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찾아가기 - 진주답사 #1
경남 진주가 온통 들썩이고 있습니다.
가을 빛 영그는 지난 주말에 찾은 진주는
"물.불.빛 그리고 우리의 소망" 을 담은 2007 진주남강 유등축제를 비롯한
제 57회 개천예술제와 제113회 전국 민속 소싸움대회와 투계대회.
그리고 실크페스티벌등 여러 축제 한마당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구석구석 찾아가기 이벤트 행사 일환으로 나선 진주답사.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문화 예술의 도시인 이름도 예쁜 진주를 찾아
아침 일찍 서울 광화문을 나선 버스는 한 낮이 되어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부산,대전 등 전국에서 6대의 관광 버스로 분승한 구석구석 답사팀을
처음 맞은 곳은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진주가 자랑하는 육회 비빔밥으로 유명한 갑을가든이란 맛집였습니다.
육회 비빔밥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서 왜놈들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관군과 의병 그리고 돌멩이를 나르는 부녀자들에게 시간을 아낄 수 있도록
손쉽게 만들어 제공한 영양식으로
질 좋은 한우 육회와 각종 나물,실고추가 반짝이는 둥근 놋그릇과 어우러져
마치 꽃과 같다하여 화반(花飯)이라고도 하고
일곱 색깔의 꽃밥이라 해서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그 맛에 반하여 전국 각지에서 이 음식을 먹고져 들리곤 한다는
귀한 음식였습니다.
푹 우려낸 사골 국물에 콩나물을 넣어 시원한 맛을 낸
선지국과 함께 나온 한 끼의 식사와 주린 배를 채우고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왜 그리 맛있는지....^^*
다음 일정을 위해 잠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누구를 닮았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재치있는 입담과 전문 지식으로 뭉쳐진
4호차 담당 윤보령 관광가이드와 함께.....
진주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전통 소싸움 경기를 보고져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진양호 소싸움 상설 경기장에는 이를 보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진주 소싸움은 삼국시대 때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승기념잔치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그 기원이 오래 되었고
소싸움의 원형 또한 잘 보전되고 계승되어 있다 합니다.
전통 소 싸움의 발원지이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해 오고 있는
진주의 소싸움대회는 소규모로 그 맥을 이어오다
지난 1972년부터 전국 규모의 대회로 성황리에 계승 발전시켜왔고,
올해 벌써 113회를 맞이한 소싸움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진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월 1~2회 정도 토요일에는 상설 소싸움 경기장에서
정기적으로 소싸움 경기를 개최하고 있어 소싸움경기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 흔치않은 구경거리라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지켜보니
평상시 순하디 순한 소들이 주인(牛主)들의 손에 이끌려 상대 소에게
마주케 하자 상황이 돌변합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렇듯이 규칙을 알고 관전하면 재미있듯
소싸움의 기술에도 여러 기술이 있습니다만
뿔을 좌,우로 흔들며 상대소의 뿔을 치며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기술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상대 소를 제압하는
'뿔치기' 공격 기술을 보여주자
수 많은 관중들도 입을 굳게 다문 채 긴장하며 지켜보다
한쪽소의 멋진 공격에 일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그 열기도 뜨거워집니다.
모처럼만의 나들이를 통해 소싸움을 관전하는
어르신들의 표정도 사뭇 진지합니다.
한 경기가 끝나자 다른 경기를 기다리는동안
관중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려는 듯
지방 중소도시 축제에 가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무명 가수들의 걸쭉한 입담과
노래 솜씨로 흥을 돋아주고,
커다란 황소탈을 쓴 진행요원이 관중들의 앞에서서 흥을 유도합니다.
한 노인께서 흥에 겨워 무대 앞으로 나와 덩실거리고
관중들 모두가 덩달아 신이납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우사의 전국의 싸움소들.
파아란 하늘 아래 펼쳐진 가을 햇살과 함께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기장에 나서면 그렇게 무서운 싸움소로 돌변하다니.....
그 자리에 함께한 모놀 가족들.
소 싸움을 관람하고 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상설 투계 경기장으로 향하였습니다.
태국에서는 오래전 부터 이어온 생활의 한 부분이자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하는 국민 오락이자 스포츠로 발 돋음한지 오래라는 투계.
약간의 푼돈을 얹어 구경꾼들이 직접 참여하여 그 승부에 따라 돈을 잃고 따는
도박으로만 알았던 투계가 우리나라에서도 열리고 있다니,
너무 문외한였던 자신을 자책(?)하며 관심잇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투계도 신라 시대때 부터 즐겨온
전통 우리 민속놀이로 이 곳 진주가 원조라 합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해설사분께서 시합 방식과 판정방법 등에 대해
알려주시며 관중들의 호응을 유도하니
도시에서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 그런지
보는이들의 표정도 사뭇 진지하고 즐거운 표정들 입니다.
