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서교분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62명이 일본 성지순례를 같다. 진주를 찾아 떠났다. 새벽 2시부터 다 못 싼 짐을 쌓다. 4시 30분 다들 나와 새로운 만남에 기쁨이 넘쳤었다.
진주를 찾아간다 함은,
내가 하느님께 받은 진주로 여기면서 어쩌면 하느님께 마치 바닷물의 거대한 흐름이 진주조개 안에 모래 알갱이 하나를 던져 넣듯, 하느님이 가지신 섭리 안에서 나를 성숙시키고 키워간다. 삶의 다양한 알갱이들은 우리 안에 넣어 주신 것. 그래서 진주조개가 아픔을 주는 모래 알갱이를 뱉어 냄 없이 감싸고 삭여야 한다. 진주를 만들 듯 우리의 삶이란 알갱이를 하느님의 부르심인 나만의 진주로 만들어 가라는 것일 것이다. 내 진주는 내 안에서 내 삶을 통해서 자라고 있다.
내 진주가 없어서 타인의 진주를 부러워하고 시샘하게 될 때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이 찔릴 것 같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왠지 마음이 찔린다.(성경 마태오 7,6ㅡ11)
하느님께로 받은 진주를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모두는 첫날 후쿠오카를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일을 하다 보니 늘 마음이 하나 된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좋았다.
제일 먼저 아리타 마을을 방문했다. 조선인 도공에서 세계적인 마음일 된 곳 사가현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평범했든 마을이 도자기로 유명해진 것은 임진 외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서 살게된 도공 이삼평의 공이 매우 크다고 한다.
자석광을 발견하여 도자기를 시작했고 그 후 도공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매 년 4월-5월 도자기 시장이 열러 고급스런 도자기를 수집하러 온다고 한다. 이곳엔 일본에 한국 수년님이 두 분 중에 한 분이 계신 곳이기도 하다. 17년 전에 나와 함께 봉사하면서 수녀님이 되기를 권고했던 자매가 13년 동안 연락이 안 되어 일본에 있다는 소문만 들었었다. 원죄 없는 성모 기사 회에 쏘노라 빌리아 수도 명으로 일하고 계심을 뒤늦게 알았다. 골베 신부님 기념관에서 전화로 몇 번 물어 직접 통화가 가능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골베신부님은 처자식이 있는 형제를 위해 대신 목숨을 바친 성인이시다.
다음은 일본 선교 본거지며 최초로 서양에 개발 항구 히라도로 이동했다.
신자들의 손으로 만든 타비라 성당은 바닷가 조개껍질을 캐서 아교와 섞어 벽을 발랐다 한다.
공동체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 힘을 넬 수 있었다.
야회 온천장에서 우연히 친한 그룹이 모여 서로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 나는 덩달아 84년 문교부장관 초청으로 동경에 왔을 때 배운 것을 전했다. 온천에서 물을 몸에 뿌리려면 내 몸에만 앉아서 뿌려야 되고 탕 안에 들어갈 때는 수건을 찬물에 담아 물기를 좀 짜고 네모로 접어 머리 위에 놓는 것을 배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건이 반쯤 일어난 자매에게 4개의 수건이 순식간에 날라 즉시 낙아 체 찬물을 적셔 대령했다. 호호대며 척척 구다사이 아리고도, 하며 나란히 수건을 머리에 이고 있는 젊은이들은 천사 같이 예뻤다.
둘째날 야마다 성당 내부는 특히 천장에 나비를 잡아 운양을 이용해 날개를 붙여 만들었다는데 날개를 붙인 흔적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그대로였다.
박해를 피해서 숨어 지냈던 아키즈키로 이동했다.
섬인데 다리가 하늘색으로 칠이 되어 마치 성모님의 옷자락을 연상하기도 했다. 250년 동안 잠복했든 신자들의 마을이며 엔도슈사쿠의 “침묵”의 무대 소트 매로
언덕위에 무사들의 집이 보인다. 받아 드리지 못하고 박해를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늘 지진이 언제 올지 몰라 집에 모시고 빌면서 다신교를 섬겼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고 한다.
거죽은 불상 같이 몸은 성모님 표징으로 숨겼다.
배교당하도록 강요당했다.
오후에 시츠성당 시골 작은 교회로 추기경 3명이 배출했다고 한다. 소토메의 아버지 빈민구제에 앞장선 민속자료 관에서 드로 신부님의 활동을 보았다.
