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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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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종교의 입교
한편 대종교의 신앙은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삼법수행(三法修行)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인간은 나면서 조화주로부터 성품[性]· 목숨[命]· 정기[精]의 3진(三眞:3가지 착함)을 받았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마음[心]· 김[氣]· 몸[身]의 3망(三忘:3가지 탈)이 뿌리박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욕심이 생기고 병이 나고 착함을 버리고 죄를 짓는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3진과 3망 사이에는 감(感)· 식(息)· 촉(觸)의 3념(三念)이 생겨 생사고락이 뒤섞인다. 그러므로 지감(止感)하고 조식(調息)하며 금촉(禁觸)하여 수행한다면 3망을 돌이켜 3진을 회복함으로써 다시 사람의 본바탕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종교의 논리는 삼이일(三而一) 즉, '하나'의 원리이다.
'하나'의 사상은 모든 것을 포괄· 협동하고 조화시켜서 본래의 뿌리인 하나로 일치·통일시키는 원리이기 때문에 본래 상반되는 존재는 없고 서로 모여 공존할 수가 있다. 이 원리야말로 상쟁과 상극의 역사를 통일지향하여 화합과 상생(相生)할 수 있는 이화세계의 역사를 이룬다.
대종교의 경전은 초인간의 계시(啓示)인 계시경전과 인간의 작품인 도통(道統)경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 속하는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대종교의 창립과 중광을 이룬 경전으로서 대종교의 기본 경전이다. 이는 366자의 한자로 씌어져 있으며, 천훈(天訓)· 신훈(神訓)· 천궁훈(天宮訓)· 세계훈(世界訓)· 진리훈(眞理訓)의 5훈(五訓) 이외에 서문, 5훈에 대한 찬문(贊文), 삼일신고 독법(讀法), 삼일신고, 봉장기(封藏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5훈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서문은 발해의 대야발(大野渤)이 발해 태조 고왕(高王)의 명을 받아 지었으며, 찬문은 고왕이 친히 지어 불렀다고 한다.
〈삼일신고〉이외에 계시경전으로 〈천부경 (天符經:81한자)이 있다. 이는 1916년 계연수(桂延壽)를 위해 태백산 석벽에 계시된 경전으로 윤세복에 의해〈종문지남(倧問指南)〉에 수록되었다. 한편 도통경전으로는 나철이 성통공완(性通功完)한 뒤 계기를 받고 지은 신리대전(神理大典)과 김교헌이 단군사적과 고유신교의 자취를 내외 문헌에서 뽑아 대종교의 역사를 밝힌〈신단실기 神檀實記〉가 있으며 서일이 성통공완한 뒤 계시를 받고 지은〈회삼경(會三經)>, 윤세복이 대종교의 수행방법을 적은 <삼법회통(三法會通) 등이 있다.
여기서 필지가 본 원고를 쓰면서 수집한 자료 가운데 밀양시 상동면 평능에 살고 있는 안병순(安秉珣)씨 댁에서 부친인 안광진(安光鎭)선생이 사용하시던 신단실기(神壇實記) 1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신단실기는 1910년대 당시 김교헌 대종사가 짓고 대종교단에서 편찬(新文館 발행)하여 경전과 교재로 사용하던 것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의 주인 이였던 안광진 선생은 밀양시 초동면 금포리에서 태어나 상동면으로 이주해 오신분인데 생전에 간도지역을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시던 분으로 알려져 있고 사학자인 정인보(鄭寅普)선생과도 교류가 밀접했다고 한다.
안광진 선생이 단애 윤세복 선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은 감이 있어서 선생의 독립운동경력을 밝혀내는 일이 필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인 것 같다.또한 금번 발견된 자료 <신단실기>는 복사하여 밀양신문 독자들과의 공유도 가능하겠다.
대종교의 전통적 의식은 중국〈한서· 당서〉등의 〈동이전 東夷傳〉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10월 제천대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종교에서는 이러한 제천행사를 선의식(禪儀式)이라 하여 행한다. 선의식은 4대 경절아침 6시에 단군 성상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에서 드리는 것인데, 절차는 홀기(笏記)에 따른다. 이러한 선의식이 진행되는 4대 경절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음력 3월 15일을 단군 건국기념일로 삼아 기념해왔다.
이후 1949년부터 양력 10월 3일로 변경한 개천절과 하느님이 교화와 치화(治化)를 마치고 하늘로 오른 음력 3월 15일인 어천절(御天節),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重光:대종교를 처음 시작한 일)한 날을 중광절, 추석, 고유명절인 가경절(嘉慶節)을 기념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종교의식은 경배식인데, 일요일 낮에 전체 교도가 모여 행하는 경배식으로 조배식(早拜式)과 야경식(夜敬式)이 있고, 이외에 봉교식(奉敎式)· 승임식(陞任式)· 상호식(上號式)· 결혼식 등등 여러 의식이 있다.
2.서간도 환인(桓仁)에서의 활동
(1)서간도 환인(桓仁)에 정착
윤세복은 1910년 12월 말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다음해 정월 29일에 바로 참교(參敎)가 되고 또 시교사(施敎師)로 임명되었으며 교주 나철로부터 만주에 대한 포교의뢰를 받고서 음력 2월에 서간도로 나아가 환인(桓仁)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입교한지 불과 1-2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망명이 이루어지고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 것을 보면 교단내의 문제나 윤세복 한 개인의 종교적 결단이라기보다는 대동청년당 일부가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고 동반 망명계획을 실천한 것이 아닌가 짐작이 된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후에 안희제를 위시하여 신채호, 신성모, 이극로, 안호상, 서상일, 이영범, 이원식, 차병철, 윤병호, 김사용 등등의 대동청년단원 출신들이 대종교에 입교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할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윤세복의 14년 연상인 친형 윤세용(尹世茸)도 밀양 부북들에 소유하고 있던 많은 전답을 전부 처분하여 윤세복과 함께 환인으로 이주 하였는데, 이들 형제들은 윤세복의 친구 백농(白農) 이원식(李元植:일명,李東厦) 등과 함께 환인현 서문안 도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정양가도(正陽街道: 지금의 백화점 자리)에서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펼치면서 대종교 환인시교당도 문을 열어 간도로 이주해온 한인 동포들의 자제 교육과 포교활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윤세복이 서간도 환인에 거점을 정한 것은 종교운동과 교육운동을 펼치기에 알맞았고 경상도지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이주민이 집중적으로 집결된 까닭도 있었다. 동창학교는 입학금이나 월사금을 받지 않고 누구든지 배울 뜻이 있으면 책과 학용품 일체를 제공해 주었으며, 기숙사가 있어서 침식도 모두 해결해 주었는데, 그 경제적인 뒷받침은 밀양에서 만석꾼 이였던 형 세용과 자신의 재력으로 충당하였다. 여기서 윤세복의 독립운동은 사상적으로는 대종교의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인맥으로는 친형과 안희제, 이원식, 이시열, 이극로 등 대동청년당의 구성 요원이 핵심 이였다.
(2)동창학교(東昌學校) 설립
또한 동창학교는 민족교육과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윤세복은 대종교의 포교도 그 목적에 포함시켰다. 윤세복 자신은 대종교의 포교를 책임지고, 학교는 함께 망명한 예안 출신의 이원식(李元植)이 담당했다. 동창학교는 환인 주변의 이주 한인들에게도 단군사상을 교육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으로 박은식, 신채호와 같은 당대 제일의 뛰어난 역사가들을 초청하여 단군에 뿌리를 둔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집필토록 하였다.
1911년 5월에 서간도로 망명해온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윤세복의 집에서 기거 하면서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와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대동고대사론> 등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특히 <몽배금태조>는 대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집필된 책으로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정신적인 투쟁사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박은식은 신교(神敎)의 원류가 단군의 신교 즉 대종교에 있음을 고증하였고 그가 민족사학적 국사관을 수립하고 국혼(國魂)으로서의 국사개념을 수립한 것은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가 국교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된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대종교적인 민족사학은 만주의 무장독립군들에게 있어서는 이념(理念), 바로 그것 이였다.
또한 1914년도에는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를 윤세복이 초청했다. 신채호는 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백두산을 답사하고 광개토대왕비를 찾았으며 <조선사>도 저술하였다. 대종교의 영향으로 민족의 역사신앙을 정립하게 된 단재는 대종교의 <단기고사>를 중시하였고 고대사 연구에도 집중하였다.
신채호의 낭가사상(娘家思想)은 국수사상(國粹思想)으로 신라의 국선(國仙)이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통한다고 생각하고 신라의 화랑은 본래 상고시대 소도재단(蘇塗祭壇)의 무사로서 당시로서는 “선비”로 일컬어지던 자 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사상이 선교와 대종교에 기틀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신채호가 주장한 혈전주의(血戰主義)의 방략은 대종교의 무장독립운동방략, 육탄혈전에 의한 독립전쟁론과 일치한다.
윤세복은 백암과 단재로 하여금 대종교를 바탕으로 한 민족정신의 역사관을 수립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실천적 이념을 제공할 수 있게 하였다. 단재와 백암의 사학은 국조인 단군을 중심체로 한 민족종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역사관이야말로 지속적인 대일투쟁에 제일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또한 동창학교의 김진 선생은 국어 교사로서 주시경의 제자였는데, 이극로는 동창학교에서 김진을 만나므로서 한글연구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동창학교는 검은색 교복에 교모를 썼다. 검은색은 대종교에서 가장 상서로운 색깔로서 혼례식 예복에도 검은색 옷을 입었다. 이러한 것은 모든 한민족의 전통문화에 그 기원을 두는 것이다. 동창학교는 독립운동을 위한 국사교육, 국어교육, 군대식체조와 같은 체육교육 등에 힘썼고 무엇보다도 대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와 앙양에 최선을 다하였다.
서북간도의 한인사회는 1860년대 이래로 평안도와 함경도출신 농민들이 이주하여 개척하게 되었는데, 1910년 전후에는 북간도지역은 전체 인구 중 80%가 이주한인들이었고, 서간도지역에도 약18만명 정도의 이주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2년 일제가 작성한 <압록강 대안 거주 선인들의 정황(鴨綠江 對岸 居住 鮮人の 情況)>이란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이주자를 집계하고 있다.
