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어르신
사람이 변하듯 말이 품은 뜻이랄까 그 가치 같은 것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런데 사회가 점점 나쁜 쪽으로 나아가는지 말도 나쁜 뜻을 함유하는 쪽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걱정이다. ‘어린이’와 ‘어르신’도 그 예외는 아니다.
‘어린이’란 말은 참 아름답다. 흔히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처음 쓴 단어로 알고 있지만 17세기 중엽의 문헌에도 나오는 걸 보면(‘어론이 맛당이 어리니를 사랑하며’ - 『경민편언해(警民編諺解)』) 그 이전에도 쓰긴 쓰던 단어인 모양이다. 다만, 방정환 선생이 1920년에 유년과 소년을 인격적으로 대접하기 위하여 원래의 ‘어린이’에 없었던 존중의 뜻을 강조하여 새로이 씀으로써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소파 선생의 어린이 사랑과 존중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소중한 단어다.
사담이지만 나에게는 소파 선생의 뜻을 이었다고 할 수 있는 강소천 선생과의 추억이 있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문인 단체에서 개최한 워크숍을 겸한 야유회에 간 일이 있는데, 광릉으로 가는 버스의 바로 뒷자리에 소천 선생이 타고 계셨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인사를 드리자마자 바로 그분의 동화책 『진달래와 철쭉』, 『꿈을 찍는 사진관』에서 궁금했던 부분을 마구 물어댔다. 그분은 귀찮아하지도 않으시고 아버지와 자리까지 바꾸셔서 내 옆에 앉으시고는 하나하나 자상히 설명해주셨다. 그러면서도 어떤 문학 작품이건 한 가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상상하고 해석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도 주셨다. 나중에는 내 손을 꼭 싸안으시면서 “어린이가 이 나라의 주인이란다.”라고까지 하셨다.
개인 경험담을 하나만 더 얘기한다면, 대학생일 때인데 아버지 심부름으로 아동문학가 서석규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당시 그분은 서울신문사 문화부장으로 근무하셨는데 내가 갔을 때 마침 예술계 인사로 보이는 한 여성분과 말씀을 나누고 계셔서 나는 기다리면서 본의 아니게 그분의 말씀을 엿듣게 되었다.
“그것이 문제예요.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어요. 그런데 왜 어른들은 어린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보고 어른들과 똑같이 하기만을 강요하느냐 말입니다. 어린이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할 때 비로소 어린이다운 문화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심부름 내용을 잠시 잊고 서 선생님의 강론에 마음속으로 큰 박수를 보냈고, 그분의 말씀은 그 후 내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이’란 말에는 존중과 사랑의 좋은 뜻이 담겨 있는데, 요즘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나를 어린이 취급해서 내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려 들지 마세요.”라든가, “네가 하는 꼴을 보면 꼭 어린이 장난 같구나.” 같은 용례에서 보듯이, 반드시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든지 하는 짓거리가 유치한 그런 연령층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어린이를 너무 과보호하다 보니 정말 어린이들이 버릇없고 유치해진 탓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어린이를 더욱 더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어린이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응원해야 할 대상이다.
어린이가 이렇게 가치 절하되는 데에는 법과 제도도 한몫했다고 본다. 보호자의 위탁을 받아 6세 미만의 취학 전 아동인 ‘영유아’를 보육하는 기관을 ‘어린이집’이라고 하는데(영유아보육법 제2조 제3호), 유치원에 가기 전의 아동까지 보육하는 곳이 어린이집이다 보니 거기에 소속된 ‘어린이’는 유치원생보다도 더 유치하여 더욱 많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 돼 버린 것이다.
‘어르신’이란 말 역시 존경의 뜻이 담긴 참 좋은 말이다. ‘어른’보다는 격이 조금 높고, 원래는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으나, 아버지나 어머니의 벗이 되는 어른 또는 그 이상 되는 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로 확장되었다. 집안의 제일 어르신은 바로 가장을 뜻한다.
내가 젊을 때까지만 해도 한 마을의 어르신 하면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갖춘 도서관 같은 존장(尊長)이어서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궁금해하는 사항들을 잘 풀어주고, 특히 서로 의견 대립이 있어 다툼으로까지 발전된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깔끔한 해결방안을 제시해주는 판관(判官) 같은 그런 분이 연상되었다. 마을의 무슨 모임 자리에서나 탈것을 이용할 때 어르신에게 좋은 자리를 내드리는 것은 단지 그분이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어르신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가장 나이가 많이 드신’ 또는 ‘가장 지혜를 많이 갖추신’이란 뜻이 없이 그냥 나이 많은 노인, 특히 지하철을 공짜로 타기 시작하고 각종 문화관광시설 등 입장에 혜택을 받기 시작하게 된 65세 이상의 노인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게 되어 버렸다. 경제적 생산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에서 그러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내포된 노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점점 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자 ‘노인’을 대체할 좋은 말을 공모하여 옳다구나 하고 채택한 것이 ‘어르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인(成人)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두 선생님처럼 존경받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선생님’의 말값만 떨어뜨리듯이, ‘어르신’도 모든 노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다 보니 그 말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더구나 행정기관에서는 더 나아가 ‘어르신 요양시설 신축’, ‘어르신 복지 시책 강화’라고 하는 등 ‘어르신’을 보호해야 할 복지대상자로 지칭하는 바람에 막상 어르신 자신들도 자기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나는 아직 청춘으로 이렇게 정정한데 마치 장애인처럼 보호하려 드는 것 같아서 싫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젊은이들은 자기들한테는 ‘젊으신’이라는 존칭을 안 쓰고 노인들한테만 ‘어르신’이라고 높임말을 쓰는 것은 분명 평등권 위반이라는 반감을 품고 있다. 또 어르신이라는 사람들이 공짜 대접을 받으면 그냥 가만히만 계시면 좋겠는데, 선거 때만 되면 누구를 찍으라느니 왜 그리 자기 주장이 강하고 결혼은 꼭 어떠어떠한 사람하고 하라는 등 매사에 쓸데없이 간섭이 심한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어르신의 말값을 떨어뜨리게 된 데에는 사회제도 탓도 있겠지만, 막상 내가 그 어르신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노인들 자신의 행태에도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자성(自省)도 하게 된다.
