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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성령 충만의 달☜
모든 생명의 양식(복음)을 등한히하면, 사탄의 표적되어 영생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창9:18-29절) 노아의 실수와 저주
부모라고 해서 다 완전한 삶을 살 순 없습니다. 때로는 자식들 앞에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자식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식들한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자식은 아버지의 실수를 마음속 깊이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약한 점과 부끄러운 부분을 가슴 깊이 새겨서 자신은 절대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실제로 아버지의 약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바로 그 모습을 닮아가는 자식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나중에 자기 며느리에게는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잘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당해보니까 다시는 이런 나쁜 시어머니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욕하면서도 자기는 더 지독하게 며느리를 구박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욕하면서도 그대로 닮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안에 그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좋지 못한 모습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 자체를 아주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안에 있는 기질은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나쁜 기질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고쳐서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의로운 사람 노아가 실수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 실수가 아니라,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포도로 포도주를 담갔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그만 취해서 알몸으로 자기 장막 안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 추한 꼴을 함이라는 아들이 보았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이 모습을 보고 다른 두 형제에게 가서 아버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함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 옷을 양어깨에 걸치고. 뒷걸음 질 쳐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알몸 위에 옷을 덮은 다음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나중에 술이 깬 노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이 일로 인하여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가나안은 이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며. *모든 사람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을 축복하면서 *가나안은 이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몇 번씩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나왔는데. 흑인종이 바로 함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흑인들은 저주를 받아 종들의 종이 되어야 하니까 이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지요.
창세기의 이 한 구절을 잘못 해석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흑인 형제들이 억울하게 무시당하고 착취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함의 아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흑인들이 무시당해도 되고. 가난해도 되며, 업신여김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또 실제로 함의 자손이 흑인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인 부분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그런 부끄러운 추태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도 함과 그의 자손들에게는 아버지에게 부끄럽게 여겼던 바로 그 부분이 유난히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특히 가나안은 성(性)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우리는 이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단순히 감정적인 보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이 말을 통해 앞으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밝히고 계십니다.
Ⅰ.노아의 실수
9:20-21절)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어떤 사람들은 노아가 포도주를 전혀 마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술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고 자꾸 마시다가 실수했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노아를 너무 순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아는 인류 최초로 포도주를 당근 사람인 동시에 인류 최초로 포도주에 취해서 추태를 부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는 홍수 전에도 있었습니다. 노아는 최초로 포도주를 담근 것이 아니고 홍수 전에 있었던 포도주 맛이 생각나서 담근 것 같습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담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포도주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도주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줍니까? 처음에 노아는 좋은 일이 있을 때, 자식들과 함께 마시려고. 포도주를 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혼자서 포도주를 이토록 많이 마셨으며, 급기야는 취해서 옷을 홀딱 벗고 벌거벗은 채로 쓰러져 자고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노아의 방심입니다. 홍수 전 노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자기 눈앞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홍수 직후에는 어떠했습니까? 이전과 마찬가지로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또다시 홍수가 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비가 올 때마다 무지개가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농사도 어느 정도 잘 되고. 자식들의 일도 모두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긴장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비참한 실패였습니다. 마치 노아의 마음속에 홍수가 다시 터진 것 같았습니다. 한번 포도주를 입에 대기 시작하자 그동안 포도주에 굶주려 있었던 노아의 육체가 한없이 포도주를 불러들였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만 마시는데서 그치지 않고. 처음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선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노아가 왜 알몸이 되었겠습니까? 단지 포도주를 마시니까 열이 나서 옷을 벗다 보니. 알몸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떤 성적(性的)충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방심했습니다. 이제 홍수는 끝나고. 무지개는 계속 떠오르고 있습니다. 노아의 삶에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끝났고. 자연도 질서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늘 은혜 충만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직도 자기 안에 죄 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탄이 아직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노아 안에 있는 죄 성은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선(線)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옷을 벗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술맛만 보고. 뚜껑을 덮으려고 했는데, 그 선(線)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성적(性的)인 범죄까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아들의 입을 통하여 노아를 여지없이 정죄했습니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노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존귀한 모습이 파괴되며,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경멸과 비난이 들어옵니다. 남자의 경우. 아내로부터 경멸(輕蔑)에 찬 공격을 받게 됩니다. 여자들은 술 취한 남자들을 믿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고.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다 싫어하고 경멸합니다.(경멸=깔보고 업신여김)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는 휴식이나 방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인들이 자기 혼자 방학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반드시 본문과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영적 전쟁상태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그러므로 깨어서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하고, 내 마음이 지금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예의 주시 않으면, 한순간에 집중 포격을 맞아서 폐허가 되고 맙니다. 오늘 코로나 시대 우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릅니다.
