은 組 →班→ 區→ 部→ 局→ 理事→ 理事長→ 會長으로 구성된다.
재정운영은 극비에 붙여지고 있으므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원칙적으로 신도에게 회비나 운영자금을 걷지 않는다. 다만 교단에서 간행하는 교리해설서나 팜프렛 신앙지침서를 신도에게 팔아 운영비로 사용하며, 신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운영되고 있다.7)
일본 대석사에는 니찌렌의 정법을 유포할 근거지로서 본문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니찌렌을 말법시대의 본존의 불보로 받들고, 남무묘법연화경을 본존의 법보로 삼으며, 이 본존의 법을 부촉 받아 펼친 이가 일련정종의 개조인 니찌고오[日興]를 승보로 삼는 독자적인 삼보관을 갖는다. 즉 석가모니불은 정법 상법시대의 불법을 맡은 교주이기 때문에 말법시대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부처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본다.8) 니찌렌이 『법화경』에서 본존의 실상으로 시사한 것을 만다라로 표현한다. 만다라의 본존은 『법화경』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 본존의 명호는 『법화경』의 제목인 <<묘법연화경>>이라 본 것이다.9)
일련정종의 포교 초창기에 논란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이 종파가 지니는 일본의 국수주의적인 성격이었다. 본존으로 도형화한 만다라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天照大神(아마데라스 오미가미)과 일본의 황국수호신인 八幡菩薩(하찌방보사쓰)가 들어 있으며, 이들을 불보살과 함께 신봉하고 있다. 그리고 <<남무묘법연화경>>이란 경제를 봉창할 때도 반드시 일본어로 독송하며, 근행 시에 동방요배를 하고 있다.
본존 만다라에 있는 천조대신은 일본의 국조신이나 민족신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본존불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받들고 있다. 니찌렌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만다라의 중심에 본존인 <<남무묘법연화경>>을 모시고, 그 주위에 諸佛菩薩과 諸天神 ․ 地神 ․ 人神 ․ 龍神 등을 둔다. 만다라의 중심이 되는 <<남무묘법연화경>>은 体가 되며, 그 밖의 제천선신들은 부처의 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조대신이나 팔번보살은 일본의 민족신으로써 받드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호법신으로 받든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 이래 일련정종 교단의 중요 텍스트는『입정안국론강의』 『법화경 방편품 수량품의 해설』『질의문답』, 『근행요전』 『일련정종불교회입문』, 「한국의 일련정종 현황 프린트본」 『확신』 『승부』 『신심』 『발심』 『정법』 『실천의해』 『결집』 『교학연구』 『정진』 『건설』 『연화』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포교를 하고 있다.
포교방법은 다른 종교와 색다르다. 교리의 내용에 文證․ 理證․ 現證의 三證을 내세워 타종교를 일체 사교라고 주장하고 일련정종만이 진실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반장이나 조장을 서로 경쟁시켜 포교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절복이라는 포교방법을 활용하며, 신도모임인 좌담회에 참석시켜 공덕담을 발표케 한다. 그리고 교리를 공부하는 교학시간이 있다.
한국일련정종총본부의 경우 197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봉사활동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해의연금 모집이나 국군장병의 위문사업은 물론이고 새마을운동이나 반공궐기대회 등 국가적 사업에도 동참하였다. 이는 일련정종 및 창가학회의 교세가 확장될 때 까지는 포교 외에 사회활동은 자제한다는 원칙에 벗어나는 것이다. 일련정종이 지니고 있는 국민적 반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전개한 사업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련종은 현재 한국창가학회와 완전히 분리된 상태이며, 그에 따라 교세가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다. 신도들이 이탈하여 창가학회로 이동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2) 한국창가학회(KSGI) 10)
SGI(SOKA GAKKAI INTERNATIONAL)는 日蓮正宗의 재가신도단체인 創價學會가 1975년 1월 국제창가학회란 이름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日蓮正宗의 在家신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전통적인 講의 하나로 출발했던 창가학회는 宗團의 산하 단체였던 만큼, SGI 역시 그 산하의 해외 포교단체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78년 11월 16일 일본 일련정종 종무원의 종규 개정으로 해외부가 신설되어 해외포교의 활동이 종무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계기로 독자노선을 택하게 된다. 그러다가 1991년 11월 종무원은 창가학회 회장인 이케다 다이샤쿠(池田大作)가 반복해서 일련종의 法主와 종문을 비판한다는 죄명으로 總講頭란 직책에서 파문하며, 그 이듬해인 1992년 8월에는 이케다의 신도 자격도 박탈당하자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창가학회의 비약적 발전은, 1960년 5월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1928-)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3대 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이다. 특히 折伏운동을 통한 창가학회의 종교적 정체성 확보와 정치참여를 통한 사회변혁을 추구한다. 이러한 의도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고자 政敎一致의 강령을 제정하고, 정당 활동을 통해 학회의 사회적 위상제고와 교세확장을 꾀하고자 하였다.
1961년에는 公明政治聯盟을 결성하고 1964년 이를 公明黨으로 개칭하면서 스스로 당수를 맡기도 했다. 창가학회는 1975년 1월 26일 괌도에서 세계51개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제1회 세계평화회의를 개최하고, 국제창가학회(SGI)를 출범시키며 회장으로 이께다를 선출하였다. 1979년 이께다회장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4대회장에 北條가 취임한다. 1980년에는 秋谷榮之助가 5대회장에 취임했다.
