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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세연정.
보길도 윤선도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 (보길면)
보길도 윤선도 원림(명승 제34호(2008.1.8 지정)
보길도는 완도군에서 서남쪽으로 12km.
사철 푸른 활엽 상록수림, 동백숲이 울창.
물이 맑아 자연경관 만으로도 아름다운 섬.
고산 윤선도(1587∼1671) 유적.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으로
그의 어부사시사가 세연정에서 탄생.
그가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그는 마음 속으로 결심.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후폭풍에 밀려, 안착한 섬.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 도착했으나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
그 소식을 듣고
몹시 실망을 하여
뱃머리를 해남으로
돌려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피안의 삶을 살고자
1637년 제주도로 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
그가 구사일생 기착한 곳이 보길도였다고 한다.
고산은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是非)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16년 넘게 유배생활.
- 윤위.,보길도지(甫吉島識) 기록에서 -
.............보길도지 기록..............
윤위(1725∼1756)는 고산 윤선도의 5대손.
고산은 조선이 청에 굴복하자 ‘백이(伯夷)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기자(箕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관녕(管寧)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이 오직 나의 뜻이라며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고 하였다.
풍랑으로 보길도에 기착한 고산은
격자봉에 올라 물외가경(物外佳境)이라
감탄하고 이곳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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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제주도로 가는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한 보길도.
위기에서 모면한.,고산.
그 섬에 터를 잡고나서
그가 명명했다는 보길도.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
그가 터를 잡은 곳에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 격자봉 아래.,거처 '낙서재'를 마련.
그후, 2 차례 유배생활, 관직에 올라 한양 생활.
그러면서, 해남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감하기까지 보길도 여기저기에 건축.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등을 짓고,
바위 등 자연 경승에 이름을 붙였다.
그가 명명한 정자, 대(臺)가., 25 개소.
그는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를 짓고
어부사시사를 비롯 자연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세연정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 이름.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처음 들어와 지은.,정자.
정자 중앙에 걸린 편액.,'세연정(洗然亭)',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고산이 제주행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처음 안착한 곳이.,'세연정'.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그에게는 구천길이
될뻔했던 제주행 뱃길.
그 위기에서 되살아난 곳.
'그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는 선계(仙界)를 본 것일까?'
씻을 洗
그러할 然
정자 亭
'자연으로
마음을 씻는
정자'., 뜻 이름.
............세연정(洗然亭) 사적..............
보길도는 세연정에서 바라보는 정원풍경.
동천석실 전망, 예송리해안 어부사시사 현장.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빼어난 섬이다.
보길도 부용동은 그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살던 유서 깊은 곳.
병자호란 삼전도 국치와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서
부용동 아름다운 절승에 의탁.
자기구제, 초속적 자유를 얻었다.
고산이 51세때(1637년) 처음 들어와
85세(1671년)에 운명할 때까지 13년간
부용동에 살면서 일곱 차례 드나들었다.
어부사시사 40수, 수십편 한시 창작.
격자봉 밑에 낙서재와 무민당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된
고산 휴식처이며, 곡수당 옆에 서재.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지역.
동천석실은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
천여평 공간에는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칸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을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세연정 지역은 부용동 입구 3천평 계원.
세연정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 (205여 평).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고산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고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던 조산.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 판석보 -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에 물을 채우는 저수를 위해 조성.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든 보이다.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 물이 새지 않게
한후, 그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 혹약암 -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 하나.
이 바위는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
* 서대 - 현재 나선형으로 세단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 한변이 7.5m 정방형, 높이 2.2m.
동대와 대칭을 이루며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추며 돌면 정성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조성.
* 회수담 - 세연정 동쪽 축단 밑 계담에서
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가 있다.
계담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는 다섯구멍,
인공 연못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구명이다.
이를 '오입삼출'이라 하는데,
물막이 석축에 5곳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조절.
* 비홍교 - '보길도지' 기록에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
'정자 서쪽, 제방 동쪽에
한간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의 암석.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이 연결되어 있어
옛 비홍교 흔적을 찾기 어렵다.
* 사투암 - 세연정 주변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중 하나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 쪽이 들려진 모습.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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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1587 :선조 20∼1671 : 현종 12).
'가사문학 대가' 정철(1536-93)과 더불어
'시가(詩歌) 문학의 쌍벽'인.,'고산(孤山)'
'외따로 있는 산' 고산(孤山)
그의 자긍심을 알게 해주는 호.
본관(本貫).,'해남윤씨(海南尹氏)'
본관이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
가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낸다.
즉, 관적(貫籍), 본적(本籍), 성관(姓貫),
본(本), 관향(貫鄕), 적관(籍貫) 등을 의미.
권신 이이첨(1560-1623)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과 경상도 기장에서 유배생활.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던.,이이첨.
세자 광해군 사부를 역임한 바 있다.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할 때 광해군의 적합함을 주장.
선조의 노여움을 샀기에 원배령(遠配令).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오른 인물인데 선조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제기되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와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
원배령을 받았던 이이첨이 유배를 떠나지 않고
이틀간 머뭇거리다 풀려난 것도 이런 소문을 뒷받침.
선조는 어의 '허준'의 지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승하.
이이첨은 정운공신(定運功臣)에 녹훈되었고,
광해군의 형님 임해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뒤 사사(賜死).
광해군 조카 진릉군(晋陵君)도 역모를 씌워 제거.
이이첨은 1623. 3. 13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천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힌 이튿날 참형되고 세 아들도 죽는다.
.
윤선도는 1628년 42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 장원.
해남 유적지에 보관된 장원 답안지.
잘못 쓴 글자를 정정하기 위해
그위에 다시 쓰고 인장을 찍은 것.
빠진 글자를 옆에 작은 글자로 삽입.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
윤선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두 대군이 있는 강화도는 이미 함락.
남한산성으로 뱃길을 향했으나
인조의 삼전도 항복 소식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제주도로 향하다가
중도에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
하지만, 그는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고 하여
1638년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해남으로 귀향.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 문제와 자의대비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세력을
꺾으려다가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
윤선도는 치열한 당쟁(黨爭)으로
반평생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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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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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세자시강원 벼슬을 하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사부로 인조 신임을 받았던 윤선도.
1635년 정적들 질시가 심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
해남 녹우당으로 내려가 은거하는데 이듬해인
1636년 12월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고산은 두 대군을 구하려고 배를 몰고 강화도로 간 것.
해남(海南)에서
향리 자제, 노복 등.
300여명 의병을 이끌고
수군 함선들을 통솔해 간 것.
그 자신이 가르쳤던
두 대군 구출이 목적.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 이미 강화도가 함락.
뱃머리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했는데 도착 직전에
인조 항복소식을 듣고 낙심해 제주도로 뱃머리를 돌린 것.
청나라와 화의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고자 했던 윤선도.
그는 '하늘이 부끄럽다.'고 여겨
세상을 등지려고 뱃머리를 돌린 것.
.
그러나, 중도에 풍랑을 만나
천운으로 보길도에 안착한 것.
그당시 보길도는
제주도 행 뱃길에서
후폭풍 파도에 떠밀려
그가 우연히 안착한 섬.
그러나, 보길도에 머물며 섬의 경치에 매료되어
제주 행을 포기하고 보길도에 정착하기로 한 것.
(완도국제항으로부터 12km 거리에 있는.,보길도)
섬 정상 격자봉(433m) 아래 주거지 낙서재(樂書齋),
낙서재 맞은편 산중턱에는.,동천석실(洞天石室),
그리고, 세연정(洗然亭)이란 정자를 조성한다.
윤선도는 이후 여러 차례
벼슬과 좌천이 거듭하다가
보길도 낙서재에서 1671년
향년 85세를 일기로 운명한다.
.................
.................
윤선도는 광해군 때 교화 천도를 주장했던
'이의신'과 친분으로 일찌기 풍수를 접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능역을 수원으로 정했는데
서인 반대로 무산되고 능역이 '구리'로 바뀌자
"10년 안에 변고가 발생해 묘를 다시 쓸 것이오.
나는 이를 못 보지만 제공들은 이를 볼 것이오.
그때 가면 내 말이 생각나리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처럼 효종 릉은 붕괴사고로 여주로 이장.
당시 윤선도가 짚었던 묘 터는
고산 윤선도의 풍수 식견을 신봉했던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 융릉이 들어선다.
훗날, 정조는 "참의 윤선도는 호가 고산(孤山)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이라 부른다. 풍수지리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산 중턱에는 윤선도 자신과 그의 애첩
설씨부인 만 출입한 동천석실(洞天石室).
동천석실에 오르면 낙서재와 부용동 분지가
한눈에 보이는데,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절경.
고산은 이곳에 밧줄과 도르레를 설치.
술과 음식을 밑에서부터 받았다고 전한다.
동천석실에서는 자신 만의 생활을 즐겼던듯.
격자봉 곳곳에서 발원한 물(부황천)은
넓은 분지에서 합수된 후 북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만나는데 의도치 않게 보길도에 상륙한
윤선도는 바다에서부터 좁은 부황천을 따라오다가
불현듯 넓게 펼쳐진 명당을 보고는.,무릉도원을 연상.
..................소안군도(所安群島)....................
전남 완도군 노화읍·보길면·소안면에 속한.,군도.
해남반도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20㎞ 지점에 위치.
소안도(所安島), 노화도(蘆花島)· 보길도(甫吉島)·
횡간도(橫看島)·자개도(自開島) 등과 50여 부속섬.
노화읍.,노화도·넙도·
서넙도·어룡도·노록도,
보길면.,보길도·예작도,
소안면.,소안도·횡간도·자개도
등 약 50개의 섬들을 포함한다
.........................................
보길도 앞 섬은., 노화도.
보길도 옆 섬은.,소안도이다.
보길도 글씐바위 건너편.,소안도
소안도 앞바다
밤이면 물고기가
몰려드는., 황금어장.
'후폭풍 대피처'
보길도.,부용동.
노화도는 간척지 곡창이 많은 부유한 섬.
소안도는 단 한번도 전란을 겪지 않은 섬.
보길도 부용동은 선계(仙界) 같은 은둔처.
'무릉도원
신선 세계를
추구할 만한 곳.'
'보길도
부용천을 따라
펼쳐진 아늑한.,분지.
윤선도는 이곳 산세가 마치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 하여 부용동이라고 명명.
마치, 연꽃 한송이가 피어 오른듯한.,부용리.
'보길도'의 중앙에 위치한.,
'격자산' 자락의 분지.,부용리.
보길도 부용동 정원을
낙서재, 동천석실, 세연정
3구역 용도를 분리한.,윤선도.
낙서재는 학문에 매진하던 곳이고,
동천석실은 자신 만의 사생활 영역.
세연정은 시인묵객들과 교류의 공간.
공(公)과 사(事)를 구분한.,고산.
철저한 자기관리를 엿볼 수 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이곳에
자신 만의 선계를 구현했던 것.
구름 위에 있는 동천석실은 天이고,
낙서재는 유학자로 중심을 지키는 人.
세연정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地이다.
'아! 뉘라서
이곳에 눌러 앉아
머물고 싶지 않겠는가?'
그가 직접 자리 잡고 죽을 때까지 머문.,낙서재.
그의 풍수 안목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격자봉에서 이어진 주봉은 기품이 있고, 그곳에서
이어진 용맥은 미끄러지듯 이어지다가 눈썹 같은
현무정을 만들고 그 아래에 낙서재가 자리하였다.
이곳까지 이르는
용세는 음택의 용세와
다른 중후함이 그득하다.
마치, 터를 알아본 주인
고산 인품이 그러했을듯.
윤선도는 이곳에 터를 정할 때
멀리 산봉우리에 올라 깃발을 든
인부들을 지휘하며 심혈을 기울였다.
낙서재는 윤선도의 풍수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명당 중에서 명당.
고산이 풍수지리학
대가 임을 대변한다.
완도군은.,금일도와 소안도, 보길도 등을
하루에 돌아보는 '완도 명품 섬 투어' 상품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 2017. 6.8. 전남 완도군 -
완도국제항으로부터
약 12km 거리.,보길도.
주위에 노화도·소안도를 비롯한 큰섬.
예작도· 장사도 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근래, 해남과 연육교로 이어진.,노화도
그뒤에 가려져 숨겨져있는 듯한 보길도.
해남 앞바다 무수한 섬들이 애워싼 보길도.
....소안군도(所安群島)....
완도군에 속한 군도(群島)
전라남도 완도군.,노화읍·
전라남도 완도군.,보길면·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해남반도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20㎞ 지점에 위치한 군도.
소안도(所安島)를 비롯하여 노화도(蘆花島)·보길도(甫吉島)·
횡간도(橫看島)·자개도(自開島) 등과 50여 개 작은 부속 도서.
행정 구역상으로는 소안도 및 부속 도서는
완도군 소안면에, 소안도 서쪽에 있는 노화도 및
부속 도서는 노화읍에, 보길도 및 부속 도서는 보길면.
노령산맥 말단부가 침수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높이 500m 이하의 구릉성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선 부근에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발달한다.
특히 노화도에는 평지의 발달이 양호하다.
해안선 출입이 심한 익곡성의 리아스식 해안
연안에 넓은 간석지 분포, 외해에 면한 곳에는
깎아세운 암석해안이 절경을 이루는 곳도 많다.
남해의 난류 영향으로
난대활엽수가 무성하며,
특히 동백나무가 자생한다.
.....................................
사실 상. 보길도는 해남 앞바다.
주변 섬들을 거느린.,제왕적 위치.
보길도 북쪽으로 전라남도 남단.
장흥군· 강진군· 해남군과 접하고
동쪽으로 고흥군, 서쪽으로 진도군.
일찌기 고산 윤선도가 배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살며., 그곳 동명을 부용동이라 명명.
고려 때부터 해남윤씨 해도인(海島人) 선구자 가문.
시조 '윤존부'는 고려 문종( 재위 1046 ~1083)때 인물.
윤선도(1587 : 선조 20∼1671 :현종 12). 조선 중기 문신.
조선시대 해남과 제주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보길도.
고대 '한.중.일' 해상무역 요충지.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
노화도에서 남서쪽 1.1㎞ 지점.
동경 126°37′, 북위 34°06′에 위치.
보길도(甫吉島)
면적은 32.99㎢,
해안선 길이 41㎞.
섬 모양이 쟁기에 끼우는
'보습'을 닮아 '보고래 섬'
그곳에 산이 둘러싸여 있어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주변 섬들의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있어 반쯤 핀 연꽃 같아 부용동(芙蓉洞).
고산 윤선도가 해남에서 제주도로 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 풍랑을 피해 파도 따라 떠밀려 와
처음 발견한 후에 '어부사시사'로 생을 마감한 곳,
어부사시가 - 윤선도.
앞 포구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 온다.
강마을 온갖 꽃들이
먼빛으로 바라보니
더욱 좋구나.
날이 따뜻해졌도다.
물 위로 고기 뛰논다.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낚시대는 손에 쥐어져 있다.
막걸리 병은 실었느냐?
동풍이 문득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타난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드나무 숲인가.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하는구나.
맑고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고운 햇빛이 내리 쬐니,
물결이 기름처럼 반짝인다.
그물을 넣어 볼 것인가?
낚시를 드리워 볼 것인가?
탁영가의 흥취가 일어나니
고기 잡을 생각도 잊겠도다.
석양 빛이 비치니
그만하고 가자꾸나.
언덕 위의 버들과
물가의 꽃들은
굽이굽이
새롭구나.
삼공(벼슬)을 부러워 할소냐?
세상 만사 생각해 무엇하리.
고운 풀을 밟아 보며.
난초와 지초도 뜯어 보자.
한 조각 거룻배에다
실은 것이 무엇인고
갈 때는 나 뿐이었는데,
올 때는 달이 함께 한다.
술에 취해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간다.
떨어진 꽃잎이 떠내려 오니
무룽도원이 가까이 있는 듯,
인간 세상의 더러움이
얼마나 내 눈을 가렸던고
낚시줄을 걷어놓고
봉창을 통해 달을 보자.
벌써 밤이 깊었는가,
소쩍새 소리 맑게 들리는구나.
남은 흥취가 끝이 없으니
(돌아) 갈 길도 잊었구나.
내일이란 날이 또 없으랴.
봄밤이 바로 샐 것이다.
낚싯대로 지팡이를 삼고
우리 집 사립문을 찾아가자.
어부의 한평생은 이럭저럭 지내노라.'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어부사시가 - 노래.
'고산 윤선도' 귀양살이
말년의 흔적을 알 수 있다.
그는 보길도 섬 주변에
자연경관을 기반으로 하여
'윤선도 원림'부용동정원 조성.
우리나라 전통정원들 중에서도
보길도 부용동정원 내 세연정은
조선시대 3대 민간 별서정원이다.
담양(潭陽) 소쇄원(瀟灑園)
영양(英陽) 서석지(瑞石池)
해남(海南) 세연정(洗然亭)
세연정은 부용동정원 내 위치
보길도., 고산 '윤선도원림' 일부.
세연정은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지은 정자로.,"날 좋은 날이면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와 벗들과 함께 술을 한 잔 걸치고는
주연이 무르익을때 어부사시사를 불렀다."고 전한다.
'얼마나 많은 벗을 세연정에 초대했기에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했던걸까?'
그가 베푼 주연 스케일이 무척 궁금해진다.
보길도 윤선도원림(尹善道 園林 : 명승 제34호)은
고산이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 저기에 세연정,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는다.
,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정자와
대가 모두 25개소에 이르며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
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
또 서쪽에 칠암헌이란 편액을 따로 걸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세연정 일대.
보길도.,세연정 일대
보길도 격자봉 정상
고산 윤선도는 이곳에 올라
보길도 주변 해역을 바라보며
조선시대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조 재위때 인조반정 구 공신들을 쫓아내고
신권정치로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
그에 맞서 '남인의 거두'로서 왕권정치를 주장했던 고산.
그러나, '평생의 정적'인 송시열에게 번번히 패배.
그 결과로 고산은 여러 차례 '총 17년 간' 귀양살이.
조선 해양강국을 이루려던 꿈을 접고.,보길도에 은둔.
시대를 잘못 만났던
'해양정책의 선구자' 고산
그의 또 다른 호.,'해옹(海翁)'
격자봉 중턱에.,'동천석실 & 정자'., 2곳
.............동천석실(同天石室)..............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 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고산이 시(詩)를 지었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했는데 지금도 석실 앞에
도르래를 건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
2008.03.06 보길대교 개통
보길도는 완도에서 가기도 하지만
해남반도 땅끝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보길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땅끝~보길도' 뱃길 한 시간.
지금은.,노화도 산양항까지 약 30분이면 된다.
