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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말하고 있는 사막지대(沙漠地帶) [제6편]
[朝鮮 疆土와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
2,026년 05월 30일
○ 「연행(燕行)」이란 말이 뭔가? 바로 「연경(燕京)을 가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연경(燕京)」은, 어디에 있는 어떤 도회지(都會地)를 말하는 것일까?
「연경(燕京)」 : [出處 : 서울역사박물관] : 〈연경(燕京)은 북경(北京)의 별칭(別稱)으로 중국 고대 춘추시대에 연(燕)나라가 이곳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하였으며,
「연경(燕京)」 : [出處 : 한국어 위키백과] : 〈연경(燕京)은 중국의 옛 지명이며, 춘추 전국 시대 당시 연나라의 수도였다. 명칭은 연나라의 수도가 이 지역이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계(薊)라고도 하며,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에 위치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설명(說明)하기를 : 〈춘추시대 당시 계(薊) 나라에서 건설하였으며, 연나라가 계나라를 점령하면서 연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222년에 진시황제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광양군(廣陽郡)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전한 당시에 범양(范陽)으로 개명한 뒤 어양군(漁陽郡)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후한 시대에 유주의 주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국 본토의 북쪽 경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잦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며, 후한 말기에는 황건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후한 말기에는 유주자사(幽州刺史)인 유언이 다스렸으며, 유언이 익주목(益州牧)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는 새로운 유주목(幽州牧)으로 임명된 유우가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유우와 대립하여 그를 죽인 공손찬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뒤 공손찬의 세력을 멸망시킨 원소에 의해 함락되었다. 원소의 세력이 조조에게 멸망한 이후에는 조조의 세력에 속하였으며, 이후 조위와 서진 시대에도 유주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당나라와 후진 시대에는 영주(营州)와 대주(代州)에서 군사적 ·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안사의 난을 일으킨 안녹산이 근거지로 삼았다. 요나라 시대에 남경(南京)으로 개명하였으며, 요나라의 남쪽 수도가 되었다. 금나라 시대에 이름을 중도로 고쳤으며, 금나라의 중앙 수도로 결정되었다. 원나라에 점령된 이후에는 연경으로 회귀하였으며, 북쪽 자리에 대도가 세워진 이후에는 이 명칭으로 불렸다. 명나라 시대에 북경(北京)으로 개명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이름을 유지하였다. [出處 : 한국어 위키백과]〉라고 아주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해 주고 있다.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은, 「AD 1,937년(年) 북평(北平)을 북경(北京)으로 고쳤다(改稱)」라는 “1,937년(年)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사(記事)”의 이미지를 검색(檢索) 중에 본 기억(記憶)이 난다. 이건 또 뭔가?
➥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은, 정말로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결과적(結果的), 결정적(決定的)인 말이지만 : 「무슨 얼어 죽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래에서 그 자세(仔細)한 기록(記錄)을 설명(說明)하겠지만 :
• 「청(淸)의 연경(燕京)」은,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 황막(荒邈)한 사막(沙漠)에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廣野)한 가운데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주위에 빙 둘러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하여 놓고, 궁궐(宮闕)이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북경(北京)”과는 전혀 다른 땅에 있었던 ‘연경(燕京)’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문제(問題)다. 연경(燕京)을 직접(直接) 도보(徒步)로, 때로는 거마(車馬)를 타고 다녀온 분들의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청(淸) 연경(燕京)” 당시(當時)의 모습을 생생(生生)하게, 묘사(描寫)하고 있다. 이것을 누가 “No”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라고 자신(自信) 있게 말할 수 있는 자(者)는 없다.
• “연경(燕京)”을 가던 조선사신(朝鮮使臣)들의 말에 따르면 : ‘연경(燕京)에 이르는 여정(旅程)은, 대부분(大部分)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과(通過)하는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 「오늘날의 북경(北京)은, “짝퉁 연경(燕京)”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연행록(燕行錄)은, 대부분(大部分)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첨삭(添削)을 거친 것이지만 : 전체(全體)를 모두 없앨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지형지세(地形地勢) 등(等)은 그대로 남아있고, 여정(旅程)이나 거리(距離), 지명(地名) 등(等)은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흔적(痕迹)이 역력(歷歷)하게 남아있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만을 보아도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있을 수 없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왕조(王朝)”였음이 명백(明白)하다.」
➥ 이렇게 생생(生生)하게 살아있는 기록(記錄)을 외면(外面), 철저(徹底)하게 배제(排除)하고 있는 ‘반도(半島) 사학계(史學界)’는, 때가 되면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 “연행록(燕行錄) 전체(全體)를 하나하나 따지고 들 수 없어, 필자(筆者)가 고른 몇 종류(種類)의 것만을, 대상(對象)으로 한 것이므로 그 일부(一部)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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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薊山紀程 1권 / 出城, 계해년(AD 1,803, 純祖 3) 10월 24일(을유)
《二十四日 乙酉 : 晴。金川七十里金陵館宿。京便上家書 : 맑음. 금천(金川) 70리를 가서 금릉관(金陵館)에서 묵었다. 서울 가는 인편에 가서를 올렸다. 早發午正門 : 일찍 오정문을 떠남. 行色劇忙。善竹橋,崧陽書院。皆未及就見。: 여행 일정이 매우 바빠서 선죽교(善竹橋)와 숭양서원(崧陽書院)은 모두 가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朝日嚴裝聽僕奴。聯翩行發舊王都。崇賢洞立旌閭碣。禁釀村無滌器墟。: 아침 해 돋자 단단히 채비하고 하인들 하자는 대로, 줄줄이 잇대어서 옛 왕도를 떠난다. 숭현동엔 표창하는 비석 서 있고, 금양촌엔 그릇 씻던 자리가 없다. 遠客肝腸剛似鐵。寒程洟唾凍成珠。關心萬里三冬節。沙漠風霜向北胡。: 먼 길 가는 손의 간장 굳기가 쇠 같구나. 찬 길에 뱉는 침이 얼어서 구슬된다. 마음이 쓰이누나 만리 길이 삼동(三冬)이라, 사막(沙漠)의 풍상(風霜) 겪으며 북쪽 오랑캐(北胡)를 향해 가네》
➥ 「사막(沙漠)의 풍상(風霜)」이란 말은, 「바람과 서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자연환경(自然環境)에서의 어려움과 고생(苦生)할 것을 비유(比喩)한 것이다.」 곧 일반적(一般的)인 환경(環境)이 아닌 “사막(沙漠)”이라는 특이지형대(特異地形帶)를 말해주고 있다.
(20 -1) 薊山紀程 제1권 출성(出城) 계해년(1,803, 순조 3) 11월 12일(계묘)
《晴。義州五十里所串站午餐。又三十里龍灣館宿。: 맑음. 의주(義州) 50리를 가서 소관참(所串站)에서 점심을 먹고 또 30리를 가서 龍灣館에 묵었다. 箭門營 : 行未至灣府十里。登箭門西望。則鴨江外山勢雄特。塞漠之氣。可通呼吸。山名金石也。: 전문영(箭門營) : 만부(灣府)에 닿기 전 10리 지점에서 전문(箭門)에 올라가 서(西)쪽을 바라보니 압록강(鴨綠江) 밖의 산세(山勢)가 유달리 웅장하고 쓸쓸한 기운이 호흡에까지 통할 정도다. 산 이름은 금석(金石)이었다.》
《渡 過 尾 溪 口, 行 上 箭 門 顚, 地 盡 朝 鮮 國, 山 雄 大 漠 天 : 미계(尾溪)의 건널목을 지나서, 전문(箭門) 마루에 올라가니, 조선(朝鮮) 나라 땅은 다 끝나고, 사막(沙漠)의 하늘 산(山)이 웅장하다. 鄕 音 如 夢 裡, 客 意 忽 風 前, 快 馬 長 驅 去, 程 道 又 幾 千 : 고향 소식 꿈속 같은데, 나그네 기분 바람 앞에 선 듯 하 이, 빠른 말을 멀리 몰고 가지만, 앞길은 또 몇천 리(里)인고.》라고 하였으니… …,
➥ 위의 내용(內容)은, 「용만(龍彎) 10리(里) 전(前)에 “전문령(箭門嶺)”에 올라 서(西)쪽을 바라보니, 조선국(朝鮮國)의 땅은 다하고, 큰 사막(大漠)의 하늘(天) 산(山)이 웅장(雄壯)하다」라고 하였다.
