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 즐기자! “…바뀐 소비 형태
▶ 팬데믹 후 경험중시 소비
▶‘여행·콘서트’ 돈 물 쓰듯
▶ 현금 없으면 빚내서라도 위기가 사고방식 바꿔
최근 여행, 콘서트, 스포츠 경기 등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가 크게 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팬데믹 이후 소비자들이 사고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로이터]
애리얼 빈슨은 코로나 팬데믹 발생하기 전까지 거의 여행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마치 중독된 것처럼 여행을 끊을 수 없게 됐다. 28세 작가로 댈러스에 거주하는 그녀는 애틀랜타에 열리는 비욘세 콘서트, 시카고의 어셔 콘서트, 친구들과의 자메이카 여행에 아무 거리낌 없이 돈을 썼다.
그녀의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계획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콘서트 일정이 발표되자마자 친구들과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고 여행 일정을 짜느라 여전히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소비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라는 빈슨은 “경험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비용이 얼마든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요즘 추구하는 새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했다.
‘파멸적 지출’(Doom Spending), ‘저축은 대충’(Soft Saving), ‘욜로’(YOLO)…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국인이 추구하는 새로운 소비 형태다. 최근 미래에 대비한 저축은 적게 하고 콘서트, 스포츠 경기, 해외여행 등에 돈을 펑펑 쓰는 미국인 늘고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작년 해외여행과 라이브 콘서트 지출 비용이 30%나 급등해 전체 소비자 지출의 5배를 넘었다. 반면 개인 저축은 경기 대침체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최악의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지갑은 닫힐 줄 모른다. 올해 2월 소비자들은 전달보다 무려 1,455억 달러를 더 지출했는데 대부분 제품 구입이 아닌 서비스에 퍼부은 돈이었다. 같은 기간 개인 저축률은 1월 4.1%에서 3.6%로 더 떨어졌다. 경기 대침체 이후 나타난 근검절약 정신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위기가 미국인들에게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더 지출하도록 각성(?)시킨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위기 후 사고방식 바뀌어
UC버클리 율리케 맬먼디어 행동금융학 교수는 “위기를 경험하면 사람의 뇌에 새로운 사고방식이 박힌다”라며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팬데믹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라고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경험 중시 소비 트렌드를 설명한다. 맬먼디어 교수에 따르면 경제 위기가 있을 때마다 돈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뀐다.
1929년 주식 시장 대폭락과 이로 인한 대공황 시기를 살아온 세대는 은행과 금융 기관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다. 실직을 경험한 사람은 새 직장을 찾기 전까지 지출을 최대한 줄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경험한 세대는 언제 닥칠지 모를 경기 침체에 대비해 월급을 최대한 저축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에 의한 위기는 저축과 절약을 유도한 과거 경제 위기와 다른 소비 습관을 낳았다. 맬먼디어 교수는 “사람들과의 교류, 사교, 여행 등 팬데믹 기간 누리지 못했던 경험에 아낌없이 지출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저축률 3.6%로 바닥
재정 자문가 캐롤린 맥클라나한은 이런 현상을 현장에서 몸소 목격하고 있다. 그녀의 고객 중에서도 팬데믹 이전에 비해 저축과 은퇴 자금을 줄이고 여행이나 콘서트 등을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고객이 늘었다. 맥클라나한은 “사람들 사이에서 ‘욜로’에 대한 로망이 있었으나 그동안 최대한 억제하며 살아왔다”라며 “팬데믹은 현재 삶이 중요하다는 경각심을 준 계기로 지금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라고 설명했다.
월급이 오르고 취업 기회가 많아진 것이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지출을 늘릴 수 있는 이유다. 주식 시장 호황과 집값 상승으로 중산층 자산이 불어난 점도 ‘욜로’ 라이프 스타일을 가능케 한 요인이다.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 미국인들은 약 4,300억 달러에 달하는 팬데믹 기간 저축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소비 붐이 일면서 저축률은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경제분석국’(U.S. Bureau of Economic Analysis)의 집계에 의하면 가처분 소득 대비 개인 저축률은 2020년 4월 32%까지 높아졌으나 올해 2월 3.6%까지 낮아졌다.