산양에서 다시 육로로 10분 정도 달려 새로 만든
다리를 넘어가면 보길도 윤선도 원림에 다다른다.
보길도는 완도군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섬이다.
격자봉 중심으로 말굽 모양 산줄기가 굽어 흐르는
아늑한 곳에 고산이 만든., 부용동정원이 펼쳐진다.
'이름 하여.,윤선도 원림(尹善道 園林)'
고산 윤선도는 어찌하여 이렇게 외딴 섬에
天上의 선계(仙界) 같은 별천지를 조성한걸까?
'해남 보길도.,'자연을 씻는다'.,'세연정'.
마치, '경회루 연회' 방지를 연상케 한다.
흥청망청 끝에 권좌에서 쫓겨났던 연산군.
"누가 방지 안에 저 연꽃을
옷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따서 짐에게 가져올 수 있는가?"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
이곳을 부용동이라 칭한.,고산.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고 있는듯 하여서
부용(芙蓉)이라 이름 지었다”
《고산유고(孤山遺稿)》
시문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고산 윤선도.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으로
옛날 꿈꾸던 부용의 절경을 얻었네
세인들은 신선이 사는 섬 알지 못하고
단지, 기화요초(琪花瑤草) 만., 찾는구나.'
芙蓉城是芙蓉洞
今我得之古所夢
世人不識蓬萊島
但見琪花與瑤草
고산이 부용동이라 부른 보길도는
중국의 부용성 선유고사(仙遊故事)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신선이 노니는 선계(仙界)
'세연정 연못에 놓인 거대한 돌 하나 하나.'
'남해(南海) 다도해에 펼쳐있는 섬들을 상징.'
'고산은 어떻게 무거운 돌들을 옮겨 놓았을까?'
돌 하나마다 목욕재개 선남선녀들이
색동옷을 입고 춤 추다가 고산 선생이
어부사시가를 부르며 배를 타고 지나면
옷을 벗고 반기며 그 노래를 함께 불렀다.
고산 선생은 노를 저으며
마치, 선계를 다니듯 배를 타고
말년에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온다.
그의 고매한 인품으로 보아
80대 고령인 말년에 쓸쓸함을
선계의 풍류로 달랜듯 여겨진다.
전북 임실 옥정호.,선계(仙界)의 풍경.
본래, 섬이란 소금기 묻은 해풍과 운무가 서리는 곳이다.
하지만, 부용동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에 위치.
부용동은 계곡 임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심산유곡.
청정한 땅 기운과 시원한 들이 있고
파도소리 조차 들려오지 않는 곳이다.
부용동은., 동백나무 고목 숲이 무성하고,
부용동을 애워싼 산에는 활엽천연림이 울창.
고산은 그곳 자연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음유시인이다.
오우가(五友歌) 만흥(漫興) 조무요(朝霧謠)
하우요(夏雨謠) 등 수많은 시와 노래를 남겼다.
그중 부용동에서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보길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부용동 원림을 소재로 한.,희황교(羲皇橋),
석실모연(石室暮煙), 소은병(小銀屛), 귀암(龜岩)
낙서재(樂書齋), 낭음계(朗吟溪), 미산(薇山) 등은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 원림'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정랑을 비롯 호조, 예조 등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50세 되던 해에
병자호란(1636)을 겪는다.
인조는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피신,
이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향리 자제.
집안 노복 수백 명을 모아 배를 타고
서해를 올라가 강화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는 청군에게 함락.
귀향 뱃길에서 인조 항복 비보를 듣는다.
울분에 찬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을 결심.
고산은 보길도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격자봉 아래 낙서재를 짓고 본제로 삼았다.
67세 때 무민당(無悶堂) 정성당(靜成堂) 건축.
정자를 증축했으며, 세연정을 조성해 원림 생활.
고산은 1671년 85세 죽을때까지
일곱 차례나 부용동을 드나들었다.
고산이 주로 생활한 공간은 낙서재.
조선후기 선비사회에서는
'주자' 은일 철학을 흠모하고
세상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간에
은둔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던 풍조.
두륜산 대흥사
.......................두륜산 대흥사.................
두륜산(703m)은 소백산맥 남단에 솟아 있으며,
북북동 ~ 남남서 방향으로 대둔산(672m)까지 뻗어
산맥을 이루는데, 두륜산 동쪽은 급경사, 서쪽은 완만.
본래, 대둔사 절 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6·25전쟁 때 재난 당하지 않았던 곳으로도 유명.
구름다리· 백운대· 금강굴·여의주봉 등 명승지가 있다.
남서해안 전망 산악공원으로 남국정취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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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에서 10월 민속축제 강강수월래가 열리며,
주변에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월출산국립공원,
고산 윤선도 녹우단유적지, 관광자원 유적 등 풍부.
'광주 ~ 해남. 대흥사' 직행버스가 다니며,
해남에서 두륜산까지 완행버스가 운행된다.
초의선사(1786~1866) 유적지.,일지암 가는 길,
두륜산계곡 초입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 여관.,유선관.
.
2014.04.17 일지암
대흥사 일지암.,초의선사(1786~1866)유적.
제주 대정현 추사유배지
'초의선사 vs 추사 김정희'
'두 벗의 우정' & '차 이야기''
어느 해 입춘, 제주에서 유배 중인 추사 김정희가
집에서 제일 예쁜 대접을 골라 깨끗이 씻어 장독대에
올려 두고 날마다 아침이면 대접을 살피러 나갔다 한다.
그러다가, 밤새 비가 내린 다음날
그 대접에 빗물이 고여 찰랑거렸다.
추사는 그 대접을 조심스럽게 들고
방으로 들어와 벼루에 빗물을 붓고
먹을 갈아 '벗에게 편지를 썼다' 한다.
추사가 첫 봄비로 쓴 편지를 받은 초의선사(草衣禪師).
제주는 우리나라에서 봄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니,
추사가 벗에게 선물한 것은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온 ‘봄’
초의선사 해마다 첫 수확 찻잎으로 만든 차(茶)를 선물.
이는 평생지기를 향한 깊은 우정이 아니면 갖기 힘든 정성.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주 차를 보내 달라’는 내용.
추사는 그 답례로
글씨를 써서 보냈다.
추사처럼 자존심 꼿꼿한 이가
뭍에 사는, 그것도 가족도 아닌
벗에게 폐를 끼쳐 가면서 번번이
아쉬운 부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다성(茶聖)'
,,초의선사(草衣禪師).
'조선의 다경(茶經)' 동다송(東茶頌)》을 써서
조선 차의 우수성을 알렸고, 다도의 정신과 선(禪)이
하나라는 다선일미설(茶禪一味說)을 강조한 초의선사.
찻잎을 따서 덖고 우리고 마시는 법을
상세히 기록한 《다신전(茶神傳)》을
남겨 조선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
초의선사가 다도의 길에 들어서고
다선삼매(茶禪三昧) 경지에 이른데는
다산 정약용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온다.
차의 언덕을 의미하는 ‘다산(茶山)’
정약용은 무척이나 차를 좋아했다.
그가 차에 깊이 빠진 계기는 1801년 시작된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다산은 차로 유배지의 화병과 속병을 다스렸다.
1809년 다산초당으로 24살 젊은 승려가
학문의 배움을 얻고자 찾아오는데 다산은
그에게 유학 뿐 아니라 제다법도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된 초의선사와 다산의 인연.
다산의 큰아들 유산 정학연으로, 유산과의
인연은 추사 김정희로, 추사와의 인연은 당대
지식인. 사대부들과 이어지는데 그 매개체가 ‘차’
초의선사는 대흥사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었는데 누구라도
초의가 만든 차, 즉 ‘초의차’를 마시면 매료.
그 시절에 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차였다.
그래서 중국차가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조선 차의 우수성을 설명.
추사가 제주 유배 중에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졸랐던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
범해선사가 초의선사 차 만드는 과정을 시로 남겼다.
.
.
〈초의차〉- 범해선사.
.
곡우에 이제 막 날이 개어도
노란 싹 잎은 아직 펴지 않았네
빈 솥에 세심히 잘 볶아내
밀실에서 아주 잘 말리었구나
잣나무 그릇에 방원(方圓)으로 찍어 내어
대껍질로 꾸려 싼 다음 저장한다네
잘 간수해 바깥 기운을 단단히 막아
한 사발에 향기 가득 떠도는구나 .
달마산
........................달마산.........................
해남군에서도 남단에 치우쳐 긴 암릉으로 솟은 산.
두륜산과 대둔산을 거쳐 완도로 연결되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닭골재에 이른 산백은 둔덕 같은 산릉을 넘어서며
암릉으로 모습을 바뀌는데 암릉은 달마산 정상 봉화대를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사그러트리지 않으며
이어진 다음 땅끝에 솟은 사자봉(155m)에서야 갈무리 하는 산이다.
달마산을 병풍 삼은 미황사는 경덕왕 8년(749)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
(갈두상)에 닿자 의조 스님이 100명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한번 크게 울면서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 소가 멈춘 곳에
미황사를 일구었다고 한다. 어여쁜 소가 점지해준
절인 동시에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말 달마산.
....................................................................
두륜산 대흥사 말사.,미황사
땅끝항.
두륜산 녹우당
해남 윤씨고택.,녹우당.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전경.
바람소리 은은한.,녹우당.
녹우당.,녹차밭 & 원림.
해남윤씨고택.,녹우당
해남 금쇄동.,고산 윤선도.,묘소.
고산은 자신이 묻힐 묘자리를 금쇄동에 정하는데
이와 관련된 전하는 이야기가 재미를 더하고 있다.
고산이 금쇄동을 발견하고 쓴 ‘초득금쇄동’에서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춰온 이곳 그 누가 알랴
선경인 줄을 깎아 지르나니 신설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뛰는 토끼 나는 가마귀 산봉우리 넘나들고
올라와 보니 전날밤의 꿈과 같음을 알겠구나.
옥황상제께서는 무슨 공으로 내게 석궤를 주시는고’
‘금쇄동 계곡입구에 도달하면
점로는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산세가 험하고 급해서 그 아래로
왕래하면 단지 단애와 취벽만 보이고
높이 솟은 뾰족뾰족한 산봉우리 같고,
저녁놀이 서린 첩첩한 산봉우리 같아서
골짜기가 거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
고산은 완도 보길도에서 부용동원림을 조영하고
해남 현산면 구시리에 금쇄동원림, 수정동원림 등을
경영한 것은 이러한 조형자연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해남 '금쇄동 원림' 가는 길
해남윤씨도선산.,한천동.
2015.08.14 해남윤씨 청소년 여름캠프
추원당 가는 길.
추원당 가는 길
추원당
2009.10.01
2009.10.01
해남윤씨 족보목판
해남윤씨 청소년 여름캠프
2012.03.30
2011.11.20
2016.11.15
어초은 사당.
.......고산 윤선도 유적지.,녹우당.............................
조선조 문신이자, 국문학 비조.,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의 유적지로 사랑채 녹우당은 600년 전통을 이어온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가이며 우리나라 최고 명당 중 하나.
덕음산을 배경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는
은행나무와 비자림, 사랑채 녹우당, 안채, 행랑채,헛간,
안사당,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추원당, 고산유물전시관 등.
조선시대 양반가 중
가장 많은 유물 (5천점)을
보관해온 집안으로 알려진 곳
.........................................
비자나무숲
................해남군...................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해남군
동쪽은 강진군, 서쪽은 신안군과 진도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영암군과 접해 있다.
면적은 987.64㎢이고
인구 76,997명(2014년 11월 기준).
1읍 13면 177개 법정리, 군청 해남읍 성내리.
한반도 남서단 해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남· 화원반도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 월출산 줄기가 두억봉, 흑석산 이루고
강진군과의 경계에 서기산과 석문산, 남쪽에
두륜산, 대둔산, 도솔봉, 달마산 등이 있다.
대부분 낮은 평야지대이며 해안 일대에 간석지가 많다.
금강산 발원 금강천이 해남읍을 가로질러 마산만에 이르고
두륜산 발원 삼산천이 삼산평야 지나 화산면 해창만에 이른다.
북쪽에 옥천천과 계곡천이, 남쪽에 고현천과 구산천 등이 흐른다.
고대 -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뒤로는
새금현과 고서이현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16) 새금현은 침명현,
고서이현은 고안현으로 개칭되어
모두 양무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 고려초에 침명현은 해남현으로,
고안현은 죽산현으로 개칭되어 영암군의
임내가 되었으며 뒤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 - 1409년(태종9) 왜구때문에
육지부로 옮겨온 진도현과 병합하여
해진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437년(세종19)
에는 진도와 분리되어 현감을 두었다.
1448년 황원현과 옥산현.죽산현 등
영암의 임내 지역을 합쳐 당악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다시 해남으로 칭하였다.
근대 - 1896년 나주부 해남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되어
부근의 도서를 나누어 완도군으로 이속.
1914년 완도군, 강진군, 영암군의 일부
지역을 조절하여 13면으로 편성되었다.
현대 - 1955년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북평면이 북평면과 북일면으로 나누어졌고,
마산면 맹진리 일부가 계곡면 덕정리에 편입되었다.
문화제
매년 음력 8월 2일 일지암과 대둔사에서
초의선사를 기리는 초의문화제가 열린다.
다문화 중흥조이며, 시.서.화 달인.초의선사.
민속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농악을 들 수 있는데
줄다리기는 보통 정월초에 당산굿을 마친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거행한다.
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쇠가락이 구성지며 흥겹다.
이밖에 윷놀이, 그네뛰기, 달맞이, 씨름 등.
동제
마을 단위로 산신제, 당제, 도제, 거리제, 중구제, 짐대제 등
정월 초하루, 대보름이나 초사흘, 2월 초하루인 경우도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全圖)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
육당 최남선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로 잡아.,우리나라 3천리 금수강산.
땅끝은 북위 34°17′21″, 동경 126°31′22″에 해당하며,
소백산맥에서 갈라진 지맥 한가닥이 노령산맥이 되어
무안반도(務安半島)와 압해도(押海島)로 뻗어 내리고
또 다른 한가닥은 무등산. 월출산. 두륜산으로 이어지며
해남반도를 형성, 이 반도 끝이 "땅끝" "토말" "갈두마을"
땅끝 일대는 기저변성암인 편마암(片麻岩)이 분포
심한 남동계절풍에 따른 파도에 의해서 높이 15m 가량.
해식애를 이루게 되었고, 암반이 판상절리(板狀節理)를
이루므로 불균등 침식을 받아 경승지를 이루고 있다.
해식애 안쪽에 갈두마을이 있고,
이곳에서 100m 가량의 사빈(砂濱)을
횡단하면., 뒷산 사자봉(獅子峰, 122m).
이 산의 급한 언덕의 계단길을 오르면 토말비가 있다.
1m 높이 비 앞면에는 예서체로 ‘土末(토말)’이라는 비명.
1987년 세운 큰탑 앞면이 토말탑으로 되어 있고,
뒷면에 김봉호(金鳳皓)의 토말찬문이 새겨져 있다.
산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보길도(甫吉島)와
갈치젓, 미역 명산지로 유명한 추자도(楸子島).
날씨 좋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의 한라산이 보인다.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은 ‘땅끝마을’이라 하는데,
‘땅끝’이라는 지리적 이미지를 내세워 관광지로 만들어졌다.
땅끝마을의 관광지화 사업은 ‘땅끝마을’ 상징어가 마을 브랜드.
1990년대 후 ‘한국전통과 문화’ 찾기.
‘국토순례’를 통해 더 많이 알려졌다.
매년 국토순례를 위해 8천명이 찾는다.
또한, 1986년부터 갈두항과 보길도, 노화도,
넙도 와의 뱃길이 개통되어 연계관광이 가능.
그로 인하여 땅끝 관광지화로 인해 땅값 상승.
혈연지연 중심의 마을 공동체가 각종 관광개발과
이해관계로 내부적으로 분화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해남 땅끝마을...................
한라산이 보이는 최남단.,갈두마을(땅끝마을)
한반도 땅끝 갈두마을은 사자봉 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절경이 일품인데, 맑은 날이면
한라산도 보인다는 전망대. 한참 내려간 곳에 기념비
'갈두' 지명은 은근산에 칡이 많아.,'칡머리'
'칡머리를 한자로 표기해 갈두(葛頭)로 명명.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땅끝(송호리)마을.
대한민국 한반도의 최남단이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땅끝시외버스정류장'을 통해 땅끝마을 방문도 가능.
그리고,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땅끝항
. ............................
페리~노화도~보길도
공룡알해안
보길도., 세연정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는
전라남도 담양군.,소쇄원(瀟灑園 : 1500년대),
완도군 보길도 부용동원림(芙蓉洞苑林, 1600년대),
화순군에 있는 임대정원림(臨對亭苑林, 1862), 그리고
서울 삼청동에 있었던 옥호정원림(玉壺亭苑林, 1815) 등.
..............................
..............................
소쇄원 -양산보(梁山甫)가 자연과 벗하며
은둔하기 위해 무등산 북쪽 기슭에 꾸민 후원.
작은 계류 중심으로 비탈면에 몇개 단으로 만들고,
애양단(愛陽壇)·대봉대(待鳳臺)·매대(梅臺)·도오(桃塢)
등의 구역을 두어 각기 적절한 조경을 하였으며 이곳에는
건축물로는., 제월당· 광풍각· 초정 등이 있으며, 방지(方池)·
물레방아·석가산 등의 시설물도 배치하였고 골짜기 개울물은
담장 아래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와 암반 위를 갈지자[之字]
모양으로 굽이치다가 폭포가 되어 떨어져 광풍각 앞을 지나 흐른다.
조경식물로는 소나무·측백나무·대나무·단풍나무·
벽오동나무·매화나무·살구나무·배롱나무·국화 등
이 곳은 신선사상과 유교사상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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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동정원 -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병자호란 후에 은거하기 위하여 꾸몄다.
원시림을 개척하여 자연 속에 정자를 짓고 못을 만들었으며
화계를 축조하고, 석가산과 인공폭포 비래폭(飛來瀑)을 만들고
휴식처 돌정자(石亭)를 세웠다. 특히, 세연정(洗然亭) 지역에서는
네모 못 안에 네모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은 것이 각별히 주목된다.
1637년 건축한 정자.,세연정.
세연정
곡수당
서재
동천석실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원.
1636년(인조 14) 윤선도(尹善道)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거처할 집을 짓고 그에 딸린 정자와 연못 등을 만들었다.
1636년은 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때로,
항복을 반대하던 윤선도는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여
해남 연동(蓮洞)의 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길도 섬에
별서(別墅 : 한적하게 따로 지은 별장)를 짓고 정원을 꾸미었다.