창가학회의 사상은 日蓮敎學→ 日蓮正宗敎學→ 創價學會敎學의 단계로 구분된다. 日蓮(1222-1285)은 天台敎學을 학습한 위에 『법화경』의 통일적 원리에 의하여 불교계 및 일반사상계를 통일하고, 협력일치 체제를 구현한다는 호국신앙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그의 제자인 日興(1246-1333)을 조사로 삼는 후지의 大石寺를 중심으로 일연정종이 성립하며, 日覺(1665-1726)에 의해 일연정종교학의 한 주류인 石山敎學이 형성되었다. 석산교학은 일연에서 일흥으로의 혈맥상승과 日蓮本佛論, 本門本尊․本門題目․本門戒壇의 三大秘法을 축으로 삼으며, 여기에 마키구찌의 가치론과 도다의 생명론을 더하여 창가학회의 교의사상을 이룬다.11)
창가학회가 국내에 유입된 것은 1961년으로 본다.12) 대구 지역은 동경에 거주하던 김종식이 대구에 살던 최규항(崔圭恒)13)에게 전파하여 창가학회가 시작된다. 따라서 1960년대 초중반의 초기 창가학회는 박소암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동대문 지역의 창신동파, 성북구 이정순 황석환 중심의 정릉파, 최규항을 중심으로 한 대구파, 임성규를 중심으로 한 부산파 등이 있으며, 60년대말 안남식의 여수파가 생겨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초창기의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의 신도단체였기 때문에 상호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創價學會의 포교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특히 포교 초기인 60년대부터 공존할 없는 대상으로서의 ‘왜색종교’라는 사회적 낙인과 싸워야 했다. 이유는 일련종과 동일하다. 따라서 1964년 1월 17일 학계와 언론계, 종교계 13인으로 구성된 ’창가학회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정부는 창가학회를 ‘반국가적, 반민족적 단체’로 단정하고 그 포교를 금하였다. 정부의 강경대응에 주춤하던 창가학회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조심스럽게 공개적인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그러한 와중인 1964년 4월 15일 박소암은 좌담회를 재개하고 한국일련정종학회라 간판을 걸었으며, 그의 형인 박성일이 교포의 도움을 받아 인천좌담회를 시작한다. 1969년 1월 16일 대석사 종교국에서 한글음의 독경을 허락함에 따라, 대석사측과 창가학회간의 한글독경문제를 둘러싼 상반된 태도는 그대로 국내에서도 대석사측을 따르는 일련정종 신자와 창가학회 측을 따르는 신자로 분열하는 계기가 된다.
1973년 창가학회 중심의 일련정종 신자단체의 통합 움직임이 등장하며, 1974년 5월 통합조직인 日蓮正宗佛敎會가 결성된다. 이러한 통합 움직임은 창가학회가 국제창가학회 결성을 앞둔 시점에서 취해진 국내 일련정종계 교단의 통합노력이기도 했다. 1975년1월 국제창가학회(SGI)가 결성되자, 국내에도 한국SGI의 결성을 위한 본격적 활동에 들어가 1975년 6월 20일 동대문구 신설동에 중앙사무국을 설치하고, 11월에는 전국 18개 총합본부 77개 지역본부로 구성된 통합조직으로 출발하였다.
일련정종 일본 본부와 신도조직인 창가학회의 갈등은 국내의 창가학회 구성원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1981년 9월 조대철 2대 이사장이 취임하고 1982년 2월 한국일련정종불교회의 회칙을 제정하는 등 조직의 내실을 쌓아갔다. 1986년 2월 28일 전국총합본부를 圈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87년 9월 6일 본부를 현재의 위치인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5동 45번지로 옮겼고 전국조직을 16개 방면, 54권으로 개편하는 등 안정적 교세에 들어간다. 같은 해 12월에는 도서출판 화광출판사를 등록하고 주요 경전인 『御書全集』한국어판을 발간하고, 이듬해 9월에는 월간『法蓮』을 출판하는 등 출판물을 통한 포교활동에 진력한다.
국내 창가학회의 발전은 1990년대 들어 일련정종과의 관계 청산을 계기로 더욱 활성화된다. 특히, 1990년 9월 21일 池田 SGI 회장이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것을 계기로 池田를 스승으로 내세우며 한국SGI불교회로 대외적 명칭을 사용하면서 9월 21일을 불교회의 날로 선포하게 된다. 1991년 7월에는 旬刊인 『聖敎타임즈』14)를 창간하였다.
1991년 11월 7일창가학회는 공식적으로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국내에서도 한국SGI불교회와 대석사와 관계를 갖고 있는 일련정종과의 완전 분리가 이뤄진다. 한국SGI불교회는 일본 창가학회와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한국지부의 성격이 뚜렷해진다. 동시에 이께다 회장의 말이 <<어서전집>>의 어록에 비견될 정도의 권위를 갖는 이께다 중심의 SGI단체로 변한다.
1994년 4월 제3대 이사장으로 박덕현이 취임하고 1995년 2월에는 전국 23개 방면, 69개권으로 조직을 확대해간다. 1996년 9월 1일 2만여명이 참석한 국토대청결운동을 벌린데 이어, 8일에는 서울에서 같은 행사를 벌리고 환경선언문 채택과 수재민돕기 모금운동을 하는 등, 대사회적인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왜색종교라는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벗어나 그 공공성을 표방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의 행사는 1995년 이후 문화회관 건립시마다 발생하는 지역주민과의 마찰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일본 창가학회의 지원을 받는 공명당이 1993년 호소카와(細川) 연립내각의 출범과 함께 일본 여당이 된 이래 정부도 공명당과의 관계나 선거에서 차지하는 만만찮은 영향력15)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관계로 왜색종교의 이미지를 벗어날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1997년 4월 제4대 이사장으로 박재일이 취임하면서, 한국SGI의 대사회적 활동도 더욱 본격화된다. 1999년 4월에는 서울 도봉구에 ‘SGI평화도봉공원’을 건립 기증하고, 5월의 부산에서 열린 지구환경예술제, 8월의 충청환경예술제 등 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한국SGI의 사회적 위상 제고에 노력한다. 이런 한국SGI의 사회적 위상 제고 노력은 문화관광부로 부터의 재단법인 등록을 위한 노력으로 집중된다.
