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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펴신 하나님
출 7: 5-7. 행 12: 1-3
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마음 등의 표현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손의 역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알기에 중요한 그 역할을 묘사할 때에 하나님의 손이라고 한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 호모 파버(물건을 만드는 사람) 등의 인간 표현이 있습니다. 그 중에 호모 바빌리스(homo habilis) 즉 손 쓴 사람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인간의 손의 신비를 빗대어 하나님의 손의 신비를 알게 합니다. 보세요,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발이란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릎이란 말이 있습니까? 이란 말은 없습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가운데 손가락을 다섯 개 이상 가진 것은 없습니다.
엄지는 참 신비롭습니다. 엄지는 작은 손입니다. 아이작 뉴턴은 다른 증거가 하나도 없더라도 엄지 하나만 갖고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솜씨와 손재주가 비롯되는 곳도 바로 두뇌입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입니다. 손은 무엇을 만들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도우기도 합니다. 손이 쉬고 있을 때는 얼굴도 쉬고 있으며, 마음이 활발하면 손도 활발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손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 손은 창조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으며 어루만질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습니다. 환영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으며, 축복할 수도 있으며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치유할 수도 있으며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구걸할 수도 있으며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손은 안전과 보호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협박하는 주먹이 되기도 합니다. 손은 가장 두려운 것일 수도 있고 가장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손이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손은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의 손이 이렇게 능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데 이것을 지으신 것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은 입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손으로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으셨다,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신다, 능하신 손으로 인도하여 내셨다 등 손으로 하신 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묘사하는 성경의 표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에 묘사된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 인물은 한 손은 남자, 한 손은 여자의 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손에는 진노, 다른 한 손에는 축복을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애굽에는 진노, 이스라엘에는 축복을 내리시는 손입니다. 구약에서 손을 편다는 표현은 다양합니다. 욥기 1:11에는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라고 합니다. 시편 104:28에는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라고 합니다. 시편 144:7에는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라고 합니다. 시편 145:16에는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손을 펴시겠다고 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손을 애굽 위에 펴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손을 펴시지만 그 곳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펴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재앙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펴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나타"입니다. 이 말은 천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광대한 손을 펴서 애굽을 덥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큰 손을 펴시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빠져나가기를 합니까? 도망칠 데가 있습니까? 완전히 사로잡힌 것입니다. 다니엘 11:42에는 "그가 열국에 그 손을 펴리니 애굽 땅도 면치 못할 것이므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애굽 땅을 치실 것입니다.
애굽 땅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애굽은 빠져나갈 데가 없이 손을 펴시지만 이스라엘은 다 빠져나갑니다. 손을 펴시지만 애굽에만 펴십니다. 같은 나라에 살지만 애굽은 손 맛을 보고, 이스라엘은 손 덕을 봅니다. 기드온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 기드온은 믿지 못하여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하시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구합니다.
기드온은 먼저 양털에만 밤새 이슬이 내리고 땅은 마르고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음날 아침에 기드온의 부탁대로 양털은 젖고 땅은 마르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그래도 믿지 못하여 이번에는 양털은 마르고 땅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땅에는 이슬이 내리고 양털은 마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골라 치시고 이스라엘을 골라 구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4:40-41에는 두 사람이 밭에 있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며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골라서 상과 벌을 주십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힘이 들었을 때는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받쳐주어 내려오지 않게 하였습니다. 모세의 팔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펴시니 이스라엘이 이긴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손을 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펴신 손, 이것 때문에 아말렉이 망했습니다. 욥기 19:21에는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라고 합니다. 하니님이 치시면 불쌍하게 됩니다. 불쌍한 정도가 아니라 망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손을 펴야 이스라엘이 인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펴신 손은 이스라엘에게는 인도하시는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손을 펴야 평안합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명기 1:31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손으로 안아주신 도움의 손입니다. 손가락은 지시하고 인도합니다. 길을 물어볼 때 손가락으로 지시해야지 턱으로 "저기요"하고 알려주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의도 아닙니다. 손가락질은 친절한 인도도 되지만 잘못하면 그렇지 않고 삿대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에 손가락질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펴서 인도했지 턱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삿대질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사랑은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끝은 이스라엘에게 사랑이었습니다. 출애굽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 2:8과 18절에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라고 합니다.
