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조선의 신분제도 모순: 노비 군인, 가짜 성씨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72 15.01.15 11:2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5361147

 

● 조선은 겉모습만 강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절대 약하지 않았다.

 

'인구=국력'이던 전근대 시대에

18세기 후반 세계 7~8번째의 인구 대국이던 조선은 

▲ 17세기 당시 세계 각국의 인구 : 여기에 중국, 인도는 제외됐다.

 

70%가 넘는 산지 + 반도국이라는 

천혜의 지리적 이점까지 갖춰

어떤 강대국이라도 쉽게 공략할 수가 없는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었다.

 

또 겨울의 추위는 매섭고, 길은 험해서

적의 보급만 제대로 공략해도

손쉽게 외침을 막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생각이었다.

 

잘못된 사상과 사회적 모순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분산시켰으며

 

'세상에 이보다 더 나약한 군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병약한 모습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데도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500여년을 버틴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이 끝나자 

유성룡은 자신의 저서에 이런 글을 썼다.

 

 유성룡

 

"이러고도 우리가 오늘날 있는 것은

오직 하늘이 도운 까닭이다."

 

 

● 왜 조선군은 무기가 없는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도착했다.

 

사령관 이여송의 첫 마디는 

경악 그 자체였다.

 

 이여송

"아니, 조선군은 무기가 없는가?"

 

당시 조선 군사들이 들고 있던 것은

죽창과 몽둥이, 농기구였다.

 

제대로 된 군복조차 거의 입고 입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은 무기며 군복이며

동원되는 군졸들이 모두 각자 알아서 준비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비쌌다.

 

전시에 노비와 양민들이 

그런걸 장만할 능력이 어디있겠는가?

 

칼을 장만할 방법이 없어서 

집안의 호미를 녹여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칼은 몽둥이랑 부딪쳐도 부러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칼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둔탁한 칼도 변변히 없어서 몽둥이를 들고

참전했던게 당시 조선의 군사들이었다.

 

지휘관 몇 명 빼놓고는 갑옷을 입지도 못했다.

 

사극에서 임진왜란 때 

군졸들이 허스름한 군복을 입고 나오면,

 

원래 조선군은 병졸까지도 모두 갑옷을 입었다고

혈압 폭발하는 이들도 있던데..

 

하지만 그런 사극의 군졸 군복보다

훨씬 더 못입고 싸웠던게 당시 조선의 군사들이었다.

 

이는 조선군에 대한 '문헌의 FM 방침'만을 보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라. 

 

조선정부는 절대로 군인에게 

공짜로 군복을 지급하던 나라가 아니었다.

 

돈 있으면 화려한 갑옷을 입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른듯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당시 조선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고

돈 있는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으니

 

당시 조선군이 입고 지참했을

군복과 무기의 수준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 이들이 과연 갑옷을 입고,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싸웠을까?

혹시 임진왜란 배경의 그림을 보고 
당시 조선 병사는 모두 무장을 했구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림들은 후대에 그려진 것들이다.
또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기도 힘들다.

 

국가에서는 병사들이 모두 저런 식으로 무장을 하기 바랬지만,
당시 현장의 기록을 보면 조선군의 대부분은
무장을 하지 못한 허스름한 노비와 농민들이었던게 사실이다.


● 왜 조선군은 군인이 없는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정에서는 

긴급히 한양에 군대를 모았지만

모두 도망쳐 버리고, 

동원 가능한 숫자는 겨우 300명 정도였다.

 

제대로 작전을 아는 장수도 아무도 없었다.

 

선조는 급히 이덕형을 도체찰사(최고사령관직)로 임명했다.



이에 이덕형은 상소를 올리는데 

내용이 몹시 참담했다.

 

 이덕형

"지금 조선군에게 부족한 것은 장수가 아닙니다.

사공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걱정입니다.

 

도원수가 전진 명령을 내리면

순찰사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있는게 

작금의 조선군입니다.

 

그런데 저를 이 사이에 넣어 

또 명령을 내리게 한다면

그야말로 더 엇갈리고 뒤섞일게 아닙니까?

 

우리 군은 지금 병사, 수사, 조방장, 수령까지

모두 별개의 직위로 별개의 군사를 가지고 있어서

공문만 여러군데서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덕형만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던

유일한 장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군의 상황을 보면

이런 코미디도 없었다.

 

그야말로 문서로만 전쟁을 치르는 꼴이었으니

 

군사조직은 서류상으로

연대급의 속오군 2500명,

대대급의 사 500명,

중대급의 초관 99명,

소대급의 기총 33명,

분대급의 대총 11명 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편제일뿐

어떤 부대는 초관이 있지만 기총이 없고

어떤 부대는 군사가 한명도 없는 곳도 있었다.

 

군, 군단, 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 등

편제는 있지만 병력은 한 명도 없는 곳이 수두룩한 반면

지휘관들만 넘쳐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군단장 이상급인 도원수가

휘하의 민병 100여명을 가지고 있었던게 당시의 상황이었다.

 

16세 ~ 60세까지 군역 대상의 남자 인구가

총 200여만명을 헤아리던 조선시대였고,

 

서류상으로도 상시 대기 가능한 군인수를

기병 2만 3천, 보병 1만 6천으로 지정하고 있었지만

 

임란 다음 해에 왕이 피난살이를 하다 돌아왔는데도

당시 한양을 지키던 군사의 수는 총 3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들 300명은 조정에서 밥을 먹여준다니

그걸 먹으려고 자원한 숫자였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에 의해 조선군이 강제 해산되었을 때도

당시 총 병력은 고작 4천명 뿐이었다.

 

 

● 조선군은 왜 작전이 없는가?

 

조선시대 상시 소속된 군사라고 해봐야

평상시 훈련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전쟁 전에 그들은 대궐 등지에서 문지기를 서고

아니면 성 쌓는 잡역 등을 하면서 살았던 이들이다.

 

따로 전투 훈련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그들이 공부하던 병서라고 해봤자

과거의 전쟁 기록사가 주류이고,

 

군대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우리나라 지형을 어떻게 이용해야 되는지 등의

실용적인 병법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이 되면 

이른바 '지형지물을 이용한 작전술' 이라는게 나오는데,

 

당시 무관이었던 송규빈이 제안하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송규빈 

 

솜이불을 적 공격로에 펼쳐서 작탄을 막자.

② 적 침투로에 나무를 심자.

③ 겨울이면 얼음으로 장벽을 치자.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 조선의 실상이 그러했다.

 

전쟁시 적의 침공로가 될까 두려워

애써 좁은 길을 고수하고 길을 닦지 않았다는 얘기는

절대로 허구가 아니었다. 

 

당시 조선의 성곽도 

단순히 벽을 쌓는데만 치우쳐서

 

병사들은 몸을 숨기고 사격을 해야 할 공간이

너무도 옹색하고 낮아서

엄폐가 되지 않아 상당한 데미지를 입어야만 했었다.

 

전투능력도 그랬다.

일본군은 일찌감치 3단 연속사격을 익혀서

쉼없이 공격이 가능했지만

 

조선군은 한꺼번에 몽땅 쏘고

그 다음에 적이 돌격해오면 

모두 도주해버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다만 그만큼 일본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이 되어 있었고

 

조선은 200년 넘게 평화 속에서만 살다보니

너무도 전쟁을 몰랐던 탓도 있었다.

 

 

● 조선군은 무보수 군인들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들은

병사, 수사, 첨사, 권관 등 직책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에 대한 녹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봉급 한 푼도 없이 

이들은 병졸에게 양식을 걷어서 먹었다.

 

그리고 이런 전시의 시스템은 

조선시대 내내 고쳐지지 않았다.

 

당시 재산이 좀 있는 사람들은

군역에 나가서 군포를 납부하고

대신 병역의 의무를 피했는데..

 

조선시대 장수들은

오히려 이런 군포 납부를 더 반겼다.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들은 녹봉을 챙길 수 있었고,

군대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국가가 백성을 동원해서

유일하게 식량을 지급했던 경우가 

전쟁이 발발할 때였는데

 

이른바 군량미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사정은 좋지 못했다.

