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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생기의 흔들림
-반칠환 시 해설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에 부쳐
황유지
시선의 층위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 감상이란 시적 주체와의 합일(또는 반합일)을 통해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언어의 구조적 세계에 유입되는 일이면서 세계 체험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내면 투사라는 심리적 추체험을 포함하는 행위다. 이러한 경유의 과정에 감상 주체는 모종의 내면 변화를 겪는다. 즉 우리는 어떤 시를 읽을 때 흔들린다. 이런 흔들림은 정도에 따라 미미할 수도, 격랑일 수도 있어서 한 편의 시는 스쳐 지나가 버리기도 하지만 존재의 양상 변화를 추동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삶, 예술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시의 숭고 특히 서정시에서 숭고를 거론하자면,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존재의 내부에 움직임을 일게 하는 시의 양태들이 있기에 그것은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일찍이 빌헬름 슐레겔은 말한 바 있다. 그 정의에서 시적 리듬과 같은 이른바 예술적 손질이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세계를 조우하게 하는 틀임을 알 수 있다.
괴테의 시학에 따를 때 서정시란 열광적 감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성정을 껴안은 형식으로 서사, 드라마 적인 것과의 구분을 통해 경계의 지점을 확보하는데, 그것은 이야기나 몸소 행동하는 방식과 구분되는 내면의 활동에 초점을 둔다. 그러니까 서정시는 시인의 내면이 세계와 만나 일으키는 모종의 변화 형식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때 형식이란 정서적 ‘만남’의 다른 이름이겠다.
이런 설을 풀어놓는 이유는 반칠환의 글에 대한 이해의 지점을 포착하기 위해서인데, 그의 글이 시에 대한 감상이라는 ‘시 이후’에 탄생한 글쓰기이면서 비평이나 서평의 형식과는 또 다른 독특한 ‘시적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視線)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두 층위를 차례로 더듬을 필요가 있다. 먼저는 시선(詩選)의 목록들이고 다음은 그것에 매달아 놓은 해설이라는 시선(視線)이다.
전작 시 해설집(『당신의 짐이 당신의 날개』)에 대해 문정희 시인은 “자유로운 야생의 시각으로 시를 선택”한 바를 짚고, 나태주 시인은 “말을 삼키는 능력”과 “빙산의 몸통을 숨기고 일각만 드러낸 줄 아는 표현의 능청”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평가했는데, 이는 각각 시선(詩選)과 시선(視線)에 대한 주석으로 마침맞다. 반칠환의 시 큐레이팅에 대한 문정희의 “야생”이란 표현은 비단 그 안목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의 선정 기준이 이른바 해당 시인의 경력이나 업력과 같은 기성의 잣대에 얽매이지 않는 대담한 기준에 대한 진취를 가리킨다. 거기에 나태주의 말은 그러한 시 목록을 경유한 해설이 촌철살인과 같은 함축미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 쓰기의 연장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쓰기의 작용을 파생하고야 만다는 것을 간파한다. 그런 면에서 반칠환의 시해설들은 전혀 다른 형식의 시 쓰기 또는 새로운 형식의 해설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시와 해설 사이, 그리고 너머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까지 외계 생명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138억 년째 팽창하는 우주 텅 빈 무생명의 공간 한 모퉁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출현한 생명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가? 하늘을 날거나, 땅을 기거나, 초원을 달리거나, 비탈길을 오르거나, 굴에 숨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적응인가?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면서도 비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은 얼마나 옹졸한 일인가.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시 해설집의 제목이『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인 만큼 신경림의 시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에 대한 반칠환의 해설을 옮겨본다. 아닌게 아니라 이 글에는 이번 시 해설집을 관통하는 그의 주관이 잘 드러나는데, 다른 존재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점, 인간을 긍정하는 마음이 발굴되는 자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적응”하려 애쓰는 데라는 점,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감추지 않고 여실히 꼬집는 바 등은 앞서 거론한 문정희의 말마따나 “야생의 시각”을 확인하게 하는 지점이다. 그는 그러한 생의 아름다움을 마냥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생의 긍정이 번연히 주어지기는커녕 발생, 생과 인간이 교차함으로써 치열하게 생성되는 것임을 말한다. ‘운명애’란 고통인 게 뻔한 생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적극적으로 살아냄으로써 그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그리하겠노라 대차게 답할 수 있을 의지에서 오는 것임을 니체는 말하지 않았나.
