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석평(潘碩枰)의 묘(墓)는 광주 반씨 장절공파 사당인 장절사(壯節祠)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반석평은 반기문(潘基文) 前UN사무총장님의 조상이라 한다. 반석평에 관련해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문집에 관련 기사가 나온다.
반석평 비갈(碑碣)은 최근래 새로 세운 것으로 글자가 선명하여 옮겨 보았다. 그리고 광주 반씨 묘역(墓域)에서 오래된 문인석(文人石)을 찍어 보았다. 새로 세운 비석과 석물(石物)이 예전 것과 공존하는데 최근래 대대적인 보수를 한 것이다. 《광주반씨 장절공파 장절사 창건기적비》를 참고하면 2020년경 祠堂이 建立된 것으로 나온다.
장절사 바로 뒤편에는 큰 갈참나무가 보인다. 참나무 종류인데 맨아래 사진이다. 이와 관련해서 구약성서를 인용하고 의견을 달았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는 젊은 시절 반복해서 읽었는데 지금 들추어 보니 그 때는 글자로만 읽은 것 같다.
헷족속과 墓地를 판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왜 주(主)라고 호칭했을까? 主란 主人이란 뜻이고 아랫사람인 노비가 主人에게 하는 말이다. 손님이 주인에게 주인님이라고 존칭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이방인이자 떠돌이며 다른 부족들 틈에 우거(寓居)하던 아브라함이 오히려 헷족속에게 主라고 호칭했어야 했다.
에브론은 재산이 있는걸 보니 아브라함에게 머슴살이를 한 사람은 아닌것 같다. 아브라함에게 포섭된 인물이었을까? 아브라함이 많은 가축들을 키우는 부자이니 재산이 탐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비위를 맞추느라 主라고 부른걸까? 평소 안면(顔面)이 있고 가깝게 지내던 이웃이었던 것은 맞는것 같다.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세기 23장 15절]
이 말은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이다. 먼저 땅값을 제시하고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較計)하리이까 라고 말한다. 노련한 장사꾼 모습이고 거래를 많이 해 본 사람의 말이며 전부터 잘 알고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 떠돌이 아브라함에게 하등 主라고 부를 이유가 없으니 아브라함을 높이기 위해 후대에 꾸며낸 구절일 것이다. 하여튼 아브라함은 일찍부터 막벨라 굴을 눈여겨 본 게 틀림없다.
우선 반석평의 아버지 반서린의 묘지명을 싣는다. 반석평 묘 위에 아버지 반서린의 묘가 있다. 묘앞에 반서린의 묘갈(墓碣)이 있는데 김안국이 썼다. 그리고 모재 김안국의 《 모재집 모재선생집권지십삼》에 수록되어 있다.
『 潘瑞麟墓碣銘 모재집 원문을 보니 필사본이고 潘瑞鱗으로 표기했다. 麟이 맞으므로 潘瑞麟으로 정정했다.
潘公瑞麟。字應之。光州人。和厚以畜德。善斯嗜。愛斯汎。人有急難必救。有忤不與校。頤志田園。淡泊爲隣。成化甲申。卒于第。一鄕咸涕相弔曰。善人亡矣。室張氏。以喪葬于沃溝縣某原。服闋。三子碩楨,碩枰,碩權幼。夫人悼公不顯。誨諸孤冀有立。携至京就學。躬績以給。京師人嘆曰。孟翟母也。居幾歲。以弘治庚申。竟卒于京。諸子微弱。不能以喪歸。乃葬于高陽郡之某里。後五年。伯仲中司馬試。又後三年。 季繼之。仲又登第。選入藝文館。今爲待敎。人又稱曰。斯父斯母。當有斯慶。惜不見耳。仲與安國交篤。痛不及養。旣無可奈之何。請碣墓道。庶垂不朽。義難却。因衆誦言者略述之。公之考曰鏡城判官岡。祖曰副護軍思德。曾祖曰工曹典書忠。天人之考曰副護軍智。銘曰。
耕又耘有不獲。種厥德慶來積。美三良家之赫。紀貞珉詔千億。
<번역문>
반서린(潘瑞麟) 묘갈명(墓碣銘)
반공(潘公)의 이름은 서린(瑞麟)이고, 자는 응지(應之)이며, 광주(光州) 사람이다. 온화하고 후덕하여 덕을 길렀으며, 좋은 일을 보면 즐겨 하고 남들을 널리 아꼈다. 다른 이에게 급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구해주었고, 자신에게 거슬려 하는 자가 있어도 대항해 따지지 않았다. 전원(田園)에서 마음을 기르며 늘 담박하게 살았다. 성화(成化) 갑신년(1484년)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를 “선량한 분이 돌아가셨구나”라고 했다.