 

여기에 명나라 군대까지 가세하여 

조선군의 상태는 더욱 곤궁해졌다.

 

명나라 군대가 1만명이 내려왔을 때

아무리 긁어모아도 

이들을 먹일 양곡은 5일분 밖에 안됐고

 

조선군들은 물에 젖은 썩은 쌀 약간과

좁쌀 몇 줌을 먹고 버텼으니..

 

허기진 조선군이 군마를 잡아먹고

명나라군이 민가를 약탈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 조선군은 도망군이었다.

 

명나라 사령관 이여송은 

조선군의 빈약한 상태를 보고 

직접 나서기 보다는 배후에서 파수(경비)를 서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파수를 세워놓으면

도망쳐 버리기 일쑤였다.

 

이때 이여송은 이렇게 탄식했다.

 

 이여송

"조선군은 도망군이다!"

 

접전이 벌어지면 절반은 도망쳐 버리던게 

당시 조선군이었다.

 

1597년 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울산성 전투에서

명나라군 4만, 조선군 1만의 연합군이 참전했는데

 

이때 조선군은 권율장군의 지휘 하에

용맹하게 싸어 300명이 전사하고 

1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런데 도망병은 5천이나 됐다.

 

하지만 명나라 군인들은 오히려 놀랬다.

 

 명군 

"와! 절반씩이나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네.."

 

추운 겨울에 손발이 얼어 터지고

식량도 없고 무기도 없었는데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 절반은 끝까지 싸웠다고

놀라던게 당시의 명나라 군인들이었다.

 

 

● 한국 역사상 4대 패전 : 용인전투의 자멸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두 달이 채 안된

1592년 6월 5일의 일이었다.

 

용인 일대에서 삼남지방(전라,경상,충청)에서 징집한

5만 대군이 수도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모였다. (일본측 기록은 10만명)

 

이에 맞선 일본군은 총 1,600여명이 전부였다.

숫적에서 31:1로 조선군이 완전 우세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긴급소집되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노비와 농민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군에 놀라

왜군은 도망을 친 뒤 기습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결과는 참담했다.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 일대에서 

조선 선봉군이 박살난 뒤

 

다음날에는 수원 광교산의 부대가 

급습을 당해 궤멸하고 말았다.

 

지휘관들은 앞서서 도망치고 

수많은 병사들이 도망쳐서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물이 터지는듯 했다."

 

당시 조선군의 패배는 

정신적, 심리적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애초에 끌려온 농민+노비들이기에

이들에게 '군의 사기'라는게 있을 수가 없었다.

 

사태가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곤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던 이들 조선군은

 

일본군 조총 소리에 놀라서 

누군가 달아나면, 

봇물 터지듯 모두 도망을 쳤고

 

그러다가 서로 밟혀서 죽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무능한 지휘관들도 문제였다.

 

지휘관 역시 겁먹고 도망치는 데에는

일반 병사들 못지 않았던게 당시의 모습이었다.

 

 

● 한국 역사상 4대 패전 : 쌍령전투의 악몽

 

장수는 녹봉이 없고, 군인은 무기가 없고,

군대는 체계와 전술이 없었던 

 

당시 조선군의 무능력함은

어찌보면 구조적인 병폐였다.

 

그리고 그런 모순들이 모두 응축되어서

비참한 결과로 일단락 지어졌던게 

바로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였다.


1637년 1월 3일,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에서

 

관군 동원령에 따라 차출된 4만 명의 조선군이

청나라(당시는 후금) 기병 300명과 마주쳤다.

 

조선군에는 다수의 조총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133 대 1.

승패는 누가 봐도 뻔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그만 대패하고 만다.

 

당시 조선군은 4만명이라고 해봤자

평소 군사 훈련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강제로 끌려나온 노비와 양민들이었다.

 

애초에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선두에 선 조총병이 대충 몇 발 쏘다가 

청나라 기병대가 돌격 해오면

삽시간에 대오가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조선군은 경사진 곳에서 

서로 도망치려 몰리는 바람에

대부분은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던 것이다.

 

인조 때 나만갑이 쓴 '병자 남한일기'에 보면

당시의 처참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만갑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사람들이 깔려 죽었는데

그 시체가 언덕처럼 쌓였다."

 

사상 초유의 압사 사건으로 

경상 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었다.


 

▲ 압사는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고 무섭다.

 

남급이 쓴 '병자일기'에서는 더 구체적이다.

 

 남급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또 목책을 넘더라도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

 

그런가하면 다른 진영에서는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그만 폭발이 일어나서

경상 우병사 민영도 현장에서 즉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군은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오합지졸의 병사들과

기본적인 전술도 모르는 지휘관의 합작으로, 

또 다시 역사상 초유의 대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용인전투의 치욕이 있은지 45년만에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판박이처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 이양선의 외국인을 보고 혼비백산한 조선군들

 

왜란, 호란 이후로도 

조선 군대의 구조적인 병폐는 여전했다.

 

그 사이에 다른 외적들이 침공하지 않았던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 해안가에는 정체불명의 서양선박,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조정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 잦았는데..


 

1795년(정조 19년)에 8월 1일에 황해도 관찰사가

황해도 장연에 나타난 이양선 사건을 보고했다.

 

내용은 이랬다.

 

국적을 알 수 없는 배 한 척이 바람에 밀려와
홀연히 황해도 오차진 앞에 정박했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군사들을 이끌고

급히 포구로 달려갔다.

 

배 안에는 사나운 오랑캐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랬다.

 

그런데 이들의 차림새가 

하도 괴이하고 수상 쩍어서

곧 수령은 군사들에게 위엄을 보이도록 하였다.

 

 수령

 

"경계태세를 갖춰라."

 

그러자 조선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당기고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그랬는데 오랑캐들은 성을 내면서

일제히 상륙한 뒤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극렬하게 저항하는게 아닌가!

 

분위기가 공포스럽게 되자

조선군은 겁을 먹고 너도 나도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가지고 있던 활과 칼, 총대 등은 

모두 포구에 내다 버리고 뛰었다.

 

 

그 바람에 화가난 오랑캐들은 

그것들을 모두 주워서 망가뜨렸다.

 

그리고는 그들도 닻을 올리고

바다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한다.

 

적을 포위하고 협박을 하는 상황에서

적이 화를 내자, 스스로 무서워 도망치고

그러면서 무기까지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니..

 

한편의 코미디 같으면서도 

왠지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소스 : 노컷 조선왕조실록(김남), 한국의 군제사(김홍), 500년 조선전쟁사(장학근), 재미로읽는 조선왕조실록(김용삼)

 

 

 

 

느려터진 역참제

● 전쟁이 터졌는데도, 굼벵이 걸음질한 역참제

1592년.
일본군이 상륙한 것은 4월 13일의 저녁이었다.

 
700여척의 함선에 2만여명의 일본 선발대가 
새카맣게 바다를 뒤덮으며 밀려들어왔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황급히
외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파발마를
한양으로 띄웠다.

 
그리고 한양에서 소식을 전달 받은 것은 
4월 17일 아침이었다.
꼬박 사흘 반나절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직선으로 320km이고,
구불구불한 지형을 감안하면 넉넉히 400km의 거리다.
즉 총 거리는 약 1000리다.

당시 도로 상태도 안 좋았으니
하루에 300리, 그래서 사흘 걸리는 것이면
보통 아니겠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다.

조선시대 역은 
역졸과 역마가 배치되어 있는 비상 대기소였는데,
역과 역 사이는 통상 30리의 거리였다.

 

▲ 조선시대 주요 파발로

계산해보면, 부산에서 한양까지 
총 30여 개의 역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30리(12km) 길은 
사람들의 보통 걸음걸이로 3시간이 걸린다.
마라토너에게는 40분 거리다.
 
만약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오늘날의 경주마라면 12분,
조선시대 조랑말이라고 해도 15분이면 가능하다.
 