에스라서에도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선한 손,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게 나옵니다.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하지요? 엄마 손은 진짜 약손이랍니다. 손에서 자기가 나와 실제로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만져주심을 바랐습니다. 만지면 치유가 됩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만져주는 것은 굉장한 교육과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스코트랜드의 수호성자 가운데 성 가일스(St. Giles)가 있습니다. 이 분은 원래 아테네의 왕자였는데 깊은 산속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랑하던 암사슴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프랑스의 왕이 사냥을 나왔습니다. 왕은 숲 속의 사슴을 보고 겨냥해서 화살을 쏘았습니다. 가일스가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 화살이 날아옵니다. 그는 자신의 손 내밀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습니다. 가일스의 손에 화살이 박혔습니다. 달려온 프랑스왕은 가일스의 손에 화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사죄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뉘우치고 새 사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화살을 막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재앙을 막습니다. 애굽의 병거를 박고 홍해도 건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입니다. 우리를 이끄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순간 순간 느껴야 합니다.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팔에 안겨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습니다.
셋째, 손을 펴야 애굽이 여호와인줄 압니다.
하나님의 손은 무서운 손입니다. 징계하는 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봐야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여호와인줄 압니다. 누가복음 24:25에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온 세상에 있습니다만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징계를 받아야 비로소 늦게 압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힘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꼭 늦게 알아서 문제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우리는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런가 보죠? 꼭 맞고 알고, 잃고 알고, 죽고 압니다.
알 때는 이미 늦은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일찍 알수록 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를 보세요. 손을 펴기 전에 여호와인줄 알았으면 그렇게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평생에 한번도 치고 박고 코피 나도록 싸워본 적이 없어서 싸움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는 것은 상대를 보고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움 잘 하는 사람은 상대를 알고 안될 성싶으면 미리 꼬리 내리고 물러설 것입니다.
실컷 얻어맞고 터지고 꼬리 내리면 때는 늦습니다. 바로가 처음부터 꼬리를 내리고 항복했으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버티다 잃을 것 다 잃고, 아들 잃고, 병거 잃고 그제사 보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세상 왕들의 모습입니다. 다 잃고 손을 펴야 비로소 아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 4:24에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 누구나 알아야 합니다. 로랜스 형제가 말한 대로 성경이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팔은 결코 짧아지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결론
고든의 박람회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펌프에서 물을 격렬하게 퍼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일관성 있게 물을 끌어올립니다. 그 속도에 놀라서 가 보았더니 진짜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생긴 기계였습니다.
그 손이 펌프에 붙어 있었고 분수처럼 생긴 우물에서 지하수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실상은 그 기계가 물을 퍼내는 것이 아니라 물이 그 사람을 펌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일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일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는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기도는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녹게 하며 하나님의 손을 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손을 펴시게 합시다. 우리를 인도하고, 지키고, 복을 주시는 손이 펴지기를 간구합시다. 이 펴진 손과 함께 사는 한 주간의 삶이 됩시다. 펴진 손과 함께 펌프질로 풍성한 물을 얻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자기 운영
출 7: 5-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80세였고 아론은 팔십 삼세였더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첫째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드렸고 둘째 주일은 어버이주일, 경로주일로 드렸습니다. 오늘은 중년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중년은 몸으로 말하자면 허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중년은 중후한 인생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년의 때는 무엇보다도 삶의 내용이 든든해져야 할 때입니다. 가정도 건실하고 사업도 건실하고 나라에 공헌도 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든든한 헌신자가 되어 살아갈 때입니다. 그것이 중년의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세의 일생의 모습을 통해서 중년의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3기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인생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 1기 왕궁생활 40년
이때는 말하자면 모세의 청소년기의 때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의 청소년기가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모세는 그때 불가능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때 왕궁생활을 통해서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잘 생기고 능력 있고 왕자들 가운데서 기골이 장대하고 능력이 특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청소년기를 기고만장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때가 있습니다. 조금 성공하거나 공부를 좀 잘하면 기고만장하고 그때 좀 일찍 성공했다 싶으면 더 기고만장할 것입니다. 이때가 모세의 청소년기의 모습입니다. 모세의 청소년기는 한마디로 기고만장했던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2기 연단의 생활 40년
사람이 기고만장하면 반드시 한번 꺾일 때가옵니다. 그래서 이탈한 궤도를 수정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공사판에 나갔다가 싸우는 노동자들을 보고 말린다는 것이 한번 치게 되었고 그것이 그만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미움을 사서 그 길로 광야로 도망가서 좌절의 때를 보냅니다. 그때부터 40년 동안 모세는 광야에서 살인자로, 전과자로, 실패자로, 패배자로, 도망자로 전락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으로 전락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렇게 한 번씩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이 기고만장할 때는 옆이나 위나 깊은 곳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기고만장할 때 그의 눈에 아무도 안 보였습니다. 오직 자신의 능력만 보였고 실력만 보였고 수단이나 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불가능은 없다 하고 자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나서 보니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곳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웃이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이 보였고 자만했던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코가 쑥 빠져서 살아가다가 어느 날 호렙산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이제는 당신의 뜻을 알았다는 말이고 뭔가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무릎을 꿇는 생활이 참 중요합니다.
