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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6월 7일 이사합니다.
아파트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고 편리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떠나네요.
8개월 동안 정이 들었는데 또 정을 떼야죠.
아마 내 뒤에는 젊은 부부가 오게 될 텐데, 땡잡은 것일까요, 아닐까요?
그 사람은 신부가 살았다는 것을 모르지만, 하는 것마다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하늘 올라갔다 오신 분 있으세요?
다 올라갔다 오셨잖아요. 비행기를 타고서도 올라갔었고,
또 제가 사는 곳이 18층인데 밑에서 보면 새카맣게 높은 하늘이에요.
저는 하늘에서 살고 있어요.
하지만, 오늘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은 그런 의미의 하늘은 아니죠.
승천(昇天), 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이죠.
여러분은 고향이 어디세요?
나 같으면 태어난 곳은 인천인데,
인천보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황해도 연백이 더 생각나요.
그러면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예요?
맞아요, 나자렛, 나자렛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죠.
하지만, 그곳은 예수님의 인성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장소죠.
예수님의 진짜 고향은 어디예요?
천국, 하늘이죠.
그곳이 예수님의 고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안 가본 곳을 가신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사셨던 당신의 고향으로 귀향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귀천하신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은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예수 귀천 축일, 예수 귀향 축일이라고도 하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승천하셨을까요?
‘승천’하면 비행기 타고 가셨을까,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가셨을까 하는 잡생각이 많이 나는데,
예수님은 지상에서 할 일 다 하시고 당신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요.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던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찾으시러 가신 것이 바로 승천의 의미에요.
다른 말로 승천은 우리가 얘기할 때 잠시 잊고 있었던, 혹은 잃어버렸던 자기의 꼴을 찾는 것이다.
제가 예전에 든 예화 같은데, 한 집안에 개와 당나귀를 기르고 있었어요.
두 동물 쓰임새는 다르죠?
걔한텐 일 안 시켜요. 걔가 하는 일은 밥 잘 먹고 꼬리 치고 귀염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나귀는 새벽부터 일어나 등뼈가 녹아내릴 때까지 일해야 해요.
어느 날 당나귀가 가만히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개보다 못한 거예요.
‘저 개노무 자식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낯선 사람이 오면 짖고, 모든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는데,
나는 온종일 빠지게 일을 해야 해, 잡아먹히는 소는 더 처량하군.
나도 개처럼 행동하면 주인한테 이쁨받고 일 안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주인이 문 열고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앞발을 번쩍 들고 주인에게 매달렸어요.
그러니, 주인은 들어오다 뒤로 꽈당 자빠졌겠죠.
그리고 돌아온 거는 칭찬이 아니라 몽둥이찜질이었죠.
당나귀는 그날 밤에 혼자 울면서 생각했어요.
‘이상하네, 나 개랑 똑같이 행동했거든. 그런데 걔가 했을 때는 칭찬을 받고 과자도 하나 얻어먹는데,
왜 나한테 몽둥이세례가 돌아왔나?’
당나귀는 끝까지 그 이유를 모르고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죠.
여러분들도 그렇게 될까 봐 저도 걱정이 들어요.
그렇게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우리 말에 ‘꼴값’이라는 말이 있죠?
보통 분수 넘게 행동하면, 꼴값을 떤다고 합니다.
하지만, ‘꼴값한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기 꼴의 값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좋은 말입니다.
‘우리 선생님은 참 꼴값 하는 선생님이셔,’ 하면 정말 선생님다운 선생님을 의미했죠.
‘우리 학생들 참 꼴값하고 살아요.’ 하면, 우리 학생들 모범생이라는 말이죠.
자, 제게 말해보세요.
‘신부님, 참 꼴값하십니다.’
억양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웃음)
‘꼴’의 의미를 아셨죠? 좋은 의미예요.
당나귀의 꼴값이 있고, 개의 꼴값이 있어요.
그런데 당나귀는 자기 꼴값을 모르고 개 꼴값을 하려고 하니 몽둥이만 얻어맞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군인의 꼴값이 있죠. 군인은 나라를 지켜야 해요.
그런데 군인이 자기 꼴값을 못하고 정치인의 꼴값을 하려고 하다 보면 쿠데타가 일어나고 독재가 되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이 죽어요.
꼴값 원래 좋은 의미의 꼴값은 정의를 나타내는데, 정의가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학교 선생이 돈 봉투를 너무 좋아해요.
그러면 좋은 의미로 꼴값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정말 꼴값하는 선생이에요.
손가락질당하는 선생님.
김웅열 신부의 꼴값이 있고, 여러분 각자의 꼴값이 있죠.
모두 다 달라요.
집에서도, 본당에서도 자기가 맡은 꼴값이 있어요.
