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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강연 (2020, 2, 3) 자료 최종 링크 모음
* 아래의 자료는 2020년 2월 3일 이시우 작가 강연, '강정, 세가지 이야기_ 군사시설 보호구역,
이란 파병, 유엔사 재활성화'의 일부입니다. 강연 자료와 영상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이시우 선생님께 또 한 번 큰 감사를 드립니다. 혹시 필요하여 인용하실 경우 출처를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료2)
이란-미국 분쟁과 한국파병
이시우
목차
1) 미국-이란 적대관계의 기원
1. 이란혁명
2. 미대사관인질구출작전
3. 레이건, 아버지 부시, 클린턴 행정부의 대 이란정책
2) 트럼프정부의 군사정책
1. 암살과 표적살해
2. 민군관계와 비밀작전
3) 하메네이의 정치군사정책
1. 초국가로서의 이슬람공화국
2. 쿠드즈 군과 시아파벨트 민병대
ㄱ. 레바논 헤즈볼라
ㄴ. 바레인 헤즈볼라
ㄷ. 사우디 헤즈볼라
ㄹ. 이라크시아파민병대
3. 반 패권동맹
4) 한국파병문제
1. 엔진
2. 레이더
3. 소나
4. SM2 미사일
5. 작전
1) 미국-이란 적대관계의 기원
1. 이란혁명
20세기 내내 이란의 발전은 석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09년 영국인 기술자 윌리엄 다아시가 세운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APOC)1)는 점차 늘어나는 막대한 석유이윤의 대부분을 서방석유기업들에게 빼돌렸다. 이란의 석유가 국유화된 1951년까지 AIOC는 영국 몫으로 7~8억 파운드를 챙겼는데 이란 몫은 고작 1억 500만 파운드였다.2)
이란석유회사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영국소유의 AIOC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증가했고 불만도 심해졌다. 이 같은 불만은 주로 1941년 창당된
친소련계 공산당인 투데당(Tudeh party)에 의해 주도되었다. 1949년 10월에는 유력한 정계의 인사들이 모여 정치개혁과
AIOC의 이란 내 자산의 국유화를 표방하는 민족전선을 창설했다. 민족전선은 급속도로 대중적 지지를 넓혀 1949년 말 이란
의회인 마즐레스(Majles)에 8명이나 당선되었다. 민족전선을 이끈 이가 바로 모사데그였는데, 그는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의
마즐레스의원이었으며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 그리고 이란의 몇 안 되는 정직한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석유국유화
운동은 처음에 영국의 석유산업지배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나 이는 곧 자주독립국가 이란을 향한 대중들의 욕망의 한 표현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독재정치를 종식하고 이란 국내문제에 대한 외세의 통제와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샤는 여론에 밀려
1951년 4월 29일 모사데그를 총리에 임명하고 5월 2일 석유산업국유화법안을 승인하였다. 모사데그는 이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자국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모사데그가 총리로 부임하자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AIOC의 영향력을 제거함으로써 영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란에서 큰 역사적 사건으로서 환호하는 이란
군중들은 “석유가 국유화 되었다: 이란의 존경받는 총리 모사데그 박사 만세!”라고 외쳤다.3)
미국은 초기에 모사데그 정권을 지지하며 석유산업국유화에 관련한 이란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란-영국 정부간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미국은 이란에 경제원조를 하며 모사데그의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영국의 개입으로
미국의 지지는 서서히 감소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집권 후 미국은 쿠데타를 배후조종하여 모사데그를 몰아내고 그의 민주화운동을
좌절시켰다. 미국은 그 뒤 팔레비 샤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그가 쿠데타 이후 수년간에 걸쳐 독재정권을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모사데그 시대에 이란 내부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선의의 제3자에서 팔레비왕정의 사악한 지지자로 바뀌게 되었다4)
팔레비는
1963년 백색혁명을 선언하였다. 백색혁명의 가장 큰 목적은 토지개혁이었지만 이 조치는 무엇보다 반왕정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조치로 성직자들의 광대한 토지소유가 제한되었다. 성직자들은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5)
이같은 반발은 농민과 농민출신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토지개혁이야말로 농촌의 안정된 생활방식을 파괴하고 빈곤을
심화시킨 변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으로 이득을 본 것은 극소수의 농민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팔레비가 국가권력을
이용해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자 그들은 대다수 민중의 불만을 모으는 초점 구실을 하게 됐다.6)
1963년 3월 21일 이란의 설날 호메이니는 반왕정투쟁을 주장하면서 설날에 상복을 입을 것을 호소했다. 점차 국면이 심각해지자
팔레비는 낙하산부대를 곰(Qom)의 신학교에 보내 무력진압작전을 감행하여 호메이니를 곧바로 체포하였다. 팔레비왕정은 1964년
10월 미군에 대한 외교 면책특권 법안과 군비강화를 위한 2억 달러의 차관신청 법안을 통과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레비를 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군은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결코 우리나라의 법률에는 저촉되지 않는다. 가령 국가원수나
종교지도자를 살해해도 그들은 우리나라의 법에 의해서 재판받지 않는다. 이란국회가 이런 조치를 승인하다니 그런 어리석은 이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미국으로부터 2억 달러를 꾸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나라의 주권은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는 말인가?”
호메이니는 팔레비체제를 미국에 종속된 친미정권이라고 규정하였다. 팔레비는 또 다시 즉각 ‘호메이니 특수작전’을 감행하였다.
1964년 11월 4일 새벽 4시경 자택에서 나와 아침예배를 하러 사원으로 향하는 호메이니를 군인들이 납치하였다. 군인들은
호메이니를 순식간에 군용트럭에 싣고 테헤란국제공항으로 가서 해외로 추방시켰다. 이리하여 호메이니는 약15년 동안 터키, 이라크 및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반왕정투쟁을 벌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점차 크게 증대하였다. 1977년 11월 29일 이라크의
나자프 Najaf에서 호메이니의 장남 무스타파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란당국은 사망원인을 협심증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호메이니와 그의 측근들은 이란의 비밀경찰(SAVAK)에 의한 독살이라고 주장했다. 무스타파의 죽음은 점차 이란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반팔레비투쟁으로 확산되었다.7)
1978년 1월 이란정부는 호메이니가 영국의 간첩이며 동성애자라는 음해기사를 親정부지에 게재함으로써 국민을 자극하였으며, 곰 신학교의 데모를 유혈 진압하였다. 이스파한시의 바자르(Bazaar:시장)8)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이를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1978년 벽두부터 반정부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1978년
9월 8일 성난 군중이 테헤란시 잘레(Jaleh)광장에 운집하자 팔레비정부는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시위를 벌이는
테헤란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살상했다. ‘검은 금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팔레비투쟁은 점차 확산되었다. 1978년
10월 이라크는 팔레비 국왕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를 프랑스로 추방하였으나 그의 프랑스 망명은 국제적 언론과의 접촉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9)
결국 1979년 1월 15일 팔레비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란을 떠났다.10)
혁명 이틀 전 팔레비국왕은 국외로 탈출했는데 당시 그의 신변을 받아들이도록 선두에 서서 활동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넬슨록펠러, 데이비드 록펠러, 사일러스 번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지미 카터, 헨리 키신저, 존 J. 맥로이 등 하나같이
록펠러제국의 거물들이다. 맥로이와 키신저가 록펠러의 손발이 되어 팔레비국왕을 멕시코에 안착시켰다. 11)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가 귀국했다. 2월 초 페다인의 좌파 게릴라들과 인민 무자헤딘의 좌파 이슬람주의 게릴라들이 군대내에서 대규모
폭동을 조장하는데 성공했다. 이 단계에서 호메이니는 사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샤를 무너뜨린 핵심 사건들인 파업과 군대내
폭동은 그와 전혀 무관하게 벌어졌다. 여러 도시들에서 다양한 위원회(코미테)들이 사실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학은 좌파와
무자헤딘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쇼라(공장 평의회)들이 경영권과 통제권을 다투고 있었다. 소수민족들이 사는 지역들에서는
민족자결권을 쟁취하려는 투쟁이 시작됐다. 2월 11일 이슬람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왕정이 종식되고, 이란 역사상 최초로 민중봉기로
지배자를 교체한 혁명이 성공했다.
임시정부의
첫 총리가 된 바자르간(Mehdi Bazargan)은 이슬람헌법제정을 추진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현대적
부르주아지 부문과 연계된 ‘온건’이슬람주의자였다. 3월 30일 정부는 ‘이슬람공화국 건설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투데당과 무자헤딘은 정권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좌파, 여성단체, 소수민족, 많은 공장의 쇼라(평의회)는 국민투표에
반대했다. 그들은 편협한 이슬람정부가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선출된 대표자들로 제헌의회를 구성해야하고 바로 이 제헌의회를
통해 새로운 공화국의 형태가 결정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하나의 권력인 호메이니는 이슬람혁명위원회로서 사실상 정부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호메이니 스스로 칙령을 반포하고 정부 각 기구에
자신의 대표자를 파견하거나 새로운 국가기구를 임의로 설치하는 등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권한을 행사하였다. 혁명재판소, 혁명위원회 등
혁명기구는 실질적 행정 외에도 과거정권 인사 및 적대세력을 임의로 구속 처형하였다. 12)
정권은 믿을 만한 군대와 경찰을 보유하지 못했으므로 정권의 존립과 이익을 지켜줄 새로운 무력을 발전시켜야 했다. 정권은 믿을 만한 코미테13)를
국가·기구로 전환시키기 시작했고 동시에 반정부 성향의 코미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코미테들은 순식간에 정권의 경찰이 됐고
기층에서 혁명적 인물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3월 그러니까 혁명이 승리한 지 고작 몇 주 만에 코미테 내부에 열성적 엘리트그룹인
이슬람혁명수비대(IRGC:Islamic Revolution Guard Corps, 파스다란)가 창설되었다. 혁명수비대(파스다란)는
하세미 라프산자니(나중에 국회의장을 거쳐 대통령이 된다)의 지휘를 받으며 ‘이슬람공화국을 수호’하는 공식기구가 됐다. 사실상
혁명수비대는 호메이니의 비밀경찰(SAVAK)14)이었고 거리와
공장과 소수민족 지역에서 탄압에 앞장섰다. 위협적인 분위기에서도 이란전역에서 일부주민들과 지역 코미테·파스다란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슬람공화당이 창당돼 좌파단체들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한편 혁명적 요구가 제기될 때마다 대항시위를 조직했다. 4월
10일, 파스다란은 이스파한에서 일어난 실업노동자들의 시위에 발포했다.15)
호메이니가
국가수반이 된 것은 다른 반정부단체들의 조직적·이데올로기적 약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2월 혁명 승리 후 8개월 동안
호메이니의 권력은 결코 확고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란은 완전한 권력공백상태였다. 이 기간에 새로 건설된 노동자평의회들, 즉 쇼라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정치·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 쇼라의 동력이 유지되는 한 호메이니는 권력을 강화할 수 없었다. 16)
호메이니가 난관을 돌파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이었다. 혁명 이란이 혼돈의 상황으로 접어들자 미국은 온건파로 분류되는 바자르간 총리에게 비밀리에 접근한다.17) 하지만 바자르간이 카터행정부의 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비밀리에 교섭한 것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18) 이란정부수립에 또다시 미국이 개입했고, 샤 정권의 재건을 모의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어났던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팔레비 전 이란국왕의 미국입국을 허용한 것이었다. 팔레비가 중병에 걸려 수술이 급해졌고, 그의
뉴욕입성을 카터가 허가한 순간 중대한 국제문제가 발생했다. 팔레비는 이슬람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중죄인이었기에 호메이니를
비롯한 혁명세력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선다. 그리고 샤 국왕을 이란으로 인도할 것을 요청했다. 이란정권을 전복하려는 “거대한
사탄(Great Satan)”이라며 반미주의가 확산되었고, 미 대사관이 첩보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지금까지 구
미대사관은 간첩의 소굴이라 불리고 있다. 결국 혁명세력의 지지자인 학생들에 의해 1979년 11월 4일, 주 이란미국대사관이
점거된다. 그리고 52명이 인질로 잡힌다. 성직자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이 미 대사관을 점거했을 때 전에는 ‘반동주의자’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현대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세력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지도적 혁명가들로 다시 나타났다. 바자르간 집단이
혁명전부터 샤에 반대하면서 주장했던 반제국주의를 호메이니가 실행한 반면 바자르간은 반제국주의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공장쇼라들과 민족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협력했던 바자르간과의 협력도 이젠 필요없게 되었다. 과거 공장의 경영진다수를 방어하던 태도를
버리고 이제는 그들을 제거하자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권력을 인수할 주체는 공장평의회가 아니고 이슬람평의회와 협력하게
될 ‘이슬람경영진’이었고 이슬람평의회에서는 좌파와 무자헤딘이 ‘이교도’로서 배제되었다. 19) 9일 후에 이란 정부는 중대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에 예금해 둔 오일달러를 넘겨라”
이미
혁명으로 현지의 엑슨, 소칼, 모빌, 텍사코는 호메이니가 언제라도 접수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인질대신 잡고 있는 예금을
넘겨주고 나면 석유를 전부 잃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서로 인질을 잡고 대치한 셈이었는데 미국은 상대방의 팔레비 국왕과 예금을
붙들고 이란은 상대방의 대사관직원과 석유를 붙들고 있었던 형국이었다.
모건-록펠러연합은
예금지불을 동결하는 전대미문의 행동에 나섰다. 국제금융도덕에 공공연하게 반하는 이 조치를 허락한 것은 재무장관 조지 밀러였다.
밀러는 텍스트론의 회장이었고 이 회사 중역회의 최고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GE의 윌리엄 앤더스였다.