물론 도중에 시내도 있고, 강도 있고
산길도 있어서 조금 더 치체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30리의 짧은 구간인지라,
말들은 전속력으로 달려야 하는게 원칙이다.
 
모든 상황을 다 감안해도 20분이면 
말들은 충분히 30리길을 달릴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30명 구간을 나눠서 부산→서울의 길을
밤에도 걸어간다면 어떨까?

 

계산해보면 알겠지만
꼬박 4일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런 거리를 30번씩 말을 바꿔타면서도 
사흘 반씩이나 걸렸다는 얘기다.
 
물론 역에 도착하면 
즉각 말을 갈아 타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역마다 수십명씩 상시대기하고 있는게 원칙이었다.

말을 갈아타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었다한들
또 얼마나 지체되었을까 싶다.

결국 아무리 늦어도 
역마다 30분씩은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정을 봐줘서
한 구간 당 30분씩 걸렸다고 쳐보자.

솔직히 전쟁 발발이라는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인데
 
한 역마다 30분씩 걸린다는 것도 
당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균 30분으로 놓고 계산을 해보면,

부산 ~ 한양까지 30여개의 역을 
모두 통과하는데에는
총 15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혹시 밤길이 어두워서
낮에만 달렸다고 쳐도 하루면 충분한 거리다.

 
사실 위급할 때에는
밤에도 파발은 달려야 하는게 원칙이다.

그래도 밤길은 어둡다고 달리지 않았다 해도
하루면 족히 도착해야하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한양에서는 사흘 후에야 
사실을 통보받은 것이다.
 
국가적인 비상사태 속에서 
이틀간의 공백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 조선시대 문헌상의 역참제도

조선 왕조는 문서상으로만 보면
제도 자체는 언제나 늘 훌륭하다.

하지만 그런 문서만 가지고 연구 분석을 하다 보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되어버려
생각이 한쪽으로 경도되어 버리는 수가 많다. 

 
역참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문헌만 봤을 때는
이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일 수가 없다.

당시 문헌에 나타난 역참제를 소개해 본다.

조선시대 역참으로 불리는 역이나 참은 
문서나 관수물자 운반이 주목적이었다.
 
이곳의 이용자들은 주로 
역졸과 관헌들이었고
 

역참 외에도 외국 사신들이 이용하는 관,
민간이 이용하는 원과 점이라는 곳도 있었다.
 
가장 서민적인 보통 주막보다는 
모두 고급시설인 셈이다.
▲ 역참의 모습
 
암행어사들도 단골로 역참에 들러
마패에 새겨진 숫자대로 말을 빌려갔다.
 

그런 역참은 한 곳에 통상적으로
역졸 100명에 역마 50여필 정도가 있었다.

물론 역마다 틀려서
종사자가 적은 곳은 10여명 안팎만 근무하는 곳도 있었고
많은 곳은 200~300명이 근무하는 곳도 있었다.

 
병조 직속인 서울의 노원역과 청파역을 예로 들면,
이곳에는 당시 각각 역졸 144명에 
역마 80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매일 평균적으로 
15필의 역마를 교대로 근무시켰는데
이런 말들은 금호문 밖의 마군영에서 보급받았다.

 
말은 상태에 따라 상등마, 중등마, 하등마 등의 
3등급으로 나눴는데,

상등마쯤 되면, 체력과 상태가 좋아
보통 시속 50km 가까운 속력을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경주마가 시속 60km다.)

이상 '만기요람'이라는 책에 기록되어있는
수치만을 봤을 때의 얘기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역참에는 말이 아닌,
발빠른 포졸들이 뜀박질을 하며
릴레이하는 식의 파발도 있었는데..

 

▲ 보발꾼

급각체(急脚遞)라는 이 제도는
하루 낮 동안 400리를 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즉, 원칙대로라면 한사람 당 12km 거리를 
대략 1시간 20분 이내의 속도로 뛰면 되는 것이었고

이렇게 포졸들을 뛰게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꼬박 이틀이면 충분히 다달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도 임진왜란 때는 말을 타고 
사흘 반이나 걸렸던 것이다.


● 세종대왕의 온천수 공수의 예

혹시 조선시대 역참제도가 
원래 다 그런게 아니냐고 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종 당시의 사례를 살펴보자.
 세종

조선의 성군으로 널리 알려진 세종대왕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사료를 보면 그는 운동 부족과 폭식으로 
당뇨와 당뇨 합병증인 안질, 등창, 각기병에 시달렸다 한다.

안질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책을 너무 열심히 읽어서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보다 당뇨 합병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무튼 세종은 눈병이 심해져서 
온천을 자주 다녀야만 했는데,

어느날 충청도 청주에서 
신묘한 물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게된다.

그러자 그 물을 즉시 각 역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는데,

이때 온천의 성분인 탄산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임금께 전달되어야 했기 때문에
특별히 비상 송달책이 하달되었다.


온천수가 있는 청주에서 서울까지
하룻밤만에 운반하라는 명령이었다.

거리는 총 250(100km)였기 때문에
역참마다 말을 갈아타며 밤길을 달려야 했다.

그리고 결국, 저녁 무렵 출발한 온천수는
무사히 이른 새벽에 도착하게 된다.

 

100km의 거리를, 그것도 어두운 밤길을,
물을 운반하면서도
8~10시간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 보아도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1.5일이면 충분해진다.

그런데 온천수보다도 몇 배는 더 중요한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전황보고서는 대략 사흘 반이나 걸려 올라왔던 것이다.


●  역참의 현실 : 봉급도 안 주면서 무얼 바라는가!

전국 곳곳에 30여 리마다 역이 설치되어 있었고
역마다 100여명의 역졸과 역마 50여필이 있어서

전국을 1일 정보망으로 설치해놓은 것은
전근대국가라는 상황을 볼 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얘기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땡전 한푼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역의 종사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돈으로 역을 운영할 정도였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당최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 나라의 시스템이 그러했다.
 
군역으로 국가에 강제 차출이 되더라도
백성들은 스스로 먹을 음식을 싸가지고 와야 했었다.

심지어 대규모 사절들이 오는 경우에
말이 모자랄 경우에는
관군들이 직접 자신들의 돈으로 말을 세내어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역참의 설치 장소는 
대부분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용이었다.
 
수백 명의 역졸과 역마 수백 필이 배치되어 있는
대규모 역은 전부 중국 사신들이 왕래하는
의주 ~ 한양 사이의 길에 집중돼 있었다.

반면에 남쪽에는 주로 늙고 힘없는 말과 
소수의 역졸들이 한가하게 배치되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도 걸핏하면 
농사지으러 가 버리고,
누가 아프다고 가 버리고,
밤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더구나 서류상으로는 상등마가 있고
중등마가 있고 하지만
현장의 상황은 절대로 그렇지가 못했다.

당시 역참의 말들은 
인근 말 목장에서 조달을 받았는데..

 
▲ 조선시대 목장 모습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굶주린 백성들이 훔쳐다 잡아먹는가 하면,
목장 관헌들이 몰래 내다 팔기도 하고,

좀 좋은 말이 있다 싶으면, 
고관들이 빼돌리고 바꿔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없어진 말들은
호랑이한테 잡아먹혔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조선시대의 고을 재정을 담당하는 '해유문서'를 보면
유난히 호랑이로 인한 가축 손실 기록이 많은데 ☞ 참고
이런 세태와 무관한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아예 호랑이에 대한 피해로
말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이유로 
역참 하나가 완전히 폐쇄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호랑이가 정말 목장의 말 수백필을 다 잡아먹었다는 말인가?)

상황이 이러했으니,
전국 목장의 말은 언제나 정량 부족이었다.
 
그런데 당시 임금은 
수시로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

상품은 으레 말 한마리가 가장 많았다.
그걸 첩지로 써서 목장에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목장에서는 내줄 말이 없었으니,
첩지만 한 길이나 쌓여 있었다 한다.