모세가 그날 호렙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데 80년이 걸렸습니다. 이 순간이 모세로 하여금 인생을 전환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때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는데 오늘 비로소 모세가 무릎을 꿇으니까 찾아오셨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 하셨어도 모세가 알아듣지도 상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실패자의 자리에서 비로소 겸손하게 무릎을 꿇으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실패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패의 자리는 눈을 뜨게 하는 자리이고 옆을 보게 하는 자리이고 생각이 깊어지는 자리이고 깊은 곳을 보게 하는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집을 꾸미고 칠하고 단장하고 나가지도 않고 이웃도 모르고 오직 집안에 머물며 집만 단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습니다. 그러자 평소 왕래도 하지 않았던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 불을 끄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건축업자는 집을 지어 팔려고 내 놓은 새 집에 와서 당분간 살라고 집을 선뜻 내주었습니다. 그 집에 가 보니까 새 침대에 새 이불에 화장실에 새 수건이 부엌에 먹을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분이 비로소 마음과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멋진 집에서 혼자 사는 것 보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번 일로 이웃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재로 인해서 집과 살림은 없어졌지만 이 일로 이해서 더 소중한 이웃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가 좌절을 맛보면서 비로소 눈이 뜨였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이웃이 보였고 자신이 보였고 고난 받는 민족이 눈에 보였고 보이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살던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저 밑바닥에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 깊은 곳, 저 높은 곳, 저 높은 하나님의 뜻은 아무나 느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 경지를 보고 느끼는데 8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실패도 좌절도 중병을 앓는 것도 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은 성숙하게 되고 눈을 뜨게 되고 깊은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 3기 소명의 인생
모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고난 받는 네 동족을 바로에게서 구원하라.” 그래서 모세는 비로소 나이 80에 민족을 위해서 봉헌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0년 인생을 민족을 구원하고 출애굽 시키는데 인생을 송두리째 바칩니다. 그래서 모세의 제 3기 인생은 소명을 이루는 봉헌의 인생이었습니다.
밥 버퍼드라는 분이 “후반전”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하루 시간에도 오전시간이 있고 오후시간이 있습니다. 운동에도 전반전이 있고 후반전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전반전이 있고 후반전이 있습니다. 모세는 모두 120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인생을 3기로 나누어서 전반 중반 종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전반 40년 인생은 기고만장하고 안하무인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반 40년 인생은 실패와 좌절의 쓴맛을 경험한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때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되었고 깊은 곳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리고 종반 40년 인생은 송두리째 하나님을 위하여 동족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헌신시키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120년 인생가운데서 종반 40년간이 가장 빛이 나타났고 화려하고 소중하게 운영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80여년 산다면 대략 35세 까지를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성공에 미쳐서 살아갈 때입니다. 대부분 성공하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 위해서 인생의 초점을 다 맞추고 살아갈 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정신없이 밤잠을 설치며 살아갑니다. 그 때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 반칙도 서슴지 않습니다. 변칙도 구사합니다. 성공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살아갈 때입니다. 그 때는 가족도 둘째고 이웃도 둘째고 신앙도 둘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것이 모두 반칙 인생입니다. 그때는 오직 성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고 질주하며 살아갈 때입니다. 인생의 전반전은 모세의 청소년 시절과 같이 자기우선 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얻는 것도 있지만 집이 불탄 사람처럼 잃는 것도 너무 많을 때입니다. 그 때가 너무 오래가면 안 됩니다. 그 시기가 오래 가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집니다.