이란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런던에 있는 미국은행에서 예금지불절차를 밟았다. 체이스맨해튼 은행, 시티뱅크,
모건은행등을 상대로 한 것이었는데, 그 뒤에는 은행전쟁이라는 수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모건은행은 런던지점은 이란정부가 갖고
있는 서독의 크루프사의 주식을 동결해 버렸다. 팔레비국왕에게 주식의 1/4을 매입하도록 알선한 사람이 바로 모건이었지만 이제 그
주식이 호메이니정부의 재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
혁명
이란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나서자, 원유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이란혁명의 여파는 안보적인 측면에 그치지 않았다. 이란은 원유생산량을 하루에 390만 배럴씩 감축했고, 초기에 다른
걸프국가들이 생산량을 늘려 이를 상쇄했음에도 원유시장은 안정되지 않았다. 공급이 줄어든 것보다 원유시장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불안감이 더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21)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걸프 국가들까지 생산량을 감축하고 나서자 1981년 1월 원유가격은 배럴당 35달러 이상으로
높아졌고, 이는 1979년 초 배럴당 14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2.5배 이상의 급격한 증가였다.22) 중동석유안보를 미국의 핵심적 이익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협하는 세력에게 군사적인 수단까지 불사하겠다는 카터독트린(Carter Doctrine)은, 1980년 당시의 석유파동이 미국과 세계경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23)
1979년에
발생한 두 개의 사건으로 세계정세는 새롭게 변했다. 이란혁명과 소련의 아프간침공이다. 이 두 사건은 모두 급진적 이슬람세력의
등장을 촉발시켰고, 이슬람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확대시켰다. 당시에는 누구도 1979년의 매우 극적인 변화가 원인이 되어
미국이 새로운 시대에 첫발을 내딛고 미군이 중동에서 다수의 전쟁에 개입하며 국내에서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79년 말, 백악관은 핵무기 동결협상을 모스크바에서 이끌어낸 뒤 걸프지역, 중동 그리고 남아시아 지역의
석유자원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24)
2. 이란인질구출작전
중동지역에서의
미국의 전략 및 이익에 큰 영향을 미친 이란혁명은 이란인질사태라는 444일 간의 악몽으로 이어진다. 학생들은 샤 전 국왕과
인질들을 교환할 것을 주장하며 장기농성에 돌입했지만, 호메이니정권은 인질사태가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
인질구출과 사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카터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인 즈비그뉴브레진스키가 상황실에서
특별조정위원회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SCC)의 회의를 주재했다. 참가자는 카터의 고위급
국가안보보좌관들이었으며, 회의는 사태의 진전을 감안하여 미국의 조치를 계획하기 위해 다음해까지 거의 매일 열렸다. 1980년
4월에 이르러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지는 듯 보였다. 그때 카터대통령이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허가했다. 작전계획은 극비에
부쳐졌다. 상황실요원들조차 임박한 작전을 알아채지 못했다.25) 베트남전에서의 치욕적 패배이후 다시 대통령에게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안긴 작전이 준비된다.
1980년
1월 카터 대통령은 ‘카터독트린’을 선언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만에서부터의 석유공급은 미국의 중차대한 이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9년부터 창설을 준비해 온 끝에 1980년 2월 4일 플로리다주의 탬파근교 맥딜 공군기지에서
‘신속전개합동군’(미국중앙사령부의 전신)이 편성되었다. 그 부대는 후에 해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한 켈리(P. X.
Kelley)해병대장의 휘하에 있었다. “카터독트린을 실현하려 ‘신속개입군’을 편성하는 과정에 우리 정부의 지도자들은 곧
항공모함전투단과 수륙양용군이 아라비아에서의 미국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군자산임을 알았다.” 켈리장군은 술회했다. 26)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통합”형태가 거론되었다. 새로운 부대는 해외상주주둔군이 아니면서도 위기지역에 신속히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명백히 원정적이어야만 했다. 한편 해병대는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그런
장비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원정군이었다. 이 신속배치군은 또 중장비의 공수가 페르시아만 같은 먼 지역에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하니 해병대야말로 해상수송에 맞아떨어지는 군종이다. 또한 신속군은 성격상 상륙전을 주로 감행할
것이기 때문에 상륙전이야말로 해병대의 주특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속배치군은 육군 및 공군의 필수요원 몇 명 정도만 거느리는
하나의 “통합”해병대 사령부의 모델이 당시로서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합참은 이 모델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합참이 이 모델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해병대가 그 임무를 몽땅 떠맡아
새로운 예산과 새로 생길 고위보직들을 독차지해 버리게 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이공사령부와 같은 하나의
통합구조 안이 각 군종의 타협을 거쳐서 채택되고 말았다. 또 이 사령부의 골격을 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브라운 국방장관이
편성지시를 내린 지 거의 6년만인 1983년 1월에 와서야 한 육군 장성의 지휘아래, 기타 보직들은 각 군종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고루 나누어진 채 드디어 골격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균등배분의 원칙에 대한 보상으로서 문자그대로와는 달리 신속하고도 명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참모들만 우글거리는 또 하나의 사령부인 신속배치군이 탄생했다. 결국 이 “통합”체제의 진가를 입증할 기회가 왔다.
이란인질구출 작전이다.
카터행정부는 1980년 4월 25일 이란인질구출을 위한 독수리 발톱작전(Operation Eagle’s Craw)을 실행한다.
델타포스를
실은 수송기 12대가 이집트의 와디 키나(Wadi Keena)공군기지를 출발했다. 니미츠 항공모함으로부터 헬기 8대도
‘사막1’을 향해 이륙했다. 그런데 2대의 헬기가 모래바람 때문에 편대를 이탈하여 엉뚱한 곳에 착륙해버렸다. 또 헬기 1대는
고장으로 비행할 수 없게 되었다. 5대의 헬기만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결국 구출부대는 작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실패는 작전을 포기한 이후에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모래바람 속에서 이륙하던 헬기 1대가 급유기에
충돌한 것이다. 이 충돌로 두 기체에 화재가 발생했고, 5명의 수송기 승무원과 3명의 헬기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충돌한
급유기에는 무려 40여 명의 델타포스 대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수송기가 불길에 휩싸이자 폭발음을 들은 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수송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미군 지휘부는 헬기를 모두 파괴하고 수송기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화재와 부상자의
아비규환 속에서 현장의 대원들에게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대원들은 흔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현장에서
철수했다. 더구나 조종사가 탈출하면서 작전세부계획이 담긴 서류를 현장에 떨어뜨리고 오는 바람에 이 서류는 다음날 이란군 정보부의
손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대사관근처에 미리 잠입해 있던 대원들의 존재가 노출되어버렸다. 이들은 가까스로 체포되려는 순간을
모면하고 이란을 탈출할 수 있었다. 백악관은 다음날 새벽 1시에 구출작전의 실패를 발표했다. 27)
결국
이 계획은 1980년 4월 25일 “사막1”착륙지의 모래바닥에서 불타는 것으로 그 종막을 내렸는데, 그 편성자체가 사이공사령부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능까지도 충실하게 뒤따랐다. 해안경비대를 빼고는 이 구출작전에 모든 군종이 가담했다. 프랑스, 영국 및
이스라엘 특공대전문가들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대경실색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들은 20년 동안 크고 작은 특공대작전을
지휘해온 전문가들인지라 이미 오래전에 특공대원만은 성격이 다른 사람으로 구성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작전에
필요한 특수요원들이야 그때그때 가담시킬 수도 있다. 다른 군종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군종의 부대원일지라도 오랜 기간 함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을 작전에 가담시켜서는 안 된다. 특공대 작전은 빠른 속도와 숨 가쁜 긴장아래서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방언이나 절차에서 보이는 조그마한 차이 및 하자나 오랜 친숙으로부터 오는 상호신뢰감이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같은 일은, 공군 급유기들로부터 재급유가 필요한 해병대조종사들이 급유기가 너무 빨리 떠나지나 않을까 조바심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을 때인 ‘사막1’지점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서로간의 인식부족이 8명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다음
“통합”형태 아래서는 그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책임자가 딱 한사람 있을 수가 없게 되어있다. 그래서 이란인질구출팀은
지상공격군을 거느린 육군책임자 1명, 헬기를 갖고 있는 해군책임자 1명, “사막1”지역을 실제로 책임진 착륙지 책임자1명, 그리고
공군 책임자 1명등 소규모작전에 각자 독립된 책임자만 벌써 4명이나 되었다. 이같은 조정이 모든 전투에도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특히 특공대작전의 수행에 있어서 절대 절명인 “지휘통일”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었다. 이 인질구출작전은 이 밖에도
층층겹겹의 상급사령부들로부터의 통제를 받아야했다. 존스 합참의장은 당시 별로 지휘할 일도 없는 것 같았는데도 국방성내의
국가군사지휘센타를 통제했으며 여기서부터 층층이 내려가 이 작전을 직접 지휘한 중간지휘층은 공군부관 1명을 거느린 육군소장의
지휘아래 있던 이집트 소재 특별 “통합”기동타격대 사령부였다. 28)
여기에
NSA도 이 실패에 한몫했다. NSA의 인먼은 우연한 기회에 NSA자체의 신호정보를 통해서 이 계획을 알게 되었다. NSA가
작전에서 배제된 데 화가 난 인먼은 합참의장인 데이비드 C. 존스 공군장성을 만나 NSA가 사실을 알게 된 건 교신보안절차가
엉망인 탓이라고 경고했다. 충격을 받은 존스는 철저한 무선통신단속을 지시했고 심지어 어쩌다 신호가 도청되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헬기를 띄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존스는
보안이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다는데 대경실색했습니다...작전헬기들은 항모를 떠날 때까지 5주 동안 비행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적에게 감지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존스는...NSA가 몰고 간 그 분위기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선통신단속과 작전투입헬기의 사전훈련부족, 그리고 항모갑판위에서 너무나 오래 방치됨으로서 야기된 헬기의 상태불량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재난을 불러왔다. 29)이리하여 NSA도 본의 아니게 인질구출작전의 궁극적인 실패에 기여했다.
군사평론가 루트워크는 당시 미군체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현재,
합참아래 여섯 개의 “통합”지휘사령부가 여전히 모든 군종을 통제하고 있다. 또 별도로 유럽, 태평양, 대서양 및 중미
통합사령부등 각 통합사령부 안에서는 사이공사령부가 갖고 있던 모든 결함들이 하나도 개선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도사리고
있다. 각급 통합사령부에 파견된 장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소속된 군종의 이익, 보직의 결정이나 역할분담을 대변하게 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은 미국군사체제에는 합동참모제도를 정식으로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합참이나 각급 통합사령부에 파견, 근무중인
장교들은 이들 사령부로부터 직접 진급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의 진급 및 신상필벌권은 소속 군종만이
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군종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해이해 보이거나하면 파견된 동료장교들에 의해 즉각 소속 군종에 보고되어,
진급에서 누락되는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 새로 설치할 통합 사령부의 조직이나 그 내용 그리고 크고 작은 작전의 기획등이 철저히
비전략적인 절차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제임즈
보트 소장은 구출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 곧 중장으로 진급, 한국주둔 미군 군담직에 임명되었다. ‘사막1’지역에 도착했던 특공대원
모두가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구출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은 델타포스의 창설자이자 불운한 현지 총 책임자이던 찰스
베크위드(Charles A. Beckwith)대령에게 돌아갔다.30) 하지만 누구보다도 카터는 재선도전에 실패했다. 결국 인질들은 카터 대통령이 물러나는 1981년 1월 20일, 미국에 동결된 이란의 자산과 금을 교환하며 석방된다.31) 완벽한 패배였다. 이 치명적 기억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란을 숙적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3. 레이건, 아버지 부시, 클린턴 행정부의 대 이란정책
1980년대
내내, 이란은 사담의 침입에 맞서 8년간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걸프지역 전체에 확산되어 이란(이라크도 물론)은 유조선을
공격했다. 유조선 공격을 방어하려고 미국해군은 이란전투함과 전투기와 포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989년 이란의 소형함정과 전투를
벌이는 중에 미해군의 순양함 빈센스(Vincennes)호는 이란의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격추시켜 29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 민간여객기의 격추와 함께 이란-이라크전쟁에 대해 미국이 유지하던 ‘중립성’은 끝났다. 미국은 이라크에 정보를 제공해 도왔고,
이란으로 향하는 군수물자를 차단했었다.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중립성을 표방했다. 이제 수백명의 이란민간인을 살해했으므로 테헤란은
분명히 이라크 편이 된 미국을 보복공격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달리 미국의 이란민간인여객기 오인격추로 결론짓고 전쟁은
끝났다. 인명의 손실이 컸던 8년간의 전쟁에 지쳐 이란혁명정부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끝낼 구실을 찾고 있었으며, 격추사건이 그
구실이 됐다. 공개적으로 이란은 미국이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왔지만 이라크와 미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쟁을 지속한다면 미국의 침입으로 혁명이 좌절될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란이 종전을 선언하자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인명과
자원이 피폐해졌던 이라크의 후세인도 기꺼이 종전을 받아들였다. 35만명의 인명이 전쟁으로 사망했다.32)
아버지 부시행정부의 경우 기본적인 노선은 균형정책이지만 이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안에 대해 필요할 경우 이란에 협조를 요청하며 관계개선의 가능성을 보였다.
반면 클린턴 1기 행정부의 경우 의회와 경쟁하듯 이란과 이라크에 대해 철저하게 이중봉쇄 정책을 취하며 제재의 수위를 높였고, 민간차원의 관계개선 시도마저도 강력한 제재로 차단하는 모습을 보였다.
33)
1995년
알폰세 다마토(Alfonse D'Amato)상원의원은 이란과의 교역을 금지하고(인도주의적 물품은 제외) 미국의 제3세계 원조금이
이란의 석유구입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런 의회의 법안발의에 대응해 클린턴 행정부는 대통령명령을 통해
유사한 법안을 실행했다. 이 법안으로 코노코(Conoco:미국정유회사)가 이란과 추진하던 10억 달러상당의 계약이 파기됐다.
핼리버튼의 사장인 딕 체니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반대했다. 또한 클린턴은 앨 고어 부통령에게 지시해 중앙아시아(특히 카자흐스탄)의
지원을 활용할 석유와 가스파이프라인을 건설하도록 각국의 노력을 조정하게 했고 이 파이프라인이 이란영토를 지나지 않도록 조치하여
이란이 이 대규모 공사에서 아무런 경제적 혜택을 얻지 못하게 했다. 백악관과 국무부가 공조하여 동맹국이 이란과 경제관계를
단절하도록 설득했으나 커다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행정부의 조치에 만족하지 못한 의회는 1995년 말에 추가적인 이란제재법안을
통과시켰다. 아울러 이란정권의 전복을 목표로 CIA가 벌이는 비밀작전에 자금지원을 은밀히 허용했다. 한 달 뒤인 1996년 1월
워싱턴포스트가 이 사실을 폭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의 주장으로 1천 8백만 달러가 추가적으로
배정되었다고 썼다. 기사에 따르면 깅그리치는 이란정권을 전복시킬 자금지원을 원했고, 이 자금이 테헤란정부의 ‘행동변화’를 이끄는데
사용되기를 원하는 행정부와 합의했다고 한다.