한 순간의 적막이 흐르다 어느 닭이 먼저랄것도 없이 사정없이 공격하면
깃 털이 뽑히고 온 몸은 상처 투성이이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싸움닭의 기술이 펼쳐지는 동안은
승부에 따라 환호하고 탄식하는 흥분감이 끊이지 않은 짜릿한 시간 였습니다.
오늘 이 곳 상설 경기장에서 펼쳐진 소싸움 경기나 닭싸움 경기같은
무형의 우리 민속 놀이가 부디 잘 계승 발전하였음하는
바램을 갖은 소중한 시간을 뒤로하고 다음 답사지인 진주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진주 성곽이 눈에 밟히고 가을 하늘은 높기만합니다.
서울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이런 하늘을 언제 보았는지 오늘은 모든것 다 제쳐 두고서라도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조들의 순국항전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라 그런 생각도 잠시
임진왜란때 이곳 진주는 아군 군량의 보급지라 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로 가는 길목으로
이곳을 빼앗기게 되면 전라도지방을 방어할 수 없었던 만큼
진주성민은 굳게 뭉쳐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성을 지켰던 곳으로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촉석성이라고도 불리우는
진주성 입구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전국에서 유등축제를 즐기려 하는 관광객들이 몰려든 가운데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은 깨우쳐 주려는 듯
손가락을 나를 향해 가리키며
오늘도 굳건히 진주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 기개를 이어받은 우리의 남해대교 님. ^^*
전국에서 모인 답사 회원들과 단체 사진을 촬영하면서 잠시....
이곳 문화유산 해설가이신 장일영선생님께서는 참 정열적인 분으로
진주의 역사에 대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것은 개인적으로 큰 복이었습니다.
임진왜란때 3대첩 하나로 꼽히는 제1차 진주성싸움.
3천8백여명도 않되는 군사로 다양한 전술을 통해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살신성인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2차 진주성 싸움에서
10만이 넘는 왜군을 맞아 죽을 각오로 맞섰으나
11일간의 치열한 싸움끝에 모두 전사,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은 숙연함이 엄습해 왔습니다.
촉석루로 향하는 길.
그 역사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귀한 말씀을 놓칠세라 꼼꼼히 메모하는 모범 모놀가족들.
촉석루에 당도하니 많은 관광객들이
따가운 가을 햇살을 피해 대청마루에 누워 혹은 누각 난간에 걸터 앉아
남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합니다.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3대 누각이라 손꼽히는 촉석루.
오르는 계단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은 후
너른 대청에 서니 끊임없이 불어대는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질으고,
그 바람속에 진주를 감도는 풍류 한자락이 묻어 옵니다.
그사이 누각내 천정에 붙어있는 편액 하나에 시선이 모아집니다.
영남제일형승.
영남에서 제일 가는 경관을 자랑한다는 뜻으로 누각에서 남강을 바라보자니
과연 그렇구나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북으로는 평양, 남으로는 진주 그런 말이 있듯이
예부터 진주는 풍류의 고장이었다 합니다.
그 풍류는 교방, 즉 기생문화에서 꽃을 피웠고
오랜 전통의 진주 기생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전해 줍니다.
나도 모르게 두둥실 어깨를 들썩이는것도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로 옆에 자리한 의기사로 향합니다.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1593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롭게 죽은 많은 백성들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의기사
우리 역사상 유일한 여자를 위한 사당이라 합니다.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1688~1744년)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증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라 합니다.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2칸, 맛배 지붕의 기와집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것 이외에 많은것을
소상히 알려주신 문화해설사님의 해설이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의기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
그 의로운 죽음 앞에 숙연함 마음을 모아봅니다.
촉석루를 떠 받치고 있는 석기둥을 따라 숨바꼭질하며 의암으로 향하는 길.
많은 사람들이 그 의로운 죽음의 현장을 보기 위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가운데 시원스레 남강이 펼쳐집니다.
현대 문명과 옛스러운것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
한가로히 떠있는 유등과 오리배를 즐기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생각이 들면서 지나간 그 역사를 돌이켜 봅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벼랑 가장자리로 조심스레 발을 옮기니
한쪽에서 옛 포도대장 복장의 안전 요원이 길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것을 배려하는 진주시의 따뜻한 마음을 엿 볼 수 있어 흐뭇한 마음을 지니는것도 잠시,
논개가 왜장을 껴 안고 뛰어 내렸다는 의암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그 충절의 현장을 보기 위해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촉석루 아래 남강의 물살을 버티고 선 작은 바위 하나.
