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키8 - 데살로니키 성채를 걸어 내려오면서 그리스정교회를 구경하다!
어제 2024년 5월 4일 칼람바카에서 데살로니키 Thessaloniki 에 도착해 호텔에 배낭을
넣고는 걸어서 로만 포룸 Roman Forum 과 로톤다 (Rotonda), 갈레리우스
개선문과 레스고스 피르고스에 Ote Tower 및 알렉산드로스 3세 기마상을 보았습니다.
5월 5일 호텔 주인에게 물으니 Acropolis Walls (Byzantine City Walls) 성채로
가는 버스는아리스토텔레스 광장 Aristotelous Square 에서 출발
한다기에 걸어서 해변에 있는 광장으로 가서 24번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오릅니다.
비잔틴 성벽 Acropolis Walls (Byzantine City Walls) 는 데살로니키의 언덕 위 아노폴리
지역에 있으니 비잔틴 성벽(Τείχη της Θεσσαλονίκης)
이라 하는데 비잔틴 성벽은 4세기 경에 지어졌으니 현재는 남문이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성벽에서 가장 높은 곳은 트리고니온 타워 Trigonion(Chain) Tower) 인데 오스만 제국
시절인 15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이며 성문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왼쪽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잇는데 여기서 내려다 보는 시내와 바다 전망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그러고는 주택가 언덕 골목길을 한참 걸어 내려오다가 이슬람 사원을 보는데.... 과거 오스만 투르크
가 그리스를 지배할때 유적으로, 이교도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고 있는게 매우 특이합니다.
우린 남산 신궁은 말할것도 없고 중앙청 건물도 허물어버렸는데 400년 식민통치 원한이 맺혔는데도 보존
하다니? 그러고는 아야 소피아 Hagia Sophia 를 보기 위해 동쪽에 Al Svolou 거리로 찾아갑니다.
아야 소피아 (Αγία Σοφία, Hagia Sophia) 는 그리스 고대어로 '하기아 소피아' 라고 발음
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성당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아야 소피아 자리에는 일찌기 3세기 부터 교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아야
소피아가 건축된 시기는 8세기로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 에 있는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 성당) 를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당은 건축 이후 한동안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이스탄불
의 아야 소피아 처럼 성당 밖에 미나렛을 하나 세워서는 모스크로 개조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에 데살로니카가 400년간의 오스만 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나
그리스에 편입되면서 원래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7년의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고 성당의 돔은 1980년에 복구되었다고 하는데
그리스 정교가 국교이기 때문에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성당은
그리스 정교 소속이니.... 데살로니키에는 모두 15개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있다고 합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입구에 전시된 예수님 성화 (이콘 εἰκών, icon) 는 진본인지 알 수 없으나 14세기에
제작된 것이며 또 긴 회랑을 이루며 늘어선 여러 개의 그리스식 원기둥들은 5세기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당 안에는 최소 수백 년에서 천 년에 이르는 여러 성화와 모자이크화
가 있는데...... 성당을 건축하던 당시에는 종교와 관련한 인물을
그림 등으로 묘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별, 십자가, 문자로 표현했다고 하네요?
10m 높이의 돔에 있는 모자이크화는 9세기 것으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원을 따라 어머니 마리아와 열두 사도가 묘사돼 있는걸 봅니다.
여기 아야 소피아 광장(Πλατεία Αγίας Σοφίας, Agia Sofia Square) 근처에 성모 마리아
성당(Ιερός Ναός Παναγίας Αχειροποιήτου , Church of the Virgin
Mary Acheiropoietos(5th c.) 으로 불리는 아헤이로포이에토스 성당 도 있다고 하지만....
오늘 성채와 교회를 보았으니 그리스 역사가 떠오르는데.... 그리스 혼전 상황 속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니, 기원전 359년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나라의 발전을 급속히 성장시키자.... 아테네는 주위의 도시국가
들과 연합군을 만들어 도전했으나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싸움에서 필리포스에게 격파됩니다.
승리를 거둔 필리포스 왕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제 도시국가들을 소집하여 코린토스동맹(헬라스동맹)
을 맺으니 그리스 세계는 비로소‘통일’ 을 이루게 되는데 이 동맹의 조약은 각 폴리스
의 자유와 자치를 인정하며, 폴리스 간의 평화유지, 정치체계의 현상 고정화를 내용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보복 전쟁도 결의가 되엇지만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2세가 암살되고, 아들
알렉산더 3세는 왕위를 이어 받으며 아버지의 유지-동방을 정벌하여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을 해방시키는 것과 페르시아에 보복하는 것-도 계승할 것을 약속합니다.
기원전 322년 아직도 젊은 나이인 대왕이 병으로 급서하니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열되었고 그리스 본토의 역사는 또 다시 제 왕국간의 힘 겨루기로 뒤죽박죽이 되고,
때마침 밀어 닥친 로마의 침략에 각 도시국가들은 주체적으로 행사할 만한 힘을 상실하고 맙니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은 코린토스를 쳐부수고 속주로 만드는데 기원전 31년에는 로마에 옥타비아누스
정권이 성립되고, 기원전 27년에 그리스는 로마의 속주 아카이아로 되니 수도는 코린토스입니다.