깅그리치가 클린턴을 설득해 혁명정부를 전복시키도록 자금을 지원하려 했던 이야기는 이란의 모든 계층에 경종을 울렸다. 미국은
1981년, 미국 대사관억류 인질석방에 합의하면서 혁명정부를 전복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란정부는 여전히 미국이 이란의
국왕을 복귀시킬까봐 노심초사했다. 이런 미국의 속사정을 들여다본 이란의 의회인 마즈리스(Majlis)는 미국에 대항하는 비밀행동에
대해 자금지원을 공개적으로 승인했다. 마즈리스의 조치는 이미 전세계에 걸친 반미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34)
이란의
테러목표가 될 가능성에 주목되었던 애틀랜타올림픽 직전인 1996년 5월, 벨기에 당국이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전갈이 워싱턴에
전해졌다. 그들은 독일로 향하던 선박을 나포했다. 선박내부에서 ‘오이절임’이라 써 붙인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누군가 특별주문 제작한 세상에서 가장 큰 박격포가 들어 있었다. 이 무기는 가까운 곳에서 발사되면 이스라엘이나 미국대사관의
방어벽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폭발력이 높았다. 배의 출발지를 추적해보니 이란이었다.35)
국방부는
테헤란에 경고를 보낼 목적으로 항모전단을 이란근해로 일시적으로 배치시키라는 백악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미해군은 이란이 걸프만의
섬과 해변에 배치한 대선박 미사일을 점점 더 걱정했다. 특히 인도양으로 향하는 좁은 해역인 호르무즈해협(Strait of
Hormuz)이 매우 위험한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5월초에 국방부는 이란이 장거리 미사일을 북한에서 입수했고 깊은 벙커에 이
미사일을 숨겨놓았다고 발표했다.
1979년
이전에 미국은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에 거의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예외라면 영국이 식민지배를 끝내고 돌아갈 때 인수했던 바레인의
소규모 해군시설 정도였다.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고 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성급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들
국가가 기지건설에 난색을 표하자 미국은 비상시 ‘미국군대의 출동’을 용인하고, 기존 시설을 강화시킬 권리를 요청했다. 어떤 국가도
미군의 진입을 공공연하게 용인함으로써 소련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군기지를 확충하고
군수물자를 비밀리에 사전 배치하는 데는 동의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위기시 미군이 이들 기지와 물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미군의 사용권에 대한 담보없이 소규모군사력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기지 및 시설을 구축하려
했다. 즉 ‘과잉시설투자와 군수물자공급’을 원했다. 미해군은 페르시아만의 항구 두 개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중 아랍에미리트의
항구만이 항모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미국 밖에서 두바이 근처의 이 항구만큼 미국선박이 많이 정박하고 많은 선원이
상륙하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이 항구는 미 해군시설이 없는 상업항이었다. 미 해군기지는 걸프만을 수백 킬로미터 더 올라간 내륙의
바레인에 있었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미해군이 주둔했다. 유조선전쟁과 뒤이은 걸프전이후 바레인의 소규모해군기지는 대규모시설을
갖춘 기지로 확장했다. 1996년 국방부는 이 기지가 미해군의 새로운 함대인 5함대의 본부로 결정되었다고 발표했다. 시베리아항의
소련해군은 무력화됐고 이라크 해군은 페르시아만 끝의 샤트 알 아랍(Shatt al Arab)에 주둔했으므로 5함대의 유일한 적은
이란이었다.
클린턴
2기 행정부의 경우 페르시아걸프 지역의 구도가 이란과 미국의 관계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이란의 국내정치적 변화와 하타미
대통령의 적극적 행보에 느리게나마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임기 말 시간과 자원의 제약 앞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말았다.36) 아들
부시정부는 하타미대통령의 ‘문명간의 대화’ 노력에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며 문명충돌론으로 응수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까스로 이란과의 핵합의에 도달했지만, 트럼프는 이 모든 것을 뒤집으면서 다시 문명충돌론을 부활시켰다. 이란으로서도 미국을
신뢰하기 어려워졌다.
2) 트럼프정부의 군사정책
1. 암살과 표적살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술레이마니(Qasim Suleimani) 참수작전 후 '종식됐다'(terminated)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다른 미국 관리들은 '표적 살해'(targeted killing), '치명적 조치'(lethal action)라는 말을
꺼내고 있다. 반면 이란 대통령이나 총리는 둘 다 술레이마니의 사망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해인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요인암살(assassination)은 순수한 국제법상의 개념으로서 "적을 살해하는 무력행사의 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37) 따라서 같은 국가 내에서 그 어떤 목적 또는 이념의 차이 때문에 이루어지는 살해로써의 암살과는 구분된다고 하겠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요인암살(assassination)의 효력등에 관한 전쟁법상의 국제관습법을 성문화된 법전으로 만들려는 최초의
노력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Lieber Code이다. 1863년 미육군은 육군일반명령으로 위 법전을 채택하여, “문명국에서의
요인암살(assassination)의 선택은 원시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표현하고 있다.38)
그러나
요인암살(assassination)을 금지하고 있던 미 육군의 Lieber Code는 몇 번의 개정 절차를 거쳐 결국
폐지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함께 미 의회는 War Power Resolution을 통과시킴으로써 그 동안 행정부가 독주해온
해외 작전에 관한 권한을 제한하였다.39) 그러나 이 결의는
단지 공식적 의미의 작전만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암암리에 비밀로 진행되는 작전에 대하여는 통제의 밖에 두었다. 그리고 의회 자신이
요인암살(assassination)에 관한 작전은 공식적 작전의 범주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는 행정부의 전권
하에서 모든 작전이 주도되었다.40) 미 행정부에 의한
CIA통제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점과 요인암살(assassination)을 미국의 대외 정책의 도구로 사용한 것에 대하여
비난함과 아울러 요인암살(assassination)은 결코 적법한 외교정책적 수단이 될 수 없으며 미국이 추구해온 국제질서와
도덕적 가치에 반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41) 아울러 차후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의회 차원의 통제 장치를 찾게 되었다. 의회는 미국의 재판권에 속하는 자가 외국 국가원수의 요인암살
(assassination)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 되었다면 이를 범죄로서 규정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의 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 의회의 법률제정에 대한 노력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사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차선책으로
채택된 것이 대통령에 의해 요인암살 (assassination)을 금지하는 대통령 집행명령(Executive Order)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체 되었다. 42)
요인암살(assassination)을
금지하는 규정은 법률에 의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집행명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 자신이 언제든지 필요한 경우 이를 취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위 집행명령은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43)
현재의
국제법 아래에서는 요인암살(assassination)을 대외정책으로 삼을 수 없다. 다만 불법한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하여
자위권의 수단으로 그 지도자들을 타격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법한 무력 행사의 합법적 수단이고, 따라서 그것은
요인암살(assassination)이 아닌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라고 할 것이다.44)
표적살해(targeted
killing)에 있어서는 다음의 4가지 평가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를
행사함에 있어서 개인 또는 적은 집단의 제거가 거대집단에 대한 공격을 제거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통상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는 결과적으로 종합해볼 때 전체적인 피해를 줄이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를 행사함에 있어서 그것이 본래의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만일
개인 또는 어떤 집단의 제거가 전체적으로 목적의 달성에 충분히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표적살해(targeted killing)의 선택은 그것이 다른 모든 평화적 가용수단을 행사한 다음 마지막 선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타격대상에 대한 체포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살해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는 어떤 형태로든 평화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요건은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다소 불명확한 요건이라 할 수 있겠다.
즉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는 일정한 요건 하에서 국제법상 허용되는 적법한 무력행사라고 할 수 있다. 정전이론에
의할 때 표적살해(targeted killing)가 적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정당한 원인(just cause)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마지막 수단으로서 이에 호소해야 하며, 그 결과가 평화에의 기대가
예견되어야만 한다.46)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히나 샴시 국가안보프로젝트 국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당화는 아직 설득력이 없다면서 "무력사용이 매우 제한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국내·국제법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시사한 대로 술레이마니 살해를 둘러싼 정보가 더
공개될 때 판단할 사안이지만, 미 행정부가 외국에서 표적을 살해할 때 관리감독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샴시 국장은 미국 대통령이 갈등상황에서 자의적 생사여탈권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평화와
안보관점에서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표적살해는 비국가 행위자인 테러분자와 외국정부관리를 구분해 왔으나 술레이마니와 관련해서는 그런 구분이 훨씬 덜 분명하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물론 미 정부는 술레이마니를 2011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그가 지휘한 쿠드스군을 포함해 이란 혁명수비대도
지난해 4월 비슷한 딱지를 붙였다. 사실 테러리스트에 대한 표적살해는 전임 오바마 행정부에서 그 대상이 크게 확장됐으며 트럼프
행정부도 소말리아, 예멘, 시리아 등에서 드론공격으로 표적살해를 하고 가장 최근에는 시리아에서 IS 우두머리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제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덤대 로스쿨의 캐런 그린버그 국가안보센터 국장은 술레이마니 사건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며 "정부 내 관리를 겨냥하면서
전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고 CNN에 말했다. 그는 미국 행정부에 대해 "선을 넘었고 그 의미는 심대하다"고 말했다.
그린버그는 이를 '시스템 붕괴'와 연관돼있다고 본다면서 지난 10년간 아무런 견제가 없이 드론에 의한 공격이 계속해서 확대된 것에
대해 어떤 인가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야당인 민주당이 술레이마니 살해가 의회인가 없이 이뤄진 데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47)
드론
워즈의 크리스 콜 대표는 “표적살해는 국제법 규범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으며, 드론 전쟁의 폭력적인
신시대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표적살해에 대한 국제법규범과 해석도 모호하고 편파적이다. 일반적으론 “적의 위협이
압도적이며 임박했을 때 자기방어를 위한 국가의 행위”만이 합법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새 ‘임박한 위협’의 원칙도
무너지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대통령은 술레이마니 살해의 명분에 대해 “임박한 위협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강변했다.48)
다음으로
공습의 자위성을 놓고 지난달 29일 미국 군수업자 한 명이 이라크에서 로켓포 공격에 사망한 것과 관련, 국무부 관리는 두 달 새
술레이마니와 그가 조종하는 대리세력에 의한 11번째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이 옳다면 이런 자기방어는 유엔헌장에서도
정당하다.
하지만
초법적인 처형에 대한 유엔 특별 보고관인 아그네스 칼라마르드는 자기방어 정당성과 관련, 임박한 무장공격에 대한 증거가 있을 때만
유효하다고 방송에 말했다. 다만 자위에 대한 국제법은 진화하고 있어 논쟁적인 측면이 있다면서 미국과 이란 간 무력분쟁도 이미
진행 중인 사안으로 전쟁법이 적용될 것이고 그 연장선에서 볼 때 술레이마니는 합법적인 표적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는 현재 양국간 무력분쟁이 있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미국과 이란은 이슬람 급진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싸워왔다고 말한다. 미국 의회도 이란과 전쟁을 비준한 바 없다.49)
또한
자위권이 성립되려면 필요성(necessity), 비례성(proportionality), 구별성(distinction)은 항상
요구되는 요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표적살해(targeted killing)가 적법한 무력행사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많은 요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50)
2. 민군관계와 비밀작전
민군관계와
관련한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객관적 통제이론에 의하면 민간인 지도자가 군을 가장 건전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형태로서 군인을 정치와 분리시키고 그들에게 군의 문제에 대해 가능한 재량권을 용인해 줌으로써 전문화효과를 최대화하라는
것이다. 51)
정치와
전략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전략은 정치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군인들이 원하는 모든 요구사항은 일단
정치권에서 판단이 내려지면 그 후에 전략과 지휘는 정치와는 완전히 분리된 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전략,
보급, 작전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일단 양자를 구분하는 분명한 선이 그어진 후에는 모든 주체세력들은 월권행위를 삼가야 한다.52)
민군관계이론은
베트남전쟁의 패배이후 이란과 레바논, 그레나다에서 사이공사령부의 망령을 극복하기 위해 미군이 수립한 나름대로의 원칙이었다. 이는
1986년 골드워터-니콜스법으로 수렴되었고 걸프전은 민군정상이론의 성공적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원칙은 쉽게 무시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너덜너덜해졌다. 정치인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비밀작전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고 민군정상론으로 무장된 군인들은
비밀작전에 군대를 동원하는 정치적 지시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포기하고 문민지도자와 타협하는 합참의장에 의해 쉽게
와해되었다. 이란과 관련한 사건에서 그 사례는 자주 목격되었다.
레바논에
억류된 인질을 석방하리란 기대로 이란에 무기판매를 주선하고 그 판매대금의 일부를 공산주의정권에 저항하는 니카라과 콘트라반군에게
지원했을 때 백악관의 국가안보보좌관 존 포인텍스터(John Poindexter)는 비밀작전을 동원하고 근시안적이며 위법의 소지가
있는 절차를 밟았다. 의회는 콘트라반군에 대한 자금지원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인질구출을 위한 무기거래는 레이건 대통령이 자주
언급했던 테러리스트와의 비협상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레이건대통령은 간신히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났다.53)
1996년
사우디 코바르의 미공군숙소에 대한 차량폭탄공격에 대해 미국은 비밀작전을 준비했다. 클린턴은 미국이 이란에 다시 무력을
사용해야한다면 대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많은 펜타곤 문관들이 오랫동안 참석하려고 노력했지만 파월합참의장은 전쟁계획수립에 군인이
아닌 문관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다. 비밀작전에 군사력의 동원을 매우 싫어했던 파월과 달리 샬리 카시빌리는 전쟁에 버금가는
상황에서 안정을 되찾으려면 군대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6년 7월 펜타곤에서 열린 회의에서 샬리는 현 상황이
전쟁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군대는 거의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한 이란 작전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이 제시한 계획은 2차
대전 중 아이젠하워가 세운 계획처럼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육군과 해병부대를 투입해 몇 개월간 이란전역을 소탕하는
작전을 세웠다.54)
체포
또는 백악관이 사용하는 용어로 ‘특별한 인도(extraordinary renditions)’는 비밀스럽게 그리고 항상 작전이
진행되는 국가의 국민이 알지 못하게 테러리스트를 체포하는 것이다. 합참은 실행하고 싶지 않은 작전을 요청받을 때마다 사용하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대답을 갖고 있었다.
-이 작전은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다.
-이 작전은 위험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미군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해 대통령을 곤궁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
-합참의 ‘군사전문가적 의견’에 따르면 이 작전을 시행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문서로 명령을 내리면 물론 작전에 들어갈 것이다.
-덧붙여 군사전문변호사는 이 작전이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1993년
무라타니를 체포하자는 의견이 제출되었을 때 백악관 법률고문인 로이드 커틀러(Lloyd Cutler)는 대통령에게 회의의 소집을
요청해 이 체포가 어떻게 국제법을 위반하는지 설명했다. 클린턴은 앨고어가 남아프리카에서 밤을 새워 날아와 늦게 회의에 참석할
때까지 커틀러의 뜻에 동의하는 듯 했다. 고어는 양쪽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머리 아프게 논쟁할 사안이 아닌데요. 물론 이
작전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비밀작전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녀석은 테러리스트입니다. 가서 체포하세요.” 이것이 민주당의
진보적 대선후보였던 고어의 상식이었다.
