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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구검(刻舟求劍)
강에 빠뜨린 칼을 뱃전에 표시해 구하다
刻 : 새길 각(刂/6)
舟 : 배 주(舟/0)
求 : 구할 구(水/2)
劍 : 칼 검(刂/13)
[동의어]
계주구검(契舟求劍)
[유사]
수주대토(守株待兎)
교주고슬(膠柱鼓瑟)
미생지신(尾生之信)
묵성지수(墨城之守)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때 한 젊은이가 나룻배로 양자강을 건너고 있었다. 배가 강의 한가운데쯤 왔을 때 가지고 있던 칼 한 자루를 잘못 강에 빠뜨리고 말았다. 칼을 찾으려면 당연히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건져 올리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갈 길이 바빴던 젊은이는 당황하지 않고 주머니칼을 꺼내 아까 빠뜨린 자리의 뱃전에 표지를 새겼다(刻舟). 배가 강기슭에 닿자 젊은이는 그제야 배에서 뛰어내려 아까 표시를 해둔 곳 주위로 칼을 찾기 시작했다(求劍).
강 한가운데 떨어진 칼이 배를 따라 기슭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은 뻔한 일인데도 젊은이는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표시한 곳에 칼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종일 찾았지만 허탕 쳤다. 주위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만 받았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신대람(愼大覽) 찰금편(察今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책은 진시황(秦始皇)의 생부(生父)로 알려져 있는 여불위(呂不韋)가 3000여 명이나 되는 빈객들의 학식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 책이 완성되자 여불위는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현상하면서 찾아보라 하면서 내용이 완벽 하다는 것을 자부했다.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성어로 남겨진 유명한 일화다.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쓴 송남잡지(松南雜識)에도 까마귀가 먹다 남은 고기를 땅에 묻은 뒤 구름으로 기억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역시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는 말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
배에 표시를 해 놓고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시대나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낡고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배의 밖으로 칼을 떨어뜨린 사람이 나중에 그 칼을 찾기 위해 배가 움직이는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칼을 떨어뜨린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는 뜻에서,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것만 고집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 나오는 말이다. 각주구검은 계주구검(契舟求劍)이라고도 한다.
고사성어는 그 새겨진 깊은 뜻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넘어 갈 때가 많다. 항상 주변의 변화를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의 새술은 새 부대에라는 예화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영토의 팽창과 전국의 패권(覇權)을 차지하는 것에 지상 목표를 삼고 있던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 당시의 시대적 요청과 역사적 흐름으로 인한 왕성한 사상의 발전을 가져온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가들은 자신의 주장으로 당시 위정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강한 독설로 유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배[舟]에 새겨[刻] 칼[劍]을 구하다[求]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은 고사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고, 의미 역시 시대의 변화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용통성 없는 사람의 뜻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각주구검 고사의 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어떻게 그렇게 강한 어조의 독설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울러 앞서 다룬 한비자(韓非子)의 수주대토(守株待兎) 농부 이야기나 견토지쟁(犬兎之爭), 교주고슬(膠柱鼓瑟)의 고사를 상기하면 유사한 의미에서 주장한 내용이기에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楚人有涉江者 其劍自舟中墜於水,
초인유섭강자 기검자주중추어수
遽契其舟曰 是吾劍之所從墜.
거결기주왈 시오검지소종추.
舟止 從其所契者 入水求之.
주지 종기소결자 입수구지.
舟己行矣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주기행의이검불행 구검야차 불역혹호.
초(楚)나라 사람이 강을 건너다가 칼이 배에서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급히 뱃전에 칼자국을 내어 표시를 하면서 말했다. “여기가 내 칼이 떨어진 곳이다.” 배가 닿자 칼자국이 있는 뱃전 밑 물속으로 뛰어들어 칼을 찾았다. 배는 움직였고 칼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처럼 칼을 찾으니 어찌 의아하지 않겠는가.
이야기만으로 보자면 우스운 한 편의 소품에 불과하지만, 각주구검이 의도한 주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면 고사의 올바른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해답의 출발로 먼저 고사의 출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살펴보겠습니다.
