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쉽고 한자(漢字)는 깊다.
한글은 '음', 한자는 '뜻'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한자의 경우 아직 도(道)의 진정한 의미조차 다 풀지 못한다. 그래서 한자는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다.
한때 우리들은 상용한자 1천800자를 달달 외었다. 그것만 읽으면 한자로 된 어떤 글이라도 술술 다 해독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누정에 붙은 한시를 보면 다 아는 한자인데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가늠할 수 없다. 글자는 다 아는 데 뜻은 모른다니.
한학의 세계는 그렇다. 영어 사전 다 암기한다고 영어의 달인이 될 수 없듯 한자도 소림사 검도 입문자처럼 숱한 난관을 거쳐야 비로소 최고의 검객(한학자)이 될 수 있다. 소림사에서 한 검법 배우기 전에 쌀 씻고, 마당 쓸고, 심부름 하는 일부터 배운다. 그게 무슨 검법과 상관있느냐며 불만을 품고 절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이도 있다.
하지만 묵묵히 참으면 검법을 스승으로부터 전수하는 날이 온다. 그것이 다 인 줄 아는 검객은 절문을 나가는 순간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 죽임을 당한다. 다음 단계는 산전수전 익히기. 절에서 배운 검법은 '고정변수'. 동기들과 대련을 하지만 그건 실제상황이 아니다. 목숨이 오고가는 게 아니다.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은 목숨을 걸어야 된다. 올챙이 검객은 절 아래 주막에서 강호의 고수를 숱하게 만나 얻어터지면서 칼이 뭔가를 알게 된다. 한마디로 '문리(文理)'가 트이는 것이다.
한자는 한문(漢文)을 낳고 한문은 한학(漢學)을 낳는다. 자(字)·문(文)·학(學)의 스펙트럼은 천양지차. 자를 배워주는 자와 문을 배워주는 자와 학을 배워주는 자의 기품도 또한 천양지차. 한자자격시험 운운하는 강사들을 선뜻 한학자 반열에 올려선 안된다. 한자 전문가는 구구셈을 끝낸 수준, 한문 전문가는 1차 방정식을 푸는 수준, 한학자는 고차 미·적분을 물리학자처럼 푸는 수준이다. 격이 다른 것이다. 한학자는 도학자이다. 한자속에서 헤엄치지만 좀처럼 한자에 걸리지 않는다. 여느 학자와 품새와 눈빛도 다르다. 천(天), 우주(宇宙), 도(道), 성(性), 명(命), 리(理), 법(法)의 경지에서 백학처럼 노닐기 때문일까.
요즘 정년 은퇴자는 물론 대학생, 심지어 밥상머리 교육이 부족한 자녀를 데리고 한학강좌를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덩달아 유학 경전 강좌가 호경기를 누리고 있다. 이번주엔 한강 이남에서 한학강좌 인프라가 가장 풍부한 대구지역 한학강좌의 현주소를 더듬었다.
그래픽=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매주 월요일 오전 8시 대구시 남구 대명9동 대연학당 2층 강의실.
우동기 대구시교육감, 대구예술대 김정길 총장, 이영상 경북외국어대 총장, 장영철 영진전문대 총장, 권상장 계명대 석좌교수 등 지역의 명망가 30여명이 모여 만든 동유회(同有會·회장 이화언 전 대구은행장) 회원들이 홍역학(洪易學) 전문가인 청고 이응문씨(51)의 강의를 대입 수험생 못지않게 경청하고 있다. 수업이 끝나도 이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회원 중 한 명이 동양경전 관련 주제발표를 하고 30분간 토론을 한다. 모두 표정이 편안하기 그지없다.
한학 때문에 관심사가 돈에서 도(道)로 바뀐 이화언 전 행장은 "지난해 행장직을 그만두면서 주역과 인연을 맺었고, 아는 분들과 함께 강의를 듣다보니 이렇게 주역 동호회로 발전하게 됐다"면서 "행장 시절 복잡다단한 관계속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근본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돼 개인적으로 너무 기쁘다"면서 주역 예찬론을 펼쳤다.