골드워터-니콜스법은
합참의장은 문민지도자들에게 군사적 조언과 최적의 선택을 제공하는 임무를 정립되었다. 이 말의 전제는 민군정상이론에 입각한 정치적
중립이다. 그러나 현 마크 밀리 미합참의장은 술래이마니 암살을 발표하는 트럼프 옆에 서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정치적 결정”을
변호하면서 위험할 만큼 정치영역에 접근했다. 트럼프는 과거에도 신뢰받는 전·현직 장성을 이용하고는 명예에 먹칠을 해서 내보냈다.56)
3) 하메네이의 정치군사정책
1. 초국가로서의 이슬람공화국
초국가(Trans-national)란
국가를 넘어(Beyond)선다는 의미에서 국가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국제(Inter-national)관계와 구별된다. “국가라는
한계를 넘고 국가의 벽을 뚫으며 국가가 가지고 있던 이제까지의 불투과성을 무시하는” 그런 운동이다. 칼 슈미트는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초국가조직은 코민테른이라고 말한 바 있다.57) 근대국가 성립이전에 존재했던 중세 교황체제 역시 대표적 초국가이다.
호메이니는 혁명 후 첫 노동절 기념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란과 모든 이슬람국가는 하나의 이슬람협회입니다. 각각의 이슬람협회들은 신과 마지막 이맘(메시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슬람 협회의 작은 지부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슬람협회들 안에서 화합해야 합니다.”58)
이슬람에서는
국민국가에 기초하여 세계를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슬람의 기본사상은 세계를
무슬림의 영역인 다르 알 이슬람(dar al-Islam: 이슬람 영역)과 불신앙의 영역인 다르 알 쿠프르(dar al-Kufr:
불신앙의 영역)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혁명의 관념적인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 중의 하나이다.59)
이슬람혁명의
의미체계와 정체성은 이란이슬람공화국의 헌법에 제도화되어 있다. 이란이슬람공화국헌법의 전문에 따르면, “억압자에 대한 모든
피억압자의 승리를 목표로 한 운동이었던 이란이슬람혁명의 내용에 주목하여 헌법은 국내외에서 이 혁명의 지속을 보장하는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한다. 특히, 다른 이슬람 및 대중운동과 함께 단일한 세계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의 영구혁명의 기초를 제공하고 이란이슬람 공화국헌법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쿠란구절을 기초로 통합된 글로벌
움마(세계무슬림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한 이슬람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이다.60)
1979년 혁명과 함께 창설된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쿠드스군(Quds Force: 예루살렘 군)은 이란 이슬람혁명의 전파, 반 이스라엘 작전수행 등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 활동하는 부대이다.61)
2. 쿠드즈 군과 시아파벨트 민병대
이슬람무장단체들의 형성은 국내의 구조적인 불균형, 지도자의 구비, 중앙통치기구의 붕괴, 외세의 영향 등에 기인하고 있다. 쿠드즈 군은 시아파벨트라 불리는 시아파62)국가들에서
군사·정치조직의 성격을 띤 민병대를 창설, 지원하고 있다. 1982년 탄생한 헤즈볼라, 제1차 팔레스타인민중봉기 기간인
1987년에 탄생한 하마스(Hamas), 2003년 미국의 침공이후 창설된 이라크의 마흐디(Mahdi)민병대 등이 그 예이다.63)
ㄱ. 레바논 헤즈볼라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의 침공작전이 한창인 1982년 8월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1회 이슬람운동협의회 (Islamic Movement
Conference)에서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레바논성직자와의 만난 자리에서 이들에게 귀국하여 대 이스라엘항쟁을 적극 추진하고
사원을 지하드의 활동근거지로 이용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이 호메이니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반 이스라엘 반 서구저항운동단체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헤즈볼라이다. 이들은 이제 창설된 단체의 이름을 두고 많은 논란을 겪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테헤란으로 호메이니의 의견을 듣기위하여 밀사를 파견하였다. 그 결과 호메이니는 이 조직의 이름을 모든 이슬람신자들을 포함할 수
있는 것으로 코란의 문구를 사용하여 ‘신의 정당,’ 즉, ‘Party of God (hizb all ah)’ 으로 할 것을
지시하였다.64)
곧이어
호메이니는 이 단체를 지원하기 위하여 1,500명의 이란혁명수비대원을 베카계곡의 주도 바알벡 (Baal beck)으로
파견하였다. 바알벡은 레바논의 곡창지대이며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었으나 이들의 도착이후 레바논인을 포함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과격이슬람무장단체의 요람으로 변하였다. 이 지역은 이란혁명수비대의 무대가 되었으며, 작은 이란혁명정부와 비슷하게
통치되었다.
특히
이 조직의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이란혁명을 외부로 전파하는 책임자이었다. 혁명수비대의 문화부처 (Cultural Units)는
호메이니의 혁명사상을 대원들에게 교육할 뿐만 아니라 정치공작 군사작전 등을 외부로 수출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걸프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국가에도 대원을 파견하여 반 호메이니세력의 제거와 이슬람혁명정신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
호메이니는
이슬람공화국최고국방위원회 (Islamic Republic Higher Defense Council: 이란의 최고
군-안보정책결정기구)를 통해서 헤즈볼라에 지시를 했으며 레바논에 슈라(majlis alshura: consultative
council for Lebanon)를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헤즈볼라를 감독 및 통제하게 되었다. 슈라위원은 1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이 성직자이었다. 그 밑으로 7개의 하부조직이 있었으며 모두 이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와 같이 레바논과
이란의 성직자들이 연대하여 헤즈볼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러한 그의 역할로 레바논 내에서 영향력을 향상했으며
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이슬람국가에서 그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즉, 아랍-이스라엘갈등의 주 진원지인 레바논에서 반 이스라엘,
반 서구 게릴라단체의 대부가 된 것이다.65) 이란의
국가권력을 장악한 호메이니는 더 이상 시아 성직자들을 정치에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이란의 이슬람공화당도 1987년까지만
존속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레비논의 시아파 울라마들은 여전히 선동적 수단을 사용한 정치적 동원과 정당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이들은 헤즈볼라를 통해 정치력을 발휘하였으며, 이를 통해 레바논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일정정도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헤즈볼라는 호메이니의 종교율법학자 위임통치방식을 채택하였으며, 준 군사조직체를 보유하였고, 사회주의혁명조직체를 이슬람에
도입하였다. 실제로 헤즈볼라의 시아파 지도자들은 통치체제를 슈라(Shura)에서 구소련의 공산당정치국(Politburo)으로
바꾸었다.66)
이란혁명수비대(IRGC),
이란혁명수비대의 특수조직인 쿠드즈군(Quods Force예루살렘군), 정보보안부(MOIS)와 다양한 국가 출신들로 구성된
외인부대 헤즈볼라를 통해 이란은 암암리에 무기수출을 계속했다. 이란은 이 조직을 확대해 가깝게는 사우디에, 멀게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에 헤즈볼라지부를 설립했다. 67)
미국잡지
국익(National Interest)의 전편집장이었던 켁(Zachary Keck)은 미국에 대한 열세를 보완하기위한
이란의 군사교리는 세가지 능력에 기반한다고 한다. 탄도미사일과 호르무즈해협봉쇄로 대표되는 비대칭해군전력과 헤즈볼라이다. 그는
헤즈볼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헤즈볼라는 이란의 무기고에서 가장 다재다능하고 사용가능한 “전쟁무기”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열려있다. 실제로 이란에 대한 헤즈볼라의 가장 큰 가치는 운영범위일 수 있다. 이란의 쿠드즈군이 중동이외의
지역에서 공격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 헤즈볼라는 그러한 제한이 없었다. 예를 들어, 2012년 초 쿠드즈군에서 일하는
이란요원들은 이스라엘의 이란과학자암살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 조지아, 태국 및 케냐와 같은 곳에서 이스라엘의 목표물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각각의 경우에, 이란요원들은 공격을 실수로 망쳤고, 때때로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난처하게 했다. 쿠드즈군이
실패한 뒤, 이란은 불가리아의 이스라엘 관광객들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던 헤즈볼라로 향했다.68)
원래
미국은 레바논을 항상 우호적이고 친서방국가로 분류했다. 레바논은 지중해 동쪽 끝의 마지막 보루였다. 1982년 레바논의 정치적
불안이 심해질 때 레이건은 재선에 성공해 두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었다. 레바논사태를 이란의 반미정권과 연계시키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바라본 레이건은 사태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해병대를 베이루트로 파병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조치는 헤즈볼라가
복수로써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구실을 제공한 셈이었다.
레이건은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 방송을 통해 부분적으로 ‘석유 때문에’ 레바논에 군대를 파병했다고 말했다. 레바논에서는 석유가 나지
않았다. 1983년 이란이 후원하는 헤즈볼라는 새로운 미군주둔에 맞서 미군 해병기지와 대사관에 파괴적인 두 번의 자동차
폭탄공격으로 대응했다. 이 공격으로 278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69)
베이루트의
미해병기지가 공격당한 후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중동의 저항세력들이 할 수 있는 일과, 구별하기 힘든 다양한 이슬람 정파의
내전이 어떻게 미국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지를 인식했다. 국무부에서 새로 창설된 중동정치군사팀은 포위된 베이루트의 미국대사관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레이건은 이 공격에 연루된 시리아나 이란을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미국 외교관은 계속
베이루트에 주재하기로 결정했다. 베이루트 인근 야즈데(Yazde)의 대사관저로 재배치한 미국외교관은 야포사격을 받자 베이루트
해안에 대기 중인 미 해군 순양함인 뉴저지호의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레이건은 미군의 무력시위를 통해 추가적인 테러공격을 막기로
결정했다. 몇 분후 2차 세계대전에서 용맹을 떨쳤던 뉴저지호의 유명한 ‘폴크스바겐 크기만한 탄피’를 가진 함포가 동쪽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적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미국이
미리 충분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레바논의 정파간 유혈충돌은 점점 격화돼, 레바논 사태는 더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일련의
폭격과 포격이 있은 후, 레이건은 미군의 레바논 철수를 결정했다. 강대국을 손쉽게 몰아 낼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베트남전의 ‘악몽’에 사로잡혀 있다는 인식이 중동전역에 퍼졌다. 몇 년 뒤 오사마 빈 라덴은 베이루트에서 미국을 몰아내는 일을
성공적인 사례로 언급했다.70) 더 이상 이라크와 전쟁에 국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자 이란은 헤즈볼라지원을 강화했고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공격도 증가했다. 의회와 행정부는 서로 앞 다투어
추가적인 대이란 제재법안을 제출했지만 헤즈볼라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1992년 존 맥케인(John McCain)상원의원은
‘최신식 재래식무기’나 부품을 이 두 국가에 수출하는 제3의 국가에도 제재를 가하는 이란-이라크 비확산법 (Iran-Iraq
Nonproliferation Act)를 발의했다.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이 폭탄공격을 당했다.
199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대인 문화센타에서 폭탄이 터져 85명이 사망했다. 정보당국은 헤즈볼라와 이란이 이 공격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암시했지만 아르헨 정부는 공개적으로 이들을 비난하지 않았다.71)
ㄴ. 바레인 헤즈볼라
바레인은
수니파 이슬람 왕족인 칼리프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란의 국왕인 샤(Shah)는 고대에 관계가 단절되었다며 바레인을 이란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국제연합위원회는 이란이 1970년에 한 선언에 배치되는 결정을 내렸고 바레인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레인에는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적었으므로 칼리프는 이 작은 섬국가를 서구 스타일로 개발해 부유한 사우디인과 조국에서 추방당한
부자들을 위한 쇼핑, 금융과 오락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레인 시민 반 이상은 시아파이슬람교도로 칼리프와 이질감을 느꼈다.
그들은 이슬람혁명세력에 호의적이었다. 6월초 워싱턴 주재 바레인 대사가 자국의 외무장관을 대신해 내게 전화를 해 백악관에서
긴급히 만나자고 요청했다. 그는 전날 바레인에서 발견된 폭탄과 다른 무기의 사진을 보여줬다. 칼리프를 무장공격해 제거하고 바레인에
친이란 정부를 수립하려던 이란혁명수비대의 음모를 담은 자료도 넘겨줬다. 테헤란의 지시를 받은 조직은 1993년 이란 중북부의
곰(Qom)에서 조직된 바레인 시아파교도그룹으로 헤즈볼라바레인이라 불렀다. 바레인 대사는 헤즈볼라 죄수를 조사해 얻은 자세한
내용을 제공했다. 서구 언론의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바레인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이란이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미군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려 한다는 증거였다.
이란혁명수비대의
쿠드즈군이 바레인, 쿠웨이트와 사우디에서 헤즈볼라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를 모집해 이란에서 교육을 시킨 후 다시
바레인으로 침투시켰다. 사우디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이란에 항의했지만 이란은 혐의를 부정했다. 어느 날 밤 사우디 국경수비대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폭발물 탐지견을 동원해 수색하던 중 세관 검문소에 세워진 수상한 차량을 발견했다. 이 차에는 정교한
플라스틱폭탄이 실려 있었다. 계속된 사우디국경수비대의 조사와 수색으로 헤즈볼라행동대원들을 체포했다. 이 차량은 사우디
헤즈볼라조직이 운영했으며 레바논 베카(Beqaa)계곡의 캠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캠프는 명목상으로는 무가살이란
사우디사람이 운영했지만 그는 이란의 특수부대인 쿠드즈군의 조직원이었다. 차량에 실린 폭탄은 사우디의 미군시설을 목표로 했다.
사우디는 이런 사실을 미국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레바논베카계곡의 헤즈볼라캠프와 가까운 시리아에 요청해 사우디 헤즈볼라요원을
체포해 넘겨받았다. 시리아는 이 사건과 아무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72)
ㄷ. 사우디 헤즈볼라
걸프전이후
사담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며 군대를 재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를 핑계로 대규모 미군주둔의 필요를 역설했다. 대부분의
미군은 사우디기지에 머물렀다. 미국은 미군주둔을 위해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과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아랍에미리트와도
임시협약을 체결했지만 현지 법률을 위반하는 미군의 처벌문제를 다루는 방법에는 이견을 보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도 미군항모는
정기적으로 두바이 인근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제한적이고 비밀스럽게 장비를 배치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사우디는 기본협약을 논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체니가 약속했던 것처럼 사우디국왕은 모든 미군의 철수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사담과 그의 건재로 인해 사우디국왕은 쿠웨이트에서 전쟁이 끝난 후 미군철수의 이해득실을 새롭게 계산했다. 전쟁이 끝난 후
주둔미군의 숫자는 빠르게 감소했지만 일부는 계속잔류 할 것이라는 견해가 사우디대중에게 점점 명확해졌다. 전투기 편대와 지원비행기는
대여섯 군데 공군기지에 잔류했다. 미군사령부의 규모는 축소됐지만 여전히 활동적이었다. 아울러 사우디는 미제무기의 대량구입을
계속했다. 무기계약이 체결될 때마다 많은 미국 민간인이 사우디에 들어와 활동했다. 처음에 미군진주를 반대했던 사우디 반체제 세력은
다시 주둔한 미군의 불경한 행동을 비난했다. CIA는 이들 반체제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말하는지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73)1996년
사우디 석유산업도시 코바르 타워로 알려진 미 공군숙소에 대한 차량폭탄공격으로 미국인 19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당했다.