여씨춘추라는 책의 출간에는 여러가지 야화가 전해집니다. 진(秦)나라의 재상까지 오른 여불위(呂不韋)라는 인물이 편찬한 책으로 전해지는데, 법가(法家)사상을 중심으로 도가(道家), 유가(儒家), 농가(農家) 등 제자(諸子)의 학설과 설화 등을 모아 엮은 일종의 백과전서의 사상서로 볼수 있고, 그 사상 역시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 중 잡가(雜家)로 분류합니다.
여불위는 본래 전국시대 말기의 거상(巨商)으로 많은 부(富)를 소유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조(趙)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秦)나라의 왕자 자초(子楚;후에 장양왕이 됨, 진시황의 부친)를 도와 권력에 접근하였고, 장양왕이 즉위하자 재상까지 올라 권력을 잡고 나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바로 이 여씨춘추를 편찬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당대의 학자나 논변가들 3천여명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여씨춘추를 저술하게 하고 완성된 책을 진(秦)나라의 도읍지 함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 두고 천냥을 걸고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냥을 주겠다.” 고 할 정도로 호언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사가 또한 일자천금(一字千金)인데, 일자천금의 의미는 현재에도 최고의 작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출간된 여씨춘추의 확고한 주장에 그 힘을 더해준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고사가 바로 각주구검(刻舟求劍)입니다. 여씨춘추의 각주구검 이야기 뒷 부분에 이런 말을 이어집니다.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이고법 위기국 여차동.
時己徙矣 以法不徙.
시기사의 이법불사.
以此爲治 豈不難哉.
이차위치 개불난재.
지나간 옛 법만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칼잡이와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이미 지나가 변했지만 그 법은 그대로가 아닌가?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바로 확고하고 자신있게 역설한 여씨춘추의 강한 주장은 그 사상의 고하 여부를 떠나서 자신만만한 여불위의 독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권력의 정상에까지 오른 여불위는 진시황과의 관계속에서 또 다른 진위가 의심스러운 야화가 전해집니다.
조(趙)나라의 볼모였던 진(秦)나라의 왕자 자초(子楚)를 도왔던 여불위는 그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특히 상인으로 전국을 돌며 찾아낸 절세미인을 자초에게 진상하는데, 자초와의 슬하에서 아들 정(政)을 낳게 되었고 그 아들이 후에 진시황이 됩니다.
그런데, 일설에 여불위가 미녀를 진상하기 전에 임신을 시켰고 그 자식이 바로 정(政)이라는 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일로 진시황이 왕이 되고 나서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모와 놀아나다가 결국 그로 인해 자결을 하고 마는 것을 볼 때,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生父)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여불위라는 인물은 우리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논할 때, 전형적인 인생유전을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인으로서 그가 이룬 경제적 부(富)와 그로 인한 권력의 접근과 권력 정상의 군림, 하지만 결국 권불십년(權不十年)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권력의 끝은 파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여불위의 종말을 보면서 그가 주장한 세태의 변화에 적극 대처하면서 임기응변을 할 줄 아는 사람의 결말이 또한 어떠했는가를 돌아본다면 각주구검의 고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멸시와 조롱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오히려 눈치 빠르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임기응변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칭송 받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남 보다 앞서면서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고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눌한 듯 하면서 양보와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 사회가 밝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시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시간은 돈이다'고 외치는 세태에, 너도 나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빨리 빨리를 외치는 시절에 시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시간을 놓치고 산다.
무엇보다 시간은 균질적(均質的)인 것이 아니다. 아침의 한 시간이과 저녁의 한 시간이 같은 것이 아니며 오늘의 한 시간이 내일의 한 시간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시간이란 것은 오늘 저축했다가 내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착각이다.
가령, 봄에 씨를 뿌려야할 때 씨를 뿌리지 못하고서 여름에 씨를 뿌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또 부지런을 떨어서 겨울에 씨를 뿌린다고 될일이 아니다. 또 약을 먹을 때, 아침에 한 봉, 저녁에 한 봉을 먹어야할 것을 오늘 먹지 않고 내일 저녁에 4봉을 먹어서 될 일이 아니다. 시간을 놓치는 약은 의미가 없다.
또 우리가 말 한마디를 잘 못해서 오해가 생길 경우, 그 시간에 바로 사과를 하고 잘못을 바로 잡는다면 오해는 끝난다. 더 이상의 파장이 없다. 그러나 멈칫 거리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말 한마디가 다른 일에도 파장이 간다.