법인등록은 DJ정부 들어 마칠 수 있었다. 재단법인 "한국 SGI"로 문화관광부에 법인을 등록함으로써 공적인 종교단체를 표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1년 1월 제5대 이사장에 여상락이 취임하며, 2003년 4월에는 지상 12층, 지하 5층 규모의 새로운 본부건물을 준공하면서 조직도 전국 30개 방면, 106개 권역으로 재편하는 등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교단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뉘는데, 중앙조직은 이사장을 정점으로 참의회· 평의원회· 이사회가 있고, 이사장 산하에 사무센터· 중앙회의· 감사· 감정심사회· 사정위원회가 있다. 사무센터에는 사무국· 총무국· 조직국· 건설국· 홍보국이 있다.
중앙회의는 지방조직을 통괄하는데, 방면장- 권장- 지역장- 지부(지부-지구-반)로 분할된다. 중앙본부는 산하에 문화본부· 교학부· 장년부· 부인부· 청년부를 두고 있다. SGI회원들은 개인적인 신앙활동은 있을 수 없고 조직을 떠난 개인적 신행은 이익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조직과 자신의 신행을 일치시키고 있다.
한국SGI의 교단활동의 주요 목표인 평화, 문화, 교육활동이 이뤄지는 중심은 전국 290여곳의 문화회관, 연수센터 및 자연학습관이다. 이중에 개인회관으로 분류되는 곳은, 총74개소(지역25,지부49)이고 문화회관은 30개방면, 107개권의 총214개(권88,지역67,지부50,연수시설5)이다.16) 문화화관 이외에 현재 한국SGI는 연수원 및 학습원을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다. 연수원은 (1) 진천연수원 (2) 제주연수원이 있고 학습원은 (1) 영월자연학습원 (2) 주남자연학습원 (3) 무안자연학습원이 운영되고 있다.
(3) 본문 불립종
본문불립종 역시 일본의 니찌렌을 종조로 받들고 있다. 1857년에 개창된 이해 1952년에 이르면 일련종계통의 대표적인 재가교단으로 발전한다. 일제시대에 들어 온 본문불립강은 1912년 야스다가 부산에 長松寺를 세우고 포교하다가 후에 1913년 불립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학송사(서울시 은평구 응암동, 외무대신 이하영의 별장)를 창건한데서 비롯된다.
학송사는 1919년 퇴계로 4가로 이전하여 건물을 짓고 야스다 닛슈(安田日州)17)가 주지로 취임했다. 1926년 대 주지로 오마끼 히유(御牧日宥)가 잠시 주지로 있다가 오까노 닛싱(岡野日眞)이 주지로 취임했으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했다.18) 즉 해방을 맞이하자 강일성이 오까노로부터 학송사를 인수받아 觀世音菩薩會에 가입했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폭격을 당해 학송사가 소실되자 청량리에 있던 고아원에 학송사의 간판을 붙이며, 조계종의 여성불교단체에 귀속된다. 이 무렵 관리자인 姜逸性은 법단의 만다라에 새겨져 있는 일본인 국조 천조대신을 단군으로 바꾸고 法華經本文八品을 염송하는 신행을 하였다.
1973년 이사장에 전 조계종 사무국장 이태석이 취임하였고, 강을선이 입적하자 이성욱이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2004년 입적하였다. 본문불립종은 학송사를 본산으로 대법사 ․ 신청사․ 본문사․ 본문사․ 불립사가 있었다.19) 학송사의 경우 행사시의 신자수는 50명 정도이고, 전체 신자수는 250~300명 정도이다. 5개 사찰임을 감안하면 종단 전체 신도수는 대략 1250명에서 1500명 내외로 추산할 수 있다. 조직구성은 부인회와 장년회가 있으나 큰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청년부는 없으며 일본과는 1년 1회 정도 교류가 있다.
특징적인 신앙방법으로는 남무묘법연화경이란 경제를 부르는 창제이다. 신자들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보고 講(설교장)에서 설교를 듣는 것과 함께 신자들끼리 병자가 생기면 모여서 본인의 수행을 주위에서 도와주는 助行의 唱題를 한다. 병자를 고치는 일이 유행하여 불전에 바친 정한수에는 『법화경』이 녹아있다고 하며 치병에 이용한다.
불립종의 수행은 南無妙法蓮華經라는 口唱行이다. 말법시대에는 어려운 수행은 할 수 없는 범부들의 시대이기 때문에 身口意 三業 중에서도 口業에 중점을 둔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니찌렌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다. 즉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하면 과거세부터의 지은 죄업이 점점 엷어져 좋은 운명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은 『법화경』의 南無妙法蓮華經이 아라야식의 죄장을 정화하는 최고의 佛種子이기 때문이라 본다.
제목은 소리 내어 불러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마음만으로 하는 수행이므로 제목을 아라야식에 심고자 하는 방법으로는 좋지 않다고 본다. 제목을 소리 내어 부르면 우선 입(舌根)을 사용할 수 있고, 귀로 제목을 듣기 때문에 耳根을 작용시키게 된다. 물론 마음(意根)도 작용한다. 그 위에 눈(眼根)으로 본존을 보면서 박자목을 치는데, 한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면 身根도 작용하게 된다고 말한다.
(4) 입정교성회
이 단체는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영우회로부터 1938년 분리된 재가 종단이다. 영우회는 1923년 창립된 일련종계열의 재가단체였으며, 입정교성회를 영우회로부터 독립시킨 사람은 니와노닛쿄우(1906-1999)와 나가누마묘오코(1889-1957)이다.
입정교성회는 해방 전에 국내에 들어 왔으며, 니와노닛수이(庭野日數)가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자리 잡고 포교하다가 추방된 바 있으며, 신점염이 서대문구 홍제동 330-518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적이 있다20)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본격적인 포교가 실시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지방에서는 해방 전에 일본에서 귀국한 宋命根이 대구시내 달성동에서 활동하였고, 1971년 그가 사망함에 따라 활동이 종식되었다. 그는 1964년 일련정종에 대한 정부의 포교금지 조치가 내려질 때 대구지역의 일련정종의 간부 金永淳과 반장 金仲煥을 절복시켜 일련정종의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한국일련정종신도회를 탈퇴하여 한국적인 법화신앙단체인 한국일련정종지용회를 결성하게 하였다21)고 한다.