건강이 좋지 못하면 고민하지요. 집안의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하면. 밤에 잠도 못자면서 걱정을 합니다. 또 학생들은 시험을 망치면, 밤새 고민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는 것이 곧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병 들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나 위로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한 것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의 대부분이 우리 마음을 살피게 하고, 이 마음 상태를 건강하게 치료받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힌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21:4)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임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사람입니다. 내 육체는 병들고. 주머니에 돈은 없지만, 내 마음이 건강하다면, 하나님이 임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모든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마음이 병들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축복을 하나도 받을 수 없습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약간의 교만이나. 음욕이나. 허탄한 생각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몰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마음속에서 생선 썩은 냄새가 납니다. 썩어서 큼큼한 냄새가 나는데도 자신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설교를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보시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겉은 흰색으로 칠해서 아름답지만. 속은 온갖 더럽고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마음이 치료됩니다.
내 마음이 치료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생각을 지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을 지키는 그것이 능력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지키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아처럼 순간적인 실패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혹시 시궁창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온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경건의 능력은 다 잃어버렸으면서도, 수입이 꼬박꼬박 들어오고 있고, 생활에 다른 문제가 없으니까 평안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내 마음이 정결하고 건강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혹시 지난 주간에 노아처럼 자기 자신을 믿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조용히 주님 앞에 나의 모든 추한 부분을 고백하십시오.
깨끗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리십시오. 즉 *나에게 건강이 회복되고. 경제력이 회복되는 것보다도 이 썩은 마음을 회복시켜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십시오. 심령(心靈)이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썩은 부분을 고침 받지 않는 자는 함처럼 노예 중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입니다.
Ⅱ.아들들의 반응
노아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 아들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습니다. 그중에 가장 나쁜 반응을 보인 아들이 함이었습니다.
9:22절)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의 반응은 대단히 예민하고 민감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렸다*는 말에는 아주 좋지 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일단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고 할 때 *보았다*는 것은 그냥 우연히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아무 의미 없이 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상상하면서 주시해서 볼 때도 있습니다.
영어(英語)에서도 이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해서 그냥 보는 것과 의도를 가지고 보는 경우에 각각 다른 동사(動詞)를 씁니다. 여기에서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아버지가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것이 우연히 눈에 띄어서 *에그머니나, 아버지가 왜 이러시나! 육백 살이 넘은 나이에....*하면서 덮어주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세히 보았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의도를 가지고 응큼하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길을 가다가 우연히 여자를 보는 것이 전부 다 간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성적(性的)인 연상(聯想)을 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즉 *저 여자가 저렇게 옷은 입었지만.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속옷은 몇 개나 입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곧 보는 것입니다.
함은 우연히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았을 때, 금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유심히 보았고, 밖에 나가서는 아버지를 실컷 욕한 것입니다. 즉 안에서는 유심히 보고 밖에 나가서는 막 욕하는 것이 함의 모습이었습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함의 의도 속에는 동성애(同姓愛)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또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렸다*는 것도 실제로는 자기는 전혀 그런 의사가 없었던 것처럼 막 아버지를 욕하면서 몰아붙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한순간도 전혀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나쁜 생각이 들어온 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대단히 부끄러워합니다.
자기가 아버지에 대해서, 또는 다른 자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제 속에 이런 나쁜 마음이 있습니다. 절 용서해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모든 비난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서 자기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천사같은 사람인 양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함이 아버지를 그렇게 심하게 비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안에 그런 추한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모습이 곧 아버지의 술 취하고 벌거벗은 그 모습인데, 자기 안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보니까 그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며. 증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기질(器質)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기질이 다른 사람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아버지들은 아들 중에서 자기를 가장 빼닮은 아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간사(奸詐)함이 아들의 안에도 있고, 자기가 집착하는 것에 아들도 집착(執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막 미워하는 거예요. 이유 없이 그렇게 미워합니다.