「집안현지방 약5만인, 임강현지방 약3만인, 환인현지방 약2만 5천인, 안동현지방 약2만인, 통화현지방 약2만인, 장백현지방 약1만 2천 7백인, 유하현지방 약8천인, 관전현지방 약5천인, 무송현지방 약3천 6백인, 안도현지방 약2천9백인, 홍경현지방 약2천 5백인, 해룡현지방 약1천인으로 대략적으로 18만 7백인이나 되었다」
서간도의 환인지역은 1910년대에 경작 가능한 황무지의 16%밖에 개간되지 않아서, 아직도 84% 정도의 경작이 가능한 황무지가 남아있었다. 서북간도 지방을 한민족의 항일 부흥기지로 건설해야 한다는 최초의 주장을 편 사람은 의병장이였던 유인석 선생인데, 선생은 “서간도는 토지가 비옥하여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을 농사하면 3.4년을 버틸 수 있다”고하여, 1896년에 통화(通化)의 오도구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인의지사(仁義之士)가 있으므로 가히 나라의 부흥지계(復興之計)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3)독립운동기지의 건설
장백, 환인, 무송지역으로 많은 의병부대가 건너갔고, 그들은 그곳에서 <농무계>와 <향약사>란 단체를 만들어 군사훈련도 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신민회(新民會)>가 서북간도와 남북만주에 한국독립운동 국외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즈음,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신민회의 이러한 계획과 함께 이상설, 안창호, 이시영, 박은식, 신채호, 이동녕, 박용만, 이갑, 이상룡, 정순만, 신규식, 여준 등 민족운동가들 역시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속속 망명해 오기 시작하였다.
서간도로 집단 이주계획을 세웠던 이들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그곳에 설정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고 이들은 먼저 그곳에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민족역량을 향상시킨 후 시기를 기다려 독립전쟁을 도모한다는 생각이였다.
그러므로 윤세복이 건너간 서간도는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였던 민족운동가들과 국내에서 의병항전을 벌리다 압록강을 건너간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던 곳으로 서북간도에다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노력은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에 의해서 꾸준히 실천되고 있었다.
당시 서간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거점은 <경학사(經學社)>가 위치한 유하현 삼원보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부민단 본부가 있는 통화현 합리하였는데, 유하와 통하는 환인 보다는 한인 거주 숫자가 적은 산골로서 이주 한인사회는 천가(千家), 백가(百家), 십가(十家)로 구분하여 자치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환인현은 친일파의 민회(民會)와 대종교의 민족운동 세력이 서로 맞서 있던 곳인데,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4년 들어 일본이 중국측에 대하여 강압적으로 21개조의 요구안을 제기하여 중국이 이를 수락하므로써 중국이 일본측에 복종하게 되었고 일본인의 협박에 못이긴 중국관헌들이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를 폐교시켜 버렸다. 단순히 동창학교의 폐쇄로만 끝난 것이 아니고, 일본의 주구인 민회측과 중국 관헌들은 윤세복에게 환인을 떠나도록 온갖 악랄한 방법들을 다 동원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단애의 형 윤세용이 환인에 남아서 친일단체 민회에 대항하는 <한교공회(韓僑公會)>라는 외곽조직을 만들어 대종교를 감싸는 사회결사에 매진한 것과 환인 외곽지대인 상루하 이도양차(二道陽?)에 환동학교(桓東學校)가 끝까지 남아서 이주 한인들에 대한 교육활동을 계속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들은 나중에 서간도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날 때 그 진원지가 되었다.
3.백두산아래 무송으로의 이동
(1)무송(撫松)으로의 이동
윤세복이 환인에서 축출되자 환인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산간오지로 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윤세복 자신은 백두산하 산림지대인 무송(撫松)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무송은 해발700m의 고지대로 서쪽에는 장백산맥줄기가 펼쳐져 있고, 동쪽은 송화강이 굽이치는 지형이며 전체적으로 장백산맥의 원시림 지대요 인적미답의 대수림 지대로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고원지대였다.
무송은 일제 영사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곳이고 자신과 안희제 등이 설립하여 전성규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백산학교(白山學校)가 있었으므로 윤세복은 이곳에서 동지 이극로, 아들 윤필한, 교사 전성규, 이순필, 신성모 등과 함께 민족교육에도 힘쓰며 새로운 독립군 양성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주구들은 윤세복이 무송으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적으로 그를 감시하며 윤세복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본측에 보고하여 독립운동은 물론이려니와 정상적인 표교활동도 제약을 받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애에게 1915년 봄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관헌들의 모함으로 일본인 살인 혐의로 아들 윤필한을 비롯하여 전성규와 성호 등 3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윤세복이 중국감옥에 있을 동안에도 대종교의 포교와 교육활동은 활기있게 전개되어 무송, 안도, 몽강 지역에 20여개 교육기관을 설치하였고 특히 이곳의 본토 한족(漢族)들과 연합하는 한중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중국관헌들이나 중국인 토호, 일반농민에 이르기까지 대종교도들과 쉽게 교류하였고, 대종교는 종교적 성격보다 이주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사회운동단체와 같아서 다른 종교인들과도 쉽게 교류하게 되었다. 천도교도나 기독교인이라 하여도 대종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백두산 아래에 모인 같은 배달민족일 뿐이였다.
서간도 지역의 대종교운동을 이끌던 단애의 세력이 감옥에 가자 그들의 구명운동이 북경, 남경, 상해, 길림 등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조성환, 신규식, 박찬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이 총동원되었고 결국 단애는 1916년 가을에 석방된다.
윤세복의 출옥으로 무송을 중심으로 장백, 안도, 화전, 반석은 물론 멀리 길림지방에서 할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이나 민족교육 세력들이 대종교 울타리 안으로 묶어지게 되었다. 윤세복은 환인, 통화, 유하, 관전, 집안 뿐 만아니라 서간도 북부지역까지 대종교의 민족신앙을 전파함으로써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서북간도 만주지역에 산재해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길림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2)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발표
1918년 음력 11월에 대종교 제2대 교주 무원 김교헌(金敎獻) 대종사가 기초하여(일설에는 조소앙이 기초하였다고 하기도 함) 만주·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대종교총본사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언한 글 즉「대한독립선언서(일명,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는데, 이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子孫 黎民)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虐壓]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固有權]이요, 백만방리의 고산려수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共有産]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구아(歐亞)에 뛰어난[拔粹]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韓一部의 權]이라도 이민족[異族]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韓一尺의 土]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韓一個의 民]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韓)이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武孼]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可掩]치 못할 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能容]지 못할지라.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嗜戰]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反天逆人] 보호 합병을 강제[逞]하고, 그들이 맹세를 어기는[?盟] 패습(悖習)은 영토니 문호니 기회니 구실을 거짓 삼다가 필경 몰의비법(沒義非法)한 밀관협약(密款脅約)을 강제로 맺고[勒結],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교육을 제한하여 과학의 유통을 막았고[防閼],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軍警)의 무단과 이민이 암계(暗計)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식[滅韓殖日]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소극(積極消極)으로 우리의 한(韓)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인가.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穢德]을 꺼리시어[厭] 우리에게 좋은 기회[時機]를 주실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順天應人]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宣布懲辨],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蠻權]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 를 억압하고 핍박(抑迫)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沮障]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小懲大戒]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각기 원상(原狀)을 회복함은 아시아의 바램[幸]인 동시에 너희도 바램이러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全部禍根] 너희에게 있으니, 복구자신(復舊自新)의 이익을 반복하여 알아듣게 타이를 것[反復曉諭]이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었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白日이 當空]하여, 공의(公義)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실로 광겁(曠劫)의 액(厄)을 일세(一洗)코자 하는 천의(天意)의 실현함이요, 약국잔족(弱國殘族)을 구제[濟]하는 대지의 복음이라.
장[大]하도다 시대[時]의 정의[義]여. 이때를 만난 우리는 함께 나아가[共進] 무도한 강권속박(强權束縛)을 해탈하고 광명한 평화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높이 날리며 인심을 순응시키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써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건설을 협찬하는 소이로서 우리 여기 2천만 대중의 충성[赤衷]을 대표하여 ,감히 황황일신(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고[昭告] 세계 만방에 고하오니[誕誥],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향응[天人合應]하는 순수한 동기로 민족자보(民族自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결코 목전의 이해[眼前利害]에 우연한 충동이 아니며, 은혜와 원한(恩怨)에 관한 감정으로 비문명한 보복수단에 자족한 바가 아니라, 실로 항구일관(恒久一貫)한 국민의 지성이 격발하여 저 이민족으로 하여금[彼異類] 깨닫고 새롭게 함[感悟自新]이며, 우리의 결실은 야비한 정궤(政軌)를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라.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齊],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죽음[一死]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傾家復國]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라고 하여 민주공화제와 독립전쟁론을 지지하였다. 이 독립선언서의 특징으로는 도쿄유학생들의 발표한「2.8독립선언서」나 「3.1독립선언서」보다 먼저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며, 선언서의 서명자 대부분이 당시 해외로 나와서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저명한 국가적 지도자 거의가 망라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의 명단을 살펴보면 본 선언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는 대종교 제2대 교주 무원 김교헌(金敎獻)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위시해서 부통령 이시영, 도산 안창호, 김규식, 김동삼, 윤동주의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백야 김좌진,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이동녕, 이동휘, 신규식(신정), 김학만, 여 준, 유동열, 이 광, 이대위,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종탁, 이 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찬익, 안정근(안중근 의사의 동생), 임 방, 조용은, 조 욱, 정재관, 최병학, 한 흥, 허 혁 등과 함께 밀양출신 인사로 손일민, 황상규와 함께 윤세복도 당연히 서간도 지역을 대표한 지도자로 서명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3월 13일에는 환인, 연길, 용정을 비롯해서 서북간도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민족운동 세력들은 윤세복을 밀고하여 환인에서 축출시킨 친일세력인 조선인 민회지부장 친일파 공청송(公靑松)과 서기 이승갑(李承甲)을 제일 먼저 응징하였고,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9인중 대부분은 중국 땅이지만 망명정부라도 만들기 위해서 속속 상해(上海)로 떠나고, 무송에 남아있던 윤세복은 대종교 교주 김교헌이 포진하고 있는 안도현 16통구 덕수동을 방문하였다. 대종교는 그동안에 이룩한 종교를 통한 사회결사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교주 김교헌이 머물던 안도현에서는 3월 27일 대종교가 주동하여 각 현·성에 거주하는 이주한인 40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 축하연을 거행했다.
