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水滸傳•제 221편
왕경은 영중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안채 뒤쪽으로 돌아가 담을 기어 넘어갔다. 조용히 뒷문 빗장을 열고 한쪽 구석에 숨었다.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보니, 담장 안쪽 동편에 마구간이 있고, 서편에는 작은 집이 하나 있는데 측간이었다.
왕경은 마구간의 나무 울타리를 뜯어내 중문 담장에 기대놓고, 그걸 타고 담장을 기어 올라갔다. 담장 위에서 울타리를 끌어올려 안쪽으로 기대놓고 가만히 밑으로 내려왔다. 먼저 중문의 빗장을 열어놓고 울타리를 치워 놓았다.
안쪽에 또 담장이 있었는데, 담장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왕경은 담장 가까이 다가가서 바닥에 엎드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었다. 장세개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한 여인과 다른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안에서 술을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
왕경이 한동안 몰래 엿듣고 있었는데, 홀연 장세개의 말이 들렸다.
“처남! 그놈이 내일 와서 보고하면, 그놈 목숨도 몽둥이 아래에서 끝장날 걸세.”
남자가 말했다.
“그놈이 가진 돈도 이제 거의 다 써 버렸을 겁니다. 매형께서 이제 결단을 내리셔서, 이 좆같은 기분을 풀어 주십시오.”
장세개가 대답했다.
“이제 내일 모레면, 자네 기분이 통쾌해질 걸세!”
여인이 말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잖아! 넌 이제 그만 둬라!”
남자가 말했다.
“누님은 그게 무슨 말씀이오? 누님은 상관하지 마시오!”
왕경은 담장 밖에서 세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서 분명히 알게 되자,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3천 길이나 치솟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금강역사 같은 신력(神力)을 발휘하여 담장을 부수고 뛰어 들어가 모조리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왕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때 장세개가 큰소리로 하는 말이 들렸다.
“얘야! 측간에 가게 등불을 밝혀라!”
왕경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비수를 뽑아 들고 매화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고 있었다. 안에서 ‘삐익’ 하는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왕경이 어둠 속에서 보니 심부름 하던 아이가 등롱을 들고 앞서고, 뒤에 장세개가 팔자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걸어가다가, 중문에 이르러 아이를 꾸짖었다.
“이 조심성 없는 종놈아! 어째서 저녁에 빗장을 지르지 않았단 말이냐?”
아이가 문을 열자, 장세개는 중문을 나갔다. 왕경은 살그머니 그 뒤를 따라갔다. 장세개는 뒤에서 오는 발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왕경은 오른손으로 비수를 빼들고 왼손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채 장세개에게 덤벼들었다. 순간 장세개는 오장육부가 모두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도둑이야!”
하지만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경의 칼이 귀밑으로 들어와 목을 베어 버렸다. 장세개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는 비록 평소에 왕경과 친하기는 했지만, 왕경의 손에 번쩍번쩍 빛나는 비수를 들려 있고 눈앞에서 흉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 발이 땅에 못 박힌 듯 꼼짝 할 수가 없었고,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마치 벙어리가 된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놀라서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장세개는 살아 보려고 버둥거렸는데, 왕경이 달려들어 등에 깊숙이 비수를 찔러 넣어 끝장을 내버리고 말았다. 방원은 방안에서 누나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등불도 켜지 않고 급히 뛰어 나왔다. 왕경은 방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등롱을 든 아이를 발로 걷어찼다. 아이가 등롱을 든 채로 넘어지면서 등롱이 꺼져 버렸다. 방원은 장세개가 아이를 때리는 줄 알고 소리쳤다.
“매형! 아이는 왜 때리시오?”
그리고는 말리려고 앞으로 오는데, 왕경이 어둠 속에서 달려들어 방원의 옆구리를 비수로 찔렀다. 방원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넘어졌다. 왕경은 넘어진 방원의 머리털 붙잡고 한칼에 목을 잘라 버렸다.
