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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충주 탄금대 탄금정(彈琴亭) 자리에 육각정이 있었다. 지금 탄금정은 2014년경 새로 지은 것이다. 다음은 예성춘추(蘂城春秋, 1959년)에 있는 육각정에 관한 글이다. 이를 소개하고 <육각정이건기> 원문과 번역문을 실었다.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예성춘추에 있는 잘못된 한자는 고치고 다듬었다.
<원문>
四七、六角亭(一名 天雲亭)
(예성춘추 p52 ~ p53)
只今은 彈琴臺上에 있으나 其來歷을 略擧하면 李朝 高宗皇帝 光武七年(檀紀 四二三六年,1903년) 癸卯에 忠淸北道 觀察使로 在任하든 金錫圭가 自己 祖父가 忠州牧師로 在任時에 現 敎育區廳跡에 있든 上蓮塘中에 石假山을 모우고 其上에 茅亭四間半을 創建하여 春夏秋期에 蓮花滿開期(최근에 <왕과 함께 사는 남자> 영화가 흥행하였다. 궁금하던 차에 춘원 이광수가 쓴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어 보았다. 단종대왕이 태어난 것은 음력으로 1441년 7월 23일이고 양력으로 8월 9일이다. 춘원은 이 책 도입부에 단종의 탄생을 부처님에 비유해서 연못에 연꽃이 피는 장면을 묘사했다. 연꽃 개화시기는 6월말에 피기 시작해서 7월 중순에서 8월초에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춘원이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소설이니까 의문이 드는 구절이 없는건 아니나 예스럽게 잘 쓴 작품이다. 친일파로 몰려 말년에 곤혹을 치루었으나 작품 수준이나 분량을 볼때 한국 근대문학의 기초를 세운 건 사실이다)를 利用하여 公務餘暇에 妓生과 三絃六角을 가지게 하고 茅亭에 登臨하여 秩蕩히 消暢하든바 年久頹落하므로 金錫圭가 繼述之意로 六角亭을 新築하고 亭名은 天光雲影이 共徘徊라는 意味로 天雲亭이라 命名하였으며 各儒林中 雄文家들이 讚訟(頌)하는 詩를 지어 懸板을 滿揭하고 公務餘暇에 登臨逍遥하든바 李朝 高宗 光武十年 檀紀 四二三九년(1906년) 丙午에 現 忠州市廳跡에 公立普通學校를 建築한 後 運動場으로 使用하기 爲하여 蓮塘充填(塡)할 當時 懸板 等은 日本人이 竊取하여 갔으므로 天雲亭만을 社稷山으로 移置하고 臨時射亭으로 使用하다가 檀紀 四二八八년(1955年) 乙未에 當時의 邑長인 朴勝斗氏가 現在地에 移建하였다.(일제시대에 천운정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아래에 실었다. 예성춘추 기록이 맞다면 일제시대 찍은 천운정 사진은 1906년 무렵이나 그 이전에 찍은게 된다. 일본인이 쓴 <충주발전지, 1916년>를 보면 1906년에 공립충주보통학교가 설치되었다고 나온다. 이것을 위 예성춘추에서 쓴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충주공립보통학교는 마땅한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이곳저곳 전전(轉轉)하였다. 그리고 옛날 중원관(충주관아에 있었음)을 개수(改修)하여 1915년 4월에 공립 간이농학교(簡易農學校)를 신설하고 두 학교를 합했다고 나온다. 그러면 상연당에 있는 천운정은 1906년이 아닌 그 후에 옮긴게 되고 일본인이 쓴 <최근지충주, 1915년> 책에 나오는 천운정 사진과 일제시대 엽서 사진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길지만 일본인 가나야 마사키(金谷雅城)가 쓴《忠州發展誌, 1916년 》에서 해당부분을 아래에 인용한다.
충주에는 1896년(건양 1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도청(道廳)격인 관찰부(觀察府)가 서게 된다. 하지만 1908년 청주로 관찰부를 옮기면서 이후 충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896년 9월 21일 관보 434호 학부령 제5호 지방공립소학교 위치 정함에 의해 충주에 공립소학교가 서게 되는데 실상이 어떠한지는 자세하지 않다. 1906년 8월 31일 관보 제3546호에 칙령제44호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이 공포된다. 1906년 9월 18일 관보 3561호 학부령 제28호 공립보통학교 명칭 정함에 의해 공립충주보통학교가 된다. 이 학교가 지금 교현초등학교 전신(前身)이다.
