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말로3 - 생 말로 성문을 나와 선착장에서 디나르로 가는 페리를 타다!
어제 5월 27일 캉 역 Gare de Caen 에서 오후 5시 11분 기차를 타고 퐁토르송
몽생미셀 Pont Mont St-Michel 을 지나 7시 28분 에 브루타뉴 의 한가한
시골역인 돌 Dol de Bretagne 에 내려 밤 21시 떼제베 기차 를 갈아 탔습니다.
떼제베 기차는 서쪽으로 달려 밤 21시 17분 에 브르타뉴 반도 북부에 항구 도시
생 말로 Saint Malo 에 도착하는데 밤이 늦었으니 택시를 타고는
생 뱅상문 Porte St. Vincen 으로 성으로 들어가 구시가지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5월 28일 휴대한 전기남비로 밥을 해서 먹고는 생 말로 Saint Malo 의 안네 므르타뉴
Anne de Bretagne 호텔을 나와 미로 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 을 지나는데
어느 건물 모서리에 흰색 성모자상 이 참 인상적이라 한참 동안 서서 쳐다 봅니다!
그러고는 큰 길로 나와서 생 뱅상문 Porte St. Vincen 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와 뒤돌아 보니 해안가의 성은 성벽도 높고 튼튼하며 원형으로
돌출한 치 도 참으로 견고해 보이니 이 성채는 가히 난공불락 이라 하겠습니다.
아침 시간 인데도 부지런한 여행사 단체 패키지 가 벌써 움직였으니 가이드 는
성과 도시의 유래 를 설명하는 모양인데 언제나 서양인 관광객들은 착한
초등학생이 담임 선생님 말씀을 듣는양 참 열심히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는 눈을 돌리니 어제 밤에 보았던 그 캐러비안 해적선 이 아침 안개 탓에
가물가울 희미한 형체 를 드러낸 모습이 한폭의 수채화 를 연상 시킵니다.
그러고는 오른쪽에 성벽을 끼고 걷는데 왼쪽은 부두이니 보트며 또 요트의 마스트 가
숲을 이루어 빽빽하게 늘어섰는데.... 이번 여행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항구는 어딜 가도 이렇게 요트가 많으니 우리네 자가용 처럼 흔해 보입니다?
그러고는 중간쯤에 또 튼튼한 성문을 보니 남문인 그랑드 포르트 Grande Porte
인데 여긴 멋있게 생긴지라 한참 쳐다 보고는 걸어서 생 루이문
Porte St. Louis 을 지나니 성벽 끝 모서리 인지라 성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돕니다.
여기 서쪽 성벽 도 끝없이 이어지는데 성벽을 끼고 조금 걸으니 오른쪽에는
서문인 다낭문 Porte Dinan 이 보이니 매우 견고하면서도 우아해
보이는데 문득 D 일보 박종인 기자가 쓴 ‘땅의 역사’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1904년 대한제국 시대, 돈값은 ‘X값’ 이었다”는 기사를 보면.... 러일 전쟁 취재차
방한한 미국 기자 로버트 던 이 서울에서 150달러(오늘날 가치로 4천달러, 430만원)
를 바꾸었는데 상평통보 동전이 값어치가 없으니.... 호텔 문 앞에 산 처럼 쌓였습니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고 손자 이산이 스물네살로 경희궁에서 왕위를 이으니 정조 라
집권당인 노론 벽파는 몸을 떨었으니 새 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해 뜻을 관철시킨 집단이라 앉아서 죽느니 뭐라도 하고 죽겠다고 벽파는 왕을
죽일 계획 을 세우니 이듬해 음력 7월 28일 전흥문과 강용휘라는 자객이 궁궐에 잠입 했다”
“두 사람은 궁궐 앞 보신탕집에서 개 한마리 잡아먹고 경희궁 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자 전흥문은 비수를, 강용휘는 쇠몽둥이 철편(鐵鞭)을 들고 궁궐 지붕 위 를
넘나들었다. 건물 아래에는 암살단 50여명이 대기 중 이었다. 경비대에 걸려
암살단은 일망타진 됐다.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 이 사주한 일이었다“
“열사흘 만에 전모가 드러났다. 일에 가담한 이유를 전흥문은 이리 말했다. "강용휘가 돈
1500문과 여자 노비 를 주며 함께 일하자고 요구했기에 승낙 했다."(1777년 정조실록
1년 8월 11일) 조선 왕국의 22대 왕을 암살 하는 청부 살인 대가가 1500푼, 15냥 이다.
정확한 가치는 알수 없으나 일의 경중을 따지면 열다섯 냥은 보통 돈이 아님은 분명하다.”