강물과 접하여 있긴 하여도 그 당시 강이 얼마나 깊었기에 그러했나 하는
의구심을 지닌 채 '의암(義巖)'이란 이름을 가진 바위에 붙여진
싯귀를 가만히 읊조려보며 논개란 여인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진주에 갔을 때 진주성 촉석루를 찾지 않을 수 없듯,
진주성 촉석루를 이야기 할 때 논개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 일것입니다.
한낱 기생의 몸으로 왜장의 몸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 든 논개.
그 아름답고 훌륭한 충절이 이토록 심하게 가슴을 뒤흔드는 것은 왜 일까요?
그의 기개와 충절은 오늘도 내일도 고요히 흐르는 저 남강처럼
오랫동안 우리들의 마음속에 말없이 흐르겠지만,
붉은 꽃잎처럼 스러진 이후
논개는 우리들 가슴에서 '은유'가 되었고, '신화'가 되었지만
논개는 '천한' 기생이 아닌 양가집 출신으로
진주성 싸움에 목숨을 바친 최경회의 첩이었다가 지아비를 잃고는,
기생인 척 촉석루 의암에 나가 원수인 왜군을 끌어안고 몸을 던졌다는 속설은
몇 안 되는 기록으로 짜맞춘 추측이듯,
충분한 기록이 없으니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는 게 논개의 이야기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개의 죽음은 그에 대한 부족한 기록 탓에 무한한 상상력의 덧칠을 통해
최근 논개가 기생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부각되었고,
세상이 아무리 변하였기로서니
이것이 요즘에는 소설 등을 통해 일반화하는 분위기인것은
아릿다운 기생만으로는 꽃잎처럼 스러진 논개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성에 차지 않아서일까요.
이제 와서 사람들은 논개의 드라마틱함을 살리기 위해 '기생'을 왜 버리려 하는지.....
논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논개가 진주의 관기였다'고 적고 있고,
영조 16년(1742년) 건립된 논개 사당의 명칭도
의로운 기생을 모신 '의기사(義妓祠)'이고,
그 의기사 편액에 남긴 정약용이나 매천 황현 등 글에도 논개를 '기생'이라 칭하였듯이
기생이면 어떻고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고질적 병폐가
직업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다보니
요즘들어 사회 저명 인사들의 허위 학력 파문이 비일비재 일어나는것도
너무 높이 날려고 태양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드는 이카루스의 욕망과도 같은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 순간 밀려오는 씁쓸함을 뒤로 한 채
규방체험을 하기위에 촉석루를 나섰습니다.
* * * * * * * * * *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 #1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 #2
달력에 나오는 모델처럼 찍고 싶어여 ~~♪♬ #1
달력에 나오는 모델처럼 찍고 싶어여 ~~♪♬ #2
나 이뽀여? ^^*
秋男
秋女
어디 다녀 온다는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마라!!!
말하면 다치는 수가 있다!! @@@
@ 2007. 10. 09.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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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른 일행이 있어서 같이 못함이 아쉽네요...단체사진에 제 얼굴도 잠시 보이는군요 ㅋㅋㅋ 저도 지금 후기 쓰고 있답니다. 맛깔스런 글 잘 보고 갑니다 우드님. ^^
시상에... 왔다가 그냥 갑니까? 담에 오시면 폼만나는 육회비빔밥 말고 비빔밥 사드릴께요.
아름답고 보고자픈 얼굴들 입니다..
진주하면 촉석루와 논개 그리고 의암..... 그 논개 사당에 적혀 있다는 논개를 노래한 만해의 시 "천추에 죽어도 죽지 않는 논개여"...라는 싯귀가 생각납니다....의로운 여인....혼란기에 그것만이 여인네가 할수 있었던 최고의 길이었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네요.... 파아란 물빛과 파아란 하늘이 하나되는 가을날 좋은 나들이 셨군요......^^*
우드님, 소싸움 정말 볼만 했겠는데요?...그 놈들 참 ~~~진주 나들이 잘 보았습니다~~
모놀에서 애쓰시는 아름다운 필수멤버만 다아 모이셨내요.......진주 구경 참 잘보았습니다.....*^@^*
요즘 읽은 소설...김별아의 논개.....그곳에 가고싶다.....진주에....(한 번도 못 가 본곳) ....논개가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 안고 뛰어 내린 강....남강의 물빛도 보고싶다.....^*^ 님들은 어케 가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