그동안 한문 전문가들의 전유물로만 취급됐던 한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최근 들어 폭증하고 있다. 특히 정년 은퇴자와 CEO들의 관심이 전에 없이 높아지고 있다. 기존 60대 이상의 실버 세대 위주의 한학강좌에 대학생은 물론, 초등·중학생까지 몰려들고 있다. 1978년 발족한 대구청년유도회(회장 이창환)가 추진 중인 대학생 한문연수강좌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수강생이 지난해 60명에 이어, 올해는 90명으로 늘었다. 이번 겨울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학생들의 한학붐은 입사시험과도 상관 있다.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이 최근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 한학 공부를 한 응시자에게 가산점을 주고 있다는 것도 일조를 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대구시 중구 담수회 한학교실에는 초등~중학생 30여명을 대상으로 기초 한자가 아니라 소학과 천자문을 무료로 가르친다. 전홍식 (사)담수회 사무처장은 "요즘 아이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예의범절이 없어지는 것을 염려한 학부모들이 한학강좌에 관심을 많이 갖기 시작하는 것 같다"면서 아동들의 한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대구에서 사서삼경 등 유학 경전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곳은 △대구향교 △남산동 문우관 △범어동 양정서당 △만촌동 모명재 한학교실 △(사)동양고전연구회 △경덕원 한문서당 △담수회 △주역 전문 학당인 대명동 대연학당 등 10곳이 넘는다. 특히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인 오초 황안웅씨가 매주 월요일 영남일보 웰빙센터(053-745-6868)에서 꾸려가는 고천문과 천자문 강의도 인기를 얻고 있다.
지역에서 가장 선비정신이 서려 있는 문우관은 한학 강좌에서 벗어나 한학 전문가들끼리 모여서 당송팔대가와 근대 유학자의 문집 등을 돌아가면서 배우는 윤독회 스타일의 수업도 마련했다.
경북대 국문학과 정우락 교수는 "영남이 타지역에 비해 대학교 한문학과가 많고, 고문서도 전국에서 가장 많이 집중돼 있고, 특히 대구향교는 물론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경북대 내 한문국역센터, 계명대 한학촌 등이 한학강좌 붐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어디서 어떤 강좌 들을 수 있나 (((
대명동 대연학당 - 홍역학 집중적으로 교육
대구시 남구 대명9동 앞산 안지랑골 아랫 동네에 있는 대연(大衍)학당(대표 청고 이응문).
이 대표는 한국 주역의 대표 학자인 대산 김석진과 아산 김병호(작고)를 제자로 둔 야산 선사의 친손자. 일반 사서 등 한문 경서보다 야산 선사가 1946년 제창한 홍역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매주 목요일 오후 7~9시 주역을 비롯 천도변화론, 대학, 중용, 홍범을 통째로 배우는 2년6개월과정의 홍역대학과정, 매주 금요일 오후 7~9시, 매주 토요일 오전 10~12시 1년6개월 과정의 주역 원전반, 매주 화요일 오후 7~9시까지 6개월 과정의 주역으로 풀어온 천자문 등에 모두 150명이 수강중이다. 2004년 5월부터 국내 최초 사이버 대연학당(www.cyberdaeyeon.co.kr)을 개설했다. 매주 셋째주 토요일 오후 5~7시 대연학당에서 대연시민문화마당을 연다. (053)656-4964
남산동 문우관 - 당송팔대가 읽기는 20년 지속
중구 남산동 옛 동산양말 공장 옆에 있는 문우관(文友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원 이수락 같은 지역의 쟁쟁한 한학자들이 고담준론을 논하고 문우관시회를 열어온 장소다. 1914년 교육운동가 채헌식씨가 상덕사 옆에 향교의 재산으로 건립했다. 현재 이완재 영남대 동양철학과 명예교수가 문우관장으로 있고 24년전부터 지역의 대표적 젊은 한학자로 평가받는 김홍영씨(51)가 관리하고 있다. 화·금요일 오전 8~9시 근세 경남 창녕 출신의 학자인 심재 조긍섭 문집, 월·목요일 오후 6~7시 고문진보, 토요일 오후 6~7시30분 당송팔대가 읽기는 20년 이상 역사의 윤독강회로 화요일 오후 1시30분~3시 이갑규씨가 운영하는 양정서당에서 진행된다. 현재 50여명이 공부하고 있다. (011)820-5262
범어동 양정서당 - 고문진보·사기열전 등 강의
수성구 범어동에 있는 양정서당. 87년부터 이곳을 지키며 정통 한학의 산실로 키워가고 있는 양재 이갑규씨(54). 경남 사천 출신인 그는 어릴 때 조부인 유암(有菴) 이후림 선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이어 산석(山石) 민영복과 추연(秋淵) 권용현의 제자가 된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30분 고문진보, 목요일 오전 10시30분 사기열전, 월요일 밤 9시30분 자치통감 등을 가르친다. (053)752-7166
대구향교 홍도학원 - 해동소학 등 9개강좌 개설
대구향교 내 홍도학원은 1975년 대구향교 명륜당 입구에 세워졌다. 사서삼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류정기 박사가 진두지휘하다가 대구의 대표적 선비 중 한 분으로 평가받는 소원 이수락씨(작고)가 맡으면서 크게 현창된다.