이복순 교회장이 취임한 후 1987년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현재의 건물22)에 입주하고, 그 다음해인 1988년 5월 29일 일본으로부터 온 부처님을 법당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2002년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부산지부를 설치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1983년에는 대한불교법화종으로 등록하였는데, 이 때 교회장님이 법화종 사찰에서 수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1997년에 법화종에서 탈퇴한다. 처음 포교 할 때는 입정교성회라는 명칭이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으므로, 한국의 절과 같은 명칭으로 약 1년 동안 교성사(佼成寺)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또한 초창기에는 재가불교회로써 창가학회와 비슷하다는 인식 때문에 포교활동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포교방법은 인연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포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다. 포교 방법 또한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신자 수는 많지 않다23).
한국에서의 조직은, 교회장, 지부장, 주임, 그리고 조장의 역할 직위로 되어있으며, 간부인 주임은 교회장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교회의 불단카드에 등록된 신자 수는 2700세대정도이며, 실제 활동하는 인원은 서울의 경우 200명 정도라고 한다. 초파일날 등을 올리는 수는 서울과 부산 합해서 1500세대 정도라고 하며, 그 가운데 일본으로 가서 불상을 받아와 집에 모시고 있는 신자 수는 전체의 120~130세대 정도라고 한다. 조장이상의 직급을 받은 간부들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활동하고 있으며 최종적인 결정은 교회장이 한다.
한국에서의 정기모임(법회)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식순은 다음과 같다.
․ 제목삼창
․ 회원강령제창
․ 찬불가 회가 제창
․ 독경 공양(소의경전 법화삼부경)
․ 체험설법
․ 교리공부
․ 지부별 법좌
․ 제목삼창
의식에서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이 法座이다. 법좌는 교회조직의 한단위로서, 법을 중심으로 한 대화의 장이다. 7~8명에서 많게는 십수 명이 한 조가 되어 지도자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앉아 일상생활에서의 경험과 법론을 담론한다. 초창기에서부터 계승해 온 이 모임은 본회의 존재 그 차제이며, 입정교성회의 생명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시 한다. 이 모임을 바른 벗들의 모임으로 규정하고 혼자서는 빠지기 쉬운 욕망을 이 벗들이 지켜준다고 본다. 그들과 함께 참회하기를 독려하며 ‘참회는 마음의 대청소’라고 가르친다.
(5) 한국 태양회
태양회는 타카하시고준이 1981년 2월 19일 창립한 일련 법화계 신흥교단이다. 창립자인 타카하시고준은 1962년 창가학회 청년부대장과 조교수를 지내면서 창가학회의 포교에 열중했다. 그러다 1964년 일련정종 말사인 常在寺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1967년에 동양대학 불교사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에는 한국인 崔淑姬와 결혼하였다. 1982년 일련정종 本應寺 주직에 임명되었고 1989년 2월 19일 태양써클을 창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5년에는 본응사 주직을 사임하고 그후 한국에 妙仙寺 妙淨寺 白華寺를 건립하였다.
태양회의 설립자인 타카하시고준이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한 서점에서 박정희의 저서인 『민족의 저력』을 구입하여 일제강점기 산림남벌 등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알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게 속죄하기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한다. 그 후 한국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봉사활동이 시작된다.
태양회는 1989년 타카하시고준이 일본 群馬縣 혼노지(本應寺) 주직으로 있을 때 불교사상에서 보는 봉사정신을 가르치며 불교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창립되었다. 한국에 있는 원폭피해자들을 지원하다가 1989년 3월 15일 한국 내 원폭피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내한 것을 계기로 봉사활동이 주임무인 한국태양회가 발족하였다. 그는 1995년 혼노지 주직을 사임하고 태양회의 본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기고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9년간 감사장과 감사패를 50여개를 수상하였다.24)
태양회의 포교활동은 1998년부터 매년 청소년 수련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는 청년부에서 정기적인 산행모임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 11일에는 제 1회 국제노래자랑을 개최하여 한일양국 태양회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태양회 경남본부는 2000년 1월 白華鼓笛隊를 발족하여 문화행사도 열고 있다.
태양회의 조직으로는 서울의 白法支會, 白仙支會, 妙寶支會가 있다. 영남에는 東門支會, 高麗支會, 三千浦支會, 馬山支會, 密陽支會, 鎭海支會가 있다. 1989년 한국태양회를 결성하여 서울에 3지부, 영남에 6지부를 운영하다가 1998년 4월 28일 태양회의 경남본부가 낙성되었으며, 그 후 2002년 4개의 지부로 재편되었다가 현재 서울․ 부산․삼천포에 지부를 두고 있다. 2000년 6월 무렵 태양회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 2동 634-16에 있었다가 2003년 현 본부인 상계동으로 이전하였다. 이들의 의식이나 법회순서, 신행방식 등은 모두 일련종과 큰 차이가 없다.
2) 일본계 법화교단의 조직 특성과 교세변화
일본계 법화교단의 조직 특성은 체계적인 신도와 조직의 관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창가학회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일백만명이 넘는 회원을 자랑하는 한국창가학회의 운영체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5) 한국SGI는 연령별 회원들을 인재그룹이라는 이름 하에, 장년부, 부인부, 남자부, 여자부, 대학부, 고등부, 중등부, 소년 소녀부로 나눠 각각 인재그룹에서 활동하도록 한다. 이런 인재그룹은 종적인 조직이며, 이와 달리 교단 조직도에 따른 횡적 조직을 갖는다. 그래서 회원들은 종적-횡적관계 속에서 조직과의 일체감을 강화한다.