밥 대신 소금을 넘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굵은 소금 한 숟갈
입속에 털어 놓고 싶을 때가 있다
쓴맛 좀 봐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손보지 않으면 누가 손보내고
찌그러진 빈 그릇같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내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
내 속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이승이 가혹한가.
소금을 꾸역꾸역 넘길지라도
그러나 아비는 울면 안 된다
-김충규, 「아비」
“해안에 사는 아비는 아비목 아비과 바다새다. 러시아 극동지역과 캄차카반도에서 번식한다. 평생 짜디짠 바다에서 물질을 하여 새끼를 키운다. 잠영의 명수지만 사녕에 실패한 채 수면에 떠올라 숨 고를 때가 더 많다. 겨울을 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는데 멸종위기 등급으로 관심 대상이다. 내륙에 사는 또 다른 아비들은 넥타이를 매거나 작업복을 입고 염전 같은 일터로 출근하는데 가족을 부양하는 모습은 해안의 아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시와 해설을 나란히 놓고 보자. 시해설의 기능은 다양할 텐데, 그중 시의 의미를 확장하며 쓰기라는 감상은 매우 적극적인 읽기, 가장 적극적인 읽기랄 수 있다. 그러한 확장의 중심에 있는 바닷새 아비, 그러나 정작 시의 어디에도 새는 없다. 이런 면이 반칠환 시해설의 독창적 지점을 확보하는 바 들여다보자면. 아비는 종을 초월하여 “멸종 위기”다. 이러한 멸종은 무조건적 희생이 미덕이 되지 않는 시류의 영향도 있겠지만 아비들의 명은 언제나 너무 할딱댄다. 우리는 시에서 겨우 참아내던 숨 고르기를 해설에 이르러 그만 실패할지도 모른다. 바닷새에 중첩되는 아비의 삶은 독자의 내면에서 이제 각자의 아비로 형상화되며 무수한 저마다의 아비로 변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해석 행위에서 텍스트 내부에 명기되지 않더라도 비평의 도구를 끌어와 해석을 확장하는 일은 보편이고 당위적이나 이런 해설의 경우 짝패로서 시를 보완하기까지 하는 것이다(쌍을 이루는 다른 방식도 있다. 이를테면 박기섭의 「봄비」에서는 시가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가 가지런한 면발을 뽑으면, 해설은 구름 반죽을 뭉게뭉게 올리고 무지개떡을 척 거는 식이다). 더해서 미덕은 자기 비하에 가까운 시의 비통을 실패하면서도 다음을 위해 고요히 숨을 고르는 아비로 바꾸어놓는 기술인데, 이런 고달픔을 삼키는 아비의 잠영은 고요와 함께 심경의 바다를 덮어옴으로써 자못 숭고의 미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교환의 순간에 지상의 아비들은 어쩐지 새의 몸을 빌려 좀 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해설로 인해 시에서 바닷새의 부재는 되레 정당성마저 확보하며 묵직한 잠영의 파문을 남긴다.
