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와 의를 통해 조상과 교감한 종가의 내력은 조상을 모시는 의식, 즉 제례로 완성된다. 단순한 서사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나를 찾아 가는 시간이 바로 조상을 모시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조상을 대하는 변함없는 정갈한 마음가짐에서 종가의 존재 이유는 빛을 낸다.
행랑채보다 높게 올라간 솟을대문과 멋들어진 처마의 단아한 곡선. 물론 아쟁과 피리가 연주되는 전통 혼례나 보기 드문 관례 의식이 이따금 벌어지기도 하지만, 종가宗家라는 낱말을 생각하면 그려지는 이미지는 늘 이처럼 늠름하면서도 단아하다. 유난히 예禮와 의義를 통해 과거와의 교류를 중시했던 우리의 시대적 정신은 그 숱한 제례들과 함께 종가에서 완결된다.
제례가 곧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라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종가에서 조상의 신주神主를 빼놓을 수 없다. 신주는 늘 후손들과 같은 공간에서 공존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종가는 인간을 으뜸으로 한다. 어쩌면 조상은 후손이 돌보지 않는 고대광실의 사당보다 자손과 함께 숨쉬는 초옥草屋을 더 정겨워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신주가 아파트에 있어도 낯설지 않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15대째 전해온 맑디맑은 문사의 숨결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동 강선마을의 한 아파트. 대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15대손인 이천용(67) 씨와 종부宗婦 서경옥(64) 씨가 살고 있는 어엿한 종가다.
겨울의 끝자락에 율곡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문뜩 눈부시도록 처연한 문사文士의 숨결이 느껴져 저절로 옷깃을 여몄다. 어쩌면, 이처럼 매화를 닮은 기상은 강물이 늘 바다를 향하듯, 선생의 드높은 자존을 꼭 빼닮았다. “율곡 선생 하면 강릉 오죽헌烏竹軒을 생각하지만 오죽헌은 율곡 선생의 생가生家이지 종가는 아닙니다.” 율곡 선생의 15대손인 이천용 씨는 기제사(忌祭祀, 매년 음력 1월 16일)에 참가하기 위해 찾은 손님들이 현관에 벗어놓은 수십 컬레의 구두를 정리하면서 흔히 일반인이 잘못 알고 있는 오류를 지적했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종부 서경옥 씨는 주방에서 제수 준비로 분주했다. 예정된 오후 7시가 되자 아파트 거실은 문중 인사와 유림 대표 60여 명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집사와 헌관들이 의관을 정제하자, 이윽고 제례가 시작되었다.
과일은 상 맨 앞자리에 놓였다. 제례는 분향(焚香, 제사나 예불에서 향을 피움)과 축문(祝文, 제사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 낭독, 재배(再拜, 두 번 절함), 헌례(獻禮, 제사 때 조상께 술잔을 올리는 일), 분축(焚祝, 제사 때 지방을 태우는 이식) 등의 순으로 기침조차 자제하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1시간여 동안 진행되었다.
불천위不遷位, 종가의 존재 이유 종가를 이해하려면 종가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 지방과 영호남 지방의 종가는 출생부터 사뭇 다르다. 기호 지방의 종가는 벼슬을 기반으로 한다. 조선시대로 들어와 초기에는 유림들이 토지를 세습받았으나, 임진왜란을 거쳐 중기로 들어서면서는 직전법을 거쳐 녹봉제가 정착되면서 관직을 얻어야만 나라에서 급료를 받았다.
그러나 영호남지방 유림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재산에 기초를 두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조선이 망하자 기호 지방 유림들은 벼슬이 끊어지면서 나라와 함께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지만, 영호남 지방 유림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다. 종가에서의 제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제례는 종가의 존재 이유기도 하다. 율곡 선생의 신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불천위不遷位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모시게 되어 있으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다. 불천위는 크게 나눠 나라가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유림의 공론으로 천거한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 문중의 뜻을 모아 정한 문중불천위門中不遷位 등으로 나눈다. 율곡 선생의 경우는 국불천위에 해당한다.
감실 안 신주와 컴퓨터, 종가의 자리 찾기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고 퇴직한 이천용 씨의 눈매에서는 온화한 미소가 잔잔하게 피어올랐다. 현관을 들어서자 왼쪽 벽에는 10만양병설을 주장한 내용과 함께 율곡 선생을 성균관 문묘에 배향할 수 있도록 명한 고종의 친필 교서가 걸려 있었다. 또 어른 키를 휠씬 넘는 제기장에는 잘 닦인 제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실 한쪽으로는 지난 2008년 거행된 7,000톤급 한국식 이지즈 군함에 붙여진 ‘율곡 이이함’ 취역식 사진이 이방인들을 맞고 있었다. 현관 오른쪽 방을 들어서면 故 이승만 박사가 친히 쓴 ‘홍파강당紅把講堂’이라는 휘호가 표구된 액자가 걸려 있었다. 홍파강당은 지금의 아파트로 옮겨 오기 전 서울 서대문에 위치했던 율곡 선생 종가의 명칭이다. 이 방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 씨의 위패를 모셨다.
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위패는 감빛이었다. 안채 동편 뒤에 사당이 있는 전통 한옥에 맞춰 그에 해당되는 방향에 위치한 오른쪽 방에 신주를 모셨다고 한다. 신주를 모시는 감실은 벽에 붙여두었다. 감실 둘레는 짧은 휘장으로 드리웠다. 감실 맞은편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클릭 한 번으로 지구 맞은편까지 동시에 연결되는 첨단과 누대에 걸친 전통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평소에는 문을 닫아둔다. 율곡 선생은 선생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시 석담에 정착했고, 수백 년 동안 후손들이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북한이 사유재산을 한창 몰수하던 1947년 14대 종손 이재능(1979년 작고) 씨가 율곡의 신주와 교지를 품에 안고 월남했다. 이후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 사당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친척의 사기 행각으로 법정 싸움까지 가는 끝에 홍파동 집이 헐렸다. 강북구 미아동과 구로구 개봉동을 거쳐 지금의 일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올해로 벌써 20여 년째다.
