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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선생님, 나의 선생님!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
선생님은 부모님만큼이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준다. 큰 업적을 이룬 인물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어주신 분은 바로 ○○○ 선생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본다. 나에게도 좋은 길로 이끌어주신 선생님들이 계셨고(초등학교 5, 6학년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께는 몇 해 전 돌아가실 때까지 아내와 함께 주기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그래서 나는 선한 깨우침을 주시는 선생님들께는 나이 고하를 불문하고 존경을 표한다. 내가 살아 온 길에 큰 후회는 없지만, 혹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도시의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선생님에 관한 영화도 많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50여 년간 영국의 브룩필드에서 라틴어 교사로 일했던 노교사의 일대기를 그린 샘 우드 감독의 <굿바이 미스터 칩스>(1939)다(우리나라 개봉 당시에는 <브룩필드의 종>이라고 제목을 달았고, 허버트 로스 감독의 1969년 판 리메이크 작품도 있다). ‘미스터 칩스’ 하면 영미권에서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교사의 대명사로 쓰이는데,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에게서도 칩스 선생님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 밖에도 폐쇄적인 섬마을의 분교에 발령받은 여교사가 모든 편견과 질시를 극복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12명의 가난한 학생들을, 그리고 그 학생들의 자식들을 다시 가르치는 눈물겹고도 따스한 일본 영화 <24개의 눈동자>(1954), 런던의 빈민촌 학교에 부임한 흑인 교사가 말썽꾸러기 학생들을 상대로 인간적인 신뢰를 주고받으며 교실 밖의 세상은 냉혹하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변화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감동 드라마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1967),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 작은 기숙학교에서 강한 체벌로 다스리는 교장에 맞서 음악으로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임시직 교사의 이야기를 담은 <코러스>(2005), 학교 건물조차 없는 외딴 벽촌에 부임하여 마을 주민과 장애인인 촌장의 아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키워주는 아지즈 선생의 감동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터키 영화 <기적의 학교>(2015) 등 많이 있다.
우리나라 영화로도 <가시내 선생>(1966),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1990), <선생 김봉두>(2003), <꽃 피는 봄이 오면>(2004) 등이 ‘선생님 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역시 ‘선생님 영화’인데, 이 영화에 대하여는 대개 ‘명문 대학 진학을 최고 목표로 삼는 학교에서 한 교사가 참교육으로 학생들을 일깨우는 과정을 그린 미국 영화’로 한 줄 정의를 내린다.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에 찌들어 왔던 우리나라 젊은이들 중에서도 이 영화에서 인생이 무엇이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내일보다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하는 키팅 선생의 모습에 매료되어 이 영화를 ‘나의 인생 영화’로 치부하는 사람이 꽤 많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에 멋지게 일침을 가했고, 실제로 키팅 선생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라고 강조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덕분에 자기 길을 바로 찾아 성공하였다고 털어놓는 경우도 제법 있다.
먼저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명문인 사립 고등학교 웰튼 아카데미의 개학식 날, 교훈인 ‘전통’(Tradition), ‘명예’(Honor), ‘규율’(Discipline), ‘탁월’(Excellence)이라는 네 깃발을 든 기수를 거느리고 입장한 놀란 교장(노먼 로이드)은 훈시에서 이 학교의 100년 전통과 아이비리그 75% 이상 진학률을 보인 우수성을 과시한다. 신입생들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고 학부모들은 흐뭇해한다.
이 학교 상급생으로 전학 온 토드 앤더슨(이선 호크)은 닐 페리(로버트 숀 레너드)와 기숙사 방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그 방으로 몰려온 다른 학생들과 얘기를 나눌 때 닐의 아버지가 그 방으로 찾아와 의대 진학에 지장이 있으니 이제 과외할동을 하지 말라고 닐에게 엄명을 내린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이 학교에 영어 교사(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어’ 선생)로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부임한다. 그 역시 웰튼 아카데미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수재다. 키팅 선생의 교육 방식은 다른 교사들과 달랐다. 첫 시간부터 교실이 아닌 선배들의 사진과 각종 트로피가 잔뜩 널려 있는 복도에서 강의를 하고, 자기를 ‘캡틴’으로 불러 달라면서, 대학 합격을 위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인생을 설계하라고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즉 오늘을 붙잡아(seize the day) 소중히 여기며 즐기라고 강조한다(첫 강의 듣고 나오는 학생들의 대화 중 이 학교의 전통을 중시하고 키팅이 역설하는 자유로운 사고와는 가장 거리가 먼 학생인 리처드 캐머런이 “그거 시험에 나올까?”라고 하는 것은 실소를 머금게 한다).