코바르공격이 발생한 다음날, 백악관은 이란의 쿠드즈군과 그 전위조직인 사우디헤즈볼라가 사건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상세한
NSC보고서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받아본 존 도이치 CIA국장은 이 보고가 다양한 가설중 하나일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코바르
사건을 조사할 수 있도록 협조하라는 백악관의 압력은 3년 이상 지속됐지만 사우디는 소극적이었다. 사우디는 이란문제에 연루되기를
꺼렸고 그 가장 큰 이유가 미국의 복수가 철저하지 못할 경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이란과 끝가지 싸우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면, 사우디는 코바르 테러사건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이란의 역할을 모두 말해줄 수 있다고 했다. 일부 사우디 왕족은
이란과의 어떤 전쟁도 ‘상처뿐인 승리’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산유국 사우디는 거의 파산할
뻔했다. 사우디는 미군과 연합군을 지원하느라 막대한 돈을 썼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국에서 막대한 무기를 구입해 무기대금지불에도
절절매야 했다. 사우디에서 미군의 존재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른 전쟁이 일어나면 또다시 대규모 미군의 주둔이 불가피했다.
국왕은 매우 무능력해 왕세자 압둘라(Abdullah)가 의사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 알리지 않고 이란과 협상에
들어갔다. 수개월 후 사우디와 이란이 합의한 핵심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란은 사우디 내에서 활동하는 테러조직을 후원하거나
지원하지 않는다. 둘째, 사우디는 미국이 왕국영토에서 이란을 공격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74)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이후 하메네이 (Ali Khamenei)가 그의 후계자가 되고 라프산자니 (Hashem Rafsanjani)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란은 합리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89년의 테헤란모임에서 헤즈볼라의 지도자들은 무력투쟁과
합리주의노선을 가지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무력투쟁을 주장하던 알 투파일리 (al-Tufayli)를 하메네이가 헤즈볼라사무총장에
유임시켰으나 그의 임기가 끝나는 1991년에 합리주의노선의 압바스 무사위를 그의 후임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곧 암살되면서 내적인 권력 투쟁이 재현되었다. 결과는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는 하산 나스랄라가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투파일리가 나스랄라의 선출에 반대하면서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나스랄라는
소장파일 뿐만 아니라 투파일리와 1983년에도 권력투쟁을 했던 압바스 무사위의 제자였다. 더욱이 투파일리는 나스랄라의
합리주의노선을 맹비난하였으며, 이란과도 이념적 및 개인적인 불만으로 1998년에는 베카계곡의 헤즈볼라기지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2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결국은 추방되었다. 이와 같은 진통을 겪은 후 헤즈볼라는 나스랄라체제가 확고히
확립되고 합리주의적인 노선이 정립되게 되었다.75)
그러나
헤즈볼라는 여전히 이스라엘과의 마찰을 일으키고 있으며, 최근의 헤즈볼라가 행하는 폭력행위는 모두 자국 내 경쟁세력이나 제3국이
아닌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행위들은 이스라엘과의 무장투쟁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군사적 충돌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테러행위의 지속으로 보아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2000년 5월 24일, 이스라엘군이 철군하였으나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Shebaa 농장지역을 레바논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철군을 요구하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에 이 지역을 둘러싸고 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분쟁이 확대될 가능성도 안고 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006년 7월 12일 이스라엘의 레바논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결국 이스라엘군은 34일 만에 철군을 하게 되었고, 이 한 달간 지속된 공격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의 공격을 막아낸76) 헤즈볼라의
위상이 강화되었으며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아랍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의 침공에 저항하여
전투를 계속해 나가면서 헤즈볼라는 레바논 시아에게는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슬람조직으로, 다른 레바논인들에게는 국가의 명예를 지키는
조직으로, 아랍청중들에게는 서구의 제국주의에 맞서 아랍본토를 보호하는 조직으로, 이외의 국제적인 청중들에게는 합법적인 자기방어를
수행하는 것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었다. 77)이러한
전략이 실제로 많은 성공을 거두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헤즈볼라는 쉽사리 이스라엘과의 대결을 포기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헤즈볼라는
아직 테러라는 수단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다른 손에 정치적 협상이라는 다른 도구를 쥐게 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무력충돌 이외에 다른 테러활동에는 신중을 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테러활동 혹은 무장활동의 희생자는 거의 군관계자에
집중되고 있으며 민간인의 희생은 현저히 적게 나타난다. 이것은 이들이 이미 합법적인 정치세력으로 진입하면서 적국과의 영토분쟁이라는
명분있는 싸움을 제외하고는 합법적인 정치통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78)
1월 3일 술레이마니 사령관 암살 뒤 5일 나스랄라 사무총장은 “미군기지, 전함, 군인들을 포함한 중동 내 미군이 공정한 표적이 될 것이며, 중동에서 미국을 몰아내는 것이 최우선순위이며 미국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강조했다.79)
ㄹ. 이라크시아파민병대
이라크
전을 계획할 때, 미 국방부와 정보기구는 수백만의 이라크 시아파가 이란과 같은 형태의 이슬람공화국수립을 위해서 전투적인 이슬람
운동에 가담해왔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2003년 2월 18일 국방부 부장관 울포위츠는 “이라크국민은 대체로
세속적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아라비아 반도의 와하비80)들과는
다른 시아파로서 이슬람 종교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이라크 시아파가 나자프 및 카르발라와 같은
그들의 성지도시에서 외국인들에게 극히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식 못하고 있는 그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2003년
4월 9일 사담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시아파민병대가 갑자기 등장하여 동부 바그다드의 빈민촌뿐만 아니라 이라크 남부의 많은
도시지역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978-79년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등장은 사담의 바트 정권을 극도로 불안하게 한 결과, 이라크는
이란이슬람호메이니신정국가에 전쟁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슬람국가의 창설을 이론화한 무함마드 바키르 알-사드르(Muhammad
Baqir al-Sadr)와 같은 급진주의적 시아파 성직자들을 탄압했다.81)
알-사드르는
‘마흐디 군대’라 명명되는 무장세력을 창설할 것이라고 발표하며 비폭력적인 노선을 따른다고 약속했다. 마흐디 군대에 약 1만 명의
젊은이가 지원하는 가운데, 이 군대의 창설을 축하하는 깃발이 동부 바그다드에 내걸렸다. 알-사드르는 이라크로부터 영․미 연합군의
즉각 철수를 계속 요구해오고 있다.
2003년
8월 29일 나자프에서 이라크이슬람혁명최고위원회(SCIRI)의 창설자 아야툴라 모하메드 바키르 알 하킴이 거대한 트럭폭탄 테러로
거의 10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해되었을 때, SCIRI 지도자들 역시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자프에서 미 해병대의 밀착된 순찰에 대한 종교적 민감성 때문에 이 폭탄테러 후 미행정관 브레머는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의해서
훈련받은 바드르 여단 및 마흐디 군대를 포함한 준군사적 단체의 출현을 눈감아 주었다. 미군점령 당시 SCIRI계의 바드르 민병대와
사드르계의 마흐디 민병대가 수니계 세력을 공격하였으며, 바드르 민병대는 정부 군경조직으로 많이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마흐디
민병대는 미군철수를 주장하며 미군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알-사드르 운동은 미국이 임명한 임시과도정부통치위원에서 배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거리정치에서 중요하게 남아있다. 알-사드르 운동은 주요한 모스크, 시아파 공동체, 병원, 상점 등을 통제하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은 고도로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영·미 연합군의 점령에 대항하여 강경노선을 걷고 있다.
그들의 지지계층은 빈민층으로서 도시의 젊은 계층이 다수를 이룬다. 정치적으로 알-사드르 단체는 민중주의자적 우익에 속한다.
알-사드르 운동의 강령은 신정국가 수립, 외세 영향력의 척결, 시아파의 리더십에 소수 수니파 병합, 여성의 차도르 착용 등이라 할
수 있다.
알-사드르
운동의 주요한 사회적 행동투쟁의 무기는 모스크에서 금요기도회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 대도시에서 대규모 항의시위이다. 미국이
알-사드르 행동주의투사들의 무기소지를 불법화하고 있지만, 그들은 시아파공동체에서 암암리에 무기를 소지하고 치안유지에 일조하고
있다.83)
수니파무슬림
저항군에 맞서는 마흐디 민병대는 무크타다 알-사드르의 정치권력 기반이 되었다. 알-사드르는 이라크 정부의 통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게릴라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2007년 6월 19일 중동문제 전문가 마한 아베딘은 "이란이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를 활용했듯, 이라크에서 알-사드르 세력을 활용할 전략적 이유가 충분하다"며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우선, 단기적으로 이란은 알-사드르를 앞세워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주둔에 대항할 수 있고 골칫거리인 알카에다와의 연계설을 차단할 수도 있다.
알-사드르가
제도권 정치세력으로 편입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이라크 정부 내에 이란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마흐디 민병대의 거점기지인 나자프
지역 내 시아파 엘리트 성직자들을 이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미·영 연합군이 물러난 자리에 마흐디 민병대를
중심으로 한 치안체제가 구축될 경우에는 이란혁명수비대가 이라크안보체계에 개입할 여지마저 생긴다.
문제는
알-사드르의 제도권 정치세력화 구상에 이란과의 연대가 포함돼 있냐는 것이다. 일단 알-사드르 개인적으로는 이란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딘은 “지난 2003년 알-사드르가 이란을 비공식 방문했을 당시, 이란 정부가 보여준
환대가 젊고 경험이 적은 지도자에게는 큰 감동을 주었다”고 평가했다.84)
가심 술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은 시아파민병대(PMF)의 자문역할을 수행하는 등 이란의 PMF에 대한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85) 시아파민병대지도자 무끄타다 사드르는 술레이마니 암살 직후 트위터에 10여 년 전 그가 해산시켰던 반미군사조직인 마흐디 민병대에 “전사들은 대응준비태세를 갖추라”며 활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86)
3. 반 패권동맹
1996년
초, 옐친 대통령은 서구 중심적 외무장관인 코지레프를 갈아치우고 그보다 경험이 풍부하며, 과거 공산 체제의 정통 국제 분석가였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를 그 자리에 앉혔는데, 프리마코프의 장기적 관심대상은 이란과 중국이었다. 프리마코프는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일등적 지위를 감소시키는 것을 지정학적 목표로 삼는 세 국가간의 새로운 '반패권' 동맹을 만드는데 있었다. 처음 프리마코프의
방문일정과 발언은 그러한 인상을 강화시켜 주었다. 더욱이 중국-이란 간에 존재하던 기존의 무기커넥션 그리고 핵에너지 접근을 위해
노력하는 이란에 협력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의향 등은 더욱더 밀접한 정치적 대화와 궁극적 동맹에 딱 맞는 구도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슬라브세계의 지도국과 가장 호전적인 이슬람국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등을 잠재적 연합체로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한 역동맹 옵션의 필연적 출발점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에
대한 양국 정치 엘리트의 적대감에 기초하여 중국과 러시아간의 쌍방적 커넥션을 부활하는 것이었다. 87)그러나 브레진스키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반패권동맹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바 있다.
‘그러나
이란과 중국은 모두 불안정하고 취약한 러시아와 전략적 운명을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양국 모두 그와 같은 동맹이
전술적 수준을 넘어서 발전하면 더 선진적인 세계 - 독점적 투자역량과 절박하게 요구되는 신기술을 지니고 있는 - 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깨닫고 있다. 러시아는 반패권 동맹을 위한 진정으로 가치 있는 파트너가 되기에는 너무나
제공할 것이 없다.88)
25년이 지난 뒤 지금 브레진스키가 무시했던 반 패권동맹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테헤란의
따스님(Tasnim)통신에 의하면 이란, 러시아, 중국이 2019년 12월 27일 인도양북부해역에서 해군 합동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고 이란해군부사령관이 발표하였다. 골람레자 타하니Gholamreza Tahani 해군제독(대장)은 기자회견에서
인도양북부해역은 대단히 안전한 지역이라면서 지속가능한 안보는 이란군대에 의해 정착되었다고 덧붙였다. "이것(안보의 정착)은 우리가
국가, 지역, 그리고 세계에 대한 책임이며, 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책임에 따라 이란, 러시아 그리고 중국은 3자 전쟁연습이
인도양북부해역에서 시작되었다...이슬람혁명이 성공을 거둔 이래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세계에서 두 주요국가의 해군과 이러한 수준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그 일정에 따라 합동군사훈련은 이란의 차바하르(Chabahar)항구에서 세 나라의 해군 소함대들이 항해를 하면서 시작된다고
계속해서 말하였다. 이란, 러시아, 그리고 중국은 인도양과 오만만에서 해상보안구역(Marine Security Belt)이라
불리는 훈련을 4일에 걸쳐 진행을 한다. 목요일 중국 국방부 대변인 위관(Wu Qian)은 북경은
시닝(Xining)유도미사일구축함을 훈련에 참여시킬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러시아 선박 3척도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 훈련은 미국이
페르시아만 순찰을 위한 해상연합으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동맹국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있는 가운데 시작되었다.89)
캘리포니아
카브릴로(Cabrillo)대학의 에틀러(Dennis Etler)교수는 “이는 지정학적 사건이며 체제가 다른 세계의 국가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국가로부터 지속적인 경제·정치 침략에 직면할 때 연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90)
4) 한국 파병문제
한국해군은 단독파병이란 명분으로 호르무즈 파병을 결정했다. 이에 군사적측면, 구체적으로 파견된 KDX-2구축함의 성능을 중심으로 단독파병의 허구성과, 이 구축함은 생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발생한 전쟁양상을 통해서도 함정생존성은 그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최신예 방공 구축함
HMS Sheffield은 아르헨티나 해군 전투기가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 2발 중 1발이 선체 중앙부에 명중함에 따라 4천톤급
최신예방공 구축함은 피격 4시간 만에 임무수행능력을 상실하며 침몰하였다. 대함 미사일에 대한 방어능력이 생존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필수요소임을 확인하는 좋은 예이다. 걸프전 시에도 이라크의 엑조세 미사일에 의해 미해군의 프리깃함인 Stark호가 격침을 당하여
사망 37명, 부상 21명, 배는 간신히 침몰은 면했지만 피해액이 9천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단 한 발의 피격으로 엄청난 손실을
경험하였다. 또한, 2000년도 예멘에 정박 중이던 이지스 구축함 USS Cole이 테러리스트들의 자폭보트 돌진으로 측면 흘수선이
파괴되어 바지선에 실려 귀환 후 1년 정도의 수리를 거쳐 재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치명적 손상을 입은 사례가 있다.91)
그러나
테러와 전쟁으로 인한 희생 못지않게 황당한 희생도 있다. 미 해군의 최대 굴욕은 2017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월에는
순양함 앤티텀이 일본에서 좌초했고, 5월에는 순양함 레이크 샘플레인이 한반도 인근에서 어선과 충돌했다. 6월 25일에는
이지스구축함 피츠제럴드호가 일본해상에서 필리핀 선적 컨테이너와 충돌하여 상선은 멀쩡한데 피츠제럴드호 선원은 7명이나 사망했고
더구나 수리를 위해 미국으로 가다 다시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8월 31일에는 존 매케인함이 말라카해협에서 라이베리아선적
유조선과 충돌하여 10명이 사망했다. 토마스 로우덴 중장은 2017년 9월 15일 4쪽 짜리 명령서에서 이지스함 근무자들에게
나침반과 연필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수병들은 장교가 함교에 부재시 장교의 지시를 기다리는 대신 수작업으로라도 잠재적 위협을
추적하라고 했다. 충돌방지를 위해 4,500미터 이내에 다른 선박이 있을 경우 반드시 수작업으로 계측하라고 지시했다. 함정정보
누출을 꺼리는 장교들이 자동식별시스템(AIS) 장치가동스위치를 꺼놓기 일쑤인데 다른 선박에 스피커 방송으로 함정의 속도 위치등을
알리라는 지시도 포함됐다. 92)이처럼 함정의 생존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달리 매우 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국정부가 호르무즈해협에 파견한 KDX-2함정의 결함을 살펴보자.