사실은 이유가 있지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기질(器質)을 그대로 닮았다는 이유 말입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도 아버지를 막 미워합니다. 입만 벌리면. 아버지를 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은 자기의 기질(器質)이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 사람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자가 안에 있는 그 부분을 계속 숨겨 놓고 *우리 아버지는 나빠* *재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 재는 돌연변이야*하고 상대방을 비방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숨겨져 있는 기질을 적당한 때가 왔을 때, 활용하려고 하면, 그것은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괜히 멀쩡한 사람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아버지의 실수는 인정했지만.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하여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 어깨에 걸친 옷을 덮어 드림으로써 조금이라도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시험들 기회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추(醜)한 모습은 기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존경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로서 자기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정당한 권위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그런 기회를 틈타게 됩니까? 곧 권위(權威)를 가진 사람이 실수할 그때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노아의 실수는 자기 아들 함과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떠날 핑계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노아의 실수와는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함은 그전부터 하나님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없다가 노아가 결정적인 실수를 하자. 그것을 빌미 삼아서 아버지를 비난한 것입니다.
즉 *이런 사람을 선지자로 세운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겠어? 술 마시고 옷을 벗고 자기 자신도 절제하지 못하는 이런 선지자를 세운 하나님은 문제가 많아* 함과 그 자손들은 그 기회를 틈타서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실수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단 한 가지 실수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앉는 것이며, 만약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버릴 기회로 삼는다면. 그는 실수한 사람보다 더욱 악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이 한 번의 실수로 아버지를 완전히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허물을 덮고. 여전히 아버지를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노아의 실수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그들 뒤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함과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실수를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기회로 삼았고. 그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온전치 못한 그들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온전치 못하면. 온전한 교회를 찾든지. 아니면 그런 교회를 세우든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노아의 실수로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과거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바로 이 한 가지를 위하여 자기 재산과 목숨을 다 버렸습니다(사탄의 사주를 받은 악한 정권과 막가파 토개공이 모두 강탈했지만).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교회가 문제가 많으니까 나는 믿지 않겠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좋은 진주가 없기 때문에 진주 찾는 것을 포기하는 진주 장수와 같습니다. 좋은 진주가 없어도 찾아 나서야지요. 사실 노아는 좋은 진주였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이 있었습니다.(마13:45-46절)
그러나 함의 교만이 아버지 노아의 실수를 틈타서 노아의 인격과 그의 말씀 전체를 거부하고. 자기 길. 곧 멸망의 길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Ⅱ.노아의 예언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여전히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9:24-25절)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우리는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상당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보면 노아가 술이 깬 후. 함이 한 짓을 보고. 너무나도 화가 나서 함을 저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사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사람의 신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듣는 사람이 설교자와 개인적인 관계가 좋지 못하면. 온전한 설교를 들으면서도 마치 설교자가 감정이 있어 설교로 자기를 공격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사실 노아가 함과 가나안에 대해 말한 것은 순전한 예언이고. 설교입니다. 술 마시고 실수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가 술을 마시고 실수한 후에, 또 함이 아버지를 비난한 후에,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 설교의 권위가 상실됨으로써 후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아가 화가 나서 보복적인 설교를 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예언이고. 설교입니다.
예언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뉘우치지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틀림없이 이러저러하게 될 테니까 지금부터 너희 삶을 고쳐라*하는 경고요. 훈계입니다.
노아는 물론 함이 한 짓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함이 아버지를 비난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노아가 더 우려했던 것은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한 성적(性的)기질이었습니다.*성 유난히 밝힘 증*이라고 할까요?
가나안이 어려서부터 성(性)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과 호기심이 많고. 나이가 들면서 호기심이 더 커져서 절제는커녕 오히려 탐닉(耽溺)하는 성향이 있는 것을 노아는 염려했습니다.
노아의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이 창세가 말씀을 읽고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곧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땅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지금 겉으로 보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노예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노예로 살아왔으며, 이제 막 해방되기는 했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입고 있는 옷이나. 사고방식은 노예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주민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성적(性的)으로 지극히 부패(腐敗)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고. 살 집 하나 없이 가난했지만, 성적(性的)으로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힘이 있고. 잘 살고. 여러 가지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달리도 성적(性的)으로 부패하고. 썩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나안 주민들이 훨씬 안정되었고. 부자였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들은 멸망(滅亡)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바로 이 성적(性的)인 부분에서 지나치게 탐닉하며, 문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노아는 그들이 이 부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가게 된다면. 가장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경고하는 것이지, 함이 아버지를 비난했기 때문에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죄가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죄고. 남에게 신체적인 손상을 끼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들 중에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고 노예 중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성적인 범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성적(性的)으로 가나안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들도 성(性)을 유달리 밝혀요. 가나안에게서 나타났던 *성 유난히 밝힘 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 두드립니다. 그러나 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성(性)에 호기심이 탐닉합니다. 이러한 성향이 제한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아이는 커서 노예 중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성적(性的)으로 무서울 정도로 부패(腐敗)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가나안적인 성향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이 부분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들의 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표현으로서 *가장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성적(性的)으로 바르지 못한 성향이나. 습관이 있다면,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의 요소가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을 곧 주님께 고백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내놓고. 이것이 치료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상담하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존귀한 모습을 회복할 것이며, 종들의 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 세상의 도덕적인 부패를 비난하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음란한 생각과 생활이 존재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노아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노아가 이 중요한 설교를 하필이면, 크게 실수한 후에 함으로써 마치 감정적인 보복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노아 자신에게도 불행이고. 함의 아들들에게도 불행입니다.