예를 들어 세례받은 지 일 년도 안 된 사람이 본당 총회장 한다고 하면 꼴값 떤다는 말 듣죠.
또, 사제를 통하여 예수님 앞으로 신자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하느님이 사제에게 주신 의무와 카리스마입니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사제의 꼴이에요.
그런데 건방지게 비켜주질 않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가리면서 자기가 예수 행세하고 산다면, 꼴값 떠는 거죠.
사이비 교주인 거죠.
얼마 전에 우리 교구 주교 서품이 있었어요.
전임 주교에게 순명과 존경과 사랑을 바치겠느냐고 새 주교에게 주교 서품식 때 물어요.
사제 사품 받을 때도 똑같이 물어요.
‘그대는 주교에게 순명과 사랑과 존경을 바치겠습니까?’
그 조직에 들어가 살아야 하기에, 순명은 바칠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랑과 존경 서약은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존경을 받을 만해야 존경을 바치죠.
나쁜 사람에게 순명 할 수는 있지만, 존경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은 분명 고위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문구라는 생각이 들고,
서품식 때마다 딱 그 부분에 저항이 와요.
자기 꼴의 값을 하고 살면 저절로 교구 신부들이 아무개 주교가 아니라 ‘우리 주교님’이라 불러요.
선종하셨는데, 미국에서 오신 인천교구의 나 주교님, 수도회 소속이시어 청빈 서약을 하신 분이시죠.
주교회의에 늘 도시락 가져가시고, 서울 가실 때 전철을 이용하셨죠.
주교용으로 나온 차가 있어도 타지 않으세요.
인천교구 신부들은 항상 이야기할 때 ‘우리 주교님’ 이예요.
그 말 한마디만 들어도 얼마나 신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지 알게 돼요.
예수님의 귀향 목적이 뭐라고요?
‘승천은 자기 꼴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오늘 이 승천 대축일 날의 가장 큰 의미는 나는 과연 내 꼴을 찾아가고 있는가,
내 꼴값 하며 살아가는가를 본인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꼴값을 못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날이죠.
우리 인간의 가장 완벽한 자기 꼴은 뭐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자기 꼴은 하느님 모상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다 나오죠?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승천의 의미다 그 뜻입니다.
요즘 인간들의 난폭하고 잔인한 삶을 보면 어디 한 구석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얼마 전에 유튜브 형사들이 나와서 하는 그 프로가 있어요.
이천십몇 년에 있었던 사건인데, 아버지 엄마는 교대로 온종일 식당을 운영해요.
하루는 13세 형과 9살 된 동생이랑 둘이 있는데 살인 사건 신고가 들어온 거예요.
남동생이 엎어진 채로 머리에 도끼로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방이 피투성이야.
그런데 형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강도가 들어와 동생은 죽이고 형은 납치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형사들의 CCTV를 보니까 형이 가방을 들고 나가는 게 보였고,
나중에 잡고 보니 그 가방 안에 피 묻은 손도끼가 있는 거예요.
이 아이를 조사했더니, 아이가 자기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별짓을 다 했대요.
부모 들어오는 시간에 화장지로 온몸을 미이라처럼 친친 감았지만,
너무 피곤한 부모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화장지 엉클어 놓았다고 혼만 났대요.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인데, 여러 번 시도해도 안 되니, 아이가 완전히 바뀐 거예요.
그러면서 살인 청부업자가 되는 것을 꿈으로 삼았죠.
그래서 도끼도 사고, 각 나라의 유명한 연쇄 살인범도 조사하면서 우상화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실험을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대상이 동생이 된 거죠.
동생 죽이고 그랬대요.
‘미안해, 그런데 별거 아니네.’
살인이 쉽다고 느끼고 또 사람을 죽이려고 대상을 찾았죠.
지나가는 택배 아저씨 불러 뒤에 태워 달라하고 뒤에서 도끼로 치려고 하는데,
커브를 트는 바람에 거울에 비친 거야.
놀란 기사는 도망쳤죠.
밤이 되어 돌아다니니, 술 취한 사람이 벽에 오줌을 누려고 해요.
뒤에서 머리를 치려고 하는데 누가 버린 유리판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라 도망쳤대요.
결국 동생뿐이 못 죽인 것인데, 이런 모습을 보며 어디서 하느님의 모상을 찾을 수 있어요?
푸틴, 자기 욕심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 그렇게 많이 죽이면서도 꼴에 동방정교회 주교 찾아가 강복 받아.
스탈린도 신부 되려고 했던 사람이고, 히틀러도 오스트리아 수도원에서 복사 쓰던 애야.
참 하느님의 모상을 찾는 몸부림은 쉬운 게 아닙니다.