단정한 종부의 기품과 이 땅의 어머니들 율곡 선생 15대손 종부 서경옥 씨는 종가로 시집오기 전 평범한 집안의 규수였다. 남편 이천용 씨는 “명문가 자손이라고 과시하는 듯 보일까 봐 결혼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서씨는 불천지위不遷位를 비롯해 한 해 10여 차례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예전 같으면 봉제사와 함께 제수를 장만할 재산도 상속받았겠지만,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밥은 굶어도 조상 제사는 지내고 있다. 대유학자의 집안이니 제수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서씨는 “할아버지가 저술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제의초祭儀抄 기록대로 제사를 행하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례상을 각각 차린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고기를 그다지 드시지 않았던 분이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손이 많이 가는 전과 가짓수가 많은 떡과 같은 제수품이 많지 않아 제사 모시는 일이 결코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숭늉 대신 차를 올리고 있습니다.” 서 씨는 율곡 선생의 준엄한 가르침을 마음에 아로새기며 아침을 맞이 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매사에 차분하고 단정한 그녀의 몸가짐에서 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기품이 느껴졌다. 숱한 성현을 길러낸 자랑스러운 이 땅의 어머니들의 역사도 그렇게 연연히 400여 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첫댓글지난달 경기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경기 문화나루' 측이 원고 청탁을 의뢰해 고양시 일산석 주엽동에 위치한 율곡 이이선생의 15대손인 이천용 선생 댁을 취재했습니다. 물론 저는 크리스찬이어서 제사를 예배로 대신하지만, 조선의 대유학자 율곡 선생의 15대손인 이천용 선생은 아주 검소하게 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보지 않고, '나와의 만남'으로 보고 계시더라구요. 그날 취재해 '경기 문화나루'에 게재된 글을 올렸습니다. 걍 짬이 나시면 부담 없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동네서 아주 지근 거리에 있네요. 세태가 바뀌어 주거 공간이 대부분 아파트다 보니 이제는 가의 모습도 바뀌어 가는군요. 우리 집안도 중 모임이 있어 시제 등 큰 모임을 같이 모여 하는데 우리 다음 세대는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좋은 전통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몰라 걱정입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인데 말이지요.
훈장님 말씀처럼, 우리 것은 좋은데,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참, 취재하면서 훈장님 생각이 났습니다. 훈장님 댁(화정지구?)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 같다는... 기독교에서 제사도 우상숭배로 보는 경향이 있기 하지만, 전 조상들과의 만남이나 나와의 만남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훈장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댓글 지난달 경기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경기 문화나루' 측이 원고 청탁을 의뢰해 고양시 일산석 주엽동에 위치한 율곡 이이선생의 15대손인 이천용 선생 댁을 취재했습니다.
물론 저는 크리스찬이어서 제사를 예배로 대신하지만, 조선의 대유학자 율곡 선생의 15대손인 이천용 선생은 아주 검소하게 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보지 않고, '나와의 만남'으로 보고 계시더라구요.
그날 취재해 '경기 문화나루'에 게재된 글을 올렸습니다.
걍 짬이 나시면 부담 없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의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께서도 제사에 임하시는 모습이 아주 각별하셨지요.
이산 가족이시기도 한 아버지께선 제사때면 많은 감회에 젖으시곤 하셨습니다.
한복 입으시고 제사 모시든 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율곡 선생의 종가를 찾아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이산가족분들의 제사가 애틋합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기독교로 개종하시어 예배로만 지내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 정신이야말로 애틋하지 않을까요?
아침햇살님, 멀리 타국에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준엄한 율곡선생
가를 찾아서
글 앞에서 좀 우스개 입바른 소리 같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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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서씨어르신은 15대손이 명문가 자손이라고 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니...1년에 제사를 10여차례 지낸다는 말씀도 안하셨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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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손
하지만 허향님 말씀대로 처음엔 어땠나 모르겠지만 한복 갖춰입고 음식 정갈하게 내 모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기품있는 신사임당 모습 맞습니다
네, 저도 그런 인상을 받았답니다.
역시 宗婦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바이올렛님도 따분할 수도 있는 기사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 꾸벅^^
우리 동네서 아주 지근 거리에 있네요. 세태가 바뀌어 주거 공간이 대부분 아파트다 보니 이제는
가의 모습도 바뀌어 가는군요. 우리 집안도 
중 모임이 있어 시제 등 큰 모임을 같이 모여 하는데 우리 다음 세대는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좋은 전통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몰라 걱정입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인데 말이지요.
훈장님 말씀처럼, 우리 것은 좋은데,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참, 취재하면서 훈장님 생각이 났습니다. 훈장님 댁(화정지구?)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 같다는...
기독교에서 제사도 우상숭배로 보는 경향이 있기 하지만, 전 조상들과의 만남이나 나와의 만남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훈장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허향님 덕분에 종가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부의 노릇이란 참 어려운 일일텐데 아마도 종가의 종부는 타고 난 사람이어야 할 거 같습니다.
제수를 장만하시는 모습에서 단정하고 고아한 종부의 기품이 느껴집니다.
들꽃님!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자내셨죠?
들꽃님의 말씀처럼, 한국에서 종부의 의미는 남다르지요.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 가운데, 종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정하고 반듯하고 단아한...
들꽃님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