이런 상태에서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관원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니

왜적의 부산 침입 소식이 사흘 반나절이나 걸려
한양에 전해졌다는 것은 
어찌보면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유명무실한 봉수대

● 봉수대의 현실

임진왜란 당시 봉수대 연락도 거의 없었다.

뒤늦게 파발 소식을 듣고 
한양 인근에서 봉수대를 띄운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정에서 문책을 할까 두려워
부랴부랴 산에서 봉화를 지폈던 것이다.

 
사실 봉수대만 원할하게 작동되었더라면
부산에서 한양까지는
반나절이면 조정에서는 소식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무엇보다 봉수대에 
불을 피울 인력이 없었고

또 불을 피우더라도
평소 나무가지를 치는 등 시계확보를 해줘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했으니
불을 피우더라도 제대로 알려지기가 힘들었다.

 
성종 때의 기록을 보면
봉수대에는 통상 다섯 명이 근무했는데

낮에는 농사일 때문인지
사람들이 도통 상주하지 않았고,

밤이라고 해봤자
산 정상까지 짐을 지고 올라야 했기 때문에
고단한 처지여서 지원자가 없었고
도망자만 속출했다고 한다.

 

▲ 산에서 불 피우는 것도 노역이었다.

그런데 이런 봉수마저도 주로 북쪽에 설치되었다.

연산군 당시 
각 봉수대 군사들에게 덧옷을 지급했는데,

평안도에 350벌, 함경도에 500벌,
삼남지방(전라, 경상, 충청)에는 63벌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쪽에는 외적이 침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만큼 대비에 소홀히 했었고
그런 이유로 봉수대 수도 적었던 것이다.

 
그런데 봉수대 수가 적어지면
간격이 넓어져 불을 피우더라도
먼 거리 때문에 제대로 인식되기가 어렵게 된다.

여러모로 당시의 봉수 시스템은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는 하루에 천리를 전진했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당시 후금) 군대는 압록강을 건넜다.

 9년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항복하고
그때 형제지간의 맹약을 맺었지만 

조선은 군사력도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매번 미개한 오랑캐라고 상대를 무시하고 멸시했던 터라
청나라는 여러 차례 경고를 했던 터였다.

그러다 결국 청나라는 군대를 몰고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 청나라 군대가 침범했다는 사실을
처음 전한 사람은 국경에 나가 있던 대원수 김자점이었다.

이때가 청나라가 국경을 넘은지 3일째가 되는
12월 11일의 일이었다.

 김자점의 전령
"큰일입니다. 
후금의 군사가 지금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인조
"이런, 결국 넘어왔단 말인가!
적들은 지금 어디에 있어?"

 김자점의 전령
"안주에 있다합니다."

 인조
"무엇이!! 벌써 안주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평안도 안주에서 한양까지는
대략 천리의 거리가 된다.

이에 조정 신료들은 아연실색하면 놀라 
서둘러 모병 대책과, 강화도 피난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개성유수로부터 급보가 올라왔다.

  전령
"긴급 소식입니다. 적들이.."

 인조
"그래 지금 어디있다던가?"

  전령
"이미 개성을 지나고 있습니다."

 인조
"헉!! 개성!!!"

그랬다. 
이미 적들은 한양의 코 앞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떻게 하루만에 적들이 
천리(400km) 길을 진군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진군은 현대의 전격전이라도 불가능할 일이다.

 
▲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격전


● 병자호란 치욕의 일등공신, 김자점

이유는 이랬다.

김자점이 보고를 늦게 올린 것이다.
김자점은 나중에 그 죄를 물어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병자록'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김자점은 황해도 북쪽 사리원 근처에 있는
정방산성에 있었는데,

 
▲ 사리원시 정방산성

그곳에서 성을 수축하는 일을 맡았다.

 부장
"장군님 빨리 일을 마무리 짓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겨울이 되면 혹시 적들이 내려올 수도 있으니.."

그동안 북방 민족들은 
늘상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던 터이다.
예전에 거란도 그랬고, 몽골도 그랬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김자점은 버럭 화를 냈다.

 김자점
"아놔, 장사 하루이틀 하나.
결코 그럴 일 없으니깐 걱정 말어."

 부장
"그렇다면 봉수대라도 더 설치하심이.."

당시 의주에서 정방산성까지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정작 한양까지는 연결을 해놓지 않았다.

 김자점
"그것도 안될 소리야. 
적이 처들어오면 그때 가서 직접 알리는게 낫지."

 김자점
"괜히 잘못해서 봉화가 전해지기라도 해봐.
조정에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그래서 봉수대 설치도 반대했던 김자점이었다.

그랬는데, 12월 초의 어느날이었다.

산에 봉화가 올라왔다.
 

봉화가 2개 타올랐다. 적진이 수상하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봉화의 신호체계는 이렇다.

1개 : 평상시
2개 : 적 국경 근처 출몰
3개 : 적 국경선 도달
4개 : 적 국경선 침범
5개 : 적과 교전 중

 부하
"장군님 용골산 봉수대에서 
봉화 2개가 피어올랐습니다."

 김자점
"호들갑 떨지마. 딱 보아하니 
겁먹은 놈들이 상황 판단도 못하고 불을 2개 지른거네."

그러고 지나쳤는데,
다음 날에도 봉화가 2개 타올랐다.
 

그러자 김자점은 부하 한명을 의주로 보냈다.

 김자점
"에잇, 짜증나! 
너가 직접가서 확인 좀 해봐라."


● 조선군의 전령은 청나라 군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12월 9일, 의주로 갔던 부하가 돌아왔다.

 김자점
"그래 어떻든?"

 부하
"큰일난거 맞습니다. 
아무래도 적들이 곧 강을 건널듯 싶습니다."

그러자 순간 김자점은 화를 참지 못하고
부하의 목을 칼로 치려고 했다.

 김자점
"어디서 함부로 입을 나불거려. 
너 똑똑히 보고 온거야?"

 부하
"보기는 봤는데요.."

 김자점
"대군이 건너오려면 일단 강물이 얼어야 하는데..
지금 압록강이 얼었더냐?"

 부하
"..."

 김자점
"내 딱 보니깐 군사훈련 하는거구만."

그리고 김자점은 도통 믿지를 않았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는 
그날 배를 타고 남하했다.

그리고 청군이 몰려오자, 놀란 김자점은 
그때야 비로소 서울로 긴급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이미 황해도 정방산 일대까지 도달한 
청나라 군대에 의해 전령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북방 기마군대 특유의 
'앞만 보고 쳐들어가기' 병법을 쓰고 있었다.
 

이 방법은 적들과 교전을 가급적 피하고
기동력을 최대한 살려서
적의 수도만을 바라보고 공략하는 방법이었다.

때문에 청군은 잠시 머물다가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하기 일쑤였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당시 적군 내침의 보고를 전달해야 할 전령은
결국 적군의 뒤를 따라 가는 기막힌 일을 연출했던 것이다.
 


● 하지만 추격하는 조선군은 없었다.

이때 의주를 지키던 임경업이나
황해도를 지키던 김자점 같은 장수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부장
"장군님, 적들이 그냥 쌩까고 지나갔습니다."

 김자점
"뭐? 진짜야? (내심 다행)"

 부장
"적들을 추격해야하는거 아닙니까?"

 김자점
"미쳤어? 
그러다가 적의 후속부대가 공격하면 어쩔려고.."

 부장
"..."

 김자점
"제발 오바하지마.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는거야."

그랬다. 
이게 당시 장수들의 마인드였다.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책임회피와 폭탄 떠넘기기.


그런데 이때 만약 군사를 풀어 
청군을 추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군의 진격은 당연히 지체할 수 밖에 없었다.
뒤쫓는 무리가 있는데 
앞만 보고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의주에서도, 평양에서도, 황해도에서도
뒤를 추격하는 조선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개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군대는 
그 바람에 한양에 손쌀같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임금은 황급히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지만
그것도 이미 늦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청나라 군은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닷새만에 한양까지 밀고 온 것이었다.