뭐 어떤 단어의 의미라든가 말값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에 상응하여 달라지는 것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그런 것까지 걱정하지는 말자는 의견도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린이’나 ‘어르신’이나 두 단어 역시 태생이 그리 점잖지만은 않은 것이니 말값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리 안타까워할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원래의 가치대로 말값이 떨어진 단어의 가치는 이상 급등했다가 폭락한 주가가 다시 올라가듯이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린이’나 ‘어르신’ 모두 그 어원은 모두 ‘얼다’에 근원을 두고 있다. 아시는 분은 알듯이 ‘얼다’는 지금은 ‘얼음이 얼다[凍]’처럼 ‘액체가 찬 기운 때문에 고체 상태로 굳어지다’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교합(交合) 즉 성적으로 합치는 행위를 뜻하는 동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의 문인 임제(林悌)가 한우(寒雨)라는 기생을 만나 사랑의 회포를 풀고 싶을 때도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기생 한우를 만났으니 – 필자 주) 얼어 잘까 하노라.”라고 중의법(重義法)을 사용한 운치 있는 구애(求愛)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눈치를 채셨겠지만 ‘어른’은 ‘얼다’의 행위를 한, 공식적으로는 혼례로써 성행위의 의식을 마친 성인을 말한다. 그래서 ‘얼다’의 과거형인 ‘얼은’이 ‘어른’이 된 것이고, ‘어르신’은 이 ‘어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는 ‘얼인 이’ 즉 ‘얼다’의 행위로 인해 만들어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얼다’의 피동형에다 사람을 뜻하는 ‘이’가 붙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솔직한 명명(命名)이고 과학적인 단어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러한 단순한 어원적 고찰과 다른 의견을 가진 국어학자도 있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이 있다. 한번 용이 됐으면 당연히 계속 용으로서 훌륭하게 활동해야 하는 것이 좋고 개천의 미꾸라지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말도 그렇다. ‘어린이’나 ‘어르신’이 비록 금기어(禁忌語) 같은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각자에 의해 어린아이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깊은 뜻이 담기거나 오랜 기간 나이 드신 노인들의 모범적인 언행으로 형성된 존경의 뜻이 담기게 된 이 두 단어가 다시 ‘타락천사’가 되어 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단어는 몰라도 이 두 단어만큼은 꼭 제 위치로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린이와 어르신을 생각하다가 뜬금없이 공자님 말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제경공(齊景公)이 임금 노릇 하기 어려움을 토로하며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이렇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다소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거기엔 역시 깊은 뜻이 숨어 있어 보이고, 제경공은 그 뜻을 바로 알아챈 것처럼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후대의 사람들은 공자의 이 말씀에 바로 그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의 요체가 담겨 있다고들 한다. 즉, ‘정명’은 각각의 사물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고, 그런 이름이 붙여진 사물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제 기능을 발휘함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 이러한 해석에 접하고는 마음이 매우 거북했다. 그런 식의 해석이라면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것은 결국 신분과 윤리에 따른 명분과 직책을 바로 세워 위계질서를 공고히 함으로써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 것일 뿐이지 무슨 고매한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공자의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도 조금씩 달라졌다. 어린 나이에서 성년이 됨에 따라 아들에서 아버지로 그 위치가 바뀌고, 사회의 조직에서도 단지 구성원이었다가 중간 간부에서 리더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되다 보니 세상이 제각기 그 역할이 있고 모두들 그 역할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할기대’가 충족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믿음이 형성되어 밝고 충만해지며, 그런 상태가 바로 평화이고 행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각자 그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는 어떤 이름이 지어져 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다워야’ 한다. ‘군군신신부부자자’의 사상은 바로 ‘~다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다워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하고 어르신은 어르신다워야 한다. 어린이가 어린애같이 안 보이려고 어른 흉내를 내서는 안 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어야만 진정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어르신은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쓸데없이 참견하거나 따지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지혜로운 방향 제시만 하고 양보하며 나이 든 사람으로서의 아량을 보여야만 웃어른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나 ‘어르신’이나 다 그 말값이 제대로 갖추도록 복원되려면 어린이와 어르신 모두가 스스로 그들다워지도록 끊임없는 노력과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도 어린이와 어르신이 그 말값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더욱 빨리 그 과업이 이루어지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역할기대에 부응하게 되어 이 사회는 좀 더 행복한 모습을 띠지 않을까 생각한다. ☼