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대륙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혁명의 결과 왕정이 무너지고 난 후 혁명의 분위기 가운데 하나님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후에 침략에 대한 불안과 전쟁과 기근과 질병 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6세기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 등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밝히셨던 것처럼,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국교회의 전반적인 형식주의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이러한 복음을 바탕으로 성경적 교회와 예배에 관한 진리를 밝히셨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냥 그리스도인이나 형제들로 불리기를 원했음에도 나중에 외부사람들에 의하여 “플리머스 브레드린”(Plymouth Brethren, 이 말은 원래 단순히 '플리머스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란 뜻으로서 이 이름은 플리머스 지역에 생긴 형제들의 모임이 형제들의 대표적 모임의 하나로 성장함에 따라 주위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알려진 것입니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과 연관하여 처음에 언급할 인물은 바로 에드워드 크로닌(Edward Cronin)입니다. 그는 1801년에 영국의 코크(Cork)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카톨릭 교도였고 어머니는 개신교도였습니다. 그는 카톨릭 교도로 자라났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자유와 생명으로 나아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치과의사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가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을 방문했을 때 카톨릭으로부터 복음을 찾아 나온 여러 복음주의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개신교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파적 분열상에 대해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더블린에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어느 특정교파에 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불편한 마음을 안고 쿠퍼(W. Cooper)라는 사람이 성직자로 있는 더블린의 요크 가(York Street)에 있는 독립교회(Independent Chapel)에 다니기 시작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이러한 분파적인 장벽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계속 연구함에 따라 인간들이 만든 교파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일인목회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도 함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으며 주일날 오전이면 나가던 집회에 나가지 않고 나무 아래 같은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이름은 그 교회의 교인명단에서 삭제되었고, 그의 이름을 삭제하는 데 반대했던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라는 집사도 결국 그 이름이 명단에서 함께 삭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두 사람은 1825년 에드워드 윌슨의 집에서 따로 모여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모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크로닌과 함께 그 교회를 떠났던 그의 사촌인 드러리(Drury)라는 여자와 팀스(Timms)라는 남자가 떡을 떼는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이 영국으로 떠나자 크로닌은 이들과 함께 로워 펨브로크 가(Lower Pembroke Street)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떡을 떼는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떡을 떼는 모임은 향후 2년 동안 점점 숫자가 불어나게 되고 프랜시스 허친슨(Francis Hutchinson)이 여기에 더해지면서는 피츠윌리엄 스퀘어(Fitzwilliam Square) 9번지에 있는 그의 커다란 방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죤 베시 파넬(John Vesey Parnel, 나중에 second Lord Congleton이 됨)이 이 무리와 함께 하게 되고, 그의 제안에 의해 옹기어 가(Aungier Street)에 있는 큰 방을 임대하여 여기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여태까지 누군가의 집에서 모임을 가진 것이라면 이 때부터는 공적인 임대건물에서 모이기 시작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크로닌의 말에 따르면 이 임대건물에 주일 저녁이면 주의 상을 놓기 위하여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구를 밖으로 옮기던 때 자신이 느꼈던 행복감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초기에 가졌던 교리는 다음과 같은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성직자제도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일인목회는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의 일원이라 믿었기에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나아올 때 나아오는 사람들의 교파적 배경과 무관하게 이 사람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부다 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갈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서로 섬기게 하기 위해 각 성도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셨음을 믿었습니다. 헨리 그로브스(Henry Groves, 영국모임 초기 형제중의 하나인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의 아들)는 이러한 원리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면 누구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열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들의 사역에 대한 자유도 함께 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1827년에는 이 무리에 죤 기포드 벨렛(John Gifford Bellet)과 죤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벨렛은 1795년에 더블린에서 태어나 10대에 회심을 경험한 후 1822년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초기 모임의 형제들을 알게 된 후에는 성경적 기반위에 단순히 모이는 그들의 모임에 함께 하게 되고 모임 초기 형제중의 하나인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와 가졌던 대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때 잉글랜드에 살았던 그로브스는 원래 치과의사를 하다가 이후 교회선교협회(Churh Missionary Society)를 통해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던 