(3)흥업단(興業團) 조직
안도(安圖)는 대종교의 지원으로 활동중이던 의병장 홍범도(洪範圖)부대가 활동한 곳이며, 서북간도와 국내, 백두산을 연결시켜주는 지리적 거점이었다. 이곳에서의 만세운동은 평화적 시위가 아니였다. 서북간도에서는 곧바로 무장시위에 들어갔으며 이를 뒷받침할 인적, 물적 지원이 요청되었다. 1919년 7월이 되자 윤세복은 김혁(金赫), 김호(金虎) 등 대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서간도지역에서 무장투쟁에 들어가는 독립운동세력들을 지원하기 위해 무송에서 독립운동단체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했다.
흥업단은 <부민단>, <한족회> 등과 같은 이주 한인사회의 결사체였다. 이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적 독립을 위한 산업진흥이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았고 흥업단은 오로지 항일무장투쟁을 뒷밭침하기 위해서 이주 한인들을 단결시키고 결속케하는데 우선적으로 전념하였다. <대한독립단>도 무송에서 남만주 제1사단을 조직하여 화개산(花開山)에는 사단 본부가 있었고, 남쪽 만강촌(漫江村)은 이주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무송은 토비나 마적의 습격이 끊이지 않아서 모든 이주 한인들은 집집마다 소총으로 무장을 하였기 때문에 안도, 무송, 장백지역에서의 무장부대 출현은 다른 지역 보다는 더 용이했다고 할 수 있다. 흥업단은 제일 먼저 중국관헌들과 중국인들에게 한중연합으로 일제에 항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평소에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흥업단은 무장독립전쟁에 가장 필요한 군사훈련을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4)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창립
1919년 9월에는 항일투쟁을 위해 교통계승(敎統繼承)을 사양한 대종교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이 왕청현에다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소학교· 야학· 강습소 등을 세워 교포들의 교육에 힘쓰면서, 애국청년을 중심으로 무장부대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세웠는데, 이 북로군정서의 전신도 서일이 1910년도에 간도로 망명해온 한말 의병들을 규합하여 독립정신을 심어주던 <중광단(重光團)>이었다.
중광단은 다시 1911년도에 역시 왕청현에서 서일과 대종교도인 채오, 계화, 양현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과 무관학교출신의 유능한 군사간부를 규합해서 정의단(正義團)이란 단체로 발전시키고, 단장에 서일이 선임되어 만주동북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지만, 이 단체도 무기가 없어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청년지사들에게 정신교육과 계몽사업에만 치중하였다.
이 때 충남 홍성 출신으로 노백린(盧伯麟)· 신현대 (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한 김좌진(金佐鎭)이 정의단에 입단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칭하였으며, 군정부를 다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였다. 북로군정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므로서 명실공히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총재에는 많은 동지들의 압도적인 추대로 백포 서일이 총재로 취임하여 대종교 정신에 입각하여 지휘하였고, 총사령관에는 백야 김좌진이 맡아서 나중에 독립운동사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청산리 독립전쟁의 빛나는 승리를 일구어냈다. 참모장에는 이장녕, 연성대장에 이범석 등이 임명되었고, 밀양출신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가 재무총책을 맡았다.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는 흥업단에 군정서 요원들을 파견하였고, 흥업단에서도 북로군정서에 단원을 참가 시켜 협력체계를 구체화 하였다. 흥업단은 독립전쟁이 원활히 수행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단체였으므로 무장은 경호대 수준에 머물렀으나 군사훈련은 군정서에 위탁해서 모두 받도록 했다. 윤세복은 김혁과 함께 흥업단을 이끌었고 실제 활동시에는 이원일, 오제동, 이현익 등 대종교의 중견 간부들이 참여했는데, 대종교를 중심으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 圖)의 의병부대가 하나로 연합을 이루웠다.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합법적으로 중국에 진출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대한독립군이 “봉오동전투”를 치르고 9월 20일경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도착했고, 안무의 “국민회의군”도 9월말 이도구에 도착하여 일본군을 무찌를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인 10월 중순경,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화룡현 삼도구 방면에 도착하였다.
(5)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의 발발(勃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항일독립전쟁중 최고의 무장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주역이 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가 벌어지게 되었다. 청산리전투의 시발은 철저히 준비되고 계획된 전투라기보다는 일본의 소위 무장대 소탕작전과 그로 인한 한인 무장부대들 간에 서로 이동 과정에서 우연찮게 벌어진 전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이도구, 삼도구 일대에서 전개된 10여 차례의 전투를 망라하여 지칭하는데 잘 알려진 전투로는 “백운평전투”, “완록구전투”,
“어랑촌전투” 등이 있고, 특히 어랑촌전투가 그 중에서 가장 큰 전투였다. 여기서 한가지, 1920년대 '청산리'는 일개 동네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고 현재 중국에 존재하는 '청산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당시 '청산리'는 녹수평으로부터 노령에 이르는 굉장히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청산리라는 한 개의 '동네'가 아니라 청산리라는 한 개의 '지역'이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산리전투가 원래부터 계획된 전투는 아니라고 했는데. 화룡현으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들은 10월 19일 회의를 열고 일본군과의 싸움을 일단 피하고 독립군의 조직과 무장을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 그런데 9월 25일 소위 일본군 토벌대가 이미 청산리 지역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북로군정서의 김좌진부대와 가장 먼저 조우를 하므로서 전투가 시작된 것인데, 그 첫 전투가 “백운평 전투”로, 여기서 독립군이 크게 승리했다. 북로군정서군이 이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엉겁결에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이들은 우선 이도구 갑산촌으로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북로군정서군이 갑산촌으로 퇴각하던 바로 그 시점(10월 21일)에, 홍범도부대와 안무(安茂) 등의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록구 천리봉 북측 기슭에서 일본군과 만나 또 교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전투는 “완록구 전투”이다. 전투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과장되긴 했겠지만 일본군 사상자가 400여명이나 되었다니 꽤 큰 전투였던 것 같다. 홍범도의 연합부대는 수적 열세에 화력도 모자라 수세에 몰리다가 북로군정서의 “천수평전투”로 일본군 주력이 분산되면서 전세를 뒤집고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갑산촌으로 이동하던 북로군정서군은 천수평이라는 마을에서 일본군 기마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일본군 기병대는 그 숫자가 얼마되지 않아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으나 이 기마대는 일본군의 선봉으로 척후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들 뒤에 대규모의 일본군 본대가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군정서군으로서는 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는 없었다. 그래서 10월 22일 새벽 기병대를 기습하였고 그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독립군의 주력을 깨기 위해 “완록구전투” 에 참전중이던 병력까지 동원해서 북로군정서를 추격했기 때문에 군정서군은 일본군 본대의 추격을 피해 이도구 어랑촌 874고지로 이동해야만 했다.
북로군정서군은 그날 오전에 다시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일본군에 포위되고 상호간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군이 고지에 있었기 때문에 지형적인 이점은 있었지만 병력면에서나 화력면에서 너무 밀리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랑촌에 들어와 북로군정서군을 도와 즉각 협공을 감행하므로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일본군은 전사자만 300여명이 나올 정도로 쌍방간에 너무나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우리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후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부대는 대열을 잃고 소규모로 분산되어 퇴각하게 되었지만 퇴각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조선인 무장부대들은 중국내에서 더 이상 무장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투쟁 공간을 찾게 되는데 이들은 일단 밀산에 모여 무장부대의 통합을 추진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한인들은 소련의 약소민족 지원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많았고,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무장부대들은 연해주의 알렉세호스크(自由市)로 이동했고, 홍범도나 김좌진, 안무, 최진동 등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은 거의 모두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인사회주의자들간의 분쟁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일명, 黑河事變)”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1920년대 초반기에 있었던 독립무장투쟁은 여기서 상당히 약화되고 말았다.
4.백두산아래 무송으로의 이동
(6)경신참변(庚申慘變)과 백포(白圃) 서일(徐一) 종사의 자결
한편, 일본은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조선인 무장부대의 탄생이 바로 간도 한인사회의 존재 자체라고 판단하고 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 추격을 명분으로 간도내 한인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의 보고에 의하면, 약 3천여명의 한인이 살해되고, 민가 3천여동, 학교 59개소, 교회당 19개소, 곡물 6만여섬이 소실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아리랑>에서 김산(金山:일명, 張志樂)도 그 참혹함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1920년에 백두산 지역에서 일어난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1921년 청산리대첩의 영웅인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 등이 모두 북정(北征)에 참가하여 북만지역으로 이동한 후 대종교 종사로 북로군정서를 세운 백포(白圃) 서일(徐一)이 밀산 당벽진에서 토비의 습격을 받아 자결을 하고 만다. 여기서 서일 종사의 죽음에 관하여 살펴보면, 서일 종사는 천재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으로 대종교를 받든지 십년 동안에 군무(軍務)에 몸을 바치면서도 교리를 밝히는 많은 저술을 남긴 바 있다. 한때 교주 승임 대상자로 뽑혔으나 광복운동에 있어서 군사활동을 중점적으로 수행해 내겠다는 약속을 한 바가 있어서 일시 유예를 얻어서 북로군정서 총재로 광복군을 지휘하다가 일본 토벌대의 습격이 심하고 무기와 군량의 부족으로 부득이 군대를 해산하고 밀산 지역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토비(土匪)의 난을 만나 청년 사병들이 많이 사상하므로 이 참변을 당한 종사는 너무나 통분한 나머지 광복운동의 장래도 암담하고 민족의 전도도 막연하기 때문에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41세를 최후로 밀산 당벽진 송림사이에서 자결을 한 것이다.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가 북만으로 떠난 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무송지역에는 오직 윤세복의 대종교 세력만이 남게 되었다. 윤세복은 이주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경신참화의 큰 희생이 뒤따라도 그들과 함께 하여야만 했다. 윤세복은 1921년 10월 상해 임시정부의 뜻을 따르면서, 이곳에 남은 무장단체들을 통합시켜 마침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창설하였다. 대한국민단은 흥업단의 대종교세력들이 주동이 되어 <군비단>, <태극단>, <광복단>, <대진단지부>, <흥업단지부> 등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지부는 경호업무를 담당하던 무장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윤세복은 무장독립운동이 전개되는 현장에서 한번도 이탈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면서 여러 성격이 다른 무장부대들을 서로 단결하게 하였다. 각 단체가 서로 연합하도록 연합규약을 만들었고, 연락처와 본부를 설치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것은 그가 서간도로 이주한 후 10여년 동안 이 지역에 뿌리내린 인맥과 교우관계가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대종교도였으므로 의병파나 개화파나 모든 세력들을 용납하였고 그들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망명이후 그는 중국관헌과 친밀하였고 각처에 있는 이주 한인단체와 한교공회 세력들도 모두 그의 심복이었다. 이러한 그의 준비작업이 3.1운동이후 서간도 지역 무장운동 전개에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각처에 혼성 의용군이 조직되었고, 이들 무장단체는 대한국민단이 제공하는 물질적 토대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농민회, 한교공회, 흥업단지부 등은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통일노선을 구축하므로써 각 단체간 갈등이나 경쟁이 없었다.