회원들은 조와 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장은 일주일에 한 번 조원을 소집하여 좌담회를 연다. 장소는 신도의 집 가운데서 적당히 선택한다. SGI측은 교단의 조직이 관료적 체제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조직, 인격적인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조직의 운영은 책임자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정열에 달려 있다.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정열을 조직 에너지로 활성화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회원들은 자신들의 조직은 오히려 합리적이지 아닌 편이 더 좋으며 인간미가 풍기는 온정적인 요소를 갖는, 조직과 인간과의 적대관계가 없는 동화력이 강한 조직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SGI는 포교, 곧 折伏에서 일대일 지도를 통해 입신으로 이끌어준 신앙상의 선배를 일본의 親子처럼 육친적 관계로 인식하도록 한다. 이런 관계로 인해 인간적 조직의 특성이 유지된다고 본다. 곧 인간과 조직의 일체화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본존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심이 SGI 조직의 근본적인 힘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좌담회나 교학강의 지도체계 등은 모두가 이런 관계속에서 형성된 조(10세대이상), 반(50세대 이상), 지구(500세대 이상), 지부, 지역, 권, 방면에 이르는 수직적 조직체계를 형성하지만, 그 기초에는 신앙적 친자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입신하면 조에 속한다. 여기서 입신초년은 모든 사회적 지위나 학력 등은 다 도외시되고 조장의 지도아래 신심을 단련하게 된다. 조활동의 기본은 좌담회를 통한 신앙심의 연마이다. 교학적으로 모르는 것을 질문하기도 하고 생활문제를 상담하거나, 체험담을 발표하는 등 종교적 써클활동을 좌담회를 통해 하게 된다. 조장은 조를 책임지는 자로서, 조장이 되기 위해서는 신심은 인정받아 반장의 에 의해서 지부장이 임명한다. SGI에서는 직책을 갖는 役職들은 회의 직분을 세속의 일보다 우선해서 완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신심이 강성한 사람은 그만큼 본존으로부터 주는 공덕도 크기 때문에 당연히 행복한 마음으로 직분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종적체계가 신심지도, 곧 신앙과 교학지도를 위한 조직이라면, 부인부등의 횡적 조직은 문화 활동 등의 행동조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이, SGI에서의 신앙과 실천과 조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서 조직은 없어서는 안되며 이 조직 속에 있으면 틀림없이 신앙을 실천해서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회원들은 년 1회 광포기금으로 1구좌당 1만원씩의 회비를 납부하는 것을 의무화한다.
한국SGI는 일본과는 달리, 회원들의 활동상에서 몇 가지의 금기 사항을 교육하고 있다. 첫째 회원간의 금전거래 금지, 둘째는 회원간 불미스러운 남녀관계 금지, 셋째는 회원간 동업 금지, 넷째는 신행 이외의 조직 이용 금지 등이다. 만약 회원들이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경고조치와 함께 역직에서 해임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26) 그 위반 행위가 심할 경우에는 사정위원회와 감정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쳐 회원에 대한 제명조치를 취하도록 내규화하고 있다. 이와 함게 본부활동에서도 병원 운영과 방송분야 진출, 정치 참여 등은 금기화하고 있었다.
최근 한국SGI 홍보국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최근 9개년간의 창가학회의 신도 수 변화는 아래와 같다.
1995년 총 986526명 23방면 76권 312지역 1174지부
1996년 총 1010169명 24방면 78권 318지역 1183지부
1997년 총 1112083명 24방면 83권 329지역 1196지부
1998년 총 1240315명 25방면 85권 336지역 1203지부
1999년 총 1435993명 26방면 92권 347지역 1218지부
2000년 총 1453993명 28방면 96권 357지역 1236지부
2001년 총 1464859명 28방면 101권 362지역 1265지부
2002년 총 1477146명 29방면 103권 372지역 1296지부
2003년 총 1485013명 30방면 107권 383지역 1316지부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창가학회의 신도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1996년 일백만명을 돌파한 이래 2003년 말 현재 15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한국창가학회의 문화원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권역별 활동가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미 150만명을 초과했다고도 추정할 수 있다. 동시에 이들은 치밀한 조직관리와 인적 유대감 강화가 발전의 토대임을 알 수 있다.
한국창가학회의 교세가 괄목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교단 역시 교세가 확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본문불립종은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라 말할 수 있으며, 입정교성회는 1997년도의 조사와 비교하면 일천세대 정도 증가한 것으로 파악 된다27). 태양회에 대한 조사는 1997년에 발간된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에선 찾을 수 없어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교단의 지부가 확장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약간은 증가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련정종계열은 상황이 불명확하다. 상술한 1997년에 발간된 원광대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28) 대략 25만2950명으로 파악된다. 필자가 교단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워낙 파벌이 많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대략 38만명은 되리라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단 관계자들의 발언은 다분히 호교적이기 때문에 신빙할 수 없다. 2004년 5월 기준으로 8천에서 1만세대 정도로 보기도 한다29).
