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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 8. 겉옷을 길에 펴고 - 마 21: 10.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마 21: 8. 겉옷을 길에 펴고 -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1] 무리의 대다수는(*, 호 데플레이스토스 오클로스)
정관사가 붙은 절대 최상급 명사로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의 의미이다.
KJV, NIV는 모두 '매우 큰 무리'(very great multitude : KJV, very large crowds : NIV)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9절에 의하면 예수의 앞에서 가고 또 뒤에서 따라가고 있다.
요 12: 12-13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왔음을 알 수 있다.
* 요 12: 12-13 –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러므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따라나선 무리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 구분될 수 있는 두 무리들이 모여 환호의 물결을 이루었다.
또한 이들은 메시야를 대망(大望)하는 열정이 가장 고조된 상태에서 예수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2]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7절에서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은 것은 안장(鞍裝)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심히 부끄러운 가난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J. Calvin).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에 얹어 놓는 것은 나귀를 탈 사람에 대한 엄청난 경의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8절에서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편 사례는 왕하 9: 13에서 예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의 경우가 있었다.
* 왕하 9: 13 -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온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한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메시야로 환영하였다.
다시 말하면 로마의 압제(壓制)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정권을 잡을 통치자로서 환영하였다.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치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거절했고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리들을 감동하여 그를 증언하며 그를 찬양하게 하셨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들 중 다수는 변절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이 변태무쌍한 인간의 마음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한다고 너무 감격할 것도 없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너무 낙심할 것도 없다.
* 사 2: 22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3]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편 선례(先例)는 B. C. 165년에 성전을 재 봉헌하고 시몬 마카베오가 입성하던 때에도 있었다(마카베오상 13:51. 마카베오하 10:7).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막절에 야외에 초막을 짓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Lightfoot).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초막절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축제용의 작은 가지, 즉 '룰랍'(lulab)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막을 만들기 위한 나무는 달개지붕(lean-to)을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큰 가지들이다. 그러므로 나귀 앞에 깔아 논 가지들은 길가에 심어놓은 종려나무의 잔가지에 해당한다.
* 요 12: 13 -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여기에서 '베다'의 뜻인 '에코프톤'(*)과 '펴다'의 뜻인 '에스트론뉘온'(*)은 모두 미완료형태의 동사이다. 이 동사가 나타내고 있는 동작이 단 한 번에 끝나버린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를 옹위하는 무리들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어 갔다. 나귀가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도록 사람들은 계속해서 길가 나무에서 가지들을 꺾고 그것들을 자꾸 길에 깔아놓는다고 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낸다.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고대 의식 중의 하나였다. 한편 가지를 흔든 이날을 기념하여 초대 기독교도들은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른다.
마 21: 9. 앞 뒤에서 따르는 무리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는 군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 예수의 앞뒤를 따랐다.
군중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의 앞뒤를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창검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왕과 종려나무 가지를 든 그의 백성들, 이것이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다.
군마에 높이 탄 왕과 창검과 기치를 펄럭이며 위풍당당한 군대를 거느리고 입성하는 세상의 왕의 행렬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전자는 평화의 행렬이고 후자는 전쟁의 행렬이다. 전자는 생명의 행렬이고, 후자는 죽음의 행렬이다.
(2)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절)라고 백성들은 외쳤다.
'호산나'의 본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인데 후대에는 '만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메시야 만세'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나라여'(막 11: 10),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것은 한마디로 '메시야'에 대한 감격의 칭호다.
드디어 대망의 메시야가 오신 것이다. 이 환호성 속에는 위대하고 찬란했던 옛 왕국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역사의 환호이며 감격이었다. 최초의 종려주일은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에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1]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무리의 환호 소리는 시 118: 25,26에서 인용된 말이다.
* 시 118: 25-26 –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편은 대찬양시(the Great Hallel)이다. 즉 시 113-118편의 일부로서, 장막절, 수전절, 유월절 때 사용되었다.
또한 무리들의 이 환호 소리는 예수 탄생시 천군 천사들이 불렀던 찬양과도 흡사하다.
* 눅 2: 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들이 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 질러'(눅 19: 40) 인류 대속(代贖)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2] 호산나!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간구로 사용되었다(Gundry, use of O. T. pp. 41-43).
* 삼하 14: 4 –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 왕하 6: 26 –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이 말은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기쁨, 환호 등의 의미가 함축된 일종의 구호(口號)가 되었다. 여기서는 찬양의 송영이나 기쁨의 환호로 이해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쁜 날에 해당하는 장막절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Hosanna Day)이라고 부른다.
* 렘 31: 7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3] 다윗의 자손이여!
마태에 의해 삽입된 호칭으로 유대 독자들을 의식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에 대한 표현이다.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 온 메시아가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아 만세'의 뜻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을 예수에게 대해서 사용한 것에 대해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15절).
4]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3절의 '주'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시는 이'라는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이 시 118: 26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었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보일 무렵부터 기쁜 마음으로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마 21: 10.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 중에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네로 황제 때의 국세 조사에 의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이 약 27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예루살렘 성은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였을 것이다.
"이는 누구냐" 극소수의 예수의 제자들을 빼놓고는 다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실락원 이후부터 구약 4천 년 역사와 신약 2 천 년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아니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아니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며,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
* 눅 19: 41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께서는 아마도 현재 '성 스데반의 문'이라고 불리는 곳, 즉 성전 바깥뜰로 들어가는 북쪽 입구의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2]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마태만이 언급한 이 소동에 대해 요 12: 19에서는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고 표현하여 예수에 관한 소문으로 온 성이 들끓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여러 도시에서 올라온 순례자의 무리가 약 200-300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혼잡한 생활 가운데서 예수의 갑작스런 출현은 예루살렘을 극히 혼돈스럽게 했을 것이다.
전에 동방박사들의 예기치 않는 방문으로 소동한 적이 있는 이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뜻하지 않은 왕의 출현'으로 다시 한번 깜짝 놀라고 마음이 동요(動搖)되었으며 불안에 떨게 되었다.
* 마 2: 1-3 –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3] 이는 누구냐? 하거늘
이 말은 예수가 실제로 예루살렘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Bonnard).
이 말은 이런 큰 소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람인 이 사람의 정체(正體)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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