북간도에서는 9개의 단체가 계속적으로 통일운동·연합전선운동을 전개하였지만 통일단체가 출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간도, 장백, 안도, 임강지역에서는 윤세복의 지도력에 힘입어 <대한국민단>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국민단은 조직을 군사와 행정으로 나누고 군대편성을 각 지역별로 안도, 임강, 장백에 동지단, 서지단, 남지단을 설치하고 각처에서는 혼성의용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군자금과 군수품의 모집에서도 통일적인 질서가 유지되어 무장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7)서일도본사(西一道本司) 전리(典理)로 승진무송으로 이동한 후 윤세복은 반석, 화전, 길림, 안도 등지에 대종교의 교당을 세웠는데 전체 이주한인의 40%가 대종교인이었다. 그는 7천여명의 대종교도를 이끌었고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1922년 6월 5일에 서일도본사(西一道本司)의 책임자인 전리(典理)로 승진되었다. 대종교도들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흥업단과 대한국민단 등의 활동이 가능하였고 대종교를 기반으로 교육운동, 사회결사운동, 무장운동 등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서간도 이주 한인사회의 실제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한편 장백지역이 윤세복이 할동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어 장백을 중심으로한 조직체가 필요했다. 대한국민단은 행정적 성격이 강하였고 각 단체가 자기 조직을 유지하면서 모인 단체였으므로 대한독립군비단, 흥업단, 태극단, 광복단 등 4개 단체가 1922년 시점에서 다시 연합할 필요가 생겼다. 여기에서 <광정단(匡正團)>이 출현하게 되는데, 광정은 “바르게 나아간다”는 뜻이다. 안도현 산중에 자리잡은 광정단은 수백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장백현 14도구 북방자에는 군복을 제조하는 군수품 공장까지도 운영하였다. 윤세복은 광정단의 교육활동, 특히 군사훈련과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는데, 무송현 동차구(東?區) 대진동에 백산무관학교(白山武官學校)를 설립하고, 1923년 6월에는 광정단의 조직개편을 통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군비단 단장 윤덕보를 광정단의 단장으로 뽑았다.
5.북만주 영안에서의 종교활동
(1)영안에서의 종교활동
1922년 4월 김교헌은 대종교의 총본사를 북간도 청파호로부터 영안 남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영안 남관을 중심으로 목단강(牧丹江)에는 단일시교당(丹一施敎堂), 밀강(密江)에는 숙일시교당(肅一施敎堂), 철령하(鐵嶺河)에는 하일시교당(河一施敎堂), 해림(海林)에는 장일시교당(帳一施敎堂)을 세우므로써 북만지역에서 영안은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안의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면, 영안은 신민부의 활동지역이다. 영안은 목단강시에서 목단강을 끼고 남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벌판 길을 한시간 남짓 달리면 약35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목단강시는 일제의 북만주 침략이 본격화한 1934년 이후에 급격히 발달된 중동선 일대에 새롭게 등장한 근대도시이나, 영안은 오래된 옛날도시 이다. 영안은 고풍스런 옛 중국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로서 영안 주위 50리 안팎에 이주 한인촌이 형성되었다.
위로는 산시(山市), 해림(海林), 목단강(牧丹江) 등이 있고, 아래로는 동경성(東京城), 경박호(鏡泊湖), 발해진(渤海鎭) 등이 있다. 또 좌측으로는 신안진(新安鎭), 영고탑(寧古塔), 구가(舊街), 밀강(密江) 등지가 있고, 우측으로는 황기툰(黃旗屯), 철령하(鐵嶺河)등지가 있다. 영안을 포함하여 이상의 지역에는 모두 1920년대 초반에 이미 이주 한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대종교가 활동한 북만주지방의 가장 중요한 곳이다.
(2)대종교(大倧敎) 3세 교주(敎主) 승임(陞任)서일의 순교이후 통분끝에 발병했던 무원종사(茂園宗師) 김교헌(金敎獻)은 일본의 탄압으로 만주로 교단의 총본사를 옮겼다가 10여만의 교도가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비탄하다가, 그도 역시 1923년 11월 18일 죽으면서 윤세복을 도교사로 지명하였다.〔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1916년 구월산에서 자결한 홍암대종사 나철(1863-1916), 백포 서일(1881-1921), 무원 김교헌(1868-1923) 대종사 등 세분의 묘소는 吉林省 和龍縣 靑湖村에 모셔져 있다〕
김교헌은 윤세복이 대종교에 입교할 때인 1910년 12월 딱 한 번 만나 인사만 했지 대화도 못해본 선배였다. 그 후 만주에서 같이 활동하면서도 서로 떨어져 있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김교헌이 자기를 도교사로 지명한데 대해 윤세복은 많은 부담 감사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는 총본사가 있던 영안현 남관에서 멀리 떨어진 환인과 무송현에서 주로 활동했으므로 1922년 6월 5일 서일도본사의 책임자인 전리(典理)로 임명받은 전후 몇 차례 왕래만 있었을 뿐 총본사의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총본사의 일은 그에게 생소했으며 자신이 도교사로서 대종교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생각할 때 막막하였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회삼경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상해에서 출판한 경전들인 <삼일신고 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회삼경> 등을 처음 받아 읽고 백포 서일의 공덕을 감탄하여 마지못했으며, 세분 종사께서 이미 다 천국으로 돌아가신 지라 경전의 뜻에 풀기 어려운 데가 있어도 물어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슬피 여기고 한탄했었다. 따라서 나의 앞길은 오직 거친 광야를 헤매는 외롭고 적막한 생애였다.
이러한 감정을 거두고, 윤세복은 1924년 1월 22일 영안 남관에서 3세 교주에 취임하고 대종교 쇄신을 위하여 제2회 교의회를 소집하여 홍범규제의 개규(改規)를 통하여 새로운 대종교의 중흥을 도모하게 되었다.(1950년 4월29일 제7회 교의회를 통해 총전교제로 바뀌기까지 30년 가까이 교주로 재임했다) 시의에 부적절한 점을 개혁하고자, 먼저 최고의결기관인 교의회(敎議會)를 규제화 했는데, 교의회는 대종교의 중대한 일을 의결하는 기관으로 그 의원은 각 교당에서 선거에 의해 뽑힌다. 교주 도교사가 수도하고 집무하는 곳이 총본사 내에 속하는 <경각(經閣)>인데 그 자문기관으로써 경의원(經議院) 제도를 신설하였다. 경의원은 경각이 의뢰하는 일을 의결하고 교계 여론을 채취하여 경각에 건의할 의무를 가진다. 그리고 대종교 각 지방 교당에 속하는 지방의회인 도의회와 당의회, 교당 내의 교무 의결기관인 직원회를 신설하여 의정을 쇄신했다.
연구기관인 종학연구실(倧學硏究室)을 신설하고 교당을 순방하는 순교원(巡敎員)과 포교를 담당하는 시교원(施敎員)의 직제를 별도로 정하여 포교와 선도를 원활히 하였다. 또한 총본사와 도본사의 직무를 전리(典理), 전범(典範), 전강(典講) 등의 세 분야로 직제를 나누었는데, 전리실(典理室)은 전리가 총본사의 행정 전반을 담당하며, 전범실(典範室)은 의식과 예의, 회계검사, 교인쟁변, 포상징벌 등을 관할하는 부서로 전범이 총괄하고, 교질, 교적검열, 교리연구 및 강연, 학교감독 등에 대한 일은 전강실(典講室)의 책임자인 전강이 맡아서 총괄하도록 교단의 쇄신작업을 완성시켜 나갔다.
(3)포교금지령(布敎禁止令) 발표
교단을 쇄신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윤세복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일제 총독부와 중국 동북삼성에서 실력자이며 길림성 성장인 장작림(張作林) 정권사이에 1925년 맺은 삼시협약(三矢協約)(29)의 부대조항(附帶條項)으로 인하여 대종교는 일대위기를 맞게 된다. 그 부대조항은 “대종교 주요 간부인 서일이 대한독립군의 수령으로서 그 교도들을 이끌고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니 중국에서 영토책임상 이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이 내용에 의해서 길림성 성장이 대종교에 대해 포교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반만년 역사의 과정에서 대종교는 언제나 조국의 운명을 같이 해왔다. 상고, 단군, 고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부여와 삼국시대의 전성기에는 대천(代天), 경천(敬天), 숭천(崇川)의 명칭으로 그 교세가 크게 떨쳤다. 발해의 융성기에는 이 대도(大道)가 찬연히 빛나 고려 후반기까지 이어지다가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에 의해 그 맥이 끊겼다. 다시 나철(羅喆)에 의해 부흥 중광된 대종교가 포교금지를 당하니 윤세복은 울적함 속에서 지성 일념으로 이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휩싸였음은 당연하다. 왜적의 침략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구출하고 나아가서는 전 인류의 자유행복과 지상천국화를 지상목표로 한 윤세복은 비분강개한 심정을 억제하고 포교금지령 해제운동을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종교 신자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자 이며 북경에서 대중국 외교통으로 활약하고 있던 박찬익에게 연락하여 길림으로 와서 이 일을 담당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외교가 탁원한 박찬익을 비롯한 이시영, 이동녕, 윤복영, 조성환 등, 대종교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29년에야 포교금지령이 해제되었다.