1975년 현 한국SGI가 분립되어 나간 이후 한국의 일련정종의 교세는 점차 축소되어 갔고 1978년 종무원의 해외부신설후 한국교단에 대한 간섭과 지도로 자주파와 해외파로 분립되면서 신자수도 축소되어 가고 있다30)고 말할 수 있다. 일련종 계열의 신도수가 급감하는 반면 한국창가학회의 신도수가 급증한 것은 일련종 신도들이 한국창가학회로 교적을 옮겼기 때문이라 본다. 母體가 동일하기 때문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일련종계의 신도수는 전체 10만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본다.32)
결론적으로 이상의 분석들을 종합하면 한국사회 내에서 일본계 법화교단은 여전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한국창가학회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2. 토착화의 성공 요인
이상에서 법화계 종단의 현황에 대해 개설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들의 특징은 탄탄한 조직력과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토착화 했다는 점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교화한 신도들의 대부분은 중하층의 서민들이었으며, 남성 보다는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신흥종교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33) 조사 기간에 시행된 인터뷰를 통해 신자들의 입신계기를 파악했는데 주로 가정불화, 변고, 열악한 생활환경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일본계 법화교단에 입문하면 다양한 관리방법에 의해 신앙심을 고취하며, 횡적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이탈하기 어렵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의 경우에도 비슷한 실례를 발견할 수 있다. 초기 개신교의 수용집단은 성격을 달리하는 두 부류가 있었다고 본다.34) 개화파의 지식인 그룹과 하층 하류의 부녀자 그룹이었다. 개화파의 지식인그룹 중의 급진개화파는 기독교의 도입을 한국의 근대화 내지 부국강병과 연관지어 수용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35)고 본다. 반면 하층 부녀자 그룹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삶의 의미와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지만 유교나 불교, 내지 도교 등 전통종교가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 종교적 진공상태가 발생했으며, 그 틈새를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제시하는 기독교가 파고들었다36)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분석 중에서 하층 부녀자들의 기독교 수용방법을 현대 신흥종교의 성장과정과 대비하여 볼 때, 주류종교의 틈새를 신흥종교가 파고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일본계 법화교단의 신도 대부분이 하층 부녀자들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37), 산업화과정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찾아온 고난과 박탈감을 메워 줄 새로운 돌파구로 자신들이 속한 법화교단을 선택한 것이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계 법화교단이 하층 부녀자층 중에서도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포교에 성공한 요인은 무엇일까? 물론 일본계 법화교단은 한일간에 깊이 맺혀있는 민족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창가학회처럼 평화와 문화운동이란 이름의 문화관 건립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편견과 공공연한 억압을 극복하고 성장세를 멈추지 않는 요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대해 필자는 일본계 법화교단이 공유하는 두 가지 요인을 말하려고 한다. 첫째는 法座 혹은 좌담회, 내지 간담회라 불리는 신도들의 모임이다. 한국창가학회를 소개하면서 그 성격을 밝힌 바가 있지만 이러한 신도관리 방법은 인적관계를 튼튼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두 번째는 법회 때 마다 행하는 唱題라는 것이다. 남무묘법연화경이란 경전의 이름을 세 번씩 제창하는 것인데 일종의 주술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의 교리적 근거와 종교사회적 기능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1) 좌담회(혹은 法座, 간담회)
좌담회의 형식은 법회 후, 혹은 지역을 중심으로 일정한 10명 내지 20여명의 신도들이 둘러 앉아 자신의 신앙체험을 고백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를 통해 친형제 보다 더 끈끈한 同行으로서의 유대감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필자 역시 조사기간 중에 시행된 신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좌담회를 통해 고백하는 신앙체험이란 입신전과 입신 이후 자신의 달라진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달라진 모습은 바람직한 모습으로 전환된 것으로 표현된다. 즉 자신이 부처님께 기도한 것이 실현된 것이란 점에서 은혜를 느끼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착실한 신도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는다. 달라진 모습은 개인적 소원의 획득 내지 가정의 화목, 승진 등 매우 현실적인 사안들이다.
그런데 좌담회란 형식은 이미 초기불교시대에 불교의 중요한 의례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보름마다 모여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참회하며, 수행생활의 정도를 점검하는 형식이다. 이것을 포살(Uposadha)이라 불렀으며, 재가자는 육재일에 8재계를 받는 것을 포살이라 불렀다. 이것이 일본불교에서 재가자들을 위해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한국태양회의 회장인 타카바시고준씨는 법좌의 기원은 니찌렌의 저서인 <<어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어서>>에선 중국 천태종의 개창조사인 천태지의 스님이 열반한 날인 음력 11월 24일 신도들이 사찰에 모여 천태대사의 은혜를 기리며 설법을 듣는 것을 대사강(大師講)38)이라 하며, 이것이 점차 법좌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39).
입정교성회에선 법좌를 신도를 지도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데 법좌를 할 때 간부를 중심으로 수십인이 둘러앉으며, 신자들 개개인이 인생문제를 고백하면 간부를 중심으로 신앙에 입각한 해결방법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고 말한다.40) 입정교성회의 모체인 영우회에선 법좌에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설법의 장소,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이는 집회, 회원의 지에서 소수인들이 모여 포교사의 지도를 받는 회합이다.41) 그런데 1920년대에 영우회에서 시행한 법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과 동일한 고뇌를 지니고 있거나 혹은 과거에 지니고 있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같은 신앙에 의해 구원받고 싶다는 강렬한 소원을 끌어않고 있는 동행자들이다. 자연 거기에는 직업, 신분, 연령을 초월한 정신의 연결이 생기게 된다. 친형제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고, 가슴 깊이 박혀있던 죄의식도 털어버릴 수 있는 분위기가 생긴다.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켜 말하고, 참회하며, 신앙체험을 고백한다. 듣는 자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을 듣는다. 이것이 법좌인 것이다”42)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법좌란 형식을 통해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카타르씨스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신도상호간의 유대감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일본 재가불교운동은 영우회가 그 시발점이며, 입정교성회와 창가학회는 영우회를 모태로 탄생하게 된다. 모두 니찌렌을 종조로 모시는 일련종의 재가단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 각 교단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좌의 형식과 목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일본계 법화교단들, 특히 창가학회, 태양회, 입정교성회, 일련정종은 법좌를 통해 신앙을 지도하며, 각 구역별로 사회봉사활동도 전개한다. 그런 점에서 각 신자 간에 금전거래나 남녀간의 교제, 조직을 이용한 영리의 추구를 금지하고 있다. 그것은 신도조직의 기본 근간인 법좌의 조직이 흔들리면 교단 전체의 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주류계층에서 소외된 이들 대부분은 경제적 빈곤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자들이거나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있는 자,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린 자, 남편이나 시부모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자,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자신이 의탁할 지연이나 혈연공동체를 상실한 자들이란 점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 과정의 피해자들이라 말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그들의 돌파구로 신흥종교를 선택한다고 본다.43) 그렇다고 본다면 일본계 법화교단 역시 신흥종교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발생한 소외계층을 기반으로 토착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입신자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한 것이 간담회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입신자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종교적 체험을 유발하며, 인적 연대감을 유지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신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2) 唱題의 呪術的 성격
일본계 법화교단은 한결같이 남무묘법연화경이란 창제를 하고 있다. 그들은 나무묘법연화경이란 창제를 하는 것으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제목을 부르는 것만으로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얻고 소원을 성취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법화경>> 전체를 다 외우는 것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지성심으로 제목을 부르는 것으로 대신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법화경>>의 핵심 품으로 인식되는 방편품에선 萬善成佛을 말하며, 특히 그중에서 “마음 산란한 이도/ 탑묘 중에 들어가/ ‘나무불’ 한번 해도/ 모두 다 성불했고”44)란 구절이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분별심의 탈각에 의해 성불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성불이란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법사품에선 “중생 가운데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이가 이 법화경을 보고 혹은 들으며 혹은 듣고 믿어서 이해하면 이런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운 줄 알아야 하느니라”45)고 하며, 제불보살의 보호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약왕보살본사품에선 “이처럼 법화경은 중생들의 일체 고통과 일체 질병을 여의게 하여 능히 일체 생사 속박에서 해탈케 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화경을 듣고 스스로 쓰거나 만일 다른 사람을 시켜 쓰면, 그 얻는 공덕은 ...그 끝을 알 수 없느니라”46)고 말한다. 나아가 약왕보살본사품에선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만으로도 죽어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난다고도 말한다.
