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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묵상글 (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 무엇을 바랄 것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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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무엇을 바랄 것인가?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열리다’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은 주님께서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의 귀와 혀를 열어주시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두 ‘열림’을 보고 즉시 정반대의 열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는 열리지 말아야 할 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고,
복음에서 장애인의 경우는 열려야 할 은총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반대의 열림이 있게 된 것은,
정반대의 요인 때문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뱀 곧 사탄의 유혹과 주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받고 복음의 장애인은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욕망이 있었고
복음의 장애인에게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창세기에는 욕망이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무 열매가 탐스러웠다는 말에서 탐욕을 유추할 수 있고
그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압니다. 욕망이 없으면 유혹도 없다는 것을.
사실 배가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음식 냄새는 결코, 유혹이 되지 않고,
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면 어떤 여자의 유혹도 유혹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욕망이란 결핍을 채워 더 만족하게 되고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자의 배부른 결핍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 외에는 다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 가질 수 있었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딱 하나 못 가진 것이 있었고 그러나 평소에는 쳐다보지 않았는데
뱀이 그것을 가리켜 보게 하자 그만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쳐다보지 않았으면 되는데 쳐다보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지요.
홈 쇼핑을 보지 않으면 되는데 보는 바람에 충동 구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사탄이 보라고 해도 보지 않으면 되는데
안에 욕망이 있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못 가진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욕망이고,
이때 못 가졌다고 느끼는 결핍이 바로 욕망의 결핍입니다.
이런 욕망의 결핍과 반대되는 것이 갈망의 결핍입니다.
욕망은 있는데도 더 바라기에 결핍을 느끼는 것이지만
갈망은 정말 없고 그래서 생존 또는 존립에 결핍이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지만
욕망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도 더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이라면
갈망은 며칠을 한 끼도 먹지 못해 정말 죽 한 그릇이라도 먹고 싶은 겁니다.
갈망은 살기 위한 것이고,
욕망은 만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도 끝없는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갈망은 살기를 바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고
욕망은 더 큰 만족을 바람으로써 유혹을 받게 하며,
갈망은 구원자를 만나 은총의 세계에 들게 하고
욕망은 사탄을 만나 죄의 세계에 들게 하는 것이다.
구원과 만족 중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갈망과 욕망 중에 무엇을 가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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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는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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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귀를 열어 주시고 입을 풀어주시기를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입이 닫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 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더듬는 이 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수필지도를 하시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특진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어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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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1973년 ‘첫 영성체’ 교리를 받으면서 외웠습니다. 어느덧 50년이 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준 곳이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흔들리는 것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그 유혹에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에 깊이 빠져들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유혹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교만’입니다. 뱀의 모습으로 온 사탄은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이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합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아벨’을 들판으로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욕망’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욕망’이라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바세바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야가 바세바의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서 넘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욕망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네 번째 유혹은 ‘욕심’입니다. 아합왕은 자신의 포도원이 많았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 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졌습니다.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웠지만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면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에 따라서 내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혹의 바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유혹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 보다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용서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욕망의 문을 활짝 열고 나눔과 봉사의 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병자들, 굶주린 이들에게 그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시대의 ‘에파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망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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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 많습니다. 단층 주택이었고 넓은 마당에는 나무와 꽃도 많았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저녁 식사 때면 늘 북적대던 기억, 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가족 모두가 함께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 마당에서 키우던 동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집니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부릅니다. 100년 전 헤밍웨이가 걷건 거리와 현재의 파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53년 이후 이렇다 할 재개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을 다시금 간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와 비슷한 감사의 인사를 받곤 합니다. 20년 넘게 써 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 때문입니다. 제 글을 보다가 어느 순간 보지 않았는데, 아는 지인이 저의 묵상 글을 보내줘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묵상 글을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계속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 평화, 기쁨, 희망, 믿음 등의 소중한 가치가 담긴 마음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십니다. 특히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냥 손만 얹어 주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시지요. 손만 얹어도 충분히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계속된 접촉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말로 위로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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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인내하라. 자신의 결함을 자책하며 용기를 잃지 마라. 하지만 지체하지 말고 그 결함을 고치기 시작하라. 그 노력을 매일 새롭게 시작하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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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영적 삶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대구 사수동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보 축일이라 대축일로 지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네딕도 오빠와의 오누이 관계가 신비롭습니다. 산같은 정주의 대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 베네딕도 오빠와의 관계도 참 흥미롭습니다. 이들의 주님 안에서 영적우정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는지 서로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생몰生沒연대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두분이 쌍둥이였고 두분 다 480년 같은 해에 태어나 547년 같은 해에 선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녀 사후 얼마 지난 그해에 돌아가셨던 듯 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두분의 영적우정(33장)과 성녀의 죽음(34장)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인의 몬테카시노 수도원 가까이 수녀원에서 살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수녀는 일년에 한 번, 오라버지 베네딕도를 만나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했던 듯 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성녀는 세상을 떠나던 해, 성인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셨으나 총총히 떠나려는 매몰찬 오라버니가 원망스러워 성녀는 간절히 기도하셨고 갑자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로 인해 수도원에 못 돌아가고 밤새 대화를 나눴다는 전설적인 내용이 베네딕도 전기 33장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남매가 만난 삼일후 성녀는 세상을 떠났고, 이어지는 묘사가 아름다워 34장 대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삼일후에 성인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에 모셔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
얼마나 열린 수도생활에 주님 안에서 아름답고 깊은 영적우정을 나눈 오누이 관계였는지요! 지금은 잘 부르지 않지만 33장과 34장을 바탕한 복음전 라틴어 부속가도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시간되면 번역된 우리말 부속가를 한번 불러보려합니다.