(4)신민부(新民府) 결성
1925년 3월에 대부분이 대종교 교인들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단체들과 국내에 있던 일부 단체가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부(新民府)>(30)란 단체를 영안현(寧安縣)에서 결성했다. 조직은 근대적인 삼권분립제도를 채택하여 행정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 입법기관인 참의원, 사법기관인 검사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집행위원회는 위원장 김혁(金赫), 민사 최호(崔灝), 군사 김좌진, 외교 조성환(曺成煥), 재무 최정호(崔正浩), 실업 이영백(李英伯), 교통 유현(劉賢), 선전 허백도(許白島), 교육 정신(鄭信), 보안대장 박두희(朴斗熙)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참의원과 검사원은 각각 15명과 10명이었다. 그러나 참의원과 검사원은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모든 권력은 중앙집행위원회에 집중되었다. 1925년 4월 1일 이후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했다. 그러나 <신민보>의 활동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지방 조직의 확장과 동시에 500여명의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하여 무장시키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통솔 아래 활동하게 했다. 또한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서 속성교육으로 배출된 500여명의 졸업생은 독립군 간부로 활동했다. 지방에는 군구제(軍區制)·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으며, 산업의 진흥을 위해 공농제(公農制) 실시, 식산조합· 소비조합 등을 설치했다. 재만동포에 대한 자치활동과 아울러 북만주에 거주하는 친일한국인 암살을 비롯하여 국내에 사람을 보내 군자금을 모집하고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1927년 2월에 일본경찰과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위원장 김혁을 비롯한 중간간부가 체포되었다.
김좌진의 명령을 받은 밀양인 손호, 김홍규,윤창선, 손봉현을 비롯해서 윤세용의 사위 이병묵과 손량윤, 신현규 등은 국내로 들어와 밀양과 대구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1928년 8월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고, 특히 손호와 이병묵은 10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중 옥사하기도 했다.김홍규 선생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홍규 선생은 1889년 12월25일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 1078 번지에서 아버지 김만두(金萬斗)씨와 어머니 최대년(崔大年)여사의 슬하 4남 2녀중 4남으로 태어났다. 마을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일찍이 분가하여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항상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의분에 쌓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3일(음력:2월 12일) 경남지방 최초로 밀양에서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을강(乙江) 전홍표 (全鴻杓) 선생의 지도로 윤세주(尹世胄)와 윤치형(尹致衡)이 중심이된 만세운동이 밀양면사무소 앞에 서 일어난 후, 3월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명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3월 15일 밀양유림들의 만세시위와, 3월 20일에는 밀양의 덕망인사 시헌(時軒) 안희원(安禧遠) 선생의 장례일에 맞춰 조상객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에 이어 4월2일에는 윤차암, 윤수선, 박차용 등이 주동이 된 밀양소년단만세가 이어지더니 4월4일 오후 12시30분경엔 이장옥, 이찰수, 오학성, 손영식, 김성흡, 김경오, 이준호 등 표충사 승려와 단장면 유지 이강조를 중심으로 하는 약 5천명의 군중이 단장면 태룡의 시장에 모여 나팔소리를 신호로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다시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큰 깃발을 선두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이곳 헌병주재소를 습격 투석하여 유리창과 지붕의 기와를 파괴하였는데 선생께서도 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헌병과 경찰이 시위대의 해산을 강요하자 시위군중들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숴버렸고, 시위를 막던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가 군중들에게 얻어맞고 짖밟혀 부상을 당하자 밀양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이 급파되고 경찰서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총기를 발포하여 오후 2시쯤 군중들을 해산을 시켰다. 그러나 일부 군중들은 5일 정오까지도 산발적으로 태룡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는데,이 시위운동으로 선생을 비롯해서 365명이 검거되고 그 가운데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단장면만세시위 이후 신분상의 불안감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선생은 1919년 5월 간도로 이주해 가는 무리들속에 어울려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마침 북간도 무송(武松)지역에서 대종교(大倧敎)포교와 교육사업을 통해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밀양 부북면 출신 선배인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선생을 만나 대종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늦은 나이면서도 민족의식 교육과 한글도 학습하며 ‘대한국민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3년부터는 고향을 오가며 단애 선생으로부터 받은 특별임무를 수행해 오던 선생은 1925년 3월 대종교 교인들이 중심이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통합을 추진하여 북만주의 영안현[寧安縣]에서 결성된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일찍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신민부> 단원으로 윤세복의 조카사위(형 尹世茸의 사위)인 이병묵,(李丙?), 동향인인 손호(孫滸), 손봉현(孫鳳鉉), 윤창선(尹昌善), 동지 손량윤(孫亮尹), 신현규(申鉉圭) 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7년 11월초순 선생의 먼 친척뻘이자 손호(孫滸)의 장인인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에 살고있던 부호 김태진(金泰鎭)으로부터 군자금 3,000원을 받아내고 그의 아들 김용출(金龍出)을 포습하여 북간도로 데려가 대종교인으로 만들려는 임무를 수행중 일제에 발각되어
1928.8.19.종로경찰서에 ‘대정8년 제령 제7호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1928.8.19.종로경찰서의 1차심문
1928.8.20.종로경찰서의 2차심문
1928.8.22.경성지법 검사국의 검찰심문
1929.3.8. 경성지법 1차심문
1929.5.13.경성지법 2차심문
1929.6.26.경성지법 제1차공판
1929.7.25.경성지법 제2차공판
1929.9.16.경성지법 제3차공판
1929.9.25.경성지법 제4차공판을 통하여 적용 법조문 형법 제226조, 형법 제162조, 형법 제163조, 형법 제159조, 형법 제161조, 형법 제167조, 형법 제246조, 형법 제240조, 형법 제236조, 형법 제63조, 대정8년 제령제7호 제1조) 위반죄로 2년의 실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형기를 마치고 출감 하였으나 옥중에서 받은 온갖 악형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몸을 추스릴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 사연리에서 오랜 기간동안 요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35년도에 북간도 동경성이 위치한 경박호 부근에 자리잡은 윤세복 선생의 근거지로 찾아가 해방이 될 때까지 윤세복 선생이 전개하는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돕기 위하여 이주 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1940년 봄에는 둘째아들 현출(鉉出) 내외와 손자(英淵, 英姬) 둘 등을 북간도로 이주시키고 그곳에 선생의 안정적인 활동처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때 이주시켰던 둘째아들의 자손들이 중국 길림성 교하시(蛟河市) 오림향 태평촌에서 오늘 이 시간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흠모하여 스스로 비서의 일원이라 자처하며 몽양의 측근에서 보필하다가 1947. 7. 19. 몽양선생이 혜화동로타리에서 저격을 당해 유명을 달리하자 실의에 빠져 방황하였고, 고문 후유증까지 겹쳐 오랜 신고(身故) 끝에 1951년 10월 15일 고향집에서 62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이상 필자가 조사한 공적조서에 근거하여 김홍규 선생은 금년에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셨다)
(5)천기(天旗) 개정(改定)
1926년 1월 16일 영안에서 제4차 교의회를 개최하고 교의 깃발을 원방각의 세극 모양을 가진 천기(天旗)로 개정하였다. 원방각은 동그라미, 네모, 세모가 모인 형상으로 대종교의 “셋으로 하나되는 삼일사상”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설은 발해때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삼일신고 주리훈 주석과 서일의 <회삼경>에서 “성품은 ○이고, 목숨은 ■ 이고, 정기는 △ 이니 그 이름이 세가지 묘함이다.
밝은이는 이것으로써 삼극(三極)의 형상에 응하나니 밖이 둥글고 안이 빈 것은 한울의 높음을 형상한 것이오, 얼굴 바닥은 바르고 지름길이 곧은 것은 땅의 평평함을 형상한 것이오, 위가 홀수요 아래가 짝수인 것은 사람의 모양을 형상한 것이다.”라고 했다.
북만주는 또한 적기단, 북만청년홍동맹, 등 공산세력의 본거지기도 했다. 영안, 아성, 상지 등에 본부를 두고 이들은 대종교와 신민부 등 민족운동세력을 분열시키고 파괴공작을 자해했다.
단애가 책임진 가장 큰 의무는 북만에 거주하는 40만 이주 한인들의 머릿속에 대종교적 민족사상을 견실하게 주입시키는 일 이였으므로 각 시교당을 순회하면서 수시로 순회강연을 실시하였고 신민부에서 순간으로 발행하는 <신민보>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신민보>의 보급과 시교당의 민족사상강연회는 북만 각처의 이주 한인들에게 민족사상과 무장투쟁 노선의 이념을 전파시키는 유일한 주민교육 수단이었다.
(6)삼부(三府) 통합 운동
신민부는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로 나누워 싸우다가 1927년경에 이르러 그 와중에서 석두하자(石頭河子)총회때 일제경찰과 중국군의 기습을 받아 김혁, 유정근, 남극, 이정화 등 대종교계의 주요한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이 당시 군정파를 이끈 세력은 김좌진, 황학수, 정신, 오상세, 이탁, 박두희 등으로 모두가 대종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신민부의 민정파를 구성한 세력에도 시교당의 주요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어 윤세복의 고민은 실로 컸다.