방씨는 바깥에서 흉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급히 하녀를 불러 등불을 들려 함께 밖으로 나왔다. 왕경은 방씨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왕경이 눈을 돌려 보니, 방씨의 등 뒤에 10여 명의 하인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왕경은 황급히 손발을 멈추고 몸을 돌려 뒷문을 열고 달려가 뒷담을 뛰어넘었다. 피 묻은 옷을 벗어 버리고 비수를 깨끗이 닦은 다음 몸에 감추었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왕경은 거리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성벽 아래까지 당도했다. 섬주의 토성은 별로 높지도 않고 해자도 그리 깊지 않아, 왕경은 성벽을 넘어 달아났다.
한편, 장세개의 첩 방씨는 단지 등불을 든 두 하녀와 함께 나왔을 뿐, 원래 아무도 따라나온 사람이 없었다. 방씨가 나와 보니, 동생 방원의 머리가 피를 흘리면서 한쪽에 떨어져 있고 몸은 다른 한쪽에 있었다. 깜짝 놀란 방씨와 하녀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두 개골을 갈라서 얼음물 한 통을 쏟아 부은 것처럼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벌벌 떨고 있던 방씨와 두 하녀가 허둥지둥 집안으로 달려가면서 소리를 지르자, 집안에서는 하인들이 바깥에서는 당직을 서던 군졸들이 횃불과 무기를 들고 뒷마당으로 달려왔다. 중문 밖에 장관영이 죽어 넘어져 있고, 아이가 쓰러져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뒷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도둑이 집 뒤로 들어온 것 같았다. 모두 뒷문 밖으로 나가서 불을 비춰 보니, 땅바닥에 비단 두 필이 버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왕경이 한 짓이라 짐작하고, 죄수들을 점검해 보니 왕경만 없었다.
영내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주변의 이웃들도 모두 나와서 찾아보니, 뒷담 밖에 피 묻은 옷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왕경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상의하여, 성문을 열기 전에 부윤에게 달려가 알리고 급히 수색을 시작했다.
부윤은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속히 현위를 보내 죽은 사람을 검사하고 범인이 드나든 곳을 알아보게 하였다. 사람을 보내 네 성문을 굳게 닫게 하고, 군병들과 포졸들 그리고 마을 이장들을 모두 내보내 집집마다 수색하여 범인 왕경을 체포하게 하였다. 하지만 성문을 닫고 이틀 동안 소란을 피우면서 집집마다 다 뒤졌지만 끝내 왕경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부윤은 공문을 각처로 보내 집집마다 수색하여 범인을 잡으라고 하고, 왕경의 고향·나이·용모·복장 등을 상세히 적고 그림까지 그린 방을 내걸었다. 왕경이 있는 곳을 알리는 자에게는 상금 1천관을 줄 것이며, 만약 범인을 숨겨 숙식을 제공하는 자는 범인과 동일한 죄를 물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왕경은 그날 밤 섬주성을 넘어간 다음 옷을 걷어붙이고 해자의 얕은 곳을 골라 건너서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비록 탈출하여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제 어디로 가서 몸을 피할 것인가?”
때는 한겨울이 다가올 때여서, 나뭇잎도 모두 떨어지고 풀도 말라 버려서 별빛 아래에서도 길은 잘 보였다. 왕경은 그날 밤 서너 개의 소로를 지나 마침내 대로로 나가 황급히 내달렸다. 붉은 해가 떠올랐을 때에는 성에서부터 약 6~70리 멀어져 있었다.
남쪽을 향해 가다 보니, 앞에 인가가 조밀한 마을이 나타났다. 왕경은 자신에게 아직 1관의 돈이 남아 있음을 생각하고, 일단 마을에 들어가서 술과 음식을 사먹은 다음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잠시 후 마을에 당도했는데,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주점들이 문을 열지 않았는데 동쪽 거리의 한 집 처마 밑에 객점임을 알리는 등롱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에 문을 닫지 않은 탓인지 문도 반쯤 열려 있었다.
왕경이 그 집으로 가서 ‘끼익’ 소리를 내면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아직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은 한 사람이 안에서 나왔다. 왕경이 보니, 이종사촌인 원장(院長) 범전이었다. 그는 어릴 적에 왕경의 부친을 따라 방주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그곳에서 양원(兩院)의 압뢰절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