즉(卽), 용만(龍彎)에서 서(西)쪽으로 압록강(鴨綠江) 외(外)로는 큰 사막지대(大漠)가 펼쳐져 있어, 그 하늘과 산(山)이 웅장(雄壯)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는 북(北)쪽을 향해 압록강(鴨綠江)이 있고, 압록강(鴨綠江) 북안(北岸) 땅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원문(原文)은 서(西)쪽을 바라보니… …하였다.」
(20 -2) 계산기정 제1권 / 만도(灣渡) ○ 계해년(1803, 순조 3) 11월 26일(정사) : 맑음. 책문(柵門) 밖 32리 지점에서 점심을 먹고 책문 안 기하(旗下) 악성(鄂姓)을 가진 민가에서 묵었다. 의주목을 통해서 가서를 받고, 입책 장계(入柵狀啓) 편에 글을 올렸다. : 王八石野 : 自魚龍堆以往。山益高水益駛。頓無沙漠氣 ; 어룡퇴(魚龍堆)부터는 산이 더욱 높아지고 물이 더욱 빨리 흘러 조금도 사막(沙漠) 같은 느낌이 없었다.
➥ “큰 사막지대(大漠)를 통과(通過)하고 있음에도”, 「어룡퇴(魚龍堆)부터는 산(山)이 높아지고, 물도 빨리 흘러가는 것을 보니 사막(沙漠)처럼 보이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20 -3) 薊山紀程 2권 / 도만(渡灣), 계해년(癸亥年 : 1,803, 純祖 3) 12월 10일(辛未)
《晴。北鎭庙三十里午餐。廣寧店二十里宿。맑음. 북진묘(北鎭廟)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광녕점(廣寧店) 20리를 가서 묵었다. 毉巫閭山 : 巫閭見於周官職方。舜分冀州東北爲幽州。此山爲州鎭。舜所封十有二山之一也。山勢東迤西走。東而爲我國長白山。西而爲山關鎭隘。連亘二千餘里。登北鎭庙。可攬其全體矣。: 의무려산(醫巫閭山) : 무려(巫閭)는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보인다. 순(舜)이 기주(冀州)의 동북쪽을 갈라서 유주(幽州)로 만들었는데 이 산이 그 주의 진산으로, 순이 봉한 열두 군데 산 가운데 하나다. 산세는 동(東)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서(西)쪽으로 달려갔다. 동(東)쪽으로 가서는 우리나라의 장백산(長白山)이 되었고 서(西)쪽으로 가서는 산해관(山海關)의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다. ‘2,000’리(里)에 연달아 뻗어 있는데, 북진묘(北鎭廟)에 올라가면 그 전체를 볼 수 있다.
• 一脈祖長白 : 한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의 조종(朝宗)이 되고,
• 千里鎭沙漠 : 천리(千里)에 걸쳐 사막(沙漠)을 누르고 있다. ∼以下 中略∼
➤ 의무려산(醫巫閭山)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醫巫閭山,又稱醫巫山、無慮山、閭山等,中國遼寧省西部主要山脈之一,為陰山余脈,位於錦州北鎮市和義縣交界處,古稱於微閭山或醫無慮山,傳說帝舜封天下分為十二個州,每州以一座山作為鎮山,醫巫閭山被封為幽州的鎮山。周時又封為五大鎮山之北鎮。西漢時於該山東側置無慮縣,為遼東郡西部都尉治所。醫巫閭山東北-西南走向,長45公里,寬14公里,山區總面積630平方公里(㎢),主峰望海峰,海拔866米》
➥ 《山勢東迤西走。東而爲我國長白山。西而爲山關鎭隘。連亘二千餘里。登北鎭庙。: 산세는 동(東)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서(西)쪽으로 달려갔다. 동(東)쪽으로 가서는 우리나라의 장백산(長白山)이 되었고 서(西)쪽으로 가서는 산해관(山海關)의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다. ‘2,000’리(里)에 연달아 뻗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
• 이게 얼마나 코믹한 이야긴가 하면 : 「성과급(成果給)으로 ‘5∼6억 원’을 달라며, 그것을 제도적(制度的) 장치(裝置)로 만들어 달라. 그렇지 않으면 공장을 파업(罷業)시켜 수십(數十)조 손실(損失)을 입히겠다」라는 협박(脅迫)에도 ‘정당(正當)한 투쟁(鬪爭)’이 되어버린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대한민국(大韓民國)이 : 21세기(世紀) 과학(科學) 문명(文明)이 최고(最高)로 발달(發達)하고, 경제적(經濟的) 번영(繁榮)한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에… …,
•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은,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 동북면(東北面)에서 서남면(西南面)으로 약 200 여리(餘里)에 뻗쳐 있으며, 그 면적(面積)은 겨우 640㎢에 지나지 않는 산(山)이다. 또 그 뒤에 초원(草原), 산림(山林)은 있어도,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애당초 존재(存在)하지 않는 곳이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그러나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길게 뻗어있어(連亘), 무려(無慮) 2,000리(里)에 달한다.”」라고 하였으니, “일만(一萬) 리(里) 서(西)쪽의 산(山) 이름을 도용(盜用)하여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즉(卽), 「그 산세(山勢)가 동서(東西)로 2,000리(里)에 걸쳐 뻗어 있다」라고 하였다. 「200 여리(餘里)와 2,000리(里)를 분간(分揀)하지 못하는 자(者)들이 바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다. “곧 200리(里)와 2,000리(里)의 차이(差異)도 모른다?” 답답한 이야기다.
☛ 할 말을 잊게 하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건 팩트(Fact)요, 현실(現實)임을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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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연도기행(燕途紀行) 上, 일록서(日錄序), 일록서(日錄序) :
➥ 특히 「연도기행(燕途紀行)」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강토(疆土)가 반도(半島) 땅일 수 없는 확실(確實)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라고 볼 수 있다.」 연도기행(燕途紀行)의 저자(著者)는,
【《저자(著者) 송계(松溪)는, 곧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으로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이며, 바로 효종(孝宗)의 동생이다.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이며, 송계(松溪)는 그의 호이다.」 1,630년 인조 8년에 인평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해서 부왕(父王)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했으며, 1,640년에는 인질(人質)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년부터는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평생에 압록강(鴨綠江)을 열두 번이나 건넜다고 저자가 술회한 것은, 이처럼 여러 차례 청나라에 갔다 왔기 때문이다. 이 ‘연도기행’은, 저자의 그 많은 연행(燕行) 중에서 1,656년 병신년, 즉 효종 7년에 역시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을 때의 기록이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연도기행(燕途紀行) 해제(解題)】》】
• “강단학계(講壇學界)의 분발(奮發)을 촉구(促求)하는 바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을 넘어, 연구(硏究)에 매진(邁進)하시라는 이야기다.”
《일록서(日錄序) : 粤惟丁丑之兵。邦運不幸。乘輿去邠。江都淪沒。萬姓魚肉。: 생각하면, 정축년【1,637, 仁祖 15】병란(兵亂) 때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해서 임금이 수레를 타고 도성을 떠났으며, 강도(江都)까지 함락되어, 모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于是時也。余奉今上。久在虜陣。宗社安危。間不容髮。: 이때에 나는 금상(今上)을 모시고 오랫동안 오랑캐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종묘사직의 안위(安危)는 숨 쉴 사이도 없이 다급했었다. 及夫南漢議和。靑丘賴安。而今上曁昭顯世子。竟未免沙磧之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今上)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淸)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余獨扈駕還都。北望遼山。只切飮泣之情。: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산(遼山)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 歲庚辰。替質遼陽。年甫弱冠。去國悲懷。瀋水俱深。: 경진년【1,640, 仁祖 18】에 볼모를 바꾸게 되어 요양(遼陽)으로 가니, 이때 내 나이 겨우 20세라, 나라를 떠난 슬픈 회포가 심양강(瀋陽江) 물과 함께 깊었다. (中略).
自庚徂丙。北渡鴨水。十有一矣。廿年征役。縱緣北使催迫。間有自朝廷命送。瀝血陳懇。敷奏情悃。: 경진년(1,640, 仁祖 18)부터 병신년(1,656, 孝宗 7)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것이 열한 번이나 된다. 20년 동안의 정역(征役)이 비록 북쪽 사신(使臣)의 재촉이 심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중간에 간혹 조정에서 명령해 보낼 적도 있어, 간곡하게 사정을 아뢰기도 했다.
庶幾盡瘁。以酬萬一。官路三千。亦嘗聊以是自慰也。끝까지 몸을 바쳐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관로(官路) 3,000리(里)도 역시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면서 갔었다. 曾前往返。適多事故。耳聞目擊。一未紀述。年代旣久。則此間情景。其誰能知。: 전번에 갔다 올 때에는 마침 사고(事故)가 많아서, 듣고 본 것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연대가 이미 오래되면, 그때의 정경(情景)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以故行邁暇隙。撥忙起懶。紀陰晴之外。又將使事本末。逐條並列。山川程途。風俗景物。率以備焉。觀者其憐之矣乎。: 그런 때문에 이번에는 바삐 가는 중에도 틈을 타서 대략 날씨와 그 밖의 일을 기록하고, 또 사신의 일의 본말(本末)을 조목마다 모두 기록하며, 산천(山川)ㆍ이정(里程)ㆍ풍속ㆍ경치까지도 대개 갖추어 쓰는 것이니, 이것을 보는 사람은 어여삐 여겨 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 《及夫南漢議和。靑丘賴安。而今上曁昭顯世子。竟未免沙磧之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今上)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淸)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하였는데… …,
《竟未免沙磧之行 : 마침내 사막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라는 말은 곧, 「당시(當時)의 청(淸)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다」라는 뜻으로 「심양(瀋陽) 곧 건주(建州)는 사막지중(沙漠之中)【사막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시(當時) 인조대왕(仁祖大王) 때의 여진족(女眞族)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 서북방(西北方) 땅에 있었다는 강력(强力)한 증거(證據)다.