인간관계 자체가 꼬이고 소원해지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 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이미 말 한마디는 말 한마디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몇 시간을 붙잡고 사과를 한들 소용이 없다. 시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의 문제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의 승패,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
우리가 6~70년을 살지만 실제 사는 것은 현재라는 찰라에 살고 있을 뿐이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는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직 않아서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과거에 살 수 없고 미래에 살 수 없고 현재의 찰라에서만 살고 있을 뿐이다.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 현재를 현재로 직시하고 현재 이 자리,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도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시간을 놓친다. 시간을 놓치는 두 가지 병이 있다.
하나는 과거에 머물고자 하는 병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래로 떠도는 병이다. 전자의 경우, 현재를 현재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현재를 바라 보는 것이다.
가령 너는 이런 놈이지 라는 선입관을 갖고 오늘의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또 어제 이런 방법으로 득을 보았으니까 오늘도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미 시간을 흘러가고 세상은 바뀌었는데 자신의 과거에 머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말하자면 각주구검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 그런 류(類)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팔레스타인 땅은 양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물과 포도주를 넣었습니다. 양가죽은 아주 부드럽습니다. 거기에 포도주를 담으면 발효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부피가 팽창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새 양가죽부대의 포도주는 발효하는 만큼 얼마든지 거기에 맞춰서 늘어납니다. 그래서 좋은 술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헌 가죽부대는 안에 당분이 묻어 있어서 가죽이 딱딱해집니다. 그런 가죽부대에 새 술을 담으면 팽창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도 버리게 되고 가죽부대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지만 이 안에는 예수님의 엄청난 교훈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시고 새 역사를 하실 때 옛것(당분)이 남아 있는 딱딱한 그릇은 사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습관과 고집,그리고 과거의 경험이 하나님의 일과 새 역사를 방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 하지만 도리어 자신의 그릇만 터져버리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 부대를 원하십니다.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그 안에 하나님의 새 일들이 담겨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위에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굳어진 고집, 율법적인 고집, 전통, 그리고 자신의 성격, 기질, 혈기, 용서할 줄 모르는 강퍅한 마음 등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새 부대인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팽창력, 그것은 곧 성도의 믿음의 분량이며 축복의 분량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깨끗이 씻으십시오. 옛것을 다 씻어 내십시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시는 분량만큼 부풀어 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 대책까지 함께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대를 확인 하십시오. 그리고 깨끗이 해 주님께 드립시다.