 

●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신분제도

 

전통시대에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라는 없었다.

 

인류의 문명 발달 과정도 따지고 보면

강한자가 약한자를 지배했던 불평등한 사회가 

대두됐기 때문에 비로소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신분제도 역사는 유구하다.

다만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삼국시대 : 귀족 - 평민 - 노비

 

전통시대 신분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세습'이라는 데 있다.

 

삼국시대 신분 제도를 3단계로 구분 짓는 이유도 

바로 이런 명확한 세습적인 신분에 있다.

 

다만 신분별로 구체적으로 몇% 비율이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일본 나라현 정창원에 보관된 통일신라 시대의 고문서를 통해

당시 청주 부근 4개 부락의 구성비율이

귀족 10%, 평민 80%, 노비 10% 정도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다.

 

 

고려시대 : 귀족 - 중인 - 평민 - 노비

 

 

 

고려시대에 오면 4개 계층으로 한단계 늘어난다.

 

'중인(중류층)'이라는 하급 관리나 지방의 호족세력(향리)이

세습적인 신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선시대와 똑같은 사회구조였다고 보면 된다.

 

다만 양민 중에서는 노비는 아니었지만

노비 못지 않게 차별대우를 받던 세력들이 있었으니,

향·소·부곡의 주민들이었다. 

 

만약 향·소·부곡의 주민들을 노비와 같이 취급하면

고려의 천민집단은 총 30%가 된다. 

대략 조선 초기 노비의 비율과 비슷해진다.

 

(한편 고려 후기부터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로

노비들의 수가 급증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시대 : 양반 - 중인 - 평민 - 노비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똑같은 '양천제'였다.

 

다만 그 비율에 있어 차이가 좀 있었다.

 

조선 초 양반 10%, 중인 10%, 평민 40%, 노비 40% 정도였는데

 

17세기를 분기점으로 이전시대에는 점차 노비가 늘어나고

이후로는 노비는 줄고, 양반은 늘어나게 된다.

 

그러다가 19세기 들어서는 국민 대다수가 양반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 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왜 갑자기 많아지게 됐나?

 

고려시대 이전까지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했던 노비의 수가 

조선시대가 되면 대폭 증가하게 된다.

 

절정기였던 17세기 초 무렵, 

조선 전체 인구의 60%가 노비였던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왜 이렇게 많아졌던 것일까?

 

흔히 다른 나라의 경우 노비(노예)는 

전쟁 포로를 통해 많이 얻어지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가끔 왜구를 붙잡아 노비로 쓰기도 했는데, 

왜구 노비들은 어찌나 사납게 굴던지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주인댁 여자를 강간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북방의 여진족의 도적들을 붙잡아다가 

노비로 삼은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숫자는 아무리 보태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죄인이나 포로 때문에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었다.

 

일명 빚을 져서 노비가 되는 경우를 '부채 노비'라고 하는데

조선 이전 시기에도 '부채 노비'는 늘 있어왔다.

 

다만 고려시대 같은 경우는

이렇게 빚을 지면 도망가는 유량민의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호패법 등으로 통제를 철저히 했던 조선시대에는

도망을 가도 유랑민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노비로 전락하게 된 것이 조선시대였다.

 

나라에서도 빚 진 자는 

양민이라 할지라도 노비로 삼게끔 법제화 하였으니,

흉년이 한번 쓸고가면 국가적으로 노비들이 급증하게 됐다.

 

여기에 부모 중 한 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무조건 천민이라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사상 때문에 

해가 거듭될수록 노비의 수는 늘어가기만 했다. ☞ 참고

 

결국 17세기 초가 되면 

당시 1100만명 인구 중 700만명 가까이가 노비가 되는 사회가 되고만다.

 

 

● 조선 초기 : 노비가 양민이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

 

빚 한번 제대로 갚지 못했다고

한번 노비가 되면 평생 노비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고

 

그 자식들도 대대로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참으로 막막한 사회였다. 

 

특히 조선 전기는 더욱 그러했다. 

 

1485년(성종 16년) 충청도 진천에 임복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런데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 정부가 몹시도 근심할 때 

쌀 2천 석을 대뜸 국가에 납속하는게 아닌가!

 

쌀 2천 석이면, 쌀 320톤을 말한다. 

 

당시의 기술로는 적어도 논 100만평이 있어야 하는 수확량이다. 

대략 여의도 땅의 40% 크기의 논에서 수확한 수준이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8억원, 당시 하급관료들 연봉의 100배 정도.

이걸 노비가 국가에 납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이 알려지자 성종은 곧 대소신료들과 의논했다.

 

 성종

"요즘 돈 있는 양반들도 이러기 힘든데

노비 신분으로 이런 거액을 내주겠다니 참으로 대견스러워."

 

 성종

"뭐 이 정도면 면천 정도는 해줘야 하는거 아님?"

 

그러자 관료들은 결사 반대를 한다.

 

 신하1

"노비들이 납속 좀 했다고 면천을 시키면 국가기강이 흔들립니다."

 

 신하2

"그 많은 쌀들이 어디서 났겠습니까? 

다 주인꺼 삥땅친거 아니겠습니까?"

 

상황이 이러했으니 성종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래서 직접 임복이를 불러서 묻게 된다.

 

 성종

"니 소원이 무엇인고?"

 

 임복

"다른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불쌍한 제 자식들만 어떻게.."

 

하지만 이때도 신료들은 결사반대한다.

 

 신하1

"노비 주제에 어떻게 그런 큰 재산이 생겼겠습니까?

오히려 죄를 묻고 법으로 처리하셔야 하옵니다."

 

그러나 성종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성종

"신료들은 이렇게라도 재산을 내어봤음?

마땅히 포상시키고, 임복이 자식 4명을 모두 면천시켜라."

 

하지만 그래도 신하들은 반대했다.

 

 신하2

"자식 4명은 너무 많사옵니다."

 

 성종

"에잇. 그럼 한 명만이라도 면천시켜.."

 

이러자 노비 임복은 쌀 천석을 더 내다 바친다.

 

결국 토털 쌀 3천석을 바치게 됐으니, 

그제서야 임복의 아들 4명은 모두 면천을 받게된다.

 

여기서 두번 놀라게 된다.

 

1. 조선시대 어이 없는 신분제도

2. 노비의 엄청난 재산

 

한편 임복의 아들들이 면천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번에는 전라도 남평에 사는 '가동'이라는 노비가 

쌀 2천석을 납속하려고 했다.

 

 가동
"저도 안될까요?"
 

하지만 임복의 아들을 면천시키면서 

원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터라

성종은 가동의 납속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 초기 노비들의 신분상승은 대단히 어려웠다.

비록 노비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더라도 양인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 조선 후기 : 쌀 15석이면 면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엄격한 신분제도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17세기 초를 정점으로 

이후 노비의 수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 노비문서 불태우는 장면

 

애초에 노비들에게 면천의 길을 열어줬던 것은 조선 정부였다.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노비들에게 납속을 받고서 

면천종량(免賤從良: 천민의 신분을 벗어 양민이 됨)을 시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임복의 예에서 보듯 

초기의 납속엔 상당한 재물이 소요되었다.

 

16세기 초 중종 때는 면천종량을 받기 위해

기본적으로 쌀이 1000석(현재가치 4억원) 정도는 있어야 했다.

 

 사실상 노비가 그런 거액을 만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16세기 초까지 납속으로 면천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중엽 명종 때

경상도 지방의 흉년을 구제하기 위해

쌀 100석 정도를 납속하면 면천 종량의 해택을 주게된다.

 

그렇더라도 현재가치 4천만원의 큰 돈이었다.

당시 왠만한 노비들은 한평생 모아도 마련할 수 없는 큰 돈이었다.


 

때문에 이때까지 노비가 납속을 통해

면천을 받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 임진왜란 발발하면서 

납속을 통한 노비 면천은 급속도로 행해지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 정부는 재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노비들에게 납속을 받아서라도 재원을 확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의 납속량은 대폭 떨어져 15석 정도였다. 