“1633년 인조 때 처음 발행됐던 엽전, 상평통보 는 유통이 중지됐다가 1678년 숙종 4년
다시 발행됐다. 조선 정부는 400푼을 은 한냥 으로 정했다.(숙종실록 4년 1월 23일)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노비 몸값은 평균 5 ~ 20냥 이었다.(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1997) 다섯 냥이면 노비를 부리고 스무냥 값이면 국왕을 죽일 수 있었다.”
“127년이 지난 1904년 5월 어느날 미국 사진기자가 조선에 들어왔다. 이름은 로버트 던
(Dunn) 이고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Collier's) 소속이다. 목적은 조선 땅에서 벌어진
러일 전쟁 취재. 평양으로 출발전 구리타(Kurita) 라는 일본인 안내인에게 환전을 부탁했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 는 구리타 말에 던은 미화 150달러 를 건넸다. 150달러는 2017년
현재 4,050달러(433만원) 정도다. ( 미연방준비은행 소비자물가 통계 ) 석양 무렵,
묵고 있던 호텔 사동이 던에게 뛰어왔다. 큰일 났다고, 구리타가 돈을 들수가 없다고.”
“1904년 6월 4일 미국 주간지‘콜리어스’에 실린 사진이다. 러일전쟁 종군기자
인 로버트 던이 서울에서 150달러를 바꾸고 받은 엽전 이 신기하다며
보낸 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에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경제 상황 이 다 담겨 있다.”
“그리하여 찍은 기념사진이 위 사진이다. 엽전 이라 흔히 부르는 상평통보 1개 는
1문, 그러니까 한푼 이다. 사진에 나오는 돈이 모두 얼마인지는 기사에
없다 ( 세어볼 엄두는 났을까 ). 대신 1904년 6월 4일 자 기사에
던은 이렇게 기록했다. "1개 부대가 있어야 운반할 수 있는 돈 이었다.”
“돈 몇 줄을 들고 2주 취재를 마치고 왔다. 그 사이 장정 스무명이 밤낮으로 내 재산을
지켰다. 돈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일당을 지급하고 나니 돈더미가 녹듯이 사라졌다.
" 열다섯 냥이면 청부 살인 까지 할 수 있던 조선에서 도대체 무슨 일 이 벌어졌을까.”
그러고는 옛날 생각에서 깨어나 조금 더 걸으니 왼쪽 부두에 페리 가 들어
오는게 보이니..... 저걸 타고 생 말로 맞은편에 자리한 도시
디나르 Dinard 를 보고 다시 돌아와 생말로 성벽과 도시 를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 생말로 가 속한 브르타뉴는 렌이 수도 인데 그 남쪽에 낭트칙령 으로
유명한 낭트 라는 도시가 있으니, 몇년전에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동정민씨
가 쓴 “한국 축제로 낭트 달구는 두 여인의 ‘위대한 도전’” 이라는
기사가 떠오르는데, 올해 한불문화상 받는 보데즈 회장과 이정주 예술감독 입니다.
16일 프랑스 파리 외교관클럽에서 열린 한불 문화상 시상대에 키 작은 한국인 여성 한명이
이 나라 대표 국립극장인 샤요 극장장과 나란히 섰다. 낭트 한국의 봄 협회 미라
보데즈 회장(44). 연단 밑에선 이정주 예술감독(48) 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4년전 이 두 여성이 프랑스 파리에서 394km 떨어진 항구 도시 낭트 에서 프랑스 지방
최초로 한국 문화 예술 축제 를 열 때만 해도 가족들 조차 무모하다고 말렸다.
지금은 매년 관객 3000명 이 찾아오는 프랑스 서부 지역의 주요 축제 로 자리 잡았다.
19일 ‘2017 낭트 한국의 봄’ 축제 개막식에 참석한 모철민 주프랑스 한국대사는
“오롯이 두 여성의 열정이 만들어 낸 축제”라며 극찬했다.
‘한국을 알리고 싶은’ 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최연소 이수자 (이 감독)와
‘한국을 알고싶은’ 입양아 출신 한방 간호사(보데즈 회장) 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3년 모국어인 한국어를 배우러 서울에 머물던 보데즈
회장이 우연히 이 감독이 연 파티 에 들르면서 시작됐다.
이 감독 은 2002년 파리에서 국악 최초로 버스킹(길거리 공연) 을 마친 뒤였다.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던 이 감독 은 보데즈 회장에게 공연 번역 을 부탁했다가
그의 한국과 음악에 대한 열정에 반했다. 공연 기획 방면에
인맥이 있던 보데즈 회장과 의기투합해 2004년부터 프랑스 투어 를 시작했다.