클린턴 정부 때 경제정책을 주름잡던 로버트 라이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권력의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아침에 그 자리를 내놓고 조용히 초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쓴 책이 “The future of success" 우리말로 ”부유한 노예“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권력의 실세의 자리에 있을 때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퇴근하는 것이 싫을 정도로 돈과 권력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1년 2년 지나다 보니 관계하던 사람들과 단절되고 아내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자식들과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성공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권력인가, 무엇을 위한 출세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성공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일 중심 성공 중심 보다는 관계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미련 없이 그 좋은 자리를 내 놓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출세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성공도 중요합니다. 물론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면서까지 가족과 멀어지면서까지 친구들과 관계가 깨지면서까지 성공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가면 막심하게 후회를 하게 됩니다. 지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뭔가 이루어 보겠다고 형제도 부모도 가족도 모른 채 일에 매달리고 출세를 위해서 동분서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자리하실 여백이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있겠습니까. 그 마음에 부모가 눈에 보이겠습니까. 형제도 보이질 않을 것입니다. 오직 보이는 것은 자신뿐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뭔가 내 뜻대로 이룬 것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아마 기고만장할 것입니다. 별소리를 다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얼마나 자만하고 교만하고 큰소리를 다 하며 살아가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시고 시편 2:4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고 웃으셨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한때 그렇게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습니다. 그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실패하고 40년 동안 초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눈이 뜨였습니다. 생각이 열렸습니다. 깊은 곳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말은 깊이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순종할 준비가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오셔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너는 애굽에 가서 고난 받는 네 동족을 이끌어 내라” 그때 모세는 인생의 후반에 가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고 인생후반을 아주 소중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송두리째 바치게 됩니다. 그것이 모세의 인생입니다.
인생 중에서 젊었을 때는 비교의식이 큽니다. 그래서 동료들 보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를 외칩니다. “누구는 몇 년 만에 성공했다” 그 말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젊은 아내들은 당신은 왜 못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빠른 것이 좋기는 합니다. 빨리 성공하고 빨리 돈 벌고 빨리 이루는 것도 좋습니다. 그래서 커닝해서 1등도 합니다. 반칙으로 뛰어서 1등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빨리가 너무 우상화 되었습니다. 1등하면 어떻게 1등을 했느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 과정을 묻지도 않습니다. 나타난 결과만을 보고 사람들은 성공했다 실패했다고 단정지어버립니다. 그래서 온갖 편법들이 난무하고 반칙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삶의 초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공, 출세, 소유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로 초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공도, 출세도, 부자 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 내가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전반전에는 1등을 위해서 빨리 빨리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면 인생의 후반전은 의미를 따지고 격식을 따지고 얼마나 내가 옳은 가를 따질 때입니다. 하나님은 큰일을 많이 했을 때도 칭찬하시지만 그런데 어떻게 왜 그 일을 했느냐를 더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양도 중시하시지만 무슨 생각으로 왜 그 일을 했느냐를 더 따지십니다. 그것이 성숙한 태도입니다. 그것이 중년이후에 생각하고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깨달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을 때 모세는 한사코 사양을 했습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뭔가 알고 눈이 뜨이고 보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무능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기고만장했을 때였다면 “염려마십시오, 제가 간단하게 해 치우겠습니다”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 좀 무지할 깨다 가장 용기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철이 들고 눈이 뜨이고 경험을 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부족한 자신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양하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을 사양하다가 재차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이 주어졌을 때는 자신을 송두리째 헌신시켜서 혼신을 다해서 민족의 해방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데 몸을 던집니다.