신민부는 1926년 9월부터 북만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국귀일당(韓國歸一黨)을 조직하여 정당을 통한 운영을 시작했는데, 독립운동전선에서 좌우합작이 시도되고 국내에서는 신간회(新幹會)운동이 태동되었던 분위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그 본부를 영안의 영고탑에 두고 당원은 1천여명에 달했으며,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김진, 정신, 유현, 신영빈, 장준걸, 조관 등이 귀일당의 핵심으로, ‘귀일(歸一)’의 의미도 모두가 정파를 떠나 한배검,‘한배’, ‘단제(檀帝)’ 즉 단군을 모시는 일민(一民)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우리 모두 하나의 민족으로서 단군을 모신다는 대종교의 민족주의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신민부가 군정과 민정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신민부에 있어서 대종교의 의미가 약화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조짐을 극복하고자 대종교인들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삼부<三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정의부(正義府)> 통합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대종교와 신민부의 제일 중요한 거점인 영안에 1926년 5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까지 설치되자 윤세복은 내적인 분열, 분파주의자, 일본영사관, 친일파 중국관헌, 나아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세력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데 1926년 대종교는 포교금지령을 당해 영안에서의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5.흥개호반 밀산 당벽진 시대
(1)흥개호반 밀산 당벽진시대
1928년 1월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와 중국 동북의 장작림(張作林) 정권의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서 제6회 교의회를 열어 그 결정에 의해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碧鎭)으로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하고 그곳의 ‘대일시교당’을 임시 총본사로 정하여 6년을 하루같이 교리연구와 수도에 전념하는 한편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포교금지령 때문에 경배의식도 부득이 잠정적으로 폐지하고 가능한 한 외부와의 접촉도 금지하였다. 당벽진은 중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지대에 있는 추운 지역이므로 교통이 불편하고 거리가 먼 곳이지만 백포 서일과 독립군들이 활동하던 곳이고 대종교 신도들이 많은 곳이라서 은거생활에 많은 도움과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북만주 각 지역에는 친일파 세력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중동철도가 발전하면서 일제의 영사관과 조선인민회(일명:民會)란 친일 세력도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보민회, 권농회, 시천교, 창림교, 제우교 등등의 잡다한 친일단체가 활동을 개시하므로서 대종교 세력과 신민부 세력들은 제일 먼저 이들과의 싸움을 치루어야 했다.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이 해림에 밀정을 파견하여 윤세복을 밀착 감시했으므로 윤세복은 북만주로 왔지만 항상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는 1911년 간도로 망명해 와서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감옥에 갈 때까지 왜놈의 밀정으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와 미행을 당했던 것이다.
(2)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의 죽음
대종교세력이 북만주 밀산 당벽진으로 거점을 옮기자 당시 김좌진은 신민부 군정파들과 함께 대표적 무정부주의자 유림과 목단강에서 만나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세우게 된다. 이때 시야 김종진, 백야 김좌진은 모두가 공산주의 세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연합하였다. 대종교 민족주의 세력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무정부주의 세력과 연합하게 되었고 신민부 군정파와 무정부주의 세력들은 연합하여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창립하게 되었다. 김좌진은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精米所)에서 민족을 배반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총탄에 맞아 어이없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백야 장군의 암살비화에 대하여 살펴보면: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장군의 암살범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많았으나, 현재는 김봉환의 사주에 의거 박상실이 암살했다는 점에 대해서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여러 가지의 다른 이름(異名)을 쓴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즉 밀양 출신의 김봉환(金奉煥)은 일명 김일성(金一星) 또는 김인권(金仁權)이란 이명을 사용했으며, 함경북도 명천 출신의 박상실은 본명이 이복림(李福林)이였다고 하는데, 이외에도 공도진(公道珍), 김일환, 최동범, 서귀남, 김신준(金信俊), 박신 등의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는 자료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백야 장군의 암살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간행물 <혁명(革命)>을 발행하던 김봉환이 박상실을 매수하여 이용했다는 기사가 1930년 6월 27일자로 일본의 북경대사관에서 보고한 《不逞鮮人刊行物 <탈환(奪還)>(4월 20일 發行 제9호 譯文)金佐鎭ニ關スル記事》문서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주동(梁柱東)의 애인이며 김봉환의 내연의 처로 최근까지도 비운의 여류작가 취급을 받고있던 강경애(姜敬愛)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애국지사 이강훈(李康勳)선생과 임기송(林基松)선생의 회고록과 증언을 비롯한 관련자료,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된 <한국민족독립운동사>의 아래와 같은 부수적인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동아일보> 1927.3.20.자 참조)
신민부 기관지인 <신민보>를 1925년 4월 1일 간행하였다. 그러나 <신민보>의 활동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946년 6월에 김일성(金一星, 金奉煥). 강경애가 투고한 내용이 적색의 경향을 띠었다고 일본의 하얼빈(哈爾濱)영사관에서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결국 신민부의 선전부원인 허성묵, 이광진이 체포됨으로써 활동이 중지되었다.
(3)추악(醜惡)한 두 악한(惡漢)
또한, 전 광복회장 이강훈 지사의 「역사증언록」가운데 <내가 밝혀야 할 두 악한>이라는 회고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 경남 밀양 출신으로 최계화(崔桂華)로 통하는 본명 구영필(具榮泌)이라는 자는 일본측과 내통 하면서 의열단 군자금을 착복하고, 재류동포 구호양곡을 착복하는 등 신민부 근거지인 영고탑(寧古塔)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다가 신민부 별동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둘째 : 이들이 어떻게 해림에 정착했는지는 모르나 신민부 기관지인 <신민보>에 일제가 기피하는 문장을 쓰는 등 종종 투고도 하였다. 그리고 김봉환은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강경애(姜敬愛)와 동거하면서 어느날 하얼빈에 갔다가 영사관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하얼빈의 마쓰시마(松島)라는 한국말에 능통한 경부는 독립운동가 취제의 전담자였는데, 조선총독부가 이광수를 그의 애인 허영숙을 이용하여 변절시킨 전례를 십분 활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변절한 김봉환과 강경애가 후배인 박상실을 사주하여 백야 장군을 암살한 것이다.
국내의 어느 독립운동사에는 이러한 두 악한이 저지른 흉악한 죄악을 알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관계한 사실만 기록한 예도 있다.
여기서 밝힌 두 사람이 밀양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밀양인들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가 없지만, 김봉환의 밀양에서의 행적에 관하여는 자세히 밝혀진 사실이 없어 향후 많은 조사가 있어야 하겠고, 구영필(具榮泌)은 고향이 밀양이 아니고 경남 기장군 일광면 출신으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과 의열단에게 군자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시던 역시 가곡동 출신의 부호 한춘옥(韓春玉)선생의 장남 한성근의 동서로서,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李鍾岩)이 국내에서 가져간 자금중 대부분을 빼내 가지고 영안현(寧安縣) 영고탑(靈古塔)으로 도망가서 농장을 장만하고 첩실을 두어 호의호식 하였던자로써 1926년 당시 약 45세 정도 였다. 만주군정서에도 관여하고 친일활동을 노골적으로 행한 파렴치한 인데, 구영필의 후손들이 최근에 와서 의열단에 일부 관계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신청을 한 사실이 있어 고소와 통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한춘옥 선생에 관해서 살펴보면: 한춘옥 선생은 밀양 가곡동 밀양역전에 근거지를 두고 만주에서 곡물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판매하던 곡물거상(穀物巨商)으로써 거부(巨富)였다. 조카(한봉근,한봉인,한봉삼)들을 비롯한 의열단과 기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탄로나 일본경찰에게 너무나 많은 시달림을 받던 선생은 1930년대 초반, 동생 한춘서의 장남 한봉고와 그의 식솔들을 데리고 북만 영안현 신안진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면서 팔가둔(八家屯)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었다. 일본의 폐전을 예견하시고, 해방 수 개월 전, 가진 것도 없이 부산으로 귀국하셨다가 고생끝에 세상을 떠나셨다.)
6.북만주 경박호반 동경성시대
(1)경박호반 동경성으로의 이동과 발해농장 개척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이청천(李靑天)의 한국독립군이 중국 국부군과 연합하여 한중연합 항일전쟁을 전개할 때 대종교는 개인단위로는 전쟁에 참가했지만 교단 전체가 3.1운동때 처럼 무장하여 저항하지는 못했다. 비록 만주국 세상이라고 해도 중광의 빛을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밀산에서 영안에 이르기까지 신일(信一), 영일(永一), 선일(善一), 신일(新一), 양일(亮一) 등 5개소의 시교당을 새로히 설립하면서 6년동안 잠재웠던 선교사업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산 안희제가 북만으로 망명해 온다는 기별이 전해져 왔으므로 단애는 다시 힘을 얻고는 1934년 6월 발해 고도 동경성(東京省)으로 총본부를 옮겨 북만에서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고, 총본사 중진 안희제 대형(大兄)은 발해농장을 개척해 나갔다
동경성이 위치한 경박호 부근에도 이주 한인촌이 많다. 경박호는 영안 서남쪽으로 50km지점에 있으며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호수다. 남북은 45km, 동서로 넓은 곳은 6km, 면적은 90㎡나 된다. 북만주에서 전개된 한중연합의 큰 전과 중의 하나인 경박호전투는 1932년 3월 2일에 일어난 것으로 한중연합전선 초기에 거둔 전과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한국독립당의 이청천부대는 중국측의 시세영부대와 연합하여 공동작전으로 대첩을 이루었다.
(2)포교금지령(布敎禁止令) 해제
1931년 박찬익, 조성환, 이시영, 이동녕 등의 대종교인들이 동삼성의 군벌정권과 북경의 원세개에게 해금 청원과 항의 교섭을 추진하고 한편 손문(孫文)의 광동 호법정부와의 외교 활동에도 노력을 기우려 포교금지령을 해제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일제는 만주 전역을 침략하여 1932년 만주에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자 항일세력으로 지목받던 대종교는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윤세복은 항일의 기치를 내걸고 일제에 대항할 것인가?, 아니면 대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숨기고 대종교는 조선 고대의 신도(神道)인 순수한 종교단체로서의 활동만을 내세워 포교의 허가를 얻어 새로이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여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에 관해서 고민하였다.