▶️ 刻(새길 각)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亥(해; 분명하게 하다, 각)로 이루어졌다. 칼로 새기다, 표를 하다, 구분짓다의 뜻을 나타낸다. 십오분(十五分)을 일각(一刻)이라 한다. ❷회의문자로 刻자는 ‘새기다’나 ‘벗기다’, ‘깎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刻자는 亥(돼지 해)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亥자는 돼지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亥자는 살아있는 돼지가 아닌 가공한 돼지를 그린 것이다. 돼지를 뜻하는 글자로는 豕(돼지 시)자도 있다. 이 두 글자의 갑골문을 보면 豕자는 돼지를 온전히 그렸지만 亥자는 머리와 다리가 잘린 모습이었다. 이렇게 도살한 돼지를 뜻하는 亥자에 刀자가 결합한 刻자는 잡은 돼지를 자른다는 뜻이다. 刻자에 ‘벗기다’나 ‘깎다’라는 뜻이 있는 것도 사실은 돼지를 나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刻자는 단순히 무언가를 새기거나 부각한다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刻(각)은 (1)연장으로 나무나 돌 같은 데에 글이나 그림 따위를 새기는 일 (2)조각(彫刻) (3)누각(漏刻) (4)시간(時間) 단위의 하나. 시헌력(時憲曆)에서 하루의 12분의 1인 1시간(지금의 2시간)을 8로 나눈 것의 하나. 곧 15분 동안을 말함 (5)시헌력 이전에는 하루의 1/100이 되는 시간. 곧 14분 24초 동안을 이름 등의 뜻으로 ①새기다 ②벗기다, 깎다 ③깎아내다 ④조각하다 ⑤시일(時日)을 정하다 ⑥다하다, 있는 힘을 다 들이다 ⑦각박(刻薄)하다 ⑧모질다, 몰인정하다 ⑨꾸짖다, 잘못을 지적하여 말하다 ⑩괴롭게 하다, 해치다, 해롭게 하다 ⑪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 엄하다(매우 철저하고 바르다), 급하다 ⑫시간(時間) ⑬때, 시각(時刻) ⑭새김, 새겨 놓은 솜씨, 그릇의 각명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새길 간(刊)이 있다. 용례로는 모나고 혹독하고 인정이 박함을 각박(刻薄), 도장을 새김 또는 새겨 만든 도장을 각인(刻印), 조각한 판목으로 인쇄한 책을 각본(刻本), 몹시 애씀이나 대단히 힘들임을 각고(刻苦), 고마움 또는 원한이 마음속 깊이 새겨짐을 각골(刻骨), 날짜를 정함을 각일(刻日), 나무를 오리어 새기거나 깎음을 각목(刻木), 시각이 급한 이때를 각하(刻下), 도자기에 꽃무늬를 새김을 각화(刻花), 글씨나 형상을 나무나 돌 따위에 파는 데 쓰는 칼을 각도(刻刀), 글자를 새김을 각자(刻字), 마음에 깊이 새겨 두는 일을 심각(深刻), 곧 그 시각에를 즉각(卽刻), 어떤 사물을 특징지어 두드러지게 함을 부각(浮刻), 시간의 어느 한 시점을 시각(時刻), 정해진 시각에 늦음을 지각(遲刻), 한 시의 첫째 시각 곧 15분을 일각(一刻), 잠깐 동안이나 눈 깜박할 동안을 경각(頃刻), 그림이나 글씨를 나뭇조각에 새김을 판각(板刻), 고니를 새기려다 실패해도 집오리와 비슷하게는 된다는 각곡유목(刻鵠類鶩), 입은 은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뼈에까지 사무쳐 잊혀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각골난망(刻骨難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판단력이 둔하여 융통성이 없고 세상일에 어둡고 어리석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각주구검(刻舟求劍), 고니를 새기려다 실패해도 집오리와 비슷하게는 된다는 뜻으로 성현의 글을 배움에 그것을 완전히 다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선인은 될 수 있다는 말 또는 학업에 정진하여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는 말을 각곡유목(刻鵠類鶩), 마음속 깊이 새겨 둠을 일컫는 말을 각골명심(刻骨銘心), 심신을 괴롭히고 노력함 또는 대단히 고생하여 힘써 정성을 들임을 일컫는 말을 각고면려(刻苦勉勵), 아무리 꾸며도 무염이란 뜻으로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아무리 화장을 해도 미인과 비교할 바가 못됨 즉 비교가 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각화무염(刻畫無鹽), 마음속 깊이 분하고 한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각골분한(刻骨憤恨), 마음속 깊이 새겨 잊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각루심골(刻鏤心骨), 나뭇잎이 저 산 모양이 드러나 맑고 빼어나다는 뜻으로 가을 경치가 맑고 수려함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각로청수(刻露淸秀), 나무를 깎아 관리의 형상을 만든다는 뜻으로 옥리를 심히 미워해 이르는 말을 각목위리(刻木爲吏), 살을 에고 뼈를 깎는다는 뜻으로 고통이 극심함을 이르는 말을 각기삭골(刻肌削骨), 뼈에 사무치도록 마음속 깊이 맺힌 원한을 이르는 말을 각골통한(刻骨痛恨), 촛불이 한 치 타는 동안에 시를 지음이라는 각촉위시(刻燭爲詩), 각박하여 집을 이룬다는 뜻으로 몰인정하도록 인색한 행위로 부자가 됨을 이르는 말을 각박성가(刻薄成家) 등에 쓰인다.