이것이 중년의 때에 할 일입니다. 중년의 때는 의미를 중시할 때입니다. 중년의 때는 더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갈 때입니다. 중년의 때는 더 소중한 것을 위해서 일할 때입니다. 중년의 때는 나를 떠나서 이웃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입니다. 유한양행의 창설자 유일한 씨는 미국에 유학 가서 기초를 닦고 터전을 이루었지만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놓고 돌아와 가난한 민족을 살려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유한양행을 창립했다고 합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송자총장은 미국에 터전을 다 이루어 놓았지만 조국을 위해서 뭔가 이바지해야 한다는 뜻 때문에 그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돌아와 일했습니다. 어떤 대학교수는 그 좋은 자리를 놓고 미개한 나라에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인생의 중년 때는 무릎을 꿇게 되면 이런 생각을 갖게 되고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중년의 인생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인생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이 이렇게 우리 인생의 중앙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준비는 길고 사역은 짧다
출 7: 7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는 준비는 길게 시키시고 잠간 사용하셨습니다.예수님은 30년 준비하셔서 3년 일하셨습니다.모세는 80년 준비시키셔서 40년 사용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12;4) 한 송이의 국화꽃을 가을에 피우기 위하여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우는 법입니다.
우리 지방 목사님들은 2년동안 돈을 모아서 성지순례를 하였는 데 10일만에 끝났습니다.
<준비는 길고 사역은 짧았습니다>
준비가 길수록 큰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1.아직도 더 준비하는 자세로 사십시오.
모세는 40년 궁중에서 준비한 것으로 그만하면 준비는 끝나고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그래서 40살에 과감히 이스라엘 민족해방에 나섰습니다.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혈기가 아직도 살아 있었습니다.
40살에 이스라엘 사람과 애급인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죽여서 모래속에 파묻었습니다.이것이 탄로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큰 일을 할 사람은 조그만 일에 혈기를 부리면 안 됩니다.200만명을 애급부터 이스라엘까지 그것도 40년을 일도할 사람은 웬만한 일에는 그저 웃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외강내유한 사람보다 내강외유한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혈기가 없는 사람으로 훈련시키려고 하셨습니다.200만명중에는 별별사람이 다 있습니다.그 누구도 다 품에 안고 나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200만명의 지도자는 너그러워야 합니다.큰 사람이어야 했습니다.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보내셔서 40년을 더 준비시키시고 80살에 부르셨습니다.그리고 120살까지 40년을 쓰셨습니다.
실패는 이제 끝이라는 신호가 아니라 더 준비하라는 싸인입니다.
침체는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기다리라는 조용한 음성입니다.
막힘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은 6번 전쟁에 패하였습니다.그러나 그는 패배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그래서 다시 착실히 준비하여 3번 전쟁을 이기면서 미국을 독립시키고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준비는 길고 사역은 짧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더 준비하여야 합니다.늦지 않았습니다.더 준비하여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좋아 하는 주석이 있습니다.영국의 매튜헨리 목사님이 쓴 주석입니다.얼마나 깊은 내용인지 지금도 그 책을 읽으려면 무릎을 꿇고 읽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매튜 목사님은 그 책을 출간하기 위하여 40년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하루에 몇 시간씩 그 책에 바쳤습니다.정말 긴 준비였습니다.출판하는 데는 불과 몇 달 걸렸지만 준비는 40년이 걸렸습니다.
준비는 길고 사역은 짧았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더 준비하여야 합니다.서두르면 안 됩니다.
대기 만성(大器萬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큰 그릇일수록 천천히 완성된다는 말입니다.작은 집은 한 달이면 완성합니다.큰 건물은 수년이 걸립니다.그러나 독일의 퀼론 성당은 600년 걸려서 지었습니다.
독버섯은 6시간이면 자라납니다.그러나 대들보감인 참나무는 30년을 자라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에펠탑에 올라 간 적이 있습니다.에펠의 아버지가 설계를 하였습니다.아버지가 지었습니다.아들때부터 돈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파리 어느 곳에서든지 에펠탑이 보이는 높은 탑입니다.파리의 상징적인 명물이었습니다.그러나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올라오지를 않았습니다.그 당시만 하여도 그런 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에펠은 에펠탑은 안전하다고 아무리 설명하여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에펠은 아예 에펠탑 위에 방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안전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파리를 관광하는 이들은 에펠탑을 꼭 올라가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준비 과정이 대를 잊도록 길었습니다.준비는 길고 사역은 짧은 법입니다.
