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봉평장날 가산(可山) 이효석을 만나러 간다. 아니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장으로 간다. 愚子가 동해시에 있는데도 마음은 콩밭이라, 아니 메밀밭이라 은근히 아내의 눈치를 보니, 애비가 저 모양이니 늙어 용돈 타 쓰기는 글렀다는 표정이다. "가는 날이 장날인데, 에라, 올 때 들리지 뭐..." 봉평은 경주처럼 2,7장이다. 제작년에 들렀을 때는 봉평장과 4,9장인 대화장도 비켜버렸다. "장돌뱅이 이생원인교?"
경주에서 강릉까지 여섯 시간을 운전했더니 몽롱한 정신에 그만 장평, 평창을 놓쳐버렸다. 영동고속도로 위다. 어딘가에서 빠져나와 다시 장평으로 U턴 하는데 , 선잠의 아내가 "보이소, 희한하제...이리 가도 강릉, 저리 가도 강릉인 게, 강릉이 경주보다 큰게비여..." 장평IC에서 봉평은 15분 거리다. 전에는 없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우선 메밀 칼국수로 속을 풀었다. 너무 맛이 좋아 메밀색처럼 가무잡잡한 주인 아지매에게 시건방을 떨었다. "아지매요, 지가요, 요 식당을 말입니더, 하루에 수만 명이 들어오는 '인낚'이라는 낚시 사이트에 올려 드리겠심더. 국물맛이 뚝배기 맛이네!" 그바람에 공짜 한 추바리라...
원래 가산 생가는 없어지고 주춧돌에 옛기억을 더듬어 복원한 것이 현재의 후가(後家)라 그리 와닿는 정감은 없지만, 배도 부르니 뒷사립에 핀 박꽃에 푸근한 심사로 만회를 하기로 하자.
<사립문 박꽃>
뒷뜰의 탈곡기와 '훌찌(쟁기질 농기구의 사투리)'를 보니 소설가 안정효(낚시 소설 '미늘'과 월남전의 '머나먼 송바강'의 작가)가 쓴 2004년 현대문학 1월호의 '김노인'의 남근석주(男根石柱/性器)가 생각난다. 훌찌질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요령도 쓰야 될 뿐더러 뱃심에다 사타구니를 주목에 힘껏 갖다 붙여야 한다. 주목이 자빠지면 새참도 사라지고 앞니도 사라진다. 낭심도 사라지고 남근석주도 사라진다. 안정효의 노골적 묘사라서 생략하기로 하는데 실은 안 읽고는 못 베길정도로 포복절도할 내용이라 상상에 맡기면서... 아무튼 막걸리 새참 얻어 마실려면 쟁기를 적당히 들어 두불 일을 각오해야 한다.
<생가와 후가/창동리 생가는 함석집/뒷산은 우경산>
각설하고, 다시 가산과 친해보자.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출생인 작가는 평창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와 경성 제1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다.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노령근해>,<상륙>,<행진곡>,<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자 작가로 활동한다. 동반 작가란 메카시즘의 입장에서 보면 빨갱이다. 직접 활동하지 않으면서 작가로서 사회주의를 후원하는 회색단체로 그 당시엔 하나의 사조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동반자 작가 활동은 1920년대 말 계급주의 문학운동이 활성화되던 때였고 그 해체는 독립운동이후 사상적 탄압이 시작된 30년대 초반이다. 그때는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사조였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면 푸로문학과 경향파의 작가군에 의한 이 사조의 단체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그 예로 문단의 중후한 작가군인 유진오,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유치진, 안덕근, 홍효민, 엄홍섭, 소위 여류작가인 박화성(낚시 수상록 '하느님 아버지 입질 좀 봅시다'로 유명한 낚시꾼 소설가 천승세님의 모친), 최정희 등의 그야말로 초기 현대문학의 기라성같은 유명인들이 그 단체에 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1935년에 해체된 K.A.P.F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가산은 외출 중>
그 후 모더니즘 문학단체인 '구인회'에 참여하고, <豚>,<산>,<들>, 등을 발표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산문시 문체로 기가막히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한다. 1936년 단편문학의 전무후무한 걸작 <모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며 문단에 우뚝 서게된다. 다음에는 심미주의적 작품인 <장미 병들다>,<화분> 등을 계속 발표하여 본능적 性을 탐구하는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받는다. 구인회란 사회주의 계급적 문학을 배척하며 1933년 결성된 순수문학을 표방한 동인회이다. 4년여의 짧은 역사이지만 당시의 복합적 사조의 뿌리가 약한 문학풍토에서 대단한 주지주의(포괄적 모더니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탄력있는 동인이었다. 초기의 발기인 동인으로는 김기림, 이효석, 정지용, 유치진, 이무영, 이태준, 김유영, 이종명, 조용만으로 총 아홉 명이라 '구인회'란 명칭이다. 결성 얼마 후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이 탈퇴하고 박팔양, '날개'의 이상, 박태원이 가입하고, 다시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봄 봄'의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하여 일정한 9명으로 유지된다.
<단행본 노령근해 1932-동반자 작가시절>
우리는 가산의 '구인회' 이 후의 작품시기인 1936년의 봉평과 대화장으로 가기로 한다. 바로 '모밀꽃 필 무렵'이다. 작가가 발표한 초고는 '메밀'이 아니고 그림의 題字 처럼 '모밀'이다.