■돈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가장 우려되는 점은 ‘욜로’ 분위기에 편승해 돈이 없어도 지출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딧카드 부채는 팬데믹 이후 22%나 급증했고 당장 지불할 필요 없는 ‘선 구매 후 지불’(Buy Now, Pay Later) 방식의 할부 구매에 손을 대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에 따르면 지난해 크레딧카드로 여행과 여가 활동에 지출한 비용은 2022년보다 7% 늘었다.
특히 경비가 많이 드는 유럽 여행을 크레딧카드로 결제한 비율이 지난해 전년보다 26%나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인들의 여행비 지출은 올해도 멈추지 않을 기세다. ‘연방교통안전국’(TSA)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도 여행을 떠나는 미국인은 작년보다 증가 추세다. 또 앞으로 6개월 이내에 해외여행 계획이 있다는 미국인도 전체 중 22%로 조사 이래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각종 티켓 판매 사이트인 티켓매스터의 모회사 라이브 네이션은 소비 붐에 힘입어 작년 역대 최고인 23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고 올해 매출 규모는 이를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마이클 래피노 라이브 네이션 CEO는 “어떤 공연이든 티켓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라며 “티켓 판매 열풍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투자자들에게 희소식을 전했다.
■ ‘외식·의류 구입비’는 줄여
소비자들이 무책임하게 돈을 써대는 것만은 아니다. 여행, 콘서트, 스포츠 경기 등 경험을 위한 지출에는 후하지만 외식과 의류 구입, 배달 음식비 등을 줄여 비용을 마련하는 소비자도 적지 않다. 시애틀에 거주하는 마이클 리는 주말이면 코미디 쇼, 콘서트, 아이스하키 경기, 주말여행을 즐기느라 24시간이 모자란다. 리는 이번 달 하와이 여행을 다녀오는 것 외에도 오는 8월에 있을 록 밴드 콘서트 티켓도 이미 구입해 놨다.
40세 소프트웨어 개발업자인 리는 “집착적으로 절약하던 삶의 방식이 팬데믹 이후 ‘나가서 삶을 즐기자’라는 라이프 스타일로 바뀌었다”라고 말한다. 리가 지출을 아끼지 않는 곳은 여행과 레저 등이고 나머지 부문은 여전히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있다.
20년 된 도요타 코롤라는 당분간 바꿀 생각이 없고 외식비는 절반을 줄였다. 냉장고에는 외식 대신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냉동식품이 가득하다.
■또 다른 위기 있어야 멈출 것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이 같은 소비 행태는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나디아 밴더홀 재정 전문가는 “사람들은 팬데믹 기간 삶과 현재 원하는 삶의 방식 간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라며 “소중한 경험을 위해 지출하면서 재정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의 최대 수혜 업종은 여행 업계로 이미 작년부터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뉴욕에서 여행업체를 운영하는 수잔 블룸 대표는 이미 2026년 해외여행 상품 예약을 받고 있다. 그녀는 최근 몇 년간 해외여행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올해도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블룸 대표는 “팬데믹 기간 집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이 이제 그러한 경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라고 여행 수요 폭등 이유를 설명했다. 폭등한 여행 수요 중 Z세대 등 젊은 세대의 수요가 많은 점은 전과 다른 점이다. 블룸 대표는 “고급 의류나 외식에 돈을 낭비하지 않고 여행 계획을 세우는 젊은 고객이 다수”라며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그리스 등 유럽 해외여행에 대한 젊은 고객의 예약이 늘고 있다”라고 전했다.
경험을 중시하고 지출을 아끼지 않는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지 아직 예측하기 힘들다. 경제 전문가들은 대규모 해고나 경기 침체와 같은 재정 위기가 발생해야 지출에 소비자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경제 연구기관 KPMG의 다이앤 스웡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고용 시장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와야 현재의 소비 행태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지금 나타나고 있는 소비 행태는 신기루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로 받아들여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준 최 객원 기자>
미주 한국일보
2024-04-15 (월)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