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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3이었던 80년 민주화의 봄은 6월 항쟁을 거쳐 그후, 나의 25년 내내를 쉬임없이 정의롭지 못한 세력과 끊임없이 싸우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80년 5월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던 전환점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종로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자리하고 있는 창덕여고 3학년이었습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딸과 동기동창이었습니다.
우리학교는 공부도 잘 했지만 베레모를 쓰고, 칼라에 풀을 메겨 깃을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는 멋있는 교복만으로도 관심의 대상이었죠...
사실 나는 시를 쓰고, 음악듣기를 좋아하고 고교야구도 가끔 보러다니는 그러면서도 공부를 소홀하게 하지는 않았던 낭만적인 여학생이었습니다.
주말이면 혼자서 교외선을 타고 일영이나 송추같은 데를 가서 맑고 청명한 개울가에 앉아 시를 쓰고, 정말 멋있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발견하면 다시 꼭 찾아오겠다는 마음으로 썼던 시를 돌무더기를 만들어 그 안에 넣어 놓고 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나에게 고등학교 2학년 때인 전혀 예기치 않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죠...
학교는 물론 전국가가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학교는 물론 청와대 근처에 있던 모든 학생들은 엄숙하고 침통한 빛을 온몸으로 굳이 드러내면서 두 줄을 맞추어 경복궁 안에 마련된 빈소까지 며칠 간 행렬을 지어 묵념을 하러 갔었습니다.
학교에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주일 내내 조가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큰소리로 떠들거나 웃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하고 서글픈 분위기 속에서 모든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정숙을 강요하는 시간들을 보냈지요....
그런 얼마후, 전두환과 노태우에 의해 12.12반란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전두환씨가 계엄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기 중에 전효선이라는 학생이 있었죠... 키가 작고 뚱뚱했었지요...
그 친구가 바로 전두환의 외동딸입니다.
그 친구의 엄마가 진작부터 치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학생들사이에서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던 터라 나는 관심을 집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섭고 힘센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군인들이 다시 국가를 지배한다는 것에 대한 의아스러움과 혼란이 있었지만 방학까지 그냥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후 전두환씨는 자기자신 스스로 소장, 중장으로 나중에는 대장으로까지 몇 개월사이에 초고속으로 가슴에 별수를 늘려 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효선이네 아버지 별 두개 달았대, 그러고 몇 달 후에는 효선이네 아버지 별 세개 됐대, 또 얼마 후 효선이네 아버지 별 4개 달았대...'라는 얘기들이 수시로 나왔습니다.
나는 이런 소문들을 연달아 들으면서 '군인들은 별 다는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고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는 방학이 끝나고 고3이 되었습니다.
80년 3월이 되자마자 우리들의 등하교길인 종로통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물러나라!' '계엄사령관 물러나라!' 등등의 구호들이 빗발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한 시위대들은 어깨동무를 걸고 훌라훌라, 농민가 등등을 부르면서 종로통으로 몰려나왔습니다.
지금은 각 학교의 학생들이 자기학교에서 집회를 하지만 그 당시에 서울시내의 모든 학교의 학생들은 종로통이나 광화문 통에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4월 5월이 되면서 거리는 온통 최루탄과 몽둥이 판이었고, 탑골공원 앞까지 걸어가서 집에가는 시내버스를 타야하는 나는 오랫동안을 기다려야만 버스를 탈수 있는 날이 점점 많아져 시위대와 함께 거리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광화문 4거리엔 여기저기 무장한 장갑차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거리 곳곳엔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넘쳐났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학교를 오가는 동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대학생이 수시로 벌이는 시위를 구경하고, 엄청나게 얻어맞으면서 잡혀가는 것을 보는 것들이 일상적인 일 같이 느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우리 동기인 전효선이의 아버지를 왜 수많은 대학생들이 물러나라고 저렇게까지 얻어맞고 잡혀가면서까지 외쳐대는지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학생들이 나눠주거나 뿌리는 모든 유인물들을 몰래몰래 가져다 자세하게 읽었습니다.
정말 무섭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받아서 몰래 가방에 넣다가 군인들에게 엄청나게 심한 쌍욕을 먹으면서 빼앗기는 날도 있었고, 두들겨 맞을 뻔하기 했지만 갈 수록 겁이 줄어들었던 것같습니다.
대학생 당사자들이 학교별로 매일매일 시위를 하러 종로통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하루도 빼지않고 종로나 광화문, 서울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시위를 볼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엄청난 혼란을 겪었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갈수록 시위는 거세졌고, 싸움도 격렬 해 졌습니다.