현재가치로 대략 600만원 수준이다. 

(노비들이 2년 정도 품삯을 모은다면 마련할 수있는 재원)

 

그리고 납속량은 갈수록 떨어져서 

13석이면 공식적으로 면천종량을 받게 되었고

 

18세기에는 돈 100냥 (약 300만원)이면 

노비들도 얼마든지 양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당시 노비의 한명의 몸 값은 20냥 (60만원)이 채 안됐다.

 

아무리 면천의 가격이 쌀 지언정 

노비 자신들의 몸 값보다는 훨씬 비쌌던 것이다.

(조선시대 노비들의 몸값은 말이나 소 반마리 값도 못됐다.) 

 

 

● 서자의 비애? 게으른자의 불평

 

왜란과 호란 등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재정 확보를 위해 국가에서는 

두 가지 종이 쪼가리를 백성들에게 팔게되는데

 

하나는 공명첩이고, 다른 하나는 납속책이었다.


공명첩과 납속책

 

공명첩이란 돈으로 양반의 관직을 사는 것이었고

납속책이란  돈으로 노비의 신분을 벗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역의 의무를 면제해주는 납속면역, 

시험에서 낙방하는 것을 면제해줬던 교생면강첩,

서얼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서얼허통첩 등이 있었다.

 

가격은 얼마나 됐을까? (참고로 쌀 1석은 현재가치로 40만원 정도다)

 

공명첩 : 낮은 관직은 쌀 30석, 문관(동반)의 관직은 쌀 80석

납속책 : 15석

서얼허통첩 : 겸사복 5석, 무관(서반) 50석, 문관(동반) 80석

 

대략 이러했다.

 

그런데 사극을 보다보면

 

서얼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평생 과거도 못 보고

신세 한탄만 하다가 가는 비운의 인물로만 그려진다.

 

물론 조선 전기에 서얼들의 운명은 그러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공명첩이 남발하던 시대에도

왜 자꾸 신세타령만 하는걸까?


 

쌀 5석만 있어도 비록 양반은 못 되어도 

겸사복 같은 말단 공무원이 될 수 있었고

50석이 있으면 양반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물론 50석이면 큰 돈이긴 하다.

 

그래도 세상한탄만 하고 절망적으로 살아갈 바에는

몇년 바짝 일하여 돈 좀 벌어서 양반이 되고

당당하게 과거 시험을 보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식으로 많은 서얼들이 양반이 됐다.)

 

서얼들의 투정은 어찌보면 

게으른자의 불평일수도 있겠다.

 

 

●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19세기 말에 오면

원래 계급의 명칭이었던 '양반'은 그냥 

'이놈', '저놈' 하듯 '이 양반', '저 양반'하고 부르는 호칭이 된다.

 

19세기 말에 양반은 대략 80~90%는 되기 때문이다. 


 

▲ 개나 소나 양반

 

대대로 권세를 누리던 문벌 가문의 양반이 있는가 하면,

공명첩을 사서 돈으로 양반이 된 이도 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서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시대 끝무렵의 이야기일 뿐이고

조선시대 내내 양반의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원래 양반이란, 

문관인 동반과 무관인 서반을 함께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4대조, 즉 고조할아버지 아래로 

9품 이상의 관직에 나간 이가 없으면

양반의 반열에서 탈락하게 되어 있었다.

 

고려말 지배층이 비대해지자 

집권 사대부들이 지배층을 축소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하지만 누가 양반에서 물러나고 싶어했겠는가?

 

조선시대 현실은 5대조가 아니라 

10대조 할아버지가 조그만 벼슬이라도 했다면 

무조건 양반 행세를 하려고 했다.

 

다만 당시 과거 시험이라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고시보다 더 어려웠던 시험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4대조 안에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기란 요원했다.

(기껏해야 30명 안팎 뽑았으니)

 

그러니 어느 집안이나 양반의 대열에서 탈락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한번 붙잡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여러 꼼수를 동원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혼반(婚班)이었다.

양반들끼리 사돈을 맺음으로서 양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외가나 처가에라도 관직에 나간 이가 있으면 

양반 노릇 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엽까지는 출가한 딸에게도 재산을 균분하여 상속했으므로 

처가의 재산은 사위에게도 상속되었다. 

 

때문에 가난한 양반은 혼인을 통해 노비와 땅을 얻고, 

양반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한 이는 

양반의 지위를 얻는 정략결혼도 성행했다.

 

 

더 확실한 방법은 동족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반촌(班村)을 형성하는 것인데

양반들은 친인척으로 한 마을을 이루고 

 

소수의 양민과 다수의 천민을 부려 

땅을 경작하여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했다. 

 

이런 꼼수로 양반 지위를 이어갔던 이들을 향반(鄕班)이라고 불렀다.



● 가난하면 양반 인생도 끝

 

그런데 무릇 양반이라고 하면

일단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물론 조선후기에는 일자무식 양반들도 넘쳐났지만..)

 

 

선비라는 명칭도 실은 여기서 유래한다.

 

때문에 양반 사회내에서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담론을 나눌 수준이 되지 못하면

경멸과 멸시를 받았다.

 

선비들 중에서 혼탁한 조정을 탓하며 

일부러(?)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아 

죽림이니 산림이니 하는 사림의 집단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벼슬을 하지 않아도 엄연한 양반이었다.

 

정작 양반에서 탈락하는 것은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특히 신분제도가 본격적으로 흔들리던 18세기 무렵부터는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양인보다 못했고

 

대신 부유한 양인이나 천민은 

돈으로 양반을 사서 양반행세를 하는 

역전 현상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한때 주인과 머슴이던 관계가 처지가 바뀌어

주인이던 사람의 아들이 나중에 

머슴 집에서 종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참고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도 

가난은 가장 무서운 적이었던 것이다.

 

 

● 자수성가하여 노비에서 양반이 된 케이스

 

노비출신이 양민이 되기도 어려웠던 시절, 

노비가 양반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돈주고 사는 양반 말고, 자수성가해서 양반이 되는 경우)

 

딱 이런 경우만 가능했다.

 

1. 역모를 고발한 경우

2.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

 

조선 선조때 서인 출신 송익필은 

노비인 아버지가 역모를 고발하여 양반이 된 경우였다.

 

그런데 당파 싸움으로 서인이 잠시 밀려나는 시기

 

송익필은 아버지가 노비의 출신이라고 하여 

다시 노비로 환천되었다가

 

서인 세력이 재집권하면서 사면을 받아 풀려나게 된다.

 

그런가하면 세조(수양대군) 때

수양대군 집의 머슴이었던 조득림은 

 

수양대군이 반정할 당시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여

나중에 3등공신이라는 개국공신에 봉해지면서

관직과 집과 땅, 노비 등을 재수 받게된다.

 

이후 조득림은 권모술수 등으로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대단한 권세를 누리기도 하는데..

 

 조득림
 

조득림이야말로 조선왕조 500년 통털어

노비 신분으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자수성가의 1인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득림과 같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노비 출신들은 

비록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었지만

다른 양반들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중종 때 반석평이라는 문신은

노비출신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함께 경서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고,

 

또 임금이 공조판서나 병조판서로 임명하려 할 때 

여러 관료들의 반대를 받아야 했다.

 

그렇더라도 조선시대 

노비가 관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전부 뒤져도 

노비 출신 관료는 몇되지 않는다.

 

노비들이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길은 

돈으로 관직을 사거나, 

세상을 뒤엎을 민란에 참여하는 일 외에는 없었다.

 

 

● 임진왜란 당시 노비들 : 차라리 일본군이 되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의정 유성룡은 선조에게 고한다.

 

 유성룡

"전하 나라가 위급하오니 노비들의 힘을 빌려야합니다.

이들에게 전쟁 중에 공을 세우면 면천을 시켜준다고 하소서."

 

 선조

"어쩔수 없구나. 그렇게 조치하게."