얼마 전에 조계종 종정도 ‘코로나, 너는 인간 탐욕의 결과구나.’ 하셨죠.
신자라고 자처하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상 욕심이 늘 하느님 공경보다 앞서고, 이 세상에서 하던 기준, 가치관, 사고방식을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 적용하고 살아가요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허물어져요.
부서지고 질서를 잃어버리고 타락해버리는 나 자신을, 내 가정을, 내 교회를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정상으로 회복시켜 제 꼴을 찾는 것이 승천의 의미라는 거죠.
교회도 엉망진창인 곳 많잖아요.
교회 꼴을 못 찾아요.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승천의 의미에요.
그때 그 순간을 자꾸 떠올리고 내 머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그 기억을 붙들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승천의 의미예요.
어느 때가 과연 여러분들은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습니까?
주님이 나를 보시기에 ‘넌 참 아름답다. 그것이 너한테 가장 잘 맞는 네 꼴이다.’ 하시는 느낌,
그 순간이 살면서 있었을 수도, 혹은 딱히 없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미 여러 번 하느님께서 칭찬을 받았을 수 있는데, 본인 기억이 안 났을 뿐이겠죠.
저는 기억에 남는 것은 각 성당에 버려진 성상을 모아 레스토레이션(restortion)해 외국에 보낸 적이 있어요.
그때 아프리카분들이 성상을 가슴에 안고 기뻐하는 사진을 보내주셨데, 정말 눈물이 많이 났어요.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꼴’이라고 하는 것의 첫 번째는 그 사람의 인성이에요.
겉으로 드러난 행동 결과물보다는
정말 내 안에 들어와서 성령께서 행복하게 사실 수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상처가 잔뜩 있고도 예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리고 누구한테 선물하면서 참 이쁘게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닮은 꼴, 하느님이 불어 넣은 숨,
하느님의 신성을 닮은 내 인성이 있었느냐는 것이죠.
우리가 결과적으로는 전교를 해서 ‘하느님도 나도 참 기뻤다.’ 하며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것도,
자기 꼴을 찾아가려는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인성까지 내려오시어 나의 과거를 보시고
‘그래, 너도 참 상처가 많은데, 용케 잘살고 있다.’ 하는 그런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보편적으로 성격에 나오는 하느님이 보시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제가 그랬죠.
‘인간은 기도하면 강해지고 하느님은 약해진다.’
인간이 기도할 때는 놀라운 힘이 생기고 그 기도하는 것을 하느님이 들으시면은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길 정도로 하느님 마음이 흐물흐물해진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명동성당 앞에 배 베드로 할아버지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은 뇌성 마비여서 온몸이 막 돌아가는데, 깡통 하나 놓고서는 구걸을 하셨죠.
빵 하나 사고 나머지는 전부 교회에 봉헌해요.
그리고 매일 새벽 미사를 빠진 적이 없고, 특히 주일 7~8대의 미사를 모두 드렸어요.
김수환 추경님께서는 베드로 할아버지 앞을 지날 때마다 기도를 청했어요.
‘할아버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나중에 추기경님이 명동성당 뒤에 조립식 집을 지어주어 사시다가,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로 모셨죠.
베드로 할아버지는 기도 부탁한 사람이 자꾸 늘어나 돌아가실 무렵에는 거의 잠을 안 주무셨대요.
하여튼 꽃동네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오웅진 신부님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 할아버지 기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오 신부님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돈 얻어와야 하고, 바쁘시죠.
세상에서 막장까지 가신 분들을 모셔 온 곳이고,
하루에도 몇이나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고 없이 돌아가고 있죠.
베드로 할아버지의 기도가 꽃동네를 쫙 덮고 있던 거죠.
항상 웃으셨어요.
하느님이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나 닮았다’ 하시지 않을까요.
두 번째로 하느님 보시기 아름다운 때는 회개할 때입니다.
후회가 아니라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할 때 하느님은 기뻐하시죠.
세 번째 용서하며 살아갈 때 분명히 하느님의 꼴을 찾아가는 겁니다.
네 번째, 세상의 것 포기하고 하느님을 채워나갈 때,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이 ‘그래, 너는 나 닮았다.’ 하실 겁니다.
예수 승천의 의미는 예수 귀향의 의미요, 귀천의 의미고, 점점 잃어버려가는 하느님의 모상을 찾아가는 길이죠.
그래서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바뀌는 거예요.
하느님의 모습을 하나도 안 보이고, 성체는 넙죽넙죽 받아먹고 살아가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더럽고 추잡한 생각, 욕심, 분노, 교만 등 오만 생각이 다 들어있다면,
과연 이런 내가 거울을 바라보며 ‘너, 정말 하느님 닮았다.’ 할 수 있겠는가!