이렇게 키팅은 엄격한 학교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니고 있는데, ‘시의 이해’(Understanding Poetry)에 대해 전통적인 방법으로 강의를 하는 듯싶더니 갑자기 시의 위대함은 완성도와 중요도라는 두 요소로 측정된다는 이론은 한마디로 ‘쓰레기’이니 그 교재 서문을 찢어버리라고 하거나, 교탁에 올라서고는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은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라면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그곳에 올려세워 세상을 넓고 다양하게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고, 느닷없이 교실 밖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서 시구를 하나씩 읊으며 공을 차라고 하는 등 걷잡을 수가 없다. 학생들은 독특한 그의 강의 방식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끌리게 된다.
그러던 중 닐 페리가 옛날 앨범에서 키팅 선생이 이 학교에 다닐 때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독특한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사실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고, 자기들도 학교 밖 동굴로 가서 그와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그래서 몇몇 학생들이 호수 건너 인디언 동굴을 찾아 나서고, 거기서 맘에 드는 시인의 시나 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된다. 입시 공부에 짓눌린 생활만을 해왔던 이들은 이로써 새로운 활력소를 찾게 되고, 약간의 일탈 행위도 하지만 종전과 달리 자기 나름의 진정한 삶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전설적인 우등생인 형 때문에 강제로 이 학교로 전학 왔지만 내성적이고 매사에 자신이 없었던 토드 앤더슨은 자신에게도 남 못지않은 능력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변호사 집안의 귀한 아들 녹스 오버스트리트(조쉬 찰스)는 우연히 만나 깊이 빠지게 된 크리스라는 여학생의 학교에까지 쳐들어가 자작시를 읊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지만 결국 그게 먹혀들어가 그녀의 마음을 얻게 되기도 하며, 약간의 반항아 기질이 보이는 금수저 찰리 달튼(게일 핸슨)은 키팅 선생이 “자유롭게 걸어라. 전통과 형식에 도전하라!”고 하자 모두가 이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자유롭게 걷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걷지 않으며 “저는 스스로에게 걷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키팅이 가르치고 싶은 바를 가장 빨리 깨우친다. 또 공부와 운동 모두 잘하는 모범생 닐 페리는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엄격한 아버지의 뜻만 좇다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오디션에 응하여 중요한 ‘퍽’ 역을 맡으면서 자신의 연극에 대한 자질과 능력을 확인하게 된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한밤중 동굴에 몰래 모여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을 주로 하는 모임이다. 그런데 찰리 달튼이 장난삼아 ‘죽은 시인’의 이름으로 야한 뜻을 풍기며 여학생도 웰튼에 입학시켜 달라는 글을 써서 학교 신문에 게재하는 바람에 보수적인 개신교 사립학교인 웰튼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혔다. 놀란 교장이 전교생을 불러 모아 놓고 누가 이런 저속한 짓을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한다고 했으나, 찰리가 오히려 ‘방금 하나님한테서 웰튼에 여학생을 입학시켜야 한다는 전화 연락이 왔다’고 말하는 등 교장을 놀림감으로 만든다. 그 응징으로 교장실까지 불려간 찰리는 크리켓 채로 엉덩이를 맞는 체벌을 받고, 이로써 ‘죽은 시인의 사회’ 동아리의 존재는 완전히 들통나 버리고 만다.
<한여름 밤의 꿈> 공연이 있기 전날 소문을 들은 닐의 아버지가 기숙사 방으로 쳐들어와서 닐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호통친다. 닐은 연극을 꼭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그 말씀에 따르겠다고 하고는 키팅 선생에게 상담을 하러 간다. 닐은 ‘연극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고, 유일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하소연하면서도, 아버지는 내가 꼭 의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하고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어서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말을 한다. 그러자 키팅은 “지금 나에게 한 말을 아버지한테 가서도 하고, 연극에 대한 너의 열정을 보여서 허락을 받아내라.”고 격려해준다.
하지만 닐은 아버지에게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 그냥 몰래 출연하기로 결심하고는 다음 날 키팅 선생에게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맡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물론 키팅은 이를 눈치채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모른 척한다.
