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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토요일. - 나는 지금 어디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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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는 지금 어디에?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오늘 죄짓고 숨은 아담에게 어디 있는지 물으십니다.
여기서 그의 물리적인 위치는 동산의 나무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위치는 하느님 앞을 피해서입니다.
어제 창세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리고 오늘 아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렇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심리적 위치는 두려움 가운데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두 가집니다.
알몸이 드러나는 두려움과 벌을 받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죄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말에 알몸이 드러난다는 것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니
아담의 알몸이란 죄이고 우리도 알몸은 죄입니다.
사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인간은 옷을 입는데
옷이란 것이 치부는 은폐하고 멋지게 포장까지 하는 것이니
옷이라는 위선의 포장이 벗겨져 죄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은 끔찍한 것이지요.
인간은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두려움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심리적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두려움도 있지요.
영적인 두려움이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요.
아무튼, 아담은 지금 두려움 가운데 있고, 하느님 밖에 있으며
두려움 가운데 있기에 하느님 앞에 있지 않는 것 이것이 지금 그의 위치입니다.
우리도 종종 심리적 두려움이 영적인 두려움으로 커져
주님의 계명을 어긴, 어쩌면 작은 죄인, 1차 죄가
주님을 피하는 더 큰 2차 죄가 되게 하곤 합니다.
어린애가 돈을 훔치고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집을 나가버린다면
부모에게는 돈을 훔친 죄보다 부모를 떠난 죄가 더 큰데
우리 인간은 종종 이런 미성숙의 죄를 부모에게도 하느님께도 범합니다.
사랑을 믿기보다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하느님께서는 벌주심도 사랑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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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마르 7,5)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엽구나.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르 7,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빵”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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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과 배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굶주린 백성을 향한 연민이 가득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성이든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연민을 통하여 생명의 빵을 건네주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먼 데서 온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인 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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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대화는 신선하고, 달달합니다. 너무 달달하다 못해 닭살이 돋기도 합니다. 멀리 출장을 떠난 연인에게 “자기 어디에 있어!”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요? ‘응 난 늘 자기 마음에 있어’가 정답이 아닐까요?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출장을 어디로 간 것이 궁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디에 있어도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마음에는 사랑하는 이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 정답은 “저는 뉴욕에 있습니다.”는 아닐 것 같습니다. 정답은 “저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둘이나 셋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담아 너는 무슨 일을 하였느냐?”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질문에 아담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제가 알몸이라서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네가 알몸인 것을 어찌 알았느냐?” 아담은 또 변명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으로 주신 이 여인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열매를 먹고 나니 제가 알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열매를 먹었느냐?” 여인도 변명을 하였습니다. “뱀이 저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해서 먹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아담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 노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여인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출산의 고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며칠 동안 먹지 못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이 있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보리떡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몇 개나 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도 살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가 가진 보리떡 일곱 개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자신들이 가졌던 보리 떡 일곱 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보리떡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굶주린 백성 4000명이 충분히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체험이 아주 강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충분히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도 했습니다. 보리떡이 몇 개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이 충분히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바구니가 남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분열과 갈등을 키우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미루고, 남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이 책임을 하와에게 미루지 않았다면, 하와가 책임을 뱀에게 돌리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회개를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용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변명에는 책임이 주어지지만 나눔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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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여러분의 주변을 보면, 남을 잘 설득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남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요? 말을 잘하기 때문일까요? 대부분 자신의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사람은 진짜가 아닙니다. 아마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진짜로 설득을 잘하는 사람은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를 늘 먼저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상대방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 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먼저 도움 줄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편인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기에, 그 사람 말에 설득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과 지지를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나만을 생각하면서 도움받기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를 자주 물으며 주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역시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많은 이가 모여듭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사천 명가량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요구사항이 있었지요. 병을 고쳐달라, 마귀를 쫓아내 달라,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하느님에 관한 말씀으로 희망을 갖게 해달라 등등…. 사실 빵의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굶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아채십니다.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설득되어서 그들은 예수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은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또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는 함께하시고, 우리 안에서 커다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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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자기 자신만이 안다. 그러니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면 된다. 설령 눈앞에 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닌 것 같아도 열심히 노력하며 현재를 살면, 누릴 것을 반드시 누리게 된다(위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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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
