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의 언어의식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문제다. 요즘 우리는 세계 곳곳을 어디나 쉽게 오갈 수 있지만, 언어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내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외국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대개의 사람들이 느끼는 긴장감의 원인 가운데 큰 것 하나가 바로 언어문제다. 특히 장기간 동안 외국에 머물면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어라는 것이 중요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곤 한다. 동포들끼리 지낼 때는 언어란 것이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고 그냥 편하게 말하며 지내는데, 외국사람과 대할 때가 되면 갑자기 언어란 것이 부담스러운 존재로서 그 낯선 얼굴을 들어내고 만다. 날이 갈수록 외국사람과 부딪쳐야 하는 기회는 많아지고, 그들과 뒤섞이며 헤쳐가야 할 일들은 많아지는데 언어는 욕심만큼 쉽게 구사할 수가 없다. 왜 모국어 하나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말하며 살수가 없는 것인가? 도대체 언어란 무엇이기에 옛날부터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다른 얼굴을 하는 것인가? 내 나라 말 배울 때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저절로 되더니 외국어를 배울 때는 한 가지를 배울 때마다 왜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인가? 도대체 몇 개의 언어를 배워야 세계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일까? 영어 하나라도 시원하게 잘 하는 방법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인가? 이런 모든 물음들을 던지다 보면 결국 언어에 대한 큰 명제 앞에서 망연한 심정으로 이렇게 자문하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적응해 가야 할 것인가?
세계에는 약 6천여 가지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사라져 가고 있는 언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경우로서 극지대의 사람들이 쓰는 에스키모 언어와 열대 밀림지대의 야생인 언어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 빠른 속도로 소멸하는 과정에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토착어 가운데 하나인 ‘에약’이라는 언어는 현재 마리 스미스라는 이름의 83세 먹은 여자 한 사람이 유일한 사용자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에약어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옛날부터 고유한 언어를 쓰며 자기들끼리 살아가던 에스키모인들이 강대국 사람들에게 점령되어 주류사회에 동화됨으로써 토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급속히 줄어들고 끝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존 밀림지대 야생인의 언어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카푸어’도 그런 운명을 맞고 있다. 아리카푸어 사용자는 현재 여섯 명이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한 언어가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어 존속하려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사용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이 지상에는 10만 이하의 사용 인구를 가진 언어가 상당히 많다. 사용자 2500명 이하인 언어의 수가 3천이 넘는다. 그런 언어들은 그냥 두어도 서서히 또는 급속히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는 설령 수십만의 인구를 가진 언어라도 다른 영향력 있는 언어와의 경쟁에서 공용어의 지위를 빼앗기면 소멸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렇게 소수 언어의 소멸과 통합 현상이 꾸준히 진행되다 보면 마침내 지구상에는 몇 개의 언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 지 궁금해진다. 특히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어와 같은 강력한 세계어가 등장하여 만국의 공용어처럼 사용되어 가는 추세에서는 소수언어의 소멸과 통합이 더 심화될 수 있다.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을 분석해 본 일부 미래학자들은 21세기말이 되면 현존 언어의 2/3 이상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50여 개의 언어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모든 언어가 영어에 통합 될 것이라는 극단적 예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저런 추측과 주장들 가운데는 매우 타당한 것도 있고, 때로는 허무맹랑한 것도 있다. 그런데 아무튼 수십만 명 이상의 인구를 유지하는 언어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또한 그런 정도 이상의 규모를 가진 언어가 지상에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언어는 어렵게 통합되고 나더라도 다시 분열의 길을 걷곤 한다. 옛날 로마제국시대의 유럽에서 라틴어로 통합되다가 다시 분열되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의 여러 갈래 언어가 생겨났듯이, 오늘날 영어권으로 통합된 곳에서는 다시 미국영어, 영국영어, 호주영어 등이 서서히 갈라져 가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이들이 아주 다른 언어로 분리될 수 있다. 언어의 소멸과 통합이 활발히 이루어지더라도 결국 상당수의 상이한 언어들이 이 세상에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아무리 세계화와 같은 추세가 지속되고 시간이 흘러도 세계인들에게 언어소통의 어려움이 완전히 해소되는 날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를 동시에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기술의 발달과 함께 통역-번역의 기기가 정밀화하면 웬만한 외국어 소통의 문제는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이어폰 같은 것을 끼고 다니면 외국인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모국어로 옮겨져 들리기도 하고, 외국어 문서를 번역기에 넣으면 바로 모국어 문장으로 출력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이 모든 언어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문제는 인류에게 하나의 숙명처럼 영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원죄 같은 것이 인간의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완전한 의사소통을 누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프로그램을 짜 놓은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미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언어 문제를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할까? 우선 세계화라는 흐름이 만들어 내는 언어 환경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언어자체의 생리를 잘 깨달아 그에 맞게 대처하는 일이 필요하다.