또한 <<화엄탐현기>>에서는 “體를 부르는 것으로 이름을 삼고, 덕을 나타내는 것으로 호칭을 삼는다”47)고 하며, 일심으로 특정한 명호를 부르거나 사유억념하면 재난이나 罪障을 소멸하고 해탈하게 된다고 말한다. 중국 정토종의 개창조사라 할 수 있는 담란은 <<무량수경우파데사원생게주>>권하에서 “名이 법에 상즉하는 것이 있고, 名이 법과 다른 것이 있다. 명이 법과 상즉한다는 것은 제불보살의 명호, 반야바라밀 및 다라니의 章句, 禁呪의 音辭등이며, 명이 법과 다른 것은 손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48)라 말한다.
이상과 같은 것은 경전에서 말하는 것이니까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는 聖言量이란 점 이외에 달리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논리적인 사고의 영역을 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단지 믿어야 한다는 점 이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승경전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경전 자체를 주문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승불교도들은 주문을 학문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대중성을 담보하기 위해 주술을 수용하고, 그 주술을 재해석하려고 했던 것이다. 많은 대승경전에 보이는 다라니나 밀교의 주문이 그러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49)
일본계 법화교단에서 경전의 제목을 주문처럼 활용하는 것은 그 자체에 대중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흥교단의 입신자들은 대부분 다른 종교에 입신한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제를 세속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종교적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50)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분석이 틀리지 않은 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방법이 아닌 초논리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초월자의 능력에 의지하는 경향을 선택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길명은 현대한국 종교문화의 특징을 성장주의로 정의하고 있다.51) 그러면서 성장주의의 특징 중의 하나로 기복이나 신비체험을 중요한 선교방법으로 내세우고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수많은 종교체험과 역사체험을 통해 지적전통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며, 감상주의나 열광주의와 같은 반지성적 성향을 낳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종교문화가 개인주의, 기복중심, 형식주의, 신앙과 형식의 불일치, 반지성주의 등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성장주의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시각에서 성장일로에 있는 일본계 법화교단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신행중의 하나인 창제는 기복과 융합하여 한국 사회변화의 흐름에 절묘하게 편승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초월자에 의한 문제해결과 심리적 열패감의 치료, 현실적인 욕구불만의 해소 등 다양한 측면에서 신도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연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일본계 법화교단은 현대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맹점, 그리고 대중들의 욕구와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포교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나가는 말
이상에서 일본계 법화교단의 수용실태와 토착화 요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의 전래는 해방 이전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교단은 대체적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 이후 배타적 민족감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편견과 억압을 극복하고, 현재 백만명이 넘는 신도를 확보한 종단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교단의 성장과 성장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졸고는 수용 실태와 토착화의 요인을 항목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장에선 일련정종과 한국창가학회의 유입과정과 포교의 특징, 교세의 변화 등에 관해 개설적으로 살펴보았다. 니찌렌을 종조로 하며,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의례를 시행할 때는 일본어 발음으로 경전을 읽고, 나무묘법연화경이란 창제를 하고 있다. 나아가 신도들을 관리하는 방법이 매우 현대적이란 사실이다. 물론 한국에 들어온 이후 수많은 분파를 야기하며 분열되기도 하지만 한국창가학회처럼 폐쇄적인 거대 종교 집단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제3장에선 그들의 신행방식인 좌담회와 唱題를 통해 토착화의 요인을 밝혀보려고 했다. 좌담회는 신도들의 인적 연결고리 겸 초기불교 이래의 포살의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창제는 주술적 기능을 함께 하면서 <<법화경>>에 입각한 신행활동을 이끌어 주고 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모두 대중 친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에 교단의 확장에 핵심적인 신행요소가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회에 이미 일본계 법화교단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들의 포교전략이 한국의 사회변동과 절묘하게 어울리며 이들 교단의 안정과 발전을 유도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동시에 한국의 주류종교들의 틈새가 생각 밖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불교의 주류 종단인 조계종과 태고종의 사회적 역할에 반성과 재점검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들의 교세가 확장되던 시기는 비구와 대처의 사활을 건 다툼이 그치지 않고 있던 시대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교단에 입신한 사람들이 전통 불교교단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전통불교교단이 이들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불식하고, 의례와 용어를 한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지나치게 주술적이고 폐쇄적인 운영을 탈피하여 한국불교계의 발전,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 李璟雨, 「법화계열 종단들」,<<한국불교의 현상>>(불교사상,1986) 참조. 李康五저 ꡔ韓國新興宗敎總覽ꡕ,p.
[출처] [일본계 법화교단]|작성자 아힝
한국sgi불교회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은 교회에서도 '할렐루야'를 우리 말로 바꿔서 '찬미예수'라고 하는 곳도 있다고 하지요.
<회원>님! 교회에서 주기도문을 히브리어로 해야된다고 하는 곳이 있든가요?
3년에서 5년이면 원어독경을 이해 할 수 있다고요?
우리말로 하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5년이나 걸려서 그런 것을 합니까?
<원어독경은 불법에서 사용하는 국제적인 언어>라고요?
원어독경이 아니라 일어독경이고요. 원어는 산스크리트어나 고대 인도어가 원어지요.