가진 것 없어도 불안하고
가진 것 많아도 불안한 겨울밤
별안간 개 짖는 소리
누구인가
환한 달전등 비추며
외로움을 훔치러 오시는 이
지아비 첫제사 앞둔
영수네 굴뚝에선
밤 깊도록 연기 피어오르고
가로등 아래 눈발 몰아치듯
외로움이라면 나도 줄 게 있어
개가 다시 짖기를 은근히 기다리네
-조동례, 「달 도둑」
“도둑이라도 여간 오래된 도둑이 아니거늘, 아직도 제 버릇 못 고치고 밤을 틈타 오시네. 종일 부릅떠 만물 지키던 태양이 노을 눈꺼풀 내리자 검푸른 밤하늘 번철에 미끄러지는 노른자처럼 오시네. 한때 강물 속으로 일렁일렁 잠영해 오다가 이태백에게 잡힐 뻔한 저 달이 홍길동처럼 가로등 데리고 오시네. 훔쳐도 아무도 기억 못 할 것만 훔치고 새벽녘에 유유히 사라지더니 오늘은 시작도 전에 들켰네. 훔쳐도 외로움을 훔친다니 주안상 차려놓고 기다리겠네.”
배경은 달이 훤히 뜬 겨울밤 자정 무렵이다. 저세상 손님을 기다리는 영수네가 남편을 보낸 지 일 년째 되는 밤. 평소에는 개가 짖으면 도둑이 들었나 무섭기만 했는데 개 눈에는 우리가 못 보는 게 보인다 하니 오늘은 그 도둑이 남편의 혼인가 싶어 은근히 기다려지는 부인의 마음에 눈시울이 찰랑찰랑하려 한다. 그런데 반칠환의 해설은 기다림을 조금 더 야릇한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주안상을 차려놓고 좀 더 적극적으로 기다려보자는 작심에는 매년 그날 오실 그에게 다시금 생명마저 부여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가 또 한 편의 시로 거듭난 셈이다. 마치 긴긴밤의 허리를 베어내어 연시라도 짓듯 해설은 사후의 애틋함을 여전히 팔딱거리는 애정으로 바꾸고 그 마음마저 초연하게 갖고 논다.
“살금살금 걸어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집. 이중 삼중 자물쇠 걸어도 안심되지 않는 집. 현관문 앞에 전단 놓고 가는 집. 상처 입은 사람이 드나드는 집. 계란판에 무정란들이 꿈 없이 자는 집. 베란다 화분 꽃 장마철에도 말라 죽는 집. 달빛 대신 가로등이 밤새 들어노는 집. 마당도 없고 뒤뜰도 없는 집.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사는 집. 외국어 이름으로 주소 읽기 힘든 집. 큰비 와도 빗소리 들리지 않는 집. 주추도 기둥도 서까래도 없는 집. 화장실에서 담배 연기 올라오는 집. 놀러갈게요, 거기.”
쿵쾅쿵쾅 뛰어도 층간 소음 없는 집
이중 삼중 자물쇠 없어도 되는 집
도리어 누군가 와서 오이 하나 애호막 하나 놓고 가는 집
상처 입은 짐승도 이따금 뒤란에 숨었다 가는 집
딱새가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나는 집
친구 집에서 얻어다 심은 범부채 꽃 피는 집
달빛이 마당 가득 차오르는 집
그런 날 마당에서 박쥐도 보는 집
할머니 할아버지 병 없이 돌아가신 집
단성면 강누(江樓)마을-주소가 예쁜 집
큰비 와도 물 잘 빠져 하루 만에 뽀송뽀송해지는 집
백 년 넘은 주춧돌과 기둥과 서까래와 기와지붕 의젓한데
마루만 맨날 삐걱삐걱 혼자 노래하는 집
-남호섭, 「집」
이렇게 순서를 전도해서도 읽어볼까? 해설이 정확히 시를 뒤집어엎어서 쓴 것이니 순서를 바꾸어 읽어도 무관한데, 순서를 바꾸어 읽더라도 해설이 시의 감상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유쾌한 놀이와 같은 이 해설법은 또 하나의 장르가 된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 개인만의 지면, 단성면 강누 마을의 저 옛집이라는 터는 독자의 것이 아니다. 이에 시에 없는 벽돌과 시멘트로 정반대의 집을 쌓아 올리니 범용적인 집이 지어진다. 어디에나 있는 집은 고유성을 탈각 함으로써 독자의 이입에 적극 기여하는데, 말하자면 먼저 살펴본 「아비」에서의 해설작업을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치환되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집」은 그와 정반대의 양상, 고유명사를 보통 명사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은 굳이 작정한 의도로 양식화되는 것이라기보다 시의 세계와 현실이라는 세태 사이의 균형감을 통해 발현되고 마는 감각적인 것이라 유추할 수 있는데, 설명도 해명도 하지 않는 해설의 방식이 그 증거다.