공연은 잘 진행되었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가 공연장에 왔고 이를 알아챈 닐은 더욱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여 친구들과 선생님한테서 어려운 역을 잘 해냈다고 큰 칭찬을 받았다. 이런 뿌듯한 성공과 달리 닐은 바로 아버지에 의해 집으로 끌려와 심한 꾸중을 듣는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사립 군사고등학교로 전학시키겠다는 폭탄선언을 받고 나서는 이제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을 완전히 잃고 깊은 절망에 빠져버린다. 결국 그날 밤 그는 자신이 연극에서 맡은 ‘퍽’이 쓰는 관(冠)을 써본 뒤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닐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또 한편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싶었다. 쉬쉬하면서 더 크게 문제가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는 학교 당국 역시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때 동아리 일원인 리처드 캐머런이 닐은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였으며 키팅 선생이 그를 연극에 나가도록 격려했었다는 것을 말해버리는 바람에 놀란 교장은 처음부터 눈엣가시로 여겼던 키팅을 이 사건을 책임질 제물로 삼기로 한다.
놀란 교장은 불문에 부친다는 조건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 동아리 회원들을 부모와 함께 하나하나 불러 상담을 한다. 상담이라고는 하지만 존 키팅이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는 확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퇴학이라는 식의 협박 같은 심문이다. 대부분의 동아리 회원들은 교장의 겁박과 부모의 회유에 못 이겨 닐의 죽음은 키팅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그 문서에 서명을 하나, 찰리 달튼만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퇴학을 선택한다. 키팅 선생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로만 아는 닐 아버지의 편집증에 가까운 그릇된 욕망으로 사랑하는 제자를 잃었음에도 학교 당국의 강요에 따라 몇몇 학생들이 서명한 확인서 때문에 오히려 그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영문학 수업은 임시로 놀란 교장이 맡게 되었고, 시에 대한 강의 내용은 역시나 키팅 선생 이전의 비평 이론에 치우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 첫 시간, 키팅이 학교를 떠나면서 두고 온 물건이 있어 교실에 들어오는데, 토드 앤더슨이 갑자기 일어나 동아리 회원들은 교장선생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서명한 것이라고 외친다. 키팅의 결백을 주장하는 토드에게 놀란 교장은 자리에 앉으라고 소리치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잠시 후 토드는 책상 위로 올라가 월트 휘트먼의 시의 한 구절이자 평소 제자들이 존 키팅을 부르는 호칭 ‘오 캡틴! 마이 캡틴!(O Captain! My Captain!)’을 외치고,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토드처럼 책상 위에 올라가 교장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떠나는 키팅 선생을 향한 마지막 인사로써 ‘마이 캡틴!’을 외친다.
자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인사를 하는 제자들을 향해 존 키팅은 “모두들 고맙다. 고마워.”라고 말하고, 애처로운 토드 앤더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
좋은 영화에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꼭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유난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멋진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는 ‘자작시 낭송 시간’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키팅 선생의 열린 마음과 남다른 교육 방법은 일류대학 입시에만 쏠려 있던 학생들의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다. 내성적이고 소심하여 항상 외부와 단절되어 지내던 전학생 토드 앤더슨도 키팅 선생의 마법으로 닫힌 마음이 열리게 된다. 자작시 낭송 시간, 키팅은 학생 한 명 한 명 나오도록 해 각자가 쓴 자작시를 낭독하게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격려한다. 이제 드디어 토드의 차례다. 토드는 “저는 숙제를 하지 못했어요.”라며 나오지 않으려 한다. 그러는 토드에게 키팅 선생은 “난 네 안에 무언가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라는 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를 북돋운 다음 시인 월트 휘트먼의 초상 앞에서 ‘야성의 포효’로 워밍업을 하게 한다. 그다음에 손으로 토드의 두 눈을 가리고 그의 내면에 있는 자신감을 꺼내어준다. 그러자 토드는 거짓말처럼 “진실, 진실은 마치 항상 발을 차갑게 내버려 두는 이불 같은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듯 시를 읊는다. 키팅은 토드를 더욱 북돋아 결국 그 시를 완성하게 한다. “잡아당겨도, 늘어뜨려도 이불은 부족하다. 무슨 수를 써봐도 이불은 우릴 덮어주질 못한다. 울며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으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이불은 울고 절규하고 신음하는 당신의 얼굴만을 덮어줄 뿐이다.” 이렇게 토드의 시 낭송이 끝나자 순간 교실에는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이어 환호와 격려의 박수가 터진다. 카메라 앵글이 키팅과 토드를 싸고 빙빙 도는 가운데 키팅이 토드에게 속삭인다. “오늘 한 걸 잊지 마라.”