2.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절망하고 있거나 포기하고 있는 여러분이 있다면 소망을 가지십시요.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세이었고 아론은 팔십 삼세이었더라>
이 말씀을 계속 읽고 또 읽도 음미하고 또 생각하십시요.묵상하고 명상하며 내 말씀으로 삼으십시요.큰 일을 시작한 나이가 80세입니다.모세는 40살이 미디안으로 도망하였습니다.이제는 다시 애급으로 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전국에 현상금을 걸고 지명수배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던 것같습니다.그런 상황에서 애급으로 들어가 보아야 당장 체포되고 잡히면 당장 사형이었습니다.이제 나머지 인생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과 함께 살면서 그런대로 살다가 죽을 형편이었습니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인생을 체념하고 살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80세에 부르셨습니다.
미국의 성공연구가 나포레옹 힐이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간 사람 500명을 연구하고 나서 공통점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실패하여 이제는 끝이라는 지점을 한 발자국 넘은 사람들이었다>
삼손을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삼손의 힘의 원천은 머리칼에 있었습니다.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머리를 길렀습니다.그러나 기생 드릴라에게 속아서 머리를 깍이고 말았습니다.삼손은 두 눈이 뽑히고 말았습니다.그리고 쇠줄로 묶은 후 연자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서서히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인 다곤신당에 모였습니다.자기 나라를 그렇게 괴롭히던 삼손을 다곤신이 잡히게 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즐기려는 모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삼손을 끌어다가 재주를 부리게 하며 승리를 자축하며 즐겼습니다.다곤신당안에사람들이 가득하였습니다.그리고 지붕에만 3,000명이 모여 있었습니다.정부 고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아마도 10,000 명 이상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사람들은 삼손을 다곤 신당 두 기둥 사이에 세웠습니다.삼손은 두 기둥 사이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삼손은 오른 손으로 한 쪽 기둥을 다른 손으로 다른 기둥을 붙들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삼손은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넘어뜨렸습니다.다 죽고 말았습니다.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삼손은 죽을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거대한 건물을 혼자서 무너뜨리는 강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살아서도 적들을 많이 죽였지만 죽을 때 가장 많은 적들을 죽였습니다.
죽는 순간 5분동안에 한 일이 일생 한 일보다 크고 많았습니다.나는 담대하게 외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일생동안 한 일이 없어서도 죽기 직전에 한 일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사람들이게는 죽기까지 기회가 있습니다.
김 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우리 같이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여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노벨이 나이가 많이 들어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가 있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호텔에서 조간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
대문짝만한 제목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였습니다.그리고 기사에 <다이나마이트의 왕이 죽다><죽음의 사업가><파괴의 발명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자기인 줄 알고 그렇게 보도한 것이었습니다.노벨은 자기 별명이 그렇게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그래서 자기 재산을 털어 노벨 상을 만들었습니다.죽기 직전에 한 일은 온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노벨도 일생동안 한 일보다 죽으면서 한 일이 더 많았습니다.모세도 청청할 때 80년동안 한 일보다 죽음을 앞에 두고 다 늙어서 한 40년의 일이 얼마나 위대하였습니까?
출애급기는 40장입니다.그런데 80세 이전의 일은 1장과 2장뿐이고 80세후의 일은 38장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사람은 최후까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최후까지 기회가 있습니다.포기하고 있었던 일이 있으면 오늘 다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십시요.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지금 가지십시요.그러면 시작이 됩니다.위대한 출발이 될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근처 시골에 교회 하나가 지어졌습니다.그 교회가 지어진 유래가 있습니다.스잔이라는 어린 소녀가 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그는 혼자 먼 곳으로 교회 다니면서 이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그의 기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이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여 주세요.교회가 너무 멀어요.그래서 친구하고 같이 교회다니게 하여 주세요.그리고 이 마을에서도 찬양소리가 나게 하여 주세요"
안타깝게도 스잔은 병명을 모를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스잔의 품속에 이런 간절한 소망이 담긴 편지와 마지막 교회 건축헌금 5불이 들어 있었습니다.이 이야기가 마을 주민에게 알려졌습니다.미국 전역에 알려졌습니다.많은 이들이 앞을 다투어 헌금하기 시작하였습니다.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마지막으로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세이었고 아론은 팔십 삼세이었더라>(출7;7)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3.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라.