➥ 경진년(1,640, 仁祖 18)부터 병신년(1,656, 孝宗 7)까지 “압록강(鴨綠江)을 11번이나 건넜다”라고 했고, 이번까지 하면 ‘12번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그 여정(旅程)은, 눈을 감고 있어도 훤하게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 그런 분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 이러한 기록(記錄)을 넘어서는 또 다른 기록(記錄)은 존재(存在)할 수 없다고 할 정도(程度)로 신뢰(信賴)할 수 있는 것이다.
“현 만주(滿洲) 땅”은 : 20세기(世紀) 초(初), 일제(日帝)의 치밀(緻密)한 계획(計畫) 아래에 이곳 땅을 철저(徹底)하게 조사(調査)한 뒤에 나온 ‘보고서(報告書)’에 의하면 : 『이때부터 이곳 땅을 “만주(滿洲)” 명명(命名)하였는데, 이곳은 지하자원(地下資源)이 매우 풍부(豐富)하고, 무인지경(無人之境), 무주공산(無主空山)이므로, 이곳의 광물자원(鑛物資源)을 취득(取得)하기 위해서는, 인력(人力)을 수급(需給)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뒤에 실제(實際) 많은 인력(人力)이 ‘하북(河北), 산동(山東), 산서(山西)’ 등지로부터 이주(移住)를 하게 되는 것이다.
☛ 실제(實際) 이들이 이주(移住)하기 전(前), 이곳 땅은 : 「무인지경(無人之境),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표현(表現)되어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기(末期) 또는 1,910년(年) 이후(以後)의 소위(所謂) 조선인(朝鮮人) 이름으로 서술(敍述)된 ➤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역사관(歷史觀)’이니 하면서 ‘이곳 땅’에 대한 역사(歷史) 이야기는 : 일제(日帝)에 야합(野合)하지 않고는 이러한 역사(歷史) 서술(敍述)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재야(在野)에서도 : 오늘날의 “만주(滿洲)”가 옛 조선(朝鮮)의 주(主) 강토(疆土)인 것 같은 주장(主張)을 하는 분이 계시는데 : 《곧, 21세기(世紀) 작금(昨今)에도, 민족주의(民族主義) 사학자(史學者) ‘아무개’의 ‘∼’에 의하면 :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주변(周邊)의 내몽고(內蒙古) 등지(等地)에 “옛 조선(朝鮮) 시원지(始源地)라거나 이곳 땅에 동이(東夷), 구이(九夷), 단군(檀君)이, 기자(箕子)가… …삼한(三韓)이… …삼국(三國)이… …하는 이야기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하지 않고는, 이러한 역사(歷史) 서술(敍述)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무주공산(無主空山),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던 그곳에 대해 일제(日帝)가 조사(調査)한 보고서(報告書)에 의하면【백과사전(百科事典)에도 나오는 말이다.】 : 「그곳에는 당시(當時)【일제(日帝) 참모본부(參謀本部)에서 은밀(隱密)하게 보낸 첩자(諜者)들이 조사(調査)한 바에 따르면】‘2’백만(百萬)도 되지 않는 백성(百姓)들이 아주 피폐(疲弊)하고, 곤궁(困窮)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들의 표현(表現)대로 “무인지경(無人之境)과 다름이 없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 착각(錯覺)은, 개인(個人)의 자유(自由)에 속한다. 만약(萬若) 그곳 땅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내몽고(內蒙古) 일부(一部) 및 연해주(沿海州) 등지(等地)가 옛 조선(朝鮮)의 터전이었다”라고 한다면 : 5,000년(年)을 이어온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의 흔적(痕迹), 행정조직(行政組織)의 흔적(痕迹) 등이 있어야 함은 상식적(常識的)인 일임에도 20세기(世紀) 초반(初盤)까지도 “무인지경(無人之境)과 다름이 없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라는 말은,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할까?』
☛ ☛ ☛ 「20세기(世紀) 초(初)부터 나온 “자주적(自主的), 민족적(民族的)”이라는 하(下)에 서술(敍述)된 조선사(朝鮮史)의 저자(著者)」들은,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내몽고(內蒙古) 일부(一部) 및 연해주(沿海州) 등지(等地)가 옛 조선(朝鮮)의 터전이었다”라고 한다면 :
「5,000년(年)을 이어온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의 흔적(痕迹), 행정조직(行政組織)의 흔적(痕迹) 등이 있어야 함은 상식적(常識的)인 일임에도 20세기(世紀) 초반(初盤)까지도 “무인지경(無人之境)과 다름이 없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라는 것을 몰랐다면 : 순진(純眞)하다 못해 적(敵)【왜(倭) : 일제(日帝)】에게 철저(徹底)하게 이용(利用)당한 것이고, 알고도 이를 주장(主張)했다면 :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가 아닌 부역자(附逆者)이다.
➥ 우리가 중요(重要)하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어디에 분포(分包)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于先) : ➊ 청해성(靑海省)∼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금성(金城)】∼영하성(寧夏省)을 관통(貫通)하는 하(河)【황하(黃河)】의 서(西)쪽에 있다. 곧 하서(河西)【하(河)의 서(西)쪽】 땅으로부터 시작(始作)되어∼감숙성(甘肅省)과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대막지대(大漠地帶)’라고 불리는 곳이다.
➋ 《청해성(靑海省)∼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금성(金城)】∼영하성(寧夏省)을 관통(貫通)하는 하(河)【황하(黃河)】의 동(東)쪽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
『이와 같은 특이지세(特異地勢)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왜곡(歪曲)한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거슬리는 집단(集團)이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다.
➌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어디에서 출발(出發)했든 간에, “하서(河西)” 땅을 거치지 않고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과(通過)할 수 없다.」라는 것을 잊는다면 : 그 주장(主張)이나 논리(論理)는,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막지대(沙漠地帶)라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은, 특정(特定)한 장소(場所)에만 분포(分包)되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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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夢經堂日史 4편 / 자금쇄술(紫禁瑣述) 을묘년(1,855, 哲宗 6) 12월 22일(경술)
《燕京不過北方一隅之地。山川則醫閭,渤海亦是支流餘脈而已。人物則雖有堯,舜,禹,湯之聖。皐,夔,稷,契之佐。一着黑毳帽馬蹄袖。則餘無足觀矣。: 연경(燕京)은 북방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山川)은 의무려산(醫巫閭山)과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인물(人物)로 말하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 같은 성군(聖君)과 고(皐)ㆍ기(蘷)ㆍ직(稷)ㆍ설(契)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취모(黑毳帽)와 마제수(馬蹄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네.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 ➥ 황막(荒邈)한 사막(沙漠),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廣野)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하여 궁궐(宮闕)이라 하였다. ∼以下 中略∼》
【夢經堂日史 : 저자(著者)는, 철종(哲宗) 6년(1855) 연행 사신(燕行使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했던 서경순(徐慶淳)의 연행(燕行) 기록(記錄)이다. [出處 : 고전번역원 DB, 해제(解題) 인용(引用)]】
➥ 「AD 1,855年」이라면 19세기(世紀) 중엽(中葉) 초(初)다. 이때까지도 『연경(燕京)은,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 : 황막(荒邈)한 사막(沙漠),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廣野) 한가운데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곳이 오늘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주변(周邊)’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인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은, “AD 1,937年 10월(月)”까지도 “북평(北平)”이었으나, 13일(日)부터 “북경(北京)”으로 이름을 고쳤다』라고 하였다.
위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4편 / 자금쇄술(紫禁瑣述) 을묘년(AD 1,855, 哲宗 6) 12월 22일(경술)』의 기록(記錄)은, “연경(燕京)”에 대한 그 지리적위치(地理的位置)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아주 귀중(貴重)한 사료(史料)다.
☛ 「연경(燕京)은, 천리(千里)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勿論) 21세기가 아닌 19세기(世紀) 당시(當時)의 땅을 말하고 있다. 곧 조선(朝鮮)에서 청(淸)나라의 심양(瀋陽)이나 연경(燕京)을 가려면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과(通過)해야 하며, 그 사막지대(沙漠地帶)는, 하서(河西)의 서(西)쪽과 서북(西北)쪽에 있었다.
