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리 전투
전쟁의 분수령
강원도 깊은 산골의 현리라는 곳에서 1951년 5월 벌어진 전투는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分水嶺) 그 자체였다. 물의 흐름이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이라는 의미다. 이를 테면,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벌인 전쟁의 흐름이 이 현리 전투라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방향을 튼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전쟁에 은밀하게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1~3차 공세를 벌이면서 전선을 평양~원산 이북으로부터 전쟁 발발 전의 대치 접점이었던 38선 이남까지 밀고 내려오는 데 성공했으나 4차 공세에 접어들면서 무겁고 강한 미군의 힘에 부딪힌다. 조금씩 균열을 보이던 중공군의 공세는 5차 공세 2단계에 접어들면서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중공군의 최고 지도부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시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현리 전투가 벌어진 1951년 5월 말일 것이다.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한반도의 싸움에 뛰어들어 사실 상 모든 전투를 이끌고 있던 중공군으로서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현리 전투는 흔히 대한민국 군대가 6.25전쟁 중에 맞이한 최악의 참패로 말해진다. 그 점은 사실이다. 3년 여 동안 벌어진 그 전쟁에서 한국 군대가 벌였던 현리 전투는 매우 기록적인 패배에 해당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공격 선두에 나섰던 중공군 1개 중대 병력에 의해 후방의 유일한 퇴로였던 오마치 고개를 빼앗긴 뒤 9사단과 3사단 등 한국군 3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싸움에서 무너진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역시 최악의 패장(敗將)으로 거론하는 사람도 많다. 군단 책임자로서 유재흥 장군이 져야 할 몫의 책임은 아주 무겁고 크다.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미군과의 소통이 부족해 작전상의 엄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그은 작전구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유일한 퇴로를 미 10군단에게 내줬고, 미 10군단은 알몬드 군단장의 허술한 판단에 따라 그곳을 빈 채로 그냥 두고 말았다. 이 점을 따지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
그러나 전사 기록을 보면 유재흥 군단장은 이 고개의 중요성 때문에 당시 상황을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에게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고 한다. 군단 차원에서 옆에 함께 늘어선 미군과의 소통과 협력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유재흥 장군의 실책은 크지만, 그를 보완해주지 못한 육군본부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3사단과 9사단의 사단장 또한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에서 비켜갈 수 없다.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그대로 싸움 없이 물러서는 군대는 있을 수 없다. 현리의 지형은 앞서 소개한대로 사주방어(四周防禦) 진지를 만들어 적과 싸울 경우 미군의 유력한 공중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모양새였다.
전쟁의 분수령
강원도 깊은 산골의 현리라는 곳에서 1951년 5월 벌어진 전투는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分水嶺) 그 자체였다. 물의 흐름이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이라는 의미다. 이를 테면,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벌인 전쟁의 흐름이 이 현리 전투라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방향을 튼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전쟁에 은밀하게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1~3차 공세를 벌이면서 전선을 평양~원산 이북으로부터 전쟁 발발 전의 대치 접점이었던 38선 이남까지 밀고 내려오는 데 성공했으나 4차 공세에 접어들면서 무겁고 강한 미군의 힘에 부딪힌다. 조금씩 균열을 보이던 중공군의 공세는 5차 공세 2단계에 접어들면서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중공군의 최고 지도부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시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현리 전투가 벌어진 1951년 5월 말일 것이다.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한반도의 싸움에 뛰어들어 사실 상 모든 전투를 이끌고 있던 중공군으로서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현리 전투는 흔히 대한민국 군대가 6.25전쟁 중에 맞이한 최악의 참패로 말해진다. 그 점은 사실이다. 3년 여 동안 벌어진 그 전쟁에서 한국 군대가 벌였던 현리 전투는 매우 기록적인 패배에 해당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공격 선두에 나섰던 중공군 1개 중대 병력에 의해 후방의 유일한 퇴로였던 오마치 고개를 빼앗긴 뒤 9사단과 3사단 등 한국군 3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싸움에서 무너진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역시 최악의 패장(敗將)으로 거론하는 사람도 많다. 군단 책임자로서 유재흥 장군이 져야 할 몫의 책임은 아주 무겁고 크다.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미군과의 소통이 부족해 작전상의 엄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그은 작전구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유일한 퇴로를 미 10군단에게 내줬고, 미 10군단은 알몬드 군단장의 허술한 판단에 따라 그곳을 빈 채로 그냥 두고 말았다. 이 점을 따지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
그러나 전사 기록을 보면 유재흥 군단장은 이 고개의 중요성 때문에 당시 상황을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에게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고 한다. 군단 차원에서 옆에 함께 늘어선 미군과의 소통과 협력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유재흥 장군의 실책은 크지만, 그를 보완해주지 못한 육군본부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3사단과 9사단의 사단장 또한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에서 비켜갈 수 없다.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그대로 싸움 없이 물러서는 군대는 있을 수 없다. 현리의 지형은 앞서 소개한대로 사주방어(四周防禦) 진지를 만들어 적과 싸울 경우 미군의 유력한 공중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모양새였다.
- 중공군은 초반의 맹렬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보급이 바닥나면서 아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지역 철로에 미 공군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이 터지는 모습이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따라서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무작정 뿔뿔이 흩어져 물러날 게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각오만이라도 있었다면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미군의 강력한 공중보급을 바탕으로 오마치를 점령한 중공군을 후방에서 압박하며 전방에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한 채 중공군의 공세에 허무하게 물러서 부대전체를 급기야 거대한 혼란의 상태인 분산(分散)으로 몰고 가 참패를 맞았던 두 사단장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나타난 기록적인 참패가 바로 현리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당시 전선에 섰던 한국군의 수준이 반영된 결과였다. 건국과 함께 겨우 제대로 무장하기 시작한 한국군으로서는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화력과 장비 또한 보잘 것이 없었다. 아울러 부대 전체를 끈끈하게 묶는 조직력도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한국군의 약점을 전선에 마주섰던 중공군은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한국군을 골라 공격을 펼쳤다.<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