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년전에 아일란드는 영국의 지배아래서
독립하여 나라와 백성이 가난하였다
천주교회내에서는 빈센치오단체를 통해서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구호활동을 하는동안
젊은여자들은 몸을 파는 창녀들도
많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이
걸려 희망이 없었기에 그들을 물직적인
도움보다 가서. 위로하고 기도하는
일을 위한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으니
레지오의 출발이다
성서형제회는 헌장을 통해서
말씀과 아나윔을 키워드로 내세운것이다
한국은 전쟁이후 가난에 시달렸다
교구를 대표하는 교구장은 사회복지사업과
사제양성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기위해 미국과
유럽등지 선진국교회를 다니면서 모금활동을
했다 부산교구에서 활동한. 미국인신부는
교구장과 다니면서 활동한 내역을 기록으로
남겼다 교구에서. 돌봐야하는 아이들 생각에
다니면서 먹는식비가 아까워서 토스트로
간단히 요기했다고한다
1986년도 포일리공소에서 견진을 준비
하고있었다. 안양호계동성당에서 견진을
받았다 교구장이 일년에 반은 모금으로
해외에 가 있어야 하기에 평일날 견진식을
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농촌이 많은 교구였다
안양에는 평촌이. 성남에는 분당이라는
신도시가 생기기 이전이었다
포일리에서 가까운동네에 내손리가 있었고
교통편이 나빠서 출퇴근시 회사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밤늦게올때는 사당에서 총알택시를
탔다 안양시내의큰병원과. 과천대형백화점에어
운영하는 버스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집에서
이십분걸어서 큰길가에서 버스를 탔다
그리고 시흥시에 있는 공장을 다니기위해
안양에서 가까운 시흥동으로 이사를 갔다
시흥동한가운데를 지나는 큰도로가 있었다
광명쪽으로는 아파트단지가 있었고 그반대길에는
성당과 여러골목으로 이어지는 연립과
단독주택 그리고 재래시장이 있었고
언덕을 오르면 피난민촌으로 생각할만한
달동네가 있었다 그곳은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고 골목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세운상가에서 만난 형벌되는분이
안양에서 살다가 달동네로 이사를 돕다가
실정을 알게되었지요 그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도시락을 쌀수가 없어서 점심을
굶는이가 절반쯤되었다고한다 그길로
가는곳에 의원과 복지시설이 있었는데
가난한이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되었다
그곳에서도 구역모임을 하였는데 집이
작아서 뒤산에 모여서 집에서 각자 준비한
음식으로 하였는데 다들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여름이면 조금만 올라가면 개울
물이 흘러 주일미사후 그곳에서 발을 담구기도
하였다 내려오다 다소나은 연립으로가서 간식을
얻어먹고 낮잠을 자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여유가 있고
풍요로왔다. 세월이 흘러 시흥동과 좀떨어진
신림칠동 난곡에서의 달동네는 재개발로
사라지고 그곳에 살았던 가정들은 흩어졌다
그들이 머물면서 지냈던것은 분명
아나윔정신의 힘으로 지탱했었다
그들은 금융대란이전에도 그렇게 살았고
성당에서 주일행사가 있을때마다
그곳 자매들이 성당에 일찍와서 겆절이를
만들고 육수를 내고 다른사람들이 교중미사를
드릴때. 국수를 삶고 전교우를 대접하고
그리고 됫정리며 설겆이후 오후 세시가
넘어서 뿌듯한마음으로 돌아갔다
잊지못할 시절이었다. 그러나 금융대란은
이를 멈추게하고 흩어지게 하였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연락을 주고받을뿐이다
아멘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말씀에 따른. 아나윔살기
권순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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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7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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