로마 지배하에 속주가 된 그리스는 문화적 면에서는 아테네가 중심인데 로마 아래서 평화를 누렸으며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졌고 32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비잔틴 제국시대
가 열렸는데...... 로마 황제 유수타니아누스 시대 (527년~565년) 에 본격적으로 비잔틴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는 제국의 영토를 서쪽의 스페인에서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흑해에서
부터 남쪽은 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까지 넓혔으니.....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비잔틴 교회 건축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완성시킵니다.
6세기에서 7세기 무렵에는 북쪽 지방에서 아바르인과 슬라브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내려와 펠레폰네소스 반도
에 정착하며, 810년경 크리티섬은 아랍인들에게 점령되었고 915년에서 924년에는 부르군도인(나중에
불가리아인)들이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그리스를 침입해 지배하는등.... 거센 이민족의 침입과 싸움
을 겪으면서도 제국은 절정기를 맞으니 867년 부터 1056년 까지 이어진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시대 입니다.
11세기로 들어오면서 붕괴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니 제1의 원인은 경제의 피폐로 마케도니아 왕조
후기 황제들은 경쟁하듯 자신들의 치세를 기념하는 건조물에 기금을 탕진했으며 두번째는
권력투쟁이 계속되어 그 결과 제국이 자랑하던 사회구조가 서서히 변질되어 간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는 제국의 중심의 상업 활동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서로마 측의 힘이 증대해 간 것입니다.
그리스 정교나 서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교와의 사이 의식 습관의 차이, 신학상의 해석 문제들로 해서
동, 서 교회의 분리 경향은 진작부터 드러나 있었으니... 양 교회 사이의 분쟁은 정치적인 문제에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적지않은 불이익을 감수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교의 동, 서 분리는 1054년), 이 사이에
아나톨리아 북서부에서 오스만 국가가 생겨나 이 군대가 아시아를 휩쓸었는데 1356년 유럽대륙에 상륙합니다.
오스만의 세력은 1387년에는 유럽 대륙으로 번지니 이 도시 데살로니키가 침략자의 수중에
떨어지고...... 축소 일로로 걷던 비잔틴 제국은 서방의 원조 없인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지킬 수 없게 되자 형식적으로나마 동, 서 교회의 통일을 꾀하며 대항합니다.
그러나 1453년 술탄 마호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아테네도 1458년에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1503년에는
그리스 전역이 완전히 오스만 제국의 주로 되며 1577년에는 키프러스 섬도 오스만 수중에 들어갑니다.
투르크(터키)의 그리스 민족 지배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부터 1821년의 ‘반란’ 이 있기까지 400년간
지속되었으니 오늘날도 ‘터키의 멍에’ 라고 말해지는데, 1700년 까지 그리스인의 인구가 4분의
1이나 감소했다는 사실은 오스만 제국의 압정이 얼마나 극심했던 가를 잘 알게 해주며
18세기 전반 까지 그리스인들은 토지를 갖지 못한 소작농민이거나 노예의 신분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슬람교 터키인은 그리스어로 교육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터키어를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정교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으면서 민족적인
자존을 지켜나갔으니 교회 지하에서는 밤이면 ‘비밀학교’ 를 열어 그리스어와 민족정신을 전수했습니다.
1669년에는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있던 크리티(크레타) 섬도 수십년간 전쟁으로 터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러나 이오니아 해의 7개 섬만은 유럽 제국과의 충돌 우려 때문에 터키 지배권에서 벗어납니다.
18세기 그리스는 농업경제였는데 유럽 제국이 공업제품의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그리스에도 손을
뻗쳐 유럽 각지에서 상인들이 찾아 들면서 그리스의 농산물들도 활발히 팔려나가게 되고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 유럽과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데살로니키, 이오안니아,
라리사, 이드라 섬 등의 지역들이 번창하게 되니 이 교역에서 돈을 벌어들인 것은 그리스 상인들이었습니다.
터키인들은 수세에만 관심을 갖고 상업이나 무역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활발해진
상업 활동으로 그리스 상인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데 되며, 그리스 상선의 수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의 50년 사이에 눈에 띄게 증가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그리스인들의 경제력이 부강해지자
그때까지 토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도가 흔들리면서 터키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균열이 심화되어 갑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싸움이 반복되니..... 1768년~1774년,
1787년~1792년의 러시아, 터키 전쟁 무렵에 그리스인의 해방을
원하는 욕구는 반란이 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로 확산됩니다. (1770년부터 1774년).
그 결과 그리스의 상선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 러시아 국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면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의 사상이 그리스에까지 파급되어 해방 기운이 고조되어 간다.
이런저런 회상을 접고 이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베뢰아
(Veria) 로 가서는 "바울 강단" 을 찾아 바울의 선교 유적을 돌아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