창피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승천 대축일의 첫 번째 의미 ‘잃어버린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무책임하게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죠.
사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그냥 집단이었습니다.
그 안에 구성원들은 감투 싸움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대부분은 기복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성령을 받아 힘이 생겨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겁니다.
도대체 어떤 힘을 받았길래?
이렇게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체험한 자가 누리는 특별한 영적인 힘이 있어요.
그 힘은 세 가지, 첫 번째 오직 예수님께 순명하는 힘이 나와요.
성령 받은 자의 순명하는 모습과 순명하는 척하는 자의 모습은 전혀 달라요
성령을 안 받아도 순명하는 척은 할 수 있어요. 그 대신 뒤로 돌아서서 욕해요.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 순명하는 모습을 보면 다 끌어안으면서 순명해요.
그리고 기쁘게 순명해요.
왜 나한테 이런 것을 요구하는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일단 ‘네’하고 봐요
순명의 반대가 되는, 순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자존심이에요.
성령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순명하는 척만, 자존심이 목까지 올라와 있어서 순명 못 해요.
하지만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얼마나 헛되고 헛된 건지
다 체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에, ‘그래. 오직 예수님께 순명한다.
당신을 보고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뒤에서 얘기하시는 저분을 보고 내가 순명한다.’ 합니다.
두 번째로 오직 예수님께 충성하는 힘이 나와요.
예수님께 충성하려고 할 때 늘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애착이에요.
자애심 자기를 사랑하는 자애심, 생명에 대한 애착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을 받은 자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하는 힘이 나와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실 제일 걸려 넘어지는 게 가족이에요.
잠깐만 사랑이 나눠질 뿐 온전히 가족들이에요.
이 세상 어려운 데서 일하는 사람들 참 많이 있지만 저는 특히 ‘국경없는의사회’ 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어느 의사는 명문대학 나와서 큰 대학병원에 있으면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대요.
‘내가 이제껏 뭐 하고 살았지? 내가 의사인데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었네.
정말 무료로 내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네.’
그래서 나이 50이 넘어 ‘국경없는의사회’에 들어가,
총알이 날아다니는데 가서 소아과 의사로 혼자서 일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 양반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하는 말,
‘오늘도 죽은 아이들 얼굴 때문에 잠을 못 잡니다.
천 원만 있으면 말라리아 주사약을 맞춰 살릴 수 있는데 천 원이 없습니다.’
그 넓은 지역의 의사가 자기 하나뿐이래요.
사람을 살리고를 떠나서 자기는 이제껏 의대 들어갈 때 돈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었대요.
그런데 다행히 30년 만에 철이 나서 나머지 인생은 이들이랑 같이 살다가 죽을 거라 하더군요.
예수님 모습이죠. 의사의 꼴을 찾는 거예요.
돈 벌어서 빌딩 짓고 그것이 아니라, 정계 진출하고, 연예인 프로에 나와 자기 얼굴을 알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힘이 나오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영적인 힘인
첫 번째 오직 예수님께 순명하는 힘,
두 번째 오직 예수님께 충성하는 힘,
세 번째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힘을 받게 돼요.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힘인 순명, 충성, 사랑을 가지고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천국 안에 성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 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죠.
여러분들 안에서 사람들은 천국을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인이 되셔야 합니다.
김웅열 신부도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도 보고, 천국도 보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같은 말로 ‘예수님 안에 우리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증거 하는 것’을 생각하는 날이 바로 승천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예수 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두 가지라고 그랬어요.
첫 번째, 내가 꼴값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은 당신이 머물던 곳으로 가셔서 자기의 꼴을 찾아가신 거예요.
우리도 꼴을 찾아야죠
두 번째,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성령이 사실은 또 예수님이고, 하느님이시죠.
예수님이 몸뚱아리 가지고는 천 년을 살겠어요? 한계가 있죠.
그래서 내가 빨리 떠나는 것이 너희들한테 유리하다고 하셨죠.
‘내가 떠나고 난 다음에 영원히 죽지 않을, 너희들 곁에서 항상 지키고 있을 성령의 모습으로 와야
너희들한테 유리한 거야, 나 떠난다고 슬퍼하지 마.’
그리고 떠나셨잖아요.
그리고 성령이 성령으로 오셨잖아요.
더 큰 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 예수라고 하는 그 몸뚱아리로부터 벗어나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자이신 성령의 모습으로 오시어
2천 년 동안 우리 백성들을 지켜보고 계신 거예요.
우리, ‘주님 보시기에 참 내 모습 닮았다 하는 소리를 듣고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또 ‘내가 정말 예수님의 증인이 돼서 세상 곳곳에
내 모습을 보고 하늘나라를 묵상할 수 있게끔 표양을 보이고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2022년 주님 승천 대축일(5/2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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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