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의 사람됨이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서 근심을 잊으니, 늙어 가는 것도 모르는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셨다.
未得則發憤而忘食 已得則樂之而忘憂 以是二者俛焉 日有孶孶 而不知年數之不足 但自言其好學之篤爾 然深味之 則見其全體至極 純亦不已之妙 有非聖人不能及者 蓋凡夫子之自言 類如此 學者宜致思焉 터득하지 못하면 발분하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미 터득했으면 그것을 즐거워하여 근심도 잊어버리니, 이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열심히 하여, 날마다 노력하되 나이가 부족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지만, 다만 스스로 자신이 배우기를 좋아함이 독실하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깊이 음미한다면, 그 전체가 지극하고 순수함도 역시 그치지 않는 묘미가 성인이 아니라면 미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대개 무릇 공자가 스스로 한 말은 그 부류가 이와 같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마땅히 생각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다.
禮標記小雅曰 高山仰止 景行行止 子曰 詩之好仁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예기 표기에 이르길, 시경의 소아편에 이르길,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빛나는 큰 길을 나아간다.”다고 하였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詩經이 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구나! 道를 향해 나아가다 중도에서 그만둘지라도, 몸이 늙은 것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살 나이가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니, 여기에 힘쓰면서 날마다 부지런하게 하여, 죽은 다음에나 그만두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朱子曰 聖人未必有未得之事 且如此說 若聖人有這般事 他便發憤做將去 주자가 말하길, “성인에게는 미처 터득하지 못한 일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만약 성인께 이러한 종류의 일이 있다면, 그는 곧바로 발분하여 가서 장차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忘食忘憂 是逐事上說 一憤一樂循環代至 非謂終身只此一憤一樂也 逐事上說 故可遂言不知老之將至 而爲聖人之謙辭 若作終身說 則憤短樂長 不可幷連下句 而亦不見聖人自貶之意矣 먹는 것도 잊고 근심도 잊는다는 것은 일 위로 쫓아가 말한 것으로서 한번 발분하고 한번 즐거워하는 것이 순환하여 교대로 이른다는 것이지, 종신토록 그저 이와 같이 한번 발분하고 한번 즐거워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 위로 쫓아가 말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늙음이 장차 이를 것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성인의 겸손한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종신으로 보아 말한다면, 발분함은 짧고 즐거워함은 긴 것이니, 아래 구절까지 나란히 연결할 수 없고, 또한 성인께서 스스로를 낮추신 뜻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朱子曰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泛說 若是謙辭 然聖人之爲人 自有不可及處 直要做到底 不做箇半間不界底人 非是有所因眞箇 或有所感發憤而至於忘食 所樂之至而忘憂 蓋有不知其然 而不自知其老之將至也 又如好古敏以求之 自是謙辭 學不厭敎不倦 亦是謙辭 當時如公西華子貢自能窺測聖人不可及處 蓋聖人處己之謙 若平易而其所以不可及者 亦在其中矣 주자가 말하길, “발분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서 근심하는 것도 잊으며, 늙음이 장차 이를 것도 알지 못한다고 운운하며 대략 말하는 것은 마치 겸사인 것 같다. 그러나 성인의 사람됨에 비추어 보면, 스스로 이를 수 없는 곳이 있다면, 곧장 끝까지 철저하게 하고자 할 것이고, 중간에 끼어서 경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의 어떤 것으로 인한 바가 아니라, 혹시라도 느낀 바가 있다면, 발분하여 먹는 것도 잊는 지경에 이르고, 즐거워한 바가 지극하여 근심을 잊는다는 것이다. 이는 대체로 그것이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늙음이 장차 이를 것임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컨대 옛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그것을 구한다는 것도 당연히 겸사이고, 배우기를 싫증 내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겸사다. 