부인 장씨(張氏)는 남편을 상장(喪葬)한 뒤 옥구현(沃溝縣) 모처의 언덕에 묘를 썼다. 삼년상을 마쳤으나 세 아들인 석정(碩楨), 석평(碩枰), 석권(碩權)이 아직 어렸다. 부인은 남편이 세상에 현달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아이들이 뜻을 세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쳤다. 세 아들을 데리고 한양(京)으로 와서 공부를 시켰는데, 몸소 길쌈을 하여 학비를 대주었다. 이에 한양 사람들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맹자(孟子)의 어머니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게 한양에 거주한 지 몇 년 만인 홍치(弘治) 경신년(1500년)에 부인 역시 끝내 한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들들의 힘이 미약하여 상여를 메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고양군(高陽郡) 모처의 마을에 묘를 썼다.
그 후 5년 뒤에 첫째와 둘째가 사마시(소과)에 합격하였고, 또 3년 뒤에는 막내마저 뒤이어 합격하였다. 게다가 둘째(반석평)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갔으며 지금은 대교(待敎)가 되었다. 사람들이 또 칭송하여 말하기를 “그 아버지에 그 어머니가 있으니 당연히 이러한 경사가 있는 것인데, 직접 보지 못하심이 애석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둘째가 나와(글쓴이 김안국) 교유가 매우 두터운데, 부모님을 제때 봉양하지 못한 것을 몹시 아파하였다.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자, 묘소 길목에 세울 묘갈명을 부탁하여 영원히 전해지기를 바랐다. 내 의리상 거절하기 어려워 여러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는 바를 바탕으로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하였다.
공(반서린)의 아버지는 경성 판관을 지낸 강(岡)이고, 할아버지는 부호군 사덕(思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전서 충(忠)이다. 부인(장씨)의 아버지는 부호군 지(智)이다.
명(銘)에 이른다.
밭 갈고 김매어도 수확하지 못할 때 있으나, 덕을 심어놓으니 경사가 쌓여 찾아왔네. 훌륭한 세 아들로 가문이 빛나니, 이 단단한 돌에 기록하여 영원토록 알리노라.』
報德門과 壯節祠 모습.
潘碩枰 碑碣 碑陽
潘碩枰 碑碣 陰記
탁본처럼 보이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옮겼다. 누군가 땀흘리면 뒷사람의 수고는 덜어진다. 그 분께 감사드린다.
자헌대부 형조판서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반공지묘(資憲大夫 刑曹判書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潘公之墓)
반석평 묘 아래 후손 묘소에서 찍은 문인석.
키가 어린아이만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모습이 귀엽다. 동자석(童子石)을 연상케 한다. 사진을 찍느라 풀섶을 헤치고 제쳐놓는 바람에 단잠을 깨뜨린 것 같아 미안했다. 몸체에 자란 돌이끼가 오랜 연륜을 말해준다.
<내가 동자석이라고? 고얀놈. 얘 이놈아, 네 할아버지만큼 나일 잡쑤었겠다.>
이 땅에 있는 흔한 나무가 소나무와 참나무다. 참나무 종류는 몇가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도토리묵을 해먹는 상수리나무, 예전 소만(小滿)무렵 논에 거름이 되라고 꺾어 넣은 잎이 넓은 떡갈나무와 갈참나무가 있다. 갈을 깎아 넣는다 했다.
수많은 풀과 과실나무는 어릴적에 구분이 어렵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성장하는 차이를 보고 구별한다. 그리고 사람의 입장에선 쓰임이 중요했고 자주 찾는 풀과 나무에 여러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같은 풀과 나무를 일컫는 이름이 지방마다 달라 혼동을 준다.
참죽나무를 가죽나무, 가중나무라고 부르는 사람이 흔한데 분명히 다른 나무다. 참죽나무는 봄에 붉은 순을 꺾어 삼고 말리면 훌륭한 반찬이 된다. 남부지방에서는 부각으로 많이 해먹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이 먹기에는 향이 강하다.