거리에 나갔다하면, 최루탄으로 눈을 뜰수 없고, 매맞는 시위대에 눈을 휘번덕이는 군인들, 총탄을 장전하고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군인 천지인 세상속에서 그나마 잘 오지도 않는 집에가는 버스는 시위대와 군인들의 충돌로 수시로 멈춰서서 종로에서 서울역까지 걸어가고, 용산까지 걸어가서 다시 타야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쩔 땐 남산길로 걸어가서 남영역쪽으로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매일 이런 상황을 보고 당하며 나는 갈수록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현장을 통해 그들의 시위를 지켜보고, 때론 참여도 했기 때문에 어쩌면 현장경험이나 감각면에서는 내가 월등하게 앞서(?) 있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점점 어차피 걸어가야 할 것 행진하다 몰리면서 밀리는 시위대와 함께 움직이면서 여기저기 종로통과 광화문 일대를 걸어다니고, 밀려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복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붙잡힐 것같은 대학생이 보이면 얼른 가서 겁이나서 오빠의 팔을 꼭 붙잡고 가는 다정한 오누이처럼 팔을 붙잡고 함께 걸어 줌으로써 잡혀가는 것을 막아주는 것도 교묘하게 많이 하였습니다.
겁이났던 학생들은 한참을 걸은 후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총총히 사라지고들 했었지요...
구호를 외치면서 앞장서지는 못했지만 몇 시간이고 여기저기를 이렇게 헤메고 다닌 날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들이 공부에 매달리는 나의 고3 생활은 시위현장 곳곳을 누비는 것으로 몇 달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이 되자 시위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곳곳에서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총칼로 무참하게 죽이고 있다는 사진들이 나돌고 유인물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한 유인물들을 가방에 넣어와서 떨면서 몰래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두환은 당시 광주항쟁을 배후조종했다고 DJ와 수십명을 구속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에 내란음모죄였다고 기억합니다.
나중에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었고, DJ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나의 분노와 혼동과 헤메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아니 헤어날 수가 없었다고 해야 솔직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지요...
우리 어머니나 가족들은 제가 내성적이지만 성실하고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독서실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나는 공부를 한다고 독서실을 한달씩 끊어놓고는 독서실에서 밤세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늘 복잡하고 우울하고 서글펐습니다.
'국민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저런 나쁜 놈들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이런 사회에서 공부해서 대학을 가면 뭘한다는 것인가?
왜 이렇게 우리는 무서움에 떨어야하나... 사람들을 그렇게 두들겨 패도 되는가?'
이러한 내용들을 글로 긁적이면서, 시를 쓰기도 하고 헤매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기대, 대학을 가긴 가야할 것같다는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대학에 간다면 적극적으로 데모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지면서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민주화운동이 격럴했던 80년 나의 고3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학교는 전효선이를 보호한다고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방탄용 리무진을 동원하고, 등하교길엔 총을 찬 여성들과 남성들이 교실입구까지 그 친구를 호위하고 다니면서 우리들에게까지 위화감을 줬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1층 현관바로 입구에 교실을 터서 호화스러운 경호실까지 만들어 놓고 등교후부터 하교 때까지 학교까지 지켰습니다.
선생님들도 전효선이 눈치만 보고, 우리 모두는 어느누구근 속이야 어떻든 말한마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심리적 압박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군인들을 거리에서 보는 것도 지겨운데, 학교에가면 그들이 또 있으니 참 더러운 상황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백송이 있던 노천 계단에 앉아 한 숨을 쉬었던 기억도 납니다.
한편, 과외가 합법적이었던 당시 우리 3학년 때 과외열풍은 최고조에 달하였습니다.
우리학교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 중심에는 치맛바람으로 유명한 이순자씨가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이순자씨가 직접 중심이 되어 과외팀을 꾸리고 전두환씨가 살고 있는 연희동 집에서 과외를 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외팀에는 군장성, 고위관료, 법조계, 교수, 사업가들의 자녀들만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그 과외팀엔 우리학교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던 같은 동기 친구인 정도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중에 전두환씨의 큰 아들인 전재국과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입소문이란 것이 여과없이 너무도 빨라 그 시절 벌써, 효선이 오빠가 도경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우리학교 친구들 사이에 쫙 퍼져있을 정도였지요...
또, 전효선이도 그 과외팀에서 같이 공부하던 남자친구 윤상현과 나중에 결혼을 했지요...
그들의 부모들은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철저하게 집안의 신분을 따져서 과외팀에 합류시킴으로써 나중에 연애를 해도 별탈이 없게 (?) 기획했던 것같습니다.