어떤 분이 몇해 전 쓴 일제시대 충주 지역사 관련 책을 보니 충주 교육과 관련해서 년도(年度)를 올려 잡는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 분의 치밀한 고증과 연구 덕분에 일제시대 충주 지역사를 편하게 보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그러나 1896년 학부령 제5호에 의해 충주에 공립소학교가 서게 되지만 그 실상은 근대교육과 멀고 지지부진 했다는 일본인의 의견은 사실일 수 있다.
단순히 일본인들이 구한국의 정체와 업적을 지우려는 것으로 보지 말고 일제는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한국의 통치권을 장악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문학의 성격이 그런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역사학자들 대부분 년도를 올려잡는 경향이 있다. 왠만한 불상은 고려시대 것으로 적어 넣는다. 좀 기법이 거칠고 조악하면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한 것이라 하고 미적으로 우수하면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가 유교국가라서 불교가 쇠퇴했다는 걸 정설로 삼다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 같은데 왕실 사찰을 비롯 거대 사찰들은 나름 명맥을 유지했다. 다른 분이 쓴 충주 향토사 다른 자료를 읽어봐도 년도를 올려잡는 경향이 있다.
천운정 사진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의문이 들었고 년도가 맞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일본인이 쓴 자료를 많이 곡해(曲解)하나 모든 역사 자료가 그렇듯 당대의 기록이 후대의 기록보다 정확하다고 봐야한다. 잘못된 걸 판단하는 것은 후대인의 역량과 노력에 달려있다. 소위 민족사관이 문제인데 실증적인 자세가 아쉽다.
위 예성춘추에서 김석규의 조부가 충주목사로 와서 천운정 자리에 모정(茅亭)을 세웠다든가 기생과 악사를 동원하여 삼현육각을 즐겼다는 기술(記述)은 조부인지 김석규인지 문장에서 흐려졌는데 당대 관찰사는 지금 우리가 보는 도지사와 천양지차로 위세가 당당했다.
김석규는 조선후기 세도가인 안동김씨 집안 사람으로 과거에 합격한 거로 나온다. 그리고 예성춘추 저자로 되어 있는 김상현은 단양군수를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급(級)은 다르지만 둘다 관리(官吏)였다. 직설화법을 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고 보면 된다.
불과 백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 이렇게 명료하지 못하다는 것은 유감이다. 일제시대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시중에 나온 책들을 보면 저자들 태반이 독립운동가 후손인 듯하다. 독립운동가들도 밥을 먹고 독립운동을 했다.
『 《충주발전지》 해당 원문
第 三章 敎育
二、鮮人敎育
從來朝鮮の敎育は、書堂より鄕校、四學に進み、成均館に入りて、最高の學問を修む