이것이 키팅 선생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오던 토드에게서 무한한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마법의 순간이자 이 영화의 절대적인 명장면이다.
조금은 거창한 얘기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교육의 본질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들에게 내재해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밖으로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Erziehung)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키팅 선생은 그야말로 참교육을 실천한 진정한 교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참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무엇이 갖추어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에 대한 답도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제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다. 키팅 선생은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모두가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고 그것을 찾아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리고 그 능력 발휘를 엄격한 규율이나 강제에 의존하여 이룩하려 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깨닫고 찾아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학생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바로 그 믿음이 바로 교육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지식을 주입해야 한다고 하고 전통과 규율만을 강조하는 놀란 교장에게 키팅은 “저는 교육의 이념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그래서 그런지 키팅은 학생들의 의식을 깨우쳐주는 ‘등에’ 역할을 하지만, 좌경화된 의식화 교육이나 정치적 선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 점에 우리의 전교조 선생들과는 선이 그어진다).
키팅은 제자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닐이 연극 출연 문제로 상담하러 키팅 선생 방을 찾아갔을 때 책상 위에 있던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의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을 보고는 묻는다. 선생님은 어디든 가실 수 있는데 이렇게 예쁜 분과 떨어져서 어떻게 견디냐고…. 이에 대한 키팅 선생의 대답은 “가르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지.”였다. 가르치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했기에 그들의 개성을 하나하나 다 파악하고 그에게 꼭 알맞은 방법을 찾아내어 이끌었던 것이다.
선생은 교육자다. 교육자는 학생들을 이끌어가는 리더다. 그러므로 선생은 누구나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키팅 선생의 교육 방법을 리더십의 관점에서 보면 카리스마적이고 강압적인 면을 보이기보다는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태도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굳이 말한다면 ‘리더 중심의 리더십’이 아니라 ‘구성원 중심의 리더십’이라 하겠다).
웰튼 아카데미에서는 학생들의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욕구와 학교 당국 업적 고양을 위한 철저한 입시 위주의 교육만이 행해지기에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고 학생 중심의 자율적인 교육으로 개혁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말하자면 키팅 선생과 학생들이 다 같이 이루어야 할 과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개혁의 동기부여 과정도 키팅 선생은 자기가 앞장서고 따라오라는 식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찾아서 사는 것이 행복의 첫걸음이라는 것만 깨닫게 해주고, 학생들 스스로 자기의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면서 내면의 변화를 이루도록 하여 그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로서의 키팅 선생과 학생들과의 관계는 수직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키팅 선생과 학생들은 교사와 학생이란 신분이지만 교육 현실과 자신들의 삶을 개혁하기 위해서 일심동체로 행동하는 공생적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키팅 선생이 첫 시간에 기존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순순히 따르고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거의 다 받아들인다. 이것은 키팅은 학생들을 믿고 학생들은 키팅에 전적으로 의지함이 전제되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 학생들은 공부 외에도 개인적인 고민 사항을 키팅 선생과 함께 공유하고 그의 조언에서 답을 찾는다. 학생들은 축구를 끝내고 키팅 선생을 헹가래를 치기도 하는데 이는 리더와 구성원 두 대상 간의 혼연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학생들은 키팅을 ‘선생님’이 아닌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부른다. 이 ‘캡틴’(선장)이란 호칭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한 배에 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생사를 함께 한다는 공생적 관계에 있음을 바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불후의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는 마지막에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 키팅 선생을 향해 “오 캡틴! 마이 캡틴!” 하고 부르는 신은 그동안 키팅 선생이 학생들과 동고동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키팅에 대한 훌륭한 리더로서의 평가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키팅 선생은 학생들을 사랑했기에 그들을 통제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헌신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학생들을 부추기고 닐을 죽음으로 이끈 책임도 있다고 해고를 당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학생들을 위한 일이었고, 또 학생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기에 아무런 이의를 하지 않고 선선히 물러난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갖게 함과 동시에 학생들이 스스로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떠나게 되지만 그가 보여주는 헌신과 희생의 리더십은 학생들에게 성장의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참된 교육자이자 훌륭한 리더를 만난 학생들은 달라진다. 키팅 선생의 학창 시절을 좇아 ‘죽은 시인의 사회’ 동아리 활동을 했던 학생들은 특히 더 그렇다. ‘죽은 시인의 사회’ 동아리 모임을 할 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를 읊는 것으로 개회사를 선언한다.