모세가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아론이 83세에 하나님의 눈에 들었습니다.노아는 500세가 넘어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아서 그 위대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이는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하나님 100,사람 0의 은총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살면서 단 한번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40년간 살면서 단 한번도 애급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게 하여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었습니다.그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도 전혀 없었습니다.
80세에 양을 치는 데 가시떨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신비체험을 주셨습니다.그리고 모세를 향하여 내가 함께 할 터이니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강권하셨습니다.모세는 못 한다고 거절하였습니다.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 되고,손이 문둥병이 되는 신비체험을 주시면서 가라고 하셨습니다.그래도 모세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하나님은 노를 발하시며 가라고 강권하셨습니다.모세는 마지 못 하여 그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100% 하나님의 의도,0% 모세의 의도였습니다.모세의 말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 인생이었습니다.모세의 마지막 40년 토막은 하나님이 함께 살아주신 인생토막이었습니다.그 40년은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 중요한 시기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준비는 길고 사역은 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십시요.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시는 역사가 기록될 것입니다.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십시요.
어느 시골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헛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곤 하였습니다.그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두 아들은 아버지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웃기만 하였었습니다.
"하나님! 두 아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세요"
이것이 가장큰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두 아들이 헛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헛간 바닥에 움푹 파인 두 구멍이 있었습니다.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던 자리였습니다.두 아들은 빗자루를 던지고 그 곳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던 자리입니다.참으로 오랫동안 기도하던 자리입니다.우리도 교회에 나갈 것입니다.그리고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준비한 기도는 죽음 직후에 결실을 맺기도 하였습니다.
서모세트 모음은 84세에도 작품을 써냈습니다.버트란드 러셀은 84세에도 작품을 평화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피카소는 90세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루빈스타인은 89세 때에도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아데나워는 88세에도 독일 수상을 하였습니다.미켈란젤로는 80세가 넘어서 대작들을 만들었습니다.모네도 85세 후에 거작을 그렸습니다.콤모르도 빈더빌트느 대분이 은퇴하는 나이인 70세가 넘어서 철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후 수 백만불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안 이숙 여사가 우리 교회 부흥회한 것이 86세때였습니다.이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 최 영섭 장관 누나인 최 정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그의 동생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 와서 정부에서 일하려고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습니다.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제는 이름을 날리려는 데 취장암이 발견되어 죽었습니다.죽으면서 그는 <아이구 억울해!>라는 말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모세가 80년 준비한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었고,40년 일한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남자 아니가 태어나면 다 죽일 때 모세만 나일강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었고,하필이면 바로의 딸 공주에게 발견된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그리고 애급 궁중 교육을 40년 받아 나중에 바로왕과 대결하는 데 바로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준비시키는 은총이었습니다.미디안으로 도망한 것 자체도 하나님은 준비시키는 은총이었습니다.그 곳으로 출애급하였기 때문입니다.준비도 은총이요,사역도 은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세이었고 아론은 팔십 삼세이었더라>
준비는 길고 사역은 짧습니다.
잠간 일하기 위하여 오래 준비하는 것이 인생입니다.더디어도 낙심말고 빨라도 교만말고,준비하고 일하는 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분을 바라보라
출 7: 8-13
오늘 저는 ‘그 분을 바라보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희 집 냉장고에 보면 아주 이쁜 여자의 사진이 있습니다. 최근에 저희 집에 오신 분들이 냉장고에 붙혀있는 사진을 보면서 사모님이 저렇게 이쁘시냐고 하는 겁니다. 오는 분들마다 그럽니다. 그런데 그 사진은 저희 집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 중에 한 사람인 ‘김태희’입니다. 김태희가 의류모델로 나온 사진인데 어느날 집사람이 그것을 붙혀놓고 나도 김태희처럼 이쁜 몸매를 만들겠다고 하는 겁니다.