특히 조선(朝鮮)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였다’라는 것이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후 서(西)쪽으로 갔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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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경오유연일록(鏡浯遊燕日錄)【임백연(任百淵, AD 1,802~1,866) : 「AD 1,836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 종고(鐘皐) 조계승(趙啓昇)의 수행원(隨行員)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와 경오유연일록(鏡浯遊燕日錄) 2책을 남겼다.】
• 경오행권건(鏡浯行卷乾) / 1,836년(憲宗 2년 병신) / 11월 초 4일(계미) 맑았지만 바람이 몹시 참 / 다시 출발하여 신시가 지나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중략(中略)
《十曝餘暄怕一寒, 風沙漠漠到新安. 中略 : 열흘 더위 온기 남아도 한번 추위 두렵더니, 바람 모래 막막한데 신안 땅에 이르렀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음력(陰曆) 11월(月) 초(初)」라면 : 한반도(韓半島) 땅에 모래바람(風沙)이 몰려오는 계절(季節)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現狀)은 한반도(韓半島)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기 때문에… …결코 이를 왜곡(歪曲)한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주(定州), 신안(新安)은 당시(當時)에 역참(驛站)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평안도(平安道)에 속(屬)해 있었던 지명(地名)이다. 「이러한 곳에 음력(陰曆) 11월(月) 초(初)에 ‘풍사(風沙)로 인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정주(定州), 신안(新安) 땅은 반도(半島) 땅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지명(地名)일 수밖에 없다.
• 경오행권건(鏡浯行卷乾) / 1,836년(憲宗 2年 병신) / 20일(기해) 맑고 따뜻함 : 遂發。氷渡鴨江。
《鴨水國西界。送我從此道。: 압록강(鴨綠江)은 나라 서(西)쪽 경계(境界)이거니, 날 송별함 이 길에서 시작된다네.》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을 보면서도 「“압수(鴨水)”를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하며, 반도(半島)의 강(江)이다」라고 한다면 :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긴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이 잘못된 것인지… …참, 답답한 노릇이다.
「서계(西界) : 서(西)쪽 땅의 경계(境界)」라는 뜻이다. 압록강(鴨綠江)이 반도(半島) 땅의 서(西)쪽을 흐르는 강(江)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한민족(韓民族) 모두 집단최면(集團催眠)에 빠져 있다는 증거(證據)다. “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나?
이것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고전(古典) 정사(正史) 원문(原文)을 보자. 즉(卽), 資治通鑑 / 煬皇帝上之下大業八年. 壬申, 公元 612年)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於仲文出樂浪道,左驍衛大將軍荊元恆出遼東道,右翊衛將軍薛世雄出沃沮道,右屯衛將軍 辛世雄出玄菟道,右御衛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御衛虎賁郎將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문중(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恆)은 요동도(遼東道)로 나가고, 우익위장군(右翊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토도(玄菟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右御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장군(右武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탁군태수(涿郡太守)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가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御衛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가, 모두 압록수(鴨綠水) 서(西)쪽에서 모이도록 하였다[皆會於鴨綠水西].》라고 하였는데,
이게 참, 반도(半島)의 지세(地勢)로 살펴보면 : 「압록수(鴨綠水) 서(西)쪽」이란 말은, 참으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하며,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최소한 수만(數萬) 년(年) 전(前)에 형성(形成)된 것으로 판단(判斷)되는데… …『수군(隋軍)의 수만(數萬) 기병(騎兵)과 수십만(數十萬)의 보졸(步卒), 기타(其他) 군량(軍糧) 등의 군수물자(軍需物資) 운송병(運送兵)까지 망라(網羅)한다면 : 그 수(數)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程度)의 ‘2백만(百萬) 대군(大軍)’이고 불렸다』라고 전해진다.
➥ 이 모두를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집결(集結)하라」라고 수양제(隋煬帝)의 황명(皇命)이 내린 것이다.
「압록수(鴨綠水) 서(西)쪽」은 : 『해구(海口)요, 바다(海)이므로, 이곳에서 몇십만(十萬)의 병사(兵士)든, 수십만(數十萬) 대군(大軍)이든 집결(集結)할 수 있는 땅(地)이 없다』라는 것이 문제(問題)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에게 물어보자. “그대들은 기보(騎步) 수십만(數十萬) 병사(兵士)들이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의 바다(海)에서 집결(集結), 점호(點呼)받고,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수령(受領)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는가?』
옛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키는 지세(地勢)는 반도(半島) 땅이 아니라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西)쪽 땅에 있어야만 가능(可能)한 것이다. 곧,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없었다”라는 것이고, 이에 따라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변경(邊境) 지방(地方)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올바른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이다.
【參考 / 《資治通鑑 隋紀 五 / 煬皇帝上之下 / 大業 八年 : 《帝親授節度:每軍大將、亞將各一人;騎兵四十隊,隊百人,十隊為團;步卒八十隊,分為四團,團各有偏將一人;其鎧冑, 纓拂, 旗旛, 每團異色;受降使者一人,承詔慰撫,不受大將節制;其輜重散兵等亦為四團,使步卒挾之而行;進止立營,皆有次儀法。癸未,第一軍發;日遣一軍,相去四十里,連營漸進;終四十日,發乃盡,首尾相繼,鼓角相聞,旌旗亙九百六十里. 御營內合十二, 三臺, 五省, 九寺, 分隸內, 外, 前, 後, 左, 右六軍,次後發,又亙八十里. 近古出師之盛,未之有也》】
이 모두를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집결(集結)하라」라고 ‘수양제(隋煬帝)의 황명(皇命)’이 내린 것이다.
➥ 도대체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이 어딘가?」 「반도(半島) 압록강(鴨綠江)은 동북면(東北面)에서 나와, 서남(西南)으로 흘러 용만(龍彎)에서 바다(海)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이라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參考 / 資治通鑑 ;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주석(註釋) : 《班志:玄菟郡西蓋馬縣有馬訾水. 新唐書: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 平壤城在鴨綠東南. 金人謂鴨綠水為混同江. : 반지(班志)에 의하면 : 현토군(玄菟郡) 서개마현(西蓋馬縣)에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물의 색깔이 오리 머리(鴨頭)와 같아, 압록수(鴨綠水)라 불리는데, 평양성(平壤城)은 압록(鴨綠) 동남(東南)에 있다. 금인(金人)들은 압록수(鴨綠水)를 혼동강(混同江)이라고 한다. 杜佑曰:鴨淥水闊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압록수(鴨淥水)는 넓어서 3 백보(百步)이며, 평양성(平壤城) 서북(西北) 450리(里)에 있으며, 요수(遼水) 동남(東南) 480리(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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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귀암이원정연행록(歸巖李元禎燕行錄)【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1,622~1,680)】: AD 1,660년(顯宗 1)의 연행기록(燕行記錄)
➥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1,622~1,680]’의 ‘AD 1,660년(年)’의 연행록(燕行錄)은 후대(後代)의 자손(子孫)들에게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것을 직접적(直接的)으로 호소(呼訴)하고 있다. 귀중(歸重)한 사료(史料)다.
(24 –1) 귀암집 제11권 / 1660년(현종 원년, 경자) : 1월 22일(무인) 맑음 :
《이른 아침을 먹은 뒤 길을 떠났다. 임진(臨津)을 건넜다. 개성부(開城府)에 묵었는데 경력(經歷) 곽지흠(郭之欽)이 나와서 기다렸다. 이곳이 바로 고려(高麗) 500년 고도(故都)로 내가 항상 보기를 원했으나 그럴 수 없었는데, 지금 와서 두루 보게 되었으니 정사와 부사의 숙원(宿願)이기도 하였다. 성곽(城郭), 교량(橋梁), 여염(閭閻)의 성대함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상사와 함께 만월대(滿月臺)에 가서 배회하며 유람하였다. 만월대는 바로 전조(前朝 고려) 왕궁의 옛터이다. 숙석(熟石 : 잘 다듬은 돌)과 계체(階砌 섬돌), 드넓은 벌판, 누대(樓臺)와 초석(礎石)이 완연히 어제와 같아서, 당시 궁실(宮室)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성함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는데, 쌓인 풀을 자리 삼아 옛날을 생각하니 슬퍼졌다. 조금 있다가 돌아왔다.