1933년 종교단체로 등록하기로 결정한 윤세복은 대일시교당에서 어천절(御天節) 경하식을 거행한 다음, “우리 대종교가 중광한 지 25년 동안 일본의 무리한 박해를 늘 받아왔으나, 시국의 정세는 더욱 변화되어 갈데 올데가 없는 오늘날 나는 한배검(天祖神,神人, 즉 檀君)의 묵시를 받고 나 자신이 교당 순방의 길을 떠나는데, 만일 당국의 양해를 얻으면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도는 가히 존재한다”라는 나철 신형(神兄)의 남긴 뜻을 이을 것이고, 또 뜻대로 안될 경우에는 나의 몸을 희생하여 선종사의 부탁하신 은혜를 갚겠다.“ 라고 선언하고, 다음날 교당 순방길에 나섰다. 총본사는 임시로 밀산 평양진 신안촌에 이전해 두고 성하식과 최익항에게 사무를 일임한 후 스스로 고을마다 다니면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33년 하얼빈에 나아가 대종교 선도회 설립에 착수했는데, 1934년초 하얼빈에 도착한 윤세복은 대종교 선도회를 하얼빈에 세우고 9월에 조선총독부 영사관으로부터 포교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허가는 제한적인 것이여서 인가된 곳은 하얼빈 선도회 외 8개 교당과 동경성에 있는 대종학원 뿐이였다. 6년후 교당 10여곳과 교적 간행에 대한 인가를 추가로 받았으나 대종교의 활동은 매우 제약을 받았다. 1934년 하얼빈 선도회를 설립하면서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종교는 인류 평화의 사명이요 개인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 대종교는 곧 대도의 근본이오 진리의 보고이며 또 인간 행복의 지침이다. 우리 대종교는 신인 단군께서 4천년전에 인간을 홍익하기 위하여 삼진귀일(三眞歸一:세가지 참 즉,성품, 목숨, 정기를 수행하여 하나로 돌아감)의 진리를 밝히시고 뭇사람을 교회시켜 밝은이가 되게하는 교문을 여시었다. 우리 인생은 마땅히 감정을 그치고 숨을 고르게 하며 감각을 그치는 세 가지 수련법으로써 마음과 기운과 몸이라는 세 가지 망령됨을 돌이켜 성품과 목숨과 정기의 세 참에 나아갈 지니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이 천국화 하는 방법이다. 아! 세계 환난을 미워하고 인류 평화를 사랑하거던 우리 교문으로 들어오라. 현재의 고민을 벗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거던 참된 대도를 믿어라. 아! 우리 최고로 경애하는 만주 동포들이여.”
이 선언문의 내용처럼 대종교는 민족에 전례된 큰 도를 따르며 그 도는 인간을 참되게 인도하므로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이 도를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된다는 범인류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3)교적(敎籍) 간행(刊行)
윤세복은 1939년 10월 25일 교적간행위원회를 설립하고 안희제와 강철구 등의 노력으로 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1941년 6월에 대종교 규범인 <홍범규재> 500부, <삼일신고> 2,000부, 단군 사적을 기록한 <신단실기> 1,000부 등을 간행했다. 같은해 대종교 의식을 기록한 <종례총략> 2,000부, 서일이 저술한 <오대종지 강연> 3,000부와 자신이 지은 대종교 해설서인 <종문지남>을 간행했다. 여기서 「오대종지」는 교주 홍암 나철이 1910년에 발표한 실천강령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공경으로 한얼님을 받들어라(사람과 만물의 근본을 안다)
2.정성으로 본 성품을 닦으라 (인생의 좋은 능력을 가진다)
3.사랑으로 온 인류를 합하라 (인간 세상의 평화를 얻는다)
4.정숙하게 행복을 구하라 (인간의 자유를 누린다)
5.근면으로 산업에 힘써라 (인류의 문명을 늘인다)
1942년에는 <한얼 노래> 4,000부를 서울에서 출판하게 했는데, 한얼노래 중 고구려에서 군가로 쓰였던 신가(神歌) 4장의 고본을 서일이 창가로 번역했고, “한풍류”,“삼신가”,“세마루”,“어천가”,“중광가”는 나철이 작사했으며, “가경가”는 서일,“개천가”는 최남선,“성지 태백산”은 정열모, 나머지 곡은 이극로가 작사했다. 이들 노래는 채동선 외 7명의 국내 저명 작곡가에게 위탁하여 작곡되어졌다. 대종교내의 기관지인 <교보(敎報)>는 포교금지령 기간인 6년을 빼고 1942년 임오교변까지 1년에 네 차례씩 발간하였다. 윤세복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교적을 간행한 이유는 “대종교교적간행회(大倧敎敎籍刊行會)” 취지문에 잘 나타나 있다.
「교화를 보급함에는 반드시 문자의 힘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이제 대종교 부흥기에 임하여 모든 이들이 한 목소리로 경전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응함이 무엇보다 대종교 발전상 급선무이다. 이것을 절감하는 우리는 조그마한 정성과 작은 힘에도 불구하고 교적간행회를 발기한다.」 라고 했다.
교적 간행과 더불어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교 계통의 대종학원(大倧學院)을 설립하여 초등부와 중등부를 운영하면서 항일 민족교육을 은밀히 진행했으며, 단군을 모시는 천진전(天眞殿:밀양에서는 天眞宮이라 함)을 건립 하고자 힘썼다.
그런데, 이때의 윤세복의 활동을 일제와 타협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1932년 이후 만주 전역은 일본 세력권 속으로 편입 되었으므로 만주에 사는 이주한인은 모두가 일제의 포로가 된 것과 도 같은데, 포로된 입장에서 교단조직 자체를 부정하고 싸움을 선택하기 보다는 대종교는 종교단체이므로 일단 순응하면서 저항한다는 형식을 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결코 굴복이라고 생각할 수 가 없는 것이다.
(4)임오교변(壬午敎變) 발생
윤세복이 1934년 동경성에서 종교운동을 시작했을때 북만지역의 무장투쟁은 요하, 탕원, 밀산 등지로 밀려났고, 1937년 즈음에는 몽고 접경의 만주리(滿洲里)에서 항일전이 전개될 정도였으므로 이 시기 윤세복이 전개한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였다.
1937년의 중일전쟁에 이어, 1942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폭압정치를 계속하였고, 대종교 교세의 발전에 내심으로 당황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회유하기도 하다가 점차 내사와 감시를 엄밀히 할 뿐 아니라 교당에 교인을 가장한 밀정을 잠입시켜 교계의 동향과 교내 간부들의 언행을 일일이 정탐하기 시작했다. 1942년 11월 19일을 기해 드디어 일제는 이극로(李克魯)(32)의 편지를 위조하면서 국내에서는 민족운동 세력인 조선어학회 간부들의 검거와 함께 만주에서는 대종교 세력을 주목하여 윤세복 이하 다수의 대종교 지도자들을 동시에 검거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소위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이 사건으로 대종교 간부 24명을 검속했는데, 이유는 조선어학회의 이극로가 단애(檀崖)선생에게 보낸 「널리 펴는 말」이란 편지의 일부분을 날조하여 그 자체를 “조선독립선언서”라고 몰아 부치면서 대종교 간부들을 구금, 심문한 사건으로,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안희제, 오근태, 강철수를 비롯한 10명이 숨지고 5명은 석방, 이현익, 이용태, 김진호, 이성빈 등 6명은 무기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목단강 액하(掖河)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는데, 단애 선생은 무기형을 언도 받았다.
검거당시 선생은 일경에게 “내가 관동군의 양해를 얻을때부터 너희에게 속아서는 근 십년을 지냈거니와 오늘부터는 너희들이 나에게 속는 것이다.”하였고, 심문과정에서 일본검찰은 상해임시정부를 가정부(假政府)로 지칭하자 거짓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임을 강조하고, 임시정부라는 기록을 남겨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재판과정에서 법정 중앙에 걸려있는 일장기를 보고는 “만주국의 재판을 받는 사람이 어찌 일장기 앞에서 재판을 받겠느냐”며 일장기를 치워줄 것을 요구하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는 백절불굴의 투사적 항거를 계속하였다. 감옥에서의 윤세복은 자신이 무지막지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도 동지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할 때에는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만주국이 성립된 이후 지하투쟁을 하지 않고, 공인된 종교로 허가받아서 이러한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 일제의 논고는 “대종교는 조선고유의 신도 중심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시키자는 표방하에서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 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의 목적이다”라고 적고 있다. 일경은 이를 기회로 신간교적 2만여권과 구존서적 3천여권 및 천진(天眞). 인배(印倍), 각종 도서 전부를 비롯하여 총6백여종의 서적을 압수하였으니 오늘날 대종교관련 자료가 부족한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널리 펴는 말」의 전문과 날조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널리 펴는 말』
천운은 빙빙 돌아가는 것이다. 한번 가고 다시 오지 않는 법이 없다. 날마다 낯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가면 낯이 오며, 또 춘하추동 사철은 해마다 돌아온다. 이와 같이 영원토록 돌아가고 돌아오는 법이 곧 한얼님의 떳떳한 이치다. 이런 순환하는 천리에서 인간사회의 변천도 끊임없이 생긴다. 부자가 가난하여지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며 귀한 사람이 천하여 지고 천한 사람이 귀하여 진다. 동방에는 밝은 빛이 비치었다. 이는 곧 대종교가 다시 밝아진 것이다. 한동안 밤이되어 지나가던 대종교가 먼동이 튼지도 30여년이 되었다. 아침 햇빛이 땅위를 비치어 어둠을 물리치는 것과 같이 대종의 큰 빛이 캄캄한 우리 앞길을 비치어 준다. 어리석은 뭇사람은 제가 행하고도 모르며 또 모르고도 행한다. 직접으로는 만주대륙과 조선반도를 중심하여 여러 천만 사람이 대종교의 신앙을 저도 모르는 가운데 아니 믿는 사람이 없고, 간접으로는 이웃 겨레들도 이 종교의 덕화를 받지 아니한 이가 없다. 삼신이 점지하시므로 아이가 나며 삼신이 도우시므로 아이가 자란다고 믿고 비는 일이 조선의 풍속으로 어디나 같다. 이 삼신은 곧 한임, 한웅, 한검이시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삼성사가 있고, 평양에는 숭령전이 있고, 강화도 마니산에는 제천단이 있다. 발해시대에는 태백산에 보본단을 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었다. 이와 같이 삼신을 믿고 받들어 섬기는 마음은 여러 천년 동안에 깊이 굳어졌다. 시대와 곳을 따라 종교의 이름을 바꾸었으나 한얼님을 섬기고 근본을 갚아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교리만은 다름이 없고 변함이 없다. 종교는 믿는 마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야 하며 또 형식은 존엄을 보전할 만한 체면을 잃지 아니하여야 한다. 사람의 이상은 소극적으로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아가는데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체면을 유지할 만한 천전과 교당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교회의 일꾼을 길러낼 만한 교육기관도 없다. 이는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오 성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동안에 모든 사정이 우리의 정성과 힘을 다 발휘할 기회를 열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제는 때가 왔다. 우리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대교의 만년 대계를 세우고 나아가야 된다. 이 어찌 우연이랴, 오는 복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도 큰 죄가 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된다. 만나기 어려운 광명의 세계는 왔다. 반석 위에 천전과 교당을 짖자! 기름진 만주벌판에 대종학원을 세워서 억센 일꾼을 길러내자!