るを以て順序とした、倂合以前に於ける敎育は、單に、儒學を講ずるのみで、所謂、寺小屋式であつた、忠州に鮮人學校の設置されたのは、明治三十九年にして、今の公立忠州普通學校は、忠淸北道に於ける、公立學校の嚆矢である、其の校舍は、舊韓國政府時代の築造にして、內地製材を用ひ、敎育用器具、機械の完備せることは、道內第一である、其の後民度の發達に伴ひ、舊中原館を改修して、大正四年四月、公立簡易農學校を新設した、校長は、兩校を倂せ、訓導前田牧次氏にして、現在生徒數、普通學校百八十五名、農學校二十九名である、其の他、嚴政面龍山里に、公立龍山里普通學校あり、大正四年九月の認可設立にして、校長は、訓導田邊英彦氏である、現在生徒數は百三十七名にして、大正六年度に於て、校舍增築の計畫中である、猶ほ、仰城面龍堂里に、私立學校あり、各面に、四十五の書堂ありて、鮮人子弟を啓發して居る。
종래(기존) 조선의 교육은 서당에서 향교, 사학(四學)으로 나아가고, 성균관에 들어가 최고의 학문을 닦는 것을
순서로 삼았다. (한일)병합 이전에 있어서의 교육은 단순히 유학을 강론하는 것뿐이었으며, 이른바 '테라코야(서당) 방식'이었다. (테라코야 (寺小屋)은 書堂을 가리킨다) 충주에 조선인 학교가 설치된 것은 명치(메이지) 39년(1906년)으로, 지금의 공립충주보통학교는 충청북도에 있어서 공립학교의 효시(시초)이다. 그 교사(校舍)는 구한국(대한제국) 정부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일본 본토산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교육용 기구와 기계가 완비된 것은 도내 제일이다. 그 후 민도(民度)의 발달에 따라 구 중원관을 개수하여, 대정(다이쇼) 4년(1915년) 4월에 공립간이농학교를 신설하였다. 교장은 두 학교를 겸임하는 훈도 마에다 마쿠지(前田牧次) 씨이며, 현재 학생 수는 보통학교 185명, 농학교 29명이다. 그 외에 엄정면 용산리에 공립용산리보통학교가 있으며, 대정 4년(1915년) 9월에 인가 및 설립되어 교장은 훈도 다나베 히데히코(田邊英彦) 씨이다. 현재 학생 수는 137명이며, 대정 6년(1917년)도에 교사 증축을 계획 중이다. 또한 앙성면 용당리에 사립학교가 있고, 각 면에 45개의 서당이 있어서 조선인 자제를 계발하고 있다.
<충주발전지, 1916년. 가나야 마사키(金谷雅城)>
일본인 기록인데 천운정이 공립 충주보통학교 교정내에 있다고 나온다. 이 책이 출판된 1916년 무렵에도 천운정이 현 충주 관아공원에 있었던 것이다.
<충주발전지, 1916년. 가나야 마사키(金谷雅城) 원문>
天雲亭
一名六角堂と謂ふ、公立忠州普通學校庭内にあり、亭は池に臨み、石橋を架す、池中蓮花研を競ひ、夏湖納凉の客繁し、建立の由來詳かならずと雖も觀察府時代の遊園なりしものの如し。
천운정 (天雲亭)
일명 '육각당(六角堂)'이라고도 한다. 공립충주보통학교 정원 내에 있으며, 정자는 연못을 임(臨)하고 있고 돌다리(石橋)가 놓여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연꽃이 아름다움을 겨루고, 여름에는 호수에서 납량(納凉, 피서)을 즐기려는 객들로 붐빈다. 건립된 유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 관찰부(觀察府) 시대(1896년 ~ 1908년)의 유원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
六角亭移刱(創)記 --- 육각정이건기(六角亭移建記)가 맞다. 바로 위에 移建했다고 했다.
創建은 처음 세운 것을, 중건(重建)은 건물이 낡거나 없어져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앉힌 것을, 중수(重修)는 건물이 낡아 부분을 수리하거나 중건(重建)과 같은 뜻으로 쓴다. 이건(移建)은 건물을 옮겨 다른 자리에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전통한옥 건축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도 쓸만한 뼈대가 되는 기둥이나 보, 도리 등를 옮겨 쓴다는 뜻이며 주초돌과 지붕의 기와와 벽체는 새로 자재를 마련해서 건물을 짓게 된다.