또 하나 시해설에서 고르게 포착되는 건 그가 시를 대하는 태도이다. 기성의 시인으로서 시를 대하면서도 배움의 태도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은 경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시와 언어의 본령에 대한 궁구를 놓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시와 해설을 예로 가져올 수 있다.
시라는 게 다 뭐꼬?
배추시 아니면 고추시
그럼 아니 아니 호박시
호박시를 한번 심어볼까?
내 평생 시라고는 종자 씨앗으로만 생각했다
호박시를 큰 화분에 심어놓고
매일같이 시가 되어 나오라고 기도를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시는 나오지 않고
싹이 터서 파란 두 잎이 나오더니
줄기가 뻗어나가고 꽃이 피고 호박이 열리더라
아하, 시란 놈은 이렇게 꽃이 피고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거로구나!
-김순이, 「호박시」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가 한글을 갓 배운 어머니가 쓴 작품이다. 선생님이 너무 하셨다. 아직 맞춤법옫 어려운 분께 글쓰기의 꽃, 시를 쓰라고 하셨으니. 벌써부터 시와 씨가 혼동되어 머럿속이 뒤죽박죽이지 않은가? 선생님이 잘 하셨다. 호박시를 호박씨로 알아듣은 어머니가 훌륭한 시를 키워내지 않으셨는가? 시는 배우는 게 아니라 삶에서 꺼내는 거다. 까막눈이지만 시를 살았던 분이 한글을 떼자 곧바로 시인이 되었다.”
이런 지점은 가히 “야생”을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것은 기성 시인의 시와 말하자면 습작시를 나란히 건져 올리는 태도애 그치지 않고 그 시들이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카데미와는 가장 멀고 삶과는 가장 가까운 곳, 생명의 자리임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시와 해설자 사이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며 삶이, 시가 일렁임을 본다. 독자는 그 흔들림에 기꺼이 동조하게 된다.
3. 살아있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다
반칠환 시해설의 공통적인 감각을 한 단어로 일별하라치면, ‘긍정’이다. 삶의 어떠한 양태도 긍정하는 그의 태도는 가히 놀라운데, 그러한 긍정이 응당 누구나 지니게 되는 덕목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삶은 그리 아름답지도 않고 궁색한데다 군색하고 구지레하며 온갖 고통과 환난의 범벅이지 않은가. 개인의 욕망을 해결할 수단으로 타인의 목숨을 베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범죄를 은폐하고 피해자를 조롱한다. 비리를 통한 사적 이익의 축적에 눈이 멀어 국가도 명예도 국민도 ‘노바디’로 만든다. 혐오와 조롱이 어린아이들의 놀이가 되어 시간을 사람을 죽음을 모독하고 강의실에서 가장 열정적인 것은 학생이 아니다. 이러할진대 시선(詩選)을 골라내는 시선(視線)은 무구하리만치 긍정이다. 그건 범박하게 일별하기만 해도 저런 형국인 삶의 형편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들이 선별된 목록임을 다시금 상기할 때 그것은 이토록 지난한 삶을 살아내는 방식, 낱낱의 삶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근거는 이런 것이다. 이 시들이 기거한 자리를 톺아볼 적에 그것은 분명 삶이 가장 핍진하게 나고 자라고 지나온 자리, 이를테면 땅, 바다, 하늘, 새에서부터 쌀과 똥(이안,「벼꽃」)에 이르는가 하면, 이웃집 노인에게 찾아온 사랑(박성우, 「해바라기」)이나, 허전한 뒤통수로 그래도 삼켜보는 국수(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에서 비어져 나오는 것은 분명 삶의 ‘생기’라는 점이다. 