그리고 참죽나무는 크게 자라면 심재(深材)가 단단하고 아름다워 소목장(小木匠)들이 선호했다. 절과 인가(人家) 가까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유다.
이와 달리 생김새가 비슷한 가중나무는 까작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들판이나 야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잡초처럼 잘 자라고 재질이 약하고 불땀도 좋지 않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잡목에 불과했다. 잎은 소도 먹지 않아 군불을 지피는 땔감으로 썼다.
이와 달리 키가 큰 상수리나무는 용도가 커서 참나무라 했다.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많이 열리고 나무가 크고 단단해서 예전 농가에서 집을 짓거나 농기구를 만들때 소나무와 함께 대접을 받았다. 요즘은 표고버섯을 기르는 농장에서 접종목으로, 캠핑용과 난방용 장작으로 많이 쓰는데 화목난로와 화목보일러 보급으로 각광(脚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참숯을 만드는데 많이 쓴다.
하지만 친족으로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가 있어 헷가리게 하는데 조금 관심을 가지면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참나무이고 한자로 진목(眞木)이라 한다.
구약성서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서 죽은 아내 사라를 위해 묘지(墓地)를 구하는데, 거져 준다고 하지만 거절하고 값을 지불하고 대대로 자신의 족속 매장지로 삼는 구절이 나온다.
아래 길게 인용한 창세기를 보면 여호와는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서 여러번 나타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는다.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도 여호와가 나타났고 그 부근에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니 떠돌이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는 각별한 땅이었다.
여호와가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이 고난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곳은 평범한 땅이 아니라 신성한 땅이자 마음의 평안을 찾는 회복의 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神은 지독히 고통받는 자에게 나타난다. 신내림이라 볼 수 있다.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葬事)한 것은 마땅한 묘지를 얻지 못하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묘지를 산것은 현명한 처사였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이자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종이에 써서 문서를 남긴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공증(公證)한 셈이다. 아브라함이 살 적에는일반 백성들은 문맹(文盲)이었고 아브라함도 문맹이었기에 구두(口頭)계약이 성(盛)하고 효력이 있었다. 흔히 언약(言約)이라고 한다. 언약(言約)은 우리도 쓴 말이다. 언약으로 맺은 사랑. 비슷한 말이 약조(約條)하다이다.
반석평 묘갈을 보면 광주(廣州) 용진리(龍津里)에 처음묘소를 정했다가 지금 음성군 원남면에 이장한 것으로 나온다. 묘지를 사거나 연고에 따라 묘를 잡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좀더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조상의 묘를 이장하는 이유는 후손들이 이주하여 새로운 땅에 세거(世居)하면서 성묘나 사초와 벌초를 편리하게 하고 제사를 이어가고 가문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창세기12 장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6절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절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창세기 13 장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8 장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창세기 23 장