중 성직안수를 받아야 선교사로 나갈 수 있다는 말에 국교회 성직자로 안수받기 위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에서 신학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험을 치러 자주 더블린에 오게 되었는데 점점 다른 초기형제들과 비슷한 원리들을 성경을 통해 깨달아가던 중에, 더블린에서 이 형제들을 알게 되면서 더블린에 올 때마다 함께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성경을 통해 사람에 의한 안수를 받아야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이며,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으면 되는 것임을 깨닫고 국교회 성직자로 안수받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화 중에 그는 벨렛에게 자신이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자유롭게 떡을 뗄 수가 있으며, 사도들의 경우를 볼 때 우리는 주일날 함께 모여 떡을 떼며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1828년이 끝나갈 무렵 그는 벨렛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 가운데 사역하게 하시고 우리를 세워 가신다는 믿음 가운데 인간이 세운 성직자를 기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단순히 모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벨렛은 이 형제들의 길이 성경적인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동안 이 형제들과 교제를 계속하고 차후에 닥치게 되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형제들 사이에서 뛰어난 성경교사의 하나로 남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무렵 죤 넬슨 다비가 이 모임에 함께 하게 되는데 그는 1800년에 아일랜드의 킹스 카운티(King's County) 지방에 있는 리프 캐슬(Leap Castle)이란 곳에서 그의 아버지 죤 다비(John Darby)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스쿨(Westminster School)에서 교육을 받고 나중에는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를 다니게 되는데, 1819년에는 고전에 대한 최우수상 수상자(Classical Gold Medalist)로 이 학교를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벨렛의 경우처럼 변호사가 되었지만 결국 이 직업을 그만두고 위클로우(Wicklow)라는 곳에서 매기(Magee)라는 더블린의 대주교에 의해 국교회 성직자로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비는 이 때만 해도 극단적인 형태의 고교회(High Church파, 카톨릭과 거의 흡사한 형태를 보이는 국교회내의 한 부류)주의자였습니다. 이 때 그를 안수한 대주교 매기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는데, 다비는 이에 결국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계속 연구함에 따라 국교회 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모습에 힘들어하던 중에, 당시 더블린의 에드워드 크로닌과 만나고 있던 벨렛의 권유에 의해 파워스코트(Powerscourt)여사가 자신의 저택에서 열던 성경의 예언에 관한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거기 참석했던 그로브스, 파넬 등을 만나게 되며 처음에는 가끔씩 교제하다가 나중에 점점 이 모임이 성경적임을 확신하고 1827년 국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모임에 전적으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다비는 추후 이 형제들의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인데, 그는 학문적 천재성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겸비한 인물로 초기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특히 1848년 죠지 뮐러(George Muller)와의 문제로 모임 전체가 Open 형제들과 Exclusive 형제들로 갈라진 이후에는 Exclusive 형제들의 지도자로서 사실상 Exclusive 형제들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나중의 사역을 통해 흔히 세대주의로 알려져 있는 체계의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아일랜드에서 서로 형제사이인 죤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과 프랜시스 윌리엄 뉴먼(Francis William Newman)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유로 잉글랜드의 옥스포드(Oxford)에 방문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벤자민 윌스 뉴턴(Benjamin Wills Newton)을 만나게 되고 뉴턴의 영향아래 있던 위그램(G. V. Wigram), 랜슬럿 브렌턴(Lancelot Brenton), 글래드스톤(W. E. Gladstone) 등을 함께 만나게 되었습니다. 플리머스(Plymouth) 출신의 뉴턴의 권유에 의해 다비는 다시 플리머스를 방문하게 되는데 1832년경 잉글랜드에서는 처음으로 이 형제들의 모임이 이 지역에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모임에는 제임스 해리스(James L. Harris)가 함께 하게 되고, 모임형제들의 글을 담은 "Christian Witness(그리스도인의 간증)"라는 잡지를 시작하게 되는데 여기에 다비의 글이 여러 차례 실리게 되었습니다. 1836년에는 트레겔레스(S. P. Tregelles)가 이 모임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플리머스 모임은 1,200명에 이르는 성장을 보였습니다. 이와 함께 반스터플(Barnstaple)의 로버트 채프만(Robert Chapman)과 브리스톨(Bristol)의 헨리 크레익(Henry Craik)과 죠지 뮐러(George Muller)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다비의 일생동안 그와 연관되어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37년에 다비는 스위스에 있는 감리교도교회에서의 사역을 시작으로 하여 유럽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고 1840년경에는 그 열매로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다수의 모임이 형성되었으며 제네바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희망에 관한 강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1845년에 그가 플리머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플리머스 모임이 뉴턴의 압도적인 영향아래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더욱이 종말론에 관한 견해에서 뉴턴과 심한 대립을 보이던 중(Darby는 대환란 전에 휴거가 있다는 입장이었고, 뉴턴은 대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그의 가르침 가운데 이단적 교리가 발견되면서 그는 그를 따르는 형제들과 함께 뉴턴이 사역하던 플리머스 모임에서 갈라져 나와 따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분열입니다. 