 

이렇게 당근책이 떨어지자

전국의 노비들이 의병으로 참가했다.

 

 노비

"왜군 목 하나 자르면 상을 주고

둘을 자르면 면천이고, 셋을 자르면 관직을 준다네.."

 

그랬는데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신료들이 들고 일어섰다.

 

 신하

"천민들이 쥐꼬리만한 공로를 핑계로 양반이 되려하니

국가의 근본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선조

"그럼 면천 취소하라고 해."

 

이렇게 해서 선조는 없던 일로 처버렸다.

 

당시 노비들의 배신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도 굉장히 많았으니..

 

선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조

"지금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웬 말이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 남긴 '쇄미록'을 보면

 

 의병장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랫 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의 점령 정책이 동네마다 쌀을 나눠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었는데

 

사정이 이러하니 평소 사람 취급도 안해주고 착취나 일삼는 

양반네 편에 설 상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병이 쳐들어오기 전 한양의 궁성을 불태웠던 것도 

실은 노비들의 소행이었다.

 

모두가 조선의 잘난 사대부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 뒤로는 어떤 왕도 전쟁을 통한

반상철폐나 노비해방 등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이 거의 없었다.

 

노비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관군에 끌려왔지만 싸울 의지가 없었다.

전세가 조금만 위태로워지면 도망쳐 버리곤 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의 90% 이상은 가짜 성씨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90% 이상은
가짜 성씨와 가짜 족보를 갖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성씨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당시 신분 계층별 비율이 어떠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조선 전기의 신분사회

애초에 성씨는 임금이 관료에게 하사한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족과 일부 권문세가 등에 국한되어 그 수는 매우 적었다.

물론 고려시대 때 쓰던 성씨를 계속 쓰던 이들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은 고려왕조를 멸조시키는 과정에서

고려 왕족의 성씨인 왕(王)씨 일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득세했던 권문세족들을 대거 숙청했기 때문에
이전 시기 득세했던 귀족들의 성씨가 상당수 사멸하게 된다.


고려 왕족이 쓰던 왕씨도 마찬가지였다.
획을 더 추가해서 왕씨를 옥(玉)씨, 전(全)씨로 고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예 성을 쓰지 않았던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성씨를 가진 이들은 매우 적었다.
심지어 15세기 초 태종 시절에는 조정 대신들 중에서도 
성이 없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15세기 후반 성종 당시 문서에 기록된 이름들을 보면
자질금, 말동, 합이, 자근, 철근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 한자 이름이었지만 성이 없었다.

심지어 불과 100년 전인 1912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교사 엘리제 셰핑 여사는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이렇게 글을 남겼다.

 엘리제 셰핑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500명 중 
이름이 있었던 사람은 단지 10명 뿐이었다.
여인들은 돼지 할머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를 쓰지 않았던 것은 
조선시대만의 특징은 아니었으니
우리나라는 이전 시대에도 그러했었다. 

참고로 고구려는 해,을,예,손,목,우,주,마,찬,동,연,을지 등 
성씨가 총 10여종에 불과했고
백제는 여,사,연,협,해,진,국,목 등의 8개 성씨가 주류를 이뤘다.

여기서 성씨가 적다라는 것은 
그만큼 성씨를 가진 이들이 적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라는 이,최,정,손,배,설이 가장 대세였고 
김씨, 박씨의 왕족의 성씨가 있었지만
김씨는 6세기 중엽 진흥왕 이후로나 쓰이기 시작했던 성씨였다.
 진흥왕
우리나라의 김씨는 진흥왕 이후부터 시작된다.

사실 박혁거세, 김알지로 알고 있는 이름도 
수 백년 뒤 후손들이 성씨를 붙여준 것이지
처음에는 성씨 없이 그냥 혁거세, 알지 등으로 불렸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가 되면서 
고구려, 백제의 성씨는 대부분 사멸하게 되고

또 고려시대가 되면서 
대부분 중국의 성씨를 모방하여 새 성씨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 고려의 귀족들

그런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실제로 많은 중국인들이 귀화를 하여 성씨를 받기도 했다.

고려 전기에는 귀화 중국인들은 성씨가 있는데
토착 고려 귀족들은 성씨가 없는 상황도 연출된다.
당시 고려 귀족 중에는 성씨가 없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성씨는 지배계층만의 특권이었고, 
또 귀화 지식인에게 내리는 포상의 성격이 강했다.

▲ 고려시대 사성정책

때문에 평민들에게는 성씨는 언감생심이었다.
다만 호적대장에는 평민들의 이름 앞에 고을 이름이 붙어다녔는데,

가령 서산의 개똥이, 충주의 돌쇠, 상주의 막봉이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물론 이런 지역명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족쇄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성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 가짜 성씨는 이렇게 늘어났다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조선의 전체 인구 중 
성씨를 가진 이들은 10% 남짓한 수준이었다.

10% 미만이라는 수치는 
당시 왕족과 관리들, 족보를 가진 양반들의 수를 모두 합한 것이다.

 
▲ 조선 전기의 신분사회

왕이 하사를 했든 어떻든 우선 관직이 있는 사람들은 성을 붙였지만
그 숫자는 기본적으로 미미했다.

17세기 초 병자호란 직후 왕이 내린 유공자 전지를 봐도 
장군의 이름이 '막둥이'로 되어 있는 등
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7세 이후로 갑자기 성씨를 가진 이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유는 바로 공명첩 때문이다.

여기서 공명첩이란 돈을 내고 벼슬을 사는 것으로서
광해군 때 재정확보를 위해 공공연히 공명첩을 뿌렸던 터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광해군은 조선을 보다 평등사회로 만든 군주인 셈)
 
▲ 조선시대 공명첩

때문에 돈만 내면 천민도 양반이 되고
벼슬자리까지 얻게 되던 시기였다. 

물론 고려시대부터 이런 매관매직은 있어왔지만
본격적인 시기는 광해군 때 들어서였다.
당시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연히 논 팔고 살림 팔아서 
성을 얻는 자가 늘어났다.

이때 국가는 3년마다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 때마다 성을 가진 인구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성을 취득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17세기 후반에는 20%가 성씨를 가졌고
19세기 초에는 50%를 넘고
19세기 후반에는 70%를 넘게 된다.
즉 19세기 후반에는 전체 인구의 70%가 양반이 되는 것이었다.


▲ 조선시대 시기별 양반의 수, 비중

그러다가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1909년 일제가 실시한 '민적법'에 의해서였다.

당시 순사들은 각 집을 돌면서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다.
이때 성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 성을 만들었다.

가끔 한자의 획을 잘못 써서 
희귀한 성씨가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 왜 하필 '김씨', '이씨'만 택했는가?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토성(土姓)이라는게 있었다.

'토성'이라고 함은 
각 지역의 유지들의 고유한 성씨를 말한다.

가령 고려시대 인구가 5천명이던 전주에는
토성으로 이, 최, 정, 손, 배, 설씨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토성의 흔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1454년 세종실록 지리지에 울산 언양현을 보면
박, 김, 이, 목, 전, 오, 윤, 문, 임 등의 9개의 토성이 나와 있다.

여기에 타 지역에서 들어온 왜래 성씨로 
황, 허, 정씨가 나중에 유입된다.

아무튼 역사적 기록을 봐도 딱히 
우리나라에 김, 이씨가 유달리 많았던 적은 없었고
그런 근거도 부족하다.

혹시 김씨, 이씨들만 유독 번식력이 왕성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 넌센스다.


김씨, 이씨가 많아진 진짜 원인은, 
그만큼 가짜 성씨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김씨였고
그 다음이 이, 박, 최, 정씨의 순이었던 것이다.

최근 통계자료를 보면 이렇다. 
(조선 후기 성씨의 인기 순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중 21%정도가 김씨인데, 총 1000만명이다.
이씨는 약 680만명 정도로 15%정도다.