그 과외팀에 대한 소문은 날이갈수록 학교전체에 파다하게 퍼졌고,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우선은 강사들이 유명한 참고서 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과외는 흔히 대학생이나 학교선생, 학원선생들이 지도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과외침은 국어는 000참고서 저자 000, 수학은 00수학 저자 000, 영어는 00영어 저자 000 이런식이라는 것이고,
여기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선행학습을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과외팀이 3학년 2학기까지 모두다 마치고 책걸이를 하자마자,
전두환은 과외전면 금지조치를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그 과외팀 아이들에 의해, 학교 전체에 퍼져 학교가 온통 뒤집어 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80년 갑자기 과외가 전면 금지되자 과외하던 아이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또 다른 고급과외를 하던 그룹의 아이들은 이런 소문을 듣고 많은 반감을 표시하기는,
학교안에서조차 워낙 센 권력인지라 수군수군 불평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지요.
아무튼 공부에 매달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소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시위등으로 방황하던 나는 당시 내신성적이 3등급이었으니까...
그런데 과외도 안하고, 가끔 학원이나 다니면서 시위같은 데나 관심을 가지고 거리를 방황하던 나에게 이런 종류의 파다한 소문은 전두환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더 키우는 요소였지요.
그러나 감히 그것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학교분위에서 느껴지는 거대권력의 무언가 모를 커다란 중압감같은 이런 것들이 느껴져
그런 아이들 집단에 대한 시니컬한 말들과 반응들을 함으로써 우회적으로만 반항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20년이 지나서 만난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재야운동을 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어쩐지 당연하게 느껴진다,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면서, 벌써 고등학교때부터 그런 낌새가 다분히 있었노라고 너스레들을 떨어 다함께 웃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과외금지를 조치를 단행한 전두환은 또 다시 대학 복수지원제를 느닷없이 들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그 제도가 지속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후기 한개의 학교에만 입학원서를 넣을 수 있었는데, 2개의 학교를 지원하고, 지원현황 등을 보아 두개중 한개학교에만 면접에 참여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제도가 처음 도입되자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 교사들까지 매우 혼란스러웠지요.
그 결과 소위 3등급 정도까지 지원하는 유명대학이라는 곳들은 전례없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률이 치솟았고,, 중위권 대학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학교를 지원해야 할지,처음으로 시도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전략, 전술을 짤 수도 없었습니다.
지원한 학생들 중에 누가,얼마나 면접에 나타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지요...
그 결과는 소위 말하는 유명대학들 전체가 미달이었지요....
꼴찌한 학생도 에라모르겠다 한번 지원이나 해보자고 하고 면접에 가거나 , 경쟁률이 높아 재수할 각오로 그냥 면접에 참석한 사람들은 꼴지학생이라도 모두 합격을 하는 우스운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졌었습니다.
나도 가고 싶은 학교가 너무 경쟁률이 높아 면접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걸어서 5분도 안되는 바로 집 옆에 있던 학교를 지원해서 갔는데, 그 학교 역시도 당시 엄청난 경쟁률이었지요...
우리는 시험이 끝나지 잘 봤든 못봤든 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때부터 관심있던 역사책이나 정치에 관한 책도 많이 보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졸업생 축제'를 한다고 했습니다.
학교차원에서 고3생들이 졸업을 하기 전에 졸업생들을 위한 축제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청와대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잔뜩 와서 강당을 꾸미고 , 무대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얘기인 즉 , 졸업생축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홍당무'라는 연극인데 그 주인공은 전효선이라고....
그러니 연극이 끝나면, 각 반별로 아주 짧은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한다고....
우리는 장기자랑 연습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반은 팝송 몇 개를 엮어 2-3명의 친구들이 고고춤을 추기로 하였는데, 나는 그 때 배경이 될 노래들을 함께 고르고 녹음하고, 틀어주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어거지 장기자랑을 준비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전두환의 딸인 효선이는 학생시절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연극 주인공을 해보는 추억을 위해 비지땀을 흘렸지요...
우리는 졸업하기 전에 모두 강당으로 모여, 이 어거지 연극 감상을 했었지요...
그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했겠지만 나는 잘못된 권력의 행패를 다시한번 깨달으면서 파란많았던 고3시절의 막을 내렸습니다.
첫댓글 Good
그렇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논산댁'님이 쓰신게 아니고... ㅎㅎ
제친구들이 그후에 과외를 하는데
과외선생이 이거불법이라서 걸리면 어떻게 합니까?하니 학생 아빠인 전직장성하는 말 그럼 조사하러오는 녀석 잡아다 혼 낼거니 걱정마라 했다는 군인들 시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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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논산댁'님이 쓰신게 아니고 누가 쓴글을 읽다가... ㅎㅎ
우리나라 50대 이상 많은 사람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게 틀림없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