▶️ 舟(배 주)는 ❶상형문자로 통나무 배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자의 부수로는 배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舟자는 '배'나 '선박'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舟자는 조그만 배를 그린 것이다. 강줄기가 많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수로가 발달했었다. 강에는 여러 종류의 뗏목이 떠다녔지만, 그중에서도 舟자는 1~2명만이 탑승할 수 있었던 조그만 배를 그린 것이다. 이 배는 돛 없이 노를 저어 움직이던 것이었기 때문에 舟자의 상단에 있는 점은 노가 생략된 것이다. 이처럼 舟자는 배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배의 종류'나 '옮기다', '움직이다'와 같은 뜻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舟자와 丹(붉을 단)자는 매우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舟(주)는 ①배, 선박(船舶) ②반(제기인 준을 받쳐놓는 그릇) ③성(姓)의 하나 ④몸에 띠다 ⑤배 타고 건너다 ⑥싣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배 강(舡), 배 방(舫), 배 항(航), 배 박(舶), 배 선(船), 배 함(艦)이다. 용례로는 서로 배를 타고 싸우는 전쟁을 주전(舟戰), 배를 타고 감을 주행(舟行), 배처럼 생긴 모양을 주형(舟形), 배와 수레를 주거(舟車), 뱃놀이를 주유(舟遊), 작은 배를 한 줄로 여러 척 띄워 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를 주교(舟橋), 배로 통하는 길 선로를 주로(舟路), 배로 화물 등을 나르거나 교통하거나 하는 일을 주운(舟運), 뱃사람을 주인(舟人), 뱃사공을 주자(舟子), 배에 실음을 주재(舟載), 배와 뗏목을 주벌(舟筏), 소형의 배를 주정(舟艇), 네모지게 만든 배나 배를 나란히 맴 또는 나란히 선 배를 방주(方舟), 작은 배를 단주(端舟), 한 척의 배를 단주(單舟), 작은 풀잎이 배처럼 떠 있다는 뜻으로 작은 배를 이르는 말을 개주(芥舟), 조각배를 편주(扁舟), 같은 배 또는 배를 같이 탐을 동주(同舟), 배를 물에 띄움을 범주(泛舟), 외롭게 홀로 떠 있는 배를 고주(孤舟), 가볍고 빠른 배를 경주(輕舟), 배는 물이 없으면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임금은 백성이 없으면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주비수불행(舟非水不行), 배 속의 적국이라는 뜻으로 군주가 덕을 닦지 않으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이 이해 관계가 같은 사람들이라도 적이 되는 수가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주중적국(舟中敵國),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판단력이 둔하여 융통성이 없고 세상일에 어둡고 어리석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각주구검(刻舟求劍),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타고 있다라는 뜻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원수라도 협력하게 됨 또는 뜻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오월동주(吳越同舟), 잡아매지 않은 배라는 뜻으로 정처없이 방랑하는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불계지주(不繫之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함을 이르는 말을 파부침주(破釜沈舟), 조그마한 틈으로 물이 새어들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을 게을리하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소극침주(小隙沈舟),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라는 뜻으로 장대한 기상이나 인물을 이르는 말을 탄주지어(呑舟之魚), 달 하나를 세 배에서 본다는 뜻으로 하나의 달을 보는 사람의 경우에 따라 각각 달리 보인다는 뜻에서 道는 같으나 사람마다 견해가 다름을 일컫는 말을 일월삼주(一月三舟), 새털처럼 가벼운 것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 앉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도 쌓이고 쌓이면 큰 일이 된다는 말을 적우침주(積羽沈舟), 한 조각의 작은 배를 일컫는 말을 일엽편주(一葉片舟), 뭍에서 배를 민다는 뜻으로 고집으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추주어륙(推舟於陸) 등에 쓰인다.