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처하는 살림집이 있는 낙서재(樂書齋) 주변과,
휴식 독서를 위해 건너편 산허리의 바위 위에 집을
마련한 동천석실(洞天石室), 동리 입구 세연정(洗然亭).
낙서재는 서실(書室)을 갖춘 살림집으로 북향
그 옆으로 낭음계(朗吟溪)라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낭음계 양편에 곡수당(曲水堂)과 무민당(無憫堂) 두 건물.
이 두 건물의 곁에는 넓고 네모진 연못이 있다.
동천석실은 천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사는 곳.,뜻말.
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유래.
세연정 부근은 이 정원에서 가장 공들여 꾸민 곳으로,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동구(洞口)에 인공으로 물길을 조성.
연못들을 만들고 정자와 대(臺)를 지어 경관을 즐긴 곳이다.
연못은 곡지(曲池)와 방지(方池)로 구성되는데
동구를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
큰 바위들을 점점이 노출시켰으며, 방지에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방지 동쪽 물가에 네모진 돌단 두개를 나란히 꾸몄는데,
이곳은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이다.
세연정은 방지 남쪽 나지막한 동산 위에 세워졌던듯 보인다.
부용동정원은 윤선도가 죽자 곧 황폐해졌고,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초석이 흩어져 있을 뿐 과거의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주변에 인가가 산재해 있을 뿐.
그러나 이 지역은 인적이 드물어
정원의 유적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연못이나 건물자리들이 뚜렷하다.
이 정원은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유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데다가
조선시대의 정원으로서는 드물게
큰 규모 별서정원이라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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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격자봉
보길도 격자봉에서 바라본.,남해바다
조선시대 보길도 윤선도 유적.,부용동정원.
거처할 집을 짓고 딸린 정자와 연못 등을 만든 정원.
1636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윤선도는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며 꾸민 정원.
해남 연동(蓮洞) 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별서 정원.
그가 그곳 거처이자 서재로 사용했던 낙서재(樂書齋)
휴식과 사색을 위해 격자봉 허리에 조성한 동천석실(洞天石室)
그가 동구(洞口)에 물길을 파 연못, 정자, 대를 꾸민.,세연정(洗然亭)
크게 세 구역으로 조성한.,부용동정원.
낙서재는 서실(書室)을 갖춘 북향 살림집
그 옆으로 낭음계(朗吟溪)라는 작은 개울물.
낭음계 양편에 곡수당(曲水堂), 무민당(無憫堂).
밝을 낭, 읊을 음, 시내 계.,낭음계(朗吟溪)
낭음계 물소리가 음악과 같아.,곡수당(曲水堂),
그 물소리에 근심이 없어진다는.,무민당(無憫堂).
사람이 죽었을 때나 제사 때 읊조리는.,곡(曲)
그가 여생을 마칠 곳으로 여겨 지은 집.,곡수당.
고산은 향년 84세를 일기로 곡수당에서 생을 마감.
'그는 왜 곡수당에서 생을 마감한걸까?'
.
곡수당과 무민당 두 건물 곁에는 넓고 네모진 연못.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세연정과 세연지가 한눈에 보인다.
보길도에 그가 명명한 연꽃에 비유한 지명들.
해남윤씨 종중과 관련 깊은 지명들로 여겨진다.
고산 윤선도 본가 녹우당이 있는.,해남 연동(蓮洞).
'한송이 연꽃이 피어나는 형태'.,2만 8천평 정원.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이라고 이름 지은.,윤선도.
부용동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곳., 동천석실(洞天石室 )
격식 格, 아들 子, 봉우리 峰.,격자봉(格子峰)
'부용동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석실'.,동천석실.
격자봉(적자봉) 허리 바위 위에 위치한.,동천석실.
'격자봉의 다른 이름 적자봉은 어떤 뜻일까?'
붉을 赤, 자주빛 紫, 봉우리峰.,적자봉( 赤紫峰)
'노을 빛에 붉게 물드는 바위봉우리' 뜻말.,적자봉.
동서 12km 남북 8km의 아담한 섬.,보길도.
아열대 상록수림이 융단처럼 감싸안은 섬.
'섬 최고봉' 격자봉(格子峰·430m).,동천석실.
그가 가장 공들여 꾸민 세연정.,곡지(曲池)와 방지(方池)
동구내를 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 큰 바위들을 점점이 노출
방지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곳에 심은 소나무 한그루.
그가 추진한 왕도정치 실현의 꿈이 담긴.,방지
네모난 섬에 심은 소나무 한그루는 그의.,충정.
방지 동쪽 물가에 나란히 꾸민 네모진 돌단 두 개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기 위한 무대.
원래, 방지 남쪽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있었던.,세연정.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잡초가 우거지고
초석이 흩어진 주변에는 인가가 산재해 있었다.
원래, 이 지역은 인적이 드물어
정원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연못이나 건축물 터들이 뚜렷하다.
이 정원은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정원 유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데다
조선시대 별서정원 중 큰 규모가 특징.
부용동정원은 궁원(宮苑)이 아니면서도
총 2만 8천평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별서정원.
'고산 윤선도' 개인 만을 위한 별서정원 용도는 아닌듯.
'그는 왜 오지의 섬에 부용동정원을 꾸민걸까?'
'그는 왜 경회루 유사한 세연정 방지를 꾸민걸까?'
'그는 왜 '오지의 섬'을 보길도라고 명명했던 것일까?'
'그는 부용동정원을 어떤 용도로 쓰려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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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파싸움 여파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재야에 은둔한 선비들이 많았다.
그러한 재야 선비들이 때를 기다리며
고향이나 은둔지에 조성했던 민간 정원들.
조선시대 별서정원.,보길도 부용동정원 세연정
담양 소쇄원, 영양 서식지와 함께 3대 민간 전통정원
그 중에서 보길도 세연정(洗然停)은
윤선도가 어부사시가를 읊은 곳이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고산 윤선도(1587~1671)가
1651년(효종 2) 벼슬을 사양 후, 65세에 지은 연시조 이다.
남인 거두지만, 보길도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윤선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치 세력.,동인과 서인.
효종 재위 초 집권세력은 송시열이 이끈.,서인.
그당시 인조반정 권신세력 서인은 왕권을 위협.
그에 반해 남인과 북인은 당시 군소 정당에 불과.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동인.
그당시 남인의 거두였던.,윤선도.
강력한 왕도정치를 주장했던.,선봉장.
'집권세력' 서인의 거두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한 그.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라
사형은 모면하고 은둔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시.
은둔지 보길도에서
때를 기다리며 읊은.,시.
'고려시대 어부가(漁父歌)에
자신의 심경을 비유한 것일까?'
어부사시가.
동풍 건듯부니 물결이 고이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돛을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스라.
.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어사와.
.
앞뫼는 지나가고
뒷뫼는 나아온다.
'동풍은 당시 정치 상황을 비유한걸까?'
'동호란 집권당 서인의 텃밭이란 뜻일까?'
서호란 '남인의 텃밭' 해남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국총 어사화.,'왕도정치'를 향한 그의 염원
왕도정치 확립으로 정권 교체를 염원했던.,남인.
앞뫼는 권신세력 '서인'이고.,뒷뫼는 '남인'의 세력.
그당시 정권을 장악한 집권당 서인의 거두.,송시열.
왕권이 바로 서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었던.,윤선도.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한 윤선도의 은둔지.,보길도.
'보길도는 남인인 그가 때를 기다린 곳일까?'
65세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읊은., 어부사시가.
'어부사시가에 담긴 그의 속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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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를 포함해 201개 섬으로 이루어진.,완도군.
완도 에서 보길도 가는 40분 남짓 뱃길은 아름답다.
싫증날 만큼 멀거나, 아쉬울 만큼 가깝지도 않은 뱃길.
완도는 우리나라 김과 다시마, 톳,
미역, 전복 70% 이상을 생산하는 곳.
우리나라 전복 양식장의 고향인 보길도.
1636년병자호란 전후 혼란기에
귀양살이를 하던.,윤선도의 이상향.
보길도는 면적33km ², 해안선 길이 41Km.
'보길도 서남쪽 끝' 공룡알 해안가에 뾰죽 솟아오른 산
보죽산 아래 동그랗게 움푹 들어간 공룡알 해안.,보옥리.
섬 전체가 수려한 봉우리로 가득해 그가 반해버린.,보길도.
뾰죽산은 산세 형태가 남근 형상이라.,보죽산.
그 아래 공룡알 해안은 여근 형상이라.,보옥리.
그가 十用十一口 명당으로 여겨.,보길도(甫吉島)
'十用(보죽산)과 十一(보옥리).,口는 어디일까?'
보옥리 ~ 뽀래기재 ~ 격자봉 ~ 예송리 해수욕장.
3시간 도보 거리 & 세연정, 선착장, 전망대~보옥리.
멀리서 바라보면, 황소가 드러누운듯한.,격자봉.
섬 전체가 동백나무 숲으로 우거진듯한.,상록수림.
150여 종류의 아열대수종과 난대수종으로 이뤄진 숲.
사철 푸른., 넓은 잎사귀 상록수 밀림.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보길도.
난파선을 타고 낯선 섬에 표류한.,느낌.'
격자봉 밀림 속은 길을 잃어버릴까 겁 난다.
마치, 열대지방의 밀림 속에 들어선듯한 느낌.
잎이 넓은 상록수림 정글 속은 한낮에도 어둡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암봉이 줄지어 나타나며
탁트인 조망을 즐길 수 있어 걷는 맛이 즐겁다.
격자봉 북쪽으로 보이는 부용리.,윤선도 유적지.
격자봉 (格紫峯.425m)에 올라 지세를 살핀 윤선도는
마치, 한송이 연꽃 같은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그 산 아래 낙서재를 짓고 건너편에 동천석실을 지었다.
쪽빛 바다 건너 해남 땅끝마을과 달마산.
격자봉 정상은 뭍을 바라다 보는.,전망대.
완도 남서쪽에 있는 노화도에서 약 3.8㎞ 떨어진 보길도.
주위에 노화도, 소안도 큰 섬과 예작도, 장사도 등 작은 섬들.
"보길도 안에 명당 자리가 있다.(十用十一口) .,보길도(甫吉島).
'보길도 안 명당자리는 동구(洞口).,세연정.'
'완도 ~ 보길도' 인근 섬들의 축소판.,세연지.
그곳에 배치한 너럭바위들은.,크고 작은 섬들.
'자연 경관에 마음을 씻는다.'는 뜻 이름.,세연정.
세연정 정자 앞에 드넓은 인공 연못.,세연지
넓은 연못 속에는 고인돌 같은 너럭바위들.
'완도 ~보길도' 뱃길 인근 섬을 쏙 빼닮은 형태.
그 거대한 너럭바위들을 인근 섬처럼 배치한 구도.
'연못 속 너럭바위들을 어디에서 구해왔을까?'
마치, 연꽃 한송이 피어나는 산세.,보길도.
그 외딴 섬 안에 2만8천평 규모.,부용동정원.
부용동정원 또한 연꽃 한송이가 활짝 피어난듯.
세연정을 중심으로 인공호수 세연지를 파고
그 연못 주변에 건축물을 배치한.,부용동정원.
세연정 지나 격자봉 아래로 가다보면 조그마한 3채 기와집
이곳에서 고산이 주자학을 연구하며 기거했던 곳이.,낙서재.
낙서재 바로 건너 격자봉 중턱 절벽 바위 위에 있는.,동천석실
동천석실은 천평 남짓 공간에 한칸 정자
그리고,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
고산이 차를 마시며 시와 사색을 즐겼던 휴식처.
격자봉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풍경들.
보길도 동남쪽의 바닷가 마을로 활처럼 휘어진 바닷가,
검정 자갈이 3km에 걸쳐 해변에 깔린 예송리 해수욕장.
눈앞 예작도와 멀리 가물거리는 추자군도 평화로운 풍경.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용동정원 속 세연정.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595.,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
'환상의 섬' 보길도에서 주변 섬까지 정원처럼 즐겼던 고산.'
'보길도 주변 섬들은 모두
그의 영역이었던 것일까?'
세연지 연못 안에 인근 섬처럼 배치한.,너럭바위들.
마치, 남서해 바다와 섬들을 거느린듯한 위치.,세연정.
그가 남서해 항로와 오지의 섬까지 훤히 알고 있었던.,물증.
'세연정은 해남 해도인들의 본부였을까?'
'아니면, 남인 은둔 세력의 거점이었을까?'
'그는 왜 남서해 항로를 세연지에 담은 걸까?'
고산은 세연정과 원림을 조성하는데 각별한 정성을 들였다.
보길도(면적33㎢)에서 부용동이 중심이고 원림은 낙원 심층부.
원림을 조성하기 위해 논에 물을대듯 개울물을 막아 세연지를 조성.
하류 수중보(높이1m, 길이 11m)가 인공 섬을 만드는 중추
수중보 상단의 판석보는 건기에는 돌다리이고 우기에는 폭포.
세연지 물이 판석보를 거쳐 장방형 인공연못 회수담으로 흐른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팔작지붕 세칸 정자가 세연정
세연정 주변에 춤추는 무대(동대와 서대)까지 만들었다.
섬 깊숙한 곳에 못을 파고 돌을 옮겨 신선 도원경을 조성.
그가 51세에 첫발을 딛고 꾸미기 시작한.,세연정.
보길도 인근 노화도 주민들까지 동원.,5년간 공사.
그는 세연지에 배를 띄웠고, 낚시대를 드리웠다.
판석보를 지나 150m 가량 오르면 옥소대가 있다.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면 소리가 세연정을 감쌌다.
자신의 거문고를 "아양."이라 이름 붙였고
그 뒷면에는 '고산유금(孤山遺琴)'이라고 쓴
거문고를 즐겨 탈 만큼 풍류를 즐겼던.,윤선도.
그가 꾸민 원림에 발을 들여놓으면
'조선시대 최고의 별서정원(別墅庭園)'
오늘날 그 평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부용동에 들어온 이후에도
관직복귀, 유배, 낙향을 거듭하다
향년 85세로 낙서재에서 운명했다.
그는 말년에 친지들을 자주 불러 연회를 열었고
풍악이 울리면 동대와 서대에서 기생들이 춤췄다.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려 한 것일까?
그는 부용동에서 7차례에 걸쳐 13년간 머물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25채 대부분 건축물들이 소실.
부용동정원 조성 과정에서 혹사당한 노비들의 방화 說.
'정말 그의 노비들이 불을 질렀던걸까?'
'
그러다가 1993년 세연정이 복원됐고,
그후 동천석실와 낙서재 등도 옛 모습.
하지만, 그 주변 복원은 여전히 진행 중.
보길도는 고산의 왕국이자, 불우한 천재의 낙지(樂地).
그곳 원림은 '시름도, 욕망도 내려놓으라' 속삭이는듯..
보길도는 청산도와 함께 사계절이 따듯한 남녘의 섬나라.
부용동 정원은 스케일이나 기법 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규모이다.
인공미 흔적이 없이 자연미를 살린 전통정원(전남 기념물 제 37호).
보길도에 부용동 정원을 조성한 그의 족적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인조반정 이후 왕도를 세워 국운을 일으키려 했던.,고산.
그는 낙서재에서 새벽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
제자들을 가르쳤고 악공들과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 했다.
세연정은 경회루 축소판처럼
3면이 연못으로 애워싸인 누각.
연못 위에 작은 배를 띄워 놓고
풍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연못 안밖으로 배치한 너럭바위들.
'집채만한 바위들을 어떻게 옮겼을까?'
얼핏 보면, 연못에는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바윗돌들을 배치.
오히려, 연못의 자연미를 반감시키는듯도 보이는.,너럭 바위들.
그러나, 그 너럭바위들의 용도를 알고나면, 세연지가 달리 보인다.
'과연, 연못 속 너럭바위들은 어떠한 용도로 쓰였을까?'
그 너럭바위마다 선남선녀에게 예쁜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그는 세연정에서 배를 타고 연못을 돌며 어부사시가를 불렀다.
그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모두 옷을 벗었다는.,선남선녀들.
물위에 비친 선남선녀 그림자를 보며
문객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는 고산.
풍류의 스케일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사실일까? 서인들이 그를 모함한 것일까?'
연산군의 경회루 향연을 떠오르게 하는.,세연정
"옷에 물한방울 묻히지 말고 연못 속 꽃을 따 오너라."
흥청들이 옷을 벗고 꽃을 따는 광경을 즐겼다는.,연산군.
꽃다운 흥청들의 알몸 수줍음을 즐겼다는.,연산군.
권신들도 그 틈에 끼어 알몸으로 꽃을 따게 했다는.,폭군.
결국, 폭군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시킨.,중종반정.
강화도 유배지에서 위리안치.,33세에 숨진.,연산군.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제주도로 유배시킨.,인조반정.
그 반정 공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서인 세력.
'인조의 둘째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올랐어도.,서인의 세상.
정당 정치를 주장한 서인과 왕도정치를 주장한 남인.
서인보다 정치적으로 열세였던.,'남인의 거두' 윤선도.
그가 '서인의 거두' 송시열에게 패한 후.,은둔한 보길도.
그가 세연정에 공들여 꾸민.,곡지(曲池)와 방지(方池)
동구내를 보로 막아 만든 곡지 연못에 배치한 너럭바위들
방지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곳에 심은 소나무 한그루.
방지 동쪽 물가에 나란히 꾸민 네모진 돌단 두 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악사들이 풍악을 울리던 곳이다.
원래, 방지 남쪽 나지막한 동산 위에 정자였던.,세연정.
경회루 방지를 그대로 모방한.,세연정 방지.
외딴 섬 보길도는 귀양지나 다름 없는.,그의 은둔지.
그는 은둔지에 궁원 규모의 정원을 꾸민 것은 사실이다.
그는 어떻게 부용동정원을 꾸밀 재원을 마련했던 것일까?
보길도 옆 노화도에 간척사업을 벌린.,고산.
노화도는 완도와 보길도 사이에 위치한.,큰섬
그곳 석중마을에 그가 간척한 개간지 130 정보.
그 개간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애첩 설씨 부인 묘.
그곳 개간지의 수입으로 부용동정원을 꾸몄다는.,설.
그 정도 수입 만으로 부용동정원 조성은 어림 없는 일.
'그는 노화도 개간지 外에
어디서 재원을 마련한걸까?'
............고산의 '해언전' 간척사업..................
고산은 일찍부터 간척을 통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입안(立案)을 받아 자신의 재산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의 적극적인 간척사업은 조선시대 인구증가로 인한
토지부족,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으로 양안(토지대장)이
줄어들어 정부에서 적극 간척을 권장하거나 장시의 발달 등
요인도 있지만 고산의 적극적 개척(도전)정신도 무시할 수 없다.