이러한 다비의 입장은 뉴턴의 가르침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로 형제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뉴턴은 이 사건 이후 사역을 그만두고 결국 형제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845년에 이러한 문제가 생기고 난 후 죠지 뮐러가 사역하던 브리스톨 모임에 플리머스 모임 출신의 몇 형제가 교제요청을 하게 되는데 다비는 이 형제들은 잘못된 교리로 전체모임에 의해 정죄받은 뉴턴이 사역하던 플리머스 모임출신이므로 받아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뮐러를 비롯한 브리스톨 모임은 이들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고 교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형제들이므로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이 형제들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다비는 모든 모임으로 하여금 뮐러의 브리스톨 모임을 정죄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형제들의 전체모임은 이 요구를 받아들인 모임과 그렇지 않은 모임으로 나뉘어 1848년 그를 따르는 Exclusive 형제들과 뮐러의 입장에 동조하는 Open 형제들로 대분열을 겪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사역 후에 그는 1853년부터는 독일에 있는 침례교도 사이에서 사역하게 되는데 뒤셀도르프(Dusseldorf)와 엘버펠트(Elberfeld) 지역 등에 모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이 형제들을 위하여 "엘버펠트 성경(Elberfeld Bible)"을 편찬하였습니다. 베를린에서 있었던 복음주의자들의 연합모임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만났던 톨럭(Tholuck) 박사에게 은사에 관한 그의 견해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포 성경(Pau Bible)"을 편찬하였고, 그가 편찬한 영어판 성경은 개정을 거쳐 그의 사후 1890년이 되어 완전한 형태로 출판되었습니다. 1859년부터는 그는 캐나다와 미국, 인도서부, 뉴질랜드,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사역했습니다.
50년이 넘는 그의 사역기간동안 그는 성경강해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The 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성경개요)"은 그의 대표적 저작의 하나로 매우 유명합니다. 다비는 하나님이 다루어 가시는 인간의 역사를 따로 구분되는 여러 세대로 나누고 각 세대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르게 다뤄가시는데 인간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때마다 늘 실패해 왔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현재의 교회시대 역시 사람들은 실패하게 되어 있으며 이 실패 역시 회복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교회의 황폐함을 바라볼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기존의 황폐한 교회조직에서 나와서 따로 모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교회의 황폐함을 볼 때 장로나 집사 같은 직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하여 완전히 구분된 계획을 따로 가지고 계시며,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후에 펼쳐지는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엄청난 대환란이 천년왕국 이전에 펼쳐지지만 교회는 이 환란을 통과하지 아니하고 대환란 직전에 휴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흔히 세대주의로 불리는 체계를 현대적인 형태로 최초로 체계화시킨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 대속적인 죽음의 효력 그리고 그의 부활과 재림에 관한 진리를 지속적으로 가르쳤으며 이러한 그의 복음적인 가르침은 그의 종말론과 더불어 근본주의운동(Fundamentalism : 20세기 전반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당시 팽배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불신앙에 대항하여 성경의 근본진리로 돌아가자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많은 수의 찬송가를 지었고 그가 지은 시집도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생을 보내고 1882년 4월 29일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간단하게 살펴본 다비의 일생입니다.
1828년 다비는 "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과 하나됨)"이라는 팜플렛을 펴냈는데, 이것은 이 형제들의 최초의 소책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기서 분명히 밝히기를 자신은 새로운 교파를 만든다거나 교회들의 연합체를 만들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자에서 "기독교도라고 말하는 교회들의 조직적인 연합체는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으며 우리는 교회의 생명과 상실된 말씀의 능력과 영적인 생명 안에서의 연합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원리 위에서 움직여야 하며 진정한 하나됨은 성령의 하나됨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왕국의 완전한 기초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포함하지 못하는 어떠한 모임도 완전한 축복을 경험할 수 없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이란 말씀에서 그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에서 축복의 이름인 것이다.
하나됨은 분명 교회의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하나됨은 교회의 하나됨이 아니라 단순한 연합에 불과하며 교회의 본질과 소망을 부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은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의 하나됨이며 영적인 사람들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라고 썼습니다.
10년 후인 1838년에 그가 쓴 글에서는 "우리의 상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상이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받으신 모든 사람들 곧 자신이 불쌍한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 안에서는 어떠한 안식도 찾지 못해 그들의 완전한 소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안식을 찾게 된 모든 사람들을 영접한다. "라고 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북미의 Open 형제들과 그랜트(Grant) Exclusive 형제들과 함께 했던 아이언사이드(H. A. Ironside)는 다비의 이 팜플렛을 언급하며 말하기를 "(위의 책자에서 보듯이)처음에는 이 형제들의 모임 안에서 획일성을 강조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 나의 확신을 말하자면 이 형제들이 나중에 일어나는 수많은 분열을 보이게 된 주요원인은 하나됨은 반드시 획일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원리를 깨닫지 못한 데 있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이 형제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길을 가시도록 맡기는 가운데 나중에 보여주듯이 교회의 질서와 절차에 있어서 모든 모임들의 행동이 획일적인 일치를 보여야 한다는 원리를 고집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성령의 하나됨에 대한 놀라운 간증을 보여주었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했습니다.