개경(開京) 서(西)쪽은 길이 겉은 마르고 속은 질퍽하여 말발굽이 이따금 빠져 들어가면 탁한 물이 팥죽처럼 솟아 나온다. 말발굽이 빠지지 않더라도 땅에 틈이 생겨서 사람과 말이 그 주위를 밟으면 물이 갑자기 솟아나는데 물색은 붉거나 누렇거나 검기도 하여 흙의 빛깔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한성(漢城) 이남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역졸(驛卒)에게 물어보니, “극심한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붙었다가 봄에 녹으면 겉은 마르고 속은 질퍽해져 본래 이와 같습니다. 말발굽이 빠진 구멍을 ‘구(臼)’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하였는데,
➊ 《성곽(城郭), 교량(橋梁), 여염(閭閻)의 성대함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상사와 함께 만월대(滿月臺)에 가서 배회하며 유람하였다. 만월대는 바로 전조(前朝) 왕궁의 옛터이다. 숙석(熟石【잘 다듬은 돌】과 계체【階砌 : 섬돌】, 드넓은 벌판, 누대(樓臺)와 초석(礎石)이 완연히 어제와 같아서, 당시 궁실(宮室)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성함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는데, 쌓인 풀을 자리 삼아 옛날을 생각하니 슬퍼졌다.》라고 하였는데,
➥ 이때가 서력(西曆, AD) 1,660年의 개성부(開城府) 만월대(滿月臺) 현장(現場) 묘사(描寫)다. 그렇다면 : 〈만월대(滿月臺)에 가서 배회하며 유람하였다. 만월대는 바로 전조(前朝) 왕궁의 옛터이다. 숙석(熟石【잘 다듬은 돌】과 계체【階砌 : 섬돌】, 드넓은 벌판, 누대(樓臺)와 초석(礎石)이 완연히 어제와 같아서… …왜란(倭亂), 호란(胡亂) 등에도 크게 훼손(毁損)됨이 없이 그 흔적(痕迹)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는 것인데… …왜 그 흔적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➋ 《개경(開京) 서(西)쪽은 길이 겉은 마르고 속은 질퍽하여 말발굽이 이따금 빠져 들어가면 탁한 물이 팥죽처럼 솟아 나온다. 말발굽이 빠지지 않더라도 땅에 틈이 생겨서 사람과 말이 그 주위를 밟으면 물이 갑자기 솟아나는데 물색은 붉거나 누렇거나 검기도 하여 흙의 빛깔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한성(漢城) 이남(以南)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역졸(驛卒)에게 물어보니, “극심한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붙었다가 봄에 녹으면 겉은 마르고 속은 질퍽해져 본래 이와 같습니다. 말발굽이 빠진 구멍을 ‘구(臼)’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위의 구절(句節)은,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황도(皇都) 주변(周邊)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알 수 있는 귀중(歸重)한 기록(記錄)이다.」
➊ 첫째로는 「개성(開城)에서 서(西)쪽으로 향(向)했다」라는 것이다. 반도(半島)의 형세(形勢)를 보면 “개성(開城) 서(西)쪽은 연안(延安)이며, 곧 서해(西海)에 다다른다. 개성(開城)에서 평양(平壤)으로 가려면 서행(西行)이 아닌 북행(北行)이어야 올바른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반도(半島) 땅의 형세(形勢)가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곧 「고려(高麗)는 반도(半島) 땅의 왕조(王朝)가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➋ 두 번째는 「개경(開京) 서(西)쪽은 길이 겉은 마르고 속은 질퍽하여 말발굽이 이따금 빠져 들어가면 탁한 물이 팥죽처럼 솟아 나온다. 말발굽이 빠지지 않더라도 땅에 틈이 생겨서 사람과 말이 그 주위를 밟으면 물이 갑자기 솟아나는데 물색은 붉거나 누렇거나 검기도 하여 흙의 빛깔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한성(漢城) 이남(以南)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역졸(驛卒)에게 물어보니, “극심한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붙었다가 봄에 녹으면 겉은 마르고 속은 질퍽해져 본래 이와 같습니다. 말발굽이 빠진 구멍을 ‘구(臼)’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는데… …,
이러한 토질구조(土質構造)는 반도(半島) 땅 그 어디에도 존재(存在)할 수 없다. 반도(半島) 개성(開城) 서(西)쪽 주변이 극심(極甚)한 추위가 있는 환경(環境)을 가진 곳인가?
「한성(漢城)과 개성(開城)은 전혀 다른 기후대(氣候帶)를 가진 곳이 아니다. 모두는 사계절(四季節)을 가진 온대(溫帶) 땅으로 더위와 추위 모두 비슷한 환경(環境)을 가진 땅이다.」
➤ 《歸巖李元禎燕行錄【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1,622~1,680)】: AD 1,660년(顯宗 1)의 燕行記錄 / 귀암집(歸巖集) 11권 / 1,660년(顯宗 元年, 경자) : 1월 22일(무인) 맑음 : 원문(原文) 이미지(No, 4.5.6)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24 –2) 귀암집(歸巖集) 제11권 / 1,660년(顯宗 元年, 경자) 1월 26일(임오) 맑음 :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 상사, 부사,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 및 평양 판관(平壤判官)과 함께 누선(樓船 : 다락이 있는 배)을 타고 술을 마시며 노닐다 강을 건넜다. 이곳은 기자(箕子)의 옛 도읍으로 붉은 난간과 그림이 그려진 용마루, 높고 큰 누각이 성(城) 안에 가득하고 구불구불 큰길, 땅에 즐비한 여염집, 나루에 가득한 배와 아득히 뻗은 평평한 수풀, 도도히 흐르는 큰 강은 마땅히 우리나라 동국(東國) 제일의 명승이다》라고 하였다.
➥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서력(西曆, AD) 1,660年의 “평양(平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높고 큰 누각(樓閣)이 성(城)안에 가득하고, 큰길, 즐비한 여염집, 강가에 아득히 뻗은 나무들」이라고 하였는데,
다른 것이야 차치(且置)하더라도 성(城)안에 그렇게도 많았다던 누각(樓閣)은 어디로 사라지고 그 흔적(痕迹)조차 찾을 길이 없는 것인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반도사(半島史)는 늘 이런 식(式)이다.
“무엇인가 존재(存在)한다”라는 기록(記錄)은 여기저기에 수없이 나열(羅列)되어 있으나, 실제(實際)로는 흔적(痕迹)조차 찾을 길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끝마다 하는 말은 : 왜란(倭亂) 또는 호란(胡亂) 때에 파괴(破壞)되었다거나 불을 질러 소실(燒失)되었다는 것이다. 전국(全國) 각지(各地)에 있는 고적(古跡)들의 안내문(案內文)을 보면 : 그렇다는 것이다.
➤ 왜란(倭亂)을 일으킨 왜(倭), 호란(胡亂)을 일으킨 호(胡) : 이들이 조선(朝鮮) 땅에 있는 많은 고적(古跡)이 탐이 나, 반란(反亂) 곧 난(亂)을 일으켜 전문가(專門家)들을 동원(動員)하여, 궁궐(宮闕), 황성(皇城), 나성(羅城), 각지(各地)에 있는 거대(巨大) 성(城), 사찰(寺刹), 탑(塔), 누각(樓閣), 왕릉(王陵) 등을 모조리 파괴(破壞)하고, 불 지르고, 도굴(盜掘)하여 없애버렸다는 건가?
반도(半島) 조선사(朝鮮史)를 알면 알수록 희한(稀罕)한 이야기꾼이 되어버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이없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학계(學界)는 각성(覺醒)해야 한다.
➤ 《歸巖李元禎燕行錄【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1,622~1,680)】귀암집(歸巖集) 11권 / 1,660년(顯宗 元年, 경자) 1월 26일(임오) 원문(原文) 이미지 (No, 8.9)[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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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수사록(隨槎錄)【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
【“수사록(隨槎錄)”은, 서력(西曆) 1,831년 연행사신(燕行使臣)의 타각군관(打角軍官) 자격(資格)으로 참여(參與)한「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의 연행(燕行) 기록(記錄)이다. 「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의 장인 홍석주는 외아들인 홍우겸(洪祐謙, 1,808~1,826)이 일찍 죽자 사위 한필교를 아들처럼 여겼다고 하며, 1,831년(純祖 31) 중국 청나라로 사신을 가게 되자 25세의 한필교를 자신의 수행원인 타각군관(打角軍官)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의 여행 기록이 바로 수사록(隨槎錄)이다」라고 전하고 있다」[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해제(解題)]】하석유고(霞石遺稿)가 있다.
• 수사록(隨槎錄) 권1 / 일월기략(日月紀略) 8월 28일(정미)
《날이 건조하고 바람이 불었다. 모래 먼지가 하늘에 넘쳐, 인마(人馬)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 백탑보(白塔堡) 【40리】 에서 점심을 먹었다. ○ 혼하(渾河) 【11리】 를 배로 건넜다. ○ 심양성(瀋陽城) 【9리】 에서 잤다.》
➤ 한필교(韓弼敎,1807~1878)의 수사록 08월 28일 기록 ‘원문 이지미’[고전번역원 DB]
(25-2) 수사록(隨槎錄) 권6 / 반형총화 하(班荊叢話下)《수사록(隨槎錄)》 뒤에 적다
《25세에 처음 사행단의 행차를 따라 서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을 지나 연경(燕京)과 계주(薊州)를 경유하여 순천(順天)에 도착하였으니, 그동안 산으로 말하면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높음을 보았고, 물로 말하면 발해(渤海)의 넓음을 굽어보았다.》
➊ 《서(西)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라는 말의 뜻이 뭔가? 「서행(西行)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라는 뜻이다. 「‘한양(漢陽 : 漢城)에서 개성(開城), 다시 평양(平壤), 다시 용만(龍彎), 압록강(鴨綠江)에 다다르는 길’은 단 한 방향(方向)인 ‘북행(北行)’ 외(外)에는 다른 방법(方法)이 없다.」
《서(西)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라는 말은, “반도(半島) 땅”에서 벌어졌던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➋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높음을 보았고》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반도(半島) 땅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보다 높은 산(山)들이 많다. 반도인(半島人)이 그깟 200 여리(餘里)에 뻗친 ‘867’m의 산(山)을 보고 높음을 보았다」라는 말은,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아닌 해발고도(海拔高度) 4,000∼5,000m의 큰 산(山)을 보고 놀랐다」라는 뜻이다.