그가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간척한
진도 굴포리, 완도 노화도는 대표사례.
해남윤씨 가문의 간척은 국가사업이 아닌 민간에서는
최초일 만큼 '고산의 조부' 윤의중(尹毅中)에서부터 시작.
서남해안 해언전(海堰田)개발로 토지가이 많기로 소문났다.
<당악문헌>(해남윤씨문헌) 에 보면 윤선도의 조부인
윤의중이 조헌(1544~1592)의 비난 상소에 대하여 반박.
조헌의 상소는 윤의중이 크게 탐해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의 거의 모든 해언전이 그의 소유라는 주장인데 윤의중은
원래 이곳 땅이 있었고 불의로 취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 고종 35년(1235년)
몽고 침입때 방어목적 연안제방을 구축한 것이 시초.
1256년 고종 43년 원나라의 침략에 강화로 피신했을 때
그곳 부족한 식량을 자체 해결하기 위한 제방을 쌓았고
그 이후에도 가뭄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도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해남윤씨 가문은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안으로
고산은 1640년(54세)~1660년(74세) 완도, 진도 등지에서
간척사업을 벌렸는데 이때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 가량 간척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남윤씨 간척은 여러 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이뤄졌는데
윤두서를 통해, 그의 외증손 정약용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는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
'당악문헌'의 공재공행장에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기록.
“어느해 심한 가뭄으로 많은 지역민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백포만에 간척지를 개간하고, 염전을 만들어
종가 소유 백포 뒷산(망부산) 나무를 베어 소금(화염)을 구워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 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다산은 공재 윤두서의 외손으로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공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산은 1818년(순조18)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 등 간척에 관한
기술을 수록할 만큼 간척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의 이러한 간척에 대한 기술은
고산을 비롯한 외증조 공재 윤두서의
간척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목민심서> 일부를 보면 제방을 쌓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제방을 쌓는 방법은 반드시 기중기를 사용하여 큰 돌을 운반.
또 조수를 막는 한 대를 만들어 조수 물머리를 감쇄시켜야 한다.
대개 조수는 멀리 대해로부터 밀려와서 제방을 정면으로 치면
큰성이라도 무너질 것인데 작은 흙덩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제방을 쌓고자 하면 먼저
제방의 허리(물이 깊은 곳)를 정하고
이 허리에 5,6보 떨어져서 조수가 들어오는
입구에 맞추어서 먼저 한 대를 구축한다.”
수원성 설계 축조 큰 공을 세운 다산.
간척을 위한 방법에도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적용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 간척사업은 근대까지도 이어지는데
고산의 12대 후손 '윤정현'도 1930년대 초반에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에 15만평을 간척 하여
그 일대가 지금도 이 집안의 소유로 되어있다.
진도 굴포리 간척
굴포리는 진도 서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포구마을
바닷가 마을 앞으로는 꽤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의 일부가 고산이 간척했다는 농토이다.
이곳에는 고산이 간척하기 위해 쌓았다는
제방 둑 약 300여 미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 약 200정보가량을 간척하였다.
이곳에는 수년전 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고산의 간척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동제를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산을 신위로 제를 지내왔다.
이곳에는 고산사당. 굴포신당유적비, 윤고산사적비 등이
세워졌는데 현재, 고산사당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있다.
고산은 60세(1646, 인조 24)때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백강 이경여와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시기에
진도에 잠시 머물면서 간척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고산은 굴포리에 머물며 경주설씨를 만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산이 이곳에 원둑(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일화.
고산은 이곳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때마다 무너지고 쌓으면 또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제방을 쌓고
있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산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새벽녘 사립문을 열고 나가 제방을
쌓는 곳을 보니 꿈에 보았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고산은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제방을
쌓으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그곳에 뱀의 지나간 형상대로 석축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곳의 지형이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쌓은 결과 무너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는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웠다. 또한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
(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는
굴포, 신동, 남선, 백동 주민 일동이
1991년 4월 6일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이곳 굴포리 고산사당에
이 마을 출신 동양화가인 백포 곽남배
주선으로 배중손 사당과 동상이 세워진다.
배중손은 진도를 무대로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군의 장수로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군의
중심 거점인 용장산성이 무너지고 쫓기는 몸이 되는데,
이중 김통정은 금갑진을 거쳐 제주도로 가지만, 임회면
방면으로 패주를 하던 배중손 무리는 이곳 굴포와
남도포에서 완전 섬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굴포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남도석성으로
배중손은 남도석성을 거점으로 항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평지성인 남도석성은 현재 잘 복원되어 있는데 배중손이
대몽항쟁을 위해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배중손과 윤선도!
그 역사적인 실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곳에 배중손의 사당과 동상을 건립하도록
추진하였던 곽남배 선생과 지역민들은 삼별초
구국적 항쟁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고산이라는
'인물의 자취를 억누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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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서 공도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그.
효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여 공도정책을 철회한다.
그후 해도인들이 다시 찾게된 삶의 터전.,남서해 섬들.
조선 후기에 정권이 바뀔때마다 오락가락했던.,공도정책.
효종이 왕자 시절에 세자 시강원 스승의 한사람이었던 고산.
공도정책 철회 및 보길도 은둔은 효종이 옛스승에 대한.,배려심.
보길도까지 찾아와 함께 기뻐했던.,해도인들
그들을 위해 65세인 고산 윤선도가 베푼.,주연.
해도인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눈.,어부사시가 향연.
'조선시대 호남 거부 가문의 종손.,고산 윤선도.
그는 남인의 거두 정치가이자, 해남윤씨 종중의 실업가.
보길도는 그의 은둔지이자 해남윤씨 종중 해도인들의 거점
.........................해남 윤씨.............................
고려시대 해양세력 무장 권신 가문이었던.,해남윤씨
고려 말 공양왕 때 강진, 해남 일대로 낙향한.,해남윤씨.
나주나씨와 해남윤씨는 전라도 남인을 대표하는 가문이다.
해남 윤씨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실용학문 가풍.
훗날, '윤선도 외5대손' 정약용은 윤두서 4째딸의 아들.
'해남윤씨 종가 녹우당' 서적들이 정약용 집필에 큰 도움.
조선시대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서남해안 해언전 소유
윤의중-윤선도-윤인미-윤이석-윤두서- 일제시대 윤정현.
해남은 입지적으로 서남해 일대 무수한 섬과 항로와도 인접.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해양진출 간척사업 교두보 거점.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居金島)까지 찾아갔던 고산.
조선시대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미지의 섬이었던.,거금도.
제주도 울릉도와 더불어 국내 10번째로 규모가 큰.,거금도.
고흥 아래 소록도 지나면.,거금도
거금도 오른쪽으로 나로도가 보인다.
당시 조선은 해금정책을 쓰는 등 바다를 멀리 한.,국정 운영.
그는 당시 서남해 알려지지 않은 오지 섬까지 찾아가 간척사업.
'고산의 조부' 윤의중에서부터 시작된.,해남윤씨 해언전(海堰田).
해안에 둑을 쌓아 간척사업으로 만드는.,해언전.
조수 간만의 차가 극심한 해언전을 간척.
아울러, 미역, 톳, 다시마 등 수산물도 생산.
미역, 다시마를 먹이로 전복 등 해산물도 생산.
버려진 오지의 섬을 찾아가 간척한.,해남윤씨.
진도 조도면은 섬들이 새때처럼 많다는 뜻 지명.
거차군도, 맹골군도로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섬들
그중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맹골도는 오지의 섬.
중국에서 우는 새벽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맹골도
해남윤씨 종중 가문에서 펴낸.,<녹우당 가보>를 보면
윤홍중(1518~1572)이 이곳 조도면 맹골도를 매입한 기록.
육지 연안도 아닌 절해 고도를 매입했던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먼 바다를 아주 자유롭게 오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항해술과 도서 경영에 탁월했던.,윤씨가문.
윤홍중은 호무한 성질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
임진왜란 전 을묘왜변(1555, 명종10) 때 해남성을 수성.
임진왜란 7년전쟁때 해남윤씨 가문의 숨겨진 공로가 컸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남서해 해언전을 개척
조선시대 지도 상 나오지 않는 오지의 섬까지 간척사업.
해남윤씨는 토지를 경영하듯 바다에서 나는 미역을 비롯
각종 수산물 소유권을 확보했고,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윤의중(尹穀中, 1524~1590)은 해안에 많은 간척을 했던 인물.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가문들과는 달리
해언전 간척사업, 도서(島嶼) 경영, 무역 등으로
조선시대 대대로 호남의 거부(巨副) 가문이던.,해남윤씨
윤선도 대에는 국부(國富)로 불리운.,해남윤씨
'호남의 거부' 윤효정은 "장자에게만 상속하라." 유언.
윤효정의 4대손이 윤선도이고, 그의 증손자가 윤두서.
그 상속 예법에 따라 대대로 호남의 거부.,해남윤씨 종손.
윤효정(尹孝貞 1476~1543), 자 희참(希參), 호 어초은(漁樵隱)
김종직 문하인 최부(崔溥), 임우리(林遇利), 유계린(柳桂隣) 제자.
퇴계(연산군 7년 )보다 25년, 율곡(중종 31년)보다 60년 먼저 출생.
윤효정은 해남주민 일부가 한해, 수해로 인해
나라에서 지정한 세곡(稅穀)을 납부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안타까운 실정을 보고 창고를 3회 연다.
세곡(稅穀)을 대납해 많은 주민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자
해남 주민과 유림들이 고마운 뜻을 한양에까지 전하므로
해남윤씨 가문이 더욱 빛나 호남지방(湖南地方) 명문(名門).
어초은공 윤효정.,시.
강진 덕정동에 살던 집
당호(堂號) 우애당(友愛堂)
그곳에 그가 걸어 놓았던.,가훈.
.
직계 처자보다 형제간의 우애를
더욱 강조했음을 알 수 있는.,한시
.
妻子似衣裳 처자사의상
兄第如手足 형제여수족
衣裳綻可補 의상탄가보
手足斷何續 수족단하속
.
처자는 의복과 같으며
형제는 수족과 같으니
의복이 헤이면 기울 수 있지만
수족이 잘리면 어찌 이으리요.
.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그의 직계 후손 중에서 윤선도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그는 해남윤씨 가문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초석이 된 인물.
............................................................. ................
'그는 왜 보길도 외딴 섬에
궁원 같은 정원을 꾸민걸까?'
윤선도(1587~1671)의 고조부.,어초은 윤효정은
해남 윤씨의 거대한 물적 기반을 지닌 인물이었다.
고산이 8세 때 숙부 강원도 관찰공 윤유기 양자로 입양.
해남윤씨 가문의 장손이 된 윤선도는 해남의 대지주
고산이 정계에 진출한 시기인 광해군의 재위 중이었다.
그당시 집권세력은 북인,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 세력.
남인이었던 고산의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열세.
26세(1612, 광해군 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정치 입문 후, 왕권 강화, 북인 서인 타도를 주장
30세(1616년, 광해군 10년) '권력 정점' 이이첨 전횡을 비판
정치적으로 패배 후, 함북 경원과 경남 기장에서 7년간 유배
그의 강직한 성품과 타협을 모르는 직선적 성격이 빚어낸 사건.
7년 후(1623년 인조반정) 북인이 무너진 후 유배에서 풀렸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하면서 반정으로 정권을 잡게된 서인 세력
인조 재위 시 정계에서 남인 위치는 여전히 좁을 수밖에 없었다.
고산은 서인들의 견제로 겨우 금오랑을 제수받았으나,
이에 만족 못했던 그는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후 의금부도사, 안기찰방, 사포서제조에 임명되었으나 고사.
42세(1628, 인조 6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후 정계 진출
장유(1587~1638) 천거로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사부(師父)
이후 5년간 공조좌랑과 한성부서윤, 시강원문학 등 관직을 거친다.
그러나, 서인들의 견제를 견디지 못하고
1634년(인조12년) 48세에 성주 현감으로 좌천
결국, 해남에 은거하던 50세(1636년)에 병자호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은 보길도에서 쓴 작품.
보길도의 발견은 고산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시기
강화도에서 뱃머리를 돌렸을때
남한산성 인조를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이유로 서인들이 시비.
이 사건으로 인해 2년 후 1638년 1년간 경북 영덕으로 유배
해배(解配)된 후 해남에서 은거 중 금쇄동(金鎖洞)을 발견.
그후 17년간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을 오가며 은거한.,고산.
그가 보길도에 삶의 터전을 잡은 시기는 병자호란 무렵.
그당시 해남 집에서 병자호란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간다.
'인조의 두 왕자' 봉림(훗날 효종)과 인평대군은 강화도로 피신.
한 때 두 왕자의 대부였던 고산.
두 왕자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고산.
해남에서 강화도까지 뱃길로 달려간다.
두 왕자조차 먹을 것이 귀했던 강화 피신생활.
묵을 은어라 했다가 도루묵이라 한.,효종의 일화.
서민 음식 '묵'조차 피난처 왕자에게는 귀했던 음식.
인조는 삼전도의 수모를 겪고 두 왕자는 인질이 되었다는 소식.
고산이 큰 배를 되돌려 제주도로 가다가 표류했다는 섬이 보길도.
당시 51세였던 그는 보길도 부용동에 살며 65세 때 어부사시사를 작곡.
보길도 부용동정원은
그가 보길도에 입도하기 전부터
비밀리에 조성 공사를 준비해 왔던.,별궁터.
그러나, 그 사실을 조정에는 알리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했던.,고산.
보길도에 '피난도성' 별궁을 마련하려고 했던듯.
인조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뒤따르려 했으나 이미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남한산성으로 파천
송시열은 왕을 수행해 남한산성 입성, 윤선도는 해남 녹우당에 있었다.
윤선도는 두 왕자가 강화도에 파난해 있다는 말을 듣고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지만,
이미 두왕자와 대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옮겨 간 이후였다.
51세 윤선도는 그후 뱃머리를 돌려.,보길도 입도.
다음해 정월 서인 정권은 그를 영덕으로 귀양 보냈다.
남한산성 인조를 문안도 않고 보길도로 도망친 불충 죄목.
....................
......................
'서인 집권세력의
'불충 죄목' 주장이
정말 옳았던 것일까?'
1636년 12월(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왕자들이 강화도로 피난
1637년 1월 그는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난다.
그는 왕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갔으나 그때는 이미 강화도가 청에 함락.
전라도수영 군선보다 한발 앞서 당도했지만
강화도는 이미 8일 전 함락된 후.,청군이 주둔.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왕과 왕자들이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양도 이미 주둔한 청군의 포위망 경계선이 살벌한 상태.
물샐 틈 없는 청군 포위망을 뚫고 왕을 알현할 수 없는 상황.
강화도에서 청군의 인질이 된 두 왕자를 구해내려했던.,윤선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후,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한 후.,제주 행.
역사 속에서 제주로 가던 중 태풍을 피해 들렀다는.,보길도.
사실은 그가 미리 준비해둔 피난처.,보길도.
보길도를 피난도성 별궁 용도로 쓰려고 했던듯.
그는 그곳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정치적 입지.
인조와 두 왕자가 청나라에 항복 후.,환궁.
그는 귀양지 겸 은둔지 보길도로 들어간 것.
예전에 제주로 가다가 태풍을 피해 들렀던 섬.
그곳 경치에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 정자를 세워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은.,고산.
산과 바다를 즐기면서 시를 벗삼아 10년을 머물게 된다.
내막은 보길도에서 10년간 때를 기다린.,고산.
병자호란때 진도로 피난한.,애첩 경주설씨.
배에 태워 부용동에 데리고 갔었던.,윤선도.
훗날, 서인 정적들의 상소로 고초를 겪게된다.
"대동 찰방(大同察訪) 윤선도(尹善道)는 병란 때 해로 따라 강도까지 이르렀었는데, 경성을 지척에 두고도 끝내 문안하지 않았으며,
피난 중이던 처녀를 배에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숨기려고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서인의 탄핵 상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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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은둔지인 보길도에 있는 동안에도
사사건건 그를 물고 헐뜯어 모함했던.,서인.
서인 권신들에게는 제거해야 할 숙청 제1호.,고산.
은둔지의 고산을 효종이 몇차례나 불러도
내린 벼슬을 사양며 입 바른 상소를 계속 올린 그.
서인들은 그의 상소를 올리지 않거나 태워 버리기 일쑤.
서인은 고산을 제거하려 했던듯.
시, 음악, 의술, 풍수지리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윤선도.
시인 음악가이자 재력가 정치인.
의학에도 조예 깊었던.,고산 윤선도.
정적 송시열도 아플 때 그에게 약을 의뢰했다.
그 아들이 독을 넣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하자
송시열은 "윤선도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다."
정적 원두표 역시 윤선도에게 약을 지어 마시고
아들을 불러 다짐 "윤선도와 원수를 맺지 말아라.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랐을뿐.,그는 나의 은인이다."
인조, 효종, 현종 때 중궁전 대비전 의학을 위해
그를 불러들인 것을 볼때 그의 의학은 대단한 경지.
왕실 어의가 고치지 못하는 병도 그가 약을 지어 고쳤다.
'왕실에서는 왜 그에게 약을 짓게 했을까?'
1652년 8월 66세 그는 보길도에서 은둔생활
1657년 재야에 물러난 송시열은 북벌을 반대.
그래도, 송시열에게 벼슬을 내리게한 서인 세력.
효종은 송시열에게 이조판서를 제수
북벌을 추진하던 도중 의문사 한.,효종.
소현세자 의문사 이후, 봉림대군도 의문사.
효종의 시신은 너무 부어올라
관에 들어가지도 못한.,괴이한 일.
1659년 5월 효종이 의문사 했던 것.
1655년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무기 개량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며 군비를 강화했던 효종.
효종의 사인을 놓고 현종이 어의 이기선을 문초하자
자신은 맥을 집을 줄도 모르는 의관이라 발뺌을 했고
현종이 어의를 처형하려 하자 송시열이 극구 두둔 구명.
어의는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의 직속 신하.
송시열은 왜 맥도 못집는 어의를 채용했던걸까?
18세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효종의 국장을 치뤘다.
..........................예송논쟁........................................
'효종의 죽음에 현종은 상복을 몇년 입는가?' 예송논쟁.
송시열은 효종이 장자가 아닌 차자이므로 1년을 주청했다.
효종은 주자례법으로 보면 왕통에 결격자라는 뜻이 내포된 것.
아버지 효종이 적통이 아니면 자신도 마찬가지
소현세자 아들이 현존하므로 그가 왕통이란 뜻인가?
송시열과 서인의 주청에 현종은 경악할수 밖에 없었다.
송시열은 주례를 따지다 보니 그런 실수를 범한 것
영의정도 그 실수를 규탄했지만 송시열은 기세등등.