“나는 유유자적하며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나는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끝까지 맛보며 살고 싶다.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을 털어 버리기 위해, 그리고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하지 말자.”
이렇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목표를 이루는 것 자체보다도 그것을 이루는 과정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모의 과도한 기대에 짓눌리고 소심한 성격 탓에 시작(詩作)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토드 앤더슨이 마지막에는 가장 먼저 책상에 올라서서 교장선생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외치는 주체적인 인격체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냥 좋은 것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갈등’을 거쳐 ‘파국’으로 떨어지는 영화적 요소를 거의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다.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사회에 외부에서 한 인사가 오게 된다. 그는 이단일 수도 있고 선구자일 수도 있는데, 그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개혁을 부르짖는다. 그의 호소력 있는 외침은 상당수의 하부 조직원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구성원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진다. 위기의식을 느낀 기존의 지도층은 불합리한 방법으로 반격을 가하고 결국 그 새로운 리더는 억울하게 그 조직에서 쫓겨난다. 이런 것이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전형적인 패턴인데, <죽은 시인의 사회>도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가장 똑똑하고 의식이 깨어 있어 보이던 리더 격인 학생 닐 페리는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만 것인가? 이게 영화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일단 답이 되겠다. 첨예한 갈등과 충격적인 내용을 담아야만 관객의 주의를 끌어들이고, 비극적인 요소를 도드라지게 보여야만 주제가 더욱 강조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상과 현실, 이 두 가지를 말이다. 키팅 선생은 정말로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그러나 너무나 이상만을 좇아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상은 바로 꿈이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이상은 모두 좋아 보이고 현실에 충실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저 고루하고 속물적으로만 보일 것이다. 키팅은 말한다. “인간은 꿈을 통해서만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법, 항상 그래왔고, 또 항상 그럴 것이다.”라고. 참으로 멋진 말이고 또 옳은 말이다. 그러나 꿈과 이상은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비극이 아닐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교육자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청소년 시절에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동경해서 곧잘 그런 직업을 갖기를 선망한다.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욕심에 공부는 제쳐두고 열심히 운동만 하고 비싼 코칭과 트레이닝까지 받아서 어떻게 프로 선수 명단에 올랐으나 주전으로는 못 뛰고 맨날 벤치만 지키고 있는 경우를 보자. 애초에 이 야구 선수에 대하여 그 능력은 물론 그 재능의 한계까지도 정확히 파악하여 공부를 하게 하면서 야구는 취미로 병행하도록 이끌었다면 그는 현재 직장을 잘 다니면서 야구동호회 활동을 즐겁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수나 연기 분야의 경우도 비슷하다. 재능이 정말 남달리 뛰어나야지만 그것을 전업(專業)으로 삼아 일할 수 있는 것이지, 되고 싶다는 꿈과 노력만으로 모두가 나훈아가 되고 전도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도 라틴어 선생 맥칼리스터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렘브란트나 셰익스피어, 모차르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그것을 부추긴 선생님을 미워하게 될 겁니다.” 교육과 학업의 기본은 역시 먹고 살려는 취업을 위한 것임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냄비 같은 열정’이나 ‘헛된 꿈’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든지 순수한 이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학생의 장래를 망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상만 좇다가는 꼭 사고가 터진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그것을 꼭 가르쳐야 한다. 키팅은 닐 페리에게 미처 그것을 가르치지 못한 것 같다. ‘꿈을 통한 완전한 자유인’? 도대체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있기는 한 것인가? 키팅 자신은 완전한 자유인인가? 닐은 자살을 함으로써 완전히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인가? 키팅은 자유로운 사고를 해칠 것이 두려워 낭만주의자처럼 ‘순응에 대한 위험(dangers of conformity)’을 가장 경계했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순응은 불가피한 것이고 그 전적인 거부가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이다.
교육자로서의 키팅은 창조적 성취의 원천은 바로 자유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꿈을 끝까지 존중해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키팅이 말한다. “의학·법률·금융·기술 이런 것들은 다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그런데 시·아름다움·낭만·사랑이 세상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목적만 가지고는 살 수 없고 먼저 삶이 유지돼야만 한다.
또 한 가지, 키팅 선생에게 소통 능력이나 그 의욕이 부족한 것 같아 그것이 상당히 아쉽다.