-실락원에서 복락원으로-
“지상천국의 삶”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후렴 시편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주님만이 세세대대 우리의 안식처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주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2월11일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자 제31차 세계 병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님은 담화문 마무리에서 성모님이 발현한 루르드 성지는 이 시대를 위한 예언적 가르침이라 말씀하시며 병자의 치유자이신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며 병자 여러분을 맡겨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아름다운 스콜라스티가 동정녀 축일에 저는 참 오랜만에 치과 병원에 갔다가 명동 서점을 다녀오던 중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순수와 열정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려 25년간 치과진료를 해주는 섬세하고 친절한 의사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세속의 수도자처럼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에서의 주님의 전사처럼 치과병원에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스러웠습니다. 18년전 써놨던 “어느 치과 의사 예찬” 이란 글이 생각났습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욕심없어
마음 또한 맑고 깨끗하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이다
식물성이라
그 곁에선 풀냄새가 난다
시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다
부드러움 중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이다
그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는 진료 봉사를 한다
주중에도 한번은 꼭 요셉병원에서 진료 봉사를 한다
쉴틈이 별로 없는 이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영성으로, 훈련된 습관으로
하루하루 사는 이다
평상심의 도를 살기에
외로움도 그를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의사이자 예술가이고 세속안의 수도자이다
내 좋아하는 치과의사다”-
이어 또 몇 년 만에 명동에 있는 분도서점에 가던중 어느 자매의 “이수철 선생님”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스크로 얼핏 알아볼 수 없는 자매였습니다. 바로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로 교회기관에서 참으로 열심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역시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자매였습니다.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은총의 선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에서도 순간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에덴동산낙원에서 참 멋지게 시작됐던 부부의 삶이 죄로 말미암아 산산히 파괴되는 장면입니다. 말그대로 어둠과 죽음의 절망스런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 그대로 실낙원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때로 우리에게도 화두처럼 주어지는 말마디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고 있는지 우리의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사람은 주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어 사람도 여자도 서로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하며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니 서로의 관계는 무너지고 부부공동체는 완전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둘의 변명이 점입가경이고 막상막하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자기는 빠지고 책임을 하느님과 여자에게 전가합니다.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도, 여자와의 관계도 무너졌습니다. 마귀가 바라는 바 이런 분열이요 마귀는 환호했을 것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뱀은 어디 따로 있는 실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잊고 살 때 언제 어디서나 호시탐탐 유혹의 기회를 노리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뱀에 이어 사람에게, 또 여자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벌이 참 엄중합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이어 에덴동산에서 내치시니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은 차단되고 말 그대로 실낙원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오늘날 희망을 잃고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창세기 제1독서가 실낙원失樂園의 현실을 보여준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00명을 먹이심으로 복낙원復樂園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파스카 신비의 실현으로 실낙원에서 복락원의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된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1독서가 어둠과 죽음의 절망을 상징하는 분위기라면 오늘 복음의 사천명이 배불리 먹은 기적의 현장은 빛과 생명의 넘치는 희망의 분위기입니다. 앞서는 분열되었던 부부공동체였는데 이젠 모두가 함께 나누는 일치의 공동체가 실현되었으니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의 구원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를 들고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는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 하셨고, 이어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4000명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만 일곱 바구니였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참으로 나눔과 섬김, 일치의 풍요로운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과거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시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이 오늘 복음의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4000명이 배불리 빵을 먹음으로 현재화되었고 지금도 매일 미사를 통해 구원 은총은 계속 현실화되고 있으며 언젠가 미래에 완전히 실현될 하늘 나라 천상잔치의 기쁨을 미리 앞당겨 맛보는 우리들입니다. 문득 사순시기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 예식중 십자가 경배시 사제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에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나무가 상징하는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차단되었던 에덴동산의 하늘문이, 하늘길이 활짝 열렸고 천상낙원을 앞당겨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미사중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열매가 바로 우리가 모시는 주님의 성체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체성가 177장 마지막 셋째 절을 나눕니다.
“그 만나 먹은 백성들은 죽었을지라도,
이빵을 먹는 자들은 영원히 살리.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기쁨과 감격을 고백한 성가입니다. 하여 저는 주저없이 오늘 강론 제목을 다음과 같이 택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
-실락원에서 복락원으로-
“지상천국의 삶”
그러니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광야에서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시편107,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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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가 머리가 나빠서인지 강론은 준비하거나 묵상 글을 준비할 때 저는 몇 번에 걸쳐 독서와 복음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다 보면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혹은 가슴에 여운이 남기도 합니다.
오늘 제 가슴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는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저 군중이 가엾구나. 저 군중이….
어쩌면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상처, 고뇌와 갈등을 보시며 같은 이야기를 하실 것입니다.
가슴속에 울리는 주님의 말에 머물다 보니 독서의 내용이 이해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치십니다. 하와에게는 출산을, 아담에게는 노동을 명하십니다. 그리고는 내치십니다. 그러나 그냥 내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가엾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새로이 창조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죄지은 인간을 멸하시고 새로 창조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그들을 가죽옷을 입혀 내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인간을 에덴으로, 주님과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낙원으로 다시 불러주십니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애잔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가슴속에 간직한 잔잔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청.바.지
청.바.지는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는 뜻이랍니다. 저도 어느 저녁 술자리에서 처음 듣게 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아주 당연한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젊은 날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날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이 청바지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아주 복음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비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입니다. 오늘 이외에 다른 날은 없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바.지
오늘 자비롭기를, 오늘 용서하기를, 오늘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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