우리에게는 오직 희망과 광명이 있을 뿐이다.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
개천4251년 9월 5일
※날조된 부분은?:
널리 펴는 말 ⇒ 조선독립선언서,
일어나라 움직이라! ⇒ 봉기하자 폭동하자!
단애 선생은 수감생활 중 쇠뭉치를 발에 차고 있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동지들이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주검이 되어 나갈 때마다 지하투쟁에서 벗어나 공인받은 종교활동으로서의 노선 변동이 화를 자초한 것이라는 자책감에 괴로워해야 했다. 선생은 목단강 액하형무소(牧丹江 掖河刑務所 제1舍 獨3房)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감옥에서의 감상을 시조체로 지은 <복당서정>과 <삼일신고>를 한글로 번역하여 주해를 달았으며, 지감법(止感法), 조식법(調息法), 금촉법(禁觸法)을 통한 수행지침서인 <삼법회통(三法會通)>을 저술하기도 했다. 목단강 감옥에서 이영재(李榮載:현재 총전교를 맡고 있는 단암 이용태의 아들)에 의해 간혹 사식이 들어올때 도시락의 바닥에 깨알같은 글자를 한자로 적어 밖으로 내보낸 것이 뒷날 모든 수행인들의 기본 교과서가 된 <삼법회통>으로 발간되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3)종교인으로서의 인품
윤세복은 대종교 지도자로 종단의 지도와 사회에 대한 기여도 많이 했지만 무엇보다도 평생 종교인으로써의 기본이 되는 수도(修道)를 해 왔던 사람이다.
그는 대종교 포교 금지령 이후 6년간 칩거할 때에는 오로지 경전 연구와 수행에 전념했고, 임오교변으로 감옥에 수감되어서도 수행을 하면서 모진 고문을 견디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총본사에 기거하면서 수행생활을 해왔다.
그는 나철, 김교헌, 서일 등과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그들과 더불어 대종교인들로부터 철인(哲人)으로 추앙받는 네 종사의 한 분이시다. 그의 수행 경지는 자진한 나철이나 서일에는 못 미치지만 그는 식사 조절법에 의해서 회도를 했던 수행인 이였으며 그의 주검이 화장될 때 사리(舍利)가 나왔다. 그의 수도자로서 평생의 좌우명을 보면,
“한 방울 물이 바위를 뚫나니 해가 오래 걸려도 싫증내지 말라, 만일 신비함을 보거든 조심하여 스스로 지킬 것이니, 모습은 마른 나무와 같고, 싱거운 음식, 소박한 옷으로 말은 적게하고, 잘 웃으며, 바보 같고, 천치 같아 구함도 없고, 얻음도 없으면 공적 마침을 가히 알 것이다.”라고 했다.
수련을 위해 윤세복은 일정 기간 동안 문을 잠그고 단식을 자주 했는데, 해방 후에도 짧게는 며칠 길게는 15일간에 걸쳐 단식을 하곤 했다. “얼마나 단식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측근에서 물었더니 “70일 이상의 단식을 할 수 도 있지만 교의 직무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길게 할 수 는 없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솔잎을 물에 불린 생쌀과 콩 등을 섞어 먹는 생식도 자주 했는데, 그 당시 남산이 지금에 비하면 깨끗하였겠지만 오염됐다고 해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에서 솔잎을 따와서 생식을 즐겼다고 한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환은 “윤세복 종사는 평생을 수도(修道)하시면서 사신 분이다”라고 평했고, 만주의 항일독립운동권에서 자란 기독교계의 유세림 목사도 “운세복 선생은 진정한 종교인이며 도인(道人)이시다”라고 늘 극찬을 하면서 흠모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 재산을 대종교에 헌납(獻納)하면서 대종교에 귀의한 후 평생 사재(私財)를 가져 본 일이 없고 대종교 교당에서만 기거하였다. 모든 것을 비운다는 의미의 허당(虛堂)이란 호를 썼고, 한글 이름인 ‘한다물’을 사용 했는데 ‘다물’은 고구려 말로 ‘고토를 되찾음’이란 뜻을 가지며 그의 한자 이름인 세복(世復)의 의미를 풀이한 것이다.
그의 인생 목표는 수행을 통해서 성품에 통하는 것과 우리 민족의 전통, 정신과 역사를 후진들에게 계승하려는 일념 뿐 이였다. 그의 생활은 일생동안 검소했는데, 만주에 계실 때에는 마른 미역 한 토막에 조밥으로 연명하기도 하고 생식을 자주했다.
의복은 주로 노동복을 입거나 한복 이였고 방한모자는 어저귀 모자를 약 20여 년 간 쓰다가 혹시 누가 털모자라도 사다주면 과분하다고 고사하고, 모직이나 비단, 털가죽 등은 일체 착용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방석도 깔지 않고 생활하였다.
고향 밀양의 친척들이 생일이라도 되어서 떡이나 갖은 음식들을 가져오면 “공인이 어찌 자기 생일이라 하여 사사로운 대접을 받겠는가? 도로 가져가서 여럿이 나누어 먹어라”고 물리친 일화를 통해서 그의 사심 없는 속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의기는 평소 잘 알고 있는 일본어의 사용도 허용하지 않았고, 일본 법관이 심문할 때 “만일 순종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화색을 띠며 “참 감사하다. 내가 죽을 자리가 없어 근심하던 차에 이런 말을 들으니 귀하는 나의 은인이다”라고 거듭 치사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그의 신념에 감동하여 일제 경찰의 형사로 근무하던 정일(鄭一)은 그를 따라 대종교에 귀의하고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홍익대학교(弘益大學校)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일본 사람과 다투다가 감옥생활을 하던 진성준이란 청년도 감화를 받아 대종교를 신봉하고 해방 후에 대종교 청년회장이 되었다. 그의 사람을 끌어 들이는 감화력은 신규식, 김동삼, 신채호, 박은식 등의 존경을 받았고, 그들로부터 ‘한국 유일의 대정치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신성모 외 다수 인사들의 해외 유학에 큰 힘을 주었으며 김좌진, 정신, 이장년, 김동평, 성호, 강영훈 등도 정신적 지도를 받았다. 해방 후 이시영, 김승학, 황학수, 조완구 등은 매주 대종교 경배에 참석했고 이극로, 정열모, 등은 대종교 삼전(三典)에 들어 집무했다. 조성환, 명세제 등은 자주 교당에 나왔으며 이병기, 최남선 등도 가끔 참석했다.
총본사가 저동에 있을 때, 교인들이 윤세복을 숭앙하여 천궁의 한배검에게 절한 후 그가 거처하는 곳을 향해 묵도를 했다. 이시영, 이범석, 신성모, 안호상, 정열모 등이 관직에 임명되면 윤세복에게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광복군 출신이며 뒤에 국군의 모체가 된 국방경비대를 창설한 송호성 장군은 한 달에 한 번씩 윤세복을 찾아와 인사를 했다. 김구(金九)는 처음 대종교를 방문하여 한배검 천진전에 참배하고 윤세복을 만나 “나도 대종교인이 올시다. 우리가 한배검의 자손인 이상 다 이 교화에 의해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완전한 교인 행세를 못하고 사는 이유는 천주교도인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천주교를 믿어라 하는 명령을 받은지라 개종(改宗)할 수는 없으나 정신만은 대종교인이 외다. 버리지 마소서”라고 하고 이시영을 비롯한 삼 사명의 원로와 한담하였다. 그리고 중광절, 어천절, 가경절(嘉慶節:나철의 조천일), 개천절 등 4대 명절에는 임정요인들을 동반하여 참여하고 적지 않은 성금까지 헌납하기도 했다.
최남선(崔南善)은 중국 북부 지역의 순회강연이 있던 기회에 발해의 옛 서울 동경성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을 때 대종교당에 먼저 도착해서 단군 천진전에 참배한 후 윤세복에게 절을 올리고는 악수를 나누며 두 무릎을 꿇고 말없이 앉아 있는데 두 눈시울을 적시며 너무 감격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어 “해외에서 큰 책임을 지시고 계신 선생님을 이처럼 뵙고 보니 평소에 하고 싶던 많은 말씀은 다 간데 없고 그저 황감할 뿐입니다. 저도 일찍이 김무원(茂園 金敎獻) 종사와 유석농 선생의 전통적 훈도를 받은 대종교 숭봉자 이오나 외면으로는 불교신자로 행세하면서 단군론을 세상에 문헌으로 밝히려는 일편단심에서 전 생애와 역량을 다 바치려고 희생적 모욕적으로 이용을 당하면서도 또한 여러 의심을 받더라도 목적한바 성공되는 날 저의 사명을 다한 줄 압니다. 금일 선생께 기탄없이 평생의 소회를 고백하여 후일의 편달을 기다리오며 끝으로 드릴 말씀은 떠날 때 다시 못 뵈옵고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영석 교수는 몇 년 전에 있은 무오독립선언 기념강연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인물을 한명 발굴했는데 그가 윤세복 선생이다. 독립투사 중에 안중근 의사 같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진 의사는 많지만 독립, 종교, 교육의 삼위일체로서 헌신하면서 민족의 대계를 위해 장기적인 노력을 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단애 대종사를 평가 하였다.
1960년 2월 13일 향년80세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대종교에서는 <大倧敎宗師 가답형> 이란 호를 추제하였고,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하였으며,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2000.11.3)되었다. 유족으로는 장남: 필한(弼漢)과 1녀: 난악(蘭岳), 1손: 무득(懋得)을 두었으나 모두 사망하고 현재는 직계 자손이 없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