대구향교에는 현재 9개의 한학 관련 강좌가 개설돼 있지만 역사가 가장 오래 된 것은 홍도학원 한학반. 매주 월~금 오전 7~8시 이수락씨의 아들인 전 영남대 동양철학과 이완재 교수(79)가 부친의 강좌를 이어가고 있다. 월·수·목 오전 10~12시는 박석현·박승필씨가 해동소학, 주자소학, 격몽요결, 매주 금·토요일 오전 10~12시 서창식씨가 삼국유사와 명심보감, 매주 월·화요일 오후 7~9시 청년유도회 한문강좌. (053)422-8700
대구청년유도회 - 대학생 대상 한문연수
92년 6월에 전격적으로 도입한 대구청년유도회의 대학생 한문연수. 타 도시에서는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지역 한학 강좌에 젊은피를 수혈한 역작이란 평가를 받는다. 대학생 한문연수는 여름·겨울 방학을 이용해 진행되는데 현재까지 37기 4천400명 이상 배출했다. 매주 월·화·수요일 오후 5~6시30분 향교내 유림회관 소강당에서 진행되며 월 수강료는 1만5천원. 성적 우수자에게 300만원의 장학금. (011)507-1266
동양고전연구회 - 주역부터 삼국지 강의까지
동양고전연구회는 96년 5월 동양고전연구소(소장 이장우)로 출발, 영남일보 대우아트홀에서 사서삼경 등 동양고전 시민강좌 붐을 일으켰다. 2000년 1월에 법인이 되면서 수성구 범어동 동양신경정신과 병원내에 교육관을 마련했다. 때로는 불경, 철학 등 폭넓은 교양강좌도 연다. 월요일 오후 7~9시 주역 강의, 화요일은 오후 7~9시 초서, 수요일 오후 7~9시 고문진보, 목요일 오전 10~12시는 한학의 이해, 그날 오후 7~9시 삼국지를 강의한다. 강사진은 주역에 조호철 원장(동양신경정신과 병원장), 초서에 능인고 교사인 전일주씨, 고문진보에 장세후씨, 한학의 이해에 이장우 영남대 중문학과 명예교수 등이다. (053)754-0025~6
<> 인터뷰
대학생 한문연수이창환 대구청년유도회 회장
"옥편도 못 읽던 학생들이 강좌 수료후엔 소학도 줄줄 외워"
이창환 대구청년유도회 회장. 23년 역사의 한문고전연수(옛 경전연구반) 등 유도회 내 한학 관련 각종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는 92년 시작된 대학생 한문연수에 가장 매달리고 있다. 공교육이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한문교육 활성화를 위해서다.
" 처음에는 옥편도 못 찾고 부수가 뭔지 모르던 학생들이 수료증을 받고 나갈 때는 소학을 줄줄 외우고 이 공부 때문에 주위의 인정을 받는 걸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그동안 37기 4천400명이 지나갔다. 학생들은 연수 기간 중 2박3일 일정으로 경남 산청 남명 조식의 위패를 모신 덕천서원, 경북 안동 농암 이현보를 기리는 농암종택 분강서원 등에서 선비체험을 한다. 학생들은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육례(六禮:詩, 書, 禮, 樂, 射(활쏘기), 數(셈))'도 익힌다. 그는 "황금만능주의가 더욱 만연해지고 인간들이 이기적으로 될수록 한학으로 마음의 중심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며 "영어보다 한학 구사 능력이 주요한 스펙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전망했다.
이 회장은 "최근 입사시험 면접관들이 한문연수 과정을 거쳤다고 하면 플러스 점수를 주고 더 관심을 갖는 추세"라면서 대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대구청년유도회에는 만 18~60세까지 가입할 수 있다. 현재 회원은 2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