바로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이 법칙은 바로 야곱이 양떼를 늘릴때에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칙을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에 사용하면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능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애굽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입이 둔한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가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바로 앞에서 신처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에 엄청난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를 덧입혀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로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고, 바로는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럴 마음을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백성들을 버리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에는 우리가 말을 잘하고 못하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바로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모세가 바로에게 단순히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전하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는 그 당시 애굽이라는 나라는 세계 최강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최강의 나라의 왕이라는 신분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세 개인적인 문제인데 바로 자기가 왕자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 함께 했던 배 다른 형제라는 것입니다. 람세스라는 책이라든지 모세에 대한 영화에 보면 모세가 함께 교육 받고 나중에는 왕위를 갖고 경쟁하는 존재가 바로 이 바로왕입니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면 나가서 담대하게 전하겠는데 모세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아마 더 불편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가장 편하게 설교하는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바로 와이프가 없을 때입니다. 두 번째로 편할 때는 언제인 줄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이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강의하거나 설교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이기에 더 신경쓰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실수가 용납되지만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실수조차도 크게 다가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여전도회 총회가 있어서 내년도에 봉사하실 일꾼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곧 남전도회도 일꾼을 뽑을 것입니다. 교육부서도 교사와 임원들을 뽑을 것입니다. 그런데 뽑히시는 분들 대다수가 바로 모세의 마음일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능력이 안 됩니다. 말을 못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고 난 후에는 이런 말들이 쏙! 들어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능력 없는 자를 들어 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과거 40년은 바로의 궁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최근 40년의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여기에 50세 이상 되신분들 중에 학교에서 배웠던 거 얼마나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마 다 까먹고 가물가물 하실 것입니다. 과거의 모세는 똑똑했을지 모르지만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 치고 있는 동안에 그는 그저 평범한 유목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바로에게 가서 나의 대변인 역할을 하라고 하니 당연히 하나님 앞에 투정 부릴만도 합니다.
내년에 일하실 여러분들, 투정은 하나님께만 부리시고 어떠한 직분이 오더라도 순종하시면 하나님이 능력 주실 줄 믿습니다.
자! 그러면 순종하는 자에게 어떠한 도움과 능력이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설교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언어 문제였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다 보니 바로 왕이라는 존재에게 가서 그들의 수준에서 말하는 것이 힘들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 문제 때문에 여러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 대신에 아론이라는 도우미를 붙혀 주십니다.
하나님은 100% 다 잘하는 사람 보다는 부족한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족하고 겸손한 자를 쓰셔야 하나님이 도울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교만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종들은 다들 하나 같이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심했던 사람이고 12제자들은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직업이거나 천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하신 종들을 완전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로 내버려 두십니다. 약한 부분에 대해서도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 약한 부분을 인하여 그들이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게 하시고,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그들에게 머물러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늘 답답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잘 못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우스워 보입니까? 바로왕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아론이 통역해 주어야 하는 모세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입니까? 그것도 당당하게 가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7:1절에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신처럼 대접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엑 하나님의 능력을 입혀 주셔서 그를 통하여 무서운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말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가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로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모세으 설득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설득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을 잘 한다고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본문 7:8-13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모세와 아론에게 기적을 요구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만약 바로가 너희에게 기적을 보이라고 요구하면 너희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져라. 그러면 그것이 뱀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가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들 앞에서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 지팡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바로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박사와 박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아론이 행한 것을 모방하여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술사들의 지팡이를 삼켜 버립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기적을 행한 자가 모세와 아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그런 요구를 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시면서 이런 기적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지팡이를 던진 자는 모세가 아니라 아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의 근원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기적을 독점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로 그런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 든 자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마치 자기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로 왔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아이를 고치지 못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능력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늘 새롭게 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에게는 기도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안에 무슨 고유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맡은 직분에 항상 두렵고 떨리는 이유는 나 자신의 기준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갖고 직분을 맡고 일을 하게 되었을 때는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큰 문제는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기적중에 아주 작은 것입니다. 앞으로 더 큰 기적들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오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큰 것만 기적이고 작은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습에서도 큰 문제에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작은 문제는 하나님 앞에 묻지도 않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마술사들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는 뱀들조차도 응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부분에만 신경을 쓰시고 작은 부분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작은 뱀의 세계였지만 사탄의 세력에 의하여 잘못 사용되고 있는 뱀들을 응징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부분에서도 결코 만홀히 여김을 당하기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부분에서도 철저하게 이기시고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영광도 놓치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황의 깊은 부분에도 간섭하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늘 대강대강 하는 버릇이 있게 때문에 “설마 이런 작은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간섭하실까?”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까지 간섭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