➌ 《물로 말하면 발해(渤海)의 넓음을 굽어보았다》라는 구절(句節)을 보자.
한필교(韓弼敎, 1807~1878)는 ‘한성(漢城)’ 출신(出身)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바다(海)가 삼면(三面)을 둘러싸고 있는 반도인(半島人)으로 발해(渤海)를 보고는 : “물로 말하면 발해(渤海)의 넓음을 굽어보았다”라는 말은, 바다(海)가 아닌 내륙호(內陸湖)를 보고 그 넓음을 보았다는 뜻이 된다. 삼면(三面)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반도(半島), 그것도 한성(漢城) 출신(出身)이 서해(西海), 남해(南海), 동해(東海)의 망망(茫茫)함을 모르고 “겨우 발해(渤海)를 보고 그 넓음을 굽어보았다”라는 말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극치화(極致化)하며 연출(演出)하고 있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는, 1,833년 성균관(成均館) 진사시(進士試) 출신(出身)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歷任)한 금수저 출신(出身) 관리(官吏)였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는, 내륙(內陸)에 있는 큰 호수 “발해(渤海)”를 보고 감탄(感歎)하고, 내륙해(內陸海) 그 넓음을 보고 말한 것이다. 필자(筆者)가 곧 ‘내륙해(內陸海)’라고 단정(斷定)한 것은 ‘아래의 글’ 때문이기도 하다.
➤ 「21세기(世紀)의 “발해”는 틀림없이 하북성(河北省) 남(南)쪽 바다(海)를 말한다.」 그러나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발해(渤海)”는 “내륙해(內陸海)”를 일컫고 있다.」라는 것을 생생(生生)하게 증거(證據)해주고 있다. 「또한 그 북안(北岸)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다」라는 것이다.
➤ 수사록(隨槎錄) 반형총화 하(班荊叢話下)《수사록(隨槎錄)》뒤에 적다 [원문 이미지]
(25-3) 수사록(隨槎錄) 권4 / 풍속통고(風俗通考) 산천(山川)
《책문으로부터 연산관(連山關)에 이르기까지는 높은 산과 험준한 재〔嶺〕가 많고, 냉정(冷井)에서 10여 리를 지나면 점점 산줄기로부터 벗어나서 산해관에 이르는데, 1천여 리 동안 사방으로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가에서 땅끝까지가 툭 트여서 거리낄 곳이 없었다. 일판문(一板門)을 나서면 말 머리에 하나둘씩 산이 보이면서 일만 봉우리가 북쪽으로 내닫고 있으니, 바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탑산(塔山)으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하늘 끝 수백 리에 걸쳐 가로로 잇닿아 있고, 곧장 노하로 통해 있다. 그 대략적인 산수가 이와 같다. 대개 황성(皇城)은 팔방으로 통하는 평야 지대에 있어서 험준한 곳을 볼 수 없으나, 산과 강이 모두 멀리서 에워싸고 있으니, 이 때문에 민간에서 말하기를, “연도(燕都)는 용맥(龍脈)이 1천 리에 걸쳐 있는 8백 리의 명당”이라고들 한다.》
➥ 「발해(渤海)가 수백(數百) 리(里)에 걸쳐 가로(橫)【동(東)에서 서(西)로, 또는 서(西)에서 동(東)으로 놓여 있다라는 뜻이다】로 놓여 있다」라는 말은, 곧 “내륙해(內陸海)라는 결정적(決定的)인 증거(證據)”다.
더구나 「발해(渤海)가 하늘 끝 수백 리에 걸쳐 가로로 잇닿아 있고, 곧장 노하로 통해 있다.」라고 한 사실(事實)이다. 곧 「노하는 발해(渤海)에 물을 대는 수원(水源)이다. 또는 발해(渤海)의 물이 노하로 통해 흘러간다」라는 뜻이다.
➤수사록(隨槎錄) 권4 / 풍속통고(風俗通考) 산천(山川) [4]
➤ 수사록(隨槎錄) 권4 / 풍속통고(風俗通考) 산천(山川) [5]
(25-4) 수사록 권4 / 풍속통고(風俗通考) 도로(道路)
《요동(遼東) 이후로는 촌락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뽕나무와 삼이 번갈아 그늘을 드리우며, 길은 폭이 백여 보나 되고, 양쪽 가에는 왕왕 수양버들이 땅을 스친다. 요동 벌판 1천 리는 흙이 밀가루처럼 고와서, 비만 오면 땅이 진창처럼 되는데, 특히 일판문(一板門)과 이도정(二道井)에 이르면 진창이 더욱 심하여, 마치 사람을 끌어당기듯 무릎까지 빠질 때도 있으니, 길을 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도로의 상황이 대개 이와 같으니, 수레의 바퀴 자국이 1척 넘게 깊이 패어서, 삼대처럼 뒤얽히고 밭두둑처럼 길게 이어지니, 뒤따르는 수레는 반드시 그 자국을 따라서 가게 된다. 다만 양쪽 바퀴 자국이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하여서, 걸핏하면 수레가 기울거나 뒤집힐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 수사록 권4 / 풍속통고(風俗通考) 도로(道路)
(25-5) 수사록 권4 / 문견잡지(聞見雜識)
《몽고인(蒙古人)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머리털을 깎고 얼굴을 씻지 않는다. 용모가 건장하고 누런 옷에 누런 모자를 쓰며,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모습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늘 호기롭게 야숙(野宿)을 하여 비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낙타를 타고 황성(皇城) 안을 왕래하는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들으니 48부(部)의 추장(酋長)이 있는데, 각기 왕이라는 호칭을 쓴다고 한다. 서번【西番 티베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방의 총칭】은 이보다 더 사납고 험상궂기 때문에 청나라가 두려워하여 감히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 「본래(本來)의 몽고인(蒙古人)은 색목인(色目人)이다.」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國民)의 대다수(大多數)는, 옛 몽고인(蒙古人)의 후예(後裔)가 아니다. 이들 대다수(大多數) “몽골공화국” 국민(國民)은 옛 조선족(朝鮮族)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 백성(百姓)의 후손(後孫)들이다.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다.
➤ 수사록(隨槎錄) 4 / 문견잡지(聞見雜識) : 몽고인(蒙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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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북경록(北京錄)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의 ‘1,826’年 연행록(燕行錄)
【신태희(申泰羲)의 ‘북경록(北京錄)’은, ➤ 「1,826년 10월 27일부터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28일까지」의 대청 사행 체험을 기록한 필사본 사행 기록이다. 단(單) 권으로 되어 있는데, 1,826년 12월 28일 이후의 기록, 즉 북경 체류 기록 및 조선 회환(回還) 기록이 빠져 있는 미완본(未完本)이다.
‘북경록(北京錄)’은, AD 1,826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참여했던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의 사행 기록으로,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 및 이봉녕(李鳳寧, 1,793~1,871)과 함께 부사 신재식(申在植, 1770~?)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하였다. 당시 동지사행의 정사는 홍희준(洪羲俊, 1,761~1,841)이고 서장관은 정예용(鄭禮容, 1,773~1,843)이다. 홍희준은 ➤ 1,794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가는 생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를 모시고 ‘북경’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무관 신태희의 사행 경험이 오롯이 남아 있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解題, 引用]】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여기서 필자(筆者)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을 이해(理解)할 수 없는 점(點)은 : 바로 위의 글《➤ 1,794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가는 생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를 모시고 북경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라고 한 구절(句節)에서 보듯이 『당시(當時) ‘서력(西曆, AD) 1,794年’에는 북경(北京)이라는 곳은 없었다.』 『“오늘날의 ‘북경(北京)’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AD 1,937年【昭和 12년】이다. 1,937년 당시(當時)에는 북평(北平)이었다.” 【出處 : 중국시사문화사전 : 북평(北平, Běipíng) / 東亞日報, 昭和 12年 10月 13日, 火曜日】
그러나 북평(北平)에 대해서도 아주 복잡(複雜)하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혹자(或者)는 ‘우북평(右北平)’이 ‘북평(北平)이었다’라는 주장(主張)도 있으나, 우북평(右北平)이 있으면 좌북평(左北平) 또는 동북평(東北平)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북평(北平) 또는 우북평(右北平)」은,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서(西)쪽 5∼8 천리(千里) 서(西)쪽 땅에 있어야 “우북평(右北平)”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것이다.