1. 엔진
KDX-I,Ⅱ은
CODOG식의 추진방식을 채택했다. 즉 순항시 디젤엔진을 사용하고, 고속시 가스터빈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가스터빈엔진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합계 58,200마력의 출력을 가진 LM-2500 2기와 독일의 MTU 20V956 TB92 디젤엔진 2기를
갖고 있으며, 총 8,000마력의 출력을 낸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가스터빈이다. 배수량이 훨씬 작은 울산급 프리기트함도
같은 급의 외국함정에 비해 강력한 출력의 가스터빈을 장착하고 있는 등, 우리해군은 전통적으로 대출력의 함정을 선호한다. 이것은
북한의 끊임없는 비정규전적 도발에 대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 때문으로 역시 고속의 간첩선과 교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 이 덕에 KDX-I의 최고속도는 경하배수량 3,800톤급의 함정으로는 최고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30노트(55.56km)에 달한다. 그러나 높은 파도와 바람등의 상황에서는 28노트 정도로 떨어진다.
KDX-Ⅱ는
속도가 더 떨어진다. KDX-I을 건조하는 중에 계획이 바뀌어 KDX-Ⅱ건조가 시작되는 바람에 엔진의 설계변경 없이 만재배수량
5,500톤이 되다보니 최고속도가 28~29노트로 저하되었다. 게다가 높은 파고와 바람 등의 실제상황에서는
26노트(48.15km)도 속도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미해군과 연합훈련을 하면 30노트 이상인 미구축함들을 따라가기 바쁜 게
현실이다.
호르무즈
섬의 배후도시인 반다르 아바스에 2019년 11월 이란해군총사령부가 이전해왔다. 반다르아바스를 방파제처럼 막고 있는 거대한
케슴섬에는 수상전투함 9척, 고속공격정 200척과 키로급 잠수함3척, 중소형 잠수함 26척등이 배치되어 있다. 30노트를 넘을 수
없는 우리 함정은 호르무즈해협에서 위협적 기동을 하며 기관총과 누르 지대함미사일을 장착하고 있는 톤다르
고속공격미사일정(Thondar Fast Attack Missile Boat)의 35노트를 추월할 수 없다. 게다가 탐지하기도
어려운 이란 소형잠수함의 553mm어뢰관에서 발사되는 후트 어뢰는 시속 370km에 달해 회피하기가 어렵다.
호르무즈해협을
항행하려면 불가피하게 툰브(Tunb)섬 북쪽의 좁은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곳은 이란영해이다. 이란혁명수비대는 이란 영해
안을 항행하는 선박은 이란어로 항행허가절차를 밟도록 요구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위협적인 상황에서 항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란의 공격을 미리 탐지해도 예방적 선제공격을 섣불리 할 수도 없다. 이 지옥의 해협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희망은 속도인데 저속의
덫을 극복하지 못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KDX-Ⅲ에서는
속도문제에 과민해져 4개의 엔진을 모두 가스터빈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속도는 30노트가 보장되었는데 문제는 가스연료비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미 이지스함도 가스비가 문제가 되어 엔진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KDX-Ⅲ가 KDX-Ⅱ보다 성능이 우수함에도
파병함정에서 제외된 것은 지나치게 비싼 연료비의 문제도 한 원인이 있다. 속도와 연료비가 역관계에 있는 것이다. 94)
2. 레이더
KDX-Ⅱ급 왕건함에는 세가지 레이더가 장착되어 있다. 마스트의 맨 꼭대기에 설치된 MW-08 3차원 단거리탐지레이더, SPS-49항법레이더, STIR-240 일루미네이터 사격통제레이더이다.
MW-08은
3차원이기에 위치와 고도가 표시되지만 탐지거리가 너무 짧아 대함미사일의 경우17~25km내외에서만 탐지된다. 함교의 높이가
20m라고 가정하면 사람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16km이고, 같은 20m의 배라면 32km 밖에서 볼 수
있고, 100m 높이로 비행하는 헬기라면 51km밖에서 볼 수 있다. 실제 네덜란드 시그널사가 공개하는 MW-08의 탐지거리는
저고도 비행중인 스텔스 대함미사일의 경우 20km이다. 함교에서 눈으로 보는 것과 레이다로 보는 것에 큰 차이가 없다. 그 거리면
SM2가 아니라 단거리 함대공 미사일이나 근접방어무기(CIWS)가 커버할 거리이다. 이렇게 되면 170km를 사정거리로 하는
SM2를 굳이 장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SM2를 제대로 운용하려면 독도함에 장착된 같은 시그널사의 3차원 장거리 레이다인
SMART-L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대함미사일을 200km 밖에서부터 탐지할 수 있다. 따라서 200km에서부터
탐지·추적하다가 SM2를 발사하면 170km지점에서 타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량이 7800kg으로
MW-08의 약 4배~7배가 되므로 현재의 마스트로는 감당할 수가 없고 함정전체의 구조가 개조되어야 한다. 즉 불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함정을 설계하지 않는 이상 KDX-Ⅱ는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
SPS-49 2차원 장거리레이더는 탐지거리가 250~474km로 대함미사일이 날아오는 방향만 체크한 뒤 STIR-240의 펜슬빔으로 해당 방향을 스캔해 고도를 측정한 후 SM-2를 발사한다.
STIR-240의 탐지거리는 138km, 탐지고도는 30km로 탐지용이 아니라 미사일을 유도하는 조사레이다로, 달리 말하면 사격통제레이더 이다. 2차원 레이다인 SPS-49를 보완하기 위해 2대씩 장착되어 있다.
레이더의
전자파는 직진성이 있으므로 표적탐지를 위해서는 레이더가시거리(LOS)가 확보되어야 한다. 거리가 멀어지면 LOS 확보가
어려우며, 레이더설치 고도가 높을수록 원거리에서 표적탐지가 가능하다. 가령 레이더 안테나가 30m높이에 설치되어있다면 지상에 있는
표적은 22.6km까지, 안테나가 100m 높이에 설치되어있다면 41.2km까지 LOS가 확보된다. 따라서 레이더는 높은 곳에
설치될수록, 표적의 발사원점에 가까이 위치할수록 미사일을 조기에 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탄도미사일방어를 위해 이동이 가능한 레이더를 가능한 한 도발 원점과 가까운 곳에 배치하고 있다. 북한의
장거리탄도미사일위협이 고조되자 전방배치모드(Forward-BasedMode)의 AN/TPY-2레이더를 일본에 상시배치하여
운용중이고, 발사위협이 고조될 때에는 이지스함을 한반도 근해에 증강배치하고 해상배치 X-band레이더(SBX)를 한반도 근해에
이동 배치한다. 이란의 탄도미사일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구축 중인 EPAA의 일환으로 이지스함을 지중해에 배치하였고, 이지스
어쇼어를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발사원점으로부터 보다 근접해서 조기경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레이더는 수신 전력을 높여야 표적탐지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레이더반사면적(RCS: Radar Cross Section)이 크게 나오는 레이더 위치라 하더라도 거리가 멀어지면 결과적으로 탐지확률이 낮아지게 된다.96)
탄도미사일이
비행하는 전 구간에 걸쳐 높은 탐지확률을 보이는 위치는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균 RCS가 가장 높은 위치에서도
표적의 상승구간 및 하강구간 등 일부 구간에서는 탐지확률이 낮다. 평균 RCS가 크게 관측되는 지점은 탄도중간구간(정점 구간)에서
측면으로 멀리 이격된 곳으로 나타났으나, 해당지점은 표적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전자파의 감쇠영향이 커져 전체구간의 탐지확률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이 실험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해당 위치에서 탄도중간구간에서는 표적의 RCS가 가장 큰 부분인 정 측면을
주로 관측하게 되므로 거리가 멀어도 수신 전력이 크지만, 상승구간 및 하강구간에서는 표적의 RCS가 작은 부분인 미사일의 전 측면
및 후 측면을 관측할 뿐 아니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전자파 감쇠로 인해 수신되는 전력이 매우 낮아져 탐지확률이 낮아진다.
탐지확률을 향상시키기 위해 탄도미사일의 탄도궤적을 구간 별로 나누어 탐지확률이 높은 위치를 산출하고, 최소한의 레이더로 공백없는
표적탐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탐지자산을
다량으로 운용할 수 있거나 어떤 종류의 미사일이 발사될 지 사전에 알 수 있다면 스커드-B를 탐지하기 위한 레이더와 스커드-C를
탐지하기 위한 레이더를 각각 운용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탐지자산으로 여러 종류의 탄도미사일을 동시에 탐지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탐지확률이 높은 위치를 찾아내서 레이더를 배치해야한다.
한
대의 레이더를 이용하여 스커드-B, 스커드-C탄도미사일을 공백 없이 탐지하기 위한 최적의 위치를 찾으려 해도 이는 표적과
레이더간 거리,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작은 RCS 등 때문에 불가하다. 그러나 탄도구간을 상승구간, 정점구간, 하강구간 등 3곳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구간에서 탐지확률이 가장 높은 위치를 찾아내어 두 대 또는 세 대의 레이더를 배치하면 탄도미사일이 비행하는 전
구간에 걸쳐 공백없이 탐지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파는 주파수가 높을수록 대기에서 진행 중 감쇠가 크고, 주파수가 낮을수록 감쇠가 작다. 그러나 전자파의 대기 중 감쇠정도는
대기 중 습도, 기온, 운용되는 환경(지상/해상/공중, 산악지형, 도심지역 등)등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전자파 감쇠에 대한
실질적인 전파모델이 반영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지형특성이 반영되어야 한다. 한반도는 산악이 많아 동일한 위도선상에 위치하더라도 레이더 LOS에 차이가 날 수 있다. 특히 산과 가까운 지역일수록 그 영향이 클 수 있다.97)
위상배열레이더는
안테나를 기계적으로 회전하지 않고도 방사되는 빔을 여러 방향으로 빠르게 방사할 수 있으나 안테나 배열면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방사범위가 제한된다. 함정의 대공방어용으로 설계된 이지스함의 AN/SPY-1레이더의 경우 4면에 위상배열안테나가 설치되어 전
방위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 및 추적이 가능하지만, 단일 안테나를 사용하는 레이더는 표적이 안테나 배열면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을
통과한 이후에는 탐지가 불가능해진다. 만일 빔 최대고각보다 표적의 고도가 높으면 표적탐지가 불가하게 된다. 레이더가 탄도축선 및
그와 가까운 곳에 위치할 경우 표적이 레이더상공을 지나가는 일정구역 동안 빔 최대고각에 의한 탐지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 지속적인
표적정보획득과 개별레이더의 탐지공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레이더의 제한요소를 사전에 고려하여 레이더를 여러 곳에 배치하고,
실시간 표적정보공유체계를 운용하여야한다.98)
아덴만
인질구출작전의 상대가 해적인 것과 달리 이번 파병의 대상은 이란이라는 국가이고 육해공으로부터의 모든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만약
이란 영토에서 함정으로 미사일이 날아올 경우를 가정하면 왕건함 단독으로는 대응이 매우 어렵다. 2018년 12월 대화퇴어장에서
우방국인 일본 초계기와 충돌하였을 때를 상기하면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측 주장의 요지를 보자.
2018년
12월 20일 오후 3시경 독도 북동쪽 100km 부근 대화퇴어장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가와사키 P-1 초계기가
북한어선구조작전 중인 대한민국 해군 광개토대왕함과 해양경찰청 소속 삼봉호에 접근하였다가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광개토대왕함이
사격통제레이더를 일본 초계기에 조사하는 적대행위를 하였다는 주장이 일본 측에서 제기되었다. 또한 일본 측은 초계기의 사격통제레이더
사용과 관련하여 3개의 주파수를 이용하여 한국 함정에 무선확인을 시도하였으나, 한국 함정에서 응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격통제레이더
사용여부에 대하여 일본은 레이더주파수 및 강도조사결과 광개토대왕함의 일본 초계기에 대한 레이더 조사가 확인되었고, 한국 함정의
레이더사용기록 등을 공동 검증할 것을 한국 측에 제안하였으나 한국이 거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초계기의 비행고도(150m)와
관련하여서는 한국 함정에 근접할 때에 충분한 고도와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고, 한국 측이 위협을 인지하였다는 점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통신상황과 관련하여서는 3개 주파수로 한국함정에 연결하였으나, 한국함정이 응답하지 않았으며, 2019년
1월 14일 실무회의에서 한국이 1개의 호출내용을 확인한 사실을 인정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99)
이에
대한 진실공방을 미루고 이 대상이 일본이 아닌 이란이 되었을 때를 가정해보자. KDX-2에서 MW-08이 탐지거리가 작아
STIR-240으로 탐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비행기가 그 탐지구역에 들어오는 일이 발생하면 주파수의 종류와 강도가
MW-08과는 다르기에 이란 전투기에서는 자신이 사격통제레이다의 전파를 받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규정대로라면 이란은 긴급회피기동을 하며 우리함에 대함미사일을 발사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이런 경험이 과거에도 관습적으로
있어왔고 합동구조훈련등도 진행한 우방국이기에 차후 조사와 확인을 할 수 있지만 이란은 한 번도 조우한 적이 없는 상대이다. 더구나
이란은 상대에게 이란어로만 통신을 하도록 하고 있어 이란어번역관이 없으면 사고를 막을 대응장치가 없다.