1절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2절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절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4절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5절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6절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절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8절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찐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9절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準價)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하기를 원하노라 10절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1절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2절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13절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절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15절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절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18절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19절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절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원문>
碑陽
資憲大夫 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議政府左贊成 諡 壯節 光州潘公 諱碩枰之墓
配 贈貞敬夫人 南陽朴氏 合祔
配 贈貞敬夫人 禮安李氏 祔左
配 貞敬夫人 眞寶趙氏 祔右 乾坐
<陰記>
吾執友司寇潘公文氏寢疾 始吾候視日一至焉 其薦也再至三至 竟不起 吾哭之痛 越辛丑夏 練且有日 其庶子士渾用趙夫人命丐銘 將表諸墓 道嗚呼 吾尚靳不腆之文 使公行蹟不顯於後耶 公諱碩枰公文其字也 系出海陽 即今光州有諱思徳忠武衛副護軍 贈兵曹參議 諱崗 鏡城判官 贈戶曹參判 諱瑞麟 忠佐衛副司果 贈吏曹判書 皆以公貴也 判書公配即 忠武衛副護軍 張智之女也 公生于成化壬辰 幼岐嶷不羣 稍長學日進 遊上庠以聲譽 服輩行正德丙寅 聖上改玉翌年大比 釋褐即選 補藝文館檢閱 居史局者累 閲寒暑 陞司憲府監察 工曹佐郎 公素長射御 多權略朝議欲試地 除咸鏡北道評事 告滿遷司諫院正言 歷戶刑禮三曹正郎 時揀儒將 無出公右 擢超三級 授慶興府使公推心莅職大爲民夷所頌連收五最 内遷承文院叅校 轉内資正復超四級 秩通政 慶源府使未上任遘疾就醫于京滿浦僉使缺公用延薦出鎭居數年 復以疾還 除公州牧使 癸未 新朝廷用師西北驅逐近塞夷落 特拜公咸鏡南道節度使 未幾坐事遞任俄授兵曹叅議在中兵凡五年 贊務輸畫 時論歸多 竟擇授咸鏡北道節度使 階嘉善 公久於戎事 曉達夷情 條説亹亹隱然有推轂之望朝職不復煩 以摠練之任 進試方岳 歷按忠清全羅平安咸鏡黃海五道 自始政至報勩皆用勤謹爲理 復遍爲春省地官冬曹貳卿 京兆亞尹 初備叅僚復充上价 兩遭朝燕 擧無愆效 竟用久次望屬陞秩 特超資憲拜漢城府判尹 遷刑曹判書兼都摠管及屬疾丐閑移知樞府公 自筮仕至 易簀實三十四年 歷任中外 皆有聲績 性周敏 裁决事務案無留牘慮定應卒事多辦治待人御下 皆得歡心 律身簡約 終始不懈 而展用未究 議者嗟惜 公凡三娶 初配朴氏 生員桂亨之女 繼配李氏府使檣之女三聘趙氏 士人龜齡之女 卒旡嗣以弟之子士濂爲后庶出子曰士渾 女嫁叅判崔璡 子士清公卒于嘉靖庚子五月十九日春秋週甲 有九用 治命 耦葬李夫人于廣州龍津里 寔是年八月初一日 銘曰
朝務擇人人自重身世 官多債孤 進易伸公携束書有 名稷下不事沽衒躍于大治收 聲珥筆取 最戎馬由卑至鉅周非己致至貳穪(稱)福 衛績孰我 敢躓逮判京兆又長 秋部倚任方殷胡嗇其壽業家 雖微慮深 則達我銘孔孚以戀 裔末
嘉善大夫行掌隸院判決事 湖陰 鄭士龍 撰