이번에는 사종지설( 四宗之說)로 효종을 서자 취급했다.
송시열은 효종의 왕권을 넘어설만큼.,권력을 장악한 권신.
효종의 북벌론을 잠재우기 위해 송시열이 독살한 것 아닐까?
1660년 남인 허목, 윤선도가 그를 역적으로 모는 상소를 올렸다.
"나라 권력은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우암 송시열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예송논쟁은 송시열이 판정승.
경국대전을 원용 1년 기년복으로 종지부
74세 윤선도는 그 일로 함경도 삼수로 귀양.
1668년 7월 81세에 귀양이 풀려
다시 보길도에 돌아와서 살다가
1671년 6월 11일 85세로 운명했다.
1689 년 송시열은 숙종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
그 일로 제주도 유배길에 풍랑을 피해 보길도에서 일박.
시 한수 남기고 제주에 안치되였다가 그해 정읍에서 사사.
숙종보다 50년 나이 많은 노회한 정치인.,송시열.
14살에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 한.,숙종.
35세 젊은 숙종과 힘겨루기 승부에서 패한.,85세 송시열.
북벌론으로 왕권을 확립한.,숙종.
윤선도보다 20세 연하였던 송시열은
윤선도가 운명한지 18년후 사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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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귀양지에서도 약포를 두어 병든 사람을 구했던 기록.
고산은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냈으며,
조선 시가에서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
정철이 가사(歌辭)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서인 정치가라면
정철보다 50 년전 고산은 시가(詩歌) 문학 대가이자 남인 정치가.
훗날, 그의 외5대손이자 남인' 다산 정약용과도 비견되는.,실용 학문.
.
강화도까지 갔어도 왕을 알현하지 않은 죄목으로 귀향살이.
삼전도의 수모를 겪은 왕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윤선도.
그후에도 그는 귀양살이가 끝날 때마다 보길도에 뼈를 묻을 결심.
윤선도가 보길도 격자봉 아래 지은 집.,낙서재(樂書齋).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문객들과 더불어 시와 풍류를 즐긴 곳.
그는 조선시대 호남을 대표하는 대부호.,해남 윤씨의 대종(大宗)
그는 조상 대대로 물려내려온 막대한 재산으로 부용동정원을 조성.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동천석실(石室) 등.
보길도에 개간사업을 벌린 점을 보면 대단한 실업가였던 그.
그가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준 해남윤씨 종가 유산도 상당했다.
그는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정쟁에 환멸을 느꼈던듯 여겨진다.
세연정에서 40분 도보거리 산중턱 절벽 위., '동천석실.'
몸 하나 겨우 누울 전각이지만 보길도 전체가 바라보이는 곳.
고산이 어지러운 세상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사색을 즐기던 곳.
부용동 정원은 그의 후손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점차 퇴락
약 300 년이 지난 후에는 건물터, 주춧돌, 연못 만 남았었다.
그러나, 세연정과 동천석실이 복원되었고 낙서재도 복원 예정.
'보길도가 관광명소로 각광받는 덕분이 아닐까?'
보길도 동남쪽의 바닷가 마을로 활처럼 휘어진 바닷가,
검정 자갈이 3km에 걸쳐 해변에 깔린 예송리 해수욕장.
눈앞 예작도와 멀리 가물거리는 추자도의 평화로운 풍경.
'보길도의 주변 해역까지 정원처럼 즐긴.,고산.'
부용동 정원은 스케일이나 기법 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규모이다.
인공미 흔적이 없이 자연미를 살린 전통정원(전남 기념물 제 37호).
부용동 정원을 만든 '윤선도의 일생'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의 고산은 평생 3번 귀양살이.
30 대 함경도 경원과 경상도 기장 등으로 전전하며 7년.
50 대 영덕에서 1년, 70대 북청, 광양에서 6년.,귀양살이.
고산이 74세에 유배지 북청 삼수(三水)에서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기 대아서(奇 大兒書)
후손들에게 지켜야할 실천윤리를 당부한 내용.
고산의 손자가 금과옥조로 삼은.,충헌공 가훈.
1. 검소함을 즐기고 아껴서 생활하라.
2. 오늘 해야 할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3. 나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4. 까닭이 없는 우월감을 갖지 말고
상대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렇다고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도 갖지 말라.
5. 집안 일가친족 형제 사이에 우애를 갖고
어려운 이를 돌보며 부리는 아랫사람에게는
언제나 따듯하게 하고 노비라도 품삯을 주어라.
6. 단정한 몸가짐, 말씨와 예의로 상대를 대하라.
7. 어떤 상황이든지 화는 늦게 낼수록 좋은 것이다.
먼저 화를 내기 보다는 상황을 사전에 먼저 깨닫고
남의 성공을 일부러 깎아 내리려고는 절대 하지 말라.
8. 언제 어디서나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말로서 평온을 유지해라.
9. 어떤 상황이든지 이익을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진심과 정의로서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하라.
10. 현재, 내가 갖고 잇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조상을 공경하라.
광양 마지막 귀양살이가 끝났을때 그의 나이 이미 81세였다.
그는 1개월간 해남에 머물다가 보길도로 들어가 85 세에 운명.
고산은 남은 여생을 보길도에서 왕 못지 않게 보내며 생을 마감.
'그는 풍문처럼 호사스러운 삶을 살다간걸까?'
고산은 말로만 후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난한 친척이나 주변사람들에게
베풀고 보살피는 일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상을 뜨기 한해 전이었던 84세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농장을 마련
옳은 일에 쓸 수 있는 곡식을 보관해 두고
극빈 자를 돕는 일에 앞장을 서며 생을 마감.
어초은 윤효정, 고산 윤선도.,나눔의 정신.
후대인 공재 윤두서 대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해 마침 해일이 일어 바닷가 고을은 모두
곡식이 떠내려가고 텅빈 들판은 벌겋게 황토물.
백포(白浦)는 바다에 닿아 있었기에 재해가 극심.
인심은 흉흉해 조석간 어떻게 될지 불안한 지경.
관청에서 구제책을 썼으나 실제 별 혜택은 없었다.
백포 사방의 산들은 인적이 끊겨 나무가 꽤 무성했다.
공재 윤두서는 마을 사람들과 함게 나무를 베어내고
주민들이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한마을 수백호 주민들이 공의 도움을 받아
굶어죽지 않고 떠돌아 다니지 않게 되었다."
공재 그림은.,나물캐기, 짚신삼기, 목각깎기, 돌깨기.
어려운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풍속화
백마도, 어린 새끼와 말, 동물에게조차 애정 가득한 그림.
해남 '윤선도 고택' 녹우당(綠雨堂)은
1만평 집터에 50만평 규모의 장원(莊園).
해남읍에서 4km 떨어진 위치.,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은 효종이 왕세자 시절에 사부 윤선도에게
수원에 사랑채를 지어 하사한 집을 해남으로 옮긴 것.
덕음산 비자나무숲 바람소리가 빗소리 같다하여.,녹우당.
윤선도(1587~1671)의 고조부.,윤효정(1476~1543)
해남 윤씨의 거대한 물적 기반을 지니게 한 인물이다.
윤효정이 연동마을에 처음 자리잡은 후 지었던.,녹우당.
윤효정에게 시집간 딸에게 정씨 집안에서
삼산벌 일부를 떼어 주어 큰 부자가 된 그
해남윤씨 장자에게만 재산을 상속하라 유언.
그 유언은 해남윤씨 가문의 재산상속 전통.
덕음산은 녹우당 뒷산으로 흉년이 들면
해남 윤씨 종가에서 백성들의 세금을 대납
주민들이 그 덕의 그늘에서 산다하여.,덕음산.
세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들어간 많은 주민들을
어초은이 3차례 구제한 후.,해남윤씨 가문의 전통.
그 소문이 한양까지 뻗어나간 명문 가문.,해남 윤씨.
세연정은 삼면이 연못이고 그 정자 가운데 온돌방이 있다.
정자 양편에 돌로 쌓은 무대는 기생들이 춤추는 동대와 서대.
세연정에서 차로 5분 거리 부용동에 '그의 거처' 낙서재가 있다.
낙서재로 들어가는 길 양편에는 울창한 동백나무숲.
낮에는 세연정에서 지냈고 밤에는 낙서재에서 잠을 잤다.
낙서재 터 건너편 산자락에 묻힌 조그만 정자가 동천석실
부용동이 마치 연꽃 한송이가 피어나는 것 같이 보이는 곳.
1587년 한양 동부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출생.
임진왜란 후 17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진출.
정권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30세 때 첫번째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곧바로 사직.
해남에서 은둔하며 벼슬을 사양하다가 42세에 두 왕자의 대부.
그 이후 공조좌랑, 호조정랑, 한서어윤,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쳤다.
1651년 보길도에서 65세 나이에 어부사시사를 지었던 고산.
그후에도 유배와 은둔을 거듭하다가 낙서재에서 85세에 운명.
그는 남인의 거두였지만 평생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살다간.,인물.
.
그의 14년간 유배생활과 19년간 은둔생활은
그가 정치적으로 서인보다 열세인 남인인 탓.
남인의 거두였던 그는 왕권정치를 주장했지만 늘 실패.
그당시 정권을 주도했던 서인 권신 세력들에게 눌렸기 때문.
절대 군주제는 연산군으로 막을 내렸고 그후로부터.,권신 시대.
그는 강력한 왕권정치의 부활을 꿈꾸며 부용동정원을 조성한다.
그러나, 그의 소신과 꿈은 그의 이상 속에서만 피었다가 스러진다.
'그의 고택'이 있는 해남은 조선시대 제주도 귀양살이를 가는.,길목.
해남 땅끝마을은 제주도 군마를 싣고와 육지로 보내는 통로.
이곳 사자봉 전망대에 오르면 남쪽 바다에 펼쳐진 다도해 풍경.
완도군 노화도와 보길도 그리고 수평선 끝에 걸린 한라산 봉우리
해남 땅끝마을에서 12㎞ 남짓 떨어져 있는 섬.,보길도(甫吉島)
동백 숲, 유자, 석류, 석란, 산다(山茶)와 노루 사슴이 뛰어놀던 곳.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듯한 산세"라고 하여.,지명이 부용동.
'그는 말년에 이곳에 은둔하며 신선의 경지를 즐기려 했던걸까?'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보길도 일대를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청별선착장-세연정-보옥리 해변-예송리 해변-중리 해변-글씐바위
'완도를 떠나 보길도에 들어서면.,울창한 동백숲.'
3월이면 흰눈 속에서도 어김없이 붉게 피는 동백꽃.
여인의 입술 같은 붉은 꽃잎 속에 탐스러운 노란 꽃술.
흐드러지게 자태를 뽐내다가 미련없이 스러지는 동백꽃
사랑스러운 여인의 열정일까? 절개일까?
윤선도의 열정을 떠오르게 하는 붉은 동백꽃.
청에 항복한 것을 한탄하며 세상을 등진.,윤선도.
꽃샘 눈속에 붉은 꽃잎 흩뿌리며 산화하는 절개의 꽃.
제주도를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상륙한 후 정착한.,보길도.
51세에 첫발을 딛고 향년 85세로 생을 마감한.,부용동 낙서제.
그는 은둔처 보길도에서 어부사시가를 짓고 32편의 시를 남긴다.
청별 선착장 오른쪽 길을 따라 1.5㎞ 가면.,부용동 정원.
.
세연지란 자연경관이 깨끗하고 단정해 마음을 씻어주는 못이란 뜻.
정자 주변으로 울창한 동백숲 오솔길에서 우수수 흩날리는 동백 꽃잎.
고산이 그곳에서 말년에 지은 시를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벗 밖에 또 더 있다 한들 무엇을 하리.
구름 빛갈이 좋다고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가 맑다고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줄 모를 뉘 없기는 믈 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어나며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른 듯 하다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이 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 서리를 모르는가?
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그리하여 아노메라.
나무도 아닌 것이시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식이며 속은 어이 비였는가?
한사코 사시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이니
밤중의 광월(光月)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아무 말을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
누구인가 기다려도 아무도 찾지 않는 신세를 한탄한 시.
정치적으로는 남인들조차도 그에게 도움 되지 않았던듯.
결국, 권력을 잃은 고산에게는 찾아오는 정객조차 끊겼던듯.
그가 아무리 화려한 향연을 베풀었어도 말년엔 외로웠던듯.
그 고독함을 달래며 부용동 정원을 꾸미고 시로 마음 달랜듯.
고산이 말년에 혼자 만을 위해 향연을 벌렸던 곳이 부용동정원.
자신의 시를 선남선녀에게 부르게 해 스스로 위로했던 고산.
선남은 초대 손님이고 선녀는 초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 역활.
선남선녀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홀로 권력 실세 시절을 회고.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 퇴폐적인 향연을 즐긴 것일까?
81세에 귀양이 풀린 나이로 추측하건데 풍류를 위한 향연.
그는 시강원 시절에 인조가 베푼 향연에 참석한 향수를 달랜듯..
보죽산(195m)자락 아래 보옥리 해변에 동백숲 그늘 속 붉은 동백꽃
그 아래 들어서면 한송이 동백꽃이 되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싶어진다.
고산은 보길도에서 부용동 정원을 조성하며 그런 심경을 달랜듯 여겨진다.
'훗날,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글귀를 남겼다는 글씐바위.'
조선 후기에 제주도 유배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들른.,그.
우암이 83세에 백도리 마을 동쪽 끄트머리 바닷가 바위에 남긴 글씨
늙은 몸으로 유배길에 오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한시(韓詩).
'자신의 처지가
19년전 고인이 되었던
윤선도와 비슷해서였을까?'
남인 고산과 치열한 정적인 서인 송시열
남인과 서인의 두 대표가 만나게 된.,보길도.
험한 뱃길에 잠시 보길도 백도리에 머물렀던.,우암
말년에 고산은 서인들을 피해 부용동에 살며
밥 짓는 연기까지 흩어지게 해 은거지를 위장했다.
윤선도가 그렇게 경계했던, 서인의 거두.,우암 송시열.
우암이 유배 길에 머문 곳이 보길도 백도리.
운명적인 보길도 입도였을까? 우연한 풍랑일까?
아니면, 윤선도의 망령이 송시열을 끌어들인 것일까?
송시열(宋時烈 :1607~1689.7.24)
조선 문신으로 유교 주자학의 대가
서인 분당 이후에는 노론 영수였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스승.
.................글씨 쓴 바위., 유래..........................
보길도 동쪽끝의 백도리 해변 석벽에 글씨쓴바위
선조 - 숙종때 노론 영수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
1689년(숙종15년 ) 왕세자 책봉문제 부당함을 상소
숙종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이 삭탈된뒤
제주도 귀양길에 보길도 바위 밑에서 숙박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솟아 바위에 쓴 글
................................................................
八十三 歲翁 蒼波萬里中
一言 호 大罪 三點亦云窮
北極 空瞻日 南溟단信風
초구구恩在 感激泣苦衷
여듯셋 늙은 몸이 멀고찬 푸른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마디말이 무슨 큰죄이길래 세번이나 쫏겨나니 궁한우수로다
북녁 끝 부질없이 님을 우러르며 남녁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담비갓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 '담비갓옷' 모피옷은 효종이 내린.,하사품.)
성격이 곧고 직설적인 윤선도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
조선시대 정치에서 생존 기본조건은.,침묵을 지키는 일.
1667년(현종 9년) 81세에 이르러 겨우 귀양살이에서 석방.
그의 마지막 유배지는 광양 백운산자락 옥룡동(추동)
1665년 6월 함경도 삼수에서 광양으로 귀양지를 이전.
'함경도 삼수(三水)는 "산수갑산" 열악한 오지의 대명사.
함경남도 삼수갑산(三水甲山)
삼수(三水)는 함경도 북서쪽 지역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고. 매우 험한 곳.
귀양갔던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범에게 물려 죽어
형기가 다하기 전에 사망하는 악명높은 불모지였다.
백사 이항복은 광해군 때 귀양 가서 죽었던 함경도 북청.
현종이 왕자 시절의 옛스승인 윤선도의 고령을 배려.
그의 정적 서인들까지 측은히 여겨 귀양지 이전에 동조.
그곳 2년 1개월 유배생활을 마감 후, 마지막 은둔지 보길도.
일생동안 약 20년간 유배생활과 19년간 은거생활을 했던 그.
1618년 경원에서 기장군 죽성리로 유배지를 옮겨 7년간 유배.
그가 열악한 유배지에서 살아 남게된 이유는 그가 펼쳤던 의술.
유배지 주민들이 그를 찾아와 병 치료를 받았고
유배지 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의술을 펼쳤기 때문.
열악한 유배지에서마다 글을 가르쳤고 의술을 폈던 그.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유배지의 주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를 제 몸처럼 보살폈고
약초를 캐느라 늘 산에 올라 건강을 유지한.,그.
만년에는 이해창(李海昌), 조경, 허목, 윤휴, 홍무적
홍우현, 하홍도, 권해, 이서우, 정길보, 나위소 등과 교우.
그밖에 당색이 다른 백강, 이경여, 윤선거, 윤문거, 윤원거 등.
온갖 억측과 비판 속에서 미수 허목 등
소수의 친구들은 그와 계속 교류하였고,
허목은 '이 시대의 의인'이라며 그를 칭송.
고산과 보길도에서 마지막 여생을 함께 한., 설씨 부인
애첩 경주설씨는 고산이 진도에 머물 때 얻었다는.,부인
"진도 간척사업 때 만난 토착민의 부인."이었다고 전해온다.
"피난 중이던 처녀를 배에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숨기려고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서인의 탄핵 상소 -
"송시열은 사형을 시켜야 마땅하다."
예송논쟁 때 왕에게 고했던.,고산 윤선도.
그에 대한 서인의 탄핵상소는 정치 보복인듯.
'서인들이 그를 모함한 것 아닐까?'
완도와 보길도 사이에 위치한.,노화도
그곳 석중마을에 고산이 간척한 130 정보.
그곳 개간지가 내려다보이는.,설씨 부인의 묘.
고산은 '그의 애첩' 경주 설씨와 보길도에서 함께 지냈다고 하며
만년에도 고산은 매일 아침 격자봉 정상과 인근 약수터를 찾았다.
해남 녹우당에서도 매일 아침 두륜산과 오삼재 약수터를 찾았던 그.
첫부인 남원 윤씨와 일찌기 사별
그후 재혼한 한양조씨는.,해남댁이고
남은 여생을 같이 한 경주설씨는., 보길댁.
보길도 곡수당은 본채와 서재가 있다.
나무 홈통 물이 연못으로 떨어져.,낙서재.
곡수당은 고산의 서자 학관이 휴식하는 공간.
고산과 설씨부인 사이에 난 아들.,윤학관.