한편 노아는 셈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9:26절)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000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셈을 어떻게 축복하고 있습니까?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셈이 그만큼 존귀한 자이며. 그의 후손도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단지 셈이 아버지를 존경해서 그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습니다.
셈의 후손을 통해 여인의 후손을 보내시며, 이 후손을 통해서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하나님이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손 중에서도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 아들 중에서 이삭을 택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바로 이 셈의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주 하나님이 되시며. 나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통해 역사하고 계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존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우리 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존귀한 줄 모른다면, 촛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소중하고. 존귀한 줄 모르고. 내 입에 한우가 들어와야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노아는 야벳을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9:27절)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셨다*는 말을 직역(直譯)하면. 야벳의 지경을 넓히신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지역으로 퍼진 사람들이 바로 야벳의 후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계획 때문에 존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나 학문에서는 많은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그들에게 없습니다. 즉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셈의 장막에 와서 셈의 은혜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야벳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시간이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돌아와 셈의 장막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자손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야벳에 대한 예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신약교회 때부터입니다. 지금은 야벳 족속들이 더 많이 셈의 장막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가나안은 멸망당하기 위하여 태어난 짐승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일시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지만, 때가 이르면 셈의 장막에 들어올 자가 많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혈통으로는 야벳의 후손이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야벳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몰랐고. 하나님의 교회 밖에 있다가 셈의 장막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존귀하며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유와 방종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하십시오. 만약 그것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노예 중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나안적인 기질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우리 장막에 거하시도록, 즉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워지시도록 간구하십시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 자만(自滿)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 마음대로 신앙적으로 방학이나. 휴학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내 안에 정욕이 있고. 사탄이 건재(健在)하는 한 영적인 방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 홍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욕의 홍수입니다. 노아는 물 홍수로부터는 지킴을 받았지만. 정욕의 홍수를 감당하지 못해서 실패했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 존귀한 사람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다 해서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다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이든지 마음대로 다 쏟아내고, 들리는 말은 누가 하는 말이든지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귀한 자가 아닙니다.
이 시간에도 내 마음을 지켜서 내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참으로 존귀한 사람입니다. 몸만 와 있다 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거기에 열정과 뜨거움이 있어야 하고,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내가 요즘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 말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들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아주 더럽고. 추(醜)한 이야기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면, 내 마음은 이미 점령당한 것입니다. 오늘 정결해지십시오. 정결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입에서 원망과 더러운 불평의 말이 나오고 있다면, 이미 내 마음속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막혀 있는 것입니다. 함은 자기 안에 있는 성적(性的)인 죄 성을 보고. 그것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노아는 유달리 가나안에게 그런 성향이 많다는 것을 염려했지만. 함은 그것을 전부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유 없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유 없이 자녀나 친구를 미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싫어하는 기질(器質)이 그 안에 똑같이 있기 때문에, 나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에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내가 타락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은 그 사람보다 몇 배나 더 악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진리를 찾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다 타락했다 하더라도 나는 진리를 찾을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즉 *남들도 다 대충대충 살고. 생활의 문제에 빠져 있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니까 나도 잠 들어도 되지*하는 생각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남이 지옥 갈 때. 그 등에 업혀서 지옥에 가겠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대로 못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내가 정욕대로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막으시는 그것이 복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영광 받으시는 것에 대해서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촛대가 꺼지지 않도록, 영원히 빛을 밝히도록 생명을 쏟고. 피를 쏟고. 젊음을 쏟아서 이 진리의 촛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많은 야벳 사람들이 셈의 장막에 들어와서 이 귀한 은혜의 선물을 가질 수 있도록 이 장막을 지킵시다. 아-멘
찬송가 411장 *아 내 맘속에*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7월 31일(주일)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신자가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 교갱원카페. 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필수.기본상식.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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