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이야기
논개는 義妓라는 설도 있고, 양가집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진주를 충절의 도시로 만든 논개는 어떤 인물일까.
2016년 4월 5일에 채널A에서 방영된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는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복수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설을 채택하여 방영하였다. 그런데 1987년 최경회의 집안인 해주최씨 가문에서 발간한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서는 최경회의 부인이 왜장을 유인해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는 기생 출신은 커녕, 천첩 이라는 묘사마저 없다. 소설가 김성한은 그의 소설 '임진왜란'에서 이를 어느 정도 절충해 '본래 장수군의 관기였다가 장수를 방문한 최경회를 모시게 되었고, 이후 최경회가 천첩으로 거둬들였다'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에필로그에서는 '논개는 기생이 분명하다'라고 단언하며 '기생이라는게 창피하다는 이유로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진주여고 출신 김지연 소설가도 비슷하다. 그는 1997년부터 1998년 12월까지 근 2년간 국제신문에 '소설 논개'를 연재했는데, 집필 당시 진주와 長水 현장을 찾아 종합 취재하고, 월탄 박종화의 '임진왜란'과 정비석의 '명기열전', 그리고 조선 시대 유몽인의 '於于野談'을 참고하여 결론은 妓女로 내렸고, 임진란 백 년 후에 나온 '호남절의록'에 논개가 장수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음을 알았다고 피력했다. 또 필자는 전 문교부 鄭泰秀 차관과 지금 의암 옆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의암비기(義巖碑記)'에 새겨진 詩를 돌에 새겨 의암 옆에 세우려고 진주시장을 만나기 위해 진주로 내려가 하순봉 의원과 식사하고 시장과 통화한 적 있다.
詩 내용은 이런 것이다.
홀로 가파른 그 바위 우뚝 선 그 여인(獨峭其巖 特立其女)
저 여인, 이 바위 아니면 어디서 죽을 곳을 얻으며(女非斯巖 焉得死所)
저 바위, 이 여인 아니면 어찌 의롭단 말 들으리(巖非斯女 烏得義聲)
한 줄기 강물,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우리라(一江高巖 萬古芳貞)
정차관님의 해주 정씨 선조인 明庵 鄭栻 先生의 시다. 임진란 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이 명암선생 시비를 증빙자료로 삼아 비변사에 상신하여 왕명으로 관기에서 의기(義妓)로 명칭을 바뀌게 되었다. 비로서 義妓란 호칭을 얻은 것이다. 논개 사후 128년(경종2년,1721)이란 긴 세월이 흐른 후 일이다.
임란 후 공신들 포상 때 당시 논개가 의병장 최경회의 정실이었다면, 당연히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을 것이다. 기녀라서 언급이 없다가 128년 후에 義妓 대접을 받은 것이다.
朱論介가 義妓가 된 내력
제1기
1593 제2차 晉州城 전투 그해 論介가 왜장 끼고 투신순절하고, 이후 논개 이야기가 晉州 民談으로 퍼져내려옴.
1620 (27년 후) 於于 柳夢寅 선생이 논개 의절이 한갓 기생의 일로 치부되어 입으로만 전해지고 正史기록에 빠져있어 야담으로나마 남기고자 위 민담을 於于野談으로 채록
1629 (36년 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차자 承旨公(鄭大隆, 명암선생의 從曾祖父)이 바위에 義巖이라 이름 지어 새김
제2기
1720 (127년 후) 明庵(鄭栻)선생이 論介와 義巖 詩를 짓다 (38세 전후)
1721 경상우병사 崔鎭漢이 明庵 시를 義巖詩碑로 새겨세우고, 이를 증거물로 狀啓을 올려 왕명으로 義妓 명칭 받음. 당시 文人들은 妓자 대신 義娘이라고도 불렀다
1740 경상우병사 南德夏가 碑閣과 義妓論介之門 현판을 걸고 義妓祠를 짓다
제3기
1964 (370년 후) 이 시가 柳夢寅의 후손에 의하여 於于野談에 追加 편집 발간되어 널리 알려지다
2000 (407년 후) 明庵 詩碑, 경상남도유형문화재자료 제353호로 지정
2001 (408년 후) 義巖 바위,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
당시 18세 주논개 초상화. 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전완식 作
於于野談에 실린 논개에 관한 글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계사년(1593)에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다.
정약용 여유당전서에 실린 논개에 관한 글
옛날에 왜구가 진주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을 기리는 사이다. 아, 어찌 열렬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을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함양 장수의 해주 최씨 승지공파 후손들 논개에 관한 설명
훈장이던 논개의 아버지 주달문은 논개가 14세 때 돌아가신다.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했는데, 도박에 가산을 탕진한 주달무는 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팔아넘기고 달아난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던 논개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가고, 김풍헌은 관아에 고발하여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에게 심문을 받는다. 심문 결과는 무죄고, 그때 최경회는 갈곳 없는 논개 모녀를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현감의 부인을 시중들게 한다. 부인은 지병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논개를 부실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당시 논개 16세)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최경회 장군과 함께 장군들이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게 된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왜군들의 잔치가 1593년 7월7일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그때 논개는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고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남강의 바위에 올라 그를 껴안고 투신한다(당시 논개 18세). 논개는 10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끼고 깍지를 끼었을 때 손이 빠지지 않게 한 상태였다.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강 하류에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서 장사를 지내려 운구하다가 함양군 서상 방지리에 묻었다. (최초 출처는 1960년대 장수군 교육청)
첫댓글 사람들은 진주 촉석루 하면 논개와 의암을 이야기 한다. 근년에 와서 장수군에서는 논개 묘소를 왕릉처럼 크게 만들고, 논개가 기생 출신이 아니고 사대부가의 부인이라고 주장한다. 진주로서야 논개가 사대부가의 부인이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 역사가 부풀려지는 사실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마침 전 문교부 차관 정태수 씨가 최초로 해주 정씨 집안 선조가 논개에 대한 詩를 썼고, 그로 인해 논개 사후 약 100년 후에 논개가 義妓라는 칭호를 조정으로부터 받은 사연을 설명했고, 진주여고 출신 김지연 작가가 국제신보에 2년간 연재한 '소설 논개' 취재 경위를 필자에게 말해준 바 있다. 진주 사람은 논개 내력을 제대로 알아야겠기에 간략히 소개한다.
또 논개의 영정 사진은 현재 유포되고 있는 영정 사진이 중년 아주머니 모습이라 당시 18세의 아릿다운 논개 초상이라기엔 너무나 늙어보여, 전 한성대 전완식 예술대학원장 작품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