더블린에서 이렇게 단순한 성경적 원리로 모이던 형제들 가운데는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다비가 그의 책자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하나됨에 대한 강하고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Open 형제들의 선구적 선교사로 존경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795년 햄프셔(Hampshire)의 뉴턴(Newton)이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Miss Paget의 영향으로 회심을 경험하게 된 그는 나중에 플리머스 지역에서 치과의사가 되는데 나중에 엑시터(Exeter)지역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치과의사로서의 세상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국에 나가 복음을 전하려는 소망을 품게 되며 그의 아내가 이러한 일에 함께 하고자 하는 확신이 아직 없자 확신이 생길 때까지 13년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1825년에는 "Christian Devotedness(그리스도인의 헌신)"라는 책자를 쓰게 되는데 그는 이 책자에서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그리스도에 헌신하려는 소망을 보여주는데 이 책자에서 우리는 특히 물질적인 소유와 연관하여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하고 성공적인 치과의사로서의 수입의 대부분을 주의 일에 바치는 그의 헌신을 볼 수 있다. 이
책자는 바로 영국모임 초기형제들의 하나이자 나중에 오직 기도로 공급받아 대규모 고아원을 운영한 것으로 유명해진 죠지 뮐러를 감동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치과의사를 그만두고 교회선교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를 통해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지만 성직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국교회 성직자로 안수를 받기 위해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해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학기중간에 있는 시험을 치르러 더블린에 오다가 더블린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제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성직안수를 받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던 가운데 그는 학기중간에 있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 더블린으로 가기 위해 마련해 놓은 400파운드의 돈이 어느 주일날 저녁 도둑맞음으로 말미암아 성직안수를 위한 시험을 위해 더블린으로 갈 수 없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직안수가 필요없는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성직안수를 받지 않은 채 ‘교회선교협회’를 통해 선교사로 나가려고 요청하였지만 성직안수를 받지 않으면 만찬을 진행할 수 없다는 그들의 말에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생각하던 가운데 결국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직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근거 없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사역을 위해서 인간에 의해 주어지는 성직안수를 받아야 한다다는 생각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생각임을 확신하면서, 1829년 그는 아내와 두 아이들 그리고 다른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그의 친구가 빌려준 배를 타고 러시아의 세인트 피터스부르크(St. Petersburg)를 거쳐 목적지인 바그다드(Bagdad)를 향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6개월에 걸친 이 여행을 마치고 바그다드에 도착하자 돈은 바닥났지만 바그다드에서의 사역기간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바드다드에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였고 살인과 강도가 만연했습니다.
바그다드에 머물기 시작한 두 번째 해에는 전염병이 돌아 수천 명의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설상가상으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대부분이 황폐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홍수와 기근, 폭력으로 말미암아 불과 85,000명의 인구중에 65,000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그들은 1832년 크로닌과 콩글턴 경(Lord Congleton) 그리고 프랜시스 뉴먼의 방문과 도움을 받았지만,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전하던 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만연하던 치명적인 전염병에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험난했던 바그다드에서의 그의 사역은 겉으로 보아서는 소수의 회심자를 얻는데 그쳤지만 그의 믿음과 용기는 그의 뒤를 따르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켰고 오늘날 오직 주님을 의지한 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곳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잉글랜드로 돌아와 잠깐 머물다가 나중에 다시 인도의 마드라스(Madras)로 가서 치과의사를 하며 바울처럼 스스로 경비를 충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의 열정적인 사역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첫댓글요즈음의 화두가 개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혁에 대한 글들이 곳곳에서 접할 수가 있습니다.200년전에 영국의 형제들은 일인목회가 비성경적인것을 알고있었으며 단순히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기 위해서 다니던 교회들을 나와서 새로이 모였습니다.되새길 필요가 있을것 같기에 올립니다
첫댓글 요즈음의 화두가 개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혁에 대한 글들이 곳곳에서 접할 수가 있습니다.200년전에 영국의 형제들은 일인목회가 비성경적인것을 알고있었으며 단순히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기 위해서 다니던 교회들을 나와서 새로이 모였습니다.되새길 필요가 있을것 같기에 올립니다
형제회에대한 이야기로군요... 어떤 구체적 내용을 떠나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방향에 참으로 공감하고... 말씀으로 돌아보고.. 말씀속에서 무엇이든 발견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