이런 성녀 축일을 배려한 오늘 말씀의 배치도 참 적절합니다. 저는 오늘 성녀 축일과 말씀들을 통해 참된 영적 삶의 세부분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첫째, 경청과 환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은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의 우선적인 바램이 바로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베타니아 이들의 집에 들리셨을 때 주님의 마음을 알아챈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합니다. 마르타의 항의를 일축하시며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마르타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베네딕도 규칙 첫 마디 역시, “들어라, 내 아들아, 스승의 가르침을. 그리고 그 가르침에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라.” 들어라로 시작되는 규칙서 첫말마디입니다.
수도원 식탁에도 큰 산봉우리 셋을 배경한 그림의 천에 씌어있는 글자가 “들어라”입니다. 산같은 침묵과 경청의 정주 수도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묵묵히 침묵중에 바라보며 듣는 정주의 불암산은 말그대로 정주의 스승입니다. 새삼 참된 영적 삶에 경청의 환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관상과 활동입니다.
둘은 참된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둘은 우열관계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둘의 균형과 조화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인 것은 관상의 경청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베네딕도회의 모토가 둘간의 우선순위와 균형을 말해 줍니다. 저는 일컬어 목운동의 영성이라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 보고 땅 보고, 하느님 보고 사람 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이 우선순위를 절대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환대가 우선이고 음식의 환대는 다음입니다. 이래서 미사구조도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입니다. 바로 이점을 마르타는 몰랐습니다. 마르타 역시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요! 음식접대 사랑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는 마리아 같은 관상가도, 마르타 같은 활동가도 필수입니다. 마리아만 있어도 안되고 마르타만 있어도 안됩니다. 두부류의 형제자매들의 균형과 조화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둘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밖으로는 활동가 마르타, 안으로는 관상가 마리아의 두 측면을 지니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에 마르타는 크게 회개하여 깨닫고 배우며 우선순위를 바로 잡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는 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셋째,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영적우정에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입니다.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깨달음과 더불어, 배움과 더불어 마음은 순수해지고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질 것이니,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영적우정도, 보이는 도반 형제들과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다음 말씀은 광야 인생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덕목들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파트너로, 협력자로 삼아 당신과의 영적우정을 깊이하겠다는 주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참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사이든지 형제간의 사이든지, 참된 영적우정을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할 필수적 덕목이,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경책 말씀의 가르침에 마리아는 경청의 중요성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을 것이며, 마르타도 활동을 자제하며 경청의 관상에 각별히 유의해야 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오늘 앞서 소개한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영적우정은 얼마가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웠는지요!
마리아와 마르타도,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도 주님 안에서 수직적 차원에서 주님과의 영적우정을 깊이하며 더불어 상호간 수평적 차원의 우정도 깊이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주님 안에서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간의 우정도 함께 가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영적 삶을 위한 세요소를 공부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영적 삶의 중심에 이 거룩한 미사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참된 영적 삶을 훈련, 습관화하여 우리 모두 참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어제 써놓은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외딴곳”이란 자작 깨달음의 잠언성 글을 나눕니다.
-“답은
내안에 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적초월의 자리 외딴곳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적 깊이와 높이의
본질추구의
내적초월의 삶을 살자
주님 만나러
외딴곳 찾아나설 것 없다
언제 어디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초월적 거점의
내적공간이 형성되고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이 된다
참 겸손
은총의 열매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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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귀가 잘 들리지 않으면 말을 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탁구 선수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탁구장에 들러 탁구를 칩니다. 그날의 일정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운동합니다. 제가 가는 탁구장은 조금 특별한 탁구장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조금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보청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소리에 민감합니다. 또한 말도 조금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특별한 점입니다. 탁구는? 기가 막히게 칩니다. 제가 평생 이기지 못할 실력을 갖춘 선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각각의 아픔을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연결된 아픔, 곧 하나로 이루어진 연결된 상처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신앙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들을 만납니다. 분명 다른 상처와 아픔인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상담하는 저도 상담을 받는 분도 서로 놀랄 때도 있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문제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던 것이군요.
우리 내면의 아픔은 각각이 다른 아픔이 아닌 하나로 연결된 아픔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소외됨과 분노가 연결되고, 두려움과 학대가 연결되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연결된 우리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열려라.’라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감고 있는 여러 개의 쇠사슬을 풀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저는 자주 실수합니다. 자주 잘못합니다.
고해소 안에 있다보면 이런 내용의 성사를 자주 듣게 됩니다.
저는 자주 실수합니다. 알면서도 실수합니다. 뉘우쳤는데도 또 그 실수를 저지릅니다. 잘못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그 잘못을 저지릅니다. 저는 구제불능입니다. 이런 마음이 저를 더욱 고해성사와 멀어지게 만듭니다.
누구나 실수할수 있습니다. 잘못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반복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의 실수로 족하다. 두 번의 용서는 없다. 두 번하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무한한 용서이신 분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실수하고 잘못하면 또 같은 잘못에 걸려 넘어졌다 하더라도 언제든 주님 앞에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용서의 은총으로 조금더 밝은 곳으로 나오십시오.
실수하는 것과 잘못하는 것은 어쩌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우리들의 특권일지 모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더욱 겸손해 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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