사미엘 성당을 가기 위해 이만이 휴게소에서 내 나이 20살을 젊에 보며 언니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하니 일 열로 줄를 서며 줄을 스는 문화에 동참한 듯 너도나도 함박웃음을 웃으며 쉬소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크림 장사는 도중에 7개씩 계산을 그때그때 계산해달라고 요구했다. 달려도 어떤 일이지 발이 안 아프다 한숨에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잠에서 깬 동녀들은 형님 외 나는 크림을 안 주는 거야/ 줄을 서야 주지했드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하며 섭섭한 어조가 석여 있었다. 실은 차 안에 금지령이 있어 못 들고 갔을 뿐인데... 마무 튼 참 좋았다. 핑계를 만들어 줄 스라는 명령이었다. 시간이 촉박 하여 언니 한입 먹어요 하며 한숨에 크림을 먹어야만 했다. 가이드는 앞자리에 앉기를 강요하였다. 1번 2번 3번 나는 4번 네 여기 있습니다. 무사하기를 기도하라는 명령하는 번호다. 파란 하늘이 더욱 아름다웠다.
나가사키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히로시마보다 피해가 적었다. 이동 중 갑자기 폭우가 내려 비옷을 준비 못해 작은 양산을 쓰고 언덕으로 숨을 헐떡이며 땀과 섞어 뒤 번벅이 됨도 모른 체 오르고 올랐다.
순교 26인을 봉양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 성당(오무라) 올라갔다 갑자기 가까운 오사카 지역에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가족보다 우리는 태평한 편이었다. 꼬불 꼬불로 앞이 안 보여도 설명을 드르려 한 사람도 걱정하는 티가 없었다.
셋째 날 나메시 성당은 지은 지 10년이 됐는데 지은 이레로 제일 많이 방문객이 와 환영 다과를 베풀었다. 62 봉지의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젊은 분들이 올 줄은 몰랐다고 한다.
3박 4일은 집을 비우고 여행 올 수 있게 배려해 준 가족이 있다는 것 그들은 못한 단다. 대부분 할머니 같은 자매들이지만 우리보다 젊은 분들 같았다.
남편 (방사선 나가이 박사)의 도시락을 싸 전해주고
(남편이 하숙생 때 천주교 입교) 폭탄에 맞아 묵주는 녹아 떡이 된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시계 정지, 지상에 거대한 하얀빛이 작열이 24만 시민 중 15만이 사망 그날 이후(반세기) 동안 풀 한포 기도 자라지 않았 단다.
평화공원은 종이학을 여러 형태로 접어 산 덤이 같이 걸어놓고 사진액자로도 걸어 놓았다.
지금은 녹음기 울창한 벚꽃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오후 운젠 지옥계곡을 오를 때는 맑은 하늘 이었어도 오르고 또 오르고 지리산 뱀사골 보다 더 높은 산을 오른다.
기사는 조금도 흩트림 없이 차근차근 급 전거도 흔들림 없이 오른다. 안갯속을 헤치고 올라가는 중 산 벽에 수로를 만들어 길가로 연결되었다. 사태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민을 위해 사태를 방지하기위해 이들의 재벌은 헤체 그릅 cuo 돈받고 일하는 사람 cu 골목 상점 수출기업 상권을 보호하는 동네 상권을 보호하는 전통차 커피점 눈 씻고 찾을수 없이 배달 문화는 더욱 없고 법 개념 고을에 상권을 이어 사줘야 한단다.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이다.
유황냄새가 진동한다. 온전히 산에 물이 끓고 있는데 120도가 넘는다고 한다. 그 속에 유황 안개가 잠시 바람에 지나갈 때 십자가가 보였다. 운젠 그곳에서 거꾸로 신자들을 매달아 머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피를 흘리게 했다. 고통 속에 배교할 것을 강요 악란한 방법으로 했다. 그들은 지진이 어느새 닥칠지 몰라 다신교를 믿어 사별하면 집에도 모시고 납골장에 모신다. 유골을 친지들과 나누워 집에 모시기도 한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 한 순교자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타인에게 모범을 보여 진주를 키우게 한 적이 있는지 반성해본다. 북한에 남아 있는 교우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숨어있는 교우들과 함께 그들도 성인 이 되리라 희망한다. 내가 먼저 진실된 신자가 되야겠다고 바다가 보이는 야외 온천장에서 새로운 다짐을 해보았다. 남에 진주를 찾았느냐 하면서 내 진주가 타인을 부러워하고 시샘하게 될 때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말자 물어 뜻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이 찔리는 일이 없도록 전에 아픔을 잘 견뎌 진주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 함으로 순교자의 진주를 거울삼아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성당 마당에서 신분님의 강복을 받고 아들 딸 들이 배웅을 나왔다.
6시가 되었는 데도 기다리는 모습이 모두 성가정을 이루는 자매님들 같았다.
감사합니다.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