➥ 北京錄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 ‘1,826’年 燕行錄 / 山川風俗總錄
《自鳳城, 至娘子山, 山高谷深, 屢渡大川。 : 봉황성에서부터 낭자산(狼子山)까지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큰 내를 여러 번 건넌다. 過冷井, 十餘里, 始出遼野, 行七百餘里, 始見邱陵。: 냉정(冷井)을 지나 10여 리를 가면 비로소 요동 들판이 나오고, 700여 리를 가야 구릉(邱陵)이 보이기 시작한다. 遼野七百里之稱用此, 而其實, 自千山至渤海, 南北共一千四百餘里。:요동 들판 700리(遼野七百里)’란 명칭은 이에 말미암았다. 실제로는 천산(千山)에서부터 발해(渤海)까지 남북(南北)으로 모두 1,400여 리이다. 統計天下大野可限, 而遼東獨得天地宏偉之勢也。: 천하(天下)의 큰 들판으로 한정할 만한 것을 통틀어 헤아려 보아도, 요동(遼東)만이 천지(天地)의 드넓고 거대한 형세를 얻었다 하겠다. 自此至北京, 雖有小小岡隴, 大抵皆平野, 不復踰峻嶺。: 여기서부터 북경(北京)까지는 비록 자잘한 언덕이 있지만, 대저 모두 평야(平野)로 다시 높은 고개를 넘지 않는다.》
《自渡江, 至北京, 地皆沙。 :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다. 自入遼野, 往來車馬, 益多, 沙益細, 乍風輒揚, 狀如烟霧, 後人不見前人。: 요동 들판(遼野)에 들어서면서부터 왕래하는 수레와 말이 더 많아지고 모래가 더 고와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때마다 모래가 날리는, 그 모양이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아서 뒷사람이 앞 사람을 보지 못할 정도다. 關內尤甚, 雖無風日, 輪蹄間觸, 起如灰, 面目頃刻幻形, 同行幾不相識。 積鬂髮者, 拭之不脫, 入口中者, 浙瀝不滌。: 관(關) 안쪽[關內 : 山海關]은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서 재처럼 풀풀 일어나니, 얼굴 모양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 동행하는 사람도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수염과 머리카락에 쌓인 것은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고, 입 안에 들어가면 뱉어내도 씻기지가 않는다. 至十襲之籠, 重封之甁, 亦皆透入, 極可怪也。 : 심지어는 열 겹으로 싼 바구니와 겹으로 봉한 병까지 모두 뚫고 들어갈 정도이니 지극히 괴이하다. 市肆及人家, 所置器物, 用鷄毛箒, 不住拂拭, 頃刻積至寸許。: 시사(市肆)와 인가(人家)에 쌓아둔 기물(器物)들은 닭털 먼지떨이로 쉴 새 없이 털어내도 잠깐 사이에 한 치[寸]나 쌓이고 만다. 北京與瀋陽山海關通州中後所等處大街, 皆濺水以浥之。: 그래서 북경(北京), 심양(瀋陽), 산해관(山海關), 통주(通州), 중후소(中後所) 등 여러 곳의 큰 거리에서는 모두 물을 뿌려 먼지를 적신다.》라고 하였다.
☛ 北京錄【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 ‘1,826’年 燕行錄】의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의 기록(記錄)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학자(學者)들이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면서도,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所)”에 대해서는 “언급(言及)하지 말자”라는 무언(無言)의 철칙(鐵則)이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문제(問題)에 대해서는 : 이리저리 잘도 해설(解說)하시는데,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 등(等)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북경(北京)까지의 여정(旅程)은, AD 1,910년(年) 합병(合倂) 이후(以後),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이 고난(苦難)의 역경(逆境)을 겪으시면서 걷던 길이 아니었을까?
➥➥➥ 그렇다면 : 여기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여러분에게 질문(質問)이 있다?
➊ 「AD 1,910년(年) 이후(以後)∼1945년(年) 사이의 기록(記錄)」에서 :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래(沙)땅”이라는 기록(記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의 전기(傳記), 영화(映畫) 등 또 일제(日帝)의 만주국(滿洲國) 기록(記錄)에서, “그곳은 당연(當然)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어야 한다”라는 기록(記錄)이 넘쳐나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記錄)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곧, “짝퉁”이라는 얘기다.
➋ 뭔 얼어 죽을… … :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지하자원(地下資源)이 풍부(豐富)해서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 하남성(河南省) 등지(等地)에서 많은 노동자(勞動者)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보고서(報告書)가 만들어질 수 있겠느냐?」 하는 거다.
「그러나 실제(實際)로 석탄(石炭), 철광석(鐵鑛石) 등의 여러 가지 지하자원(地下資源)이 풍부하여 이것을 캐내기 위해 많은 노동자(勞動者)가 인근 성(省)으로부터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곧, 이 땅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없는 땅이다. 곧, “짝퉁이라는 얘기다.”
➥ “북경록(北京錄)”의 그 내용(內容)을 보면 : 『오늘날의 20∼21세기(世紀)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사기극(詐欺劇)이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해 주고 있다.』
㈠ 『북경록(北京錄)【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 ‘1,826’年 燕行錄】이 21세기(世紀)에 사기극(詐欺劇)을 연출(演出)하고 있는 것일까?』
㈡ 『20세기(世紀)∼21세기(世紀) 사학자(史學者)들이 정치가(政治家)들과 야합(野合)하여 전세계(全世界) 인류(人類)를 상대(相對)로 “사기극(詐欺劇)”을 벌이고 있는 걸까?』
㈢ 『필자(筆者)의 생각은 위의 글 “㈡”항(項)에서 말하는 “사학자(史學者)들이 정치인(政治人)들과 야합(野合)하여 전(全) 인류(人類)를 상대(相對)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演出)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㈣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중원대륙(中原大陸)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강토(疆土)로 했었다.』라고 주장(主張)하는 바다. 아래의 “북경록(北京錄)의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을 보기로 하자.
➊ 《過冷井, 十餘里, 始出遼野, 行七百餘里, 始見邱陵。: 냉정(冷井)을 지나 10여 리를 가면 비로소 요동 들판이 나오고, 700여 리를 가야 구릉(邱陵)이 보이기 시작한다. 遼野七百里之稱用此, 而其實, 自千山至渤海, 南北共一千四百餘里。: 요동 들판 700리(遼野七百里)’란 명칭은 이에 말미암았다. 실제로는 천산(千山)에서부터 발해(渤海)까지 남북(南北)으로 모두 1,400여 리이다. 》
냉정(冷井)에서 10 여리(餘里)를 지나면 그곳부터 요야(遼野) 700리(里)가 펼쳐져 있었는데, 700리(里)는 평야(平野)가 구릉(丘陵)조차 없이 펼쳐져 있었다는 뜻이다.
700리 들판에 구릉(丘陵) 하나 없다는 말은, 곧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아니면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이루어질 수 없다. 곧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이나 하북성(河北省)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그러함에도 많은 반도사학자(半島史學者) 누구 하나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하지 않는다. 그저 남의 일이려니 하는 것 같다.
조선사(朝鮮史)가 어떻게 남의 일이 될 수 있겠나?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폐쇄적(閉鎖的)인 무리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집단(集團)이다.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➋ 《自渡江, 至北京, 地皆沙。 :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다. 自入遼野, 往來車馬, 益多, 沙益細, 乍風輒揚, 狀如烟霧, 後人不見前人。: 요동 들판(遼野)에 들어서면서부터 왕래하는 수레와 말이 더 많아지고 모래가 더 고와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때마다 모래가 날리는, 그 모양이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아서 뒷사람이 앞 사람을 보지 못할 정도다.》하였다.
이 구절(句節)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결정적(決定的)인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특히 이런 사실(事實)은 저자(著者)가 직접(直接) 보고, 체험(體驗)한 것으로 반론(反論) 자체(自體)가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기록(記錄)한 다수(多數)의 연행록(燕行錄)에 : 전문령(箭門嶺) 또는 용만(龍彎)에 다다르면 벌써 “대 사막(大漠)”의 싸늘한 한기(寒氣)가 몸에 스며든다」라고 기록(記錄)하였다.
위의 기록(記錄)은 다수(多數)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기록(記錄)한 지형지세(地形地勢) 곧 산천풍속(山川風俗)의 하이라이트(highlight)로, 《自渡江, 至北京, 地皆沙。 : 강(江)을 건너서부터 북경(北京)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다(地皆沙).》라고 하였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로 대제국(大帝國)으로 군림(君臨)했었다』라는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명백(明白)하게 증언(證言),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 『이때가 서력(西曆, AD) “1,826”年이다.』
➌ 《關內尤甚, 雖無風日, 輪蹄間觸, 起如灰, 面目頃刻幻形, 同行幾不相識。 積鬂髮者, 拭之不脫, 入口中者, 浙瀝不滌。: 관(關) 안쪽[關內 : 山海關]은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서 재처럼 풀풀 일어나니, 얼굴 모양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 동행하는 사람도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산해관(山海關)은 사막(沙漠)의 한 가운데(沙漠之中) 우뚝 솟아있었는데,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불렸다」라는 말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생생(生生)하게 살아나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극동(極東) 땅 바닷가에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위의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풍사(風沙)가 몰아치는 현장(現場)을 직접(直接)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상황(狀況)을 이해(理解)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사막(沙漠)의 한 가운데에서 풍사(風沙) 곧 모래바람을 만나면 : 멀리서부터 새까만 구름 또는 짙은 황색의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부터는 숨을 곳을 찾고, 온몸을 천으로 감싸고, 특히 얼굴과 입은 철저하게 감싸야 하며, 함부로 이동(移動)해서도 안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暗黑)의 시간(時間)이기 되기 때문이다… …한 시간(時間)이고, 두 시간(時間)이고 지나가기만 기다려야 하는데,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이런 땅에서 몇 년(年)을 살다 보면 : 풍사(風沙)를 몇 번 경험(經驗)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날씨만 봐도 언제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짐작(斟酌)하게 되어 미리 준비(準備)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상(異狀) 현상(現狀)은 특이지세(特異地勢)를 가진 ‘대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일어나는 자연현상(自然現象)이다.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이나 요녕성(遼寧省), 하북성(河北省) 등지(等地)는 전혀 관계(官契)없는 땅이다.