<모밀꽃 필 무렵 1936>
1936년 朝光지에 발표.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은 왼손잡이요 곰보인 장돌뱅이 허생원의 이야기다. 그 허생원이 봉평장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선달과 같이 충주집으로 간다. 그는 애송이 동이가 충주댁과 놀아나는 것에 화가 나서 따귀를 때려 쫓아버린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 셋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따라 대화로 간다.
<생가 창동리 가는 길>
허생원은 젊었을 때 메밀꽃 달밤에 개울가 물레방앗간에서 성씨집 새악씨와 밤을 새운 이야기를 그날도 하게된다. 조선달에게 몇 번이나 욹어먹은 이야기라 그 마저 달달 외울 정도지만 허생원의 화두는 자못 진지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의 물레방아 연담을... 동이도 가슴에 묻었던 그의 어머니 얘기를 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부 밑에서 고생을 하다가 가출했다는 것이다. 대화장으로 가는 달빛길에,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빠져 동이에게 업히게 되는데, 그 등판의 온기에 흐뭇함을 필자 역시 아끼고 아끼며 읽은 장면이다. 허생원은 동이 어머니의 본가가 봉평이라는 사실과 동이가 자기와 똑같이 왼손잡이인 것을 알고는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힌다. 다음 장엔 동이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달길을 걸어가는데 메밀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임을 암시하며 읽는 사람의 애간장을 은근이 건드리는 밤길인데... 거기에 메밀꽃이 피고 나귀가 거든다.
<여울목/작품속의 장평 개울>
단편소설이 아니고 詩라고 해야 할 이 작품에서 정작 작가 본인은 애욕(愛慾)의 신비성을 다루려 했다고 그의 〈현대적 단편소설의 相貌〉에서 적고있다. 아마 방아간의 해후가 이루는 정사가 외설의 지름길을 아슬하게 비켜가는, 지극히 절제된 時空을 제공하면서도 두근두근 방아질을 치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는 그런저런 장면이었을까. 그 꿀같은 심미주의적 단어는 언어가 되고 시가 됨을 김동리 선생은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평했고, 필자의 스승인 목월님은 '주관적 모더니즘의 극치'라 표현하셨다.
<가산 이효석>
비끝에 맞춘 장날은 초장이라 늘어진 긴긴해에 한갓지면서도 슬금슬금 제몫의 장길로 채워지는 중이다. 나귀대신 네남없이 반은 경운기고 반은 포터라 내마음의 봉평장은 낯설기만 하다. 각다귀 대신에 허생원의 스켄들을 짐작할 만한 드팀전 귀신들이 전설처럼 눈앞에 다가섬에 그나마 안도이다. 탁주가 제격인데도 소주병이 참술치고는 넉넉하다. "새복 넉 점에 일나서 자는 놈 깨워 무우단에 실려 온 겨. 경운기 멀미엔 소주가 낫어." 새벽단잠의 아들을 깨워 봉평장에 열뭇단을 부루고는 아들이 공장에서 돌아올 쯤에 파장을 맞춘다는데 지금이 중참인데 그게 만만치가 않음에 타는 애에 소줏병만 는다.
<30년대의 봉평거리>
<장터1-봉평재래장터>
소줏병만큼 열뭇단도 쌓이는데, 차양밖의 여름해는 한 발도 더 남았다.
<장터2-장돌뱅이 2005>
한 자리 얻어 감자전 부쳐 먹으며 곡식전의 조와 겨를 보니 糟糠之妻가 바로 옆이네. 천지를 모르는 아내는 세상만사 넉넉한 줄만 아는데 감자전 천 원어치가 마파람에 게눈이다. 수수밥을 먹여도 군소리 없던 '사철 발 벗은 아내'의 김장 서른 번. 세월을 잃고 열 번, 접고 열 번, 알고 속으며 열 번인데, 나머지를 마저 속일려니 훤히 보이는 속셈이라, 자뭇 생색인 동행도 고마울 뿐이다. 그래도 편한 낌새를 끝까지 들키지 말아야지...
<장터3-곡물전>
조선달같은 개나리 할배는 노루목을 걸어 넘었다는데 메밀 부침게를 뒤짚던 충주댁의 표정이 별쭝맞다. 사금파리같은 사연을 묻으며 살았는데 새삼 고름을 풀려니 그런저런 까탈이 말기에 걸렸을 그날의 충주댁이 훌쩍 세월 그네로 넘어 온다.
<충줏집 - 대타 2005/충줏집 터>
식용유에 가성소다를 넣은 무공해 비누를 참하게도 진열해 놓았는데 그 옆에 유일하게 젊은 동이같은 박물장수가 휴대폰으로 자장면을 시키는 중이다.
<장터5-깨끗해요!>
"단무지 좀 많이 가져 오더라고! 그건 곱배기라구! 수수 빗자루는 탕수육이여!" 그건 맞다! 허생원도 조선달도 바터제(barter制)엔 능했으니까.
<장터6-박물장수 2005>
이제 대화로 가자. 나귀 방울소리가 시원한 달빛 여울목과 푸른 콩포기와 소금을 뿌린 메밀밭으로...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