세계화라는 말은 원래 서양인들이 먼저 쓰기 시작한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굳어진 것이다. 영어로 하면 ‘Globalization’이다. ‘지구화’라고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구의 중심에는 강대국들이 각축하고 있다. G7, G8, OECD국가 등이 그들이다. 요즘 말하는 세계화란 결국 돌려서 말하면 강대국 중심의 지구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대국 가운데서도 가장 큰 힘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렇게 강대국 또는 미국 중심의 흐름에서 지구가 한 덩어리로 뒤섞이며 접촉과 교류가 활발해지다 보니 자연히 지구의 중심국가들 특히 미국에서 쓰는 언어의 중요성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인터넷의 무대를 장악한 영어의 위력은 더욱 커졌다. 또 잠재적인 변수로서 중국어의 존재가 관심을 끌고 있다. 지구상에서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구가 5억 정도인데 중국어는 사용자는 10억이나 된다. 또한 중국의 경제력이 꾸준히 성장함에 따라 세계무대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그 만큼 커지고 중국어의 중요성도 나날이 증대하고 있다. 그리고 유럽연합이 조금씩 결속력을 갖춰가면서 유럽의 대표언어들이 다시 세계무대에서 영향력을 되찾아 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격동하는 지구촌 분위기 속에서 가장 큰 관심이 되는 언어 문제는 영어를 비롯한 주요 외국어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소화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영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때로는 모국어에 대한 애정까지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국에서도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람으로서 가장 합리적으로 세계인의 요건을 갖추는 길은 어떤 것인가? 지금의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잘 하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한두 가지 주요 외국어의 능력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길인가? 많은 사람들이 앞 뒤 살피지 않고 영어공부에 뛰어드는 현상을 많이 본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기 쉽다. 언어라는 것은 조급히 몰아 부친다고 하루아침에 원하는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정립된 언어의식과 학습법을 갖추어 꾸준히 노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외국어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국어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국어도 뒷전으로 하고 영어 몇 마디 더 익히는 데에만 안간힘을 쏟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뇌는 어린 시절에 습득한 제1 언어의 구조에 따라 지능을 구성하기 때문에 모국어가 서툴거나 불안정하면 그 다음에 배우는 제2, 제3의 언어는 언제나 그 영향을 받게 된다. 여러 가지 언어를 어설프게 많이 배우는 것보다는 먼저 한 가지를 확실히 갖추면서 다른 것들을 단계적으로 추가해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국내의 조기영어학습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모든 언어는 어린 나이에 익히면 그 능률이 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조기외국어 교육은 자칫 외국어학습의 효과도 제대로 얻지 못하면서 오히려 모국어 능력을 한 참 갖출 나이의 어린이들에게 지적 성장의 교란만 일으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외국체류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언어를 동시에 습득하는 다중언어 사용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후유증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소한 하나의 언어는 집중적으로 학습과정을 밟아서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 여러 언어를 그냥 막연히 ‘잘 한다’는 정도로 이것저것 배우는 것에 그치면 어느 것도 완전한 언어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되기 쉽고 지적 능력도 한계에 부딪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가 단순히 단어나 문장들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구조 속에는 언어 사용자들의 정신과 문화가 용해된다. 따라서 외국어를 대할 때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문화를 고려해야 하며, 언어가 갖는 구조를 먼저 생각하면서 사용해야 한다. 단편적으로 언어 요소들을 외워서 배우는 외국어 학습은 그 자체의 능률도 떨어지고 세계무대에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의사소통과 교양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언어의식을 바탕으로 문화적 이해와 함께 외국어 능력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