此六角亭 本在蘂城別館後蓮塘上 宜有前人之述旣無文籍可改 莫識其創拾何代何人手 然至係別館附屬而爲官公物儘無疑也 肆當島夷扼獗吞我邦疆設彼所謂 神社於社稷山移于其側幸遇 檀紀 四二七八年(1945년) 乙酉 秋㐫(凶)焰冷落戰敗撤歸大韓江山露出舊眼目踰九年 癸巳(1953년) 春 金使君容殷以鄭使君喜澤 後任來守是郡 越明年 甲午(1954년) 秋 移建于彈琴臺申忠壯殉國之遺墟寔繼前守措畫主催脩擧廢政中特一件事而至於經費邑長朴勝斗畫出十五萬金得以完遂屬余爲之記 噫 蓮塘守令方伯達官名職隨時登臨 碧尾丹欄無非涵恩於聖朝雨露神社熸?齒之徒瀆神社淫祀接近足敭(揚)脛寸陰尺影無非蒙陋於異類狼藉今立于此挺然一榮一辱之餘意以殉節將巨爲托命之所 凝忠肝於樑脊 結義膽於柱石 白日照而眉宇開明月來而顏色展髮髥乎 將軍顯聖儼然在上 俯臨戰壘釰光指馬島而電馳 箭的注江戶而虹貫 茲豈非移步擾形移形擾狀者 取自後登臨是亭 盃嘯詠者 吾不知其將何以爲心也 吁二侯一擧措爲世道權衡爲生民正趨向乃如此絕非尋命吏所敢比明矣
翌年 元月 下浣 宜春 南宗祐 謹記
<수정>
只今은 彈琴臺上에 있으나 其來歷을 略擧하면 李朝 高宗皇帝 光武七年(檀紀 四二三六年,1903년) 癸卯에 忠淸北道 觀察使로 在任하든 金錫圭가 自己 祖父가 忠州牧師로 在任時에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김석규(金錫奎)는 안동 김씨로 1864년(고종1)에 태어났고 사망년도는 미상이다. 충청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것은 1899년 기해 4월이다. 아버지(生父) 김병수(金炳洙), 조부 김원근(金元根), 증조부는 유명한 김조순(金祖淳)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면 조선후기에 충주목사로 재임한 인물중에 김재로(金在魯), 김조연(金祖淵, 1832년 충주목사 부임), 김구현(金九鉉)이 있으나 각각 청풍김씨, 연안김씨, 광산김씨로 김석규와 본관이 다르다. 따라서 김석규 祖父가 충주목사를 지낸 것도 아니고 上蓮塘에 茅亭을 창건한 것도 아니다. 김석규가 육각정 천운정을 신축한 것은 맞다고 봐야 한다.
現 敎育區廳跡에 있든 上蓮塘中에 石假山을 모우고 其上에 茅亭四間半을 創建하여 春夏秋期에 蓮花滿開期를 利用하여 公務餘暇에 妓生과 三絃六角을 갖추게 하고 茅亭에 登臨하여 跌蕩히 舒暢하든바 年久頹落하므로 金錫圭가 繼述之意로 六角亭을 新築하고 亭名은 天光雲影이 共徘徊라는 意味로 天雲亭이라 命名하였으며 (주희(朱熹)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반무방당일감개, 천광운영공배회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
影影共徘徊)"에서 따온 것이다. 一畝는 약 200평이라 한다. 중국에서 쓴 단위다. 반무(半畝)는 약 100평을 말한다. 方塘은 네모진 연못이다. 사람의 힘으로 만든걸 말한다.
半畝方塘一鑑開 조그만 방당(方塘)이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徘徊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떠도네)
各儒林中 雄文家(뛰어난 문장가)들이 讚頌하는 詩를 지어 懸板을 滿揭하고 公務餘暇에 登臨逍遥하든바 李朝 高宗 光武十年 檀紀 四二三九년 (1906년) 丙午에 現 忠州市廳跡(예전 충주군청 자리를 말한다. 1956년7월 8일에 충주군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었다)에 公立普通學校를 建築한 後 運動場으로 使用하기 爲하여 蓮塘充塡할 當時 懸板等은 日本人이 竊取하여 갔으므로 天雲亭만을 社稷山으로 移置하고 臨時射亭으로 使用하다가 檀紀 四二八八년(1955年) 乙未에 當時의 邑長인 朴勝斗氏가 現在地에 移建하였다.