그 당시에 공서화나 자공 같은 사람은 스스로 능히 성인께서 미칠 수 없다는 곳이란 대체로 성인께서 자기에게 대처함이 겸손한 것임을 엿보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범하고 쉬운 것 같지만 미칠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역시 그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發憤忘食 是發憤便能忘食 樂以忘憂 是樂便能忘憂 更無些小係累 無所不用其極 但見義理之無窮 不知身世之可憂 歲月之有變也 衆人縱如何發憤 也有些無緊要心在 雖如何樂 終有些係累乎其中 不怨天不尤人 樂天安土安於所遇 無一毫之私意 聖人便是天 聖人有此理 天亦有此理 故其妙處獨與之契合 發憤忘食은 발분하면 곧 밥먹는 것도 잊을 수 있다는 것이고, 樂以忘憂는 즐거우면 곧 근심도 잊을 수 있다는 것으로서, 더 이상 조금도 얽매임이 없고, 그 지극함을 쓰지 아니함이 없으니, 다만 義理의 무궁함만을 볼 뿐이지, 자기 身世가 걱정할만한 것도 세월이 변함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뭇사람은 설사 어떻게 발분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조금의 긴요한 마음도 있지 않고, 비록 어떻게 즐거워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 안에 조금이라도 얽매임이 있는 것이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 것은 하늘을 즐거워하고 땅에 편안해하며 만나는 바에 안주하여, 터럭 하나만큼의 사사로운 뜻도 없는 것이다. 성인께서는 곧바로 하늘이니, 성인께서 이 이치를 갖고 계시면, 하늘도 역시 이 이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오묘한 부분이 유독 이와 더불어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聖人直是脫灑 私欲自惹不著 這兩句 雖無甚利害 細看來 見得聖人超出乎萬物之表 성인께서는 그야말로 초탈하여 깨끗하시니, 사욕은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비록 무슨 대단한 이해관계가 없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성인께서 만물의 껍데기에서 초월하여 벗어났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南軒張氏曰 子路以葉公不知聖人 且欲擬其形容而未知所對也 夫子之意 則以爲卽其近者告之斯可 夫子所言 發憤忘食樂以忘憂不知老之將至者 亦好學之至者也 然則 聖人之所以異於人者 果獨在於好學耶 蓋生知而好學 則是其所爲生知者 固亦莫揜矣 謂聖人所以異於人者 在於好學 亦豈不可乎 남헌장씨가 말하길, “자로는 섭공이 성인을 알지 못하였기에 또한 그 형용을 모방하고자 하였지만 대꾸할 바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공자님의 뜻은 곧 그 가까운 것에 나아가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發憤忘食과 樂以忘憂, 그리고 不知老之將至’라는 것은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중에서 지극한 것이다. 그러한즉, 성인께서 남과 다른 것은 과연 유독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그가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역시 본래부터 가려서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성인께서 남과 다른 것은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憤與樂相反 聖人發憤便至忘食 樂便至忘憂 是兩邊各造其極 如寒到寒之極 暑到暑之極 故曰 全體至極 兩者循環不已 所以不知老之將至 此是聖人之心 純乎天理 別無他嗜好 所以自然學之不厭 故曰 純亦不已 全體 說憤樂 至極 說忘食忘憂 純亦不已 說不知老之將至 쌍봉요씨가 말하길, “憤과 樂은 상반되니, 성인께서 발분하시면 곧 밥먹는 것도 잊으심에 이르렀고, 즐거우시면 곧 근심도 잊으심에 이르렀다. 이 양쪽은 모두 각자 그 지극한 곳에 나아갔으니, 마치 추우면 극단적 추위에 이르고 더우면 지극한 더위에 이른 것과 같았다. 그래서 ‘전체가 다 지극하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두 가지가 순환하기를 그만두지 않기에, 늙음이 장차 이를 것임도 알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마음은 天理에 순수하여 달리 다른 기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연히 배우기에 싫증 내지 않는 것이니, 그래서 ‘순수함이 또한 그침이 없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全體는 곧 憤과 樂을 말하고, 至極이란 忘食과 忘憂를 말하며, 純亦不已란 不知老之將至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