서자 이지만 윤선도가 가장 사랑했던.,아들.
윤선도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주관했던.,윤학관.
보길도 개울가에 판 연못이 아름다운.,곡수당(曲水堂)
'고산 윤선도의 서자' 윤학관이 거주하던.,아담한 기와집.
그 곁에 기와집이 설씨부인과 윤선도가 거주하던.,낙서재.
낙서재는 윤선도의 거주지이자 부용동정원 서재.
그가 책을 즐겨 읽는 서재라 하여.,낙서재(樂書齋).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
향년 85세로 그가 운명한 후
보길도 부용동정원 건축물들은
모두 다 소실 되었다고 전해온다.
'정말 그의 노비들이 불을 질렀던걸까?'
우리나라 역사는 집권세력 및 승자의 기록.
그에 관한 기록은 상당부분 왜곡되어 있는듯.
역사 기록에서 지워진 사실을 밝혀내기 어렵다.
그후, 72년 세월이 지난 후에도
보길도는 인적이 끊겼던.,무인도.
그곳 건축물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현재, 세연지 너럭바위들 만.,옛모습.
그는 자녀 교육에 무척 심혈을 기울였고 전해온다.
아들 과거 낙방 답안지를 분석해 줄 정도로 자상했고
소학을 평생 수신서로 정해 실천할 만큼 모범을 보였다.
'윤선도의 아들' 해남윤씨 종손.,윤인미(尹仁美 :1607 ~?)
1630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1662년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고산이 예송논쟁에서 예론을 주장해 10년간 벼슬을 못했다.
.
평소 그는 자녀에게 적선을 실천할 것을 당부.
항상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라고 가르쳤다.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라.
다른 양반 사대부들이 흔히 행하듯
망아지를 길러서 이득을 보려하지 말라."
...........고산의 유언..........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말라.
혹, 인연이 닿아 벼슬을 하더라도
권력, 지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
...................................................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서인 권신세력.
"인조는 만백성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
인조반정 반대 세력까지 정치에 참여시켰던.,서인.
인조 당시 남인은 서인 권신들의 들러리에 불과.
그후, 효종과 헌종 당시에도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
그는 후손에게 정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려한듯.
.
그후 그의 후손은 공재 윤두서, 윤덕회, 윤용 등
그의 유언은 후손 대대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듯.
그의 후손들은 정치인 아닌 분야 인물이 더 많다.
오늘날까지 문인화가, 정치인, 많은 법조인을 배출.
전 대법원장 윤관, 윤재식 대법관, 윤일영 전 대법관,
윤성식 정부혁신지방분과위원장, 윤근환 전 농림부장관
'크라운 제과'를 창립한 윤태현씨도 고산의 후계.
윤선도-윤두서-윤덕희-윤용 등으로 이어지는 시서화
서양화가 윤형식, 그 장녀 윤보숙, 차 종손의 손녀 윤지영
윤지영은 초등학생때 시집을 낼 정도로
후손들도 시서화에 재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녹우당에 살고 있는., 산의 14대 종손 윤형식
연대 영문학과 졸업후, 30대부터 40년 간 살고 있다.
그 역시 선조들의 영향으로 종가를 유지하려면
재력이 필요함을 알고 5만여 평의 차밭을 조성
'해남의 차 문화' 보급에 크게 기여를 하고 있다.
윤선도 묘역은 해남 두류산 향로봉 병풍암 등
한눈에 보이는 금쇄동 임도 곁 명당터.,약 120만평.
조선시대 그가 매입했고 현재는 해남윤씨 종중 소유지.
'첫부인' 남원윤씨와 합장한.,고산 윤선도 묘.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그의 혜안을 볼 수 있는 명당.
해남윤씨 부귀와 1만8천 후손의 번영을 이루게한 묘역.
1654년(효종5년) 운명한 첫부인
그 묘는 원래 해남군 수정동 야산.
윤선도 사후에 장사 지낼 때 합장했다.
제자인 효종과 헌종 재위 시절에 북벌론에 반대했던.,그.
그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북벌이 불가함을 알고있던.,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주장해 입지를 굳히려 했던 서인.
북벌론은 서인들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
그로 인해, 남서해안 도서 지역의 민생 경제는 파탄.
북벌을 위한 세금을 해남윤씨 가문이 3년 대납할 만큼.
그는 왜 보길도에 동남동녀들과 함께 풍류를 즐긴걸까?
'남서해안' 오지의 섬까지 찾아 해언전을 개척.
그들을 이주 시켜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했던.,그.
그는 동남동녀와 더불어 신선의 경지를 누리려한듯.
보길도는 윤선도의 이상향 건설을 위한.,교두보.
보길도 세연정에는 그의 원대한 꿈이 담겨있는듯
세연정 너럭바위마다 이름을 붙였던.,고산 윤선도.
실용적인 학문과 실천 가능한 경제를 추구했던.,그.
세연정은 단순히 풍류가 목적인 정자는 아니었던듯.
그의 이상향 건설을 향한 꿈이 담겨있는듯 보여진다.
보길도를 거점으로 남서해 해언전을 개발.
오지의 섬까지 이상향을 건설하려 했던.,윤선도.
그의 해양부국 원대한 꿈이 담겨있는.,보길도 세연정.
조선시대 중앙 정치가 미치지 못했던.,오지의 섬들.
남서해안 오지의 섬에서 해언전 간척사업을 벌린 그.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오지의 섬을 찾아 개척한걸까?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오지의 섬 간척사업.
그는 시대를 몇 세기나 앞서 나간., 조선시대 장보고.
그의 꿈은 시대를 앞서 나갔지만, 정치인으로는 패배자.
그의 이상은 훗날 그의 외5손 정약용에 의해 다시 부활한다.
훗날 다산 정약용이 집필한.,5백여권 실학 문서들.
녹우당 서재에 보관된.,해남윤씨 종중의 실학 문서들.
그곳 문서들을 토대로 수백 여권을 집필한.,다산 정약용.
다산초당이 위치한 강진은 고려 말부터 해남윤씨 거점.
다산이 외가 해남윤씨 도움으로 거처하게 된 다산초당.
'애민정신'과 '국민복지 실천' 그의 정신은.,외가의 영향.
"하늘을 우러러보듯 백성을 보듬는다" - 정약용.
........................정약용의 실학.............................
'유형원, 이익' 학문과 사상을 계승해 실학을 집대성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며
봉건제도 폐해를 개혁하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 선비들에게 직업론을 유도
노동력 향상을 위한 공동농장 경영론.
볼록 렌즈, 프리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
한강 배다리(舟橋) 설계, 거중기, 고륜(鼓輪), 활차(滑車) 등
건설기계를 창안했고 방직기술, 의학, 수리관개사업, 식수(植樹)
목축, 수렵, 채광기술 및 의학, 농민들을 위한 과학 정책론을 제시.
해남윤씨 종중의 해양 도서 경영방식을 집대성.
.......................................................................
강진은 옛부터 조선, 탐라, 중국, 왜를 잇는 항로의 중심.
해외 각국의 선진문명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하기 좋은 곳.
다산의 실학 저서들을 보면 고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윤선도는 어떤 평가를 받았던 인물일까?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릴때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생활.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적을 만들기도 했다.
같은 시대의 미수 허목은 그의 원칙론과 강경함을 높이 평가했다.
"준정(峻正)하여 인의(仁義)를 많이 쌓아 널리 베풀고
은혜로 명예를 바라거나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언제나 남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는 곧은 성품.
한결같이 바른 도리때문에 배척을 당해
죄수명부에 있은 지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 만큼 정당해
비록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의를 봄이 한결 같다."
부용동 정원을 구경하러 보길도까지 간 김에.,거제 해금강,
여차몽돌해변, 외도 해상농원, 해금강 해돋이 등도 볼만하다.
아울러, 그 일대 오지의 섬들까지 관심을 갖는 것도 권하고 싶다.
수심 20m 안팍에 위치한.,남서해안 도서 지방.
육지와 다를 바 없는 가치를 지닌.,잠재적 보고.
동아시아 국제 물류항 후보지로 부각되는 보길도.
정약용의 외5대 조부.,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 6. 22) ~ 1671년 7월 16일(음 6. 11).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시대 시조시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 별칭.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 약화제(藥和劑)를 남겼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 등의 횡포를 규탄.
함경도 경원, 경상도 기장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인조 반정 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된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 역임
1629년(인조 6년) 세자시강원문학으로 소현세자를 보도.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던.,윤선도.
서인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삼수(三水)에 유배.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한.,윤선도.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
그 덕분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보길도 세연정에서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시조로 전해온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송강 정철,
18년간 유배지에서 수십권 저서를 남긴 정약용 등과 비견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81세에 이르러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7월 27일(음 6. 22)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종로구 연지동)에서 생부인 예빈시직장 윤유심(尹唯深)과
생모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관찰사 '윤유기'의 양자가 되어
전남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을 잇는다.
큰아버지 윤유기는 어초은 윤효정의 4대 종손이었다.
생부 윤유심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지만,
큰아버지인 윤유기는 관찰사(종2품)에 이르렀다.
윤선도의 생모 안씨는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
그의 가계는 고려 중기 윤존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윤존부 이후로도 가계가 실전되어 광혁(光奕), 형(衡),
효정(孝正), 천즙(川楫), 환(桓), 녹화(祿和) 등 전해온다.
그뒤 윤존부 6대손이자 윤선도 9대조 윤녹화가 진사기 되고,
8대조 윤광전이 고려 말 영동정이라, 사실 상 윤선도가 중시조
유년기에 그는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6월 2일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유기(唯幾)에게 양자로 입양할 것을 신고하여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가 현재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윤선도 집안은 동인
사림이 동서로 나뉘자
그의 가계는 동인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 윤의중 역시 동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가족을 따라 피신하였다가 되돌아왔다.
1597년(선조 30년) 산사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불교 법회에서 수륙재를 열었으나 학업에만 정진.
그러나, 정유재란이 다시 터지며 다시 피신하였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17세에 남원 윤씨로 판서 윤돈의 딸과 결혼한다.
이후 한양조씨와 보길도 첩인 경주 설씨를 맞이한다.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1591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
그는 북인에 가담하지 않고 남인이 되었다
윤선도는 일찌기 송시열 서인과 숙원 관계.
그 숙원의 뿌리는 정여립의 난까지 소급된다.
정여립의 난 때 위관은 서인인 정철이었는데
이때 죽음을 당한 이발은 생조부 윤의중의 사위.
윤선도는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1609년 양어머니 구씨(具氏)의 상을 당하여
학문을 중단하고 3년상을 하였고, 1610년 생모
안씨(安氏)의 상을 당하여 1612년에 상을 마쳤다.
청년기에 그는 북인들의 학문과 사상 역시 반대하여
광해군 때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06년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다.
그뒤 1612년(광해군 4년) 향시에 합격.
1612년 진사시에 1등 2위로 급제하였다.
바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생부 윤유심이 눕자 임종시까지 극진히 간호.
1616년(광해군 8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 친정아버지 김제남 규탄 상소를 올렸다.
그해 이이첨, 권신 등 대북계열 인사들이
왕을 제대로 모시지 않고 권세를 휘두르자,
그해 12월 이를 비난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다.
그해 이이첨 일파의 월권행위 비판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광해군의 권세를 등에 업고 뇌물수수와 권력남용
등 부패행위를 자행하는 이이첨, 김개시 등을 비판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론,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등의 처형을 규탄, 비판하였다.
또한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의 정치를 난정(亂政)으로 규정하고,
이와 함께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간원 등
3사에서 탄핵이 빗발쳤고 1617년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
이후 경남 기장(機張)
등지에서의 유배생활.
병진소(丙辰疏)라 한다.
그러나, 아버지 윤유기나 생부 윤유심이
북인 당원이었던 덕에 죽음은 모면하였다.
1618년 광해군과 이이첨 일파를 비난하다가
변방에 유배된 이들이 여진족 등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그도 배소가 경남 기장군으로 이배되었다.
1619년 5월 양아버지 윤유기(尹惟幾)의 상을 당하여
특별히 풀려나 3년상을 마친 뒤 유배지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인조반정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1623년 3월 의금부도사 제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 남인으로 전향하여 남인으로 생활한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윤선도는 8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
한성으로 돌아와 승의랑 의금부 도사 ·병조 정랑 등의 벼슬.
그는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는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벼슬을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6월 의금부 도사 승의랑에서 봉직랑으로 승진하였다.
반정 직후 서인 조정에서 '죄를 입은 사람을 모두 뽑아 쓰자.'
하여, 1623년(인조 1년) 7월에 의금부 도사로 통덕랑에 승진.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임명.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명목 상으로 그에게 벼슬을 내렸던 것.
만백성의 지지를 얻은 것처럼 천명하기 위해
남인계와 일부 북인에게도 출사를 요청했지만
그는 서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출사를 거절.
그는 송시열처럼 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시강원의 사부로 효종의 스승이었다.
세자가 즉위하면 사부는 중용되는 것이 관례.
그는 중용되지 못했고 윤선도는 그 이유가 바로
서인 송시열의 반대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1629년 왕자사부로 공조좌랑 겸, 형조정랑(刑曹正郞)
1630년(인조 8년)초, 병을 칭하여 공조좌랑을 사직했다.
그러나 그해에 공조정랑,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1630년 8월 1일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
1630년 10월에 별시(別試) 초시에 합격한 뒤
12월 특명으로 공조정랑을 제수 받고 사부 겸직
1631년 6월 호조랑에 임명되고 총융청랑을 겸직.
그해 9월 호조정랑을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해 11월에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32년 1월
오랫동안 왕자의 사부로 있었다고 하여
특별히 호조 정랑으로 제수받고 사부 겸임.
그해 2월 사복시 첨정(司僕侍僉正)으로 승진했다가
지덕해, 고부천이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이 사직서를 냈다.
1632년 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을 사퇴하고,
왕자사부직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633년(인조 11) 행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
그해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지내고 7월 관서경시관(關西京試官),
9월 19일 통훈대부 행세자시강원문학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소현세자 보도.
그해 10월 증광 향해 별시(增廣鄕解別試)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曺正郞)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강석기(姜碩期)의 반대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으나
왕의 부름을 받고 귀경,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
그러나 서인 측으로부터 너무 빨리 승진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1634년 성산현감으로 나갔다.
1634년 7월, 성산현감 재직 당시 양전(量田)의 득실을 논하고
등급을 낮출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보고되지 아니하였다.
1634년 해남을 방문한 승려 침굉 현변(枕肱 懸辯)을 만나게 된다.
19세 승려 침굉은 송계당을 따라 복현에 나들이갔다가,
관청 객사의 상량문 문제로 윤선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윤선도는 해남에 내려와 있었고, 둘째 아들을 잃었던 때.
윤선도는 침굉이 죽은 둘째 아들과
외모 등 여러 점에서 흡사했으므로,
침굉이 곁에 머물러주길 간청하였다.
훗날 윤선도가 광양에 유배되었을 때,
침굉이 그곳에 가서 창랑가를 부르며
고산 윤선도를 위로해 주었다고 전한다.
성산현감 재직 중 삼남 전답을 측량한 것을 두고 원성이 많아
그는 '전정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에게 너그럽게 할 것'을 건의.
그러나 토지측량때 불만을 품은 지주가 그를 비난하여 결국 탄핵.
1635년(인조 13년) 8촌 윤선오(尹善五)에 의해
실전되었던 윤광전(尹光典) 묘소가 발견되었다.
이후 제각을 겸한 문중 사당 조성에 적극 참여한다.
윤선도는 1635년 직계 선조인 6대조 사보(思甫)와
5대조 경(耕)의 묘소와 향사를 위한 경비를 마련한다.
윤선도는 6대조와 5대조부모 묘소가
종가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외자손이 기 천명에 이르지만 관리가 소홀
하여 수천명 내외손이 포와 미를 거두어
제향경비로 쓰기로 하였다가, 1649년에
재답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전환하고
이를 기화로 문중재실 추원당을 건립.
1635년 내내 그는 관직 출사를 단념하고
문중 선산과 분묘 발굴, 문중 사당 건립.
1635년(인조 13년) 11월 탐학을 부렸다는 이유로
경상도관찰사 유백증(兪伯曾)의 탄핵으로 그의
탐욕행위가 조정에 알려져 성산현감에서 파직.
그해 복관되어 성주목사가 되었다가
사도시정(司導侍正)에 임명 얼마뒤 사직.
이후 행대동찰방(行大同察訪)으로 부임하였다.
서인계 언관들의 거듭된 탄핵 공세.
그는 서인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된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자, 1637년 1월
병자호란 중에 그는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왕을 보호하려 강화도로 떠난 것.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왕이 환도했다는 소식.
인조가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
그는 평생 은거를 결심, 뱃길을 돌려서 제주도로 향하였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 경치에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아 낙서재라는 정자를 세워 생활하였다.
본래는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들렀으나
수려한 산수에 마음을 뺏겨 10년을 머문다.
그러나 이때 피난중이던 한 처녀를 데리고
부용동에 갔던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대동 찰방(大同察訪)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병란 때에 해로를 따라 강도 근처까지 이르렀었는데, 경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으며, 피난 중이던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숨기려 했으니, 국문 정죄하소서." | ||
— 당시 서인계 사간원 언관들의 탄핵 - |
그러나 인조가 거절하여 그는 국문을 당하지 않았다.
윤선도는 보길도 격자봉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라 하였다.
여기에서 문객과 문인들,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석실(石室) 등을 지었다.
그러나 정축하성의 후유증이 수습된 뒤 한성부에 상경했다가,
한성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
서인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해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거부했었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경북 영덕에 유배.
영덕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뒤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 산중신곡, 속 산중신곡 등.
1643년에는 거금도 풍광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여러 날을 머물면서 산중신곡을 펴냈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
산수 자연 속에 파묻혀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보길도로 돌아온 그는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
그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즉,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시문과
주자학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 낭음계,
오운대, 독등대, 상춘대, 엄선대 등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을 경영하였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
낙서재 건너 산중턱 절벽 위에 한 칸 집을 짓고 동천석실.
동천석실에서는 독서와 강론을 하며 별장으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
계간을 판석보로 막아 계담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단을 쌓고, 세연정(세연정)을 지었다.
이때 윤선도는 세연정에서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고금영 (古今詠), 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1644년(인조 22년) 인조가 병을 얻자
태의(太醫)를 통해 그를 불렀으나
가지 못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마음은 한몸의 주장이 되므로
장부(臟腑)ㆍ규맥(竅脉)ㆍ기혈(氣血)ㆍ
음양(陰陽)의 역순 성쇠(逆順盛衰)가 다
마음에 매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면 곧
몸도 편안해서 풍한(風寒)ㆍ서습(暑濕)ㆍ
귀매(鬼魅)ㆍ백사(百邪)가 저절로
들어오지 못하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면
곧 이와는 반대로 되는 법입니다."