☛ 다만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무분별(無分別)한 인구증가(人口增加)와 함께 목축업(牧畜業)의 우후죽순(雨後竹筍) 증가(增加)로 인하여 수초(水草)의 땅이 메말라지며 사막화(沙漠化)가 급속도(急速度)로 진행(進行)되어 온 탓에 풍사(風沙)가 덮치고 있으나, 그 정도(程度)야 사막지중(沙漠之中)의 것에 비하면, 그 정도가 아주 약(弱)한 것이다.
➥ 위의 글 “➌”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런 곳은 : 「돈황(燉煌) 서(西)쪽 ‘금산산맥(金山山脈)=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알타이산맥(Altai, 山脈)’ 서(西)쪽 기슭에 있다」라고 전해진다. 「곧 모래에 말발굽이 푹푹 빠져 말의 배 밑까지 빠진다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해 놓고 있는데, 밤사이에 도깨비[魑魅魍魎 : 이매망량]들이 괴롭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이런 땅이 압록강(鴨綠江)에서 북경(北京)까지에 이른다」라는 말은,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없었다』라는 말과 같다. 「19세기(世紀) 전반(前半)에 살다 가신 조선인(朝鮮人)이 거짓으로 기록(記錄)을 남겨 놓을 일은 없다」라는 것이고, 또 「이는 다른 연행록(燕行錄)에도 같은 내용(內容)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설명(說明)한 기록(記錄)이 다수(多數)다」라는 것이 이를 증거(證據)하고 있다.
역사연구(歷史硏究)를 무엇으로 할 건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가 답(答)해야 한다.
○ 이와 같은 고전(古典) 원문(原文)【정사(正史), 삼국사(三國史), 동국사(東國史), 지리지(地理志), 연행록(燕行錄), 사대부(士大夫)의 문집(文集) 등(等)의 많은 원전(原典)을 말하는 것이다】을 번역(飜譯)하고, 주석(註釋)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는, 번역(飜譯)하고, 주석(註釋)을 하는 경우(境遇) : 「무조건(無條件) 반도(半島) 안(內)의 것으로 해야 한다」라는 실체(實體)가 없는 감시(監視)가 작동(作動)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 번역서(飜譯書)들에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와 관계(關係)가 깊은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인 : 「지형지세(地形地勢)…기후대(氣候帶)…방위(方位)…토산물(土産物)…고유지명(固有地名)…특이지명(特異地名)…특이풍속(特異風俗)…동이(東夷), 구이(九夷)…면적(面積)…거리(距離)」등(等)에 대한 기록(記錄)에 대해서 :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예(例)’를 들면 :
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막북(漠北) 토벌(討伐), 수만리(數萬里), 몇 만리(萬里), 동서(東西) 1만리(萬里), 북계(北界)의 사막지대(沙漠地帶) 등에 대해서… …
㈡ 연행록(燕行錄)에서의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북경(北京)까지는 모두 모래땅(沙土)이라는 사실(事實) … …심양(瀋陽)은 사막(沙漠)에 있다는 사실(事實), 연경(燕京) 또한 사막(沙漠)의 한 가운데 급조된 도시(都市)였다는 사실(事實)… …
㈢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 서(西)쪽에 있다는 것,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은, 옛 유관(楡關)이 아니다’라는 사실… …등에 대해서 : 논평(論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하시고 있는 주석(註釋)은, 어찌하여 단 한 구절(句節)도 없는 것인가?
【언급(言及)한 적이 있지만 : 오늘날의 심양(瀋陽) 근교(近郊)에 있는 하천(河川)을 보고, “심하(深河)”라고 하면서 :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과 그 휘하(麾下) 장병(將兵)들의 순절(殉節)한 그 넋을 달래기 위해 이것을 방문(訪問)한다」라는 기사(記事)를 볼 때마다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짝퉁 심하(深河)”, 그곳에는 김응하(金應河)와 장병(將兵)들의 넋이 있을 리 없다.」 「말 그대로 “짝퉁 심하(深河)”에 막걸리 한 잔 붓는다?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우리 국민(國民)도 사실(史實)을 알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언제까지 “세뇌(洗腦)에 당하고만 살 건가?】
☛ 함부로 입(口)을 놀리면, 펜(Pen)을 놀리면 :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라는 건가? 도대체 뭔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體制) 하(下)의 ‘학문(學問)의 자유(自由)가 있다’라는 말은, ‘헛소리’라는 건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도 적극적(積極的)으로 변화(變化), 개혁(改革)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살아남지 않으면 소멸(消滅)된다는 것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다음 게재(揭載)는 ‘6-1’편으로 계속됩니다.] 2,026년 05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안녕하세요.
회원 여러분!
그리고 먼 곳까지 찾아오신 손님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게재 예정은 "6-1, 2편"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 반도식민사학계은 막무가내로 "연경=북경'이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여정은 그 땅이 모두 모래로 된 황막한 사막지대였다는 것이고, 물론 중간 중간지대에는 사막같지 않은 풍경도 있어 여행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다음 길을 위해 충전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 그러나 반도식민사학계는 자신들의 몇 대 윗 조상들이 기록해 놓은 것마저 무시하고, 비하하고, 조롱하며, 무조건 일제(日帝)가 만들어 놓은 '식민조선사'를 애지중지 품에 안고, 내려 놓질 못하고 있습니다.
*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대략 짐작합니다. 100년을 이어가며 만들고, 주장한 논리를 깬나는 것은 "죽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압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조상을 밟고, 무시하며, 비하하며, 조롱하며, 무지랭이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죠"
* 반도식민사학계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편에서는 당시의 북경에 살고 있었다는 여진족들의 인종(人種)이 과연 어떤 종족이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진족(女眞族)!
과연 그들 여진족은 어떤 인종이었을까요?
당시 북경(北京)은 옛 연경(燕京)이었다고 말합니다만, 그렇다면 그곳에 살고 있었던 백성들은 누구였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핵심적인 것이고,
이것을 능가하는 그 어떤 기록도 인종만큼은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닉다.
과거부터 필자는 주장하기를 "女眞族"은 우리 민족인 '조선족=한족'과는 다르게 생긴 인종, 즉 다른 종족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옛 몽고족 또한 '조선족=한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인 '색목인 종족'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렇다면 "연경=북경"에 살고 있었던 "청인(여진족)"들은 과연 어떤 인종 또는 어떤 종족이었는가?
이게 밝혀진다면 오늘날의 "연경=북경'은 "짝퉁"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이것은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들이 "색목인"이 아닌 '조선족=한족'과 똑같은 종족이라는 것, 그리고 오늘날의 '연경=북경'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조선족=한족'과 다른 점이 없는 종족, 인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말힙니다.
옛 "갈족의 후조"는 나라가 망할 시 "수십만 갈족들은 하나 하나 찾아내어 참수했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립니다.
왜냐하면 "갈족들이 중원대륙에 진출하여 나라를 세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것"때문인데... ...그렇다면 그들 후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 왜냐하면 갈족은 중앙아세아 인종으로 황인종과는 전혀 다른 인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자들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자... ..."망시에 일일히 찾아내어 살해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말 그대로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깁니다.
예를 들면 중간의 몇 고구려 왕의 가계가 중앙아세아 종족이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이렇듯 "인종이나 종족"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연경=북경에 살고 있었던 '청인"들의 인종은 과연 어떤 종족이었을까?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현 북경에는 옛 청나라 사람들이 있을까요?
없을 까요?
물론 소수인들은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북경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은 조선족=한족과 다른 사람들이 아닌 대동소이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풍속이나 언어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형=체양' 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몽골공화국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두는 20세기로부터 21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재편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서세들이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갈려져 놓은 것입니다. 물론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건 지금 세계정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없는 나라, 종족, 부족은 힘있는 강대국에 의해 복속되고, 또 동화되어 소멸되기도 합니다... ...
카페를 성원해주시는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벌써부터 더위가 심해지니... ...
건강에 유의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