3. 소나100)
얕고 잔잔한 바다인 호르무즈해협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잠수함을 탐지하기 수월한 특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해수면이 잔잔하면 소스와 표적과의 상대적인 수심조절로 원거리 탐지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은 수심을 마음대로 변경하여 운용할 수 있는 가변심도 소나를 사용하는 함정에게 있어서 특히 유리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만약 해수면이 거칠어지면 필연적으로 원거리 탐지확률은 떨어지나, 음영구역의 탐지확률은 조금 높아진다. 하지만 탐지확률이 높아지는
음영구역의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 이는 해수면이 거칠 때, 가변심도 소나를 이용하는 함정에게 있어서 표적이 잘 잡히지 않으면
불필요하게 수심을 변경하는 것보다는 신속히 다른 위치로 이동해서 탐색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함을 의미한다.
셋째로, 바닥이 존재하는 경우의 탐지확률은 바닥이 없는 경우보다 전체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이는 바닥을 맞는 음선경로 때문으로 수심이 비교적 얕은 바다가 잠수함 탐지에 특별히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수면이 거칠어질수록 바닥의 영향이 주도적으로 나타난다. 즉, 거친 해수면이 미치는 영향보다 바닥이 미치는 영향이 커진다는
의미로서, 이는 해수면이 거칠어지더라도 수심이 아주 깊은 심해가 아니라면, 바닥의 영향 때문에 어느 정도의 탐지확률이 보장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을 모를 리 없는 이란은 이미 비대칭적 전략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전쟁연구소(ISW: Institute of
Study of War)의 이란군사전문가인 크리스 하머(Chris Harm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라비아 만의 좁고 얕은
물에서 잠수함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은 좁은 해상수송로로 이동하는 해상선박을 효과적으로 위협한다.” 이들 좁은 해상수송로는 군함
및 상선을 예측가능한 경로로만 항행하도록 강제하여 잠수함의 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어준다. 이란에는 여러 종류의 잠수함이 있지만
초소형인 150톤 가디르급 (Qadir / Khadir)잠수정함대는 특히 모든 분쟁에서 치명적이다. 북한 유고와 산고급 잠수함의
변형인 가디르급의 작은 크기와 음향특성으로 인해 탐지 및 추적이 특히 어렵다. 잠수함의 질이 좋지는 않지만 종종 이란해군능력과
마찬가지로 수량이 중요하다. 이란은 다른 잠수함보다 비교적 적은 수인 최소한 20척의 가디르급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이 가디르급 잠수함을 사용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크리스 하머는 2013년에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잠수함은 모래해저에 있는
것이다. 이란인들은 가디르를 항구에서 꺼내 얕은 페르시아 만의 바닥으로 가라앉혀 모래바닥에 얹고 목표물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라고 말했다.102)
왕건함의 소나가 이런 가디르 잠수함을 잡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침묵하고 숨어있던 가디르에서 후트어뢰가 발사된다면 우리함엔 큰 불행이 발생하는 것이다.
4. SM-2 미사일
1988년
7월 3일 미국 이지스함이 이란민항기에 SM2미사일을 발사하여 격추시킨 일이 있다. 미국은 이란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약700억원을 배상했다. 우리나라에서 SM2 미사일을 처음 도입한 함정은 이번에 파병한 KDX2이다. 2002년 진수된
이순신급헬기탑재구축함(KDX2)에 SM2미사일을 도입할 당시 국방차관이 이란기격추사건을 염두했음인지 해군조함단에 만약 실수로
민항기를 격추하여 발생하는 책임을 미국측 제작사가 지도록 서명을 하게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해군조함단은 법률검토등을 해봤지만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끝나 결국 포기결정을 했다. 즉 이번에 호르무즈해협에 파견되는 이순신급헬기구축함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최첨단 탐지식별기능을 가졌다는 미 이지스함도 실수를 했는데 이지스체계가 탑재되지 않은 KDX2는 그 확률이 더 높은 셈이다. 또한
2013년 10월 SM2미사일 10발 중 3발 꼴로 불발이 발생해 발사가 안 되거나 비행 중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이에
대한 하자보상 요구에 미국은 단호히 거절하여 보상이나 하자보수를 받을 방법도 없다. 보통 국내선비행고도는 6~8Km,
국제선비행고도는 8~13km이기 때문에 오발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이란의
누르 지대함 미사일은 180km사정거리의 아음속미사일인데 2006년 7월 14일 이스라엘-레바논 전쟁기간 이스라엘 스텔스 초계함
하닛(1200톤급)을 폭파했다. 당시엔 이란 미사일기술자의 도움을 받은 헤즈볼라의 대함미사일로 추정되었다. 당시 하닛함은 상공에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있어 대공방어시스템을 작동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아음속대함미사일 탐지에 실패한 것이다.
또한
KDX2의 SM2는 이란의 지대함탄도미사일(ASBM)인 칼리즈파즈를 상대하기 어렵다. SM2는 목표물 근처에서 폭발하여 파편을
뿌려 공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전투기는 파괴할 수 있으나 초음속미사일을 파괴하긴 어렵다. 엄청난 운동에너지를
가진 초음속 물체는 포착하기도 어렵지만 파편공격을 받아도 튕겨내기 때문이다.
5. 작전
현재
우리군이 구축 중인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는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미국의 조기경보위성이 최초로 탐지하여 경보를
전파하고, 한국 해군 이지스함의 AN/SPY-1D 레이더와 공군의 GBR(Ground Based Radar)이 미사일을 탐지,
추적하면서 표적정보를 공군 탄도미사일작전통제소(AMD-Cell)에 전송하고, AMD-Cell에서는 한미연합감시자산이 수집한 정보를
융합하여 위협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에 최적의 요격포대(PAC-2)를 선정하여 요격 명령을 하달하고 교전을 통제한다.103)
KDX-3급의
이지스 스파이레이다를 사용할 수 있다하더라도 일반에 알려져 있듯이 만능이 아니다. 우선 레이더가 미사일발사지점을 예상하고 그쪽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비로소 탐지·추적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미사일발사예상위치를 대략이나마 특정할 수 있어서 거기에 레이다를
맞추고 대기한다. 북한 탄도미사일발사 시 세종대왕함은 탐지했는데 일본 이지스함이 탐지하지 못한 이유는 기계의 성능이 아니라
기계외적 정보와 운영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란은 전혀 낮선 지역이므로 결국 미국 등으로부터 정보지원을 받아야 한다. 실제
미사일발사탐지는 한국에서처럼 미국 군사위성이 먼저 탐지하고 해군이 그것을 받아 좌표를 찍고 레이다 추적에 들어간다. 그리고 육군과
공군의 감시자산등이 종합되어 최종 격추결심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연합작전 없이는 우리 함정은 고철덩어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KDX-2에 실린 레이다는 이지스 레이다도 아니기 때문에 구역방어는 물론이고 개함방어도 어려울 수
있다.
결국
한국은 두가지 상황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단독파병으로 300명 장병과 구축함을 대책 없이 사지에 몰아넣고 요행을 바라는 길과,
대규모 추가파병과 미군과의 연합작전으로 장병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대신 이란과 정확히 적대관계에 서는 길이다.
주
1) 이란으로의 국호변경에 따라 APOC는 영국·이란석유회사(AIOC: Anglo-Iranian Oil Company)로 바뀌었다.
2) Ramy Nima, The Wrath of Allah (London: Pluto Press, 1983) ch 1. ;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 1987)/ 마르암 포야(Maryam Poya), 「이란 1979년 혁명 만세!…이슬람 만세?」, 혁명의 현실성, (서울: 책갈피, 2011), p.232
3) Falle, Sir Sam, “The Mussadiq Era in Iran, 1951-1953: A Contemporary Diplomat’s View”, D. W. Lesch(ed.), The Middle East and the United States, (London: Westview Press, 2003), p.80.; 장병옥, 「미국-이란 외교관계와 이란국민의 인식변화-모사데그 통치기를 중심으로」, 韓國中東學會論叢Vol.27 No.1, (韓國中東學會, 2006), p.4-6
4) 장병옥, 「미국-이란 외교관계와 이란국민의 인식변화-모사데그 통치기를 중심으로」, 韓國中東學會論叢Vol.27 No.1, (韓國中東學會, 2006), p.2
5) 유달승, 「밀레니엄 특집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인물 50선(選)』 ; 종교,사상 이란 이슬람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Ayatollah Ozma Ruhollah Khomeini, 이란, 1902~1989)」, 중동연구Vol.17 No.2(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센타 중동연구소, 1998), p.338
6) 크리스 하먼, 이수현 역,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 (서울: 책갈피, 2011), p.25
7) 유달승, 「밀레니엄 특집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인물 50선(選)』 ; 종교,사상 이란 이슬람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Ayatollah Ozma Ruhollah Khomeini, 이란, 1902~1989)」, 중동연구Vol.17 No.2(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센타 중동연구소, 1998), pp.338-339
8)
시장상인들의 저항 때문에 호메이니의 이슬람공화당을 주도한 집단이 전통적 시장 상인자본가들과 연계된 성직자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슬람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의 절반 이상이 전문직·교사·공무원·학생출신이었다. 그럼에도 4분의 1이상은 시장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M. Moaddel, Class, Politics and Ideology in the Iranian Revolution,
(New York,1993), pp.224-238; 크리스 하먼, 이수현 역,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 (서울: 책갈피,
2011), p.31
9) 외교부 아프리카중동국 중동1과, 이란개황, (서울: 외교부, 2016), p.32
10) 유달승, 「밀레니엄 특집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인물 50선(選)』 ; 종교,사상 이란 이슬람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Ayatollah Ozma Ruhollah Khomeini, 이란, 1902~1989)」, 중동연구Vol.17 No.2(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센타 중동연구소, 1998), p.340
11) 廣瀨 隆 Hirose Takashi, 億萬長者はハリウッドな殺す, (東京: 講談社, 1986)/이규원 역, 제1권력, (서울: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 1쇄), pp.466-470
12) 외교부 아프리카중동국 중동1과, 이란개황, (서울: 외교부, 2016), p.32
13) 도시에서 권력은 코미테(위원회)라는 지역별 임시기구들로 넘어갔다. 코미테의 회원들은 주로 게릴라 단체 지지자들로 구성됐지만 지역의 성직자와 이슬람공화국 사상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포함됐다.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 1987)/ 마르암 포야(Maryam Poya), 「이란 1979년 혁명 만세!…이슬람 만세?」, 혁명의 현실성, (서울: 책갈피, 2011), p.262
14) 새로 들어선 무함마드 레자 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도와 원조를 받으며 1953~73년에 굳건해졌다. 이 정권의 핵심에는 1957년 창설된 사바크, 즉 악명높은 보안경찰이 있었다.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 1987)/ 마르암 포야(Maryam Poya), 「이란 1979년 혁명 만세!…이슬람 만세?」, 혁명의 현실성, (서울: 책갈피, 2011), p.233
15)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 1987)/ 마르암 포야(Maryam Poya), 「이란 1979년 혁명 만세!…이슬람 만세?」, 혁명의 현실성, (서울: 책갈피, 2011), pp.280-283
16)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 1987)/ 마르암 포야(Maryam Poya), 「이란 1979년 혁명 만세!…이슬람 만세?」, 혁명의 현실성, (서울: 책갈피, 2011), p.263
17) Seyed Hossein Mousavian, Iran and the United States: an insider's view on the failed past and the road to peace. (Bloomsbury, 2014), p.2-3.
18) Christian Emery, "United States Iran Policy 1979–980: The Anatomy and Legacy of American Diplomacy," Diplomacy & Statecraft, Vol.24, No.4(2013), pp.619-639.; 박윤주. 「1989-2001년 미국-이란 관계개선의 실패 ;미국의 중동지역정책 및 대이란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8), p.20
19) 크리스 하먼, 이수현 역,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 (서울: 책갈피, 2011), pp.82-83참조
20) 廣瀨 隆 Hirose Takashi, 億萬長者はハリウッドな殺す, (東京: 講談社, 1986)/이규원 역, 제1권력, (서울: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 1쇄), pp.466-470
21) Laurel Graefe, “oil shock of 1978-79,” Federal Reserve Bank of Atlanta, (http://www.federalreservehistory.org/Events/DetailView/40) (검색일: 2017년 5월 12일)
22) EIA(http://www.eia.gov/pub/oil_gas/petroleum/analysis_publications/chronology/petroleumchronology2000.htm#T_8_) (검색일: 2017년 5월 12일)
23) Jimmy Carter, "The State of the Union Address Delivered Before a Joint Session of the Congress." January 23, 1980
(http://www.presidency.ucsb.edu/ws/index.php?pid=33079&st=&st1=)
(검색일: 2017년 5월 12일); 박윤주. 「1989-2001년 미국-이란 관계개선의 실패 ;미국의 중동지역정책 및 대이란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8), p.21
24)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69-71
25) Michael K. Bohn, Nerve Center, (Virginia: Brassey’s, Inc, 2003)/신현돈 역, 백악관 상황실, (서울: 북키앙, 2003), pp.219-222참조
26)
Harry G. Summers. Jr. On Strategy Ⅱ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Dell, 1992)/ 권재상·김종민 역, 미국의 걸프전 전략, (자작아카데미, 1995), pp.105-106
27)
이란 혁명정부는 제2의 구출 시도를 막기 위해 대사관 인질들을 더욱 세분화시켜 이란 전국으로 분산시켰다. 카터정부는 10월 다시
제2의 구출작전을 시도한다. 일명 크레더블 스포츠 작전(Operation Credible Sports)이었다. 이번엔 헬기 대신
로켓 추진 장치를 장착하여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개존한 허큘리스 수송기를 이용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1980년 10월
29일 개조한 수송기의 시험비행이 실패하면서 구출작전은 완전히 취소되었다. 양욱,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 (플래닛 미디어, 2009) 참조.
28)Edward N. Luttwak, 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 (Simon & Schuster, 1984)/에드워드 N. 루트워크, 미국방성과 전쟁술, (명지출판사, 1986년), pp.42-43
29) James Bamford, Body of Secrets, (Anchor, 2001)/권미경·박수미 역, 미 국가안보국 NSA1, (서울: 서울문화사, 2002), pp.148-149
30) Edward N. Luttwak, 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 (Simon & Schuster, 1984)/에드워드 N. 루트워크, 미국방성과 전쟁술, (명지출판사, 1986년), pp.42-43
31)박윤주.