通德郎議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官 世子侍講院弼善 金魯 書 并篆額
<표점>
資憲大夫 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議政府左贊成 諡 壯節 光州潘公 諱碩枰之墓
配 贈貞敬夫人 南陽朴氏 合祔
配 贈貞敬夫人 禮安李氏 祔左
配 貞敬夫人 眞寶趙氏 祔右 乾坐
吾執友司寇潘公文氏寢疾,始吾候視,日一至焉。其薦也,再至三至,竟不起。吾哭之痛。越辛丑夏,練且有日,其庶子士渾用趙夫人命丐銘,將表諸墓。道嗚呼!吾尚靳不腆之文,使公行蹟不顯於後耶?
公諱碩枰,公文其字也。系出海陽,即今光州。有諱思德,忠武衛副護軍,贈兵曹參議;諱崗,鏡城判官,贈戶曹參判;諱瑞麟,忠佐衛副司果,贈吏曹判書。皆以公貴也。判書公配,即忠武衛副護軍張智之女也。
公生于成化壬辰,幼岐嶷不羣,稍長學日進。遊上庠,以聲譽服輩行。正德丙寅,聖上改玉。翌年大比,釋褐即選,補藝文館檢閱。居史局者累閱寒暑,陞司憲府監察、工曹佐郎。公素長射御,多權略。朝議欲試邊地,除咸鏡北道評事。告滿,遷司諫院正言,歷戶、刑、禮三曹正郎。時揀儒將,無出公右。擢超三級,授慶興府使。公推心莅職,大爲民夷所頌,連收五最。内遷承文院叅校,轉内資正。復超四級,秩通政,慶源府使,未上任。遘疾就醫于京,滿浦僉使缺,公用延薦出鎭。
居數年,復以疾還,除公州牧使。癸未,新朝廷用師西北,驅逐近塞夷落,特拜公咸鏡南道節度使。未幾,坐事遞任,俄授兵曹叅議。在中兵凡五年,贊務輸畫,時論歸多。竟擇授咸鏡北道節度使,階嘉善。公久於戎事,曉達夷情,條説亹亹,隱然有推轂之望。朝職不復煩,以摠練之任,進試方岳,歷按忠清、全羅、平安、咸鏡、黃海五道。自始政至報勩,皆用勤謹爲理。復遍爲春省、地官、冬曹貳卿,京兆亞尹。初備叅僚,復充上价。兩遭朝燕,擧無愆效。竟用久次,望屬陞秩,特超資憲,拜漢城府判尹,遷刑曹判書兼都摠管。及屬疾,丐閑移知樞府。
公自筮仕至易簀,實三十四年。歷任中外,皆有聲績。性周敏,裁决事務,案無留牘。慮定應卒,事多辦治。待人御下,皆得歡心。律身簡約,終始不懈。而展用未究,議者嗟惜。
公凡三娶:初配朴氏,生員桂亨之女;繼配李氏,府使檣之女;三聘趙氏,士人龜齡之女。卒旡嗣,以弟之子士濂爲后。庶出子曰士渾,女嫁參判崔璡、子士清。公卒于嘉靖庚子五月十九日,春秋週甲有九。用治命,耦葬李夫人于廣州龍津里,寔是年八月初一日。
銘曰:
朝務擇人,人自重身。世官多債,孤進易伸。 公携束書,有名稷下。不事沽衒,躍于大治。 收聲珥筆,取最戎馬。由卑至鉅,周非己致。 至貳穪(稱)福,衛績孰我?敢躓逮判,京兆又長。 秋部倚任,方殷胡嗇?其壽業家,雖微慮深。 則達我銘,孔孚以戀裔末。
嘉善大夫行掌隸院判決事 湖陰 鄭士龍 撰
通德郎議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官 世子侍講院弼善 金魯 書 并篆額
<번역>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계셨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셨으며, 시호는 장절(壯節)이신 광주 반공(潘公), 휘 석평(碩枰)의 묘이다.
정경부인에 추증되신 남양 박씨는 합장하였고, 정경부인에 추증되신 예안 이씨는 무덤 왼쪽에 부장(祔葬)하였으며, 정경부인 진보 조씨는 무덤 오른쪽에 부장(祔葬)하였다. 乾坐
--- 乾坐는 무언가 착오가 있다. 지금 묘자리와 반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언뜻 손좌건향(巽坐乾向)으로 보이는데 아래 《창건기적비》를 참고하면 사좌해향(巳坐亥向)이라 한다. 예전 족보에 있는 이장하기전 묘자리 坐向을 말하는 듯하다. 풍수에서 乾坐는 주역의 乾卦와 결부되어 하늘, 아버지(父), 지도자의 자리라고 한다.
《광주반씨 장절공파 장절사 창건기적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碩枰公은 서기 1472년 壬辰에 出生하시니ㆍㆍㆍㆍ서기 1540년 庚子 5월 19일 卒하시니 墓는 舊 廣州 龍津里 고량원(高良原?) 乾坐에 初葬했다가 후에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陵村 海山 巳坐(弟 碩權墓上座)로 遷移했다. 配는 南陽朴氏와 禮安李氏와 眞寶趙氏로 乾位 4合窆했다.》 여기서 乾位는 바로 위에 아버지 潘瑞麟 墓가 있어서 쓴 말 같다.
나의 오랜 벗인 형조판서 潘公文(반석평)이 앓아 누웠을 때, 내가 처음 간병하러 갈 적에는 하루에 한 번씩 들렀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두 번 세 번 찾아갔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으니, 내가 통곡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신축년(1541년) 여름을 지나 1주기(練祭)가 다가오자, 서자(庶子) 사혼(士渾)이 조부인(조씨 부인)의 명을 받들어 묘비명을 청하며 장차 무덤에 표석을 세우려 하였다. 아! 내가 어찌 글재주가 부족하다 핑계대며 아끼어, 공의 행적과 업적이 후세에 드러나지 못하게 하겠는가?