키팅은 학생들을 매우 사랑하고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해주기 때문에 그들과의 의사소통을 잘되는 편이다. 심지어 획일화된 사고의 위험성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걸이조차 남과 똑같이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자 아예 걷지 않을 자유를 행사하겠다는 학생까지 나올 정도로 키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학생들에게 잘 먹혀들어간다. 그러나 상급자인 놀란 교장이나 학부모와는 의견 대립만 있거나 전혀 대화조차 없다. 동료 교사와도 자신과의 차별화만 확인할 뿐 진정한 의견 교환이나 경청 또는 설득 같은 것이 없다. 바로 이것, 교장선생이나 학부모, 동료 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소통 부족이 키팅 선생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키팅도 소통을 통한 설득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다. 닐 페리가 도저히 아버지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호소할 때 연극이 나의 전부라고 하는 그 열정을 아버지에게 잘 보여드리라고 권장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여기서 키팅도 닐과 함께 닐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일단 내일의 <한여름 밤의 꿈> 공연을 한번 보시고 나서 닐이 의사의 길을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함께 강구해 보자고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이상을 추구했던 닐이 자기가 해결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를 자살로써 끝내려 한 것은 키팅의 가르침이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인 결과를 낸 사례인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니 매사에 이상과 현실이라든지 하는 양면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그 양면의 조화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비교적 쉽게 눈에 보인다. 그리고 내가 젊은 시절 일을 그르쳤던 것들이 정의감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이상적인 상태를 너무 성급하게 쟁취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자책도 뒤따른다. 양비론 같지만, 고고한 비타협적 엘리트주의나 약삭빠른 현실적 타협주의만으로는 우리 사회를 좋은 쪽으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매사에 획일적 대응은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처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키팅 선생과 우리나라의 선생님들께 좀 더 소통을 원활히 하고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는 지혜를 학생들에게 전수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이상적인 기대일까?
그렇다고 내가 교육자로서의 키팅 선생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키팅은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다. 다만 ‘혼자’여서 너무 외로웠고,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을 뿐이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라틴어 선생 매칼리스터가 학생들을 눈 쌓인 마당에 걷게 하면서 라틴어 단어를 음송하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도 이제 키팅 식의 교육법을 따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 선생님, 나의 선생님!
한 사람의 생각은 이상에 그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 이상이 현실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키팅 같은 선생님들이 많이 나오고 여기에 소통과 약간의 지혜가 보태어져 키팅이 꿈꾸던 그런 이상적인 교육이 이 땅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추기(追記):
ㅇ 이 영화의 제목이 <죽은 시인의 사회>다. ‘society’란 단어에 ‘사회’ 말고도 ‘단체’, ‘회(會)’, ‘모임’의 뜻도 있다. 그러니 ‘Dead Poets Society’는 작고한 시인들의 시를 읽고 기리는 문학동아리 정도가 아닐까 한다. 여기서 ‘죽은 시인’이란 어쩌면 작고 시인 중에서도 진정한 삶을 좇아 이상만을 노래하다가 주류사회에서 쫓겨난 선각자, 바로 키팅 선생 같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시를 곧잘 음송했던 닐 페리가 진정으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연극을 하다가 자살함으로써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기렸던 소로, 휘트먼, 셸리와 같이 글자 그대로 ‘죽은’ 시인이 된 셈이기도 하다.
ㅇ 토드 앤더슨의 부모는 형만 편애하고 토드에게는 압박만 할 뿐 관심이나 사랑이 별로 없기에 생일날에도 작년과 같은 학용품 세트를 또 줬다. 그걸 받고 우울해하는 토드를 발견한 닐 페리가 그를 위로하며 “이 학용품 세트는 잘 날게 생겼는데…”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던져버리라고 한다. 토드는 처음엔 주저했지만 닐이 재차 권유하자 결국 그걸 다 던져버리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학용품들을 보며 둘은 환하게 웃는다. 토드가 드디어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때 한마디 하는 닐의 대사 “괜찮아, 내년이면 또 받을 텐데 뭐.” 또한 걸작이다. 그리고 두 친구는 후련한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후에 닐의 자살 소식을 듣고 너무나 큰 충격에 토드가 비틀거리며 눈이 내리는 선착장 쪽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장면 역시 우리의 가슴을 에게 하는데, 이때 토드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에서 자기는 닐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어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그러한 자기가 닐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했구나 하고 깊은 회한에 빠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절망의 깊은 늪에 빠진 그 누군가를 벗어나게 하는 좋은 친구 노릇을 해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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