신체적 주체로 제시할 때 인간은 ‘창조’와 ‘해석’의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이때 해석이란 해석자의 인식 의지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의미 세계를 구성하고 읽어내는 작업이 아닌가. 그러한 의미에서 말하는 창조란 의욕하는 주체에 의한 세계의 ‘해석’ 활동과 진배없다. 그러한 니체의 철학을 긍정으로 해석할 때 세계와 인간의 존재란 힘에의 의지라는 ‘생기’ 현상이다. 그것은 달리 정의해 해석, 세계에 대한 해석의 욕망이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니체를 건너뛰어 근자의 신유물론에 이르러 다시금 ‘생기’라는 말을 만날 수 있다. 신유물론의 생기에는 저 사물들에 대한 능동적 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즉 다양한 방식으로 물질의 내재적인 힘, 역량, 능력, 행위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외부의 어떤 요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물질들, 스스로 작용하고 변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물질들의 상태가 바로 생기(vitality)다. 생기에 기반할 때 ‘그륵’에는 어머니의 삶이 조심스레 실천하고 옮겨놓은 수평을 찾은 조심스러움이 담기는데, 그것은 비단 어머니를 통해 배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륵’이 가진 성질로서 자체적으로 연마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그륵’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태도와 공명하는 또 하나의 주체가 되며 그것은 곧 언어가 된다(정일근, 「어머니의 그륵」). 말하는 세 치 혀의 대척점, 송아지를 핥는 어미 소의 혀에서 찾는 혀의 쓸모는 종의 우열을 파기하고 ‘말(언어)’을 우월의 요소로 보는 휴머니즘의 한계를 지움으로써 ‘몸의 언어’를 만나게 되며(박일환, 「핥아주는 혀」), 바짝 뜨거웠다가 단 한 번 입맞춤하고 간명하게 가는 종이컵의 생을 바라보는 일은 비-생명의 에너지, 고유성, 삶을 읽게 한다(유계자, 「종이컵」). 그럴 때 인간화라는 장치로 치환됨으로써 사람을 흉내 내는, 사람의 입장이 되는 사물이라는 인간 중심적 사유는 폐기되며 엄마의 옷은 엄마의 품으로 어머니가 잡았던 산고의 문고리는 엄마의 손아귀 자체가 될 수 있다(이경림, 「걸친, 엄마」).
삶이 그지없이 사랑스럽다는 전언이 “황소, 젖소 키우려면 외양간 지어야 하지만, 고맙소는 고삐도 필요 없다”(문무학, 「절경」)는 식, 염소를 스님을 삼킨 살해범으로 만드는 식으로(공광규, 「운장암」) 유머에 닿는 것은 필연으로 보인다. 유머란 어쩌면 박장대소와는 먼 그렇게 진열된 과일을 하나씩 뒤집어보고서야 사게 되는(백무산, 「손」) 제 손길이 아차 싶은 순간 머쓱함에 싱겁게 웃게 되는 것, 그 찰나에서 싹을 틔우는 생의 비밀이 아닐까?
우리는 왜 반칠환의 긍정이 살아 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닿는지 비로소 주억거리게 된다. 그것은 한껏 벼린 푸르름의 당위가 아니라 패이고 곪으며 피멍 든 존재들의 안간힘으로 지켜낸 것, 이 빠진 그릇이나 구멍 난 옷자락의 시간을 닮은 어딘가 좀 헐은 생의 순간들에 바치는 애틋한 고백은 아닐까? 그리하여 살아 있는 것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그의 시해설을 좇으며 얼핏 본 것도 같다.
--{애지} 가을호에서
황유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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