공의 휘(이름)는 석평(碩枰)이요, 공문(公父)는 그의 자(字)이다. --- 반석평의 字는 公文이다. 비문에는 公父라 되어 있는데 誤記다. 비슷하니 혼동이 생긴거다. 고쳤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六에 나온다. 潘碩枰 字公文 正德丁卯式年 以生員中文科三等居末 刑曹判書八道監司五道兵使 三司翰林 壯節公 光州人 父瑞麟 居沃溝 安瑭所薦擢 見於于野談有庶名
홍치17년(연산 10년) 갑자방목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潘碩枰 公文 文科 本光州 父瑞麟 刑曹判書 八道監司 五道兵使 居京
본관은 해양(海陽)이니 곧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조상 중에 휘 사덕(思德)은 충무위 부호군으로 병조참의에 추증되셨고, 휘 강(崗)은 경성 판관으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셨으며, 휘 서린(瑞麟)은 충좌위 부사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셨으니,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써 추존된 것이다. 이조판서 공의 부인은 바로 충무위 부호군 장지(張智)의 딸이다. --- 반서린(潘瑞麟)은 반석평(潘碩枰)의 친부(親父)인데 반석평 외조부(外祖父)가 장지(張智)란 뜻이다. (諱瑞麟,忠佐衛副司果,贈吏曹判書。皆以公貴也。判書公配,即忠武衛副護軍張智之女也。)
공은 성화 임진년(1472년)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뛰어나 무리 중에 도드라졌으며 조금 자라서는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국학(성균관)에서 노닐 적에 명성과 명예가 자자하여 동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정덕 병인년(1506년), 성상(중종)께서 즉위하셨다. 이듬해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니 곧바로 발탁되어 예문관 검열에 보임되었다. 사관의 자리에 머물며 여러 해를 보내고 사헌부 감찰과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본래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고 계책과 전략이 많았다. 조정의 논의가 변방 지역에서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여 함경북도 평사(評事)로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자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고, 호조·형조·예조의 세 판서 밑에서 정랑을 역임하였다. 당시 선비 출신의 장수를 선발하는데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세 등급을 뛰어넘어 경흥 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진심을 다해 직무에 임하여 백성들과 이민족(여진족) 모두에게 크게 칭송을 받았으며, 연이어 다섯 번이나 고과에서 최우수 등급(五最)을 받았다. 조정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가 내자시 정(正)으로 옮겼다. 다시 네 등급을 뛰어넘어 당상관(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경원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병을 얻어 한양에서 치료받던 중 만포 첨사의 자리가 비자, 공이 천거를 받아 변방의 진영을 지키러 나아갔다.
수년간 머물다가 다시 병으로 돌아와 공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23년), 새로 들어선 조정이 서북(서북) 국경에 군대를 일으켜 변방에 가까운 오랑캐 부락들을 몰아낼 때, 특명으로 공을 함경남도 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병조에 머문 지 무릇 5년 동안 군무를 돕고 계책을 세우니 당시의 여론이 그 공로를 많이 인정하였다. 마침내 다시 뽑혀 함경북도 절도사에 제수되었고 품계는 가선대부로 올랐다. 공은 오랫동안 군사 업무에 몸담아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았으므로, 조목조목 설명하는 부지런한 모습에 은연중 군대를 통솔할(추곡) 재목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조정의 직책으로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고 총괄하여 훈련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지방의 장관(방백)으로 나아가 충청, 전라도, 평안, 함경, 황해의 5도를 두루 다스렸다.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공로를 보고할 때까지 모두 부지런하고 신중함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았다. 다시 공조의 참판(冬曹貳卿)과 한성부 우윤(京兆亞尹, 右尹)을 두루 거쳤다. 처음에는 사신단의 부사(참료)로 서임되었다가 다시 정사(상가)가 되어 두 번이나 명나라 조정의 잔치에 참석하였는데, 행동에 전혀 허물이 없었다. 마침내 오랜 경력으로 인해 품계가 오를 차례가 되자, 특별히 자헌대부로 뛰어넘어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고, 형조판서 겸 도총관으로 옮겼다. 병이 깊어지자 한가한 자리를 청하여 중추부 지사로 옮겼다.