정말 원어로 해야된다면 니치렌께서도 산스크리트어나 고대 인도어로 했어야 합니다.
저는 되게하라님께 의문점이 하나 있습니다.그토록 신념이 강하시다면 몇몇사람밖에 안보는 여기서 그러실것이 아니라 불교회 본부에가서 따지시든지 해야 할것 같은데 거기는좀 겁이나서 그런지 이곳에서 야단법석을 하시는군요.기독교 어느목사는 무단방북을하여 김정일 찬양을하고 판문점으로 귀국하였는데 5년형을 받았더군요.불교회에서는 그정도까지는 아닐거라고 생각하는데 겁이 나서그런지 물지도 않으면서 짓기만하는 삽살개가 (비유가좀죄송합니다)떠오르는것은 웬일일까요.
회원님.... 저혼자 학회에서 떠들어봐야 몇명이나 그 진실을 알까요? 많아야 한두명? 그리고 학회에서 말해봐야 저 한명 탈퇴시키면 그만이겠지요.... 하지만 인터넷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정보전달이 발전하여 이곳에서 제 의견을 말하면 혼자 말하는 것보다 수백배, 수천배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미국소 파동도 한 중학생으로 인해서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끌어냈지요.... 겁많은 삽살개가 이곳에서는 훨씬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화광신문에서 닛켄 기생사진 조작이나, 시애틀사건에 대해서 사실대로 보도 하던가요???????????????????? 진짜 웃기지 않습니까? 무조건 닛켄이 극악이라고 악을 쓸뿐이지요.... 진실을, 사실을 왜곡하여 학회원들의 눈을 멀게 하는학회가 정말 정상입니까?
회원님이 그리도 존경하고 존경하는 신한위를 학회본부에서는 뭐라고 하는줄 아시지 않나요? 학회를 공격하는 세력, 일명 '반대파'로 통하지요.... 신한위가 저는 있는줄도 몰랐습니다. 이곳에서야 알았습니다. 신한위도 학회 본부에서는 불순세력이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신한위가 반대파라고 싫어하는 학회본부가 맞습니까??.... 아니면 신한위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학회에 대부분의 일반회원들은 신한위가 불순세력이라고 보고 있는데.......
그리고 제가 무작정 혼자 학회비판을 하는것이 아니라 다른분들과 공방을 벌이면서 토론을 합니다... 이 토론을 보고 제3자들이 판단하고 '여론'이 형성되고 '여론'은 세상을 바꿉니다....
겁먹은 개는 제가 아니라 회원님입니다.... 감춰두고 덮어놓고 싶은 부분을 하나씩 다 들춰내서 진실이 밝혀지다보니 회원님이 그동안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단체의 치부가 들어나는것이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이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보고 겁먹은 삽살개로 표현하시는 회원님은 참...
닛켄과 학회가 싸워서 나온 결과를 사실대로 말하는것이 왜 겁먹은 개의 행동입니까?
흐름님도 개미와 배짱이의 예를 들었지만 성품의 비슷한점을 말했을뿐 개라고 말한적은 없습니다.그래서 되게하라님과의 토론을 다른분들이 싫어하는것입니다.그리고 신한위에 대해서는 저도 말할수있는 기근을 살펴보았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허락하지를 않는군요.멀지않은 시기에 신한위에대한 글을 삭제하고 이카페를 떠날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흐름님이 다시 오실지는 모르지만 가치적인 토론이 어렵다고 생각한 흐름님이 현명한것 같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것을 개의 성품이라고 하시니.... 제눈에는 회원님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ㅡ ㅡ
회원님께서 저와 토론을 버거워 하시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근거가 없이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흐름님 또한 수없이 학회의 과도한 선생님 띄우기에 대해서 수없이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닛켄법주 기생조작사진이나, 시애틀 사건에 대한 토라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회원님은 귀를 틀어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것을 걸어온 것이 아까워서 쉽게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기에 빠진 사람들도 처음에는 사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같다고 말씀드릴수가 있지요.....
그렇다고 학회가 사이비종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학회가 회원님이 생각하시는것처럼 그렇게 깨끗하고 청결하기만 한 단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구속이 되어도 교인들은 왠만해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에 모든것을 건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확신시켜라..... 그리하면 , 당신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학회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피하시는 회원님께 뭐라고 드릴말씀은 없습니다.... 가시는것을 잡을수는 없겠지요....
되게하라님과 토론이 어려운것은 되게하라님의 주장의 내용이 일관성이 없고 무엇이든지 유리한대로 갖다 붙인다는데 있습니다.단언하건대 되게하라님의 논법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누구도 되게하라님을 설득할수없다고 생각합니다.불법대화를 이런식으로 하는분은 처음본것 같습니다.그리고 아까 비록 비유라고하지만 되게하라님이 불쾌하신데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되게하라님이 저에게 먹통이다 뭐다 비유를 하시기에 그정도는 이해하실줄알고 잘못사용한것 같습니다.아무튼 미안합니다.
저의 주장이 뭐가 일관성이 없다고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지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주장 : 1. 석가부처님을 존경합시다. 2. 학회에서 선생님을 너무 띄운다. (좌담회 때마다 선생님에 대한 영상시청하기, 대성인에 대한 책자 한권없고 선생님에 대한 책이 전부, 법련지 곳곳에 선생님 젊은시절의 사진...모든 체험담에 임의대로 선생님 스피치 끼워넣기....등등)이것의 저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래도 제목수행으로 인해서 얻은 공덕이 많기 때문에 제목수행의 위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닛켄법주의 기생사진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근거를 제시해도 막무가내, 맹목적으로 학회편을 드시기에 저역시 너무 과격한 표현을 썼습니다. 저역시 회원님께 그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제가 이 카페에서 활동하는것은 시간이 남아돌아서도 아닙니다. 제가 믿는 종교가 제발 21세기 최고의 종교로 우뚝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대성인 본불론에 대해서도 같이 연구하고 공부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서로 사과하며 스스로 참회하시는 모습은 두분다 훌륭하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