六角亭移建記
此六角亭 本在蘂城別館後蓮塘上 宜有前人之述 旣無文籍可改 莫識其創始何代何人手 然至係別館附屬而爲官公物儘無疑也
肆當島夷扼獗 吞我邦疆 設彼所謂神社於社稷山 移于其側 幸遇檀紀四二七八年乙酉秋 凶焰冷落 戰敗撤歸 大韓江山露出舊眼目
踰九年癸巳春 金使君容殷以鄭使君喜澤後任 來守是郡 越明年甲午秋 移建于彈琴臺 申忠壯殉國之遺墟 寔繼前守措畫 主催脩擧廢政中 特一件事 而至於經費 邑長朴勝斗 畫出十五萬金 得以完遂 屬余爲之記
噫 蓮塘守令方伯達官名職 隨時登臨 碧楣丹欄 無非涵恩於聖朝雨露 熸齔之徒 瀆神社淫祀 接近足揚脛奔 寸陰尺影 無非蒙陋於異類狼藉
今立于此 挺然一榮一辱之餘 意以殉節將軍爲托命之所 凝忠肝於樑脊 結義膽於柱石 白日照而眉宇開 明月來而顏色展 髮髥乎將軍 顯聖儼然在上 俯臨戰壘 劍光指馬島而電馳 箭鏑注江戶而虹貫
茲豈非移步換形 移形換狀者 取自後登臨是亭 盃嘯詠者 吾不知其將何以爲心也
吁 二侯一擧措 爲世道權衡 爲生民正趨向 乃如此 絕非尋常命吏所敢比 明矣
翌年 元月 下浣 宜春 南宗祐 謹記
<표점>
六角亭移建記
此六角亭, 本在蘂城別館後蓮塘上. 宜有前人之述, 旣無文籍可攷, 莫識其創始何代何人手. 然其係別館附屬, 而爲官公物, 儘無疑也.
肆當島夷扼獗, 吞我邦疆, 設彼所謂神社於社稷山, 移于其側. 幸遇檀紀四二七八年 乙酉秋, 凶焰冷落, 戰敗撤歸, 大韓江山, 露出舊眼目.
踰九年癸巳春, 金使君容殷, 以鄭使君喜澤後任, 來守是郡. 越明年甲午秋, 移建于彈琴臺, 申忠壯殉國之遺墟. 寔繼前守措畫, 主催脩擧廢政中, 特一件事. 而至於經費, 邑長朴勝斗, 畫出十五萬金, 得以完遂, 屬余爲之記.
噫! 蓮塘守令方伯, 達官名職, 隨時登臨, 碧楣丹欄, 無非涵恩於聖朝雨露. 熸齔之徒, 瀆神社淫祀, 接近足揚脛奔, 寸陰尺影, 無非蒙陋於異類狼藉.
今立于此, 挺然一榮一辱之餘, 意以殉節將軍, 爲托命之所. 凝忠肝於樑脊, 結義膽於柱石. 白日照而眉宇開, 明月來而顏色展. 髮髥乎將軍, 顯聖儼然在上, 俯臨戰壘. 劍光指馬島而電馳, 箭鏑注江戶而虹貫.
茲豈非移步換形, 移形換狀者? 取自後登臨是亭, 盃嘯詠者, 吾不知其將何以爲心也.
吁! 二侯一擧措, 爲世道權衡, 爲生民正趨向, 乃如此, 絕非尋常命吏之所敢比, 明矣!
翌年 元月 下浣, 宜春 南宗祐, 謹記.
<번역문>
이 육각정은 본래 예성(蘂城, 충주의 옛 이름) 별관 뒤편의 연못(상연당) 위에 있었다. 마땅히 선인들의 기록이 있어야 할 터이나, 이미 고증할 만한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의 손으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정자가 관아 별관에 부속된 관청의 공물(公物)이었음은 참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나간 날 섬오랑캐(일제)가 미쳐 날뛰며 우리 나라의 강토를 삼키고, 저들의 이른바 신사(神社)를 사직산에 설치하면서 정자를 그 곁으로 옮겨 버렸다. 다행히 단기 4278년(1945년) 을유년 가을을 맞아, 저들의 흉악한 불꽃이 사그라들고 전쟁에 패해 물러가니, 대한의 강산이 마침내 옛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9년이 지난 계사년(1953년) 봄, 군수 김용은(金容殷) 대인이 정희택(鄭喜澤) 군수의 후임으로 와서 이 고을을 지키게 되었다. (당시는 6.25가 일어나 전쟁중이었다) 그 이듬해인 갑오년(1954년) 가을, 신충장공(申忠壯公, 신립 장군)이 순국한 유서 깊은 터인 탄금대로 정자를 옮겨 세웠다. 이는 전임 군수가 세웠던 계획을 이어받아, 무너진 정치를 닦고 일으킨 와중에 해낸 특별한 한 가지 일이다. 여기에 들어간 경비는 읍장 박승두(朴勝斗) 씨가 15만 금을 주선하여 마침내 완수하게 되었으니, 나에게 글을 지어 기록해 달라 청해왔다.
