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장군 이성계는 무학대사로부터 해몽을 받은 뒤로 정치적 야심을 품고 언제나 산신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무수한 전장터를 오가면서 자신의 웅지를 펼치기 위해서는 8대 산왕대신이 허락해주어야 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명산에만 가면 산신제를 지내곤 하였다
. 그러나 장군 이성계는 기도중에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지리산에 가서도 혼이 나고 태백산에 가서도 혼만 날 뿐이었다.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기도를 방해 하는 것으로 보아 산신이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고민에 빠졌다.
다른 명산에 가서 기도를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하늘은 정녕코 나를 택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무학대사를 찾아가서 의논을 하게 되었다
. 무학은 이성계의 하소연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아들 형제가 여덟이나 있다고 합시다. 비록 아들은 여럿이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한 분이 아니겠소?" 무슨 중대한 일이 생겨 8명이 모두 반대하더라도 그 어머니이신 자당께서 먼저 허락하면 나머지 자손들든 결코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산의 이치, 신의 이치 또한 이와 같아서 어머니에게 먼저 허락을 받으면 아들들이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 산신님께 먼저 지성으로 기도를 올려 허락을 받으십시요.
"
"그렇다면 산신들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 누구입니까?"
"그거야 계룡산 산신님이시지요. 이 분은 전국 8대 명산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니 먼저 어머니께 허락을 받으면 나머지 산왕님들도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성계는 계룡산 신원사 위쪽산기슭, 연천봉 용맥이 힘차게 내려와 끝나는 자리에 제물을 놓고 일심으로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1시쯤 될 무렵 제단 앞에 신비로운 안개가 일어나면서 6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잘 생긴 할머니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게 보였다. 이성계는 꿈인지, 환상인지, 착시인지, 그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여러 번 눈을 비벼 보고 제 살도 고집어보았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네가 그토록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니, 왕 될 것을 허락하노라. 그러나 너의 기도소리가 천 년 왕업을 이루게 해달라는데 욕심이 많구나, 5백 년 동안만 하도록 하여라.
그나마 그것도 조건이 있으니 첫째는 생명을 아껴서 사람을 죽이질 말아야 하고, 둘째는 덕을 베풀어서 민심을 얻는 데 부지런하여야 하느니라. 모름지기 이 두 가지는 제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니 한시도 잊지 말고 명심하도록 해야 하느니라. "운운, 계룡산 산신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소리없이 스러져 가벼렸다.
그 후로 이성계는 계룡산 산신의 당부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일 때에 그가 얼마나 진노했던가, 또 한 후에 태종이 된 방원이 왕자들을 비롯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얼마나 비분해 했던가.
아무튼 이성계는 계룡산 산신의 허락을 받고 자 모든 산신기도가 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어떤 명산에 가도 감응이 매우 좋았는데 오직 하나, 금오산만이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후에 삼천리 강산 전체가 모두 내 것인데 오직 금오산 하나만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의 '금오일구 비아소유'라는 친필을 쓰기까지 되었다.
이 글씨는 금오산 채미정(길재의 사당)에 보관되어 내려왔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자신이 기도했던 신원사 뒤편의 그 터에 계룡단을 세웠는데 우리나라 산악 신앙의 중요한 제단 중의 하나인 이 단은 후에 중악단中嶽壇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는 묘향산의 상악단上嶽壇,지리산의 하악단下嶽壇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한편 신원사는 651년(백제 의자왕 11)에 열반종의 개산조 보덕이 창건한 고찰인데 그 이름이 신원사였다가 후에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신원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이름은 1866년에 관찰사 심상훈이 중수하면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중악단에는 이성계가 기도 당시 생생하게 보았던 계룡산 여산신의 그림이 있는데 이는 태조가 화공을 시켜 그때 헌신했던 할머니를 그리게 한 것이다.
아다시피 조선왕조는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하엿다. 승려들은 한양성 안으로 출입도 못했고, 사찰들은 고려때처럼 흥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원사만은 예외였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있다.
신원사는 태조 이성계가 애지중지할 수 밖에 없느 사찰이엇다. 자신의 산신기도를 통해 제왕의 지위를 허락받은 터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조는 중악단을 신성시했고 그곳을 지키고 보전하는 임무를 신원사 스님들에게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뭇 선비.관료들이 이따금씩 신원사 스님들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니 스님들은 이태조에게 직접 하소연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 중악단을 지키기 어렵다고 이야기 하자, 이성계는 매우 특별한 조치를 신원사에 내려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육모방망'이다. '어느 누구든지 신원사에 와서 행패를 부리면 왕을 제외하고는 때려도 좋다'고 어명으로 써서 주니, 신원사 스님들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 방망이는 손을 대도 역적이요, 붙잡기만 해도 역적이며, 반항하면 더욱 역적이니, 그 기세가 위풍당당하기만 하였다. 왕족이든 영의정이든 어느 누구도 이 방망이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신원사 일대에는 그만 인적이 끊겨버렸다. 간혹 스님들이 장난 삼아 방망이를 들어도 반항할 수가 없으니 항우 장사라 할지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신원사의 샘이 좋아서 장수가 난다는 풍수설이 있었으나, 신원사의 그 권세는 사실 육모방망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손석우님의 글에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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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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