이어 섭식과 약석(藥石)으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호할 것을
비유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간에서 인멸, 보고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인들은 그가 건방지게
왕명을 받고도 즉시 도성에 올라오지
않았다며 죄를 주어야 된다며 공격하였다.
이후 그는 서실을 짓고 시문과 글을 가르치며
소일하며 문인들과 시인, 가객들을 길러냈다.
그의 문인 중 한명 이서우를 통해 그의 학문과
시맥은 성호 이익과 안정복 등에게로 계승된다.
1649년(인조 25) 5월 8일 인조가 병으로 사망.
그러나 [[국상]을 당했지만 그는 딱히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칩거하여, 다시 사헌부 탄핵을 받았다.
서인 사헌부에서는 그의 태도를 문제삼아 계속 공격.
"전 현감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선조(先朝) 때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병자년 난리 때 끝내 분문(奔問)하지 않고 해도(海島)를 점유하여 호부(豪富) 함을 즐겼으며, 나라에 국상이 있는데도 감히 마음대로 편안함을 즐기고 분곡(奔哭)하지 않고서 아들을 보내 상소 은연 중 조정의 뜻을 염탐하였으니, 그의 교만스럽고 세상을 농락한 정상이 더욱 얄밉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
그러나 윤선도의 문인들이
그의 무고함을 상소하였고
결국, 무마되었다.
인조가 죽자 오히려 그는 아들을 보내
당시 한성부의 동태를 살피고 오게 했다.
한성부의 동태를 파악하여 오도록 했던 것.
5월 15일 효종 즉위 직후 그는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것을 상소한 <기축소 己丑疏>를 올렸다.
효종이 즉위 후 여러번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고사.
1649년(효종 즉위년) 6월 효종 즉위 직후 석방,
특별 복권되어, 효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양.
1650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에 임명하자 처음에는 거절.
효종의 거듭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취임하였다.
그해 3월 효종은 통정대부 승정원승지(承旨)를 제수.
이어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임명하여 늘 경연(經筵)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서인계 경연관들이 그를 꺼리고 기피하자,
4월초 여러 번 상소하여 강력히 물러날 의사를 밝히고 떠났다.
효종이 특별히 배려하여 동부승지에 제수했지만
그가 한사코 거절하자 사간원의 언관이던 민정중과
김시진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에 스승일 때처럼 지도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는
효종의 거듭된 청을 받고 그해 여름 다시 출사하였다.
1652년(효종 3년) 1월 23일 통훈대부 행성균관사예
(通訓大夫行成均館司藝)가 되어 부임하였으며,
그해 3월에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3월 27일 특명으로 통정대부 동부승지겸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반려하였다.
그러나 4월 초 정언(正言) 이만웅(李萬雄)이
탄핵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사직소
(辭職疏)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바로 하직인사 후,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 가려다가
효종의 만류로
고산(孤山)에
머물렀다.
1652년(효종 3년) 4월 5일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사직
(行義興衛副司直)에 임명되었다가 4월 9일
동반직인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임.
1652년 8월 예조참의(禮曺參議)가 되었으나
서인들의 공격으로 사퇴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예조참의가 되어
상경한 그는 시급히 처리할
여덟 가지 현안시책을 건의한
'시무팔조(時務八條)'를 올렸다.
시무팔조를 올린 뒤 사직하고
양주(楊州) 고산촌(孤山村)에
잠시 체류하며 11월에 원두표의
권력이 강한 것을 비판한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렸다.
시무팔조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리면서
그는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무팔조에도 김자점(金自點), 송시열(宋時烈), 원두표(元斗杓)가
각각 파당을 만들고 다툰 점과 당시 서인 중진인 원두표를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서인의 공격을 받자 스스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군
고산(孤山)의 별장에 다시 은거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몽천요(夢天謠)를 썼다.
그는 김자점, 송시열, 원두표가
각각 파벌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다가 원두표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
그해 11월 원두표를 해임하고
은퇴시키라는 강경 상소를 올렸다.
“ | 신은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국가와 고락을 같이하고 안위를 함께할 생각에만 늘 절실하므로, 옛사람이 이른바 ‘신은 차라리 말하고 죽을지언정 차마 말하지 않고 폐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욀 때마다 간절하여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거듭 나타나는데, 그림자를 살피면 그 형상을 알 수 있고, 한가히 있을 때에 깊이 생각하면 어리석은 자의 많은 생각 중에도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을 수 있으므로, 감히 서리가 내리는 것을 보면 추운 겨울이 올 것을 안다는 경계를 가지고 근본을 굳게 하는 계책을 도우려 합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을 살피고 정신들여 꾀하여 과감히 결단하소서.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는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활하며, 포학하게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으므로,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고, 원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잘 죽기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은 옛날의 밝은 임금이 공신(功臣)을 보전한 덕이고, 이러한 사람을 먼 변방으로 내치는 것은 옛날 성인이 망설이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 도였습니다. 밝은 임금의 덕과 성인의 도가 어찌 성명께서 체득하여 행하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히 살도록 명하여 연말까지 한가롭게 놀게 하다가 나라의 형세가 굳어지고 조정이 안정된 뒤에 그가 새로워지거든 다시 등용하소서. 그러면 종사에는 실로 억만년 끝없는 복이 되고 원두표에게도 억만년토록 얻기 어려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기우(杞憂)를 못 견디어 외람되게 하찮은 계책을 아뢰었습니다. | ” |
그때까지도
윤선도의 사직서를
수락하지 않던., 효종.
"상소한
사연이 매우 해괴하고
경망하여 버려둘 수 없으니,
본직(本職)을 갈라."며 그대로 파면.
윤선도의 상소가 있자
원두표가 궐하(闕下)에
대죄하여 상소하였다.
“ | 윤선도의 상소는 오로지 근일의 재변을 신에게 돌린 것인데, 그림자를 보면 형상을 안다느니 서리를 밟으면 추운 겨울이 올 것을 안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까지 하면서 종사(宗社)를 근심하였습니다. 이런 죄목은 억측으로 남을 의심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듣고 본 것이 있을 것이고, 신도 이런 말을 듣고 분명히 씻기 전에는 천지 사이에 다시 설 수 없으니, 신을 옥관에게 내려 윤선도와 한 곳에서 대질하게 하여 국법을 바로 세우소서. | ” |
그러나, 문제가 커지자
효종은 원두표를 위로하여
돌려보낸 뒤 윤선도의 고신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삭탈관직하고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문외 출송(門外黜送) 조치 이후 한성을 떠나 고향
해남에 내려와 한동안 외부출입을 자제하고 은거생활.
은거와 학문 연구, 제자 양성.
그러나, 그의 원두표 공격의 후유증은 계속되었고,
그는 외부와 단절하고 성리학 연구와 시와 글로 소일.
1653년 2월에 보길도(甫吉島) 부용동(芙蓉洞)으로 가서
세연정(洗然亭)을 증축, 명성이 알려져 문인들이 찾아왔다.
이후
석실(石室), 회수당(回水堂), 무민거(無憫居),
정성당(靜成堂)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4년(효종 5년) 부인 남원 윤씨가 죽자
전라남도 해남군 수정동 야산에 장사지냈다.
그뒤 윤선도가 죽고 장사지낼 때에 이르러
고향인 문소에 옮겨 합장하였다.
1655년(효종 6년) 3월 14일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임명되었는데 그해 10월 그는
<시폐사조소 時弊四條疏>를 올려,
당시 조정에서 시행하려던 섬 주민들을
몰아내고 어부들을 강화도로 이주시키는
일 등의 부당함을 말하여 중지시켰다.
1656년 상소를 올려
서인이 조정을 장악한 것을 규탄,
조선이 왕의 나라인지 신하의 나라인가를
묻고 왕권을 강화할 것을 상소하였다.
71세까지 활동하여 벼슬이 금부 도사,
공조좌랑, 예조정랑 등을 거쳐 예조참의,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며, 남인의 거두로서
치열한 당쟁 속에 휘말려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다.
1657년(효종 8년) 가을, 인선왕후 장씨의 병으로,
약제를 잘 짓는다는 추천에 따라 왕명으로 상경하여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로 의약(議藥) 제조에도 참여.
1657년(효종 8년) 4월 6일 윤선도는
승정원의 옹폐(壅蔽)를 공박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남인
정개청의 서원(書院)을 철폐하는
것의 부당함을 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송시열과 갈등하였다.
이때 그는 정개청을 변호하였으나
송시열이 강경하게 나오자, 그는 송시열이
편협하다며 공격하여 감정싸움이 벌어졌고,
송시열과 서인들은 그가 사론을 조장했다며
공격하자 그해 8월 파면당하였다.
1657년 중추부첨지사
(中樞府僉知事)로 임명
되어 복직하였다.
1657년 겨울에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바로 공조 참의를 거쳐 다시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었으나, 자신과 같은
남인(南人)인 학자 정개청(鄭介淸)을 모신
서원을 철폐하려는 서인(西人) 송시열과 논쟁.
이어 송준길(宋浚吉)이 정개청의 일을 비난하자
서인들의 계속된 상소로 정개청의 사당은 훼철되었다.
정개청의 사당을 헐게 되자, 윤선도는 또 상소하여
정개청 사당 훼철의 부당함을 극진히 변명하였다.
동시에 송시열과 송준길이 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현을 모독한다고 규탄하였다.
1658년 3월 다시 공조참의(工曺參議)에
특별히 임명되어 복직하였다. 이는 효종이
자신의 왕자시절 사부에 대한 배려였다. 그런데
이때 윤선도는 정개청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은 사직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4월 대간과 사헌부에서 일어나 그를 탄핵.
자리를 교체시켜 세자시강원에서
왕세자 현종의 사부가 되어
현종을 가르쳤다.
그러나.
사간원과 사헌부는 계속 탄핵
그해 12월 삭탈관직당하고 다시
고향인 경기도 양주로 되돌아갔다.
1659년(효종 10) 5월 4일 효종이 죽자
그해 5월 말 총호사 심지원이 자신을
수행할 사람으로 이원진과 윤선도 추천.
바로 첨지(僉知)에 제수되었다가,
심지원의 건의로 특별히 효종의 능지를
살필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특별히
부호군에 임명되어 상경했다. 이후 효종의 장지(葬地)를
선발하는 명을 받고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다.
장지를 보러 다니던 중 윤선도는
길지를 택해 경기도 여주(驪州)의
홍제동(弘濟洞)과 수원(水原)을
능지에 적합한 길지로 정했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현종은 그가 선정한 능지
후보지 중 하나 수원을 채택.
서인들은 그가 정한 묘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며 집단 반발,
1659년 7월 서인계 언관들이 그를 공격했다.
수원 능지 선정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내의
건좌(乾坐) 언덕이 효종의 능침으로 채택되면서 그는
서인 언관들의 공격으로 파직되고 추고되었다.
이후 산릉(山陵)문제와 함께
조대비 복제(趙大妃服制)문제 대두.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 항쟁했다.
그러나,
산릉간심관으로 제대로
능지를 보려 하지 않았다는
서인계 언관들의 공세에 시달림.
1659년 8월 서인들의
거듭된 공격으로 파직.
1660년 복직하여., 호군.
이때 그는 복제 문제를 걸고 넘여진다.
효종이 죽자 송시열과 송준길,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들은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제는 차자로서, 적장자
이외에는 모두 서자로 본다는 주자가례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
그러나 윤선도는 효종이 인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어떻게 차남이나 서자로 격하하려는 수작을 부리느냐 항의.
그는 일찍이 송시열을 "시열은 도리어 문과수비
(허물을 감추고 뉘우치지 않음)하려는 꾀가 있어서
예경(禮經)의 글자들을 주워 모아 자기의 뜻에 맞게 부회하니
그 사설이 번거롭기만 합니다."라고 평한 바 있었다.
1660년 윤선도는 상소를 올려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예로써 3년 상복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효종은 가계상 차남이 맞으므로 장남 이외의 자식들은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인측에서 어머니.
(계모도 어머니로 간주한다.)를 신하로 삼는 예가
어디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해온다.
이 과정에서 윤선도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다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몰고 온다. 종통과 왕통이 따로
있을 수 있느냐는 이론을 제기,
이는 종통과 왕통을
분리한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고가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는 남인의 우두머리로서 3년 설을 주장하다가
기년 설을 주장하는 서인에게 꺾이게 된다.
서인들은 그가 같은 효종과 현종의 사부였으나
송시열에 밀려서 빛을 보지 못한 점을 근거로 들어
그가 송시열을 질투, 투기하는 것으로 몰아 비방하였다.
서인으로부터 송시열을 질투, 투기하는
편협한 인간으로 비난을 받자 감정이 상한 그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이후 그는 허목(許穆), 윤휴와 함께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임금으로 취급한다며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송시열이 역심을
품고 있다며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했다.
상소문 사건.
1660년 4월 호군이 되었다.
곧 윤선도는 허목을 변호하면서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분리하려
한다며 사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 |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와 사직을 관장하는 임금(효종)에게 돌려보내고 적통(嫡通)은 기왕에 죽은 장자(소현세자)에게 돌려보내니 종통과 적통을 어찌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명령(父詔)과 왕명을 받았어도 정통이라고 하지 못한다면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가짜 황제란 말입니까? 고공(古公)이 비록 계력을 세웠더라도 고공의 정통은 오히려 태백(太伯)의 자손에게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다면 국인(國人)이 뜻을 바르게 정하지 못할 것이요, 나아가 계력의 자손들을 어떻게 보존하자는 말입니까?" | ” |
윤선도는 기년복 주장의 논리상의 오류를 지적하며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세력이 복상 문제를 기회로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몰아 제거하려 했다.
즉, 이종비주(二宗卑主, 종통과 적통을 분리해
임금을 비하시킴)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처형 주장은
서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윤선도의 상소를 보고
서인들은 비로소 예송을 거듭 제기하는
남인들의 속뜻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즉 선례에 따라
예를 바로잡자는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송시열을 죽이자는 것이요,
나아가 서인 정권을 타도하자는
정치 공세인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송시열을 비난하며 갈라섰던
서인들이 일제히 단합해 윤선도를 공격.
윤선도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효종에게 소현세자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했고, 윤휴 등은 이에 동조했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은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그를 반좌율를 물어
극형에 처해야 된다는
서인 성균관 유생들과
선비들의 상소가 연이었다.
송시열을 죽이려다가
집권당인 서인들의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된 윤선도는 오히려
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서인은 부제학 유계는
상소를 불사르자고 청하고
서인이 장악한 삼사 등에서는
윤선도를 혹은 국문하자 하고
혹은 죽이자고 하였다.
집권 서인과 삼사의 공격을
한몸에 받는 윤선도는 죽음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윤선도를
구명하고 나선
인물은 우윤 권시.
그는 상소를 올려
윤선도를 옹호했다.
“ | 자의대비마마의 복제가 3년이 맞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송시열, 송준길 등이 이를 잘못 해석한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온 세상이 이것이 잘못임을 알지만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윤선도가 말한 것입니다. 다만 선도의 말이 간악하나 그 감언한 용기는 취할 만한 점이고 또 선왕의 사부이니 경솔하게 죽일 수는 없습니다. | ” |
그러나 이번에는 삼사가
일제히 나서서 권시를 공격했다.
권시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고 말았다.
이때 서인 유계(兪棨)가
그가 올린 상소를 불태워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의 상소를 불태워 버렸다.
1차 예송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받고 부호군으로 체임되었다가,
1660년 6월 함경남도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윤선도의 논리가
송시열 등의 서인들에 대한
모함이라는 탄핵에 의해 윤선도는
귀양 조치되고, 현종은 더 이상 예론을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함으로써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
남인들은 승복하지 않았고, 윤휴 등은 반발했다.
1차 예송 논쟁의 후폭풍
윤선도를 옹호했던 권시가 파직되자,
윤선거의 형이자 송시열의 사돈인
윤문거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교리 이익(李翊)
등이 송시열을 떠나게 되었고,
재야 사림들도 허목과 윤휴 쪽으로
여론이 많이 기울어졌다.
여기에 삼조의 노신이요
판중추를 지낸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하고 그의 상소를
태워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가세했다.
조경의 상소는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다.
송시열과 이유태, 그리고 부제학 유계 등은
조경을 공격했으나, 영상 정태화와 좌상 심지원(沈之源),
그리고 대사간 조수익(趙壽益) 등은 조경을 옹호했다.
조경은 관직을 내놓고 재야에 물러나 있었는데
반대파들은 그를 삭직해서 내쫓자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두 물러나겠다고 강경대응.
송시열은 조경을 삭탈관직하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겠다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남인 유생들의
윤선도 구명 운동이 계속 일어나
조정에서 끝난 예송 논쟁은 지방
유생들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결국 허목이 송시열을
탄핵하는 것으로 사태가 확산.
결국 이러한 1차 예송 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석견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663년 3월과 4월 남인계 유생들이
윤선도의 무고함과 윤선도가 고령임을
들어 석방을 탄원했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
송시열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가
서인들은 윤선도가 송시열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여, 그가 어진 이를
모함한다며 심하게 공격하였으며
역으로 윤선도 사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서인들의 계속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효종과 현종의 왕자, 세자 시절 사부의
한사람이었으므로 사형은 모면하였다.
윤선도의 상소는 현종을
고무하기보다는 분노케했다.
가짜 세자, 가짜 황제 운운은 비록
윤선도가 효종, 현종을 옹호하는 뜻으로
말했다 해도 신하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심한 말.
이미 자신이이 즉위한 시점에서
자신의 정통성 시비를 용인해서
이득이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로 상하를 헐뜯었으니 마땅히 사형시킬 것이로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전리로 돌아가게 하라 | ” |
윤선도가 효종, 현종의
사부가 아니었더라면
꿈짝없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윤선도는 귀향조치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선도에 대한 서인의
집요한 공격에 분개한 허목이
다시 송시열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싸움은 격화.
서인들은 윤선도를 귀향시키는데 그친
현종의 처분이 너무 약하다 하여 연일 상소.
이에 따라 왕은 "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보내라"
하교를 다시
내리게 되었다.
1660년 4월
명이 바뀌어
함경도(咸鏡道)
삼수군(三水郡)에
유배령을 받고 출발,
그해 6월에 삼수에 도착.
그해 겨울에 <예설 禮說> 2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혀 놓았다. 여기서
그는 장자가 죽고 차자가 왕위를 계승했으면
장자로 보는 예설의 근거 조목을 찾아서 정리, 저술.
유배 생활
그의 장남 윤인미(尹仁美)는
또한 학식이 많기로 알려져
명성이 있었다.
