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재(任熙載.1472.성종 3∼1504.연산군 10)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장가. 자는 경여(敬輿), 호는 물암(勿菴), 본관은 풍천(豊川). 임사홍(任士洪)의 아들. 진사에 합격, 1498년(연산군 4) 문과에 급제, 승지(承旨)에 이르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이유로 변방(邊方)에 귀양갔다. 일찍이 병풍에, “요순(堯舜)은 태평세월을 이루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더냐. 화가 자기 집에서 일어날 것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라고 썼다. 연산군이 그 집에서 이 글을 보고 노하여 그를 죽였다. 임희재는 송설체(松雪體)를 본받아 글씨를 잘 썼으며, 여주(驪州)의 임원준(任元濬)의 신도비(神道碑: 洪貴達의 文)와 양주(楊州)의 좌의정 홍괄(洪佸)의 묘갈(墓碣)을 썼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 자는 경여(敬輿), 호는 물암(勿菴)이고, 도승지 임사홍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이어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김종직의 제자였던 임희재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병풍에 시 한 절구를 써놓은 것이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종성(鍾城)으로 다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사화 때 죽은 이목(李穆)의 붕당으로 지목되어 죽었다. 아버지 임사홍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권력을 배척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에 능하였다. 작품으로 임원준(任元濬) 신도비와 성건(成健) 묘비가 있다. [출처] 임희재(任熙載.1472.성종 3∼1504.연산군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