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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맹함으로 선덕여왕의 통치를 도왔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별을 관측하는 건물(瞻星臺)이라는 명칭 때문에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도 첨성대가 ‘천문관측대’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선덕여왕 2년(63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조선 말기 ‘증보문헌비고’는 선덕여왕 16년(647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구체적인 제작시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책들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가 안 나타나 있다.’(‘우리 역사의 여왕들’)
첨성대 같은 관측 건물을 세워 자연재해를 미리 예방하려 했던 것은 여왕이 그만큼 뛰어난 왕이었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힘
여왕은 연호를 바꾼 해에 분황사(芬皇寺)를 낙성한다. 분황사는 경주시내 황룡사 터 바로 옆에 있는데, 후대에 다시 지어져 지금도 사찰로 이용된다. 선덕여왕은 이미 3만여 평(9만9000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사찰인 황룡사가 지척에 있는데도 분황사를 또 지었다. 공사기간만 3년이 걸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석공만 200여 명, 인부 100여 명을 합쳐 모두 3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이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왕위를 계승하고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정치적 틀 속에서 안주하던 방식을 어느 정도 떨쳐내고 자기 나름의 정치를 펼쳐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김기흥)이라는 분석이다.
이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여성적이다. 더구나 1915년에 일본인들이 탑을 수리하다가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뜻밖에 실패와 바늘통 같은 각종 바느질 용구가 출토됐다. 함께 출토된 금바늘 은바늘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 귀족들, 나아가 왕실이 갖고 있던 물건임을 짐작케 해 선덕여왕과의 관련성을 짚는 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이름부터 불교적이다. 아버지 진평왕은 석가모니 이름을 가졌고 어머니 이름‘마야’도 석가모니 어머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선덕이란 이름도 ‘불교경전인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모범으로 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김기흥)
여왕은 재위 15년 동안 무려 25개 사찰을 창건했다. 이는 통치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수단이라는 분석이 많다.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라 27대에 여자가 왕이 되니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이 침범하게 되었다. 만약 대궐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침해를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를, 제3층은 오월을, 제4층은 탐라를, 제5층은 응유를, 제6층은 말갈을, 제7층은 단국을, 제8층은 여적을, 제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삼국유사’ 권3 탑상 4 황룡사구층탑, ‘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실제로 선덕여왕 즉위 후 통치가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642년 가을,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성을 빼앗아갔고 그해 8월에는 백제 고구려 연합군이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고 했다. 또 같은 달 백제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조카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기도 했다. 놀란 여왕은 자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리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선덕여왕은 불교세력을 정치에 이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뜬’ 인물이 자장이다. 진골 귀족 출신 자장은 높은 관직을 사양한 채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닦았다. 그는 유학 중 직접 문수보살을 보았다면서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집안과 같이 부처님으로부터 미리 특별한 약속을 받은 종족으로 다른 귀족들과는 출신 성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직접 들었다고 전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자장은 여왕의 배려로 당에서 공부했고 다시 여왕의 뜻에 따라 귀국했다. 그는 당 유학 중에도 단지 불법을 닦는 데 그치지 않고 늘 신라의 안전을 걱정하며 여왕 통치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로 알려졌다. 자장은 귀국 후 여왕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여왕을 깔보지 못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여왕은 그를 황룡사 사주 겸 국통에 임명해 불교교단을 정비하고 전국의 승려를 조직화했다.
자장은 국민을 상대로 보살계를 주었는데, 이 보살계는 살생을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재미로 살생을 하면 문제가 되지만 나라나 부모를 위한 살생은 괜찮다는 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던 국민에게 살생은 죄가 안 된다고 함으로써 불교가 전쟁 수행을 중시하는 세속의 가치와 대립되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선덕여왕은 왕 자신이 불교세력에 의지함으로써 기존 정치세력과 무관한 새로운 세력을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비담의 난
선덕여왕은 ‘첫 번째 여왕’으로서 선구자적 어려움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자장조차 중국에 유학하면서 태화못이란 곳에서 만난 신령으로부터 ‘여자가 통치를 하면 나라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록(‘삼국유사’)이 있다. 사람도 아닌 유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귀신조차 여왕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남성들 사이에도 여성비하 의식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덕여왕은 결국 말년(647년)에 대규모 반란사태에 직면한다. 비담과 염종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삼국사기’ 권5. 선덕왕 16년)
이 난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왕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수많은 귀족이 가담해 여왕에게 엄청난 심적 고통을 안겼다. 난에 가담한 조정 신료가 30명에 달해 주요 직책을 맡은 신료 중 적지 않은 수가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담은 선덕여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비하해 부를 정도였다.
비담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귀족이었다.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때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상대등’이었다. 그는 당시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니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을 전하며 반란세력을 규합했다고 한다. 후계자(진덕여왕)까지 여왕으로 정해지자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된다. 김유신은 당시 특별한 존재였다. 부친 서현이 이미 왕실의 일원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해 왕실이 외가였으며 여왕의 조카이기도 한 김춘추와 그의 여동생(문희)이 결혼해 왕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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