윤선도가 삼수에 유배중일 때
장남 윤인미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서인들에 의해 아버지 윤선도에 연좌되어
관직임용에서 배척당한다. 이후 윤인미는
금고형을 선고받아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고
13년간 금고생활하다가 윤선도가 죽고 3년 뒤인
1674년(현종 15년)에 죽으니, 1677년(숙종 3년)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추증된다.
노구의 윤선도가 막상 유배를 가게 되자
이번에는 그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다.
심지어 송시열과 같이 기년설을 옹호했던
송준길도 윤선도의 처벌에 반대할 정도였다.
1661년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흉년이 일어났다.
4월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이때 삼수도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그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흉년이 계속되자
현종은 구언(求言)을 하였고,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이 상소를 올려 윤선도를 동정하며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이어 송준길이 그의 유배지를 좀더 나은 곳으로
옮겨줄 것을 청하여 윤선도를 삼수(三水)보다
풍토가 나은 북청(北靑)으로 이배하도록 하였으나,
뒤이어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한
소를 올렸다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선도가 무슨 죄입니까?
선도의 죄는 종통 적통을 말한 것이니,
효종을 위하여 좌단한 것입니다.
선도가 소를 드리던 날에 누가 전하에게
소를 태우자는 계책을 내었습니까?
고려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워 버렸고
전번에 광해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는데,
국사와 야사에 쓰기를 만약 "아무 조정 아무 때에
윤선도의 '예를 논한 소'를 불태웠다." 한다면
성조(聖朝)의 누(累)가 됨이 어떻겠습니까?"
조경은 윤선도를 옹호하며
흉작지에 유배된 윤선도를 구명하였으나
서인의 탄핵상소가 빗발쳤고, 현종은 분노하여
조경(趙絅)을 삭탈관작하였다. 이어 1660년 겨울,
윤선도가 유배지 삼수에서 지은
<예설 禮說>이 문제가 되어 다시
서인 삼사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5월 15일에는 북청 이배의 명이 취소되고
6월 13일에는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추가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이 추가되었다. 이듬해인
1662년 3월 28일 위리안치를 철거하였다.
석방 운동
이후 남인계 유생과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흉작지에 유배된 것과 윤선도가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을 들어 선처호소 탄원서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
현종은 윤선도를 옹호하는
주장에 엄히 대처하였으나,
남인계 유생과 선비들이
상소는 계속되었다.
서인에서는 그를 죽여야 된다며 계속 상소를 올렸고,
이에 반감을 품게 된 허목은 도리어 송시열이 예를 그르쳐서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니 사형시켜야 된다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시문을 지으며
소일하였다. 한편 오지의 학동,
청년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고,
자발적으로 그의 문하에 찾아와서
배우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는 수시로 가족에게 서신을 보냈다.
유배 중이던 윤선도는 과거에 낙방한
아들에게 “부지런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하늘이 돕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려면 선행을 쌓고
어짊을 베풀어 복을 받는 수밖에 없다” 다독인다.
유배지에서 보낸 또다른 편지에서
그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
근검절약할 것을 권한다.
"나는 50세가 넘어서야 명주옷이나 모시옷을 처음 입었는데,
시골 있을 때 네가 명주옷을 입은 것을 보고 몹시 불쾌했었다.
이런 복식(服飾)은 가까이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여라."
고산 윤선도는 함경도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기대아서(寄大兒書)'에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뜻은 가풍으로 이어졌다.
허목과 윤휴가 계속
그의 석방을 청하는 탄원서와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당했다.
1663년 홍문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또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주장을 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나,
현종은 이를 거절. 1663년 4월 홍우원은
다시 윤선도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현종은
도리어 홍우원을 금고형에 처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시문을 짓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명사들과 시문으로 소일.
그런데 그가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염려한 용주 조경(龍洲趙絅)은 1664년초 그를 염려하며
자숙하라는 편지 서신을 보낸다. 이에 그해 9월 윤선도는 조경에게
자신의 음악론을 피력한 <답조용주별폭 答趙龍洲別幅>을 보냈다.
한편 윤휴와 허목은 계속해서
윤선도를 석방할 것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계속 조정에 올렸다.
1665년 다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를 옮겨 전남 광양(光陽)으로 이배.
1665년 1월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2월에는 혜성이 나타나자 현종은 자신을
책망하며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이때, 그해
2월 21일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구언에 따라
상소를 올려 윤선도의 방환을 탄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허목과 윤휴 등 남인에서는 계속 윤선도 구명 상소를 올렸다.
2월 27일에 다시 재앙으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윤선도를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의 명이 내려졌다. 윤선도는 4월에 삼수를 출발,
6월에 전남 광양에 도착하여 백운산(白雲山) 아래
옥룡동(玉龍洞)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광양도 흉년으로 피해를 입었고,
허목의 표현에 의하면 '남쪽 바다끝 바닷가로
풍토가 심히 나빠서 난환(難換)과 기괴한 병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9명은 죽었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었다.' 한다.
1667년 초 현종은
그가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한 것을 생각하여 풀어주려고
대신들을 모아 의견을 묻자,
모두 석방하라 하였으나
의정부 영의정 홍명하(洪命夏)만
안된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곧 윤선도의
석방이 결정되었다.
1641년 55세에 <금쇄동기 金鎖洞記>를 지었다.
1642년 56세에는 시조 <만흥 漫興> 6수, <조무요 朝霧謠> 1수,
<하우요 夏雨謠> 2수, <일모요 日暮謠> 1수, <야심요 夜深謠> 1수,
<기세탄 饑歲歎> 1수, <오우가 五友歌> 6수 등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1645년 59세에 시조 <추야조 秋夜操> 1수,
<춘효음 春曉吟> 1수 등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그 밖에 <고금영 古琴詠> 1수, <증반금 贈伴琴> 1수,
<초연곡 初筵曲> 2수, <파연곡 罷宴曲> 2수
등의 시조를 지었다.
1651년(효종 2) 가을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1652년 66세 5월에는
고산(孤山)에 머무르면서
시조 <몽천요삼장 夢天謠三章>을 지었다.
1664년 78세에는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을 염려한
용주(龍洲) 조경(趙絅)에게
자신의 음악론을 피력한
<답조용주별폭 答趙龍洲別幅>을
답신으로 지어 보냈다.
1667년 6월 8일(음력 윤4월 17일)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윤선도의 석방을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음력 5월 11일)
유학 이석복(李碩馥) 등이 윤선도의 사면, 석방을 상하였다.
고민하던 현종은
그해 9월 8일(음력 7월 21일)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8월에 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9월에는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였다.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었던
그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 같은 성깔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평도 있다.
1667년(현종 9년)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자연 속에 묻혀서 시를 읊으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만년에는 이해창(李海昌),
조경, 허목, 윤휴, 홍무적, 홍우원, 하홍도, 권해,
이서우, 정길보, 나위소 등과 교유하였고,
그밖에 당색이 다른 인물로는
백강 이경여, 윤선거, 윤문거,
윤원거 등과 교유하였다.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이서우는
후대에 남인의 학문과 시맥(詩脈)을
후대에 전하였다.
온갖 억측과 비판이 계속되었지만
미수 허목 등 소수의 친구들은
그와 계속 교류하였고, 허목은
그를 '경외하는 외우',
'이 시대의 의인'이라며
그를 칭송하였다.
그의 첩 경주설씨는
고산이 진도에 머무를 때
얻은 부인으로, 고산은 이곳에서
간척사업을 하였는데 이곳
토착민의 부인이었다 한다.
경주설씨는 고산이 보길도에서
생활할 때 함께 지냈다고 하며
그곳의 후손들이 경주설씨와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년에 그는 매일 아침마다
두륜산정에 올라 오심재
약수터를 찾기도 했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 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해남군 현산면 문소동과
해남군 삼산면의 경계 지점)에 안장.
그는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냈으며,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를 지었다.
그의 작품은 《고산 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 1675년(숙종 1년) 남인이 집권하자
죄가 풀려 신원되고,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과 시문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夢天謠) 5수,
<우후요>(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1672년 12월 현종은 특명을 내려
선왕과 자신의 스승이던 그의 직위와
작첩을 되돌려주라 명하였다.
그의 사후 효종비 인선대비 장씨가
1674년 1월에 사망하면서 자의대비가
다시 효종비 장씨의 상복을 입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윤휴, 허목 등의 1년설이 채택되어
제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
집권하면서 그도 복권된다.
묘갈명과 신도비문은
1681년 미수 허목(許穆)이
찬하였다.
그의 아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장남 윤인미(尹仁美)는 그가 삼수에서
귀양살 때 급제하였으나, 금고형 13년형을
선고받고 그가 죽은지 4년 뒤
1674년(현종 15년)에 병사했다.
1675년 1월 그에게 가해진
유벌을 풀어주기를 청하는
윤휴의 상소로 유벌이 풀렸다.
금고된 아들 윤인미는 1677년(숙종 3년)
증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이 추증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 이후 다시 그의 후손들에게도
금고령이 내려졌으나 영조 때 특별히 해금되었다.
4대손 윤덕희(尹德熙)는 화공으로 출사하여
삼성진전(三聖眞殿) 모사중수도감(摸寫重修都監)을
중수할 때 감독으로 참여한 공로로
정릉현감이 되어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추증과 추탈
이어 1675년(숙종 1년) 2월 제1차 예송 논쟁으로
송시열, 송준길 등에 맞서다가 피해를 입은
남인 관료들을 복권시킬 때 허목, 윤휴의 건의로
그해 8월 2일 증(贈) 자헌대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때 허목과 윤휴는 여러번 그가
예를 바로잡는데 기여하였으므로 마땅히
의정(議政)으로 추증하고 작위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의정부영의정 허적(許積)은
옳지 않다하여 결국 1671년 1월 증직은
이조판서로 정해졌다.
1676년 2월 28일 이조참판 이무가
다시 윤선도에게 삼공을
증직할 것을 청하였다.
1678년 9월 영의정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金德遠)의 상주로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 당하였다.
그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복권되었다.
1701년(숙종 27년) 무고의 옥으로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정조 때인
1795년(정조 19년) 10월 정조(正祖)의
특명으로 다시 복권되었다.
그의 증손 공재 윤두서의 외손이
다산 정약용으로, 정약용은 정조 때의
남인 문신이자 500권 저서를 남긴 학자였다.
1725년(영조 3)
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
(영구히 제사지냄)의 명을 받았다.
그 뒤 추탈되었다가 1727년(영조 5년)
다시 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 회복.
묘비문은 허목이 썼고, 신도비는 허목이 쓴
신도비와 문인 이서우가 쓴 신도비가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학계에서
그의 문학 작품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
1970년대 한글번역, 교과서와 각종 문학작품에 인용.
2001년 5월 고산 윤선도 문학대상이 제정되었다.
2006년 전라남도청 대강당 1층 '윤선도 홀'이라 이름.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또한
거침없는 발언과 형식,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
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 짓기가 뛰어나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 3대
시가인(三大詩歌人)으로 불린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덕일은
자연을 소재로 한 것 보다는
현실 정치에서의 우울함을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한다.
미수 허목은 그의 원칙론과
강경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허목은 경신환국 직후 쓴 신도비문에서
"준정(峻正)하여 인의(仁義)를 많이 쌓아
널리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사곡한 예와 변변치 못한 은혜로
명예를 바라거나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아서 환난궁액(患難窮액)에 한결같고
바른 도리 때문에 배척을 당해
죄수명부에 있은 지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 만큼 정당하여
비록 아홉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의를 봄이 밝고 죽음으로서 지켜서
바꾸지 않는 이가 아니고서야 능히
이같이 하였겠는가!" 라며 평가했다.
남파 홍우원(洪宇遠)은
"앞사람을 이어받지 않고
새로운 경지를 세웠다.
(不襲踏前人 創立新意)"
라고 평하여 창의성을
높이 샀다.
또 고산선생의 한시에 대해서도
'검옹지림(黔翁志林)'에서
"고산 윤선도의 시는
옛 사람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틀을 잡아 마음대로 짓고,
뛰어나서 남들이 높이고
두려워 하게 했다.
(尹孤山善道詩 不依古人 自出機?
放恣卓詭 有使人可敬而畏者)라고 평.
영조때의 가객(歌客)인 김수장(金壽長)님은
『해동가요(海東歌謠)』에서 "이분(고산)의 노래는
때묻지 않아 맑고 높으므로 우리로서는 올라갈 수 없는 만장봉이다.
(然此翁歌法 脫垢淸高
吾觀之此 則難登萬丈之峯)"
라고 시격(詩格)을 칭송하고
'고산어부사발문'을 찬하였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정송강(鄭松江)과 국문학(國文學)'이란 글에서
"고산은 대개 담아의 일경으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에 배합되는데 좋다. 고산의
'어부사시사'에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우유(優遊)하는 심경을
흔적없이 나타냈고,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래 맑게 난다"
같은 것은 호남 산수간의 야경(夜景)을
귀신같이 그려 놓았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
조윤제(趙潤濟)는
《한국시가사강
(韓國時歌史綱)》에서
"고산은 다른 작가에 특출하여
실로 시가로 인하여 조선어의 미를 발견하고,
그를 그의 시가상에 직접 시험하여 보았다."고
평하여 고산선생이 시조문학의 대가임을 극찬.
또, 《한국문학사》의 '고산조'에서도
"시조문학역사 수백년에 드디어 우리는
위대한 시조인을 얻었다. 그는 즉 고산이다.
.... 그의 시가는 단순한 감흥의 표현이 아니고
자연과 완전 배합되며 또 자기자신의 현현으로서 나왔다.
이것이 고산의 위대한 점이다...... 고산의 자연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약동하는 생명이다.
고산의 시조는 자연의 소리요,
자연미의 율동이다.
고산은 자연시인으로 시조의 절묘를 얻어
시조문학의 진가를 최고로 발휘하였다.
고래로 시조작가가 수없이 많아
간혹 특출한 절품이
전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작품을 통판할 때 고산만큼
대성한 이는 일찍이 없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산은 확실히 시조에 있어
최고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사엽(金思燁)은 《국문학사(國文學史)》에서
"고산으로 말미암아 조선어의 미가 발견되었고,
조선어를 예술적으로 순화양양했다고 본다.
송강이 이미 가사를 통하여 더없이
아름다움을 밝혀 놓았거니와
고산에 이르러 한 겹 더깊이 넓게 되고,
캐내어 그 아려함을 천명하였다.
한문이란 밀림 속에서
유교라는 정글속에서
우리말을 찾기란
그 당시에 있어서
지난하다기 보다
불가능에 가까운
공부이었을 것인데
대담하게도 이것을
시험해서 훌륭히
성공하였다.
여기에서도 단가에 있어서는
월계관을 고산옹에게 올려야 하겠다."
이재수(李在秀)는
《윤고산연구(尹孤山硏究)》
저서에서 고산이 가요의 대가라고 한다.
"평범한 시재에다
고결한 인격의 향기를 융합시켜
세련된 수법으로 그려낸 것이 그의 단가다.
그 작품은 평범하게 보이나 음미하면 할수록
의의가 심원하고, 표현과 내용이 소박하면서도
고아하고, 고전미가 있다. 고산작품의 가치는
시정보다도 표현의 미에 있다. 특히 그가 조선어를
교묘히 구사한 것은 특필하여야 된다. 과거 한학자들은
생각하는 것이 도학이요, 붓끝에 튀어나오는 것이 한문숙어인데
조선어의 중요성을 창도한 이가 전대에 이퇴계가 있었고,
후에는 김서포가 있었지만 조선어는 고산에 의하여
미가 부여되며 예술어화하였다. 이 점은 고산이
송강의 높은 시재와 대치하여 조선 가요사상에서
쌍고봉이 되는 까닭이다."라고 평한다.
시인 윤곤강(尹崑崗)도
《고산가사(孤山歌辭)》에서
고산의 작품 경향과 수법을 말하되
"그의 작품은 돈후 화이를 주지호 한 듯하며,
어느 것을 보아도 모두 유창하고 평명하다.
그의 시조는 되도록 평명한 것을 주지로 삼으면서도
사람의 간장을 파고드는 알 수 없는 박력을 갖고 있는 것은
어귀음률이 깍고 다듬어져서 순연한 예술의 경지를
나타내 주는 데 있다......고산의 시조야말로
탄이하고 소박하면서도 속되지 아니한 참으로
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가장
보통성을 가진 예술일 것이다."
라고 봤다.
박성의(朴晟義)는
《송강ㆍ노계ㆍ고산의 시가문학》에서
"과연 고산은 자연시인으로서 시조의 절묘를 얻어
시조문학의 가치를 최고도로 발휘하였으니,
시조의 나아갈 길은 고산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달한 느낌이 난다.
이런 의미에서 고산은
근세 시조문학의
제일인자이다.",
정병욱(鄭炳昱)은
〈윤고산론(尹孤山論)〉에서
"국어미(國語美) 조탁(彫琢)의
천재(天才)" 등으로 평가했다.
2017.5.24
2017.6.3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
땅끝마을 해맞이
해남 땅끝마을 가을 호박
해남 미황사
2017.5.
2016.11.03 |
2015.05.12
2017.06.27 해남 땅끝마을 오토캠핑장
갈두산 행 모노레일카
송호리해수욕장(松湖里海水浴場)은
"송지" "송호해수욕장"으로 불리웠으나,
최근 "땅끝 송호 해변"으로 명칭이 변경.
'한반도 최남단' 해남의 대표적인 해수욕장.
해남읍에서 남쪽으로 41㎞ 지점에 위치.
백사장의 길이 1.5㎞ 폭 200m 규모이며,
모래 깨끗하고 물이 맑다(평균 수온 20℃)
수심 1∼2m.,깊지 않고 해저경사 완만.
하여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
간조 시 갯벌에서 고동·소라 등 해산물 채취.
백사장 뒤에는 2백년 거목들과 수령이 다양.
640여 그루의 해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해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야영장으로 적합하다.
면적 16,474㎡, 길이 394m로 이어져 있는
해송숲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
해수욕장 내 오토캠핑장, 편의시설 등 조성.
숙박이 가능한 오토 캠핑카 10대를 임대 운영.
2005년 모노레일카가 건설되어 해수욕장 뒤에 위치한
갈두산(葛頭山 : 156.2m) 사자봉 정상까지 이동이 용이.
이곳에서는 보길도·어룡도·청산도·당인도 다도해.,전망대.
.
해변에서 남쪽으로 2㎞거리에 땅끝마을과 갈두항.
배편으로 1시간 거리에.,고산윤선도 유적지.,보길도.
2017.07.02 땅끝마을 가는 길
대죽리 해안., 조개잡이 체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