「1989-2001년 미국-이란 관계개선의 실패 ;미국의 중동지역정책 및 대이란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8), p.22 이 작전에 대해 록펠러의 강한 영향력이 미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廣瀨 隆 Hirose Takashi, 億萬長者はハリウッドな殺す, (東京: 講談社, 1986)/이규원 역,
제1권력, (서울: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 1쇄), pp.466-470)
32)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65-168
33) 박윤주. 「1989-2001년 미국-이란 관계개선의 실패 ;미국의 중동지역정책 및 대이란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8), p.35참조
34)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65-169참조
35)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74-75, 179-180참조
36) 박윤주. 「1989-2001년 미국-이란 관계개선의 실패 ;미국의 중동지역정책 및 대이란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8), p.35
37) Major Tyler J. Harder, Time to Repeal the Assassination Ban of Executive Order 12,333: A Small Step in Clarifying Current Law, 172 Mil. L. Rev. 1, (2002), pp.1-3; Mathan Canestaro, American Law and Policy on Assassinations of Foreign Leaders: The Practicality of Maintaining the Status Quo, 26 B.C. Intl & Comp. L. Rev. 1, (2003), pp.2-3.;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37
38)The Lieber Code, art. CXLVIII provided that: The law of war does not allow proclaiming either an individual belonging to the hostile army, or a citizen, or a subject of the hostile government, an outlaw, who may be slain without trial by any captor, any more than the modern law of peace allows such international outlawly; on the contrary, it abhors such outrage. The sternest retaliation should follow the murder committed in consequence of such proclamation, made by whatever authority. Civilized nations look with horror upon offers of rewards for the assassination of enemies as relapses into barbarism.;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40
39) Jeffrey F. Addicott, Proposal For a New Executive Order On Assassination, 37 U. Rich. L. Rev.751, (2003) pp.756-757;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49
40) Brenda L. Godfrey, Authorization to Kill Terrorist Leaders and Those Who Harder Them: An International Analysis of Defensive Assassination, 4 (San Diego Intl L.J. 491), (2003), pp.504-505;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49
41) Alleged Assassination Plots Involving Foreign Leaders, S. Rep. No. 94-465, (1975), p.71;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50
42) Major Tyler J. Harder, Time to Repeal the Assassination Ban of Executive Order 12,333: A Small Step in Clarifying Current Law, 172 Mil. L. Rev. 1, (2002), pp.12-13;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50
43) Major Tyler J. Harder, Time to Repeal the Assassination Ban of Executive Order 12,333: A Small Step in Clarifying Current Law, 172 Mil. L. Rev. 1, (2002), pp.15-17;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50
44)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52
45) Joshua Raines, Osama, Augustine, and Assassination: The Just War Doctrine and Targeted Killings, 12 Transnatl L. & Contemp. Probs. (2002). p.235;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44
46)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44
47) 「암살이냐 제거냐…미국 표적공습 두고 법적논란 점점 커져」, 연합뉴스, 2020.1.7.
https://www.yna.co.kr/view/AKR20200107084500009
48) 「영·미, ‘드론 표적살해’ 일상화…언론은 비판적 시각 잃어」, 한겨레신문, (2020.1.20)참조
49) 「암살이냐 제거냐…미국 표적공습 두고 법적논란 점점 커져」, 연합뉴스, 2020.1.7.
https://www.yna.co.kr/view/AKR20200107084500009
50) 김양호, 「국제법상 무력행사로서 요인암살의 허용여부」, 저스티스No.80, (한국법학원, 2004), p.155
51) Samuel P. Huntington, The Soldier and The State, The Theory and Politics of Civil-Military Relation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p.457참조/강창구.송태균 역, 군인과 국가 (서울: 병학사, 1997, 6판), p.484참조
52)
Samuel P. Huntington, The Soldier and The State, The Theory and
Politics of Civil-Military Relation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p.68/엘리엇 코언,
최고사령부, (가산출판사, 2002), p.71재인용
53)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28-129
54)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205-206
55)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226-228
56) 「트럼프의 ‘술레이마니 암살’ 철벽방어한 합참의장 ‘시험대’ 올라」, 연합뉴스, (2020.1.14)
57) Carl Schmitt, Positionen und Begriffe im Kampf mit Weimar-Genf-Versailles 1923-1939 (Berlin: Duncker & Humblot, 1994)/김효전,박배근 역, 입장과 개념들 바이마르-제네바-베르사유와의 투쟁에 있어서 1923-1939 (부산: 세종출판사, 2001 초판), p.105 참조
58) Ettellaat (daily newspaper, Farsi) 28 April 1979;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 1987)/ 마르암 포야(Maryam Poya), 「이란 1979년 혁명 만세!…이슬람 만세?」, 혁명의 현실성, (서울: 책갈피, 2011), p.272
59) Mohammad Amjad, Siast va Hokumat dar lyalat-e Mottahedeh, (Tehran: Samt Publication, 2011), pp.23-32
60) 유달승, 「이란외교정책의 정체성연구; 구성주의시각에서 본 이란-미국 갈등」, (한국이슬람학회, 2019), p.136
61) 국방조직은 최고지도자 직속으로 정규군, 혁명수비대의 이원조직이며, 대통령 및 국방장관은 군지휘 계통상에 있지 않고 국방장관은 군수물자 조달만을 책임진다. 정규군은 이란의 국토방위 및 국내안정을 담당하는 한편, 혁명수비대는 이란의 이슬람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외교부 아프리카중동국 중동1과, 이란개황, (서울: 외교부, 2016), p.85
62) 시아파 수니파의 분쟁은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Uthman)이 암살되고 예언자 모하메드의 사촌 알리(Ali)가 제4대 칼리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알리의 첫 도전은 모하메드의 애첩 아이샤(Aisha)가 낙타를 타고 나타난 낙타전쟁 (Battle of the Camel 656년)이었으나 이 전쟁에서 알리가 승리했다. 그 다음 해 우스만의 암살사건의 진상파악을 놓고 그 당시 다마스쿠스의 총독이며 우스만의 사촌인 무와위야(Muawiya)의 추종세력과 알리의 추종세력 간의 657년 시핀(Siffin) 전쟁에서 알리가 패배하면서 본격적인 이슬람의 분파가 시작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하여 칼리프는 신분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고 지도력이 있는 자가 선출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카와리즈(Khawarij)파와 승자인 무와위야를 칼리프로 인정하는 수니파, 패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party of Ali)파로 분파되었다. 이와 같은 알리시대의 분쟁을 제1차 이슬람내전(656-661년)이라 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Ira M. Lapidus, A History of Islamic Societi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54-58 참조; 박찬기, 「헤즈볼라(Hezbollah)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國際政治論叢Vol.48 No.3, (한국국제정치학회, 2008), p.206
63) 박찬기, 「헤즈볼라(Hezbollah)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國際政治論叢Vol.48 No.3, (한국국제정치학회, 2008), p.225
64) ‘신의정당(Hezbollah)’ 이란 용어는 호메이니가 1971 년 이라크 나자프에서 귀양살이 때 그의 저서에도 나오고 있으며 이란혁명 후에 반대파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그는 이란에서도 헤즈볼라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용했다, 자세한 사항은 Nikki R. Keddie, Modern Iran: Roots and Results of Revolu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p.193, 244, 247, 251-252 참조.
65) 박찬기, 「헤즈볼라(Hezbollah)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國際政治論叢Vol.48 No.3, (한국국제정치학회, 2008), pp.219-220
66) As'ad Abu Khalil, “Ideology and Practice of Hizbullah in Lebanon: Islamization of Leninist Organizational Principle,” Middle Eastern Studies 37, no.3(1991), p.394.; 황병하,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의 이념적 단일성과 정치적 다양성에 관한 연구」, 한국중동학회논총Vol.26 No.2 (한국중동학회, 2006), p.17
67)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65-168
68) Zachary Keck, “Iran Is Weaker Than The U.S. Military, But Tehran Won't Go Down Easy”, National Interest, January 23, 2020
https://nationalinterest.org/blog/buzz/iran-weaker-us-military-tehran-wont-go-down-easy-116256 (2020.1.30검색)
69) 9.11테러가 있기까지 레바논 해병기지 테러와 팬암(PanAm)기 103편 폭파사건(아버지부시재임기간)은 미국을 상대로 한 가장 큰 공격이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83년 레바논에서 장기간 인질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언론인, 해병대대령, CIA지부장이 인질로 억류됐고, 그중 두 명은 고문당한 후 살해됐다. 이는 86년 이란에게 인질석방협상의 중재를 요청하는 조건으로 무기판매를 시도했던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이어졌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나 아버지 부시대통령은 모두 미국을 향한 이런 공격에 군사적으로 즉각 보복하지 않았다.
70)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76-78
71)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65-168
72)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80-183참조
73)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21-123
74) Richard Clarke, Against All Ene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RAC Enterprise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의 숨겨진 진실, (서울: Human & Books, 2004), pp.183-189참조
75) 박찬기, 「헤즈볼라(Hezbollah)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國際政治論叢Vol.48 No.3, (한국국제정치학회, 2008), p.224
76) 정유선, 「이슬람원리주의 테러조직의 선택; 온건화 그리고 급진화」, (고려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09), pp.36-37
77) Judith P Harik, Hezbollah: The Changing Face of Terrorism (London; New York: I. B. Tauris, 2004), pp.71-72
78) 정유선, 「이슬람원리주의 테러조직의 선택; 온건화 그리고 급진화」, (고려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09), p.41
79) 노재현, 「래바논 정파 헤즈볼라 “중동 내 미군기지·전함·군인이 표적”」, 연합뉴스, (2020.1.5.)
80) 역사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았던 칼리파제도 대신 신정일치의 카리스마적인 이맘제도를 채택하며 정통 이슬람으로부터 분리를 추구했던 시아파 운동에 대항하여 한발리파는 전통인 순나(Sunna)와 공동체인 자마아(Jama'a) 중심의 이슬람사상인 수니사상(Sunnism)을 주창하였다. 이외에도 한발리파는 십자군 전쟁을 통한 기독교의 위협과 몽고의 위협 그리고 수피사상의 위협으로부터 정통 이슬람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는 대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슬람의 목소리를 코란중심으로 단일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한발리파 사상은 18세기 말 사우디아라비아에 등장한 와하비(Wahhabi) 원리주의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정치적으로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하고 종교적으로 청교도주의와 일신론(tawhid)을 주창하며 한발리파 사상을 적극적으로 계승했던 와하비 사상은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원리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황병하, 「이슬람원리주의운동의 이념적 단일성과 정치적 다양성에 관한 연구-협력과 대립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중동학회논총Vol.26 No.2, (한국중동학회, 2006), p.4
81) 장병옥, 「이란-이라크 커넥션과 시아 저항운동」, 중동연구Vol.26 No.1 (한국외국어대학교중동연구소, 2008), pp.229-232
82) 외교부, 이라크 개황, (서울: 외교부, 2017), pp.64-65
83)장병옥, 「이란-이라크 커넥션과 시아 저항운동」, 중동연구Vol.26 No.1 (한국외국어대학교중동연구소, 2008), pp.252-254참조
84) 장병옥, 「이란-이라크 커넥션과 시아 저항운동」, 중동연구Vol.26 No.1 (한국외국어대학교중동연구소, 2008), p.257, 260
85) 외교부, 이라크 개황, (서울: 외교부, 2017), pp.64-65
86) 이정애·정남구, 「미, 트럼프 지시로 이란 군부핵심 공습 살해…중동전운」, 한겨레신문(2020.1.8)
87) 브레진스키, 김명섭 역, 거대한 체스판, (서울: 삼인, 2013), p.155참조
88) 브레진스키, 김명섭 역, 거대한 체스판, (서울: 삼인, 2013), p.156
89)“Iran-Russia-China Naval Drills Kick Off in Indian Ocean” December, 27, 2019, (www.tasnimnews.com/en/news)
90)
“Iran-Russia-China Joint Drills Shows US Global Power ‘Diminishing’:
American Analyst”, December, 30, 2019, (www.tasnimnews.com/en/news)
91) 김현직, 「성분작전 별 함정생존성 강화방안 조사·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4), p.2
92) 김진호, 「이지스함 잇단 사고 미 해군이 선택한 최종병기는 나침반과 연필」, 김진호의 세계읽기, 92017.10.15) http://gino.khan.kr/814
93) 박창수, 「한국해군을 위한 해군용 가스터빈 엔진」, 한국유체기계학회논문집3(3), (한국유체기계학회, 2000.9), pp.55-56
94) 이외에도 KDX2 보다 성능이 좋은 이지스함인 KDX3를 보내지 않는 것 다른 이유로는 함정수 와 대북탄도미사일감시문제도 있다. KDX1과 더불어 KDX3는 각각 3척밖에 없다. 우리 해군은 '3척주의'로 운영하는 데 작전·대기·보수로, 두 척은 항상 대기상태로 있거나 보수수리상태에 있고 1척만 작전에 투입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KDX2는 6척이어서 숫자상으로 여유가 있다. 이지스레이다를 가진 KDX3만이 북한탄도미사일을 탐지할 수 있기에 KDX3를 다른 데로 빼돌릴 수 없다.
95) 다른 목표물의 탐지거리는 KF-16전투기는 40km이상, P-3 초계기, 보잉737, B-52는 80km이다.
96) 박태용, 「탄도미사일 탐지확률향상을 위한 최적의 레이더배치 방안」, (아주대학교박사논문, 2016), pp.67, 65, 69
97) 박태용, 「탄도미사일 탐지확률향상을 위한 최적의 레이더배치 방안」, (아주대학교박사논문, 2016), pp.86, 97, 102-103
98) 박태용, 「탄도미사일 탐지확률향상을 위한 최적의 레이더배치 방안」, (아주대학교박사논문, 2016), p.66
99) 박명희, “한일관계 주요 쟁점과 한국의 대응방향”, 2019년 일본의 외교정책방향과 한국의 대응방향 및 국회의 역할, 2019.
100) KDX-2에는 함수와 함미에 두 개의 소나가 장착되어 있다. 함수에는 ATLAS DSQS-21BZ소나, 함미에는 SQR-200K 흑룡 예인소나 이다.
101) 이정철, 「거친 해수면에서의 수중표적탐지특성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4), p.42
102) Zachary Keck, “Iran Is Weaker Than The U.S. Military, But Tehran Won't Go Down Easy”, National Interest, January 23, 2020
https://nationalinterest.org/blog/buzz/iran-weaker-us-military-tehran-wont-go-down-easy-116256 (2020.1.30검색)
103) 이상일, 「한국형 미사일방어를 위한 외국의 BMD 추진사례 연구」, (국방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4); 이정철, 「거친 해수면에서의 수중표적탐지특성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2014),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