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편집자말] |
1988년처럼 세상이 어수선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6월항쟁으로 가능해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세력이 분열하여 노태우가 당선된 것이 그 전해였다. 그리고 치른 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효과를 본다. 지식인들은 저마다 깊은 내상을 입고 자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어떤 이야기도 재미가 없으니 다들 새해가 되어도 해돋이를 보고 싶지 않다던 참인데, 문익환 목사는 딱 그럴 때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새해 첫날 꼭두새벽부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시낭송을 했다는 소문이 금세 우리들에게도 닿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이 시는 제목부터가 <잠꼬대 아닌 잠꼬대>였다. 다들 문 목사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유쾌한 상상'이라며 새 시의 탄생을 축하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3월 25일 '문 목사 평양 도착'이라는 뒤집어질 만한 보도가 나왔다. 온 나라가 경악했다.
▲ 하나됨을 위하여 문익환 방북을 모티브로 한 작품, 임옥상의 '하나됨을 위하여' | |
ⓒ 임옥상 |
정부는 이 방북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김일성의 대남 분열책동에 놀아난 사건'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처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한반도는 때 아닌 논쟁에 휩싸였다.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고 거품을 무는 공안 당국 말고도, 통일을 앞당길 거라는 환영 입장과 모험주의라는 비판 입장이 맞섰다. 그런 가운데, 문익환은 본인의 방식대로 평양 일정을 수행했다.
문익환은 분단 후 처음으로 북한의 주석 김일성과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에 대한 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이 훗날 김대중과 김정일 간에 맺어진 '6.15선언'의 토대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4.2남북공동성명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과 문익환 목사가 체결한 4.2남북공동성명. | |
ⓒ 사단법인 통일의 집 |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
문익환은 평소 통일이야말로 민족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실마리라고 믿고 있었다. 1970년대 말부터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부터 '선 민주 대 선 통일'의 논쟁에서도 문익환은 민주와 통일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익환은 분단을 이용해 독재 권력을 유지시키고, 또다시 독재 권력이 통일을 가로 막는 고착된 상황을 깨고 싶었다.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민주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고 목숨을 끊는 일에 마음 아팠다.
마침 독일이 통일되고 미-소 냉전구도가 깨지기 시작했다. 남북이 한 목소리로 주장을 말해야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북의 진의를 타진하여 미-소 냉전이 만든 한반도의 분단을 해소하고, 아시아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문익환은 방북의 길에 올랐다.
▲ 봉수교회에서 문익환 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 | |
ⓒ 사단법인 통일의 집 |
1989년 3월 25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북한의 부총리 정준기, 여연구 등이 영접을 나왔고, 문익환은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려고 왔다. 어느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습니다"는 뜻을 밝혔다.
다음 날 아침 10시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한 문익환은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믿는 제가 통일을 위해 평양에 와서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라고 인사하고,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뜨겁게 불렀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분단 40여 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있던 북쪽 국가원수와 남쪽의 재야 운동가가 서로 부둥켜 안았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입니다."
문익환의 첫 마디에, 김 주석도 흔쾌히 화답했다.
▲ 겨레말사전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 |
ⓒ 사단법인 통일의 집 |
회담에서 문익환은 구체적인 제안들을 내놓았다.
첫째, 국제체육대회에서 공동으로 쓸 '남북공동응원가를 만들자.
둘째, 남북공동국어사전을 만들자.
셋째, 이산가족 교류.
넷째, 남쪽 출판도서를 팔 서점을 북쪽에 열자.
앞에 세 가지 의견에는 찬성을 받았지만 마지막 제안은 긍정도 부정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문익환은 평양 방문 성과를 널리 알리고 활발한 통일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랐다. 북쪽을 설득하여 이룬 합의가 당국 간 회담의 기초가 되었으면 했다. 게다가 북의 국가원수와 통일 논의를 한 당사자가 구속되면 북에서 모욕감을 느껴 남북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귀국하는 길에 북경과 도쿄에서 기자회견과 보고대회를 열었다.
72세 감옥수의 통일
문익환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체포됐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다섯 번째 구속이었다. 가족과 친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시민단체가 준비한 방북보고대회나 정부와 국회 보고도 갈 수 없었다. 문익환은 재판을 보고대회로 이용하기로 했다. 모두 진술과 상고 이유서에 자신의 소개부터 방북 경위, 세세한 일정과 자신의 심정까지 자세히 적었다.
재판정에서는 법관들과 논쟁을 벌였다.
"아까 검사가 '북괴'라고 하는데 우리 대통령이 김 주석을 만날 때, '당신 북괴 수령이오?' 할 수 있겠습니까? 한입으로는 북괴, 한입으로는 민족공동체. 정부의 정신분열증은 전 국민에게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적용된 보안법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그래 내가 고무, 찬양했다. 남북통일을 하려면 서로 고무, 찬양해야지 서로 욕하고 비난하면 통일이 되겠나? 결혼을 앞둔 남녀가 서로 칭찬해야지 서로 욕하면 되겠느냐!"며 "고무찬양이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은 재판정에서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아들은 72살요, 나는 92살이오. 익환아!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으라! 문 목사가 김일성을 안아줬다고 뭐라 하는데, 여보시오, 문 목사가 아니면 김일성을 안아줄 사람이 없어요!"
▲ 호송되는 문익환 오랏줄에 묶인 통일염원, 방북 재판에서 10년형이 선고된 문익환이 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경찰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이송했고, 이를 AFP통신 김철한 기자가 단독으로 포착했다(기증사진). | |
ⓒ 사단법인 통일의 집 |
감옥 생활을 잘 견디던 문익환도 이번만은 심하게 아팠다. <마지막 시>까지 썼다. 문익환의 병원 치료를 위한 운동으로 1990년 1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진단을 받았다. 허혈성 심장질환, 그러나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했다.
"통일은 다 됐어"
문익환이 방북 후, 항상 "통일은 다 됐어"라고 했다. 문익환은 정부가 못하는 일은 '민의 힘'으로 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정부가 통일논의를 독점하지 말고, 국민의 통일운동을 북돋아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통일운동이 확산되고, 민족이 하나가 되면 통일은 다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익환의 방북은 북쪽 동포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어떤 사람이기에 자신들의 위대한 수령님을 그리도 당당하게 대하는 것일까?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목사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후에 방북했던 목사들이 고마워했다. 문익환이 번역한 신·구교 공동성경을 자신들의 어휘로 바꿔 사용하기도 했다. 북에 선교도 한 셈이다.
이처럼 문익환은 국가와 제도, 사상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에 쌓아놓은 굳건한 장벽도 뛰어넘어 통일을 이끌어 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잠꼬대 같은 걸음으로 평화와 통일에 다가선 것이다. 그의 위대한 한 걸음은 길이 되고, 표지석이 되었다. 이제 그가 걸은 길을 따라, 심어놓은 표지석을 따라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걸었으면 한다.
▲ 북한의 손님과 박용길 북한에서 온 손님이 통일의 집을 방문해 박용길 장로에게 위문품을 전달하는 모습. | |
ⓒ 사단법인 통일의 집 |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문익환 -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 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 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년 첫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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