▶️ 求(구할 구)는 ❶상형문자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에서 몸에 감다, 정리하다, 모으다, 구하다의 뜻이 있다. 모피를 달아 맨 모양이다. ❷상형문자로 求자는 '구하다'나 '탐하다', '빌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求자는 水(물 수)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으나 '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求자의 갑골문을 보면 衣(옷 의)자에 여러 개의 획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털 가죽옷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求자의 본래 의미도 '털 가죽옷'이었다. 먼 옛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털옷은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옷이었지만 쉽게 구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비쌌다. 求자에서 말하는 '구하다', '탐하다', '청하다'라는 것은 비싼 털옷을 구하거나 원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求(구)는 ①구하다 ②빌다, 청하다 ③탐하다, 욕심을 부리다 ④취하다 ⑤모으다, 모이다 ⑥나무라다, 책망하다 ⑦가리다, 선택하다 ⑧묻다 ⑨부르다, 불러들이다 ⑩힘쓰다 ⑪갖옷(짐승의 털가죽으로 안을 댄 옷) ⑫끝, 종말(終末)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걸(乞), 찾을 색(索), 구할 호(頀)이다. 용례로는 남에게 물건이나 돈, 곡식 따위를 거저 달라고 비는 일을 구걸(求乞),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求人), 구하여 얻어 들임을 구입(求入), 구해 벌어옴이나 휴가를 원함을 구가(求暇), 직업이나 직장을 구함을 구직(求職), 중심으로 쏠리는 힘으로 참된 마음을 찾아 참선함을 구심(求心), 이성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여 상대편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일을 구애(求愛), 벼슬자리를 구함을 구사(求仕), 배상 또는 상환을 요구함을 구상(求償), 구하여 얻음을 구득(求得), 먹을 것을 구함을 구식(求食), 혼인할 상대를 구함을 구혼(求婚), 산소 자리를 구함을 구산(求山), 살길을 찾음을 구생(求生), 필요하여 달라고 강력히 청함을 요구(要求), 재촉하여 요구함을 촉구(促求), 상대방에 대하여 일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일을 청구(請求),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함을 추구(追求), 몹시 애타게 구하는 것을 갈구(渴求), 본능적으로 충동적으로 뭔가를 구하거나 얻고 싶어하는 생리적 또는 심리적 상태를 욕구(欲求), 구하기 힘든 것을 억지로 구함을 강구(彊求), 강제로 구함을 강구(强求), 돈이나 곡식 따위를 내놓으라고 요구함을 징구(徵求), 바라고 요구함을 희구(希求), 도를 구하는 사람을 구도자(求道者), 구하려고 하여도 얻지 못함이나 얻을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을 구지부득(求之不得), 팔고의 하나로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을 일컫는 말을 구부득고(求不得苦), 몸과 마음을 닦아 온전히 하려다가 뜻밖에 남으로부터 듣는 욕을 일컫는 말을 구전지훼(求全之毁), 예를 찾아 의논하고 고인을 찾아 토론함을 일컫는 말을 구고심론(求古尋論),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는 뜻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음을 일컫는 말을 구인득인(求仁得仁), 논밭과 집을 구하고 문의하여 산다는 뜻으로 자기 일신 상의 이익에만 마음을 쓰고 국가의 대사를 돌보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구전문사(求田問舍), 무엇을 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구즉득지(求則得之) 등에 쓰인다.
▶️ 劍(칼 검)은 ❶형성문자로 剣(검)의 본자(本字), 劔(검)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뾰족하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僉(첨, 검)으로 이루어졌다.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劍자는 '칼'이나 '베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劍자는 僉(다 첨)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僉자는 많은 사람이 밖에 나와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모두 다'나 '남김없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금문에서는 金(쇠 금)자가 들어간 鐱(가래 첨)자가 '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이것이 칼과 관계된 글자임을 뜻하기 위해 刀자로 바뀌면서 지금의 劍자가 만들어졌다. 사실 劍자는 칼 중에서도 '양날 검'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劍자에 '모두 다'라는 뜻을 가진 僉자가 쓰인 것도 양쪽에 날이 있는 검을 뜻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부터는 이 둘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지금은 큰 구분 없이 '칼'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劍(검)은 (1)무기로서의 긴 칼 (2)군인들이 사용하던 긴 칼의 뜻으로 ①칼, ②검법(劍法; 칼을 쓰는 법), ③찌르다 ④베다 ⑤죽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칼 도(刀)이다. 용례로는 검술에 뛰어난 사람을 검선(劍仙), 검술이 있는 협객을 검협(劍俠), 검술에 조예가 뛰어난 사람을 검객(劍客), 검술을 닦은 사람을 검가(劍家), 칼을 잘 쓰는 수법을 검술(劍術), 검술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인격의 수양을 도모하는 일을 검도(劍道), 검술에 능통한 사람을 검사(劍士), 허리에 띠게 만든 긴 칼을 장검(長劍), 짧은 칼을 단검(短劍), 보배로운 칼을 보검(寶劍), 총 끝에 대검을 꽂음을 착검(着劍), 이름난 훌륭한 칼을 명검(名劍), 찌를 듯이 날카로운 말을 설검(舌劍), 오줌을 검사함을 요검(腰劍), 뱃속에 칼을 품는다는 뜻으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복검(腹劍), 불효하고 불경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떨어진다고 하는 지옥을 일컫는 말을 검림지옥(劍林地獄), 바람이 칼자루 끝에 있는 작은 구멍을 스쳐가는 미세한 소리를 일컫는 말을 검수일혈(劍首一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