2009년 두 사람은 “프랑스에 한국 문화를 알리자”는.... 목표 하나로 낭트 에 들어왔다.
낭트 항구가 쇠퇴 하면서 문화 도시로 변모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택한 결정이었다.
오자마자 두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공연, 음식을 곁들인 ‘한국의 밤 저녁행사’를 열었다.
이 감독은 “당시 주민 들은 ‘코레(한국)’라고 하면 북한 으로 생각할 정도로
한국을 몰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루아르 강가 집에 큰 태극기
부터 내걸었다. 배를 타고 다니는 현지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이 감독은“2009년 집에서 DVD로 이준익 감독‘왕의남자’를 본 프랑스인 50여명의 반응을
잊을수 없다”고 했다. 영화 속 우리 옷의 화려한 색감과 디자인, ‘금기’를 깨는
스토리 에 관객들은 오전 2시가 넘도록 집에 갈 줄을 몰랐다. 영화와 공연, 거기다
한국 음식까지 더해진 저녁 행사는 낭트 지역 신문에 소개되면서 낭트의 명물 로 떠올랐다.
기회가 왔다. 2010년 낭트 한국 명예영사이자 시의원이었던 다니엘 라르질리에르마레샬 이
먼저 한국 문화축제 개최 를 제안했다. 낭트의 대표 음악 축제인 바르바르 페스티벌
에서 이 감독의 거문고 공연 에 반한 인연이었다. 낭트시와 한국문화원도 지원을 약속했다.
보데즈 회장은 1973년 태어난 뒤 이듬해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 가정에 입양됐다.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부부(남편은 엔지니어, 부인은 고교 영어 교사) 의 막내였다.
그가 한국의 정체성 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다섯차례나 한국에 데려간 부모의 정성
덕분이었다. 19일 개막식에도 부부는 개량 한복을 입고 딸을 흐뭇한 표정 으로 바라봤다.
간호대학을 졸업한 보데즈 회장 은 한국에서 배운 한의학을 낭트대 에서 다시 공부
하면서 추나요법, 침, 마사지 등 의료 일도 하고 있다. 이 감독에게
배운 거문고 실력도 수준급 이다. 보데즈 회장에게 한국이 좋은 이유 를 물어봤다.
한참 동안 허공만 바라보던 그는 “투(tout·‘모든 것’이라는 뜻)”라고 수줍게
말했다. 그는 “역사, 음식, 음악, 의학… 다 좋다. 한국 문화 는 주변국 중국,
일본과 비교해도 깊이가 다르다. 낭트 시민들이 이를 알아가는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두 사람의 꿈은 두 가지다. 2023년 낭트 한국의 봄 축제 10주년을 낭트의 가장
유명한 성에서 여는 것. 2010년 일본 사무라이 전시회 가 이 성에서 열리는
것을 본 뒤 부터 변치 않는 꿈이다. 낭트에 한옥 공연장 을 짓는 꿈도 꾸고 있다.
2009년부터 쭉 함께 살고 있는 두 사람은 “이제는 친자매”라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상대방 언어를 전혀 못했던 두 사람은
어느새 두 나라 언어 능통자 가 됐다. 꿈을 가진 두 사람 은 행복해 보였다.
입구에 자그만 박스형 오피스 가 있는데 안내문을 보니 디나르는 편도 4유로
에 왕복은 8유로 라 왕복표를 끊어 선착장 Cale de Dinan 으로
걸어 내려가는데..... 안개 가 낀 탓에 해안가 배며 시설들이 희미해 보입니다.
안개가 낀 탓에 배가 출항할수 있을러나 걱정되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보이고 배는
출발하는데... 성채가 멀어지는 모습 을 구경하다가 눈을 돌리니 안개 가
자욱한 탓에 바다 중간에 여러 구조물들이 희미하게 보이는게 또 운치가 있습니다.
배 안에서 조금전에 받은 유인물을 받아보니 생 말로 Saint Malo 에서
디나르 Dinard 는 8번 코스로 아주 짧으며 다른 코스는
몇시간을 가야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멀며 아주 다양하다는걸 봅니다!
페리 Ferry 는 20분후 디나르 Dinard 에 도착하니 특이한 것은 배들이 부두에
정박하지않고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것이 수심이 얕아서 그런 모양이니
그럼 배에 타고 내릴 때는 다른 자그만 보트들이 왕래 하는지 모르겠는
데... 그럼 상호간에 신호는 무전기가 아닌 그냥 휴대폰 으로 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