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바다를 못본 사람들이 있다니?
태생이 산골 출신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해는 산위에서 떠올라서
산 넘으로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십대 후반 바닷가의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놀라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 결혼을 한 뒤
처갓집에서 또 한번 생경스러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해가 땅에서 올라와 땅 밑으로 사라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목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산골 촌뜨기 출신으로서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이후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함에
있어서 가지는 기준은, 본질인가? 방법의 문제인가를 염두에 두는 편입니다.
동시에 연약한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라는 틀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에 몽골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선교 활동을 하면서 현지어를 습득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답니다.
한번은 어학 선생님께서 과제를 주었는데 자신의 모국을 몽골어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서툰 실력으로,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으며 서해안은 갯벌이 있으며, 갯벌은 바다의 심장같은 역활을 한다고
설명했다 합니다.
익숙치 않는 언어를 열심히 암송하여 발제를 하는데 듣는 교수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지며 좋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윽고 발제를 마치자
지도하시는 분이 화를 내면서 학생들 앞에서 면박을 주더랍니다.
“여러분 조금 모자라더라도 자신이 직접 준비하고 발제해야지
미스터 j처럼 표절하면 못쓴다”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니라며 자신이 직접 쓴 원고이라 했더니 지도 교수 왈,
깊고 넓은 바다라는 말과 갯벌이라는 표현은 고급언어이며,
자신도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납득을 시켜보라 하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지역의 몽골인들은 평생 바다를 구경하지 못한이들이라 합니다.
그러니 깊고 넓은 바다라는 개념과 진흙 속에 빠진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재간이 없는 것이지요.
조금은 웃픈 에피소드를 들으며 이것은 기독신앙에도 동일하겠다 싶었습니다.
기독신앙을 일컬어 부활신앙, 또는 부활의 종교라 합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부활은 재생이나 재활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생명의 단절 상태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신비 사건입니다.
또한 부활은 우리네 인간들 입장에서는 놀라운 사건이지만,
호흡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일상이며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후
무덤입구를 돌로 막고서 군병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무덤을 굳게 지키는 것이
임무였고 소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8장 1-2절은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마28:1-2)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이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여 힘껏 무덤 입구를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하늘로부터 내려 보내시자 힘껏 막았고,
힘껏 지켰던 돌이 굴려짐 당했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 사건은 전적타자(全的他者)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힘껏 노력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면 인간의 수고와 계획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굳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역린(逆鱗)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순간순간 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닌 일부일 수 있음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유연하고도 열린 생각과 사고(思考)의 틀을 가질 수 있는 자만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와 자연의 섭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욥기 39장 참조)
그러기에 귀로만 듣는 신앙을 넘어서 눈으로 주님의 뵙게 되는
은혜를 경험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5, 새번역 성경)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