이 두 성씨를 합하면 전 인구의 36%가 김씨나 이씨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걸 보고 왜 가짜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성이 없던 사람이 성을 새로 가지려면 
새로운 성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전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니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있는 다른 사람의 성씨 속에 은근슬쩍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러니 가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 김씨와 이씨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당시 성을 신고하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단 조선은 전주 이씨가 세운 나라였다. 
그리고 구한말에는 세도가 안동 김씨의 힘이 상당했다.
이왕 선택하는 성씨인데
가급적이면 괜찮은 걸 택하고 싶은건 사람들의 본능 아니겠는가!

그래도 너무 뻔히 보이는 짓이라고 생각해서
몰락한 왕가의 성씨를 택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그래서 인기였던 성씨가
옛 가야왕의 성씨였던 김해 김씨와 
신라와의 성씨였던 밀양 박씨, 경주 김씨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본관 순위를 보면
김해 김씨가 410만명으로 1위,
밀양 박씨가 300만명으로 2위,
경주 김씨가 170만명으로 4위인데
이런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 한 마을이 통채로, 노비들이 통채로 같은 성씨가 되기도

우리나라 시골에 보면 유독 집성촌들이 많은데,
여기에는 이런 비밀이 있다.

가령 낙향한 가난한 양반이 한 집 있으면 
그 고을의 성씨가 없던 부락민들이 
돈이나 양식을 주면서 부탁하여 같은 성씨로 입문을 하곤 했다.


심지어 마을의 의견을 모아 
부락 전체가 통째로 같은 성씨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노비들이 통채로 주인의 성을 따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노비는 상전을 부모와 같이 취급해야 했기 때문에
노비들이 면천을 하면서 주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

때문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폐지할 당시
안동 김씨의 한 권문세가의 노비 300여명은
일사분란하게 주인댁과 같은 성씨가 되기도 했다.

또 성씨가 많아진 데에는
당시 족보를 변조하던 전문 사기꾼이
특정 족보를 입수해서 판본으로 만들어서 대량 찍어냈던 탓도 있었다.

이런 판본이 있으면 사기 족보는 대단히 만들기 쉬었다.
이름 하나만 추가시키면 됐기 때문이다.


● 폐쇄적인 우리나라의 성씨

꼴랑 성씨 두개가 전 국민의 30%가 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베트남은 Nguyen씨만 40%다.)

중국도 가장 많은 이씨, 왕씨, 장씨를 모두 합쳐봐야 20% 정도다.

사실 일본도 성씨 없이 살기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 후에 
전국적으로 성씨를 만들게 하여 생겨나게 됐으니
당시는 이런 식으로 성씨를 만들어 붙였다.

 
산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야마나카(山中),
소나무가 많은 고장에 살던 사람들은 마츠시타(松下),
들판 가운데 살던 사람들은 다나카(田中),
대밭이 있는 지역은 다케다(竹田)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성씨는 현재 1만 여개가 넘는다.
반면에 중국의 성씨는 현재 약 2만 3천개에 달한다.
 
미국 역시 성씨는 수만 가지다.

미국인들의 성씨는 대부분 성경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서 따온게 특징인데,
흔히 직업을 나타내는 성씨가 많다.

가령 '베이커'는 제빵사, '스미스'는 대장장이, '부시' 나무꾼,
'파머' 농사꾼, '피셔' 어부, '코핀' 장의사 등등
대략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씨를 모두 합해봐야 
현재 총 286개에 불과하다.


그마저 1960년대까지 258개였는데
외국인 귀화로 좀 늘어난게 그 정도다.

이 모두가 우리 조상들은 성씨를 얻으면서,
새롭게 성씨를 짓기보다는, 기존의 성씨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바로 조선이라는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라는 특수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성씨를 쓰려는 자체가 
차별받는 상민, 청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새로운 성씨를 쓰면 곧 천한 출신이라는 증표가 되고 만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대로 성이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여기에 창씨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이라는 사회의 폐쇄성과 권위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족보는 대부분이 가짜

이런 엉터리 성씨와 함께 
조선의 폐쇄적 잔재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실체로 족보가 있다.
 
요즘 집집마다 족보가 있고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왕가의 후손이요, 명문가의 잔손들일텐데..

그러나 이중에 진짜 족보는 10%도 안되는게 현실이다.
족보에 나와 있는 조상들 중에
5,6대 이상이 자신의 실제 선조일 가능성은 10%도 안된다는 뜻이다.
 
남의 족보를 빌려다가 위는 베끼고 
아랫부분은 현재의 자기 가족들을 집어넣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직후까지 
이런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고 한 재산 모았던 브로커들이 많았는데

이런 것은 원본 족보와 대조해 보면 금방 밝혀지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하도 가짜가 난립하다보니, 어느게 진짜인지도 분간이 어려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대로 된 족보는
15세기 후반이나 되어야 
최초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믈다. (안동권씨의 성화보)

 
▲ 안동권씨의 성화보

당시까지 족보를 가진 가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실제로 양반이면서 족보가 없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오면서부터 양반들의 허례허식이 강해져
족보를 양반의 필수품 쯤으로 여기게 되면서
조직적으로 족보 위변조를 하는 풍토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영조 때 기록을 보면 이렇다.
 
 신하
"전하 어떤 역관 하나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한 다음 
족보를 찍어내어 양민들한테 팔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당시 상민이나 천민이 족보를 갖게 되면 
무슨 혜택이 있다고 저랬을꼬?

혜택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군역의 면제였다.

당시는 양반들이나 유생들은 군역에서 제외됐다.

런데 당시 관례로 족보를 지참하고 있으면 
양반으로 인정을 했던 것이고
이런 이유로 족보가 있으면 군역이 면제될 수 있었다.
▲ 일반 백성들은 군역을 면제 받는 조건으로 면포를 내야했다.

물론 이들이 군역 면제만을 노리고 
위조된 족보를 산 것은 아니었으니..
천대 받는 신분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1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변조가 계속되면서 
나라에서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18세기 말부터는 아예 양반들이 스스로
돈을 받고 자기 족보에 올려주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족보를 가진 양반가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음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7세기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중 60%가 노비였는데 ☞ 참고
현재 어느 누가 자신의 조상을 노비라고 말할 수 있을지..


● 소소한 얘기

이름 앞에 성이 오는 나라 : 동아시아, 헝가리, 인도

이름 뒤에 성이 오는 나라 : 헝가리를 제외한 서양 모두, 터키 
(터키는 원래 성이 없었지만 근대 들어 생김)

성이 없는 나라 : 아랍 
(때문에 이름에는 아버지 이름, 할아버지 이름, 부족출신, 고향이름 등이 붙는다)

왕건, 견훤도 사실 성이 없던 인물이었다.
견훤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개였다.

결혼을 하면 여자의 성이 남편 성을 따르는 나라 : 대부분 국가, 일본

결혼을 해도 여자의 성이 남아있는 나라 : 한국, 중국

고려시대에는 왕가의 여인들은 결혼전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부모와 자식들의 성이 다른 나라 : 아이슬란드
아버지 성씨에 아들에게는 -sson(쏜)을 붙이고, 딸에게는 -dottir(도띠르)를 붙인다.

서양에서 전치사가 붙는 성씨는 대개 귀족의 성씨다.
프랑스 de(드), 독일 von(폰), 네덜란드 van(반), 스페인 de(데) 

이런 성은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뜻
-son, -sson으로 끝나거나, O' 혹은 Mc(Mac)으로 시작하는 경우
예를 들어 Handerson, McGuire, O'brien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금지는 왜 할까?
 

우리나라는 해방 후 법을 만들면서 
동성동본 혼인을 법으로 막고 있다.

본래 동성동본 금혼은 성씨가 많지 않았던 
1669년 현종 당시 송시열이 주장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로서는 아마 당연한 규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씨가 이미 엉망이 된 마당에 
동성동본 타령을 하는 것은 웃기지 않는가?

이보다 '근친혼 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듯 싶은데..
 
 
다음검색
댓글
  • 15.01.15 20:25

    첫댓글 잘 봤읍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