아! (과거에) 연못가의 정자는 군수와 관찰사 등 명망 높은 관료들이 수시로 올라 굽어보던 곳이니, 푸른 기둥과 붉은 난간은 조정의 은혜와 복(비와 이슬)을 머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멸망하여 재가 된 무리(일제)가 신사의 음란한 제사로 이곳을 더럽혔고, 발을 높이 들고 정강이를 놀려대며 접근하니, 이 정자의 한 치의 시간과 한 자의 그림자마저도 저 외방의 이류(異類)들에게 더럽혀지고 짓밟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 이곳에 정자를 세우니, 영광과 치욕을 한 몸에 겪고 난 뒤에 우뚝 솟은 모습이다. 뜻하건대, 목숨 바쳐 절개를 지킨 (신립) 장군께서 넋을 기탁하실 곳으로 삼아, 충성스러운 간(忠肝)은 대들보와 마룻대에 응집시키고 의로운 담력(義膽)은 기둥과 초석에 맺어두고자 함이다.
이제 밝은 해가 비치니 장군의 이마와 기상이 활짝 열리고, 밝은 달이 떠오르니 장군의 안색이 펴지는 듯하다. 수염을 휘날리는 장군의 성스러운 모습이 엄연히 저 위에 계시어 아래로 옛 싸움터를 굽어보시는 듯하니, (장군의) 칼빛은 대마도를 가리키며 번개처럼 달리고, 화살촉은 에도(江戶, 도쿄)를 겨누며 무지개처럼 꿰뚫는도다!
이것이 어찌 정자의 위치를 바꾸어 형상이 새로워지고, 형태를 옮겨 그 모습이 바뀐(정자가 제자리를 찾아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다음에 이 정자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조릴 이들이 장차 어떤 마음을 가질지 나는 잘 알겠다.
아! 두 고을 수령(정희택, 김용은 군수)의 이번 장거(壯擧)는 세상을 다스리는 저울추가 되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른 방향을 세워준 것이 이와 같으니, 결코 평범한 관리들이 감히 비할 바가 아님이 명백하도다!
이듬해(1955년) 정월 하순,
의춘(宜春) 남종우(南宗祐)가 삼가 쓰다.
충주읍성내에 있었다는 상연당(上蓮塘)과 천운정(天雲亭), 일제시대. 출처: 2005년 신동아별책부록. 외국인이 소장한 100년전 한국사진.
최근에 복원된 천운정(天雲亭) 일제시대 모습이다.
작은 엽서에 있는 사진이다. 년도는 미상이다. 정자 뒤편 오른쪽 키 큰 나무는 오동나무 같다.
일본인 무라카미 토모지로우(村上友次郞)가 쓴
[최근지충주, 1915년] 에 나오는 사진이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과 비교했을때 왼쪽에 미루나무가 한 그루 더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에 관아건물이 보이지 않고 나무가 자랐다. 따라서 아래 사진이 나중 사진이 된다. 책에 예전 사진을 쓸 수도 있기 때문에 출판된 연도가 사진의 연도는 아니다. 하지만 1915년 무렵 사진으로 봐야 한다. [최근지충주]라는 책의 성격을 알면 쉽게 이해될 문제다.
그리고 이 당시 엽서에 조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쓴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후 그들이 조선을 근대화했고 발전시켰다는 걸 과시하려는 의도로 봐야 한다. 조선의 명승고적을 포함해서 다른 도시들의 모습을 찍은 엽서가 상당수 남아 있다. 이런 엽서들은 일본 본토에 사는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히 인기 있었다 한다.
<탄금대 탄금정>
충주에서 오래 산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다. 육각정이라고도 했다. 1976년 6월에 목조건물인 기존 육각정이 낡아 콘크리트로 만든 2층 정자다. 예성춘추(1959년)에 나오는 위 기록은 1976년까지 있었다는 육각정을 말한다. 호암지에 있는 육각정은 별개의 육각정이다.
<2014년경 새로 건립된 탄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