공이 처음에 벼슬길에 나아갔을 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실로 34년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모두 명성과 업적이 있었다. 성품이 두루 민첩하여 사무를 재단하고 결단함에 책상에 머물러 있는 문서가 없었다. 책략을 미리 정하여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니 많은 일이 잘 처리되었다. 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을 거느릴 때 모두의 기쁜 마음을 얻었다. 몸가짐을 간약하게 단속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능력을 다 펼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논의하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공은 무릇 세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 박씨는 생원 계형(桂亨)의 딸이요, 둘째 부인 이씨는 부사 장(檣)의 딸이며, 셋째 부인 조씨는 선비 귀령(龜齡)의 딸이다. 끝내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인 사렴(士濂)을 후사로 삼았다. 서출 아들은 사혼(士渾)이라 하고, 딸은 참판 최진(崔璡)에게 시집갔으며 그 아들은 사청(士清)이다. 공은 가정 경자년(1540년) 5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였다. 유언에 따라 그해 8월 초하루, 광주 용진리에 이씨 부인과 함께 장사 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조정의 정무는 인재를 택하고 그 사람은 스스로 몸을 무겁게 처신하네. 세습되는 관직은 빚이 많으나 외로이 나아간 이는 뜻을 펴기 쉽도다.
공은 한 묶음 책을 손에 쥐고 조정(稷下)에서 명성을 떨쳤도다. 명예를 사거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不事沽衒) 훌륭한 치세에 힘차게 도약했네.
사관의 붓을 잡고 명성을 거두었으며 군마가 치닫는 변방에서 최고의 공을 세웠도다. 낮은 자리에서 큰 자리에 이르기까지 두루 소임을 다한 것은 스스로 사사로이 취한 게 아니었네.
판서의 버금가는 자리에 올라 복을 일컬었으니 변방을 지킨 공로에 나를 따를 자 누구인가? 때로 엎어지기도 했으나 마침내 판서에 이르고 한성부의 수장(판윤) 또한 지냈도다.
형조(秋部)의 중책에 온전히 의지하려 하였거늘 바야흐로 왕성할 때 어찌 그리도 속절없이 거두어 가셨는가? 그 수명과 업적은 집안에 남아 있으니 비록 미천하나 생각은 깊도다.
이에 나의 명(銘)을 전하여 지극한 믿음으로써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게 하노라.
가선대부 행 장례원 판결사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지음.
통덕랑 의정부 사인 겸 춘추관 편수관 세자시강원 필선 김노(金魯)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을 함.
-------------------------------------------
아래는 예전 비문 내용이다.
【判書潘公墓碣銘(家額)】 有明朝鮮國資憲大夫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 潘公墓碣銘 幷序 嘉善大夫行掌隷院判決事 鄭士龍 通德郞守義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官世子侍講院 弼善 金魯 書幷篆額
【판서 반공(潘公) 묘갈명(전액)】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 반공묘갈명 병서
가선대부 행장례원판결사 정사룡(鄭士龍)이 글을 짓고,
통덕랑 수의정부사인 겸춘추관편수관 세자시강원필선 김로(金魯)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하다.
나의 벗 형조판서 반공문(潘公文)씨가 병에 걸리자 처음에는 내가 문병한 것이 하루에 한번 갔고 위독해짐에 두 번, 세 번도 갔었는데 필경은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가 슬피 곡하였다. 해를 넘겨 신축년(1541, 중종 36))에 소상이 끝나고 며칠 뒤 그 서자 사혼(士渾)이 조부인(趙夫人)의 명을 받고 명(銘)을 청해 묘에 표식을 하고자 하였다. 아아! 내가 차마 변변치 못한 글을 아껴서 공의 행적을 후세에 드러내지 못하게 하겠는가? 공의 이름은 석평(碩枰), 공문(公文)는 그 字이니 世系는 해양(海陽)에서 나왔는데 바로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사덕(思德)이라는 분은 충무위부호군을 지내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강(岡)은 경성판관을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서린(瑞麟)은 충좌위 부사과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판서의 부인은 즉 충무위부호군 장지(張智)의 따님이다. 공은 성화 임진년(1472, 성종 3))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우뚝하게 빼어나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며 점차 장성하며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훌륭한 명성으로 동년배들을 감복시켰다. 정덕 병인년(1506)에 중종이 반정을 하고 다음해의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곧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사국(史局)에서 5년을 지내고 사헌부감찰, 공조좌랑에 승진하였다. 공은 평소 활쏘기와 마술에 능하고 책략이 많으니 조정의 논의가 변방에서 공을 한번 써보고자 하여 함경북도 평사(評事)에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서 사간원정언으로 전임되고 호조, 형조, 예조 등 삼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장(儒將 : 문신으로 장수에 임용되는 것)을 뽑는데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발탁하여 세 품계를 올려서 경흥부사에 제수하였다. 공은 진심을 다해 직책에 임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크게 칭송하였고 인사고과에서 연이어 다섯 번 최우수를 받았다. 내직으로 승문원참교에 전임되었다가 내자시정으로 옮겼다. 다시 네 등급을 넘어 통정대부의 품계로 경원부사가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에 걸려 서울로 와서 의원에게 갔다. 만포첨사의 자리가 비자 공은 조정의 천거로 만포진에 나갔다.
몇 년을 지내고 다시 병으로 돌아와 공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조정에서는 서북에 군사를 일으켜 요새 근처의 오랑캐부락을 쫓아내고자 하여 특별히 공을 함경남도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일에 휘말려 체임되었으나 곧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병조에 재임한 것이 5년인데 업무를 도와 극진히 하니 당시의 여론이 많이 쏠렸다. 마침내 함경북도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니 품계는 가선대부이다. 공은 군사의 일에 오래 종사하여 오랑캐의 사정을 정통하게 알고 조목조목 힘써 개진하여 은연중 장수의 명망이 있었기에, 조정의 논의가 군사를 감독하고 조련하는 직임 때문에 다시 번거롭지 않았다. 관찰사로 등용이 되어 충청, 전라, 평안, 함경, 황해 등 다섯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처음 정사를 볼 때부터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모두 부지런하고 공경히 함을 법도로 삼았다. 다시 두루 예조와 호조, 공조의 참판, 한성부의 차관을 지냈다. 처음에는 막료로서, 두 번째는 상사(上使)로 두 번 명나라에 갔는데 일을 거행함에 어긋남이 없어 마침내 효과가 있었다. 오래도록 승진하지 못하다가 명망이 모아지자 승진하여 특별히 자헌대부에 올라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며 형조판서로 전임하여 도총관을 겸하였는데 병에 걸리자 한가한 직책을 구하여 지중추부사로 옮겼다. 공이 벼슬을 시작해서 별세할 때까지 실로 34년이니 내외의 직책을 역임하여 모두 훌륭한 업적이 있었다. 성품은 빈틈이 없고 민첩하니 사무를 재결함에 책상에는 지체된 서류가 없었으며, 숙고해서 결정하고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니 많은 일이 처리되었다. 사람을 대하고 부하를 다스림에 모두 환심을 얻고, 자기 몸을 간약(簡約)하게 지켜 시종 게으르지 않았으나 뜻을 펼치는 것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세번 장가갔는데 첫 부인 박씨는 생원 계형(桂亨)의 딸이고 둘째부인 이씨는 부사 장(檣)의 딸이며 셋째부인 조씨는 선비 귀령(龜齡)의 딸인데 끝내 후사가 없다. 이부인과 조부인은 모두 정부인에 봉해졌다. 서출의 아들은 사혼(士渾)이고 딸은 참판 최진(崔瓘)의 아들 사청(士淸)에게 시집갔다. 공은 가정 경자년(1540, 중종 35) 5월 19일에 별세하니 춘추는 69세이고 유언에 따라 광주(廣州) 용진리(龍津里)에 이부인과 함께 장사지냈으니 즉 이해 8월 1일이다. 명하노니,
조정에서 사람을 선발함에 힘쓰니 사람마다 자중하는구나. 대대로 벼슬길 실패 많은데 외로이 나아가 쉽게 능력 펼치네. 공은 책 보따리 항상 가지고 다니며 직하(稷下:제선왕이 학궁을 세운 곳, 성균관을 이름)에서 명성 얻었으나 명예를 구하거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크게 쓰이기를 일삼지 않았다. 명성 거두어져 한원에서 붓을 잡았고 군사의 일에 가장 뛰어났구나. 미관을 거쳐 높은 자리에 이르도록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네. 지방관이 되고 중앙의 대신을 지내니 다섯 곳의 관찰사가 되고 삼조의 참판이 되었다. 겸손함에 복을 받고 그 자취 지키니 누가 감히 나를 막겠는가? 경조의 판윤이 되고 또 형조판서가 되어 의지하는 책임 바야흐로 성대한데 어찌 그 수명에 인색하였는가? 집안은 비록 미미하나 원래 깊으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내가 매우 간절히 명을 써서 후손에게 밝히노라.
가정 20년 신축년(1541. 중종 36) 10월 일에 세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